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덤에 묻힌 사람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마거릿 밀러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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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목만 보고는 호러 소설인가 했다.
꿈 얘기, 암시들이 이어지면서 초현실? 혹은 트라우마? 혹은 기억상실인가 싶기도 했다. 결론은 이 모든 게 그렇기도 하면서 그렇지 않기도 했다는 거다.

삼분의 이쯤 읽었을 때 문득, 부제가 없었다면 마지막까지 좀 더 예상 밖의 전개에 당황하고 궁금해하는 즐거움을 누렸을텐데 싶어졌다. 제목은 물론 부제도 참 중요하구나.

서른 살의 여성, 평판도 경제적 능력도 완벽한 남편을 둔 주인공은 어느 날 불길한 꿈을 꾸게 된다. 너무 현실적이라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꿈, 자신이 죽어 묻힌 무덤을 찾아가는 꿈 말이다.
 개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예감은 분명 무언가가 있다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라고 말한다.

가까이 사는 어머니도 남편도, 남편의 친구까지도 꿈은 무시하고 잊어버리라고 한다. 그런 반응들, 당연할 수도 있고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 반응들이 여자에게는 무언가 있는 거라고, 반드시 알아내고 말 거라는 결심을 굳히게 한다.

묘지에 적힌 사망 일은 1955년 12월 2일.
4년 전, 그날,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수수께끼풀이가 시작된다.

어떤 소설, 작품들은 인물의 심리뿐 아니라 역사, 사회적 배경을 알고 있을 때 더 명료하게 메시지를 드러낸다. 물론 사건, 소재 자체로도 흥미로울 수 있겠다. 그러나 완전한 남의 이야기보다는 조금은 더 내 얘기에 가까울 때 몰입도, 흥미도 커지는 게 당연한 일.

껍데기 뿐인 행복은 가치가 없는가?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파괴, 전복의 시도를 응원하고 도와야 하는가? 
절반의 확률로 절망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일이라도?

부모는 '보호'라는 명목으로 아이에게 가하는 많은 제약, 조건, 구속을 정당화 한다. 자신의 삶, 경험, 감정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러면서 그 결정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까지 품는다.
한 마디 말.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

사람은 자신의 주장, 예감, 생각에 골몰할 수도 있지만 확신하기보다 간단히 의심하게 되고 설득에 넘어가기도 한다. 신뢰할만한 절대 다수의 말이라면 더욱 유혹적이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그 너머에 있다. 그리고 껍데기뿐인, 가짜 행복이라도 지켜내려는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노력을 부정하고 비웃어도 되는 걸까.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저마다 유독 얽매이게 되고 집착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도 때때로 마음을 뒤 흔드는 그 무엇이 말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마음이 무거울 때보다는 아무 생각이 없거나 킬링 타임을 위해 읽을 책이 필요할 때 읽어볼만한 책으로 분류하기로 한다.
별점은 다섯 개 만점에 세 개 반.


배경 1955년 12월 2일로부터 4년 정도 후, 미국

2018. 10. 29~ 2018.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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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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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숨기랴!
읽는 내내 불쾌함을 떨치지 못했고 읽고 나서도 고개를 젓게 만든 소설이다.

필립 로스를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마음에 맞는 작품과 아닌 작품에 격차가 너무 크지 싶다. 

소재가 결정적이다. 70세 노교수의 고백 형식인데 그 고백이라는 게 강의에서 만난 여대생을 유혹해 섹스를 즐겼던 과거다. 수십 년 간, 몇 명인지도 모를 제자와 관계를 가져온 뒤틀린 성욕으로 똘똘 뭉친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 추하게 늙은 남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 <죽어가는 짐승>이라니. 나이 들어 쇠약해지는 남자의 비참함에 동정이라도 보내달라는 걸까.

강간은 아니었다고 변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루밍 성범죄'라는 정의조차 없었겠지. 1960년이나 70년, 많이 양보해서 80년 대라고 해도 얼마나 달랐겠는가.


스무 살을 넘긴 성년의 여성, 합의된 성관계라는 설정도 전부 사회적 비난을 의식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였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런 게 있기는 하겠다. 몰랐다, 무지했다는 항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추악한 욕망을 품고 의도적으로 접근해, 가장 성공률 높은 수단을 활용해서 사냥감을 손에 넣는 비열함. 그 악랄함은 조금도 줄일 수 없다.

