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서의 오해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최정수 옮김 / 부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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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통한다'라고 느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 나만의 감각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통한다는 게 비슷하다거나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가 끌린다는 말처럼 같아야 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럼, 통한다는 건 뭘까?

앞뒤 다 자르고 정말 간단하고 단순하게 적어보기로 한다.

통한다는 건, 서로에게 이해의 여지를 둔다는 거다.

이해의 여지를 둔다는 건,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마음을 기울인다는 거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자기 뜻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상대만을 찾아다니는 비겁한 부류도 존재한다. 

반대인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서로를 너무 아끼고, 이해하려고 하고, 배려하기에 오히려 오해가 생기고 다투게 되는 일이 늘어나는 사람들 말이다. 

덜 사랑하고, 덜 이해하기에 덜 다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하고 싶기에 더 다투는 사람들이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소설 <모스크바에서의 오해>는 후자의 이야기다.

그들은 너무 사랑하고, 너무 이해하고 싶고, 너무 함께 하고 싶었기에 오해를 하고 다투게 된다. 

사르트르라는 거대한 지성의 동반자로 생을 함께 했던 시몬 드 보부아르라는 여성의 첫인상이 된 이 소설은 너무 귀엽고, 애틋해서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청춘들의 이야기처럼 읽히기도 했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러운 사람들인지.


<모스크바에서의 오해>에는 개인적으로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출간 소식을 듣고 마침 서평단을 모집하기에 신청을 했더란다.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기에, "아이고, 이거 떨어졌구나."하고는 다른 책을 사며 함께 사버렸다.

책이 도착하고, 읽기 시작한 다음 날 한 권의 책이 내게 왔다. 

그 책의 제목도 <모스크바에서의 오해>였다. 

하루 늦게 받은 서평 도서였다. 그렇게 이 책은 두 권이 된 거다. 


이 에피소드가 개인적으로 재밌게 느껴진 건 <모스크바에서의 오해> 속 주인공들처럼 사소한 일(서평단 당첨 공지를 확인하지 않은) 하나로 내 쪽에서 일방적인 오해를 하게 됐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60대의 노부부가 러시아로 이주해 살아가는 딸의 집에 한 달 일정의 휴가를 보내기로 한 데서 시작된다. 두 사람은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서로에게 몰두하고, 사랑하기에 지치지 않았다. 너무 아끼고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이라 더 함께 있고 싶고, 서로의 즐거움을 위해 조금의 양보와 희생을 기꺼이 할 수 있었다. 

남편 앙드레는 더 돌아다니고 싶고, 러시아의 풍경을 즐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지만 아내 니콜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걸 알기에 자제한다. 니콜은 니콜대로 러시아나 모스크바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앙드레가 좋아하기에 기꺼이 동행한다. 그런 두 사람이 크게 다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앙드레가 얘기도 없이 일정을 10일이나 늘인 데서 생겨났다. 

 앙드레는 자신이 얘기를 했고 니콜도 동의했다고 말했지만, 니콜은 앙드레가 일방적으로 정했고 자신에게 얘기한 적이 없다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라고, 당신은 좋은지 몰라도 너무 지루하다고 말해버렸던 거다. 두 사람은 하마터면 별거까지 가게 될 만큼 크게 다투는데 그 상황을 해결한 건 정말 사소하고 단순한 방법, 잠시 동안의 대화였다. 


 얼마나 자주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묻고 싶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으면서 꺼내지 못하고 참다가 한 순간에 터뜨려서 서로 당황하고 화를 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기에 이 책 속의 이야기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을 거다.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이유는 참 많다.

바빠서, 그런 것까지 다 얘기해야 하나, 좀 이해해주면 안 될까.

이런저런 상황이나 조건, 동정에의 호소, 일방적인 요구. 

대화는 너무 많은 이유로 봉쇄되고 오해는 그 몸피를 끊임없이 불려 간다.

결정적인 상황에 이르러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 모든 것을 해결하는 건 사실 단순하고 간단하다.

