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의 세계 (양장) - 전통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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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제게 가장 좋아하는 학자를 꼽으라면 아마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님이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접한 <제3의 침팬지(1991)>와 <총,균,쇠(1997)>, 졸업무럽 읽었던 <문명의 붕괴(2005)> 모두 생각의 지평을 넓혀줬던 인상깊었던 책이거든요. 생리학에서 출발하셔서 조류학, 인류학, 생태학, 지리학, 진화생물학까지 섭렵하셨고, 십여 가지 언어를 구사하시는 이 시대의 석학이시죠.

다이아몬드 교수님의 최근작 <The World until Yesterday: What Can We Learn from Traditional Societies?(2012)>를 어젯밤 완독했습니다. 이 책은 소위 WEIRD(Western Educated Industrialized Rich and Democratic)들에게 39개의 전통(수렵채집,농경) 부족사회가 체득한 지혜들을 소개하고, 지금 세대와 후손들이 어떤 것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지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이제 곧 팔순인 석학께서 자신의 손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가르침을 구술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젖떼기와 우는 아이달래기, 놀이도구와 친구, 이중언어 사용, 현대인의 비전염성 질병과 관련된 염분과 당분의 과다섭취와 운동부족 등에 대한 우려 등은 영유아 자녀교육에 관심있는 분들께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거인의 생각이 흘러가는 흐름을 느끼며 쏟아져 나오는 지식의 물줄기세례를 받고나니 복잡한 세상일들이 내는 소음에서 한발 떨어져 편안해져서 좋네요.

인생에서 7%의 시간을 뉴기니에서 보내면서 총천연색 경험을 했고, 나머지 93%의 시간을 회색빛 현대문명지에서 보내며 계속 뉴기니를 떠올린다는 교수님의 소회를 보니 현대인들이 왜 등산이나 캠핑같은 자연을 찾는 아웃도어를 좋아하는지 알겠더군요.(부쉬크래프트매니아나 생존주의자들도 좀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돌을 쪼개 돌칼을 만들어쓰던 뉴기니의 부족민부터 이십대의 미국인인 막내아들까지 타임머신이 개발되기 전까지, 다이아몬드 교수님같은 소수의 인류학자가 아니고서는 수천년 동안 인류가 경험해온 다양한 사회를 자신의 시야에 담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만화가 최규석씨의 <대한민국 원주민>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던 것처럼 저는 아직 삼십대지만 어릴 적에 남도 끝자락의 면단위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농사를 짓는 외갓집이 가깝다보니 수업 끝나고 자주 가서 놀았죠.

초등학교 1학년인 제게 외할아버지는 소나 염소의 고삐를 쥐어주시며 방죽(저수지)에 가서 풀 좀 먹이고 오라고 시키셨고, 일 없으면 놀지 말고 꼴이나 좀 베어오라고 하셨는데 오는 길에 길을 막고 있는 다른 소나 성질사나운 염소때문에 이도저도 못하고 끙끙대던 기억이 나네요.

마을 또래들은 코흘리개여도 다들 제 몫의 일들이 있었고요. 쪽대(반두)를 가지고 놀러가서 농로나 도랑을 쳐서 미꾸리나 드렁허리, 각시붕어, 돌고기, 왜몰개 등을 잡아와서 반찬거리로 쓰거나 닭모이로 던져주곤 했죠. 좀 부지런떨어서 아침 저녁으로 저수지를 한바퀴 돌면 물가로 올라오는 우렁이를 대야 한가득 잡을 수도 있었고, 대나무로짠 닭장에서 족제비한테 물려죽은 닭 잡아먹고 남은 닭뼈 챙겨서 계곡으로 놀러가면 그 날 저녁엔 가재 삶아먹었죠.

수완좋은 친구덕분에 동백씨를 주워모아 머릿기름으로 쳐줬던 동백기름 짜는 집에 팔거나, 솔잎이 수북하게 쌓인 땅을 파서 굼벵이나 사슴벌레 애벌레를 잡아서 한약방가서 팔아서 용돈 벌기도 했었고요.

마을에 살던 삼촌과 이모들이 저를 돌봐주셨고 사촌들이나 동네 친구들하고 놀다보면 하루가 언제 지나가는지 몰랐던 어린 시절 추억을 간만에 떠올려 봤네요.

개인적으로는 종교에 대한 제9장 '전기뱀장어는 종교의 진화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가 주는 통찰력이 이 책에서 가장 좋더군요.

에필로그를 제외한 마지막 장인 제11장 '염분과 당분, 비만과 나태'를 읽으며, 여름철 기온이 높은 벼농사지역이다 보니 뭐든 짰던 반찬들, 광주로 전학와서야 햄버거와 피자를 처음 먹어봤던 기억, 지난번 건강검진 때 확인한 BMI지수와 늘어진 뱃살(시골살 때는 나름 그동네의 풀무치 학살자였는데...) 정상치의 끝단 근처에 있는 혈압수치까지 다이아몬드 할아버지한테 혼나는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물론 애정어린 충고입니다.

참고논문까지 합치면 번역판으로 700페이지가 넘는 책이다보니 들고 읽기도 무겁고 해서 읽는데 좀 오래 걸렸지만 국가사회 이전의 인류집단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그들이 체득한 지혜는 무엇인지, 어떤 것들이 지금 우리에게도 유용한지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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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쪽

전통적인 사회의 보상 과정은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그 후로도 작은 사회에서 평생 얼굴을 마주치며 살아야 할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중략) 국가 사회에서는 분쟁 해결 과정이 느린 데다 적대적이며, 당사자들이 그 후로도 만날 가능서잉 거의 없는 서로 모르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분쟁 해결 과정이 관계의 회복보다 잘잘못을 따지는 데 집중되기 마련이다. 또한 국가의 이해관계가 피해자의 이해관계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270쪽

식량이 충분하지 않는 전통 사회에서, 젖을 먹이는 어머니는 젖을 만들어내는 데 많은 열량을 소비하기 때문에 지방 수치가 그 임계값을 항상 밑들기 마련이다. 따라서 수렵채집 사회에서 수유하는 어머니와 달리, 서구 산업사회에서 수유하는 어머니가 섹스를 하면 두 가지 이유에서 임신할 가능성이 높다. 첫째로는 수유의 빈도가 너무 낮아 수유성 무월경을 유도할 정도로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산모들이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서 수유로 많은 열량을 소비해도 체지방수치가 배란을 위한 임계치를 항상 웃돌기 때문이다.

