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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1일부터 6일까지 서울에서는 “2013 서울 탱고 페스티벌이 열렸다. 나는 처음 경험하는 국제적인 행사였다. 아르헨티나에서 세 쌍의 마에스트로가 왔고 많은 외국인들이 오직 춤을 추기 위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날아들었다. 뉴질랜드, 하와이, 대만, 베이징, 일본, 홍콩 등에서 온 다양한 외국인들을 접하면서 그들에게 서울 탱고 페스티벌이 상당히 인기 있는 행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든 얼마나 나이를 먹었든 어떤 직업을 가졌든 아무런 편견 없이 오직 탱고라는 세계 공용어로 서로 소통하고 있었다. 그들은 밤을 새워 쉬지 않고 춤을 추었다.

 

마에스트로들의 모든 동작은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웠고, 역동적이면서도 부드러웠다. 공연을 하거나 강습을 할 때 그들은 진정으로 즐기고 있었고 때문에 얼굴에서는 행복한 표정이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춤이 끝나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쪽쪽 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하고, 엉덩이나 따귀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해서 보는 이들도 즐거웠다. 세 쌍의 마에스트로들은 성격이 모두 달라보였다.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중후하면서도 친근한 호르헤와 마리아 (Jorge Dispari &Maria del Carmen Romero), 춤은 물론이려니와 몸매며 얼굴까지 아름답고 우아한 하비에르와 노엘리아(Javier Rodriguez &Noelia Barsi), 귀여운 악동 커플 같은 옥타비오와 꼬리나(Octavio Fernandez &Corina Herrera). 그들의 춤은 그들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문득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호르헤의 강습 두 개(Milonga con Traspie, Giro Combination), 하비에르의 강습 두 개(Milonga con Traspie, Adornos)를 들었다. 예민하면서도 상냥하고 섬세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하비에르는 밀롱가를 출 때는 탱고를 잊어버리라는 말로 두 춤의 변별성을 확실히 해주었다.

 

마에스트로들 중 가장 연장자인 호르헤 디스파리 (Jorge Dispari)는 살사나 재즈의 동작이 탱고에 묻어나는 것을 경계했다. 특히 그가 한 말이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 누구나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며 놀았다는 것, 그때는 틀린다는 것을 몰랐으며 설사 틀렸다고 해도 즐거웠다는 것, 하지만 지금의 우리들은 틀릴까봐 걱정되어 즐기지도 못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네 차례의 강습과 두 번의 밀롱가에 참여하면서 나는 체력적 한계와 더불어 노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무슨 수영을 독립운동 하듯이 하느냐고 말하던 수영코치도 떠올랐고, 자기는 도저히 가르칠 수 없으니 다른 사람한테 배우라던 스키 코치, 도대체 몇 남자를 상대해야 직성이 풀리겠냐며 내가 포핸드로 공을 받아내는 동안 팔굽혀 펴기를 몇 개씩 하던 스쿼시 강사도 떠올랐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노는 일을 절체절명의 일을 하듯이 해왔던 것 같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사는 세계를 반영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세대였던 것이다. 개인의 욕망이나 쾌락보다 역사적 사명이 우선이라고 배웠고, 몸을 쓰는 일을 경멸하는 정신적 우월주의 시대를 살아왔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즈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파트너가 설명을 듣는 동안 쿠션을 껴안고 춤을 추는 사람, 음악이 흘러나오면 온몸으로 반응하며 흥겨워 하는 사람, 동작 하나하나가 분명하고 단정한 사람, 춤추고 있는 동안 얼굴이 행복으로 물드는 사람. 이렇게 존재 자체만으로도 타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내 가슴은 목련이 벙글 듯이 사랑스러움으로 뻐근해진다. 아마도 나는 오래 이런 사람의 주위를 공전할 것이다. 태양계에서 퇴출당한 명왕성처럼 춥고 어두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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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오전 6시가 조금 지난 시간. 세곡동에서 택시를 타고 사당역까지 갔다.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중교통편도 모르고, 7시에 출발하는 창녕행 답사버스에 늦을세라 불안한 마음 때문에 탄 택시였다. 날씨가 잔뜩 흐려 있어서 일기예보가 궁금했던 나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라디오 소리는 정말 작았다. 하지만 채널을 확인하지 않아도, 내용을 듣지 않아도 그 격앙된 어조만으로도 금방 그것이 특정 종교 방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기독교 방송인가요?’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기사는 “예, 작게 듣고 있다가 손님이 싫어하면 바꿔요.”라며 볼륨을 조금 높였다. 일기예보를 듣고 싶어서 물어보는 나를 기사는 기독교에 관심 있는 것으로 오해했던 모양이다. 교회 다니느냐고 묻는다. 나는 안 다닌다고 했다. 절에 다니느냐고 재차 묻는다. 안 다닌다고 했다. 일요일마다 가서 ‘좋은 말씀’을 들어야하는데 일 때문에 더러 빠진다고 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이렇게 라디오로 ‘말씀’을 듣는다고 하며 볼륨을 더 높인다. 나는 기분이 좀 안 좋아졌다. 나는 오늘 비가 올지 안 올지 좀 궁금할 뿐 그가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듣는 것에 내가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돈 내고 택시를 탔지만 라디오채널 선택권까지 내 몫으로 챙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기사가 두 번씩이나 볼륨을 높이면서 자기는 몸에는 성령이 들어있고 그것이 주는 기쁨으로 충만하고.......교회에 안다니는 사람은 그런 것을 모르고....... 블라블라...