마음을 터놓고 나누는 잠시 동안의 대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마음 쓰는 이들이라면 아주 잠시 동안의 대화로도 많은 것을 풀어낼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거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니콜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많은 부부가 그렇게 포기하고 타협하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고독 속에서. 나는 혼자다. 앙드레 곁에서 나는 혼자다. 그리고 그것을 납득한다."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 납득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함께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느끼는 고독은 그 사람이 소중할수록 급격히 커진다. 그 납득이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달콤하지도 않을 거라는 건 뻔한 일이다.


니콜과 앙드레, 두 사람은 서로를 몹시 사랑하지만 서로에 대해 크고 작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하나의 예로 나이 듦에 대해 상대방의 생각을 추측하는 장면이 있다. 니콜은 앙드레가 젊은 시절과 다르지 않으며 나이 듦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믿는다. 반대로 앙드레는 자신보다 니콜이 나이 듦에 대해 덜 불편해한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당신은 좋겠어. 변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질투와 원망을 담아서. 조금의 실망과 함께.


 이 모든 오해가 풀리는 순간의 대화는 소꿉놀이 중에 다투는 어린아이들을 닮아있다.

"당신에게 하지 않은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있어." 니콜이 말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하고 난 팍삭 늙어버렸어.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그래서 아주 작은 불만도 견딜 수가 없었지. 당신은 나이를 느끼지 않겠지. 하지만 난 느껴." 
"오! 나도 나이를 느껴." 앙드레가 말했다. "심지어 나이 생각을 자주 한다고."
"정말이야? 한 번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잖아." "당신을 슬프게 하기 싫었으니까. 당신도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않잖아." 
(중략)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야, 그녀가 생각했다. 대화가 되지 않는 부부 사이에는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우리 관계가 망가졌을까 봐 조금 두려웠어."
"나도 그랬어."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야." 그가 말했다. "우린 반드시 이야기를 나눠야 했어."
"그래, 맞는 말이야. 다음번엔 겁내지 않을 거야."

이 대화 속에서 느껴지는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을 어떻게 해야 할까.


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려울까를 생각해보면 '겁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가 위축되고, 상대에게 '이해를 구해야'하는 '약자'가 되는 게 겁나고, 얘기를 했을 때 이해받지 못할까 겁나고, 얘기하고 나서 후회할까 겁이 나고, 지금의 관계조차 깨질까 봐 겁내는 일.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자주 일어날까.


더 이상 겁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대화를 나누는 걸 겁내지 말아야겠다.

이 짧은 소설, 너무 쉽고 간단히 읽히는 이야기는 내게 겁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대화를 많이 해서 오해가 생기는 일은 없다.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게 대화가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대화는 서로의 마음을 서로에게 허락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언제나 오해는 대화가 없는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러니, 대화해야 한다. 사랑해야 하고.


이제, 시몬 드 보부아르의 <모든 인간은 죽는다>를 시작할 결심이 섰다. 

마치 짧은 대화를 나눈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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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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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사랑 중요하고, 사랑하는 거 좋다. 그래도 도서관 장서에 밑줄 긋지는 말자.


 제목이 『밑줄 긋는 남자』고, 실제로 도서관 책에 그은 밑줄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니까 하는 얘기지만, 나는 도서관 장서에 밑줄 긋는 사람을 싫어한다.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싫어한다. 마치 혼자 보는 것처럼, 자기 책은 줄을 긋기는커녕 표지가 긁히는 것조 못 참으면서 공공의 도서에는 그렇게 마구 긋는 것만큼 예의 없는 행동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혹시라도 이 책을 읽고 모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그러지 말자.


 제목 그대로의 이야기다. 
로맹 가리를 몹시 사랑하는 한 여자가 있다. 이름은 콩스탕스, 이름의 뜻은 변함없음, 한결같음, 항상성. 콩스탕스가 정말 안타까워하는 건 로맹 가리가 쓴 소설이 고작 서른한 편이라는 사실. 일 년에 한 권씩 읽어도 곧 고갈될 것을 고민하기 시작한 콩스탕스는 다른 작가를 발굴함으로써 로맹 가리의 고갈을 늦추려는 시도를 한다. 그 시도의 하나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기로 한다. 

