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내 친구 재운이 마누라 정문순 씨가 낀 여성문화 동인 살류쥬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어이쿠, 했다 나도 앉아서 오줌 눈지 벌써 몇 년, 제발 변기 밖으로 소변 좀 떨구지 말아요 아내의 지청구에, 제기랄 앉아 오줌 싸는 거 습관이 된 지 벌써 수삼 년, 날마다 변기에 걸터앉아서 나는 진화론을 곱씹는다. 이게 퇴화인가 진화인가 퇴행인가 진행인가 언젠가 여자들이 더 많은 모임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박서영은 배를 잡고 웃고 강현덕은 그것이야말로 진화라고 웃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되받았다 역시 여자는 새침데기들이 더 무섭다 그건 그렇고 강정구 교수 전화번호라도 알아내어서 수다 좀 떨까 난 앉아서 오줌 싸니까 방귀가 잘 꾸어지던데, 낄낄낄 캑캑캑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끼리

 

 

                                                             『상가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황정산

 

 

앉아서 오줌 누눈 남자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도 내가 앉아서 오줌 누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래야 환경과 여성을 모두 생각할 수 있는

완전 소중한 남자가 된단다.

유홍준이라는 잘나가는 이름을 가진 어떤 시인이

진보적이고 문제적인 강정구 교수를 언급하며

자신들의 앉아 쏴!에 사회적 미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래도 난 못한다.

내 핏속에 들어있는 단 한 방울의 기억 때문에라도

할 수가 없다.

내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의 또 그 고조할아버지는

어디 풀숲에 서서 오줌을 갈기다

얼핏 풍기는 여인네의 비릿한 냄새에

제대로 털지도 못하고 쫓아갔을 것이고

돌칼을 든, 그 고조할아버지의 고조할아버지는

짐승과 열매를 찾아 들판을 달리다

당당히 오줌을 지려 표식을 남겼을 것이다

오줌은 유랑의 기록이고 수컷의 운명이다.

라면 봉지에 떨어지는 오줌발 소리에

부르르 몸 떨며 즐거워하고

사람 없는 평일이면 산에 올라

봉우리마다 오줌 줄기를 날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나의 여자여,

그대의 생활에 포섭되지 못하는 

조금의 나를 남겨주면 안되겠니?

 

 

                                『문학과 의식』 2012 겨울

 

 

 '앉아서 오줌누는 남자'라는 문구를 명함에 넣어다닌다는 공무원이 있다고 한다. 앉아서 오줌 누는 것이 요즈음 예비 신혼부부의 新혼수 라는 신문기사 타이틀을 본 적도 있다. 일본남자의 40%는 앉아서 오줌을 눈다고 한다. 남자들이 서서 오줌 누는 것이 이렇게 문제가 되고 있는 줄 몰랐다.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의 모습이 나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 여자가 서서 오줌 누는 것만큼이나 불편할 것 같기도 하고 급한 나머지 서서 오줌 누는 것보다 더 낭패를 보게 되는 경우도 생기지 않을까 싶다. 

 

앉아서 오줌 누는 시인은 변기위에 마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앉아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것이 퇴화인지 진화인지, 퇴행인지 진행인지......

 

아직 완소남이 되지 못한 서서 오줌누는 남자는 오줌 누는 행위에 동물성과 남성성을 부여한다. 그에게 앉아서 오줌 누는 행위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그도 완소남이 되고 있다. 완전 소외된 남자? 마지막 3행에서는 안타까움 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언제부터 남자는 서서, 여자는 앉아서 오줌을 누었을까? 태초부터? 갑자기 궁금해진다. 수다쟁이 헤로도토스는 아이귑토스(이집트)에 관해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기술하면서 아이귑토스의 기후가 특이하고 강이 다른 강과 다르듯이 아이귑토스인들의 풍속도 다른 민족의 그것과 정반대라는 이야기를 한다.

