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목수들 : 한국 - 우리 시대의 새로운 가구 제작 스튜디오를 찾아서 젊은 목수들
프로파간다 편집부 지음 / 프로파간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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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드는 일에는 전혀 재능이 없는데 옷, 그릇 등에서부터 시작된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인테리어로 흘러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원목가구로까지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

여느 초보처럼 저도 신혼가구를 집성목이나 무늬목으로 디자인 예쁘게 뽑고 색깔도 포인트를 잘 주거나 화사하게 만든 공장 가구를 샀죠. 그런데 막상 4년을 써보니 그런 가구들은 흠집나면 못생겨지고, 레일이 뻑뻑해지거나, 짜맞춤이 부실해서 흔들흔들하더라구요.

그래도 책장과 협탁은 소나무 원목 공방에서 제대로 만든 물건을 샀더니 역시 가장 만족 스럽습니다. 공장 제품보다 두 배 비싼 이유가 괜한게 아니었죠. 물론, 카레 클린트처럼 고급스럽고 합리적인 가격의 가구 브랜드도 있지만요.

벼락부자가 속출하던 산업혁명시기 영국에서 귀족들이 새로 이사온 부르주아 이웃들을 뒷다마하던 소재 중 하나가 '저 집은 가구를 샀대.'였다는 말이 어떤 문화에서 나왔는지 알겠더군요.

이러던 차에 북미산 블랙 월넛 통판으로 만든 라이브엣지 테이블 실물을 보고 원목가구에 빠져들었습니다. 예술품은 바라보는 대상이지만 원목가구와 같은 공예품은 심미적인 만족과 함께 실제로 사용하는 만족감까지 주는 장점이 있어서 집에 예술품을 들이는 기분으로 살만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요즘 2년 후에 입주할 아파트에 어울리는 원목가구로 뭐가 좋을지 미리 찾아보고 있고요. 우리나라의 원목가구 공방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14곳의 공방 또는 원목가구회사를 운영하는 오너의 과반수가 저보다 나이가 어린 젊은 목수들이더군요. 그래서 동년배들의 저와 다른 삶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저는 소개된 곳들 중 '프레그셋'과 '밀로드'가 가장 인상깊고 업에 대한 철학이 와닿더군요. 실물로 못보긴 했지만 사진으로 본 개별 작품중에서는 프레그셋의 'Whale Daybed'와 'Cloud Desk' 그리고, 밀로드의 'G shelf', 컴플리트 파이브의 MS-AV Board_01 거실장, 메이앤 공방의 락킹 체어 ROO, 정재원 가구의 'Heel Stool' 등이 맘에 들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여기 나오는 원목가구 쇼룸도 구경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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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나무는 소중한 자원이다. 나무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그것으로 만든 가구를 오래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오래 쓸 수 있는 디자인은 과하지 않은 것이다.

41쪽

서비스에서도 큰 차별점이 있는데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가구와 함께하는)'시간'이다. 사람들이 가구를 5년 정도 사용하다 버리고, 교체하는 케이스가 많다. 이케아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그런 문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올바른 소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우처 제도라는 것을 도입하게 됐다. 가구를 오래 사용할수록 혜택이 돌아가는 제도다.

61쪽

디자인만 하면 가구를 예쁘게 잘 만드는 걸로 끝나지만 운영을 하고 배송까지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되면 각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특성과 사이즈까지도 고려하게 된다.

77쪽

의자의 경우 기성품을 많이 사신다. 나도 그렇게 권해 드린다. 왜냐하면, 금액대가 훨씬 비싸니까. 사실 의자를 만드는 게 테이블 하나 만드는 거랑 별반 다르지 않게 힘들다. 그렇다고 테이블 가격을 받을 수는 없다. 기성품들이 워낙 저렴하게 나온다.(공장제 카피 의자)

187쪽

보통 혼수를 여자가 해 가지 않나. 가구에 값을 지불하는 건 장모라 자연히 가구 디자인의 취향 역시 장모의 취향을 따를 수밖에 없다. 또 시댁 쪽에서는 "걔네 가구 어디서 해 왔대?"가 중요하다. (중략) 말하자면 디자인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장모의 영향력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개개인의 취향이 많이 가미됐고 이제는 비로소 디자인을 보기 시작한 것 같다.

258쪽

길종상가의 모든 가구는 평생 A/S가 보장된다. 이것도 물건을 더 튼튼하게 만들게 되는 원동력이다. 평생 A/S가 말이 쉽지, 꽤 번거로운 일이다. 그러니 아예 고칠 일이 생기지 않게 튼튼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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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기계 시대 - 인간과 기계의 공생이 시작된다
에릭 브린욜프슨 & 앤드루 맥아피 지음, 이한음 옮김 / 청림출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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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그럴싸한데 좀 실망했습니다. 공저자들이 MIT 슬론경영대학원에 재직하시는 정보경제학 전공자시니 당연히 학문적으로 출중하기야 하겠지만 인사이트를 느끼지 못했거든요. 그냥 본인들 분야 경영학 머터리얼 케이스 스터디 내용들을 정리한게 아닌가 싶은 느낌으로 읽었습니다.