 콩스탕스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 우연히 밑줄이 그어진 걸 발견한다. 그런데 이 밑줄이 그어진 부분이 절묘하게도 사랑을 고백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콩스탕스는 '혹시 누가 나한테 관심이 있어서?'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밑줄 그은 남자가 일러주는 다음 책을 찾아다니면서 누군지 모르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밑줄 긋는 남자』는 그렇게 알게 된 밑줄 긋는 남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정확히는 밑줄이 엄청 많이 등장한다. 로맹 가리, 도스토예프스키, 키르케고르와 같은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이 주연인 셈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심리를 완벽하게 대변하는 고전 속 문장들을 읽어가는 재미가 색다른 즐거움이 되어준다. 


 도서관 장서의 틈바구니에서 로맨스가 일어나고 사랑이 싹튼다는 설정도 좋다. 죽은 나무의 무덤, 텍스트의 집합소가 아닌 생명이 움트는 공간, 감정이 살아 움직이는 장소가 된다는 그 설렘이 좋은 거다. 한 번쯤 꿈꿔보게 되는 그런 낭만적 사랑이랄까.


 물론 아무리 사랑이 좋다고는 하지만, 도서관 장서에 그렇게 마구 밑줄을 그으면 곤란하다. 다른 사람들의 사랑도 지켜줘야 하지 않을까? 내 사랑을 지키고 싶다면 말이다. 


 주된 관전 포인트는 콩스탕스의 감정의 흐름이다. 기대에서 흥분으로 나아가다가 실망하고 좌절했다가, 분노하기도 하는 그 과정에서 '남자'는 실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사랑이라는 게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인 것마냥, 그렇게 보이는 거다. 하지만 어떤 사랑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이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가볍게 읽히면서, 이세욱 번역가의 맛깔난 우리말 표현도 즐길 수 있어서 잔재미가 많은 작품이다. 영어보다 낯선 우리말을 여럿 목격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콩스탕스가 클로드라는 남자 대학생과 처음 데이트를 하는 장면에서의 '남자가 리드해주지 않아서 좀 그렇다. 남자라면 박력이 있어야지'하는 태도를 보였을 때는 좀 의외였다. 여자가 바라는 남자의 모습이란 국경이 없는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남자가 그래야만 하는 건가 하는 약간의 의문도 있었다.

 뭐, 꼭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저, 다만, 약간 그랬다는 거다. 


 문학이 사랑을 일으키고, 인연을 맺게 하는 이야기. 이건 문학에 하나의 가능성을 더하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단지 읽으면 재밌고 즐거울 뿐 아니라, 문학이 우리 삶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든지 더 많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니 말이다.


 더 많은 사람이 문학을 즐겼으면 좋겠다. 그 안에서 사랑을 찾고, 사람을 배우고, 그 배움이 사람들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끝없이 계속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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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5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장물방울 2016-07-25 00:11   좋아요 1 | URL
:) 정말, 설정이 묘하지요. 그래서 취지만 받아들이고 문장을 옮겨 적었구나~ 하는 걸로 이해했어요. 도서관 책 훼손하는 사람 정말 ㅠㅡㅜ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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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더 순진했던 날들에는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어?'하는 생각을 종종하곤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설마'보다 더 나쁜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었고, 일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언제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다닌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상처를 기꺼워하는 사람은 없다.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굳이 몸이나 마음에 새기겠다고 덤비는 사람은 어딘가에 병이 있는 것으로 여겨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너무 많은 경우에 이 '상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거다. 


 이 책《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상식적인 사람들의 비상식적인 행동과 태도에 대한 10가지 심리 실험이다. 목적은 단순하다면 단순하다. 재해나 재난, 폭력, 전쟁처럼 개인이 제어할 수 없는 충격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과 사랑의 근원과 같은 내밀한 심리까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결과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거다.


 중요한 건 이 책 역시 그러한 실험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걸 잊지 않는 거다. 

 "그런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이것을 알거나 모르는 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세상의 누군가가 경험한 일이라면 그 일이 언제, 누구에게 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결정적인 근거 가운데에는 '사고한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이 '사고능력'은 많은 순간 통제 불능이 되거나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혹시 일어날지 모를 그러한 상황에 대한 예방접종 정도의 역할은 해줄 수 있으리라. 