 

 

아이귑토스에서는 여자들이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고 남자들은 집안에서 베를 짠다. 베를 짤 때 다른 민족들은 씨실을 위로 쳐 올리는데, 아이귑토스인들은 아래로 쳐 내린다. 짐을 남자들은 머리에 이는데, 여자들은 어깨에 멘다. 오줌은 여자들이 서서 누고, 남자들이 앉아서 눈다. 배변은 집 안에서 하고, 식사는 노상에서 한다.그들의 설명인즉 혐오스럽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은 몰래 해야하고, 혐오스럽지 않은 일은 공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신들을 위해서든 여신들을 위해서든 사제직은 남자가 맡아 보아양 하고 여자가 맡으면 안 된다. 아들들은 싫으면 부모를 봉야하지 않아도 되지만, 딸들은 싫어도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182쪽 

아이귑토스인들의 다른 풍속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반죽은 발로 이기고, 진흙은 손으로 이기며, 똥도 손으로 수거한다. 그들은 할례를 받는데 그 목적이 청결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아이귑토스인들은 아름다움보다 청결함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할례나 남자가 앉아서 오줌을 누는 행위가 청결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건 이해가 간다. 그런데 여자들이 서서 오줌누는 것은 청결과 무슨 관계가 있나?

 

아이귑토스인이나 앉아서 오줌누는 남자들이나 모두 청결과 환경을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명함에 문구를 새기고 돌릴만한 일인가?

남자들이여, 서서 당당하게 오줌 눠라. 그리고 수컷임을 날마다 하루에 몇 번씩 확인하라. 하지만 튄 오줌은 좀 씻어내면 안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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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1-07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글이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진화라기 보다는 적응쪽에 가깝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적응도 진화의 일종인가요?

오랫만에 글을 보니 반갑네요. 새해 행복한 한해 되세요.^^ 즐거운 책읽기, 시읽기도 하시구요. 아..그리고 건강도 챙기시구요.

반딧불이 2013-01-08 18:56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평안하시지요?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새해 첫글이 오줌이라 좀 그렇지만 그냥 재미있자고 적어봤어요.

책읽기도 시 읽기도 건강하지 못하면 어려운 일이 되어버리고 더구나 즐기기는 더욱 요원한 일인것 같아요. 건강하고 행복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맥거핀님께도 늘 행복과 건강의 여신이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진경문고 5
정민 지음 / 보림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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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히지만 아주 유익한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은 이미 오래전에 같은 저자가 쓴 『한시 미학 산책』에서 일별한 적 있다. 같은 내용을, 정확하게 말하면 『한시 미학 산책』에 실린 앞부분을 쉽게 풀어 썼다. 저자는 딸 벼리가 한자에 눈떠가는 모습을 보며 아이를 위한 선물로 이 책을 마련했다고 한다. 어린이에게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쉽게 읽히는 장점이 있다. 요즈음 이런 방식의 책들이 많이 나오는 모양이다.

 

내가 이런 형식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수잔 와이즈 바우어가 쓴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 역사 이야기』였다. 적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옛날이야기를 읽듯이 읽을 수 있었다. 이후에 이와 비슷한 형식을 가진 책들이 유행하기 시작한 듯하다. 시를 어려워하고 한시라면 더더욱 어려워할 뿐만 아니라 외국어 대하듯 하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몹시 다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시에 관심을 가지고 한시를 읽으면서 아이의 한자실력도 함께 늘어날 것을 염두에 두었는데, 사실 이 책은 한시를 읽는 독자만이 아니라 시를 창작하는 사람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한시를 예로 들었지만 한권의 시론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울림이 있는 말’, ‘간결한 것이 좋다’ 등 소제목만으로도 시를 지을 때 명심해야 할 내용들이 모두 보인다. 특히 ‘절벽 옆에 말을 세우니 몸이 너무 피곤해서/나무에 시를 쓰는데 글자가 써지지 않는다’를 ‘절벽 옆에 말을 세우니 몸이 너무 피곤해서/나무에 시를 쓰는데 글자를 반만 쓰고 말았다.’로 한두 자를 바꾸어 전혀 다른 맛이 나게 고치는 부분,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를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로 절반으로 줄이면서 의미는 더욱 풍성하게 하는 방법을 눈여겨보았다.