310쪽

수렵채집 사회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그곳의 아이들이 성정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서구학자들과 내가 소규모 사회 구성원들의 정서적인 안정감과 자신감, 호기삼과 자주성, 조숙한 사교능력에 충격을 받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략)
수렵채집 사회를 비롯한 소규모 전통 사회에서 살았던 서구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에 따르면, 그곳의 아이들이 양육되는 방법 덕분에 그런 부러운 자질들이 발달하는 것이다. 즉 긴 수유 기간, 오랫동안 부모 옆에서 잠을 자는 풍습, 대리 부모를 통해 아이에게 훨씬 많이 제공되는 사회적 본보기들, 돌봄이들의 끊임없는 신체 접촉을 통한 사회적 격려, 아기의 울음에 대한 돌봄이의 즉각적인 반응, 체벌의 최소화 등의 결과로 그곳 아이들이 얻는 정서적 안정감과 격려가 그런 자질들의 근원적인 힘이다.
(중략)
1만 1,000년 전, 국지적으로 농업이 도래하기 전까지 전 세계인이 수렵채집인이었고, 5,400년 전까지는 누구도 국가 정부 하에서 살지 않았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실험해서 얻어낸 양육법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415쪽

내 미국인 친구는 뉴기니에서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던 새로운 무리사회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만나려고 지구의 절반을 날아갔지만, 그들의 절반이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이유로 이미 인도네시아의 한 마을로 이주해 티셔츠를 입고 지내는 모습을 보았을 분이다. 그들은 "먹을 쌀이 있고, 모기가 없다!"라는 말로 이주한 이유를 짤막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483쪽

종교는 흔히 다섯 가지의 속성을 지녀야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1)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 2) 사회운동이라 생각하며 그 운동에 동참하는 회원들, 3) 비용이 많이 드는 구체적인 증거를 보여줘야 하는 헌신, 4) 행동을 실질적으로 규제하는 규칙들, 5) 초자연적인 존재와 힘을 현실의 삶에 개입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540쪽

위험으로 무릅쓰고 종교를 다른 식으로 정의한다면 나는 이런 정의를 제안하고 싶다. "종교는 어떤 특성들의 집합체로, 그 특성들을 공유하는 인간 집단과, 그 특성들을 똑같은 형태로는 공유하지 않는 인간 집단을 구분한다. 특히 세 가지 특성-초자연적인 설명, 통제할 수 없는 위험에서 비롯된 불안감의 완화, 고통스런 삶과 예견된 죽음에 대한 위안의 제공- 중 하나 혹은 그 이상, 때로는 세 가지 모두가 언제나 공유돼야 한다. 초기 단계 이후에 종교는 규격화된 조직, 정치적인 순종, 자신과 같은 종교에 속한 낯선 사람을 받아들이는 아량, 타종교를 믿는 집단과 벌이는 전쟁의 정당화를 꾸준히 지원해왔다."


646쪽

혈액에서 포도당 농도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인슐린을 신속하게 분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인슐린을 신속하게 분비하도록 명령하는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은, 음식물로 섭취한 포도당이 소변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혈액의 농도를 높일 틈도 없이 포도당을 지방으로 격리할 수 있다. 때때로 식량이 풍부할 때 이런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은 음식을 한층 효과적으로 활용해서 지방을 저장하고 신속하게 살을 찌운다. 따라서 그 후에 닥치는 기아의 시기를 한층 여유롭게 이겨낼 수 있게 된다. 이런 유전자는 풍요와 기아가 예측할 수 없이 반복되던 전통적인 생활방식에서는 유익했겠지만, 현대 세계에서는 비만과 당뇨병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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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6
박훈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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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께서 추천하신 책인데 오래 기억만 하고 있다가 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세종도서라고 직장 도서실에 기부해준걸 얼른 빌려와서 읽었습니다. 과연 추천받을만한 책이군요.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서 가장 궁금해하는 내용에 대해 답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일본사를 워낙 날림으로 읽고 공부를 안해서 요시나가 후미의 <오오쿠>에서 봤던 로주 등 오오쿠에서 일하는 쇼군의 수족들과 번의 운영체제 등을 접했던게 이 책을 읽는데 꽤 도움을 줬습니다. 

저자 박훈 교수님이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주로 개항기 일본의 대외인식과 정치사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리야마 본진의 신상목 사장님께서 월간조선에 연재하시는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경제사와 사회문화사에 관한 글들과 같이 묶어서 보시면 도쿠가와 막...부말부터 일본의 개항기에 전체적인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1장 <도쿠가와 체제의 구조와 특징>이 처음부터 깊은 인상을 주더군요. 많지 않은 분량으로 도쿠가와 막부체제의 핵심을 쉽게 설명해주시네요. 저는 사무라이들이 다이묘가 거주하는 조카마치(성하촌)에 거주하는 도시민으로 봉록만을 받을 뿐 토지소유권도 없고 조선의 양반이나 중국 신사층처럼 향촌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것도 몰랐고, 사무라이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7%가량이나 되는지도 처음 알았습니다. 서리계층과 비슷한 지위의 하급사무라이들이 200년의 평화시기 동안 신분 상승의 기회가 막혀있었다니. 