 이것은 영화가 아닌 현실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을 현실에서 마주하게 된다.


나는 대체로 '트라우마'를 부정하려고 하는 편이다. 트라우마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너무 많은 것을 트라우마로 설명하려고 하는 불성실함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있어서 '할 수 없다'는 것, 그 말은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부터 거짓인 걸까?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스키너라는 사람은 행동주의 심리학자로 '스키너의 심리 상자'를 고안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이론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체벌은 인간의 그 어떤 것도 개선할 수 없다."는 거다. '적절한 보상'의 지급을 학습시키는 것을 통해 얼마든지 교육시킬 수도 개선시킬 수도 있다는 거다. 


 스키너의 이론에 따르면 체벌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얼핏 생각해도 뭔가를 하지 않게 하는 데는 체벌이 그나마 효과적일 것 같지만 무엇을 하게 만드는 데는 거의 효과가 없을 것 같다(실제로는 하지 않게 하는 데에도 큰 효과가 없다고 한다). 반대로 뭔가를 했을 때 보상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그 보상이 적절하다면 뭔가를 더 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장점이 있는가 하면 단점도 있다. 어떤 사람은 단점을 보완하라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은 장점을 극대화하라고 가르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간단히 바로잡을 수 있는 단점은 보완하되 장점을 해칠 것 같다면 그만두라고 하는가 하면, 장점이 조금 줄어들더라도 최대한 단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한다. 

 어느 방법을 택하는 게 최선일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서 다루는 심리실험들은 분명 납득할 만한 결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절대적이지는 않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정하는 건 본인의 몫이다. 


 10가지 실험 중에 한 가지의 결론만을 꺼내놓았을 뿐인데, 벌써 지치는 것 같다. 그러니 다른 실험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돌려야겠다.


 모든 실험들이 생각해볼 만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한 가지만 여기에 옮겨 보기로 한다.

인지 부조화에 대한 실험의 결론 부분이다.

 우리는 평생 자신의 믿음과 일치되는 정보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주변에 자신의 믿음을 지지하는 사람들만 두며, 자신이 이미 저질러놓은 것을 의심케 하는 모순된 정보는 무시해버린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중

 인지의 부조화의 흔한 예로 '나쁜 남자(여자)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서 자꾸만 좋은 점을 찾고, 발견하려 하고, 합리화하기를 계속하는 것은 아마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면서 계속하는 행동일 거다. 자신이 그 사람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을 선택했기에 자기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꾸만 거짓된 믿음을 만들어내는 거라고.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서 다루고 있는 실험은 하나 같이 세상을 흔들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표방한 '악의 평범성'과 '권위에의 복종', '사랑', '인지부조화'처럼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영원한 숙제들 말이다.


 인간이 선한 존재로 태어나는지 악한 존재로 태어나는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거다. 불완전하기에 더 알고자, 완전해지고자 노력하지만 때로는 그 과정이 불완전성을 키우기도 한다.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나 해석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더 많은 여지와 가능성을 알게 되는 것 아닐까. 앞으로도 심리실험은 계속될 것이고, 그 심리실험이 설명하지 못하는 일들은 여전히 벌어질 것이며,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는 살아가게 될 거다.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그것만 알아도 이해의 여지는 커지지 않을까. 

 이해하고 싶다. 이해까지는 아니라도 오해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정도는 깨닫고 싶다. 내가 바라는  그저,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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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듯 천천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이영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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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아는 바가 없어 몰랐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있는 감독이라고 한다. 이 책 《걷는듯 천천히》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철학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어쩌면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을 말랑말랑한 에세이다.


 내 이름, 정확히 성은 한자로 '천천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느릿하고 느긋하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런데 이름의 마지막 한자는 '민첩하다'는 뜻을 갖고 있어서 천천히 민첩하다는 모순을 품게 되어버렸다. 만약 이름에 의미를 부여해본다면 느긋하고 싶어 하면서도 급해지고 마는 건 모순된 이름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걷는듯 천천히》라는 제목과 어쩐지 느긋하고 아련하기만 한 파스텔톤 표지 그림이 천천해지고 싶은 바람을 이끌었다. 그렇게 천천히 읽어볼 생각이었으나, 시작하고 나니 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해져 버린 통에 결국 두 시간 만에 읽어버리고 말았다. 