 

나는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지난밤 늦게까지 『언더그라운드』를 읽으면서 찾아보았던 옴진리교 교주의 모습이 떠오르며 혐오감이 확 밀려왔다. 기사는 자신의 신념을 내게 계속해서 불어넣느라 내가 불쾌하든 말든, 혐오감을 느끼든 말든 개의치 않고 목소리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수양이 부족한 내가 언제까지 참을 수가 있었겠는가. 차가 예술의 전당을 지날 무렵,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말했다. 나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가끔 불경도 보고 성경도 본다. 나는 예수님을, 성경을 마주하고, 아주 개인적으로, 1대1로 만나고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시라고. 택시비가 9300원인가 나왔는데 내게 만 원짜리가 없었다. 미안해하며 오만 원 짜리를 내밀자 잔돈을 거슬러주면서 계속 무어라 ‘말씀’중이시다. 문 열고 내린 내 손으로 만 원짜리가 먼저 건너오고 천 원짜리가 건너오고 동전이 마지막으로 내 손에 건너오기까지 아저씨의 ‘말씀’은 계속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는 일용할 양식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일용할 환상을 내려 달라고 기도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 댓가로 자아의 일정부분을 지불했을 것이다.

 

창녕에 도착해서 관룡사에 올랐더니 여기도 ‘말씀’ 중이시다. 법당에서 조근조근 법문을 하시면 좀 좋으랴만,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말씀’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찌직 거리는 기계음 때문에 절간이 절간이 아니다. 잠시 스쳐가는 내 미간이 이렇게 찡그려지는데 산 속의 동식물은 어떠하겠는가. 어째서 도시나 산 속이나 이렇게 ‘말씀’은 넘쳐나는가?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말인가? 나는 돌아와 아래와 같은 시를 몇 번씩이나 되풀이 읽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

 

 

꾸오바디스/이영광

 

 

 

날 사탄이라 욕하고 행패 부렸던 택시를 다시 타고 말았다.

나도 점잖진 못했지만,

소규모 베드타운의 비극이다.

그자, ‘베드로맨’은 이제부터 잘 좀 지내보자고

아, 원수를 사랑하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웃었다.

나는 정신을 잃느니 그냥 사탄하겠다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촛불도 없이 헤매고 다니는

당신 교회의 ‘우리 장로님’이라는 이나 얼른 좀 사랑해주시라고 말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원수들이 함께 사는 곳이야말로 지옥이고

원수를 만들고서야 사랑을 싸지르는 지복의 착란 속에 사느니

차라리 선량한 백치가 되겠으며,

당신이 순교자가 될지 안될지 알 도리는 없지만

날 지옥에서 내려준다면, 백번 지각을 하더라도

깁스한 다리를 끌고 걸어서 ‘로마’까지 가겠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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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5-17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종교계에서 한번씩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터져 나오게 되어서 그런지
요즘 종교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시선이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거 같아요.
그리고 너무 자신이 믿고 있는 교리를 타 종교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좋지 못하고요..
종교에서 강조하는 '말씀'이 옳은지 아닌지 구분해서 믿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


반딧불이 2012-05-18 09:37   좋아요 0 | URL
종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종교단체의, 또 몇몇 교인의 문제겠지요. 그것이 불교든, 기독교든...싸잡아서 문제삼을 수는 없다고 봐요.^.^

쉽싸리 2012-05-1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종교의 장점을 얘기하면서 다양성을 많이 꼽는데요. 이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건 아닌지 싶어요.
교회와 절등이 너무 외세 확장에만 몰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교회와 절은 너무 가까이 있고, 어디 먼 산속에라도 들어가야지 싶어요...
다가오는 초파일에 연등이라도 제대로 바라 볼런지...

반딧불이 2012-05-19 00: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절은 산속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나다보니 교회처럼 마을 한복판에 내려와 있는 절도 있더라구요.
저는 연등도 바라보고 크리스마스 트리도 바라보고 다만 구원은 찌질한 저 자신에게서 구하려구요.

글샘 2012-05-18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국에 가면 술도 없고 여자도 없고... ㅋ 쾌락도 없을 거라고 지옥이 낫지 않을까? 하던 강유원 샘 유머도 있었는데...
요즘 높은 분들이 사시는 거 보면, 천국에 가면 더 고급 술집과 이쁜 여자들이 많을 거 같아요. ㅋ 천국으로 갈까봐~~

반딧불이 2012-05-19 01:00   좋아요 0 | URL
ㅎㅎ 글샘님께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가 있는 '아픈 천국'을 권해드리고 싶은뎁쇼!

oren 2012-05-25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권하는' 신앙인들을 만나는 건 딱 질색인데, 여전히 주변에는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나 성당에 다니는 분들이나 절에 다니는 분들이 참 많기도 많더군요. 저 역시 개인적으로는 성당이나 교회나 절이나 스스럼없이 들락거리는 편인데, 그래도 고즈녁한 풍광 속에 자리잡은 사찰에 조금 더 마음이 끌리는 느낌도 가지고 있답니다. 올해 봄에는 영월 법흥사와 양양의 낙산사를 '여행길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낙산사에 가서는 난생 처음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연등'을 밝혀달라고 5만원권 2장을 기꺼이 쓰고 왔답니다.('연등 접수'도 낙산사 원통보전은 벌써 마감되었기 때문에 보타전에 1년간 달아준다고 하더군요.)