 

창작자는 피로써 피를 씻듯이 다른 사람의 시를 읽게 되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시인만의 새로운 시각을 갖기 위해 애쓰다보면 초심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 잃는 것 까진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지금 어디서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게 될 때, 빛나는 형용사만을 찾아 시선이 흔들릴 때, 시를 보는 눈은 한없이 높아져서 정작 자신은 시를 쓸 수 없게 되었을 때, 퇴고를 위한 자기검열의 기준이 모호해 졌을 때, 이 책의 내용들이 도움이 될 듯하다. 책의 뒷부분에는 본문에 인용된 시의 원문을 함께 수록했고, 각 저자들의 간단한 소개도 곁들였다.

 

최근 읽고 있는 『잘라라, 기도한 그 손을』의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몇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어 원문을 거의 외우다 시피 한다고 한다. 독서를 혁명이라고 말하는 그는 한 권의 책을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그것의 내용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며, 그것은 또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한번 읽은 책은 몇 권되지만 두 번 읽은 책은 두어 권 뿐이며 반복해서 읽고 또 읽은 책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시 그의 말을 빌리면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은 명백하게 어리석은 일이지만, 우리들은 이 어리석음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 역시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어리석음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시 미학 산책』을 읽을 때 보다 오히려 가슴에 와 닿거나 깨닫게 되는 부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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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2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24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름과 경이 I21총서 1
이영광 지음 / 천년의시작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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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인연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악연일 수도 호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사놓고 몇 년 째 읽지 않는 책이 있다면 악연일까? 호연일까? 출간과 동시에 구입해서 바로 읽었다면 그건 호연일까? 악연일까? 끙끙대며 읽었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그건 악연일까? 호연일까? 이상한 몰입의 힘에 이끌려서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자 진이 다 빠지고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건 호연일까, 악연일까?

 

최근 이런 책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출간 소식은 출판사의 개인 메일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서점에 깔리기도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시름과 경이 』라는 제목에 기대어 시에 대한 이야기겠거니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마도 저자가 시인이라는 믿음도 있었겠고 그가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서 소개한 두보의 시에 대한 기억도 있었으리라.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423413&cloc=olink|article|default

 

저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공부하여 쓴 글과 시와 시 쓰기에 대한 글을 골라 묶’은 책이다. 본문은 총 네 부분으로 나뉘었다. 1부의 글에서는 시의 형식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특히 소월시의 수미상관을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으로 진단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2부는 무속의 세계로 미당의 시를 해석하고 있는데 묘한 설득력을 갖는다. 3부는 오탁번, 조정권 등 시인들의 시세계를 다루었다. 오탁번 선생의 ‘폭설’이나 ‘굴비’처럼 적나라한 욕이나 성애의 내용을 담고 있는 시들이 사람들에게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 늘 궁금했었다. 나는 있는 사실을 말해도 외설이 되고 음담이 되는데 말이다. 저자는 이런 나의 궁금증을 마치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이 알려주었다. 조정권론에서 저자는 ‘미묘하고 역동적인 분열의 느낌’이 눈길을 끈다고 했다. 내가 시집 『고요로의 초대』를 읽었을 때의 느낌과(http://blog.aladin.co.kr/734872133/4590458)’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 ‘보유’라는 제목으로 5편의 산문을 묶었다. 바로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책과의 인연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세 권의 시집을 낸 사람으로서, 시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시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곱씹으며 나는 참담한 마음으로 동틀 때까지 잠들 수 없었다.

