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

그대 가슴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에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한 시인이 있었다. 그 섬은 어떤 섬이었을까? 아마도 사람들이 쉬이 드나들지 못하는 섬이었을 것이다. 그 섬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래도 였을 것이다. 이렇게써도 저렇게 써도 말장난 같은데 말장난으로 끝낼 수 없는 마음 아픈 섬.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도에 나도 가끔 슬픔의 닻을 달고 간다. 그래도에서 만나는 당신은 그래도 다행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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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외롭다 문학동네 시인선 34
김승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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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을 묶으려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시가 몇 편이나 실려 있는지 배열은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졌는지 가독성은 얼마나 되는지 해설은 누가 썼으며 어떻게 접근했는지 등등. 시집 한 권에 최소 50편 이상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시편들은 1, 2, 3부 로 나뉘어 실린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단위로 나누었을 때 그 기준이 뭘까 궁리하며 읽게 된다. 어떤 시집은 명확하게 그 구분이 보이기도 하고 어떤 시집들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르겠다. 시인만이 아는 어떤 분류의 기준이 있는 것인지 단지 가독성을 위주로 배열을 한 것인지 모호하다. 별 시들이 균등한 무게를 지니고 있을 때도 있고,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의 무게중심이 맞지 않아 기울기가 심하거나 용두사미 격인 시집도 보인다.

 

희망이 외롭다는 김승희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은 총 4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유난히 그 변별성이 눈에 띄는 시집이다. 시각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그 특징이 한눈에 드러난다. 없어도 그만이지만 있으면 더욱 의미가 살아나는 우리말의 부사어를 소재로 한 1,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생각나게 하는 서울의 우울연작이 실린 2, ‘모짜르트의 엉~덩이연작을 실은 3, 단 세 편의 시를 실었을 뿐이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이 시집을 다시 보게 만드는 4부로 나뉘어져있다. 각 부에서 표제작을 꼽으라면 1부에서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2<서울의 우울 4>, 3<모짜르트의 엉~덩이 1>, 4<, 정저(井底), 덕혜옹주를 고르겠다. 2부와 3부의 두 편만을 옮겨놓는다.

 

서울의 우울 4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없으면 자살로 본다.

법의 말씀이다

어느 자살도 깊이 들여다보면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너무 많다

심지어는 내가 죽인 사람도

아주 많을 것이다.

자기 손으로 밧줄을 목에 걸었다 할지라도

모든 죽음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안다

자살도 타살도

금환일식이다

 

 

모차르트의 엉~덩이 1

모차르트의 손가락

신의 물방울을 우리 가슴에 떨어뜨려주는

손가락,

잘츠부르크 궁정에서 열리는 연주회 직전

콘스탄체와 음란한 농담을 하느라고

연주회에 늦은 모차르트,

내가 고용한 하인 때문에 내가 왜 망신을 당해야 하냐고

대주교로부터 야단을 맞고 나가다

문 앞에

자기 음악을 듣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대주교에게 엉덩이를 흔들며

엉덩이로 인사를 하고 나가는 모차르트,

게임에 진 벌칙으로

엎드려서

혹은 뒤로 눕혀져서

두 눈을 가리고 피아노를 치는 모차르트의 손가락,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하는 손가락,

파파게노 파파게나를 부르는 손가락,

한없는 기쁨에 가득 차서

무엇인지도 모를

신의 즐거움에 항상 참여하며

들떠서 피아노를 치다가

일어나 엉덩이를 들썩 보여주는 모차르트,

황제의 조카 엘리자베스의 가정교사를 구한다며

작품 악보를 가져와보라는 시종장의 말에

내가 최고인데

왜 음악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심사할

음악을 제출해야 하냐고 항의하는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엉덩이는 바로 그 항의다,

눈물이다,

떠들썩한 웃음이다,

가발 사회에 던지는 천진의 폭탄이다

코앞에서 빵~ 터지는 찬란한 방구다

 

빙하에 내리는 비라는 허윤진 평론가의 글 또한 이 시집의 무게를 더하는데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시와 해설이, 시인과 평론가가 이렇듯 서로를 마주보고 서로를 견제하며 상생하고 있는 시집을 이전에 내가 보기나 했던가. 몇 번씩 통독하게 하는 시집이다. 내가 무언가를 덧붙인다는 건 사족에 불과하므로 해설을 옮겨놓는다.