반딧불이 2012-05-26 01:39   좋아요 0 | URL
저는 시어머니의 강권에도 오로지 할렐루야로 20년을 넘게 맞서고 있는 나쁜 며느리어요. 구원은 바란적도 없고 헌금도 시주도 한번 한 적 없는 저는 삶이 곧 지옥이고 천국이려니 생각하고 살려고요.
음...저도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연등을 밝힐 날이 있을 것 같아요. oren님 말씀 참고삼아 일찍 신청해야겠군요.
 

 

시간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놓고 보니 옛 생각이 난다. 아들이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이게 뭐야? 라는 질문을 하루 종일 입에 달고 살았다. 사물의 이름을 말해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멈추는 경우가 있고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겨울 아이와 방안에 갇혀 있을 때였다. 엄마, 무슨 소리야? 야쿠르트 병 굴러가는 소리야. 야쿠르트 병이 왜 굴러가? 바람이 불어서. 바람이 뭐야? ........ 궁색한 나는 아이의 얼굴에 훅~ 입으로 바람을 불어주었다. 녀석은 금방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곧 이어 바람은 왜 불어? 하고 물어온다. 이에 대한 답은 나는 아직도 궁색하다. 내가 좀 더 현명하고 지혜로웠다면 아들이 지금 물리학자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 나와 네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이 별이 왜 빛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별이 왜 빛나느냐니? 빛나니까 별이지. 뭐 이런 식으로 대답했던 것 같다. 초등학생이 아니 내가 대답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몇 개의 질문에 대답한 뒤였고 질문마다 답이 궁색해지자 나는 발칵 화를 냈던 것 같다. 동생은 그걸 왜 모르느냐고 나보다 더 화를 내면서 베개를 집어던지고 울고불고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싸웠던 기억도 있다. 왜 내게는 당연한 것이 그 아이에게는 숨이 넘어갈 만큼 답답했을까?


만약 아들이나 동생이 시간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면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대답을 할 수도 없었고 하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을 생각하니 깜깜하다. 그런 질문을 받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자. 시간이 무엇이냐에 답하기보다 시간의 시작은 언제인가, 끝이 있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시간은 흘러간다고 하는데 정말 흘러가는 것일까?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상정하고 시간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미래로부터 현재를 거쳐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 걸까? 시간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정의들은 일단 접어두고 시간에 대한 과학적 이론들 먼저 살펴보자.


무수한 과학자들이 우주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자 노력해왔다. 기원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설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거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까지 과학이론들은 수정과 발전을 거듭해왔다. 우주 전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일한 이론을 만드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인 목표다. 그들의 접근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주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려주는 법칙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의 초기 상태에 대한 질문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해 현대과학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으로 설명한다. 일반상대성 이론은 중력과 우주의 거시적인 구조를 다루고 양자역학은 극도로 미세한 규모의 현상들을 다룬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 이것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주의 시작은 아주 작은 덩어리였고 빅뱅이 일어났던 시기가 우주의 시작이 된다. 그러니까 과학에서의 시간의 시작은 빅뱅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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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는 어떤가? ‘하느님은 세계 창조 이전에 무엇을 하셨는가’라고 깊은 신비를 캐묻는 자에게 어떤 사람은 지옥을 준비해두었다고 답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심오한 질문을 한 사람을 비웃지도 말고 오류의 답도 하지 말며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대답하길 바란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마도 내 동생 같은 호기심 많은 동생에게 봉변을 당해보지 않았나보다. 그는 ‘주님은 모든 시대의 창작자이며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바로 주심이 만들지 않으신 무수한 시대가 어디서 와서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주심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시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라며 하느님이 시간도 창조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는 시간도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의 순간 시간도 시작된 셈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끝은 언제인가? 이 질문에는 늘 종말론이 놓인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 E=mc²의 핵심 주장은 E=m, 즉 에너지=질량이라는 것이다. 태초에 에너지가 질량 쪽으로 밀어 넣어져 사물이 생겨났지만 그 끝은 질량이 에너지의 자리로 이동하게 된다. 그것은 10에 0이 99개가 붙을 만큼 먼 시간이지만 그 시간이 종말이다.


스티븐 호킹은 1000년 이내에 핵전쟁이나 지구온난화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위기가 온다고 했다. 이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우주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이고 만약 우주인이 지구에 먼저 도착을 하게 될 때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우주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시간’의 개념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주가 시작되기 전의 시간에 대해 논하는 것은 마치 남극점에서 남쪽이 어디냐를 묻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어쨌거나 빅뱅 이후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고 있다.


