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진경문고 5
정민 지음 / 보림 / 200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술술 읽히지만 아주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이미 오래전에 같은 저자가 쓴 『한시 미학 산책』에서 일별한 적 있다. 같은 내용을, 정확하게 말하면 『한시 미학 산책』에 실린 앞부분을 쉽게 풀어 썼다. 저자는 딸 벼리가 한자에 눈떠가는 모습을 보며 아이를 위한 선물로 이 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어린이에게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쉽게 읽히는 장점이 있다. 요즈음 이런 방식의 책들이 많이 나오는 모양이다.

 

내가 이런 형식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수잔 와이즈 바우어가 쓴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 역사 이야기』였다. 적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옛날이야기를 읽듯이 읽을 수 있었다. 이후에 이와 비슷한 형식을 가진 책들이 유행하기 시작한 듯하다. 시를 어려워하고 한시라면 더더욱 어려워할 뿐만 아니라 외국어 대하듯 하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몹시 다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시에 관심을 가지고 한시를 읽으면서 아이의 한자실력도 함께 늘어날 것을 염두에 두었는데, 사실 이 책은 한시를 읽는 독자만이 아니라 시를 창작하는 사람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한시를 예로 들었지만 한권의 시론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울림이 있는 말’, ‘간결한 것이 좋다’ 등 소제목만으로도 시를 지을 때 명심해야 할 내용들이 모두 보인다. 특히 ‘절벽 옆에 말을 세우니 몸이 너무 피곤해서/나무에 시를 쓰는데 글자가 써지지 않는다’를 ‘절벽 옆에 말을 세우니 몸이 너무 피곤해서/나무에 시를 쓰는데 글자를 반만 쓰고 말았다.’로 한두 자를 바꾸어 전혀 다른 맛이 나게 고치는 부분,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를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로 절반으로 줄이면서 의미는 더욱 풍성하게 하는 방법을 눈여겨보았다.

 

창작자는 피로써 피를 씻듯이 다른 사람의 시를 읽게 되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시인만의 새로운 시각을 갖기 위해 애쓰다보면 초심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잃는 것 까진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지금 어디서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게 될 때, 빛나는 형용사만을 찾아 시선이 흔들릴 때, 시를 보는 눈은 한없이 높아져서 정작 자신은 시를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퇴고를 위한 자기검열의 기준이 모호해 졌을 때, 이 책의 내용들이 도움이 될 듯하다. 책의 뒷부분에는 본문에 인용된 시의 원문을 함께 수록했고, 각 저자들의 간단한 소개도 곁들였다.

 

최근 읽고 있는 『잘라라, 기도한 그 손을』의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몇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어 원문을 거의 외우다 시피 한다고 한다. 독서를 혁명이라고 말하는 그는 한 권의 책을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그것의 내용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며, 그것은 또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번 읽은 책은 몇 권되지만 두 번 읽은 책은 두어 권 뿐이며 반복해서 읽고 또 읽은 책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시 그의 말을 빌리면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은 명백하게 어리석은 일이지만, 우리들은 이 어리석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 역시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어리석음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시 미학 산책』을 읽을 때 보다 오히려 가슴에 와 닿거나 깨닫게 되는 부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9-22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24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름과 경이 I21총서 1
이영광 지음 / 천년의시작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에도 인연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악연일 수도 호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사놓고 몇 년 째 읽지 않는 책이 있다면 악연일까? 호연일까? 출간과 동시에 구입해서 바로 읽었다면 그건 호연일까? 악연일까? 끙끙대며 읽었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그건 악연일까? 호연일까? 이상한 몰입의 힘에 이끌려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자 진이 다 빠지고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건 호연일까, 악연일까?

