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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ㅣ 마음산책 짧은 소설
백수린 지음, 주정아 그림 / 마음산책 / 2019년 11월
평점 :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
백수린
진즉에 사두었던 책....작가님 작품은 ‘친애하고 친애하는’을 읽었더랬다. 작품이 애매하게 좋았던 기억이다. 할머니와 어머니... 외가댁에서 자랐던 그녀의 마지막 할머니와의 추억 이야기... 어머니나 할머니의 이야기는 무조건 좋은 거기에... 좋았다고 생각하고.. 글이 예스럽게 서정적이어서... 다음 작품을 기대는 했는데 무조건 좋지는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지난 여름에 잔뜩 사 둔 책 중에 하나인데... 책이 참 예뻤거든.
결론... 너무 좋았다. 이 책 덕에 나는 이 작가님의 책을 다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단편 모음집... 그냥 그냥의 이야기들이 잔잔하고 글이 참 깔끔하고 담백하게 서정적이다.
13개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멋진 날..... 아이들이 모래놀이를 하던 한낮의 해변..책을 읽던 가운데... 나타난 누군가의 ‘아름다워서요’ .... 뒤에 무슨이야기가 있는지 모르지만...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 어떤 날은 분명 ... 정말 멋진 날이지.
우리, 키스할까?...권태기였던 그가 어느 여자아이와 남자 아이를 보던 날... 봄 향기가 머물 것 같은 늦가을의 한 때... 함께 있는 주정아 작가 님의 단풍 그림이 예술이다.
완벽한 휴가...너무 더워 휴가로 간 공항... 진우와 주희의 어린 시절 휴가 이야기를 나누다 주희는 그 때의 아빠를 떠올린다. 젊었던 ...아무것도 두렵지 않던 아빠...(이야기가 너무 공감되었다.
그 새벽의 온기.... 멜랑꼴리한 그녀, 삶도 잠도 피곤하고 몸도 마음도 추운 그녀에게 찾아온 버려진 개... 그 개의 온기.
봄날의 동물원... 동물원에서 일하던 내게 찾아왔던 사촌 누나와의 봄날의 추억... 홍학.. 아름답고 슬펐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비치 타올.... 보면서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모른다. 너무 공감이 가서... 어느 부분에서 공감일까... 암튼 유독 결론이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
어떤 끝....처음과 끝의 여행...도쿄... 모든 사랑이란건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니까....쓸쓸했다.
비포 선라이즈....엄마와의 파리 여행... 모녀 간의 여행...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여행은 책이나 드라마에서만 가능할 수 있는 법... 암튼 현실적이었다.
언제나 해피엔딩...조교로 있는 민주, 축제 마지막 날이라 오후 강의가 다 휴강이던 어느 날 철학과 사무실에 찾아온 박 선생(큰 백 팩을 들고 다니며, 세상 유행과 동떨어진 차림새, 화장은 물론 어떤 치장도 하지 않고 남에게 절대 피해 안 주며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여 훗날 그렇게 될까 두려운 사람의 전형) 이 나타난다. 나는 절대 저렇게 늙지 않을 거야 다짐하는 민주.. 스물일곱 살이 된 이래로 매일매일 초조하다. 대학에 가면 ~해야지 했던 많은 꿈들... 어느 순간 자신이 원했던 것을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아버렸다. 자신은 현재 비정규직, 남친은 몇 년째 공시생.. 암울한 그녀.
민주는 스무 살 이후 자신의 삶이란 꿈꾸어왔던 것들을 조금씩 하향 조정하는 날들의 연속인 것처럼 느꼈다. ... 길을 잃지 않으려고 빵을 떼어 길가에 버리며 걸었다는 동화 속의 남매처럼 민주는 자신의 꿈의 디테일을 하나씩 버리며 걸어왔지만, 자신의 삶이 어디쯤 도착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끝을 향하는지는 더욱 알지 못 했다. p.149
암튼 박 선생이 잠깐 차를 마시고 가도 되냐고 물어본 후 자신의 스테인레스 보온병에서 차를 한잔 따라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옛날 영화관 아르바이트 시절을 이야기해 준다.
‘영화관 아르바이트의 가장 큰 장점이 뭔지 알아요?’
‘공짜 영화 보는 건가요?’
‘아뇨. 결말을 미리 본다는 점이었어요. 그 시절에 뭐가 그렇게 인생에 불안하게 많던지, 영화만이라도 결말을 미리 알고 싶더라고요. 그러면 나는 해피엔딩인 영화만 골라 볼 수 있잖아요.’