과학자들이 시간의 비밀을 밝혀낸다고 해도 또 수많은 학자들의 시간관을 섭렵해도 여전히 생물학적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 아닐까. 인간은 ‘시간의 이빨’에 뜯어 먹히는 존재이고 그렇게 다 뜯어 먹히고 나면 다음 세대에게 시공간을 양보해야 하고 사라지는 존재. 어쩌면 인간은 시간이 쏘아버린 화살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겨누고 있는 과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날아가는 화살, 스스로 과녁을 결정할 수도 없는 화살. 어느 시인은 '사수는 두 개의 과녁을 노리지 않는다'고 했다. 시간은 나를 쏘며 무엇을 겨냥했을까?

 

 

중심을 쏘다/신용목

 

 

 

사수가 한쪽 눈을 감는 것은 과녁을 떠나는 그 영혼을 보지 않기 위해서다

 

어떤 형벌이 사수의 눈동자 속에

과녁의 동심원을 그렸을까

 

한입 어둠을 씹어먹는 허공의 아득한 중심에서

 

정확히 자신의 죽음을 겨누어 떨어지는, 빗방울

우산은 방패가 아니었다

 

바람 불 때마다 영혼의 부력으로 뒤집히는 중심의 테두리 그 팽팽한 시간 위에서

 

빗물이 명중의 제 몸 잠시 허공에 흩어놓을 때

 

한 발의 생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그리하여 저편

영혼으로 과녁을 치는 무지개,

 

중심을 산 너머에 숨겼으므로

 

검은 부리로 날아가는 새가 있다 구름 사이로

 

누구를 겨누어 저 달은 오늘도, 눈꺼풀 내려 촛점을 잡는 것일까

한쪽 눈을 감을 때마다 보이는

 

둥글게 갇힌 자신의 영혼 그리고

영원히 외눈인 해와 달,

 

사수는 두 개의 과녁을 노리지 않는다

 

 

 

 

 

덧 : ‘시간의 역사’라는 말이 성립 가능할까? 시간은 역사를 시간적으로 품을 수 있지만 역사는 시간을 시간적으로 품을 수 없고 의미적으로만 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은 ‘시간의 역사’라기 보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역사’가 더 알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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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2-01-1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만에 서재에 들려봅니다. 잘 지내셨나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최근에 브로노우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를 완독하고 난 뒤라 갑자기 과학사를
읽어보고 싶어지더군요. 그 중에 <시간의 이빨>도 읽어보려고 했었는데
읽어봐야겠어요. 오래 전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잠깐 읽어본 적이 있는데
시간의 역사라기 보다는 그냥 과학 법칙 설명서 같아요. 그 때 나이로는
그 책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이론을 설명하는 그림이 많아서
좋았는데 그림도 이해하지 못했답니다. ^^;;

반딧불이 2012-01-14 11:42   좋아요 0 | URL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cyrus님께서도 공부 열심히 하시고 책도 쉬지않고 있으시더군요. 새해에도 열정과 노력이 지속되시기 바랍니다.

<시간의 역사>은 우주의 본질을 밝히려는 노력들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고대 그리스로부터 최근의 초끈이론이나 양자물리학까지 설명이 되어있어요.
은 이 공식에 대한 전기라고 보시면 되는데 <시간의 역사>를 읽기전에 읽으시면 훨씬 도움이 되실거에요. <시간의 이빨>은 죽어가는 것에 대한 긍정, 혹은 찬사라고 해야할까요. 이 책은 좀 천천히 보셔도 될듯해요. 전공공부에 시간을 더 많이 쓰셔야하실 것 같아 노파심에 길어졌네요. 참고하셔요.

프레이야 2012-01-1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시간이 쏜 화살인 저는 지금 어느 과녁을 향해 날아가고 있을까요?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알 수 있는 노릇일까요?
사수가 한 쪽 눈을 감는 것은 과녁을 떠나는 그 영혼을 보지 않기 위해서다!
멋진 싯구입니다.
반딧불이님 새해 인사드려요. 복 많이 받으세요.

반딧불이 2012-01-14 11:43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여전히 읽고 쓰고 계시더군요. 부럽습니다. 프레이야님께서도 복 많이 받으시고 책, 영화와의 행복한 시간이 새해에도 지속되시기 바랍니다.

비로그인 2012-01-14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렸을 때 전파사에 세로로 붙어 있는 TV를 보고 "엄마, 왜 소 자가 거꾸로 돼 있어?" 그렇게 물었다네요. 덜떨어졌다는 소리 좀 들었더랬습니다ㅎㅎ 이젠 전파사도 시간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네요...

반딧불이 2012-01-14 11:46   좋아요 0 | URL
하하..교정자로서의 자질이 이미 글자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발현되셨군요.~ 찌릿찌릿 전파사. 한 시대가 마감 되었다시던 말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게 그 전파사였군요. 놀랍군요.
 