노교수라는 지위를 십분 활용한다. 권위와 연륜, 경험과 경력. 젊은 여자가 '어쩌면' 동경할 수 있는 요소들을 그는 갖췄고 능숙하게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나이차가 40에 가깝기에 상대는 방심하기 마련이고, 주인공을 통해 '노인과의 섹스는 어떨지 궁금해 하는 젊은 여자도 있다'고 말할 정도인데 어련할까.

필립 로스 자신의 경험이건, 상상이건, 환상이건, 욕망이건, 이런 이야기는 혼자 두고 읽었으면 좋았을뻔 했다.

 지금보다 뭘 몰랐던, 좀 더 혈기 왕성하고 호기심에 넘쳤던 때에 읽었다면 전혀 다른 평가를 내렸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한다. 숨겨두고 몰래 읽으면서 환상을 키우고, 욕망을 삭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게 됐다. 이 책을 읽은 건 지금의 나이고 쥐어짜서 만들 수 있는 한두 가지 이유를 제외하면 이 책이 굳이 한글로 번역되어 종이를 낭비하면서 인쇄될 필요가 있었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두 가지 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이유를 적을 수는 있겠다.
 첫째로 이토록 적나라하고도 노골적으로 성묘사, 성욕에 구애 받는 남자를 그리기도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집착을 느끼지 못했던 남자가 쇠약해지면서(성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죽어가면서) 보이는 집착과 질투, 그가 뿌려대는 파멸의 씨앗들이 너무나 생생했다. 읽는 것만으로 역겨울만큼.
둘째로 그 생생함이, 역겨움이 커질수록 빛의 밝기에 따라 짙어지는 음영처럼 삶과 죽음의 교차가 자아내는 비극성이 극대화 되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필립 로스가 욕망을 쏟아 부을 생각으로 순수하게 자극만을 위해 쓴 작품이 아니었다면 혹은 그게 필요했던 거라면 예술로서, 어디까지나 인간 세계를 초월한 예술의 경지에서 존재해도 될 작품이라는 점.

2018년, 결국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은 필립 로스. 그와 그의 작품 전체에 편견을 갖게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다른 작품들, 널리 읽히면서 인정 받는 작품들이 있고, 나 스스로 감동을 느꼈던 경험이 있기에.

욕망은 건강함, 생기, 활력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집요해지고, 더러워질 때 몹시 추해서 역겨워지는 것임을 깨닫는다.

호기심이 동한다면 읽어봐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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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흑인과 훈장 창비세계문학 33
페르디낭 오요노 지음, 심재중 옮김 / 창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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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문학. 
좀 더 자세히는 아프리카, 식민지 문학에 관심이 생겨서 몇 권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있다.
 알제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어의 실종>에 이어 두 번째니 뭐 본격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새롭게 알게된 사실 하나는 카메룬 공식 언어가 프랑스 어라는 거다. 두 번째 언어는 영어. 토속어에 해당하는 270여 개의 언어가 있다는데, 젊은 층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그들끼리의 소통에만 쓰고 있겠지.

언어를 잃어버린 셈이다.
본래의 문화, 얼마나 남아 있을까.

이렇게 추측하는 데에는 작품에 담긴 내용이 근거가 되었다. 제목 그대로 늙은 흑인 이야기다. 처음에 '훈장'을 완전히 잘못 이해해서 서당의 훈장인가 하고 생각하는 엉뚱한 짓을 해버렸다.
아프리카에도 훈장이 있나? 했으니.

결과적으로 이 훈장은 가슴에 다는, 공훈을 기념하는 뜻으로 수여하는 메달로 밝혀졌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메카라는 늙은 아프리카 인이 있다. 그의 집안은 아프리카 영주였으며, 넓은 토지도 갖고 있었다. 백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함께 들어온 종교로 개종한 이 아프리카 인은 지금은 자신의 토지를 몽땅 교회에 기증한 후다(그 과정에서 강압성이 있었는지, 속임수는 없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백인들의 전쟁에 나갔다가 모두 전사했다. 그러니까 이 흑인은 땅도, 자식도 모두 백인에게 빼앗기거나 내준 상태다.