18세기에 비단, 차, 도자기의 국내생산까지 성공해서 굳이 은을 유출하는 대외무역을 할 필요가 없고 에도의 인구는 당시 세계 최대인 100만,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이 필요한 물건을 제공했던 조닌(상인)들이 형성한 200여개의 조카마치가 있는 도시화율이 상당한 전근대의 평화로운 자급자족 국가가 일본이었군요. 

나카사키의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서 자카르타발 풍설서를 통해 당시 세계의 정세를 상세하게 입수했고, 출판문화가 발전하여 재야의 식자층들도 전국7웅을 빗대어 러시아,오스만튀르크, 무굴제국, 유럽, 청, 일본이 대치한 세계의 구도를 인식하고 나름의 방책들을 쏟아냈던 것들을 읽으니 동시대 우리나라와는 차원이 다르더군요. 

심지어 요시다 쇼인은 막부의 해금정책을 한탄하면서 "하물며 내가 평생 뛰어다니더라도 동서 경도 30도, 남북 위도 20도의 바깥을 나가지 못함에랴."라고 한탄했다고 하는데 할 말이 없더라구요. 지식인들이 이정도로 세계정세에 밝았으니 1848년 아편전쟁의 패배에서 실제로 패했던 청나라보다 더 강한 위기의식을 가질만 했네요.(심지어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이 곧 함대를 파견하여 개항을 요구할 것이고, 함대 사령관의 이름이 페리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니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한 후 해밀턴 아일랜드라고 이름붙이고 주둔한 사실은 커녕 거문도가 도대체 어디 붙어있는 섬인지 파악도 못했던 우리네 조상님들을 생각하면 한숨이...)

재조지은 뽕을 맞은 덕에 청나라가 발원지인 만주를 봉금한 이래로 쓰시마 해적들 수준말고 나라의 존망을 좌우할 위기가 닥치면 조공책봉 체계에 따라 중국에 기대면 되었던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13세기 몽골군 외에는 외부 침략을 받을 일이 없었죠. 고립국가여서 안보를 의존할 주변국도 없었고요.(우리나라가 도와줄 의사도 능력도 없었지만 일본도 전혀 기대도 안했더군요.)

전근대의 항해술로 도하가 쉽지 않았던 바다(심지어 반절 이상은 망망대해 태평양)로 보호되어왔던 나라에 살았던 일본인들이 아편전쟁의 통해서 서양의 발달된 항해술과 함포의 위력을 전해듣고 얼마나 충격받았는지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텐진은 그저 관문일 뿐이었고 내륙 수운으로도 식량 조달이 가능했던 베이징이나, 비슷하게 강화도가 쑥대밭이 되더라도 구형 불랑기포로 놓으면 한강 양쪽에서 양이선을 공격할 수 있었고 한강의 흘수선도 낮고 모래톱때문에 자칫하면 대동강의 제너럴 셔먼호처럼 좌초될 수 있어서 수도에 대한 직접적인 무력의 투사가 어려웠던 조선의 경우와 달랐더군요. 

당시 일본의 수도인 에도는 지금의 도쿄만 깊숙하게 위치해 있는 인구 100만의 도시였고, 그 인구들은 연안 선박이 조달하는 식량과 물자들로 생활하고 있는 실정이었는데 무장한 이양선들이 우라가와 훗쓰 사이를 봉쇄하면 에도가 당장 혼란에 빠지고, 바로 상륙도 가능한 상황이었으니. 실제로 1853년에 페리 제독도 우라가에서 무력시위를 벌였고요.(도쿠가와 막부의 금제 중 하나가 번들의 해군 육성을 막기 위해 쌀 500석 이상을 실을 수 있는 선박 제조를 못하게 하는 것이어서 군함이 없었으니.)

저는 막말의 양이론자들을 우리나라 최익현과 같은 쇄국론자라고 생각했었는데 개국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시기상조라고만 봤을 뿐이더군요. 부럽게도 막부말의 로주 아베 마사히로가 15년 동안 리더쉽을 발휘하며 서양 사정에 밝은 인재들을 발탁해왔다는 점에서 무능한 고종과 민자영 척족일파들과 비교하면서 한 번 더 한숨을. 

종가인 쇼군가와 작은 집 격인 고산케라는 방계의 존재. 쇼군과 가까운 집안이고 참근교대도 하지 않고 일년 내내 에도에 머무르며 상징적으로 부쇼군의 권위를 인정받았으나 막부의 주축으로부터는 방계의 방계 격으로 폄하받고 견제당했던 '내부 균열자' 미토 번의 존재. 도쿠가와 나리아키와 중소규모 후다이번 출신인 로주의 정치적 한계에 대한 분석 등도 전혀 몰랐던 내용이라 재미있더군요.

제4장 <유학의 확산과 '사대부적 정치 문화'의 형성>은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언급되었을 때는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했었는데 여기까지 읽어온 내용, 그리고 저자가 자신이 직접 읽었던 자료들을 제시하며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들을 보니 결국 납득이 되더라구요. (원래부터 아는게 없으니 수긍하는게 당연하기도)

무엇보다 도쿠가와 막부의 엄격한 질서가, 유학을 배우는 기회가 제공한 인적 네트워크와 공론에 대한 관념을 통해 서리 격이었던 하급 사무라이들을 조선의 사대부처럼 정치 열풍으로 이끌었고, 그들이 중국이나 조선과 달리 향촌사회 거주자가 아니라 교류가 손쉬운 도시주민이었다는 점이 막말 정치격동의 핵심이었다는 분석이 탁월했습니다. 그 외에 막부말 유학이 퍼지는 모습들도 다른 책에서 접해보지 못한 내용들이었고요. 

저자의 분석처럼 막부의 대정위임론과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대정봉환에 이 하급 사무라이들이 공부한 유학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제가 이런 결론에 동의하게 될 줄은 읽기 전엔 상상도 못했는데... 