  

 

인류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역사를 살펴보는 동안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단어가 몇 개 있다. ‘신화적 상상력’ ‘야생의 사고’ ‘대칭성 사회’ ‘유동적 지성’ ‘불교’ 등이다. 학자마다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로 정의하고 있지만 이러한 말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이다. 고대인들은 자연과 인간이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들은 동물과 결혼을 할 만큼 대등한 관계였다. 인간이 도구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면서 문명의 진보를 이루었고 이것은 점점 더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멀어지게 만들었으며 끝내 자연은 정복해야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원래 자연과 인간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기에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오면서 인간이 정복한 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그 자체였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우려를 표명하고 그 나름대로의 새로운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그 대안 중의 하나로 신화적 상상력이 놓여있다는 것이 거칠지만 내가 짚은 맥락이다. 물론 여기에는 국가의 탄생이나 그와 밀착된 종교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역사, 정치, 이념, 종교 등 거대담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어쩌면 무관하려고 애쓰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즈음에서 지진아처럼 내가 깨닫는 것은 이러한 것으로부터 무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의 탄생을 기원으로 하는 서기 2011년의 10월 마지막 주를 살고 있고, 서울 시장 선거를 앞두고 투표권을 행사해야한다. 박원순을 찍으면 나는 소위 말하는 ‘강남좌파’가 되고 만다. 오직 주소지가 강남구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역사의식도 정치의식도 거대한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못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 중의 한명이지만 내가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가장 역사적이고 가장 정치적이며 가장 이념적이면서 또한 가장 보잘 것 없는 이 시대의 구성원이고 주인공이다. 야스퍼스의 말을 빌린다면 나는 ‘역사에서 빠져나와 무시간적인 것 속으로 도피 할 수’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것은 내가 새로 직면한 나의 ‘한계상황’이다.

야스퍼스는 인류가 이런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 ‘차축 시대’가 열렸다고 본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인류 곳곳에서 사상가들이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공자, 맹자, 노자가 道를 물었고, 붓다는 번뇌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짜라투스트라와 그리스의 비극도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유하고 있는 근본 범주들은 모두 이때에 생겨난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전체 속에 있는 존재로 알게 되었고, 자기 자신을 참으로 알게 되었으며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었’ 듯이 나 역시 나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문제 삼을 때 나의 차축시대가 열릴 수 있을까? 그보다는 우선 내 생의 좌표를 설정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한계상황’은 고대인들의 ‘겨울’과 다르지 않은 듯싶다. 그들에게 겨울은 단지 사계절의 겨울의 의미를 넘어 공포와 죽음, 초자연적인 힘, 생명 가진 것들의 유한성 등 폭넓은 의미로 범람했을 것이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힘 앞에서 우리는 몇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초자연적인 힘 혹은 절대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걸할 수도 있고 그 힘에 대항하여 주술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레미 숲의 사제처럼 스스로 황금가지를 꺾어 나를 죽이고 필요할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법을 강구하기 이전에 요구되는 것은 자신의 한계상황을 적나라하게 인식하는 것이 아닐까. 겨울로 상징되는 한계상황은 어느 누구라도 피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도 지났다. 곧 겨울이 잇대어 올 것이다. 겨울은 철이 없다. 한여름에도 겨울은 온다. 내 외로움의 관절이 삐걱이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겨울은 언젠가는 끝난다.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동짓날 밤의 끝자락에서 이미 봄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이 어김없이 진행되듯이 생의 겨울도 인류의 겨울도 예외 없이 진행되어 머지않아 얼음이 풀리고 봄이 올 것을 믿는다. 그러나 막연한 믿음만으로 이 겨울을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야스퍼스를 빌려오자면 ‘나 자신은 어디에 서고자 하며 무엇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가 하는 것을 물을 때다.’ 삶의 좌표, 생각의 좌표를 정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랴.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참작하고 고려하고 끝내는 훔쳐서 ‘사랑’이라는 결론을 내려 본다. ‘은혜’나 ‘자비’는 다분히 종교적이다. 기독당이 어떻고 빤스 목사가 어쩌구 하는 것도 꼴불견이고 국가의 탄생에 대한 견제로서 불교가 탄생했다고 하지만 지금의 불교에서 그런 뜻을 헤아리는 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랑 또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울리히 벡이 지적했듯이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인 동시에 『위험사회』를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사랑은 다시 막막하다. 

이 막막한 사랑 앞에서 내가 찾아든 것은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이었다. 그는 사랑을 ‘미지의 무엇을 지속시키려는 욕망’이고 ‘삶의 재발명’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사랑은 공간과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들을 지속적으로, 때로는 매몰차게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사랑에서 가장 첨예하게 맞닥뜨리는 것은 타자와의 차이다. 차이를 가진 타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존재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창조적인 것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 즉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할까? 정 반대의 속성을 가진 것들의 차이는 인식의 단계부터 시작되어야할 것이다. 나와는 전혀 다른 것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나를 무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 이해를 통해 결국 다다르게 되는 곳은 나 자신이었다. 이전의 나와는 또 다른 ‘나’다. 재발명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재발명 되어야 할 것은 사랑이지 ‘나’가 아니잖은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어쩌면 이해의 폭은 넓어졌는지 모르겠지만 끝내 스스로를 무화 시키는 사랑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건가?
이런 막막함 앞에서는 그저 막막하기만 할 뿐이구나.