 

최근 이런 책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출간 소식은 출판사의 개인 메일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서점에 깔리기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시름과 경이 』라는 제목에 기대어 시에 대한 이야기겠거니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마도 저자가 시인이라는 믿음도 있었겠고 그가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서 소개한 두보의 시에 대한 기억도 있었으리라.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423413&cloc=olink|article|default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공부하여 쓴 글과 시와 시 쓰기에 대한 글을 골라 묶’은 책이다. 본문은 총 네 부분으로 나뉘었다. 1부의 글에서는 시의 형식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특히 소월시의 수미상관을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으로 진단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2부는 무속의 세계로 미당의 시를 해석하고 있는데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3부는 오탁번, 조정권 등 시인들의 시세계를 다루었다. 오탁번 선생의 ‘폭설’이나 ‘굴비’처럼 적나라한 욕이나 성애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시들이 사람들에게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 늘 궁금했었다. 나는 있는 사실을 말해도 외설이 되고 음담이 되는데 말이다. 저자는 이런 나의 궁금증을 마치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이 알려주었다. 조정권론에서 저자는 ‘미묘하고 역동적인 분열의 느낌’이 눈길을 끈다고 했다. 내가 시집 『고요로의 초대』를 읽었을 때의 느낌과(http://blog.aladin.co.kr/734872133/4590458)’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 ‘보유’라는 제목으로 5편의 산문을 묶었다. 바로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책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세 권의 시집을 낸 사람으로서, 시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시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곱씹으며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동틀 때까지 잠들 수 없었다.

 

시의 황홀경을 맛본 자가 다시 그것에 접하려 할 때, 아마도 그 정신의 상태는 모종의 비상한 ‘몰입’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몰입이란 정신이 딴 데로 가 버렸다는 것, 그는 현실이 아닌 곳에 자기 아닌 다른 이로 다가가서, 없던 말을 얻어 와 이곳을 충격에 빠뜨림으로써 낯선 진실을 드러내는 자이다. 이처럼 시는 어떤 특별한 몰입을 통해, 그러니까 “모든 감각들의 이치에 맞는 착란(랭보)”을 통해 만나게 되는 특별한 순간이고, 특별한 순간에 태어나는 낯선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시 쓰기는 어렵다. 제 감각과 의식을 지우면서, 그러나 지성의 컨트롤타워를 유지한 채 미쳐야 하기에, 시에 미치는 것과 미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265쪽)

 

이렇게 시는 어디선가 온다. 의식 하의 몸의 소리가 의식에 남기는 흔적이 곧 시의 순간일 것이다.……그러니 시에 닿으려면 아예 그것을 의식 차원에서는 잊고 있거나, 아니면 찌른 자리를 또 찌르듯 무의식의 작동 메커니즘에 다시 몸을 맡겨야 한다. 그렇게 시인은 괴롭게 넋을 잃는다. 넋을 잃다니, 하면서도 시인은 그렇게 제 몸의 시간의 수라장을 건너간다. 넋을 잃으면 많은 것을 더 잃겠지. 생활의 균형, 페르소나의 분실 같은 것. (-270쪽)

 

 

 

‘책은 사람을 비추는 종이거울’이라고 썼던 적이 있었다. 시를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내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을 만난 것 같다. 시인의 종이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초라하기가 비에 젖은 닭 같다. 시와의 치열한 만남 앞에서 나는 헐겁기가 터진 그물망 같다. 이렇게 부끄러워 본 적 없었다. 아니 창피했다. 나는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흉내 내는 얼치기 독자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잔뜩 기가 죽어서, 때로는 질투에 떨면서 인정해야했다. 카프카였던가?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한 이가? 나는 지금 카프카가 말하는 도끼를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데 이 책은 내게 과연 악연일까, 호연일까?

 

갑자기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대한민국의 국가 대표급 시인이 낸 책인데 어째서 그 흔한 보도자료 한 장이 없는 걸까? 네이버 책에서는 아예 검색도 안 된다.

“시는? 정신을 조금만 잃고, 삶은?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라더니, 시인은 아예 삶에서 정신을 놓아버렸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것이 인간인가』는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을 웅변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일은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것을 매 문장마다 확인해야 하는 아주 불편하고 고단한 작업이다. 작가가 자신을 이런 지옥에 살게 만든 나치즘에 대한 원한이나 분노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을 담담하게 적고 있으므로 함께 분노하거나 공감하지도 못하는데도 그렇다.

