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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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맨 부커상 수상작으로 이름이 제법 읽기도 쓰기도 어려운 생소한 작가 작품이다.


뭐, 책을 좀 읽으시는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실지도.


독특한 작품이었다. 

문자 그대로인데, 서사 방식, 전개 구조, 장의 구성이 색달랐다. 


지난 번 필립 로스 <에브리 맨>은 마지막 장을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었었다. 이 작품도 본의 아니게 처음 부분을 다시 읽게 됐는데 계기는 전혀 달랐다.


왜 그랬는지는 책을 읽은 사람들은 저절로 알게 될테니 밝히지 않기로 하고,


대표 키워드를 몇 개 뽑고 싶은데, 첫째는 ‘부활’이다. 과연 유명 문학상 답게 모호한 부분이 많아서 콕 짚긴 어렵지만 이 작품은 죽음과 부활을 다루는 거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종소리’다. 단순하게는 시작 종과 마치는 종이라는 열고 닫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고, 흥미를 돋우자면 죽은 자를 깨우는 종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세 번째는 ‘감시’로 한다. 감시가 먼저인지 존재가 먼저인지 이 이야기만으로는 선뜻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배경이 궁금해지는 이야기인데 어떤 배경에서 쓴 건지 알게 된다면 억측이나마 추측을 시도해 볼 여지가 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거미’다. 이야기에 거미가 거듭 등장하는데(정확히는 ‘거미줄’) 보이지 않지만 모든 곳에 이어진 줄을 남긴다고 한다. 해충이 되어 박멸 대상이 된 개미와 달리 해충까지는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혐오하고 없애고 싶어할 곤충이 거미다. 거미는 날벌레들에게는 치명적인 적인데, 공중에 쳐진 거미줄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일단 걸리면 도망치려 발버둥 칠수록 감기는 성질이 있는 게 거미줄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다보면 거미줄에 얽히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동명의 영화가 있다는데, 그게 7시간이 넘는 단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게 빠른 드물게 존재하는 작품이지 싶다.


읽고 난 직후라 아직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게 뭔지 모르겠다고 고백해야만 하는 상황인듯하다.

 무슨 메시지를 담은 건지 감 잡기가 힘들다. 줄거리는 알겠고, 등장인물들의 성향이나 상황, 심경도 추측할만 한데 그 모든 걸 아울러 담은 결과물이 표현하고자 하는 게 뭔지 좀처럼 와닿지를 않는다.


독특하고, 수월히 읽히지만 다 읽고 나서도 뭔가 석연찮은 기분을 남기는 소설이다.


헝가리, 다뉴브 강, 폐허가 된 농장, 궂은 날씨, 불확실과 무지와 무력함, 부활이라는 기적.

난해했다.


표지가 두 가지다. 랜덤으로 발송된다는데, 검정이 왔다. 빨강이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 소설에 입각해 생각해보면, 정말 빨간 표지는 존재하는 걸까?하는 의심을 해보게 된다.

악마에 홀려 탱고를 추는 꼴이 아닐지.

제목이 사탄 탱고인데, 솔직히 작품을 다 읽고도 제목의 의미조차 다 간파하지 못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언젠가 시간을 내어 영화를 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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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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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검정이 왔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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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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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을 가진 귀족이 있다. 

그는 아내가 될 여자를 찾고, 어떤 여자들이 아내가 되기 위해 찾아온다. 

이제 아내가 된 여자에게 푸른 수염은 단 한 가지만은 하지 말라고 말한다.

"집 안에 있는 '어떤 방'에만 들어가지 마시오."

 여자는 그러겠다고 약속하지만 호기심이 여자의 약속을 이긴다. 어쩌면 처음부터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약속을 어기고 '어떤 방'에 들어간 여자는 죽었으니까.

 푸른 수염의 귀족이 다시 아내가 될 여자를 찾는다.

아내가 되고, 약속하고, 약속을 어기고, 살해당하기를 반복한다.

 푸른 수염은 자꾸만 아내가 될 여자를 찾고, 여자들은 아내가 되려고 찾아온다. 

푸른 수염은 약속을 받아내고, 여자는 약속을 어기며, 죽는다.