 

시의 황홀경을 맛본 자가 다시 그것에 접하려 할 때, 아마도 그 정신의 상태는 모종의 비상한 ‘몰입’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몰입이란 정신이 딴 데로 가 버렸다는 것, 그는 현실이 아닌 곳에 자기 아닌 다른 이로 다가가서, 없던 말을 얻어 와 이곳을 충격에 빠뜨림으로써 낯선 진실을 드러내는 자이다. 이처럼 시는 어떤 특별한 몰입을 통해, 그러니까 “모든 감각들의 이치에 맞는 착란(랭보)”을 통해 만나게 되는 특별한 순간이고, 특별한 순간에 태어나는 낯선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시 쓰기는 어렵다. 제 감각과 의식을 지우면서, 그러나 지성의 컨트롤타워를 유지한 채 미쳐야 하기에, 시에 미치는 것과 미치지 못해 괴로워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265쪽)

 

이렇게 시는 어디선가 온다. 의식 하의 몸의 소리가 의식에 남기는 흔적이 곧 시의 순간일 것이다.……그러니 시에 닿으려면 아예 그것을 의식 차원에서는 잊고 있거나, 아니면 찌른 자리를 또 찌르듯 무의식의 작동 메커니즘에 다시 몸을 맡겨야 한다. 그렇게 시인은 괴롭게 넋을 잃는다. 넋을 잃다니, 하면서도 시인은 그렇게 제 몸의 시간의 수라장을 건너간다. 넋을 잃으면 많은 것을 더 잃겠지. 생활의 균형, 페르소나의 분실 같은 것. (-270쪽)

 

 

 

‘책은 사람을 비추는 종이거울’이라고 썼던 적이 있었다. 시를 흉내 내기 시작하면서 이제야 비로소 내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을 만난 것 같다. 시인의 종이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초라하기가 비에 젖은 닭 같다. 시와의 치열한 만남 앞에서 나는 헐겁기가 터진 그물망 같다. 이렇게 부끄러워 본 적 없었다. 아니 창피했다. 나는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흉내 내는 얼치기 독자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잔뜩 기가 죽어서, 때로는 질투에 떨면서 인정해야했다. 카프카였던가?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한 이가? 나는 지금 카프카가 말하는 도끼를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데 이 책은 내게 과연 악연일까, 호연일까?

 

갑자기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다. 대한민국의 국가 대표급 시인이 낸 책인데 어째서 그 흔한 보도자료 한 장이 없는 걸까? 네이버 책에서는 아예 검색도 안 된다.

“시는? 정신을 조금만 잃고, 삶은?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라더니, 시인은 아예 삶에서 정신을 놓아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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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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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는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말을 웅변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일은 ‘이것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것을 매 문장마다 확인해야 하는 아주 불편하고 고단한 작업이다. 작가가 자신을 이런 지옥에 살게 만든 나치즘에 대한 원한이나 분노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을 담담하게 적고 있으므로 함께 분노하거나 공감하지도 못하는데도 그렇다.

 

읽는 내내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 또 비참해질 수 있는지 그 바닥을 확인하게 되고 끝내 인간에 대한 환상을 접게 만든다. 그러므로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 있지?라고 되묻거나 책 속의 내용을 복기하는 일은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책을 덮는다고 기억마저 덮혀지랴만- 인간에 대한 모든 환상을 깨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인간이라고, 가장 비현실적인 일은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인간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피상적이고 환상적인가를 다시 생각해야한다.

 

레비는 왜, 어쩌자고 이런 글을 썼을까.

 

“코만도의 동료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그러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 내가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침에 내가 사나운 바람을 피해 실험실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내 옆에 한 친구가 등장한다. 내가 휴식을 취하는 순간마다, 카베에서나 쉬는 일요일마다 나타나던 친구다.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 -216

 

프리모 레비가 포로수용소의 노동현장에서 실험실로 배치를 받은 후에 적은 글이다. 매일 매순간 굶주림과 추위와 혹독한 노동으로 인해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릴 때 인간은 자살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끊임없이 죽음이 닥쳐오기 때문에 죽는다는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살을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사치이고, 살려는 본능만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다. 잠깐이나마 이런 상황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을 때 인간은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가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