예전에 한명기 교수님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를 읽었을 때처럼 이런 학자가 되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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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쪽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필자는 유럽 근대의 성취와 그 획기적 의으를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필자는 유럽 근대가 그 이전의 어떤 시기보다도 획기적인 변화를 인류사에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중략)
그러나 근대의 획기적 의의를 인정하는 것과, 근대 이전의 동아시아사를 근대화라는 가치 기준 하에서 연구하는 방법론에 찬성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225쪽

필자가 메이지 유신을 공부하기 시작하던 1990년대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 후 한국의 눈부신 발전으로 '근대화'도 '일본 모델'도 매력이 떨어져 갔다. 그러나 이것은 거꾸로 우리가 메이지 유신을 객관적으로, 또 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이 글이 그런 논의의 작은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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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쟁 완결판, 두 제국 군주의 리더십 대격돌!
김형오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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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형오씨의 이 책 <술탄과 황제>에 대해서는 출간 당시 언론에 호평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약간 코웃음을 치면서 당시엔 읽어볼 생각도 안하고 넘겼던 걸로 기억합니다. 5선을 하면서 18대 국회의 국회의장을 지냈던 이가 전반기 국회의장 임무를 마치고 은퇴하고 나서 펴낸 역사교양서가 얼마나 충실할까 싶었거든요.

 

시기적으로 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전직 대법관이 편의점을 열어서 화제가 되었던 것과 비슷한 뉴스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여의도 정치를 20년가량 해왔던 사람이 1453년 이후로 무수한 전문 학자들이 연구해온 주제인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대한 책을 썼다는 패기가 만용으로 보이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은 제게 잘 쓴 교양 역사서 이상의 인상을 줬습니다. 이 책의 내용보다 (비록 박사학위 소지자이긴 하지만) 아카데미아 소속이라고 볼 수 없는 이가 전공자에 필적할만한 교양서적을 펴낸 국내 사례라는 점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정말 존경할만한 이 시대의 어른이고 이런 분들이 우리나라의 저력이라고 생각됩니다.(국회의장 퇴임 후 방문교수로 이스탄불에 체류하는 동안 전직 국회의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현지 공관 등으로부터 연구에 필요한 적극적인 지원을 받긴 한 것 같지만요.)

 

어차피 전문성으로는 평생 이 분야를 연구한 학자들의 서적을 뛰어넘기 어려운 제약을 일단 신선한 형식으로 참신한 구성으로 돌파한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책 구성의 아이디어를 얻은 순간에 대한 묘사를 읽으며 그가 얼마나 간절히 이 주제에 천착했고 책으로 펴내고 싶었는지가 느껴지더군요.

 

책에 등장하는 많은 그림들과 연표, 서지목록의 나열이 아니라 약간의 서평을 곁들인 적지 않은 참고문헌 목록들 역시 저자가 이 책을 쓰기위해 들인 노력을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내보여줍니다.

 

게다가 ‘골든 혼과 갈라타 언덕(http://hyongo.com/2020)’과 ‘루멜리 히사르(http://hyongo.com/1984)’처럼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할 지형지물들에 대해서 QR코드로 자신의 블로그 포스팅으로 연결해서 독자들이 자신이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들과 답사기 포스팅을 참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2016년도 아니고 2012년에 나온 책에 말이죠.

 

QR코드로 연결된 우리나이로 70세인 전직 국회의장이 운영하는 블로그입니다. http://hyongo.com/ 인데 포스팅이 1974개나 있네요. ’디지로그(Digital+Analog)’의 인상깊은 사례였습니다. 많지 않은 선수로 국회의장이 된 것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심지어 올해 3월에 이 책의 개정증보판까지 내셨네요. 개정판 제목은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정말 존경스러운 열정입니다.

 

책을 읽고 난 느낌을 총평하면 예전에 읽었던 시오노 나나미의 전쟁 3부작 중 하나인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그녀의 ‘사일런트 마이너리티’를 섞어놓은 느낌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은 훨씬 더 충실한 것 같았고요. 저자의 의도대로 오스만 술탄 메흐메드 2세와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당시 심리와 인물의 개성에 대해서 잘 묘사하기도 했더군요.

 

이 책을 보면서 저는 첫째로 외교의 중요성을 실감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범위는 아니지만(물론 술탄의 외교전략과 이에 대한 황제의 대응도 나오긴 합니다만) 전쟁이 발생하기 전부터 터키의 동맹 및 중립외교로 인해, 예상된 침공에 대한 구원요청의 실패와 황제의 로마카톨릭과 정교통합에 대한 반발, 베네치아 공화국의 늦은 결정 등 외교적으로 전쟁의 승패가 상당부분 결정되어 있었죠. 패배자임에도 훌륭했던 콘스탄티누스 11세가 부족했던 점이 이 부분이 아닐지. 인간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말 존경하지만 그가 주창한 ‘동북아균형자론’과 ‘배일외교’는 국내적으로는 호소력이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콘스탄티누스 11세와 겹쳐보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다음 대통령은 국제정치에 대한 훈련이 좀 되어 있는 분이길...

 

둘째로 역시 종교는 인간의 진화의 산물이구나 싶었습니다. 공방의 당사자가 무신론자들의 집단(혹은 그나마 가장 가까운 베네치아 공화국)이었다고 가정해보니 과연 종교라는 발명품 없이 다른 밈(문화적 유전자)들만으로 이렇게 서로 사력을 다한 공격과 방어가 조직되고 지탱될 수 있다고 생각하긴 어렵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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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금속의 세계사 : 인류의 문명을 바꾼 7가지 금속 이야기 - 인류의 문명을 바꾼 7가지 금속 이야기
김동환.배석 지음 / 다산에듀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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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의 세계사>란 제목과 ‘인류의 문명의 바꾼 7가지 금속 이야기’라는 부제가 매력적으로 보였던 책입니다. 제1저자 김동환 박사님은 호주에서 국제학 박사학위 취득 후 사설연구소와 컨설턴트로 활동하시는 분이고 제2저자 배석님은 금속공학 박사님으로 대기업 연구소에서 부품&소재 연구 실무를 하시는 분이더군요.