 이쯤되면 포기할만 한데 푸른 수염은 한 번 더 아내가 될 여자를 찾는다. 

이번 여자는 만만치 않았다. 결국 오빠와 힘을 합친 여자는 푸른 수염을 죽이고 재산을 차지한다.

 이 이야기에는 사랑이 없다. 욕망, 어리석음, 어리석은 욕망, 욕망의 어리석음만 있을뿐.


<푸른 수염>은 동명의 동화 <푸른 수염>을 모티브로 해서 지어진 소설이다. 아멜리 노통브를 처음 읽었는데, 쉽고 빠르게 읽히는 속도에 깜짝 놀랐다. 


 소설에서는 동화 속 푸른 수염 대신 돈 엘레미리오 니발 이 밀카르라는 귀족이 자신의 집에 세 들 세입자를 구하고 있다. 이번에 앞서 이미 여덟 번의 세입자 구하기가 있었고, 여자들이 세입자로 뽑혔으며, 세입자로 들어간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실종'이라고 했다. 귀족의 집에서 사라진 이후 두 번 다시 그 여자들을 만난 사람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죽었다거나 살해당했다고 하지 않고 '실종'됐다고만 했다.

 세입자로 들어간 여자들 중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음을 알지만 세입자를 모집할 때마다 여자들이 몰려들었다. 아홉 번째인 이번에도 열여섯 명이나 되는 여자가 찾아왔다. 

 벨기에 여자 사튀르닌 퓌이상도 열여섯 명 중에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싼 월세로 호화로운 집에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다른 누구도 아닌 사튀르닌이 새로운 세입자로 선정된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멜리 노통브의 <푸른 수염>에서도 귀족이 제시한 금지 사항은 하나다. 

'암실에는 절대 들어가지 말 것.'

그 외에는 집안 어디든 갈 수 있으며 뭘 하든 자유였다.

 

 귀족, 엘레미리오는 돈 많고, 요리에 능하며, 바느질은 물론 사진까지 잘 찍는 만능 재주꾼이다. 그런 그에게도 나쁜 버릇이 있는데 자꾸만 사랑에 빠진다는 거다. 상대가 자신을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랑을 고백하고, 구애하기를 멈추지 않을만큼 뻔뻔한 태도로 말이다.

 사튀르닌은 이 변태에 살인마임이 분명한 남자를 경계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경계심이 자꾸만 누그러진다. 경계심은 호기심으로 바뀌며 엘레미리오를 설득하기에 이른다. 

 진실은 암실 안에만 있고, 암실 안에는 죽음만이 있다.


 푸른 수염과 엘레미리오의 공통점은 들어가지 말라고 금지했을뿐 방문을 잠그거나 막아두지 않았다는 거다. 엘레미리오는 말하기를 잠그거나 막는 건 의미가 없었을 거라 한다. 잠겨 있거나 막혀있어도 호기심을 멈출 수는 없었을 거라고 말이다. 호기심이란 녀석은 분명 무모하고 참을성이 없다. 왠지 일리가 있는 말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인간에 내재된 고질병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다. 

엘레미리오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선물 공세와 요리 뽐내기를 그치지 않는다. 급기야는 최대의 호의라고 할 수 있는 암실의 비밀도 알려준다. 하지만 엘레미리오가 어떤 호의를 베풀고, 희생을 감수한다 해도 그런 게 사랑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할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만든 착각. 늘 이야기하지만 그런 착각은 둘 모두를 비극으로 끌고 가게 된다. 


 사튀르닌은 자유를 만끽한다. 자신을 시험하고 구속하려는 엘레미리오도 적절히 이용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자유, 신처럼 무책임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자유를 이용했다면 그 이용한 만큼 삶에 돌아오게 되는 거다.


 <푸른 수염>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튀르닌의 태도도, 엘레미리오의 비밀도 아닌 황금을 찬양하는 표현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물질이라는 황금. 좀처럼 변하지 않아서 왕의 관이나 신의 형상을 짓는데 쓰인 황금을 다양하고도 적절하게 묘사해서 그려 보여주는 거다. 그 사치스러운 묘사라니.