같은 이야기들을 불필요하게 반복하기도 하고 해서 그리 공들여 썼다는 느낌도 안들었고요. 제가 보기에는 숙련편향적인 노동시장 재편과 인공지능, 로봇기술을 발전으로 알고리즘 짜기 쉬운 직업들부터 사라지는 추세인 게 확실한데 어떻게든 이를 명확히 인정하지 않고 최대한 낙관적으로 살펴보는게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미래가 제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본인들도 다 인정하면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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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쪽


역사적으로 보면, 고래 기름에서 말의 노동력에 이르기까지, 한 때 가치 있었던 생산의 여러 투입량들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것들은 설령 가격이 0이라고 해도 오늘날의 경제에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다시 말해, 기술은 불평등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실업도 낳을 수 있다.


299쪽


역소득세-밀턴 프리드먼의 'negative income tax'(음의 소득세)는 기본 소득을 노동 유인책과 결합시킨다. 소득이 기준선(2013년 기준 약 2만 달러) 보다 낮은 사람은 1달러를 벌 때마다 총소득은 1.5달러가 될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설령 일을 해서 얻는 임금이 적다고 할지라도, 일을 시작하고 일거리를 더 찾고자 하는 동기를 갖게 된다. 또 그들은 세금 환급을 위해 소득을 신고하려고 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파악하기 쉬운 주류 노동력의 일부가 된다. 게다가 역소득세는 실시하기도 비교적 쉽다. 이미 있는 기반 시설을 이용하여 세금을 계산하고 환급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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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스탈린 - 강철 인간의 태동, 운명의 서막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김병화 옮김 / 시공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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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작스럽게 찾아온 초겨울 추위덕분에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의 <젊은 스탈린>을 완독했습니다. 색인까지 다하면 700페이지가 살짝 넘는 분량인데 좁은 시장에서 이렇게 정성들여 번역해주신 김병화님 그리고 시공사에 감사하며 읽었습니다. 임명묵님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책이 있는 것도 몰랐겠지요.

 

스탈린이 어떻게 볼셰비키 혁명에 기여했는지, 권력을 잡게된 과정이 어땠는지도 전혀 몰랐고 독소전쟁에서 총알받이로 세운 인명들과 대숙청, 소수민족 이주 정책, 한국전쟁 지원 결정 정도밖에 몰랐는데 이 책덕분에 그가 권력을 잡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왔던 사람인지 좀 알 수 있었습니다. 션판의 <홍위병>처럼 약간 딴 세상 이야기 같아서 역사소설이나 무협소설같은 느낌으로 읽다보니 잘 읽히긴 하더군요. 게다가 툭하면 각주에서 ~~에 대한 내용을 에필로그를 확인하기 바란다.하는 식으로 저자가 수시로 떡밥을 던져두니. ㅎㅎ

 

대학원 수업 때 외교관 출신이셔서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셨던 모교수님께서 조지아(옛 그루지야)의 아름다운 풍광과 맛있는 음식들을 이야기하셨던 기억이 나네요. 남아공 대사도 지내셨던 분께서 은퇴 후에 조지아에서 컨테이너 단위로 와인을 수입하려고 진지하게 알아보셨을 정도면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었는데 이 책 덕분에 더 가보고 싶어졌네요.

 

그리고 대니얼 예긴의 <황금의 샘> 1권에서 아주 옛날부터 역청이 들끓던 바쿠 유전, 거기로 몰려든 노벨 일가와 로스차일드가(로쉴드가 프랑스에 정착한 로스차일드인지 처음 알았네요. 샤또 무통 로쉴드가 로스차일드의 와이너리였다니..)와 로열 더치 쉘의 영업에 심대한 훼방꾼이었던 노동운동가 스탈린에 대해 언급하고 지나갔었지요. 그런데 석유를 캐러 몰려든 그들이 유전설비를 세우고 바쿠~바툼 철도를 건설해서 만든 사회분위기가 있었기에 조지아에 볼셰비키가 의미있는 세력으로 커나갈 수 있었고, 스탈린이 출현할 수 있었으니까요. 스탈린이 스탈린그라드를 악착같이 지킨 덕에 독일이 바쿠 유전을 뺏지 못해서 패망한 것까지.

 

스탈린과 볼셰비키 혁명 동지들의 여성 편력들은 제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더군요. 얼굴도 잘 생긴 편이고 시를 읊고 노래도 그렇게 잘 불렀다지만 와룡강 무협소설 주인공들을 찜쪄먹는 수준이라니. 허허허... 마찬가지로 강인한 인간이지만 스탈린과 대척점에 있다고 보이는 세바스치앙 살가두가 떠오르더군요.