부족 사이에서는 아직 어른으로서 존경받는 이 흑인에게 큰 일이 생긴다. 바로, 백인의 우두머리가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그들이 사는 마을, 둠까지 찾아 온다는 거다.

부족, 친척, 인근의 부족들은 모두 기뻐하며 축하를 보낸다. 이제 비로소 백인과 친구가 될 사람이 자신들 안에 생겨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때까지 백인은 흑인과 마주 하거나, 같은 자리에 앉거나, 대화 하거나, 함께 밥을 먹는 일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게 했으나 이 훈장을 받기만 하면 그런 '금기'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 늙은 흑인은 완벽한 토착 아프리카 인이다. 백인들이 입는 갖춰진 옷이 아니라 걸핏 하면 엉덩이나 성기가 보이기 십상인 옷을 입고 다닌다. 신발은 물론 신지 않고 다닌다. 그랬던 흑인이지만 훈장을 받는 자리에서는 옷을 차려 입기로 한다. 가죽 구두도 신기 위해 애쓴다. 그에게는 옷도, 구두도 고통이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훈장 하나를 받는 것 뿐인데 뭐 하나 간단하지가 않다. 땡볕 아래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게 하는가 하면, 훈장을 받았음에도 같은 잘에서 밥을 먹게 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일들이 그와 그들에게 벌어진다.

식민지를 유지할 때 제국주의 국가들은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강경책과 유화책이 그거다. 총과 군대, 감옥은 그들을 가혹하게 다룬다. 훈장을 수여하고, 학교와 교회, 병원을 세우며, 통역, 시동, 낮은 계급의 행정직원, 파수꾼, 경찰 등으로 고용하기도 한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동시에 분열과 갈등을 만드는 좋은 수단이 되는 거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방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식민지를 유지하는 방식들은 어쩌면 그리 닮아 있는지, 지역과 인종을 막론하고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기이한 기분이 든다. 좁지도 않은 땅에 직선으로 국경선이 그어져 있으니 말이다. 

한반도의 38선도 그렇게 반듯하지는 않다. 그건 마치 땅따먹기를 할 때 점과 점을 찍고 선을 그은 것 같은 모양이니 이상할 수밖에.
 아프리카 역사를 조금 알고 나면 그 이상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간단히 납득하게 된다. 실제로 땅따먹기였으니 말이다.

기만당한 아프리카 인. 본래의 문화와 삶, 언어와 종교 모두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우리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은 운명을 맞이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안도하게 된다.

치기 어린 시절, 세계는 왜 우리의 억울함, 분노를 왜 몰라주는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비극을 그들은 왜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가를 궁금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에는, 넓은 세상에는 그와 비슷한 오히려 가혹한 비극이 너무나 많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었다. 과거가 아닌, 현재. 어쩌면 미래였던 거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소설은 잃고, 빼앗긴 자들의 설움이 담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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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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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대는 문학이 무력해지고 소설이 가치를 잃은 시대인가?

실시간으로 연결된 다양한 경로, 매체가 전하는 타인과 세상의 이야기만으로 이미 충분한가?

이 물음에 나는 경솔하다 싶을 만큼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답할 수 있다. 그런 날, 문학이 무력해지고 소설이 가치를 잃어버리는 시대는 '영원히' 오지 않을 거다. 적어도 나의 영원, 내가 숨쉬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이 확신에 근거가 있는가? 

물론, 근거가 있다. 문학은, 소설은 이 시대, 오늘 혹은 내일, 너 혹은 우리 삶의 단면이나 단절된 시간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오랜 과거에서 가까운 과거, 오늘을 거쳐 내일, 먼 미래까지 사라지거나 끊기지 않는 연속된 이야기다. 지금의 나, 우리와 닮은 모습을 발견하고 마음과 시야를 넓히게 하는 다면의 창(窓)이 되는 거다.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으며 새삼 확신한다. 이 낯선 세계의 이야기 역시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먼 대륙, 다른 인종, 다른 피부색, 생소한 언어, 무관한 역사,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너무나 닮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음을.