소설의 결말이야 어떻든 만약 나에게 단 하나의 열려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모든 게 허락된다면 단 하나의 금지를 지키고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을 얻은 다음에는 만족하게 될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 생각 밖에 안 하게 된다고 한다. 그 방에만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절대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걸까. 


 이 절대 지키라고 하는 말을 절대 어기고자 하는 뒤틀림과 사랑을 엮어서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억지로 사랑에 빠질 수도, 억지로 사랑하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논리가 떠오르고 마니까 말이다.


 책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즐겁게 읽고, 읽고 싶을 때 읽고, 읽고 싶은 걸 읽어 나가면 계속 읽게 되는 게 아닐까.


 마음이 어수선하니, 쓰는 일에도 드러난다. 어수선하고, 어지럽고, 어설프다.


엉뚱한 결론을 내려볼까.

이 이야기의 결론은 이런 게 아닐까.


"사랑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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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혼자 있겠습니다 - 복잡한 세상, 나를 지키는 자유의 심리학
마이클 해리스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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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는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모두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찾아야 할 필요도없고,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마주하는 '고독'을 회복해야만 한다. 고독은 자발적인 홀로있음이며,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임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나는 흩어지고 지워진 나의 조각들을 되찾아야 한다. 내가 아닌 그 무엇으로도 나를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어떻게 다른가?

이 물음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외로움이 불러 일으키는 비참함이었다.  

고독은 찬란할 수 있지만 외로움은 비참하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

내가 생각하는 외로움이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의 감옥에 붙은 낭만적 이름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고, 연락 없이도 지인들의 근황을 알게 되며, 계정 하나만 만들면 낯모르는 무수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세상.

 이토록 다양한 연결 속을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풍요 속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왜 자꾸 외로워지기만 하는 걸까.

 함께 있지 않기에 외로운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다. 그때는 누군가와, 무엇인가와 연결되기만 하면 외로움이 사라질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기만 하면 외로움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될 거라고 말이다.

 

 심심함은 게으르고 나태한 쓸모없음의 증거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쉼 없는 근면과 부지런함이 미덕으로 칭송받던 시대는 저물었다.


 시간은 많은 걸 바꿔 놓았다.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다. 사람은 혼자일 수 없기에 외로움을 느낀다.

심심함, 게으름, 나태함을 철저하게 박살냈듯 관계, 성공,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고독을 외면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다.


 사람은 여전히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타인은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사르트르처럼 '타인은 지옥이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다. 타인의 존재가 고통을 주는 건 나 자신보다 타인이 존재 우위에 있을 때다. 주체성, 독립성을 잃고 휘둘린다면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다.


 나에게는 타인이 필요하다.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수용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나의 존재를 긍정해줄 수 있는 대등한 존재가 있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해도 외로움이 나를 집어삼키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에서는 얕은 존재 의식, 깊이도 무게도 없는 사교 행위로써의 관심을 '소셜 그루밍'이라고 칭한다. 잠시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쓰다듬 말이다. 지속될 거라는 확신보다 언제든 그칠 수 있다는 불안이 더 큰, 목이 말라 바닷물을 들이켜듯 점점 더 관계의 갈증을 키우는 노력이 SNS와 커뮤니티의 모습으로 확장되고 장려된다. 넓고 얕은 관계에 휩쓸려 나도, 우리도 잃어간다. 마침내 우리는 조금 더 외로워진다.


 어떻게 지독한 외로움을 끝내고 나를 찾아낼 수 있을까. 소로처럼 오두막을 짓고 홀로 지낼 수도 없는, 정보와 연결의 홍수 속에서 무엇으로 우리를 건져낼 수 있을까.


 이 시대에 연결을 거부한다는 건 덜하게는 괴짜로, 심하게는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기를 자처하는 게 된다. 다들 읽는 책을 읽어야 하고, 다들 본 영화를 봐야 하며, 다들 아는 건 나도 알고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시달림이 차츰 나를 갉아 들어온다. 적극적으로 혼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잠시라도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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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 안녕 - 190만 팔로워가 사랑한 시바견 마루의 하루
오노 신지로 지음, 하진수 옮김 / 경향미디어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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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 욱일승천기를 당당히 그려 올리고 좋아하는 사람의 책이 지금까지 팔리고 있다니 씁쓸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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