 

읽는 내내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또 비참해질 수 있는지 그 바닥을 확인하게 되고 끝내 인간에 대한 환상을 접게 만든다. 그러므로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 있지?라고 되묻거나 책 속의 내용을 복기하는 일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책을 덮는다고 기억마저 덮혀지랴만- 인간에 대한 모든 환상을 깨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이라고, 가장 비현실적인 일은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인간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피상적이고 환상적인가를 다시 생각해야한다.

 

레비는 왜, 어쩌자고 이런 글을 썼을까.

 

“코만도의 동료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그러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 내가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침에 내가 사나운 바람을 피해 실험실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내 옆에 한 친구가 등장한다. 내가 휴식을 취하는 순간마다, 카베에서나 쉬는 일요일마다 나타나던 친구다.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 -216

 

프리모 레비가 포로수용소의 노동현장에서 실험실로 배치를 받은 후에 적은 글이다. 매일 매순간 굶주림과 추위와 혹독한 노동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릴 때 인간은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끊임없이 죽음이 닥쳐오기 때문에 죽는다는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사치이고, 살려는 본능만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다. 잠깐이나마 이런 상황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을 때 인간은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가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

 

죽은 자들은 그 시대를 증거할 수는 있지만 증언할 수 없다. 살아남은 자만이 죽은 자를 대신해 증언할 수 있다. 레비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대신해 증언하기 위해 썼다. 그러나 1987년 끝내 그는 생을 마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운이고 적절한 시기에 아팠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어쨌거나 극한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던 그가 아파트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이것이 인간인가』에 실린 쁘리모 레비의 연보에는 자살이라는 말은 없다. 대신 “1987년 3월 <주기율표> 프랑스어판과 독일어판 출판, 레비는 외과 수술을 받는다. 4월 11일 토리노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그는 왜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물어야했을까? 단지 아우슈비츠에 대한 고발과 폭로를 위해서였을까? 게르만족은 유대인보다 우월하다는 민족우월주의,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라 노예이며 짐승이라는 사상의 희생자였음에도 왜 그는 인간으로서 수치심을 느껴야했을까? 그리고 그는 왜 자살했을까? 나의 이런 질문에 레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을 열정적으로 실행에 옮긴 아이히만에게서 세 가지의 무능성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었다. 나의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이히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내 안의 무능성에 대해 물어야할 때인 듯하다.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함께 해야 할 질문이다.

 

 

눈여겨 봐둘 것

1.『이것이 인간인가』 신곡의 플롯을 따르고 있다. 지옥-연옥-천국으로의 이행을 지옥과 다름없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강제 이송-실험실로의 재배치-이탈리아로의 극적인 생환과 맞물려 있다.

 

 

2.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p58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12-06-05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저는 기억이 어렴풋한데 레비가 어린 청년에게 단테의 신곡을 설명해 주던 그 대목이 떠올라요. 프리모 레비의 자살은 결국 '이것이 인간인가'에 대한 절망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어요. 살아남아도 인간에 대한 실망은 끝까지 남는. 반딧불이님이 얘기해 주신 '무능감'이 와 닿아요.

반딧불이 2012-06-05 15:07   좋아요 0 | URL
네..프랑스 청년 장에게 신곡 지옥편 제 26곡을 읽어주죠.
저도 그 부분 때문에 플롯을 눈여겨 봤어요. 그런 상황속에서 문학작품이 위로가 되는것이 놀랍기도 했구요.
'무능감'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참..얼마전 올려주신 리뷰에서 중년여성과 사춘기 소녀의 사랑감정에 대한 얘기를 읽고 고개를 주억거렸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6-05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독일보수우파의 과거사 왜곡작업을 다룬 책들을 본 뒤에 프리모 레비를 알게 되어 레비가 왜 자살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하더라고요.80년대 중반에 특히 독일우파의 역사왜곡이 세력을 얻었으니까요.

