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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와 빵칼
청예 지음 / 허블 / 2024년 7월
평점 :

<라스트 젤리 샷>, <수빈이가 되고 싶어> 등 제목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청예 작가가 이번에도 일을 냈다.
오렌지와 빵칼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단어들이 한 문장에 들어왔다.
빵칼은 오렌지를 썰 수는 없지만 쑤실 수는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문구이다. 너무 매력적인 말이다.
이 책은 너무 좋다가도 잠깐 거리를 두게 만드는 책이다.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을 읽다 보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의 문장 구조를 너무 좋아하는 편인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책의 주인공 영아는 27살의 유치원 교사이다. 오래 사귄 남자친구도 있고 사이좋은 친구도 있다. 그게 오영아다.
영아는 은주를 좋아한다. 그래서 증오한다. 은주는 영아에게 거침없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에 분통터져하며 이를 영아와 함께 나눈다. 국민 청원 참여나 일본 불매 같은 것들을 말이다. 영아는 은주에게 맞춰준다. 맞는 말이니까. 파렴치한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영아는 살아간다.

영아가 근무하는 유치원에는 은우, 아니 마일로가 있다. 은우는 은우가 아닌 마일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원했다. 은우라고 말하면 화내거나 소리를 지르고 악을 쓴다. 마일로라고 해야 온순해진다. 영아는 참는다. 선생님이니까. 그러다가도 한계가 찾아온다. 그렇게 영아가 참다 참다 결국 분노하면 은우는 웃으며 "you nailed it"이라고 말한다.
마일로, 유 네일드 잇. 우리는 이 이름과 문장을 앞으로도 많이 보게 된다.
영아는 은우의 하원 도우미를 맡게 된다. 은우의 엄마는 남편과 헤어진 수년 전부터 홀로 은우를 키우다가 호주 멜버른에서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 하나동에 전입신고를 하고 빵집 '나루터'를 운영하고 있다. 에코 비건 빵집 나루터를.
영아는 은우의 엄마, 그리고 남자친구인 수원에게 같은 상담 센터를 소개받는다. 상담을 받기 위해 들어간 영아는 자신을 정신과 의사는 아니라고 소개한 닉네임 scarlett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상한 실험을 소개받는다.
일명 전두엽의 기능을 조절해 사람의 정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실험이다. 주입하는 자극은 길어봤자 4주. 4주 뒤에는 원래대로 돌아온다. 영아는 알지 못했다. 그 4주가 27년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지.

그 시술 이후 영아는 조금 달라졌다. 유치원에서 호통치는 일이 많아졌다. 원장도 영아가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물론 달라졌다는 건 영아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남자친구인 수원을 대하는 태도도, 가장 친한 친구였던 은주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곤 한다. 이 시술 괜찮은 건가? 잘못되는 거 아닐까 싶지만 속 시원할 때도 있다. 은우의 '유 네일드 잇' 소리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게 오영아 본연의 모습일 수도 있다. 당황스럽고 감당할 수 없지만 거부하고 싶지는 않은 상태였다.
때로는 억압이 존엄을 지킨다.
기압에 의해 몸의 형태를 유지하는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