 

우산을 들고도
 

 

발치에 강이 깊은데 돌미나리 타들어간다
척박한 땅을 움켜쥐고 헝클어진 뿌리들
오랜 집착을 끊듯 걷어내고
맨드라미 모종하는 호미가 붉다

미나리와 맨드라미의 거리
빗겨가는 생의 거리를 서성이는 동안
칸타타처럼 빗방울 듣는다

우산을 펴 비를 부르는 토란잎 아래
생이가래 개구리밥 살갑게 모여드는데
연잎 방석위에 오도마니 앉은 물방울처럼
내 사랑은 다만,
막막할 뿐
막막하고 막막해서
막막함으로 반짝 빛날 뿐

발치에 강이 깊은데 돌미나리 타들어간다
세상의 모든 강가에서 목마른 것이 미나리뿐이랴

우산을 들고도
그대라는 강가에서 나는
맨드라미의 뜨거운 혀처럼
붉은 이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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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31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어떤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만이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듯 합니다. 다만 문제는 그 새로운 시대가 인류를, 아니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타자를 사랑하게 만들것인가의 문제겠습니다만...

영화 좋아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 이 글을 읽다보니 최근 개봉한 영화 중 '트리 오브 라이프'라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네요. 이야기가 간단하면서도,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아마 글에 이야기하신 것들과도 연결되는 영화가 아닌가 싶네요.

반딧불이 2011-11-01 18:20   좋아요 0 | URL
영화 제목부터 뭔가를 생각하게 만드네요. 꼭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비로그인 2011-11-02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점점 좋아지는데요. 나중에 한 권으로 묶으셔도 되겠는걸요^^

반딧불이 2011-11-03 10:2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그래도 '국어사전 사랑법'만이야 하려구요.

2011-12-19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9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아침 홍성으로부터 봄이 전송되었다. 은빛 솜털이 후광처럼 빛나는 꽃이다. 이런 빛깔의 봄 앞에서 내 언어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여기저기서 꽃소식이 전해지는데 한편에선 부고가 다투어 세 개나 날아들었다. 겨우 30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가고 오는 것의 유한함이 사무치는 날이다.  

사람들이 꽃놀이 가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나는 뜬금없이 차를 몰아 과천 미술관 가는 길의 벚꽃그늘을 둘러보거나 하르르 하르르 지는 꽃잎아래서 넋을 놓곤 했다.   

올해는 아주 마음먹고 꽃을 맞으러 가기로 했다. 백련사 동백은 피지도 않은 것이 누군가의 객혈처럼 멍울져 있었다. 봉오리만 점점이 박혀있는 동백을 뒤로 두고 다산의 족적을 따라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오솔길을 걸었다.  

산청의 매화를 보러 가던 날은 찬비가 차창을  심하게 두드렸다. 그 빗줄기가 매화의 꽃모가지를 다 꺾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웠지만  雨中梅花를 생각하면서 기대도 컸다. 산청에는 삼매가 있다. 원정공 하즙의 원정매, 통정공 강회백의 정당매, 남명 조식이 수식한 남명매를 산청삼매라 한다. 남명매가 수령 400년을 넘었고 나머지는 600년을 넘겼다. 


일찍이 청나라 사람 궁몽인은 《독서기수략讀書紀數略》에서 네 가지 매화를 귀히 여기고 있다.
귀함불귀개(貴含不貴開) 꽃망울은 머금고 있는 것을 귀하게 치고 활짝 핀 것은 귀하게 치지 않는다. 귀희불귀번(貴稀不貴繁) 꽃은 드문드문 핀 것을 귀하게 여기고 번잡하게 핀 것은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귀로불귀눈(貴老不貴嫩) 나무는 늙은 것을 귀히 여기고 어린 것은 귀히 여기지 않는다. 귀수불귀비(貴瘦不貴肥) 가지는 마른 것을 귀히 여기고 살진 것은 귀히 여기지 않는다.  



남명 조식 선생이 심었다는 남명매다. 위의 네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자태다. 그런데 빗물에 매향이 다 녹아 내렸는지 향기가 나지 않았다. 가지를 살며시 흔들면 그야말로 가느다란 향기가 코끝에 닿을듯 말듯 했다. 아쉬운 마음에 고목 주위를 빙 눌러보는데 그런 내가 가여웠던걸까. 남명매는 그 귀한 향기를 희미하게 흘려주었다. 마치 영혼을 긋고 가는 향기의 메스라고 해야할까. 참으로 야릇하게도 이런 때는 갈증이 심하다.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단속사지 뒤쪽에 있는 정당매는 초라했다. 골다공증에 걸린 다리를 씨멘트로 채우고 있어 안타까웠다. 하지만 더 안타까웠던 것은 그 귀함을 초라하게 만드는 나무 아래의 쓰레기들이었다. 남명매와 참으로 비교되는 모습이다. 남명매가 늙었으나 정갈한 마님같다면 정당매는 그 마님의 시중을 들면서 늙은 삼월이 같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는 듯 그 늙고 투박한 등걸에는 분첩같은 꽃을 피웠다. 