 

처음에 훌훌 넘겨보니 입말로 썰을 푸는 느낌의 책이라 박대정심한 정통 학술서로 입문해야 하는 게 아닐까 약간 고민했네요. 뭐 제가 금속의 역사를 알아서 일에 써먹을 것도 아니라 그냥 이 책으로 충분하다 싶어서 그냥 읽었죠.

 

이 책을 보니 터키와 레반트, 이란과 이라크 징역이 고대사의 타임캡슐인 것 같아 한 달 이상 길게 가보고 싶은데 언제쯤 갈 수 있을는지. 루브르의 중근동 유적을 처음 봤을 때도 엄청나게 충격 받았는데 이스탄불의 대표적인 고고학이나 역사박물관 정도는 가볼 생각입니다.

 

가벼운 필체로 써내려간 이 책이 괜찮았던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원소주기율표를 배우면서 가지게 된 고정관념과 달리 기원전까지 인류가 사용했던 금속이 겨우 일곱 가지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줬기 때문이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접경지대의 텔 타프 유적에서 발견된 송곳을 통해 약 7천년 전에 발견(화학적으로 추출)된 것으로 확인한 최초의 금속 ‘구리’부터 ‘납(기원전 6500년)’, ‘은(기원전 5000년)’, ‘금(기원전 4700년)’, ‘주석(기원전 3300년)’, ‘철(기원전 2100년)’, ‘수은(기원전 1500년)’의 순서로 발견된 일곱 가지 금속을 소위 ‘고대 금속’이라고 부른다네요.

 

그 다음에 발견된 금속은 거의 2천년 가까이 흐른 후에 발견된 비소(AD 1250)이고 다음은 아연(AD 1400)이라고 합니다. 18세기 프랑스의 라부아지에 이후에서야 지금 쓰이는 많은 금속들이 화학적으로 발견되었고요.

 

금속의 정의도 중학교 기술이나 공업시간에 배웠을텐데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번에 다시  접했습니다. “열이나 전기를 잘 전도하고, 펴지고(전성) 늘어나는 성질(연성)이 풍부하며, 특수한 광택을 가진 홑원소 물질. 수은을 제외하고는 상온에서 고체”를 금속이라 불러야 한다네요.

 

전 그동안 최초로 목탄을 통해서 강철을 제련해낸 집단이 힛타이트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터키의 카만-카마휘위크 유적지 발굴 정보를 통해서 힛타이트인들이 정착하기 500년 전에 이미 아나톨리아 고원에 강철 야금술을 습득한 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더군요.

 

재미있는 잡지식도 많습니다. 요새 금수저 담론을 불러일으킨 영어 관용구 ‘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라는 표현이 세르반테스가 쓴 <재치있는 시골귀족 돈 키호테 데 라만차> 중 산초 판사의 대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네요.

 

또, 입자가속기에서 수은을 이온화하여 아광속으로 가속시키고 베릴륨과 충돌시키면 수은의 원자핵이 부서지면서 개중 0.01% 이상이 금의 원자핵으로 변한대요. EU의 거대강입자가속기를 2만년 넘게 계속 돌리면 금 한돈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섬짓한 사실인데 형광등에는 수은을 많이 사용하는 작업장의 공기 기준치보다 최대 400배나 높은 수은 입자가 꽉 들어 차 있다고 합니다. 수은 증기는 무색, 무취, 무미라서 인지할 수가 없다고 하니 형광등은 절대 깨지 말고 꼭 분리수거 하세요. (이래서 형광등 분리수거함이 따로 있었군요. 어릴 때 폐형광등으로 칼싸움하고 팍팍 깨면서 놀았던 기억 나는데...)

 

그나저나 이집트 신왕국의 람세스2세가 이끄는 청동기로 무장한 2만 군대와 강철로 무장한 힛타이트의 무와탈리 2세의 3만 5천 군대가 시리아 왕국의 패권을 두고 맞붙은 ‘카데시 전투’의 광경이 어땠을지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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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우리나라도 이미 2004년 12월에 1원 동전과 5원 동전의 발행을 중단했다. 그 때문에 1원 단위 값에는 반올림이 적용된다.

 

59쪽

 

지구화학자 클레어 페터슨은 그런란드 지역에서 눈 속의 납농도를 조사한 결과 GM이 유연휘발류를 생산하기 시작한 1923년 이전에 쌓인 눈 속에서는 납이 거의 존재하지 않은 데 반해, 그 이후 눈 속의 납 동나가 꾸준히 증가한 사실을 발견했다.  
(중략)
그의 끈질 노력으로 1970년 미국에서 청정대기법이 제정되었고 1986년에는 드디어 유연휘발유의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미국인의 혈중 납 농도가 무려 80%나 감소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200년 <네이션>은 “우리 몸 속의 납 농도는 한 세기 이전 사람들보다 625배 많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다.

 

62쪽

 

오늘날에도 여전히 화장품에는 미량의 납 성분이 들어간다. 특히 립스틱은 납의 함유량이 높은 편이라 조심할 필요가 있다. 미국국립보건원에 따르면 여성들은 평생 최고 3kg 가량의 립스틱을 먹거나 흡수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93쪽

 

은은 650가지 이상의 세균을 죽일 수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은에서 발생한 이온은 세균의 세포벽 안에 들어가 세포막을 손상시킨다. 또 세균의 단백질 성분에 변화를 일으켜 세포의 활성화를 막는다. 이 과정에서 결국 세포는 파괴되고 만다. 다만 은은 어디까지나 향균제다. 세포분열을 하는 세균에게만 통할 뿐, 애초에 세포벽이 없는 바이러스는 무찌를 수 없다.
(중략)
강한 항균력과 다르게 독을 감별하는 은의 능력은 그다지 탁월하지 않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은은 독성 물질은 황화합물과 반응한다”라고 해야 빈틈없이 안전한 상식이 된다.