 

죽은 자들은 그 시대를 증거할 수는 있지만 증언할 수 없다. 살아남은 자만이 죽은 자를 대신해 증언할 수 있다. 레비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대신해 증언하기 위해 썼다. 그러나 1987년 끝내 그는 생을 마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운이고 적절한 시기에 아팠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어쨌거나 극한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던 그가 아파트 4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이것이 인간인가』에 실린 쁘리모 레비의 연보에는 자살이라는 말은 없다. 대신 “1987년 3월 <주기율표> 프랑스어판과 독일어판 출판, 레비는 외과 수술을 받는다. 4월 11일 토리노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그는 왜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물어야했을까? 단지 아우슈비츠에 대한 고발과 폭로를 위해서였을까? 게르만족은 유대인보다 우월하다는 민족우월주의,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라 노예이며 짐승이라는 사상의 희생자였음에도 왜 그는 인간으로서 수치심을 느껴야했을까? 그리고 그는 왜 자살했을까? 나의 이런 질문에 레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을 열정적으로 실행에 옮긴 아이히만에게서 세 가지의 무능성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었다. 나의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이히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내 안의 무능성에 대해 물어야할 때인 듯하다. 그리고 이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함께 해야 할 질문이다.

 

 

눈여겨 봐둘 것

1.『이것이 인간인가』 신곡의 플롯을 따르고 있다. 지옥-연옥-천국으로의 이행을 지옥과 다름없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강제 이송-실험실로의 재배치-이탈리아로의 극적인 생환과 맞물려 있다.

 

 

2.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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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2-06-05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저는 기억이 어렴풋한데 레비가 어린 청년에게 단테의 신곡을 설명해 주던 그 대목이 떠올라요. 프리모 레비의 자살은 결국 '이것이 인간인가'에 대한 절망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어요. 살아남아도 인간에 대한 실망은 끝까지 남는. 반딧불이님이 얘기해 주신 '무능감'이 와 닿아요.

반딧불이 2012-06-05 15:07   좋아요 0 | URL
네..프랑스 청년 장에게 신곡 지옥편 제 26곡을 읽어주죠.
저도 그 부분 때문에 플롯을 눈여겨 봤어요. 그런 상황속에서 문학작품이 위로가 되는것이 놀랍기도 했구요.
'무능감'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참..얼마전 올려주신 리뷰에서 중년여성과 사춘기 소녀의 사랑감정에 대한 얘기를 읽고 고개를 주억거렸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6-05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독일보수우파의 과거사 왜곡작업을 다룬 책들을 본 뒤에 프리모 레비를 알게 되어 레비가 왜 자살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하더라고요.80년대 중반에 특히 독일우파의 역사왜곡이 세력을 얻었으니까요.

아마 지금 레비가 독일의 현실을 바라본다면 더 한숨을 쉬고 있을 겁니다.올해 초 시사주간지 슈테른에서 독일 젊은이들의 역사관을 조사한 결과가 나왔는데 독일이 과거사 때문에 다른 민족에게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응답이 65%에 이르더군요.우리나라도 독일 보수우파의 과거사 왜곡 작업방식을 면밀히 연구해야 국내의 왜곡세력들과 제대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반딧불이 2012-06-07 01:0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레비의 자살 이유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결국 내 안의, 혹은 우리 안의 문제로 환원될 수 밖에 없더라구요.

과거사에 대한 책임감 문제는 놀라운 결과네요. "집단적인 유죄의 고백은 범죄자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탁월한 방어수단"이라는 아렌트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아요. 유익하 말씀 고맙습니다.