원정매는 본가지는 고사하고 옆으로 작은 가지 하나가 삐져나와 홍매를 피웠다. 꽃피우는 일이 난산인듯 보여 오래 보기가 힘겨웠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그루누이처럼 향기에 굶주린 나는 멀찍이 떨어져 핀 어린 가지의  꽃모가지를 기어이 비틀고야 말았다. 봉우리가 벙글지 않은 세 송이를 몽돌을 쥐듯 동그란 주먹 안에 감추고 나와 몰래 흡입했다. 두어 번 흡입을 하고 나니 그제서야 갈증이 좀 가시는 듯 했다. 가방에 있던 책 속에 매화와 향기를 가두어 두었다. 

     

 

이 향기 코끝에 스치면 그대는 내게 물을 것이다.  
어찌 이리 향기로운가라고. 
 

나의 대답은 질문이다.
그것이 단지 향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시린 내  왼손을 내밀겠다.  
거기 생명선에 못다한 내 말이 고여있을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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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매화가 왔다
    from 파란여우의 뻥 Magazine 2011-04-10 16:19 
     “어리고 성긘 가지(柯枝) 너를 밋지 아녔더니, 눈ㄷ 기약(期約) 능(能)히 직혀 두세 송이 퓌엿고나, 촉(燭)고 갓가이 랑헐 제 암향(暗香) 좃넋 부동(浮動)터라” 조선후기 시인 안민영의‘영매가(咏梅歌)’다.‘매화사(梅花詞)’로 불리기도 한다. 어리고 성긴 가지에서 무슨 꽃이 피겠냐고 했는데 촛불처럼 환한 꽃이 피었다. 비록 두 세 송이 성긴 꽃이지만 그윽한 향기가 퍼진다. 이 시조에서‘암향(暗香)’이란 그윽한 향기라는 뜻으로 주로 매화 향기..
 
 
양철나무꾼 2011-03-29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란한 봄도 탐났는데, 초라한 언어도 탐나요.
이런 거 욕심부리면 소박한 욕심이 될 수 있을까요?

저 위의 사진, 무슨 꽃이예요?
전 제주도에서 활짝 핀 동백과 유채를 원없이 보고왔는데,
사진 속의 매화를 보며 님의 글을 접하니 생각이 달라지는걸요~^^

반딧불이 2011-03-30 00:22   좋아요 0 | URL
음..소박한 언어라기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욕심 아닐까요? ㅋㅋ

맨 위의 꽃 말씀이세요? 아직 저걸 모르신다고요? 그렇다면 쉽게 가르쳐드릴 수가 없는데.....

할.....미....꽃이에요~ 끙!

양철나무꾼 2011-03-30 00:27   좋아요 0 | URL
저...컨닝 하지 않았구요.
정말 설총의 화왕계에 나오는 할미꽃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근데, 글에서 매화가 하도 앞다투다 보니...살짝~~~^^

반딧불이 2011-03-30 00:38   좋아요 0 | URL
할미꽃 보기가 귀해서 잘난척 좀 해봤어요.~

비로그인 2011-03-30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정갈하면서도 그윽한 향기가 물씬 풍기는 여행기로군요. 굳이 사진은 필요없었겠다 싶을 정도네요. 반딧불이님의 글만으로도 충분히 향기를 만끽할 수 있으니까요^^

반딧불이 2011-03-30 11:47   좋아요 0 | URL
참으로 신뢰가 가면서도 불끈 힘을 솟게 만드는 댓글이네요. 철저한 텍스트지향주의자도 아니면서 글만 쓰다가 혼자보기 아까워서 사진 몇장을 더해 봤습니다.

감은빛 2011-03-30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와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굳이 사진이 필요없는 글이예요!
덕분에 저게도 매화향기가 나는 듯한 기분이예요!

반딧불이 2011-03-30 23:28   좋아요 0 | URL
매향을 조금이나마 전해드릴 수 있어서 저도 기분이 좋아요. 고맙습니다.

cyrus 2011-03-30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이님이 사시는 곳에는 꽃이 활짝 폈네요, 한국에서 제일 따뜻하다는 대구에는
언제 꽃이 필까요,,? ^^;; 제 눈에만 꽃이 안 보이는건가요,, ㅎㅎ;;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사이의 꽃 책갈피라,, 은근히 잘 어울립니다. ^^

반딧불이 2011-03-30 23:29   좋아요 0 | URL
저는 서울에 살아요. 꽃을 보러 강진으로 산청으로 먼길을 갔었답니다. 사이러스님 눈에는 사람꽃이 보이시겠지요.

쉽싸리 2011-03-30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화꽃 잘 보았습니다. 꽃보다 글이 더 좋긴 합니다. ^^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 제게도 매화향기가 솔솔 나는거 같습니다.
예전에 산청군 단성면에 있는 매실밭에 종종 가곤 했지요. 참 원없이 꽃 구경?하는 일 이었지요. 매화구경 다음엔 복숭아,배,사과, 포도, 포도도 꽃이 펴요. 다른꽃들 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기후영향인지 올 해 매화꽃 피는게 영 부실하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사는 동네는 매화가 거의 없어요. 그래서 노란 산수유를 제일 처음 보게 되지요. 저번주에 마침 보았어요. 올 해 처음본 꽃이죠. 그리고 여기서 매화를 보게 되네요.
홍성엔 할미꽃이 벌써 피었나 보지요? 허리가 휘어 그렇지 매우 아름다운 꽃 이죠. ㅎㅎ 뿌리는 약으로도 쓴다고 하더라구요.