 

146쪽

 

서사시인 헤시오도스는 그의 대표작 <노동과 나날>에서 인간의 역사는 1. 황금시대, 2. 은시대, 3. 청동시대, 4. 영웅시대, 5. 철시대라는 연속된 다섯 시대로 나뉜다고 말하고 각각의 시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청동기와 철기 시대구분이 이렇게 오래 전부터..)

 

209쪽

 

인기 좋은 금속의 비결은? 그냥 철의 역학적 성질 그 자체다. 우선 매장량이 많다 보니 값이 꽤나 저렴하다. 게다가 성형이 쉽고, 다른 원소나 금속과도 잘 어울려 합금 만들기가 용이하다. 덕분에 철의 경도와 강도를 쉽고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단결정철’의 인장강도를 10, 경도는 3이라고 했을 때 탄소, 규소, 니켈, 몰리브덴으로 합금한 ‘오스폼드 강’의 인장강도는 2930까지, 경도는 1200까지 높아지게 된다. 순철에다가 0.035~1.7%의 탄소를 첨가하면 갑자기 1천배 이상으로 강하고 질긴 강철도 변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납으로 금을 만들어 내는 마법 같은 수준의 변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255쪽
환경부는 2012년부터 2년 동안 전국의 어린이(만6세)부터 청소년(만18세) 1820명을 대상으로 체내 유해 물질 농도와 환경 노출 등을 조사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수은 농도는 1.93데시리터였고, 청소년의 수은 농도는 1.90데시리터인 것으로 나왔다. 이는 캐나다보다 7배나 높고 독일보다는 무려 19배나 높은 수치다.
(수은 광산 개발금지와 2020년부터 수은사용제품 제조 및 수출을 금지하는 내용의 2013년 미나미타 협약은 아직 미발효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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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의 역사 - 매일 5억 명의 직장인이 일하러 가면서 겪는 일들
이언 게이틀리 지음, 박중서 옮김 / 책세상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출퇴근의 역사(원제는 Rush Hour)>의 저자 이언 게이틀리(Iain Gately)는 홍콩 태생으로 케임브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하신 분인데 다른 쓰신 책이 <담배와 문명>, <음주:알코올의 문화사>네요.(왠지 오탱 형이 생각나네요.) 제임스 워드가 쓴 <문구의 모험>처럼 지난 수백년 동안 우리네 일상에서 떼어낼 수 없을 정도로 필수적이었던 분야에 대해 풍부한 지식의 좌판을 펼친 것 같은 책입니다. 최근들어 근본적인 변혁이 벌어지고 있는 분야라는 점도 같지요.


제1부 '통근의 탄생, 성장, 승리'는 저자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출퇴근이 탄생한 시기부터 현재까지 개인들이 일터와 쉼터를 분리하고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원거리를 출퇴근하는 행위의 역사에 대한 요약입니다. 제2부 '지옥철에서 냉정을 유지하는 방법'은 현재의 통근에 대한 이야기이고, 마지막 제3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시간'는 근미래의 통근에 대한 여러 관점과 예견들을 소개하면서 나름의 예측을 곁들이고 있습니다.


저자 자신도 햄프셔에서 런던까지 하루에 왕복 4시간 이상을 통근에 할애하고 있으면서도 통근 예찬론자에 가깝다는 사실이 재미있더군요. 직장에서의 근력소모 혹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큰 편이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뭐 그래도 통근이라는 행위가 평균적으로 도시인들의 24시간 중 상당한 기간을 차지하고, 통근에 소요되는 시간 전후에도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물론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가볍게 읽어볼 가치가 있었습니다. 일단 교외(suburb)란 표현도 통근으로 인해 생겼으니까요.


저자는 최초의 통근을 철도가 개통된 1833년 개통 당일 스톡턴-달링턴 철도의 기관차가 이끄는 21량의 석탄화차에 붙은 'Experiment(실험)'이란 이름의 객차가 매년 20만 명의 승객을 실어나른 것으로 보고 있더군요. 처음에는 당시 벌크화물의 주된 운반수단으로 쓰이던 운하 운영업체들의 과도한 이용료 요구와 여름의 가뭄이나 겨울의 결빙으로 인한 화물운송 제약에서 벗어나기 위해 설치했던 철도에서 몰랐던 잠재력을 발견한 것이죠.


건설 및 토목 업계에서 회사의 신뢰도를 상징하는 시공실적을 왜 Track Record라고 부르는지 몰랐는데 이 책을 보니 1846년 한 해에만 영국 내에서 1만 5천 킬로미터의 철도건설 사업제안이 의회를 통과되었을 정도의 철도 광풍 시대에 사업 시행자들의 '선로 건설 기록'에서 유래했더군요. ㅎㅎ

또, 철도의 정기권 제도가 사전 구매자들에게 휴가철 내내 할인 혜택을 제공하던 영국 해안지대의 증기선 운영자들을 모방했다고 합니다.


지금 철도는 안전의 대명사이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철도는 정말 위험한 탈 것이어서 매표소에서 승차권뿐만 아니라 Railway Passengers' Assurance Company라는 보험회사의 생명보험 상품도 함께 판매했다고 하네요.


철도로 인해 표준 시간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시계산업이 발달하고 손목시계가 널리 퍼진 것은 많이들 알고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마을마다 자기 교회 종소리로 알 수 있는 고유의 시간으로 살던 사람들이 철도로 인해 1분이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학습하게 되었을테니.


철도 통근시 통근자들 사이의 '침묵의 규약'이 관습으로 형성되면서 열차 내에서 소비되는 책과 신문의 범람과 이로 인한 문맹률의 하락을 불러왔다고 하는데 비싼 운임과 정기권 비용을 낼만한 사람들이 주로 식자층이었으니 그런 것 아닐까 싶어서 갸우뚱 했습니다.