 이 소설은 아프리카 북부에 자리한 나라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다. 알제리는 19세기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20세기 중반 8년에 걸친 독립 전쟁의 승리로 독립한 후, 90년 대 시작된 내전으로 지금까지 테러와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라다. 식민지 1세기, 그 정도의 시간은 한 나라의 많은 것 어쩌면 거의 모든 것을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본래의 언어는 상당 부분 지위를 잃는다. 언어에 담긴 정체성, 역사, 감정과 의지까지 빼앗는다. 나라의 권리를 되찾은 이들은 변화, 개혁을 꿈꾼다. 그러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무엇을 회복하고, 어디까지 고치고 바꾸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 혼란의 한 가운데에 한 남자가 있다. 원래 주민의 후예이면서, 어떤 과정에서든 독립을 위한 투쟁의 한 가운데에 있었으며, 이후 수십 년을 프랑스에서 살다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 이 남자는 여전히 고향의 언어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 의지를 품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어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프랑스어로 형성된 정체성 또한 갖고 있다. 그런데 새로이 정권을 차지한 세력은 프랑스어의 사용을 금지한다. 많은 지식인, 언론인, 시민이 알제리를 떠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실종, 사라지는 일이 계속된다. 이 혼란 속에서 남자는 자신의 삶과 사랑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평생 쓰고 싶었지만 쓸 수 없었던 이야기, 기록할 수 없던 일들을 자기 민족의 언어로, 또한 프랑스어로 써 나간다.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으며 처음 느낀 건 "식민의 역사는 닮아있다."는 거였다. 어떤 이유에선가 외세가 유입된다. 조선의 경우 동학 농민군 진압을 위해 불러들인 청나라 군대를 둘러싼 협약의 결과로 일제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고 알제리의 경우 프랑스 해역에 출몰하는 해적의 진압이 그 이유였다. 핑계로든 억지로든 한 번 들어온 그들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 - 대륙 침략의 발판이든, 석유 등 자원이든 - 을 합법적으로 얻기 위한 권리를 세계에 인정받으려 한다. 피를 흘리며 총칼로 위협하든, 지도자와 권력층을 회유하든 식민 상태를 공고히 한다.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거나 동화시키려는 시도가 계속 된다. 운이 좋으면 빨리 독립하고 운이 나쁘면 식민 상태가 좀 더 오래 지속 된다. 식민 상태가 끝나면 평화가 찾아올까? 그렇지 않다. 한국은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 동족 간의 전쟁을 치른 후 둘로 나뉘었고, 알제리는 10년 넘는 내전을 치르고 지금 현재, 2018년 까지도 테러와 내전의 공포에 떨고 있다. 


 이상한 말이 되겠지만 한국,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보다 먼저 식민지화 됐으면서 2차 대전 승전국인 프랑스의 식민지였기에 독립의 권리를 얻지 못하고 독립 전쟁을 치러야 했던 알제리. 정치, 종교와 문화적 배경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을 치르는 알제리.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기이한 모양, 직선과 직각에 가까운 국경선을 가진 알제리.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알베르 카뮈가 알제리 출신이라느니, 알제리 독립을 반대했다느니, 프랑스 2차 대전 영웅 샤를 드골이 알제리 독립을 승인했다느니, 그런 드골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느니 하는 단편적 지식들. 알제리가 어디에, 어느 대륙에 있는지 그 역사가 어떤지 관심도 없던 멀고 먼 나라의 전쟁 이야기.

 

무관심했다. 계기도, 이유도 없었기에. 정의로운 나라, 세계 평화를 수호하려는 세력들이 왜 부당하게 침탈 당한 조선의 권리와 영토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는가 원망하던 때가 있었다. 순진했달까, 그들이 뭐가 다르다고 그런 걸 바랐던 걸까. 아프리카의 더 넓은 영토 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옥은 과거형이 아닌 현재, 미래의 언제쯤 끝날지 모르는 진행형으로 존재했다. 분단, 테러, 전쟁, 죽음의 땅에서 나고 자라며, 두려움에 떨다 세계 어딘가에 있다는 평화로운 나라를 꿈만 꾸다 죽어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한민국의 고통, 전쟁의 위협 역시 현재 진행형이지만 그럼에도 우린 역시 운이 좋은 편인 거다. 