 

희망이 외롭다1부에 수록된 대부분의 시들에서 시인은 한국어의 이삭을 줍는다. 그녀가 주운 이삭들은 비로소’ ‘이미’ ‘아랑곳없이’ ‘그래도’ ‘부디’ ‘하물며와 같은 부사들이다. 문법에 맞는 문장을 만드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문장에 적절한 활기를 부여하려면 없어서는 안 되는 말들이다. 특히나 명사와 형용사보다는 동사와 부사가 언어의 정취를 결정하는 한국어의 세계에서 부사는 동사를 단장하는 마지막 손길 같은 것이다. 시작(詩作)에 있어서 한 번도 탐미주의자가 아닌 적 없었던 김승희에게 부사는 헤어짐의 순간까지 손을 놓고 싶지 않은 연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삭을 줍기 위해서는 허리를 숙여야 한다. 국어사전의 한 귀퉁이에서, 소박하게 낡아가는 단어들 앞에서 기꺼이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이 시인의 자세에서 나는 윤리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긴 시간 동안 한국어를 갱신해 온 이 놀라운 시인이 한낱 단어들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풍경. 자기 몫의 아우슈비츠를 버텨내는 행상 여인처럼 이 시인은 이렇게 자기 몫의 자세를 감당해왔을 것이다. 시인이 언어의 재벌이 아니라 언어의 빈자(貧者)라는 겸허한 인식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도저하다

시인은 자신을 구원할 한 줌의 언어를 온몸으로 갈구하는 사람이다. 언어의 섬광이 자신의 골수와 영혼을 꿰뚫고 뒤흔들어 영혼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때까지, 도래할 말을 기다리며 눈물 젖은 얼굴로 온밤을 새우는 사람이다. 수혈되지 않는 언어를 기다리며 매일의 빈혈을 가까스로 버티는 사람이다. 그녀는 상에서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 같은 말들을 제발, 부디, 달라고, 부끄러움 없이 손을 내밀고 신에게 언어를 구걸한다. 부지불식간에 언어의 아사(餓死) 를 겪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리하여, 이 비참한 북극으로, 37.5도의 말이 오리라. 우리에게는 충분히 이른 비다. 해설13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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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 - 제6회 채만식문학상, 제10회 무영문학상 수상작
전성태 지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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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늑대9편의 단편이 실린 이 책의 공간적 배경은 몽골이다. 작가가 몽골에 체류하면서 쓴 작품들이라고 한다. 나는 여러 작품들 중 늑대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늑대의 속성을 빌어 자본주의의 속성과 인간의 욕망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이곳에 실린 작품들 중 단연 으뜸이다. 문체 형식 의미 등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이 없다.

 

늑대는 어쩌면 악령이 숨을 불어넣어 태어난 짐승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맹수들처럼 주린 배만 채우고 물러나면 족하나 늑대는 천성이 그러지를 못합니다. 하룻밤에도 수백 마리 양들의 숨통을 끊어놓습니다. 살생을 즐기는 이빨을 갖고 나지 않았다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살아 숨 쉬는 일만으로도 죄업을 늘리는 짐승. 그러니 불법으로도 구제할 방도가 없습니다. 큰 입 가진 이 짐승은 분명 인연의 모순이며 혼돈 그 자체입니다” - 42

 

입의 크기로 말한다면 자본의 입을 당한 것이 무엇이 있겠나. 사회주의 체제가 막을 내리고 이제 막 자본주의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몽골 땅에서 자본의 입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어느 것도 없다. 도시에는 물론 도른 고비에도 아스팔트가 자본주의의 혓바닥처럼 깔리기 시작했다. 혀가 길어질수록 초원은 먹힐 것이고 자본은 몸을 부풀릴 것이다. 자본은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끝내는 인간마저 집어 삼킬 것이다. 작품속에는 이러한 과정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면서 동성애까지 더해 밀도 있게 그려지고 있다.