미국과 달리 영국에서 내연기관 자동차(당시엔 '동력 수레' 수준의 개념이었죠.)의 도입이 늦었던 이유를 1865년에 제정된 도로상기관차법에서 기계식 차량이 공용 도로에서 운행할 경우 사람 한 명이 60보 앞에서 걸어가면서 붉은 깃발을 흔들고 나팔을 불어야 하며, 차량 속도는 교외에서는 시속 6km, 도시에서는 시속 3km를 넘을 수가 없고, 그런 차량을 운전 및 조종하려면 최소한 세 명 이상을 고용해야 한다고 규제하고 있었던 영향도 있다고 하는데 법이 기술발전을 가로막았던 좋은 사례인 것 같습니다.


미국의 무절제한 자동차 열풍을 비판하는 말들도 많지만 당시 19세기말 축력(말)에 의존한 교통에 기반한 대도시의 끔찍한 상황을 보면 그리 쉽게 비판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1989년 뉴욕에서 열린 국제도시계획학회의 최우선 의제가 말로 인한 공해 해결이었을까요? 농부들이 추수기에 바쁘다보니 말똥을 수거해가지 않을 경우에 공터에 말똥이 20미터 높이로 쌓였을 지경이었으니 그 악취와 침출수, 세균오염 등은 오죽했을까 싶네요.


모델 T를 만든 헨리 포드가 '이 도시는 죽을 운명이다. 우리는 도시를 떠남으로써 도시 무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선언하고 디트로이트로부터 15km 떨어진 곳에 2천에이커의 부지를 확보하는 등 '교외'라는 개념을 통찰했다는 것도 신기하더군요.


최초의 교통 신호등은 존 피크 나이트란 사람이 고안해서 1868년 런던의 한 교차로에 설치된 것이라고 합니다. 붉은 색과 초록 색의 가스등을 이용해서 정지 신호와 출발 신호를 보내는 장치였는데 설치 한 달만에 폭발해버렸다고 하네요.


사랑스러운 디자인의 베스파(Vespa:말벌)는 1946년 엔리코 피아조에 의해 로마 골프 클럽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1990년대 초반 중국과 수교를 했을 때 베이징의 넓은 도로를 가득 채운 똑같은 색깔과 모양의 자동차 물결이 엄청 신기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옷도 비슷한 인민복을 입은 사람들이라 더 강렬했었죠. 기어가 하나 뿐이고, 핸들은 비치크루저 스타일로 휘어있으며, 원시적인 브레이크(1932년에 생산된 자전거 모델을 본뜬)였던 이 자전거는 무려 5억대 이상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달용이라는 선입견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지만 정말 편리하고 고장안나는 혼다의 자랑 C100 오토바이(대림혼다의 citi100이 혼다 오토바이의 라이센스 버전이죠. 이걸 타고 유라시아 횡단을 한 젊은이도 있는데 고장 한번 안났다고 하더군요.)도 과거의 노새처럼 볼품없다고 여겨져서 주목받지 못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통수단입니다.


개인적으로 왜 자전거전용도로를 붉은 색으로 칠하는지 몰라 궁금했는데 의문을 해결했습니다. 항공에서 '활주로 지연'을 tarmac delay라고 하는데 'tarmac'의 원뜻은 '쇄석과 타르를 섞어 굳힌 포장재료'를 뜻하더군요. 1970년 영국 버킹엄셔주의 도시인 밀턴 케이스의 도시기본계획에 따라 최초로 설치된 자전거 도로가 tarmac으로 포장해서 붉은길(Redway)'라고 불리웠다고 합니다.


휴우 1부에서 인상깊었던 내용들을 정리하는 것도 이렇게 길다니. 말씀드렸던 것처럼 2부는 현재의 통근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치한들의 성추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성 전용 객차(이름이 '꽃의 열차')가 1912년 일본에서 도입되었다니 생각보다 빠르네요.


뭄바이의 통근 노선인 뭄바이 교외철도는 1953년 영국이 인도대륙철도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건설한 철도인데 지금도 매일 사망자가 10명씩 나오고, 지난 10년 동안 사망자가 3만 6천명이라는데 이 숫자가 너무 아득해서 현실로 와닿지가 않네요. 우리나라에서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가 대략 4천명 정도인데...


자동차 통근자들에게 도로 정체는 열차나 버스 통근자들이 겪는 승객 욱여넣기(이게 표준어였군요.)와 같은 느낌이죠. 출퇴근길 정체에 시달리는 통근자들을 칭하는 Road Rage로 인해 이름을 떨친 러시 림보가 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설명들이 좋더군요. '도로를 따라 똑같은 방향으로, 속도 제한을 준수하고 맘대로 멈출 수도 없는 제약으로 인해 긴장은 가중되고', '공식적인 의사소통용 몸짓 언어를 갖고있지 않은 제약(비상깜빡이를 빼고요.)', '서로 마주볼 수 없고 상대방의 꽁무니만을 보게되는 비대면 상황의 지속', '운전자가 욕을 하고 소지를 질러도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무기력감' 등의 스트레스 요인에 대한 설명들이 유용했습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는 운전 중 예의범절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청정지대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이죠. 기리야마 본진의 신상목 사장님께서 일본 거주 시절에 경험한 일본인들의 운전습관에 대한 글을 봤는데 일본의 운전자들이 운전석의 선(禪) 수행자처럼 보였고, 예의범절을 교환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처럼 존경스럽더군요.


호주의 Perth 시에서는 30분 내외의 여행 시간에 맞춰 대중교통을 재편했고, 그 결과로 근린 조성과 보행자 친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Neo-Uranism의 전형으로 꼽힌다고 하는데 BRT와 자전거를 활용해서 도시 중심 어디에서도 대중교통과 도보로 30분 이내에 행정중심복합도시 어느 곳이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종시도 비슷한 지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한창 건설 중인 도시인 관계로 평가는 하지 않겠습니다. ㅠ.ㅠ)


통근자들의 소비성향이 휴대성, 소형화, 연결성을 추구하는 신제품들의 개발이라는 혁신을 촉진했다는 저자의 분석도 일리가 있더군요. 저는 최초의 상업용 휴대전화 서비스가 고속철도에 처음 도입되었는지도 몰랐거든요.