 이런 게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으며 떠올린 생각이다. 프랑스어 권 소설, 알제리, 아랍 작가의,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남자의 고백이 담긴 소설.

 조선의 식민지, 동족 상잔의 전쟁, 분단과 전쟁의 위협. 우리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는 소설이 그 비극성 하나만으로, 비극의 씨앗이 된 외세의 침입, 식민지라는 공통의 배경 하나만으로 닮은 것이 된다. 그들의 혼란, 고통, 미래로 이어져 해결을 요구할 과제들을 도무지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게 하는 거다.


 문학, 소설이 왜 그 가치를 잃지 않으리라 확신하는가?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얼마만큼 명징하게 그 상징을 드러낼 수 있는가, 얼마나 생생하게 갈등과 고민, 감정을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건 작가의 역량에 달려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이야기 속 상징, 갈등과 고민, 감정을 발견하고 사유로 연결짓는 책임은 독자에게 달린 문제다. 

 

 알제리의 역사와 프랑스 식민의 역사를 조금 더 알게된 후에 다시 읽어보면 지금보다 더 많은 걸 느끼고, 발견할 수 있겠지.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 다시 읽었을 때 더 많이, 다양하게,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될 거라는 기대를 품게 하는 이야기. <프랑스어의 실종>은 그런 이야기의 하나가 됐다.


 이건 덤인데, 타국의 멀고 먼 아프리카 대륙의 어느 나라 역사가 담긴 소설을 읽으며 우리 역사를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부끄러움이랄까, 아쉬움에 가까운 미안함이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아나는 걸 느꼈달까. 지식을 채우고, 배움의 범위를 넓히는 건 분명 효용이 있다. 그러나 사유가 없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 되고, 뿌리가 없는 배움은 간단히 흔들리는 법이다. 우리의 사상, 사유를 구성하는 언어의 가치와 존재 의의. 이 소설은 아마 조금 더 깊은 곳, 더 무거운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던 게 아닐까. 다음에 다시 읽을 때는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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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05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아시아 제바르의 다른 소설 <사랑, 판타지아>부터
읽기 시작한 게 탁월한 선택이었던 듯.

이 소설은 알제리의 식민화 과정부터 그리고 있거든.
그 다음에 알제리 독립투쟁을 그린 <프랑스어의 실종>을
읽는 게 맞는 것 같군.

영화 <알제리 전투>는 덤으로.

대장물방울 2018-11-06 00:34   좋아요 0 | URL
오, 그렇다면 전 역순으로 읽게 되는 거네요. 그것도 나름 흥미로울 걸로! 크크 암튼 괜찮은 선택이었습니다.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산월기(山月記) / 이능(李陵)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명진숙 옮김, 이철수 그림,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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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가면 늘 같은 자리에 앉는다. 그 자리에서는 왕복 2차선에 그려진 횡단 보도가 보인다. 신호등이 있지만 황색 점멸 신호뿐이다. 매일 지나다니는 사람 중에도 그 자리에 신호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있으리라. 신호등도 횡단 보도도 그 정도의 의미. 언제든 어디서든 건너도 되는 길에 놓여 다만 형식을 갖추었을뿐인 정도다. 

 

 고작 형식뿐이라도 횡단보도에는 의미가 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황색 점멸 신호등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길 한복판으로 건너기보다 횡단보도로 혹은 그 가까운 데서 건너려고 한다. 운전자는 횡단 보도 주변에서는 언제든 사람이 도로로 나올 수 있음을 예측하며 지난다. 무턱대고 길을 건너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음에도 사고가 나지 않는 건 갖춰진 형식을 기반으로 공유하는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게 믿고 싶다.


 도로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기에 보이는 게 있다. 좀 더 정확히는 떨어져서 조금 위에서 봤을 때 말이다.


"횡단 보도를 건너는 사람과 지나는 자동차는 얼마나 위태롭고 치명적 관계인가?" 

 그저 태연하게 멈춰서는 자동차의 운전자가 놀랍고, 그토록 대담하게 뛰어드는 보행자가 두렵다. 놀라움은 그런 상황에 놀라지 않음에서 생기고, 두려움은 태연함이 의미하는 일상성에서 느낀다. 보행자와 자동차의 위태로운 관계는 어디에나 있는 보편, 일상적인 풍경. 놀랍지도, 두렵지도 않은가?