 아, 결국 민첩함으로 끝이나다니.


 책에 감상을 쓰려고 앉았다가 먼저 밑줄 그어둔 부분을 다시 표시하고, 한 번씩 더 생각해봤다. 생각하는 것까지 민첩하게 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지금의 감상은 그렇게 느린 과정을 거치고 나서 적는 거다. 처음의 급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기에, 적으나마 천천한 감상이 되지 않을까.


 고레에다 감독은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영상에 입문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품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 불린다고. 

 다큐멘터리 같아지고 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고레에다 감독이 영화에 작위보다 자연스러움을 더 크게 담고자 하기 때문이다. 아역 배우에게는 대본을 주지 않는다는 원칙도 그런 이유에서 생긴 것이다. 대본을 주지 않는 대신 상황을 설명해주고 그 상황에 '너라면' 뭐라고 말할지, 그 생각을 말하게 하는 거다. 아이는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그 어떤 대사보다 더 진실한 마음의 이야기를 꺼내놓는다고. 

  

 영화라는 게 감독의 의도와 취향을 깊이 반영하기는 하지만 그 영화에 담기는 것은 결국 배우 개개인의 면모다. 진심이라는 게 전해질 수 있다면 그런 자연스러움이 조금 더 수월히 진심을 전할 수 있지 않을까.


  고레에다 감독은 천천히 한 가지, 한 가지씩 이야기해 나간다. 영상을 담을 때의 생각과, 자신의 기억과 그 기억이 남긴 의미와 촬영하며 깨닫는 것과 세상을 보는 시선과 불안과 바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풀어놓는다.


 가볍게 읽어도 페이지는 사뿐히 넘어가고,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의미가 풍부해져서 영화만 좋은 게 아니라 텍스트도 좋구나 하고 인정하게 만들어버린다. 고레에다 감독을 모르지만, 언제나 진심을, 최대한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한다.


 기억에 남는 문장은 많지만 몇 군데만 적어보기로 한다.

"세상에는 쓸데없는 것도 필요한 거야. 모두 의미 있는 것만 있다고 쳐봐. 숨 막혀서 못 살아."
《걷는듯 천천히》 중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오다기리 조가 연기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이야기라고 한다. 공기 중에서 산소만이 쓸데 있다고 해서 공기가 산소로 가득하다면 인간도 동물도 살아가지 못한다. 생명이 숨을 쉬고, 생을 이어갈 수 있는 것도 그런 '쓸모없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상대의 대사를 들을 수 있는 힘이야말로 배우로서 가장 중요한 능력임이 분명하다. 말하는 힘이란 우선 이런 힘이 있어야 생긴다고, 고키 군을 보며 확신했다.
《걷는듯 천천히》 중

 듣는 능력, 태도, 힘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부터 시작해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는 한다. 대화를 나눈다고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그 시간을 끝내는 일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상대의 대사를 듣고 거기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한다면, 상대의 말을 듣고 진심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지녀야 할 정말 중요한 능력이다. 말하는 건 그다음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또 적고 있지만 얼마나 잘 들을 수 있을지 조금 걱정도 된다. 

 

 걷는 듯, 천천히.

모든 걸음이 천천하지 않다는 걸 생각하면, 천천히 걸어야 진짜로 걷고 있는 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상대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더운 날의 연속이다. 이런 날들에는 역시 천천히 걸어야 하지 않을까. 

 걷는 듯, 천천히. 

천천히 걸어나가야겠다.


 이 책을 만날 수 있게 해준 이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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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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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복잡한 생각없이 편하게 누워서 읽은 가벼운 책이다. 감상 역시 가볍게 쓰기로 한다.