아마 지금 레비가 독일의 현실을 바라본다면 더 한숨을 쉬고 있을 겁니다.올해 초 시사주간지 슈테른에서 독일 젊은이들의 역사관을 조사한 결과가 나왔는데 독일이 과거사 때문에 다른 민족에게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응답이 65%에 이르더군요.우리나라도 독일 보수우파의 과거사 왜곡 작업방식을 면밀히 연구해야 국내의 왜곡세력들과 제대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반딧불이 2012-06-07 01:0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레비의 자살 이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결국 내 안의, 혹은 우리 안의 문제로 환원될 수 밖에 없더라구요.

과거사에 대한 책임감 문제는 놀라운 결과네요. "집단적인 유죄의 고백은 범죄자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탁월한 방어수단"이라는 아렌트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아요. 유익하 말씀 고맙습니다.

루쉰P 2012-11-20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군대에서 읽었던 책이에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구요. 이 책을 시작으로 서평을 쓰는 것을 시작했었죠.
그의 죽음의 이유는 저도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서경식 교수의 '프리모레비를 찾아서'라는 책도 참으로 좋아하며 읽었죠. ^^
반딧불이님 잘 지내시죠. 저도 이제 1년만에 서재에 다시 왔어요. 푸하하하 ^^;;

반딧불이 2012-11-21 00:28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가끔 책주문 하러 와서 들려보았지만 썰렁하던데 다시 오셨다니 반갑습니다. 자주 오진 못하지만 종종 뵙기를 바래봅니다. 기온이 많이 내려가나봐요. 건강한 겨울 나시기 바랍니다.
 

 

지난 일요일 오전 6시가 조금 지난 시간. 세곡동에서 택시를 타고 사당역까지 갔다.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중교통편도 모르고, 7시에 출발하는 창녕행 답사버스에 늦을세라 불안한 마음 때문에 탄 택시였다. 날씨가 잔뜩 흐려 있어서 일기예보가 궁금했던 나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 소리는 정말 작았다. 하지만 채널을 확인하지 않아도, 내용을 듣지 않아도 그 격앙된 어조만으로도 금방 그것이 특정 종교 방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기독교 방송인가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기사는 “예, 작게 듣고 있다가 손님이 싫어하면 바꿔요.”라며 볼륨을 조금 높였다. 일기예보를 듣고 싶어서 물어보는 나를 기사는 기독교에 관심 있는 것으로 오해했던 모양이다. 교회 다니느냐고 묻는다. 나는 안 다닌다고 했다. 절에 다니느냐고 재차 묻는다. 안 다닌다고 했다. 일요일마다 가서 ‘좋은 말씀’을 들어야하는데 일 때문에 더러 빠진다고 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이렇게 라디오로 ‘말씀’을 듣는다고 하며 볼륨을 더 높인다. 나는 기분이 좀 안 좋아졌다. 나는 오늘 비가 올지 안 올지 좀 궁금할 뿐 그가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듣는 것에 내가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돈 내고 택시를 탔지만 라디오채널 선택권까지 내 몫으로 챙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기사가 두 번씩이나 볼륨을 높이면서 자기는 몸에는 성령이 들어있고 그것이 주는 기쁨으로 충만하고.......교회에 안다니는 사람은 그런 것을 모르고....... 블라블라...

 

나는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지난밤 늦게까지 『언더그라운드』를 읽으면서 찾아보았던 옴진리교 교주의 모습이 떠오르며 혐오감이 확 밀려왔다. 기사는 자신의 신념을 내게 계속해서 불어넣느라 내가 불쾌하든 말든, 혐오감을 느끼든 말든 개의치 않고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수양이 부족한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가 있었겠는가. 차가 예술의 전당을 지날 무렵,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가끔 불경도 보고 성경도 본다. 나는 예수님을, 성경을 마주하고, 아주 개인적으로, 1대1로 만나고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시라고. 택시비가 9300원인가 나왔는데 내게 만 원짜리가 없었다. 미안해하며 오만 원 짜리를 내밀자 잔돈을 거슬러주면서 계속 무어라 ‘말씀’중이시다. 문 열고 내린 내 손으로 만 원짜리가 먼저 건너오고 천 원짜리가 건너오고 동전이 마지막으로 내 손에 건너오기까지 아저씨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는 일용할 양식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일용할 환상을 내려 달라고 기도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댓가로 자아의 일정부분을 지불했을 것이다.

