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 지질학적 시간의 발견에서 신화와 은유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06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이철우 옮김 / 아카넷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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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간을 인간의 정신 안에 위치시킨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였다. 폴 리쾨르는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줄거리 구성을 연결시켜 시간은 이야기를 통해 형상화 된다고 했다.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 이론을 Ⅰ,Ⅱ,Ⅲ으로 나누어 꼼꼼하게 설명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메시스Ⅲ이다. 이야기로 형상화된 시간은 독자가 이야기(시간)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의미 있는 이야기(시간)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질학자들은 시간을 어떻게 보았을까?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은 시간에 대한 지질학자들의 은유다. 말 그대로 '시간의 화살'은 직선적 시간관으로 절대적인 유일성을 가지고 반복되지 않는 시간을 의미한다. 필연적인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 균질화된 근대적 시간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반면 '시간의 순환'은 내재적 법칙성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시간을 말한다. 물론 이때의 순환은 똑같은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이다. 시간의 본질을 상반되게 표현한 이 이분법적인 은유 중 어느 쪽이 옳은가? 시간은 화살처럼 방향성도 목적성도 없이 계속 나아가기만 하는가, 혹은 순환하는가?

 

이런 이분법적 사고의 전통은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스티븐 제이굴드가 말하듯이 ‘이분법은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유용하거나 오도하거나의 문제이다.’ 우리는 늘 두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하는 입장에 놓이지만 세상 만물을 모두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눌 수 없듯이 시간 역시 직선이냐 원이냐 선택적으로 말 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즉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나도 내 경험세계에서의 생물학적 시간과 근대적 시간관에 너무나 익숙한 탓에 거의 직선적 시간만을 인식하고 살고 있다.

 

시간의 본질을 묻는 이런 이분법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간은 화살만도 아니고 순환만도 아니다. 또 시간은 화살이고 순환이다. 그러니까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것은 하체는 하나고 상체가 둘인 샴쌍둥이를 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고 두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1.5인이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쩌면 시간은 이렇게 ‘아니다’라는 부정의 형식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 있는 것은 분명한데 말 할 수 없는 것, 다른 것들을 측정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측정되어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이런 아포리아를 해결하기 위해 스티븐 제이굴드는 영국 지질학계에서 유명한 한 명의 악당과 두 명의 영웅을 불러온다. 악당의 이름은 토머스 버넷이고 영웅의 이름은 제임스 허튼과 찰스 라이엘이다. 이들은 차례대로 17, 18, 19세기 인물로 지질학이라는 학문이 나오기도 전에 지질학적 시간인 ‘심원한 시간(deep time)’을 발견한 이들이다. ‘심원한 시간’은 인간의 역사에 비해 장구한 지구의 나이를 표현한 말이다. 책에 있는 말을 그대로 옮겨 온다면 ‘지구의 나이를 1야드(91.44cm)의 길이로 간주했을 때 손톱 다듬는 줄로 가운뎃손가락의 손톱을 한 번만 밀어버리면 인간의 역사는 모두 지워진다.’

 

지질학도들은 어떻게 지구의 나이를 수십억 년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심원한 시간’으로 인식하게 되었을까? 제이굴드는 한 명의 악당 그리고 두 명의 영웅이 쓴 책과 표지로 사용된 그림 등을 분석하는데 해석학자에 맞먹는 텍스트 해독능력을 보여준다. 직선적 시간관 안에 내재되어 있는 순환적 시간을 읽어내는가 하면,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바로잡기도 하고, 우습고도 멋진 문장으로 문외한들을 사로잡기도 하면서 자연은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 둘 다에게 호의적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즉 자연은 역사적 고유성이라는 시간의 화살과 항구적인 내재성이라는 시간의 순환을 모두 요구한다는 것이다.

 

제이굴드의 책을 끝으로 ‘시간과 역사’에 대해 참고해야할 책읽기를 마쳤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 등은 절반도 이해를 못한 듯하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따로국밥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게 깨우친 듯하다. 자끄 모노의 <우연과 필연>을 읽으면서 인간은 단백질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보르헤스의 <픽션들>과 <러브크래프트 전집> 2권에서는 과학적 시간관이 문학작품 속에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과학과 불교>에서 나는 본문과는 무관하게 달라이 라마들이 어떻게 교육을 받는가 하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고 부럽기까지 했다. 가장 쉽고 편하고 읽은 것은 'E=MC2' 과 <시간의 화살>이었고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였으며,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은 가장 신선했고 제이굴드의 학자적 태도에 탄복했지만 화살도 순환도 아닌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양비론자 같아 뒷맛이 개운찮다.