 에노시마에는 100년이 넘게 이어온 사진관이 있다. 그 사진관의 이름이 니시우라 사진관이다. 긴 역사를 갖고 있는 사진관이지만 세월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마지막 주인 니시우라 후지코 사후에 영업을 끝내게 된다. 니시우라 후지코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유의 외할머니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종종 들렀고, 외할머니에게 사진을 배운 마유지만 4년 전의 '그 사건' 이후 사진을 찍는 것도 카메라를 만지는 것도 그만두었다. 

 이야기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영업을 마치게 된 사진관을 정리하기 위해 마유가 섬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한때 마유는 '과거의 순간을 잘라내'어 사진에 담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의 결과 4년 전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기에 사진을 그만둔 거였다.

 마유는 사진관을 정리하다가 '미수령 사진'이 담긴 상자를 발견한다. 미수령 사진들 속 주인공들이 바로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연이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수십 년까지, 과거에서 잘려나온 시간이 담긴 사진들은 주인을 기다린다. 사진 속 주인들이 찾아오고, 마치 시간이 이어진 것처럼 그들의 마음에 남아있던 앙금도 하나둘 풀려간다. 어쩌면 사진관의 정리가 끝날 때쯤에는 마유가 사진을 그만두게 된 그 4년 전의 사건, 그 이전의 시간과도 이어질 수 있을지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내용이나 결말에 민감한 이들이 많기에 줄거리도 정말 대략적으로만 적었다. 실제로 읽어보면 알겠지만 줄거리 자체는 전혀 다르지 않다. 사진과, 인연과, 시간의 이야기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설정과 프롤로그다. 

첫번째 설정은 소재가 사진이며, 그 사진이 의미하는 바가 '과거에서 잘려나온 시간'이라는 점이다. 어쩐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두번째 설정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계기가 니시우라 사진관의 마지막 주인이자 마유의 외할머니인 니시우라 후지코의 죽음이라는 거다. 죽음 이후에 비로소 부활 혹은 재생이 시작된다는 흔하지만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에서 시작하는 셈인거다. 

 프롤로그 역시 설정과 이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이 이야기의 배경이 '섬'이라는 걸 자세히 묘사한다. 그런데 이 섬은 단지 바다로만 둘러싸여 있는 게 아니다. '다리'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일지 벌써 예상이 되시는지.


 사람은 누구나 '섬'과 같은 고립된 존재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기에, 결국 어떤 순간, 혹은 거의 언제나 섬처럼 고립되어 있는 상태를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섬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고립되어 있기만 한 것도 아니다. 다리를 통해 육지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거다.

 에노시마라는 섬은 고립과 연결이라는 상태를 통해 무대의 배경이 됨과 동시에 사람의 내면 혹은 존재를 암시한다.


프롤로그에서 고양이 요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8쪽

 오른쪽에서는 파도 소리가, 왼쪽에서는 인간의 발소리가 들렸다. 같이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바다에 가봤자 찬바람만 맞을 뿐이겠지. 왼쪽으로 꺾어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서로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불가능한 바다에 나가 찬바람을 맞는 것보다는 의미 없이 부딪힐지언정 사람들 속에서 방황하는 게 나은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를 보고 깨달음을 얻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렇게 많은 수도승들이 산으로 바다로 나갔음에도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사람은 사람 속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끊어내고, 잘라버린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다시 연결되어야만 한다. 


 이 이야기 속에 담긴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흔할 수 있는 일화들에서 내가 읽은 건 단절과 연결, 화해와 이해에 대한 갈망과 필요성이다. 어떤 일이 있었는가에 따라 달라지지만 어떤 계기나 매개체가 있다면 우리는 조금 더 수월하게 연결될 수 있다.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에서는 사진이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거다.


 어떤 사건 이후로 사진을 그만 둔 마유가 섬에서 알게된 묘한 남자 마도리 아키타가 역시 비밀을 감추고 있다. 크고 작은 비밀들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과거에서 잘려나간 시간을 담고 있는 사진을 찾기 위해 사진관을 찾는다. 고양이 요나가 말하는 것처럼 탁한 발소리와 함께. 


 길을 갈 때 사람들이 발소리에 귀기울여 보시기를. 혹시 그 가운데 보통 사람과 다른 탁한 발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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