 

창녕에 도착해서 관룡사에 올랐더니 여기도 ‘말씀’ 중이시다. 법당에서 조근조근 법문을 하시면 좀 좋으랴만,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말씀’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찌직 거리는 기계음 때문에 절간이 절간이 아니다. 잠시 스쳐가는 내 미간이 이렇게 찡그려지는데 산 속의 동식물은 어떠하겠는가. 어째서 도시나 산 속이나 이렇게 ‘말씀’은 넘쳐나는가?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말인가? 나는 돌아와 아래와 같은 시를 몇 번씩이나 되풀이 읽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

 

 

꾸오바디스/이영광

 

 

 

날 사탄이라 욕하고 행패 부렸던 택시를 다시 타고 말았다.

나도 점잖진 못했지만,

소규모 베드타운의 비극이다.

그자, ‘베드로맨’은 이제부터 잘 좀 지내보자고

아, 원수를 사랑하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웃었다.

나는 정신을 잃느니 그냥 사탄하겠다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촛불도 없이 헤매고 다니는

당신 교회의 ‘우리 장로님’이라는 이나 얼른 좀 사랑해주시라고 말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원수들이 함께 사는 곳이야말로 지옥이고

원수를 만들고서야 사랑을 싸지르는 지복의 착란 속에 사느니

차라리 선량한 백치가 되겠으며,

당신이 순교자가 될지 안될지 알 도리는 없지만

날 지옥에서 내려준다면, 백번 지각을 하더라도

깁스한 다리를 끌고 걸어서 ‘로마’까지 가겠노라고 말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2-05-17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종교계에서 한번씩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터져 나오게 되어서 그런지
요즘 종교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시선이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거 같아요.
그리고 너무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를 타 종교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좋지 못하고요..
종교에서 강조하는 '말씀'이 옳은지 아닌지 구분해서 믿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


반딧불이 2012-05-18 09:37   좋아요 0 | URL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종교단체의, 또 몇몇 교인의 문제겠지요. 그것이 불교든, 기독교든...싸잡아서 문제삼을 수는 없다고 봐요.^.^

쉽싸리 2012-05-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종교의 장점을 얘기하면서 다양성을 많이 꼽는데요. 이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건 아닌지 싶어요.
교회와 절등이 너무 외세 확장에만 몰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교회와 절은 너무 가까이 있고, 어디 먼 산속에라도 들어가야지 싶어요...
다가오는 초파일에 연등이라도 제대로 바라 볼런지...

반딧불이 2012-05-19 00: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절은 산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나다보니 교회처럼 마을 한복판에 내려와 있는 절도 있더라구요.
저는 연등도 바라보고 크리스마스 트리도 바라보고 다만 구원은 찌질한 저 자신에게서 구하려구요.

글샘 2012-05-1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국에 가면 술도 없고 여자도 없고... ㅋ 쾌락도 없을 거라고 지옥이 낫지 않을까? 하던 강유원 샘 유머도 있었는데...
요즘 높은 분들이 사시는 거 보면, 천국에 가면 더 고급 술집과 이쁜 여자들이 많을 거 같아요. ㅋ 천국으로 갈까봐~~

반딧불이 2012-05-19 01:00   좋아요 0 | URL
ㅎㅎ 글샘님께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있는 '아픈 천국'을 권해드리고 싶은뎁쇼!

oren 2012-05-25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권하는' 신앙인들을 만나는 건 딱 질색인데, 여전히 주변에는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나 성당에 다니는 분들이나 절에 다니는 분들이 참 많기도 많더군요. 저 역시 개인적으로는 성당이나 교회나 절이나 스스럼없이 들락거리는 편인데, 그래도 고즈녁한 풍광 속에 자리잡은 사찰에 조금 더 마음이 끌리는 느낌도 가지고 있답니다. 올해 봄에는 영월 법흥사와 양양의 낙산사를 '여행길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낙산사에 가서는 난생 처음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연등'을 밝혀달라고 5만원권 2장을 기꺼이 쓰고 왔답니다.('연등 접수'도 낙산사 원통보전은 벌써 마감되었기 때문에 보타전에 1년간 달아준다고 하더군요.)