 어떤 이들은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말하고 싶을 때 통계를 인용한다. 횡단 보도에서의 교통사고 확률은 예를들면 백만 분의 일이고, 그 사고에서 치명적인 상처, 예를들면 사망할 확률은 다시 몇 십분의 일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범하게 되는 심리적 오류는 그 백만분의 일 혹은 몇 십분의 일 확률의 당첨자가 '자신'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통계를 인용하지만 통계에서 자신을 제외하면서 통계의 희박한 확률에 의지하는 거다. 그러다 사고가 나면 "운이 나빴다"고 한다. 운의 문제였을까.


 가까운 게 잘 보이기 마련이고, 보고 싶은 걸 보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너무 가까운 것만 보고 있지는 않나?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제목처럼 역사 속 인물들, 중국 고전의 이야기를 뼈대로 지은 네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실제 역사의 기술인지 착각할 만큼 사실적이다. 최고의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미쳐 호랑이가 된 사람 이야기, 활의 명인이 되길 꿈꾸다 경지에 이르러 활이 무엇인지조차 잊은 사람 이야기, 공자와 제자 자로 이야기, 한나라 무제 때 장수 이릉 이야기.


 모두 아득한 먼 옛날의 이야기인 데다, 일상에 무슨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 이야기들이라 일본인이 재해석 한 중국 이야기까지 읽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내놓을 대답이 궁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가까운 일이 아니기에 보이는 게 있다. 그런 믿음이 있기에 추천하며 읽기를 권할 수 있는 거다.


 몇 군데 함께 생각해봤으면 싶은 구절을 적어본다.

 <제자>에서 도전하기 위해 찾아온 자로에게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말에는 채찍이, 활에는 활도지개가 필요하듯이, 사람에게도 방자한 성격을 바로잡기 위한 가르침이 꼭 필요한 것이라네. 틀을 바로잡고 갈고 닦으면 비로소 유용한 재목이 되는 법이지._71페이지

 느끼는 바, '배움'에 있어서 실용성을 우선하는 시기의 정점에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그걸 읽어서', '그걸 알면', '그걸 배우면', '그걸 생각하면' 따위의 뒤에 "뭘 할 수 있는데요?" 혹은 "뭐가 될 수 있는데요?"가 따라붙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다. 책이 외면 당하고, 도덕이 가치를 잃는 건 '아무 쓸모가 없어서'가 아닌가 말이다. 


 공자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반드시 맞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어떤 쓰임'이 있을 때만 그 필요성이 인정될 수 있다. 사람 입장에서야 말이 유용하기에 굴레를 씌우고 채찍을 내리겠지만 그건 말에게는 수고로운 일이자 고통일 뿐이다. 유용한 재목이라는 것 역시 사람의 입장에서다. 재목이란 베어져 쓰임에 맞게 가공한 나무다. 사람은 쓰임을 얻지만 나무는 쓰러져 일단의 생을 끝내게 된다. 


 <이능>은 뛰어난 장수였지만 전쟁에 패해 병사를 잃고 흉노에 항복한다. 노한 무제 앞에서 이능을 변호하다 벌을 받게 되는 이가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사기 집필을 위해 치욕을 무릅쓰고 궁형을 택했다고 알고 있었는데(죽음, 벌금, 궁형에서 선택할 수 있었으나 죽고 싶었으나 죽을 수 없었고, 벌금을 낼 돈은 부족해서 궁형을 택했다고), 여기서는 선택보다는 '어쩔 수 없었던', '불가피한 운명'으로 그려진다. 죽음을 택할 수 있었으나 죽을 수 없었기에 궁형은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기를 완성한 게 정말 '사마천'일까 아니면 '사마천 이었던 사람'이었을까? 