 

부수적으로 성경의 전도서를 읽으며 불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하느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는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신다는 말을 읽으며 크게 웃었다. 보르헤스의 <모래의 책>을 다시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보르헤스의 시간관을 엿본듯해서 나름 뿌듯했다. 2년여에 걸쳐 읽은 역사와 관련된 책들. 결국 모든 책의 종착은 나, 즉 사람이었고 사람의 살아있음, 삶이었다. 시간을 사는 나는 내 삶의 저자이며 동시에 유일한 독자라는 것. 이제 어떻게 내 삶을 쓸 것인가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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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이야기 1 - 줄거리와 역사 이야기 현대의 문학 이론 33
폴 리쾨르 지음, 김한식 이경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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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시간이 길다고 혹은 짧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시간을 측정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측정할 수도 없으니 분명 시간은 존재하긴 한다.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그는 말한다. “아무도 나에게 그 질문을 하지 않을 때에는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그것을 묻고 내가 그것을 설명하려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있기는 있는데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는 시간의 이 존재론적 역설을 그는 어떻게 해결하려는 걸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질문을 바꾼다. 그렇다면 시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에게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따로 따로 존재한다고 보면 크나큰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어디서부터 현재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과거이며 또 미래인가? 어떻게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과거와 현재를 측정할 수 있는가 등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우리의 정신에 위치시킨다. “어쩌면 우리는 그 본래의 의미로 세 개의 시간, 즉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실 이러한 세 가지 시간 양태는 어떤 방식으로 정신 속에 존재하며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는 기억이라는 이미지로, 미래는 기다림(기대)으로, 현재는 직관으로 세 겹의 시간을 설정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의 정신이 과거의 이미지를 불러오는 것이고 기대한다는 것은 미래의 이미지를 미리 예측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현재’에 동시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현재는 언제나 세 겹의 중첩된 시간이다. 우리는 모두 이 세 겹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정신’을 준거점으로 측정 가능하다. 시간은 기억이나 기다림(기대)의 방식으로 확장(이완)되며 집중 혹은 긴장하는 ‘현재’의 활동을 통해 연장된다. 이런 작용으로 우리의 정신 속에서 파편화된 시간은 연속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기다림과 기억은 바로 정신 안에, 인상의 자격으로 연장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인상은 정신이 행동하는 한에서, 다시 말해서 기다리고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하는 한에서만 정신 안에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시간은 헤아릴 수 있는 영혼들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던 시간을 정신에 위치시킴으로서 존재를 결여한 존재로서의 시간의 역설은 해결되었다. 한없이 단자화 되고 파편화된 시간들도 세 겹의 현재로 인해 연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시간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인 동시에 인간의 실존적인 제약이기도 하다. 이 제약은 어떻게 극복 가능한 것인가? 시간의 연장은 언어를 통해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줄거리 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좀 더 극단으로 밀고 가면 이런 말이 가능할 것이다. 이야기가 아니면 어떻게 이 세계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폴 리쾨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을 바늘 하나 꽂을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분석하고 거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줄거리 구성을 연결시킨다. 줄거리 구성은 시간적 경험을 언어로 형상화하고 재형상화한다. 시간성이 언어로 옮겨지는 것이다. 리쾨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를 분석하면서 역사와 허구에 대해 분석한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역사적 시간과 허구적 시간에 대한 분석이다. 역사적 시간은 연대기에 따른다. 그러나 연대기만으로는 안 되고 필연적으로 허구의 시간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역사와 허구는 교차하면서 바로 이 교차의 지점에 ‘인간의 시간’이 있다.

 

객관적 시간 즉 우주적 시간은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개인이 경험하는 시간 즉 사적인 시간과 늘 불협화음을 이룬다. 개인적 시간을 어떻게 객관적 시간에 안착시킬 것인가가 역사적 시간인 셈이다. 책을 읽다보니 지구상에 살고 있는 63억 인구 개개인은 모두 다 다른 시간을 사는 셈이다. 역사적 시간은 제쳐두고 내게 남은 사적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가슴을 짓눌러 온다. “내가 아프다. 시간이 아프다.”라고 했던 폴 발레리의 말이 남의 말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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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4-03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섬이다."라는 공간으로서 인간을 분리시킨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인간을 또 '개인의 시간', 정신에 존재하는 시간으로 분리시켜 시간에서마저 각 인간을 떨어뜨려 놓는군요. 공간으로서의 지도와 시간으로서의 연대기와 분리되어 버린 각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반딧불이 2012-04-03 12:28   좋아요 0 | URL
음..시간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제가 다다른 결론은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空이었어요. 기독교에서는 영원을 말하지만요. 그래서 맥거핀님과 같은 질문에 닿았지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책을 좀 읽어보려고 해요. 어? 그런데 프로필 사진이 바뀌었네요. 봄단장 하셨나봐요?

우리는 시공간을 각각 별개의 것으로 인식하지만, 아인슈타인 이후 시공간은 더이상 별개가 아니었어요. 날이 궂어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했는데..결국 내가 누워 있던 곳은 방바닥이며 동시에 시간을 깔고 누워 있었던 거였더라구요. 벌떡 일어나 답글 달고 있습니다.^.^

맥거핀 2012-04-03 22:07   좋아요 0 | URL
봄단장이라기에는 너무 칙칙한 사진입니다.ㅋ 날씨가 진짜 좀 궂네요. 내일은 맑았으면 좋겠어요.