루쉰P 2012-11-20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군대에서 읽었던 책이에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구요. 이 책을 시작으로 서평을 쓰는 것을 시작했었죠.
그의 죽음의 이유는 저도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서경식 교수의 '프리모레비를 찾아서'라는 책도 참으로 좋아하며 읽었죠. ^^
반딧불이님 잘 지내시죠. 저도 이제 1년만에 서재에 다시 왔어요. 푸하하하 ^^;;

반딧불이 2012-11-21 00:28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가끔 책주문 하러 와서 들려보았지만 썰렁하던데 다시 오셨다니 반갑습니다. 자주 오진 못하지만 종종 뵙기를 바래봅니다. 기온이 많이 내려가나봐요. 건강한 겨울 나시기 바랍니다.
 

 

지난 일요일 오전 6시가 조금 지난 시간. 세곡동에서 택시를 타고 사당역까지 갔다.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중교통편도 모르고, 7시에 출발하는 창녕행 답사버스에 늦을세라 불안한 마음 때문에 탄 택시였다. 날씨가 잔뜩 흐려 있어서 일기예보가 궁금했던 나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 소리는 정말 작았다. 하지만 채널을 확인하지 않아도, 내용을 듣지 않아도 그 격앙된 어조만으로도 금방 그것이 특정 종교 방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기독교 방송인가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기사는 “예, 작게 듣고 있다가 손님이 싫어하면 바꿔요.”라며 볼륨을 조금 높였다. 일기예보를 듣고 싶어서 물어보는 나를 기사는 기독교에 관심 있는 것으로 오해했던 모양이다. 교회 다니느냐고 묻는다. 나는 안 다닌다고 했다. 절에 다니느냐고 재차 묻는다. 안 다닌다고 했다. 일요일마다 가서 ‘좋은 말씀’을 들어야하는데 일 때문에 더러 빠진다고 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이렇게 라디오로 ‘말씀’을 듣는다고 하며 볼륨을 더 높인다. 나는 기분이 좀 안 좋아졌다. 나는 오늘 비가 올지 안 올지 좀 궁금할 뿐 그가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듣는 것에 내가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돈 내고 택시를 탔지만 라디오채널 선택권까지 내 몫으로 챙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기사가 두 번씩이나 볼륨을 높이면서 자기는 몸에는 성령이 들어있고 그것이 주는 기쁨으로 충만하고.......교회에 안다니는 사람은 그런 것을 모르고....... 블라블라...

 

나는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지난밤 늦게까지 『언더그라운드』를 읽으면서 찾아보았던 옴진리교 교주의 모습이 떠오르며 혐오감이 확 밀려왔다. 기사는 자신의 신념을 내게 계속해서 불어넣느라 내가 불쾌하든 말든, 혐오감을 느끼든 말든 개의치 않고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수양이 부족한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가 있었겠는가. 차가 예술의 전당을 지날 무렵,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가끔 불경도 보고 성경도 본다. 나는 예수님을, 성경을 마주하고, 아주 개인적으로, 1대1로 만나고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시라고. 택시비가 9300원인가 나왔는데 내게 만 원짜리가 없었다. 미안해하며 오만 원 짜리를 내밀자 잔돈을 거슬러주면서 계속 무어라 ‘말씀’중이시다. 문 열고 내린 내 손으로 만 원짜리가 먼저 건너오고 천 원짜리가 건너오고 동전이 마지막으로 내 손에 건너오기까지 아저씨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는 일용할 양식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일용할 환상을 내려 달라고 기도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댓가로 자아의 일정부분을 지불했을 것이다.

 

창녕에 도착해서 관룡사에 올랐더니 여기도 ‘말씀’ 중이시다. 법당에서 조근조근 법문을 하시면 좀 좋으랴만,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말씀’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찌직 거리는 기계음 때문에 절간이 절간이 아니다. 잠시 스쳐가는 내 미간이 이렇게 찡그려지는데 산 속의 동식물은 어떠하겠는가. 어째서 도시나 산 속이나 이렇게 ‘말씀’은 넘쳐나는가?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말인가? 나는 돌아와 아래와 같은 시를 몇 번씩이나 되풀이 읽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

 

 

꾸오바디스/이영광

 

 

 

날 사탄이라 욕하고 행패 부렸던 택시를 다시 타고 말았다.