 

이소설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챕터 마다 각기 다른 화자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문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를 사용하고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자가 모두 다르다. 특히 마지막 한 챕터(챕터라는 말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지만 달리 무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에서는 한 문단마다 화자를 달리 하면서 소설을 마무리 짓고 있다. 심지어 그믐밤에 죽은 늑대까지도 화자다. 꼼꼼히 읽지 않으면 정말 헛갈리지만 화자가 누구인지를 새기면서 읽으면 작가가 얼마나 이 작품을 공들여 썼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몽골여행을 다녀와서 다시 읽으니 책의 내용이 돋을새김 되는 기분이다. 막막했던 초원의 풍경이 그려지고 그들의 옷차림, 음식, 잠자리 등이 더욱 선명해졌다. 무엇보다도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 입체감이 느껴진다.

 

물론 이런 생각을 처음 하는 것은 아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고 그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가마쿠라에 다녀왔을 때 이미 경험을 했었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었던 해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소세키 문학관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고 정말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발코니에 오래 서있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하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가져야하는 배경지식은 대체 얼마나 되어야 하나.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 작품을 온전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나 보는 만큼 안다는 말은 둘 다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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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맹인 안마사

심재휘

상해의 변두리 시장 뒷골목에

그의 가게가 있다

하나뿐인 안마용 침상에는 가을비가

아픈소리로 누워 있다​

주렴 안쪽의 어둑한 나무 의자에 곧게 앉아

한 가닥 한 가닥

비의 상처들을 헤아리고 있는 맹인 안마사

곧 가을비도 그치는 저녁이 된다

간혹 처음 만나는 뒷골목에도

지독하도록 낯익은 풍경이 있으니

손으로 더듬어도 잘 만져지지 않는 것들아

눈을 감아도 자꾸만 가늘어지는 것들아

숨을 쉬면 결리는 나의 늑골 어디쯤에

그의 가게가 있다

지난 7월 마지막주를 방콕에서 보냈다. 관광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태국엔 음식점 만큼이나 마사지 샵이 널려 있다. 그러나 시에서 보이는 풍경을 방콕에서는 보지 못했다. 대부분 기업화 되어 있어 메머드급 건물 전체가 마사지샵인 곳도 있었다. 난생 처음, 남자의 손을 빌려 전신 오일 마사지를 받았다.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함께간 일행이 저녁마다 마사지를 예약해 놓는 바람에 살이 아프도록 마사지샵을 전전하다보니 맨처음 몸을 맡겼던 그 마사지사가 새로새록 사무친다. 몸 구석구석에 젖어들던 지극한 정성. 내가 무슨 복을 지어 이런 황송한 손길의 마사지를 받았는가 싶다. '숨을 쉬면 결리는 나의 늑골 어디쯤에' 큰 빚이 있다.

중국인 맹인 안마사 -

심재휘 지음/문예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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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살의 인터뷰

천양희

나는 오늘 늦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세월은 피부의 주름살을 늘리고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었냐고

입술에 바다를 물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노을이며 파도며

다른 무엇인가 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늘 실패했거든요

정열의 상실은 주름살을 늘리고

서쪽은 노을로 물들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았냐고

해송을 붙들고 그가 물었을 때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당신은 어느 때 우느냐고

파도를 밀치며 그가 물었을 때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할 때 운다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일까 말까 한 작은 간이역이 행복이었거든요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치며

마흔살의 그가 말했습니다

떨어진 꽃잎 앞에서도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참 좋은 인터뷰였다고

<현대시학> 2014.7​

시를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또 거부할 수도 없다. '일흔'이라는 숫자가 믿기지 않아 확인해보니 시인이 1942년 출생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 희망을 버리니까 살았다, 행복을 알고도 가지지 못할 때 운다." 일흔의 나이로 요약한 생이 담담한듯 하면서도 절절하다. 연을 나누지 않고 빼곡히 적은 형식이 목울대를 넘어오는 눈물을 꾸욱 꾸욱 누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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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5-01-0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찡 `울림이 있어요.

반딧불이 2015-01-12 19:01   좋아요 0 | URL
네..한살 한살 더할 때마다 울림이 배가 될 것 같아요. 답이 늦어 죄송해요 블랑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