비로그인 2012-04-0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네 도서관에 가면 1권이 빠진 채 2권부터 진열돼 있어서 늘 다음으로 미루곤 했는데 구입해서라도 읽어봐야겠네요. 잘 봤습니다ㅎㅎ

반딧불이 2012-04-04 11:43   좋아요 0 | URL
이미 살펴보셨겠지만 2,3권에서는 역사와 이야기, 그리고 시간이 이야기 속에서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실 예를 들고 있었어요. 그러니 가장 본질적인 이야기는 1권에 모두 있는 셈이지요? 소설쓰시는 분들의 필독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답니다.

프레이야 2012-04-04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가 아니면 어떻게 이 세계를 만날 수 있을까..
소설 쓰는 사람의 필독서로 생각하셨다니 리뷰만으로도 어느 정도 와닿습니다.
감사해요. 담아갈게요^^

반딧불이 2012-04-06 00:19   좋아요 0 | URL
재미도 없는 글을 꾸준히 읽어주시네요. 고맙습니다.

maruko 2012-04-2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관한 자료를 찾다가 들어와 왔어요.
왠지 자주 찾아질 것 같아요..^^

반딧불이 2012-04-27 11:3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별내용 없지만 참고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징검돌을 놓으며

 

 

물속에 돌을 내려놓았다

동쪽도 서쪽도 생겨난다

돌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옆이 생겨난다

옆에 아직은 없는 옆이 생겨난다

눈썰미가 좋은 당신은

연이어 내려놓을 돌을 들어올릴 테지만

당신의 사랑은 몰아가는 것이지만

나는 그처럼 갈 수 없다

안목이여,

두번째 돌 위에 있게 해다오

근중한 여름을 내려놓으니

호리호리한 가을이 보인다

 

 

 

 

문태준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다. 시집의 제목이 '먼 곳'인데 시인은 세속과는 아주 먼 곳에 있는 듯하다. 인적없는 소나무 숲을 오래 걸어들어가서 만나는 사찰같다고 해야할까.

 

시인은 왜 세번째 돌을 놓을 수 없는가. 두번째 돌에 연이어 세번째 돌을 놓으면 중심이 생겨나고 주변이 생겨난다.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수평? 두번째 시집에 이어 수평에의 지향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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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소장 도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아마존에서 살아남기

사막에서 살아남기

빙하에서 살아남기

화산에서 살아남기

초원에서 살아남기

바다에서 살아남기

시베리아에서 살아남기

동굴에서 살아남기

남극에서 살아남기

......

 

  - 사는 게 장난이 아닌가봐

 

 

 

 

 

 

내 생의 가장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살아남았다. 만신창이가 된 심신으로 며칠을 앓고 삭정이만 남았다. 정말 '사는 게 장난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저런 책을 읽었더라면 좀 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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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3-21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제가 잠깐 착각했어요. 저는 반딧불이님의 아드님이 읽고 있는 소장도서에 대한 글인줄 알았거든요. ^^;;

그런데 시가 짧으면서도 요즘 사회의 한 단면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군요. 생각해보니 어린이들이 읽어야 할 책들이 대부분 '~~에서 살아남기'라니,,
아이러니하네요. 경쟁사회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고요 ^^;;

반딧불이 2012-03-22 01:15   좋아요 0 | URL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을 보면 '개와 꼰대는 읽지 마시오. 언니야, 풍자가 아니면 자위다.'라는 말이 있어요. 시인이 의도한 것도 바로 cyrus님이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맥거핀 2012-03-21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재밌네요. 근데 저런 책을 읽어서라도 살아남으면 다행인데, 요새는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세상이라는 사실이 서글프군요.

반딧불이 2012-03-22 01:17   좋아요 0 | URL
저는 저 시의 말미에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를 한 줄 더 보태고 싶었어요. 정말 사는 게 장난이 아니죠.
 

 

이랴/신원철

 

 

고조선 때쯤?

아사달 살던 암팡진 궁둥이의 여자

소를 몰고 산길을 홀로 걷고 있는데

도무지 소란 놈이 느릿느릿 말을 안 듣더란 말이지

화가 치민 여자

그놈을 번쩍 들어 머리에 이었단 말야

뾰족한 머리가 배를 깊이 치받으니

창자가 터질 지경이어서

눈물 콧물 흘리며 소가 애걸복걸 했다는군

그때부터 느릿느릿 제 버릇 나오면

 

너 이놈 또 머리에 "이랴?"

 

쪽진 머리, 목, 어깨, 허리, 작지만

딱 벌어진 궁둥이로

못난 역사를 떠받치고 온

 

 

 

서걱거리는 삶을 다독이듯 봄비가 내렸다. 젖은 마음을 더이상 축축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이 눅눅한 마음을 가볍게 해줄 즉각적인 무언가를 찾게 된다. 하이킥 몇 편을 다운 받아 보고 계간지를 펼쳤더니 이 시가 눈에 띄었다. '이랴'라는 말이 저렇게 생겨났구나.

문태준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매일 게으른 내 손을 반성하면서, 또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면서 이 봄을 견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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