반딧불이 2012-05-26 01:39   좋아요 0 | URL
저는 시어머니의 강권에도 오로지 할렐루야로 20년을 넘게 맞서고 있는 나쁜 며느리어요. 구원은 바란적도 없고 헌금도 시주도 한번 한 적 없는 저는 삶이 곧 지옥이고 천국이려니 생각하고 살려고요.
음...저도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연등을 밝힐 날이 있을 것 같아요. oren님 말씀 참고삼아 일찍 신청해야겠군요.
 
언더그라운드 언더그라운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95년 3월 20일 아침, 일본에서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일어났다. 12명이 사망하고 60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가벼운 기침, 울렁증, 구토 등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에서부터 시야협착증, 마비, 기억상실 등 장기간 치료를 요하는 중환자들도 있다.

 

이 사건은 옴진리교 교주였던 아사하라 쇼코의 명령에 따라 옴진리교 간부들에 의해 행해졌다. 다섯 개 노선의 지하철 칸에 묘한 액체가 든 비닐봉지를 놓고 뾰족하게 간 우산 끝으로 봉지를 터뜨려 달리는 지하철 안에 사린가스가 유포되게 만들었다.

 

옴은 ‘우주의 창조유지 파괴’를 뜻하는 힌두교의 주술어로 주신은 파괴의 신인 힌두교의 시바라고 한다. 아사하라 쇼쿄 교주는 자신을 시바로 믿었던 것 같다. 옴진리교 교단을 만들고 조직을 갖추었고 인류의 종말을 예언하며 신도들을 끌어 모았다. 옴진리교 간부들은 심장혈관 외과 전문의, 응용물리학과 수석 졸업자 등 슈퍼 엘리트급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별다른 존재감이 없거나 일용노동을 하다가 출가한 사람, 또 인생의 고통이나 좌절을 경험한 사람 등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이었다. 그들에게서 어떤 일관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었고 사회적으로 격리된 범죄자도 적의에 가득 차 세상을 비난하는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명령을 하달 받았을 때 그 위험성을 충분히 짐작하고 윤리적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언더그라운드』는 이 사건의 경험자들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터뷰하고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미국에 체류 중이었던 하루키는 봄방학을 이용해 잠시 귀국해 있던 참이었다. 그는 “1995년 3월 20일 아침에, 도쿄의 지하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하는데 의문을 품었다. 그가 품었던 의문은 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에 대한 논리와 시스템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똑같은 작업을 사건의 직간접적 피해자들에게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었다. 하루키는 아사하라가 그렇게 강렬한 카리스마를 얻기 위해서는 그가 격렬한 내적 지옥을 통과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반면 “옴 진리교에 귀의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아사하라가 수여한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를 얻기 위해 자아라는 귀중한 재산을 아사하라 쇼코라는 ‘정신은행’의 대여금고에 열쇠 째 맡겨버린 듯하다”고 한다. “아사하라 쇼코가 소유하는 ‘보다 거대하고 보다 깊고 균형이 깨진’ 개인적 자아에 자신의 자아를 고스란히 동화시키고 연동시킴으로써 그들은 의사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거칠게 얘기하면 옴진리교 신자들이 심적 편안함을 위해 생각을 멈추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종교에서 구원을 찾는다. 그러나 만일 종교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구원을 찾아야 할까?” 이것은 하루키가 인터뷰를 하면서 던진 질문이었다. 구원은 차치하고 나는 교주 아사하라 쇼코 또 그를 추종하는 맹목의 신도들, 대체 이들에게 믿음이, 이 맹신이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러한 궁금증은 에릭 호퍼에게서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길위의 철학자라 불리는 호퍼는 모든 광신적 신자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광신적 성향은 같다고 분석한다. 그것이 기독교도든, 이슬람교도든, 민족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대의와 교조의 내용은 다르지만 그것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 속에는 이런 획일적 요소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대중운동이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붙들어 둘 수 있는 것은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부정 열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평범한 일상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편이 가능한 것을 시도할 때보다 신뢰를 잃을 위험이 적기 때문이다. 이들이 믿는 것은 자신의 경험이나 사고가 아니라 경전에서 나온 말이다." 결국 맹신은 자기 불신에서 나온다는 얘기. ‘광신’에 대해 호퍼는 이렇게 정의한다.