그리고 산업혁명 이전 영국의 상류층과 중산층에게 식사는 단순히 허기를 달래는 시간이 아닌 사교의 기회였기 때문에 아침을 먹고 나와 저녁 식사 전까지 따로 식사를 하는 문화가 없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소위 신사들은 침묵과 고독 속에서 음식을 집어삼키는 것을 자신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차라리 굶었다고 합니다. 뭐 결국은 lunch가 슬금슬금 일상으로 들어왔지만요.


헥헥 쓰는 것도 힘드네요. 이언 게이틀리는 마지막 3부에서는 통근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구 선진국들이 인도와 같은 해외로 전화상담 등의 업무를 아웃소싱하면서 자국 내 통근수요는 줄게 되지만 오히려 새로 들어선 전화상담센터 주변의 도로 정체는 증가하게 되는 점을 비꼬고, 정부가 아무리 재택근무나 원격근무를 권장하더라도 고용된 근로자의 입장에서는 집에 일하다보면 고용주가 언젠가는 다른 어딘가의 누군가가 더 적은 월급을 받고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찾아내지 않을까 두려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터로 출근해 능력 뿐이 아니라 얼굴도 보여주고, 정수기 앞에서 서로의 아이 이름까지 묻고 답하는 잡담을 나누는 사이가 되는게 유리하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수긍이 가더군요. 내 업무의 아웃소싱을 방지하기 위한 특효약이 통근인 셈이죠.


IT업체의 경우 구글버스와 같이 통근수단을 제공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원격 근로의 아킬레스 건인 자료 보안의 문제때문이라는 점은 미처 몰랐습니다. 집에서 일하는 것이 연료를 아끼고 매연을 덜 배출할지는 몰라도 이로 인해 IT분야에 추가로 투입되어야 하는 에너지와의 비교도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현재 IT업계가 전세게 전기의 10%나 사용하고 있다네요. 저자는 원격 근무시 보안 및 버퍼 유지로 인해 일반적인 서버 데이터보다 많은 용량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또한 저자는 싱클레어의 C5나 세그웨이, 외바퀴 전기스쿠너 라이너 등 대안적인 퍼스널 교통수단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자동차를 대체할 수는 없을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마이크로 모빌리티들이 장애인 보조용 의자차나 브롬톤 자전거의 영역을 빼앗아올 수 있을지 의문이고요. 이는 기술적이거나 편의성 부분의 문제가 아닌 인도와 차도 구분과 같은 법적이고 관습적인 부분의 제약때문일 겁니다.


저자는 통근으로 인해 현대인들이 겪고있는 이런 고난들을 열거하고 있고, 통근시간의 증가를 삶의 질이 저하하는 것으로 평가하는 국제기구의 판단기준도 소개하지만 통근자들은 불행한 사람이고 통근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자율주행 자동차에 대한 개념이 1939년 뉴욕의 세계박람회에서 GM의 후원으로 설치한 1960년대의 미국에 대한 상상 모형에 등장했었고, 앨런 머스크의 하이퍼루프를 가동시키는 진공 튜브 열차와 유사한 공기 압축식 철도가 이미 1847년에 건설되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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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쪽


처음에는 철도 회사마다 운행 시간표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시간이 조금씩 달랐지만, 결국 대부분의 회사들이 1840년 11월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가 도입한 '철도 표준시간(GMT:Greenwich Mean Time)'을 채택하게 되었다.


82쪽


'통근하다(commute)'라는 단어는 패터슨-허드슨강 철도에서 유래했다. 1843년에 승객 가운데 일정 기간 동안의 승차 요금을 미리 '일괄 지불(commute)'하고 싶은 사람, 즉 할인을 조건으로 정기권을 구입하고 싶은 사람은 "회사의 대리인과 만나 약정서를 작성"하라는 권유가 있었던 것이다.


145쪽


최초의 상업용 자동차 라디오는 1930년에 Galvin Corporation이 개발한 Motorola 제품이었으며, 나중에는 이 상표명이 회사 이름이 되었다.


245쪽


SUV 판매량이 급증한 원인으로 미국 남성들의 남성성 회복과 군용 장비에 대한 애호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일반 승용차보다 월등히 큰 크기에 있었다. 사람들은 더 큰 차량을 보면 위협을 느끼기 때문에, 큰 차량에 탄 사람은 스트레스가 덜하다. SUV는 바로 이런 위협의 인식에 맞춰서 진화했으며, 그 어떤 도전에도 끄떡없는 능력을 강조하는 광고의 지원을 받았다.


284쪽


최초의 상업용 휴대전화 서비스는 1969년 뉴욕과 워싱텅 DC를 오가는 고속철도 메트로라이너 열차에 처음 도입되었다.


316쪽


통근자들이 마주하는 모든 표지판의 위치와 크기, 그리고 거기에 적힌 내용은 단계적 공개의 원칙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중략) 정보는 반드시 알 필요가 있을 때 중져야 한다. 선택지가 너무 많을 경우 군중이 얼어붙게 되고, 런던 지하철의 통로 내에 막힘 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396쪽


사우스 데번 철도회사는 1847년 전설적인 공학자 킹덤 브루넬이 설계한 공기 압축식 철도 구간을 건설했으며, 조용하고 매연이 없는 대기 속에서 최대 시속 110km의 속도로 엑서터에서 뉴턴 애벗까지 승객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쥐들이 가죽 풀무를 갉아서 구멍을 내고 금속제 설비가 바닷바람에 부식되면서, 겨우 이듬해에 가동이 중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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