반딧불이 2011-03-30 23:33   좋아요 0 | URL
홍성의 할미꽃은 사진으로 전송되어왔어요. 정말 예쁘죠? 자줏빛 벨벳에 금구슬을 박아놓은듯해요. 보내주신 분의 마음도 그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보니 저는 아직 포도꽃을 보지 못했네요. 언제쯤 피는지 눈여겨 봐야겠습니다.

blanca 2011-03-3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르르 하르르 지는 꽃. 이 말이 너무 좋네요. 저도 운전해서 꽃구경 갈 여유가 올까요? 그리고 이런 아름다운 페이퍼도 함께.

반딧불이 2011-03-30 23:38   좋아요 0 | URL
필 때보다 질 때 더 아름다운꽃은 벚꽃 뿐이 것 같아요. 동백은 섬뜩하고 목련은 지고난 자리가 추하죠. 지금 연습중이시니 엄두가 안나시겠지만 1년쯤 지나면 내 몸이 차인지 차가 내몸인지 구별이 잘 안되실걸요. 사람의 마음을 허무는데는 꽃이 제일 인 듯합니다. 때때로 꽃그늘 아래서 허물어지는 블랑카님을 상상할께요.

노이에자이트 2011-03-31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명 조식...어떤 아저씨가 남인계열 향교에 가서 남명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했다가 쫓겨나왔다는 일화가 있었죠.그러고 보면 북인계열은 멸종되었나 봐요.

반딧불이 2011-03-31 00:44   좋아요 0 | URL
남명이라 남인으로 알았던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11-03-31 16:37   좋아요 0 | URL
책 내용으로 보면 작심하고 그랬던 것 같기도 하구요.

반딧불이 2011-04-01 11:11   좋아요 0 | URL
노자님. 보신 책이 어떤 책인지 저도 좀 알 수 있을까요?

노이에자이트 2011-04-01 16:50   좋아요 0 | URL
조여항<정인홍과 광해군>. 그다지 학술적인 책은 아닙니다.북인을 칭찬하는 책이라서 읽어봤지요.한때 조선사 서술이 당파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어서 이것 저것 읽어봤네요.

반딧불이 2011-04-02 11:5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시간의안그림자 2011-04-0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문학을 정말로 사랑하고 깊이가 너무 넘쳐 흐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문학의 깊이를 좋아 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의미들을 정말 오랜 만에 내음으로 받아 들여 봅니다. 한자 글귀들을 마주 대하고 있으니까 정말로 시간의 피드백이란 것이 있지 않나 보입니다. 과거가 잊혀져 갈 때 그 과거의 흔적을 생각나게 해 주는 그 무언가가 어느날, 문득 소리없이 장황하게 눈 앞에 신기루 같이 뿌려져 있을 때 그 느낌 같은 것을 말이죠^^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매화 꽃이랑 글을 마주 대하니 신기생뎐에 출연하는 캐릭터 단 사란이 떠 올라집니다. 배우로써의 임 수향이 아니라 단 사란이란 이미지의 모습과 자테가 연결이 되어 집니다. 양반들의 힘과 여인네들의 한이 서린 듯한 그 느낌 같은 것 말이죠^^ 아마도 산청이 양반네들의 자존감이 강해던 곳이라 그런 생각을 더 해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문학도란 것이 천직이란 것이 글 속에도 들어 앉아 있다는 것도 느껴 봅니다. 본인의 느낌이지만 국문학과 선생님을 만약 하게 되신다면 학생들한테 좋은 뿌리를 지닌 나무를 정신적으로 심어 주실 수 있는 선생님 같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언어의 유희와 어휘의 맛이 너무 담겨 있습니다. 로쟈의 서평 속에도 그것들이 제대로 담겨 있엇고요^^ 정말로 좋은 글 많이 듣고 나갑니다. 글 속에서 좋은 행복 많이 찾으세요^^

반딧불이 2011-04-01 11:16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반이법님. 여러가지 과찬의 말씀 고맙습니다. 신기생뎐을 저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단사란'이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않네요. 한자로는 어떻게 쓰는지도 궁금하구요.
종종 뵙겠습니다. 이 봄 어김없이 찾아드는 꽃처럼 환한 날들되시기 바랍니다.

루쉰P 2011-04-0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분들을 따라 오다보니 이런 좋은 꽃도 보고 글 향기도 느끼고 가네요. ^^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은 저도 읽고 있는데 리뷰 써 주시면 참고가 많이 될 듯 하네요. 지하에서 봄이 온 지도 모르고 햇빛으로 그냥 감만 잡고 있는데 글과 꽃이 향기를 전해주네요. 근데 국문학에 있어서 포스가 남다르신 듯...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 자주 올께요.

반딧불이 2011-04-04 22:01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루쉬P님.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은 신간 평가단 도서였어요. 이 글 아래아래에 리뷰가 있습니다. 마감에 쫓겨 급히 쓴 글이라 도움이 되실지는 알 수 없지만요. 번역에 좀 문제가 있긴 했지만 평전이 비평전 전기라면 그에 가장 근접한 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종종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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