나도 점잖진 못했지만,

소규모 베드타운의 비극이다.

그자, ‘베드로맨’은 이제부터 잘 좀 지내보자고

아, 원수를 사랑하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웃었다.

나는 정신을 잃느니 그냥 사탄하겠다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촛불도 없이 헤매고 다니는

당신 교회의 ‘우리 장로님’이라는 이나 얼른 좀 사랑해주시라고 말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원수들이 함께 사는 곳이야말로 지옥이고

원수를 만들고서야 사랑을 싸지르는 지복의 착란 속에 사느니

차라리 선량한 백치가 되겠으며,

당신이 순교자가 될지 안될지 알 도리는 없지만

날 지옥에서 내려준다면, 백번 지각을 하더라도

깁스한 다리를 끌고 걸어서 ‘로마’까지 가겠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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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5-17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종교계에서 한번씩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터져 나오게 되어서 그런지
요즘 종교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시선이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거 같아요.
그리고 너무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를 타 종교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좋지 못하고요..
종교에서 강조하는 '말씀'이 옳은지 아닌지 구분해서 믿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


반딧불이 2012-05-18 09:37   좋아요 0 | URL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종교단체의, 또 몇몇 교인의 문제겠지요. 그것이 불교든, 기독교든...싸잡아서 문제삼을 수는 없다고 봐요.^.^

쉽싸리 2012-05-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종교의 장점을 얘기하면서 다양성을 많이 꼽는데요. 이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건 아닌지 싶어요.
교회와 절등이 너무 외세 확장에만 몰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교회와 절은 너무 가까이 있고, 어디 먼 산속에라도 들어가야지 싶어요...
다가오는 초파일에 연등이라도 제대로 바라 볼런지...

반딧불이 2012-05-19 00: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절은 산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나다보니 교회처럼 마을 한복판에 내려와 있는 절도 있더라구요.
저는 연등도 바라보고 크리스마스 트리도 바라보고 다만 구원은 찌질한 저 자신에게서 구하려구요.

글샘 2012-05-1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국에 가면 술도 없고 여자도 없고... ㅋ 쾌락도 없을 거라고 지옥이 낫지 않을까? 하던 강유원 샘 유머도 있었는데...
요즘 높은 분들이 사시는 거 보면, 천국에 가면 더 고급 술집과 이쁜 여자들이 많을 거 같아요. ㅋ 천국으로 갈까봐~~

반딧불이 2012-05-19 01:00   좋아요 0 | URL
ㅎㅎ 글샘님께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있는 '아픈 천국'을 권해드리고 싶은뎁쇼!

oren 2012-05-25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권하는' 신앙인들을 만나는 건 딱 질색인데, 여전히 주변에는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나 성당에 다니는 분들이나 절에 다니는 분들이 참 많기도 많더군요. 저 역시 개인적으로는 성당이나 교회나 절이나 스스럼없이 들락거리는 편인데, 그래도 고즈녁한 풍광 속에 자리잡은 사찰에 조금 더 마음이 끌리는 느낌도 가지고 있답니다. 올해 봄에는 영월 법흥사와 양양의 낙산사를 '여행길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낙산사에 가서는 난생 처음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연등'을 밝혀달라고 5만원권 2장을 기꺼이 쓰고 왔답니다.('연등 접수'도 낙산사 원통보전은 벌써 마감되었기 때문에 보타전에 1년간 달아준다고 하더군요.)

반딧불이 2012-05-26 01:39   좋아요 0 | URL
저는 시어머니의 강권에도 오로지 할렐루야로 20년을 넘게 맞서고 있는 나쁜 며느리어요. 구원은 바란적도 없고 헌금도 시주도 한번 한 적 없는 저는 삶이 곧 지옥이고 천국이려니 생각하고 살려고요.
음...저도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연등을 밝힐 날이 있을 것 같아요. oren님 말씀 참고삼아 일찍 신청해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