처참한 노력을 1년 정도 계속한 후, 그제야 그는 삶의 가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후에도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기쁨만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_184페이지

 사마천이라는 사람은 죽어 없어지고 사기를 집필하는 '기능'만 남은 시간을 이어갔던 건 아닐까. 사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에서만 기쁨을 느끼는 삶. 그것은 살았던 게 아니라 살아진 게 아니었을까. 박경리 선생님이 토지를 집필하면서 느낀 심정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쓰고 싶다'가 아니라 '써야 한다'는 마음으로 '쓸 수 밖에 없었던' 시간은 얼마나 고단했을까.


 이능 자신도 흉노에 항복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고국에 바친 충성과 그에 대한 고국의 보답을 생각하면, 아무리 무정한 비판자라 하더라도 그 '어쩔 수 없었던' 것을 인정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 한 남자가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앞에 두고도 결코 자신에게 그것은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_209페이지

 이능이 아직 항복하기 전, 잘못된 사실이 전해져 한나라에 남아있던 어머니와 부인, 자식들이 몰살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절망한 이능은 흉노 선우의 항복 제의를 받아들여 선우의 딸을 부인으로 삼고 우교왕의 지위를 얻는다. 이렇게 항복한 이능과 전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이 있으니 소무라는 사람이다. 소무는 이능의 20년 지기 친구로 항복의 권유에 응하지 않은 채 19년 동안이나 나라와 주군에 대한 지조를 지킨다. 자신처럼 가족 전부가 몰살당한 건 아니지만 비슷하게 억울한 처분으로 죽음을 맞은 형과 동생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했다. 풀려날 거라는 기약도, 누군가 그의 지조를 알고 기억해줄 거라는 확신도 없었지만 소무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음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거다. 


 '보통 사람인 나'는 많은 선택의 순간, 갈등, 고민과 마주했을 때 어쩔 수 없는 이유를 찾기에 열심이었다. 이능의 선택이 틀렸고, 소무의 선택이 옳았다는 이분법식 정답 찾기를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실리를 위한 선택에서의 '어쩔 수 없는'이 아니라 자기 선택의 순간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자아 없음'의 '어쩔 수 없는' 때가 압도적으로 많지는 않았던가. 눈에 보이는, 수치화 가능한 가까운 것들을 선택, 판단의 기준 삼지는 않았나.


부끄러움에 그치지 말아야 하건만 늘 부끄럽기만 하다.


이 부분은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데미안>을 떠올리게 하기에 적는다.

그것은 '의리'라든가 '절개'라든가 하는, 밖에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억누르려고 해도 억누를 수 없이 용솟음쳐 나오는 가장 친밀하고 자연스런 애정_211페이지

소무와 이능이 다른 선택을 하게 된 결정적 차이를 말하는 부분이다. 이능은 장수로서의 임무, 군주와 조국을 향한 의리로서 항복을 거부하고, 성과를 만들어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소무는 의리나, 절개, 임무를 떠나 순수하게 솟아나는 애정으로 긴 시간을 견디고 이겨낸다. 약한 내면은 간단히 흔들리고 휘둘리지만 단단한 내면은 외부의 조건들, 힘으로 파괴할 수 없음을 일깨우듯.

 소무는 칭송받을만 하다. 그리고 위대하다. 하지만 괴로움 끝에 타협한 이능은 비난받아 마땅한 걸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충성의 기회, 가족까지 모두 빼앗긴 후에도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 영원히 유효할 수는 없다. 오히려 지금은 이능을 괴롭힌 사회와 사상, 제도적 얽매임을 냉정히 돌아봐야 할 때 아닌가.


 톨스토이 단편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다시 읽어보려다 책장에 꽂는다. 왜 고전을 읽는가? 질문은 하나지만 답은 무한하다. 다만 단순히 이것 하나만은 생각해보자. 옛날, 아주 오래된 옛 이야기가 전혀 다른 시대, 세상을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 울림을 남길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발 아래를 살피며 걸어가면 돌부리에 채이거나, 혹시라도 있을 구멍에 빠지는 건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조금 멀리, 종종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지 않으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나 아주 오랜 후에야 도착할 수도 있다. 아주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꼭 도착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냐고? 그것도 그렇다. 그러나 그 결과를 '어쩔 수 없는' 그 어떤 힘에 맡기지 말았으면 한다. 어쩔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하기를.


 세상은 돌고 돌아 제자리에 닿는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가 그 역사 속에서 걸어나가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상상, 제법 흥미롭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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