....‘...괜찮아지나요?’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끝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만 여기, 여기의 온기에 집중하기 위해 아직은 따뜻한 차를 마셨다. p.155~157
이 작품이 가장 여운이 남았다. 뒷표지에 이 글의 문구가 왜 있는지 읽으면서 납득했다.
여행의 시작 – 교직 생활 30년 후 퇴직한 그는 얼마 전 아내와 사별했다. 외롭던 그는 딸이 있는 프랑스로 떠나기로 했다. 아내가 가고 싶어했던 곳, 혼자 가는 비행기와 공항에서의 이야기... 쉽지 않은 여행의 시작 이야기...
오직 눈 감을 때 ...옛 연인과의 낯선 중국집에서의 저녁....칠성반점이었으면서 지금은 차이나향이 되어버린... ‘어향가지’가 남다른 맛이었다는... 아... 먹고 싶다. 나는 이 이야기도 쓸쓸하고 아련하고 너무 좋았다. 나의 최애 작품이다.
별것도 아닌 일로 정의 운운하며 핏대 높이고 싸우다가도, 실연하면 쉽게 동지가 되던 나이. 마흔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고, 서른이 되기 전엔 인생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일 조바심이 났다. 뭐는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 사이를 휘청거리면서도 그 나이에만 허락되던 무책임과 자유를 방탕하게 누리던 날들. p.188
...그때 우린 왜 그렇게 없는 것이 많았을까? 그와 사귀는 동안에도, 이별하고도 한동안 나는 내가 만약 조금 더 가진 것이 많았다면, 미모든 재능이든 박애주의자같이 넓은 마음씨든, 우리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만약에,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내가 아니었다면,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더 사랑을 받았을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고 나는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나 아인 나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나인 것을 온전히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잃어버린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오직 눈 감을 때에만 내게로 잠시 돌아왔다 다시 멀어지는 모든 것들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내 것인 줄 알아차리기도 전에 상실해버린 그 모든 것들이. p.194~195
참담한 빛.... 부모 준비를 하는 어린 소년 소녀의 이야기... 그들이 온전히 가정을 꾸릴 수 있기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
아무 일도 없는 밤.... 요양원에서의 끝을 앞둔 환자와 눈이 엄청 오던 밤 간병인이 옆을 지키던 이야기... ‘오늘 밤은 사라지지 말아요’가 이 이야기에서 나왔다. 따뜻했다.
아... 이렇게 다 적고 나니... 이 작품들은 참 다 좋았다. 아련하게 슬프고 따뜻하고 애잔한 감정들, 여행의 이야기, 추억이기도 하고 그리움이기도 한 이야기들이 예쁜 일러스트와 버무려 참 아름다운 책이 되었다. 글들도 참 아름다웠고.. 계속 소장하고픈 책이다.
민주는 스무 살 이후 자신의 삶이란 꿈꾸어왔던 것들을 조금씩 하향 조정하는 날들의 연속인 것처럼 느꼈다. ... 길을 잃지 않으려고 빵을 떼어 길가에 버리며 걸었다는 동화 속의 남매처럼 민주는 자신의 꿈의 디테일을 하나씩 버리며 걸어왔지만, 자신의 삶이 어디쯤 도착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떤 끝을 향하는지는 더욱 알지 못 했다. - P149
....‘...괜찮아지나요?’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
....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끝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다만 여기, 여기의 온기에 집중하기 위해 아직은 따뜻한 차를 마셨다. p.155~157 - P155
...그때 우린 왜 그렇게 없는 것이 많았을까? 그와 사귀는 동안에도, 이별하고도 한동안 나는 내가 만약 조금 더 가진 것이 많았다면, 미모든 재능이든 박애주의자같이 넓은 마음씨든, 우리의 관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만약에,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내가 아니었다면,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그렇다면 나는 더 사랑을 받았을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고 나는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나 아인 나 아닌 무엇이 되기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으니까.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나인 것을 온전히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는 점점 더 그런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잃어버린 것,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오직 눈 감을 때에만 내게로 잠시 돌아왔다 다시 멀어지는 모든 것들이 한없이 그리워졌다. 내 것인 줄 알아차리기도 전에 상실해버린 그 모든 것들이. p.194~195
- P194
별것도 아닌 일로 정의 운운하며 핏대 높이고 싸우다가도, 실연하면 쉽게 동지가 되던 나이. 마흔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고, 서른이 되기 전엔 인생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일 조바심이 났다. 뭐는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 사이를 휘청거리면서도 그 나이에만 허락되던 무책임과 자유를 방탕하게 누리던 날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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