 

“자신과 화해한 자만이 세계에 대해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자신과의 조화가 깨지고, 자기로부터 거부당하고 자포자기하고 자기를 불신하거나 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고반응성 물질이 된다. 불안정한 화학원소 모양으로 손에 잡히는 아무것하고라도 결합하려 드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거부당한 자신만으로는 자신감을 일으키지 못하며 무엇이 되었건 오로지 자신이 신봉하게 된 그 무언가, 그 기둥에 열정적으로 매달릴 때만 자신감을 얻는다....... 그의 자신감은 자신이 지지하는 대의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행위에서 나온다. 광신자는 사실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가 어떤 대의를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신성하며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자기가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조화’ 이 말은 자기를 긍정하라는 말일 터인데 달리 말하면 내가 찌질한 것을 인정하자는 얘기다. 어렵게 얘기하면 ‘자기 배려’가 필요하다는 얘기. 무언가 모자라는 내가 바로 나이고 어딘가 비어있는 듯한 내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그곳이 출발점이 될 때 구원은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이다. 구원은 외부의 어딘가에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구원은 '나'에게서- 그 '나'가 아무리 찌질하다고 하더라도- 시작되며 나에게서 끝난다.

 

 

 

 

 

 

 


댓글(4) 먼댓글(1)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맹목적 지지와 마비된 이성
    from 파란여우의 뻥 Magazine 2012-05-17 10:05 
    5월 12일 오후 두시, 통합진보당(이하 통진당) 제1차 중앙위원회가 개최됐다. 10시간 30분 동안 진행한 결과는 참담했다. 욕설과 고함으로 시작된 회의는 당권파의 일사불란한 복창과 단상점거 폭력으로 막을 내렸다. 회의가 시작된 후 중간에 질문과 의견을 받은 짧은 시간을 빼곤 10시간 내내 당권파의 복창은 뽕주사를 맞은 것처럼 계속됐다. 통진당이 어제 중앙위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19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부정경선 문제때문이다. 토론을 통해 해법을..
 
 
비로그인 2012-05-17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텔레비전에서 당시 사건 보도를 접했던 때가 떠오르는군요. 어쨌든 저는 비교에 빠져들거나 맹신자가 될 염려는 없겠네요. 제가 얼마나 찌질한 인간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ㅎㅎ

반딧불이 2012-05-17 10:34   좋아요 0 | URL
참내..그게 왜 그렇게 가는지...
아무튼 구원받으실 거에요. 아니 스스로, 자신을, 이미, 구원하셨지요?

맥거핀 2012-05-18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도서관에서 이 책 읽었었는데, (저는 처음에 소설인줄 알고 집어들었어요^^)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한 사건의 원인과 결과 뭐 이런걸 잡아내는 게 아니라, 집단기억으로 하나의 사건에서 시작하여 당시의 어떤 시대상을 잡아내려는 시도가 대단해보였어요. (최근에 <한겨레21>에서 대구지하철 사건에 대해 이 책과 비슷하게 서술한 내용들도 인상적이었구요.) 에릭호퍼가 한 이야기와도 연관지어서 보시는 반딧불이님의 의견도 흥미롭습니다.

반딧불이 2012-05-18 09:41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이거 뭐야?...하는 느낌이었어요. 하루키가 왜 이런식의 작업을 했는지도 궁금해졌구요. 하루키가 내 안에 있는 어떤 맹목을 보여주었다면, 이 맹목이 폭력 혹은 파시즘과 상통하고 있다는걸 호퍼가 확인해준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