 

런던의 역사학자인 저자가 <젊은 스탈린>을 쓰면서 인용한 1차자료와 1차자료의 방대함에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2008년 남오세티아전쟁으로 CI S에서 탈퇴한 조지아가 저자에게 자국 문서고의 기밀서류들을 공개한 덕분에 내용이 더욱 풍성해진 듯 합니다. 시베리아 북극권에서 스탈린의 체류경험에 대해서 인류학자의 자문까지 받아가며 잘 묘사했는데 강철의 독재자가 마지막으로 단조된 시기가 아닌가 싶더군요. (그 전까지의 유배형들은 이게 형집행인가 싶더군요. 조선시대 유형이나 위리안치보다 널럴하니 원)

 

우리나라도 90년대 이후 구한말과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가 풍부하게 이뤄진 것으로 아는데 누가 <젊은 이승만>에 대해서 이런 두툼한 책 한권 펴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그런 책이 이미 나와있다면 추천 부탁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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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

 

우크라이나 남부의 제철소 소유자의 딸인 루드밀라 스탈은 소소보다 여섯 살 위였고, 감옥에도 이미 여러 번 다녀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파리로 망명을 떠났다. 두 사람의 관계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좀 더 젊었던 스탈린에게는 그 영향이 좀 있었다. 뒤에 스탈린이 레닌을 만나러 외국에 나갔을 때, 레닌과 가까이에서 일하던 루드밀라와 만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친분을 보여주는 증거로 남은 것은 전혀 없다. 오직 평생에 걸친 놀라운 유물 하나, 스탈린이라는 그의 유명한 이름만 남았다.

 

553

 

스탈린은 아들을 포기했지만, 투루한스크는 어떤 면에서든 그를 더 러시아인으로 만들었다. 아마 시베리아가 그에게 있던 그루지야식 이국적 특성을 얼려서 없애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는 시베리아 사냥꾼들의 특성인 자립성, 경계심, 고독을 크렘린으로 가져갔다. 스탈린 원수가 1947년에 쿠레이카에서 함께 낚시하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말은 진실이었다. 난 당신과 투루한스크에서 만난 내 친구들을 잊지 않았소. 아마 난 당신들을 절대 잊지 않을 거요. 몰로토프의 말이 그 점을 가장 잘 표현했다. 시베리아의 작은 조각이 스탈린의 여생 동안 그 속에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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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존재는 절대 아니었다. 두뇌, 확신, 지적 집중, 정치적 재능, 폭력에 대한 믿음과 경험, 까다로움, 보복심, 매력, 감수성, 무자비함, 감정이입 능력의 결여 등, 그라는 인간의 전적으로 괴상한 특이성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지만 활약할 무대가 없었다. 1917년 그는 무대를 발견했다.
역사상 다른 어떤 시대에도 그는 권좌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는 그 인간성과 그 순간이 동시에 존재해야 했다. 그루지야인으로서 러시아를 지배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선다는 일어나기 힘든 일은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적 성격에 의해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 그의 독재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포위된 상황에 의해, 유사종교적인 그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광신주의에 의해, 무자비한 볼셰비키적 남성성에 의해, 1차 세계대전의 살육 정신에 의해,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레닌의 살인적인 비전에 의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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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7-03-06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읽고 싶은 책이네요. 저는 이 책을 알게해준 장한별님에게까지 감사를 더합니다.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조갑제 지음 / 조갑제닷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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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잠자기 전에 몇 페이지만 보려고 집어들었는데  책을 덮고 나니 새벽 세 시네요. 조갑제 대표님 개정판도 절판이니 제발 추가 출판 좀 해주세요. 책 구하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ㅠ.ㅠ (출근 관계로 서평은 나중에. -> 이어서)

탐사보도의 걸작이더군요. 실력있는 기자가 4개월 동안 하나의 주제를 집중해서 파면 이런 걸작이 나오는군요. 저자가 "글을 잘 쓰기보다는 많이 발라 써야 한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홈런을 치려면 스윙을 많이 해야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뒷받침할 사례를 스스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특히 언론인과 법조인 그리고 그 길을 생각하는 분들에게 꼭 권하고 싶습니다. 사형제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도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형은 평화시에는 유일한 '합법적 살인'이고, 결과만 보면 사형선고를 내리는 판사는 데쓰노트에 피고인의 이름을 적는 '살인자'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죠.

사형제 폐지에 대한 논란은 최근으로 올수록 거세지고 있지만 우리나라가 마지막으로 사형을 집행한 것이 1997. 12. 30. 유영철씨라서 이미 20년이 지난 지금은 사형이 실제로 어떻게 결정되고 집행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느낌을 받지 어렵죠. 이 책은 1979년 사형을 당한 오휘웅씨를 중심으로 하여 1987년 출간 당시까지 있었던 여러 케이스를 다루고 있어서 지금 나오는 책들보다 도움이 됩니다.

이 책은 첫 문장부터 독자에게 충격을 줍니다. '끔찍한 살인 현장을 본 사람들은 사형 존치론자가 되고 처연한 사형집행을 목격한 사람들은 사형 폐지론자가 된다고 한다.'

이 책은 사회부 경험이 많은 민완기자의 집요한 취재경험들을 담고 있어 매우 구체적이고 생생합니다. 당시 당사자의 실명을 익명으로 처리하지 않고 있어 프라이버시 침해가 걱정될 정도로 말이죠. 수사 단계의 경찰, 기소단계의 검찰, 수사 및 공판 단계에서 진술한 증인들, 1심~3심 재판부와 심급별 변호인들, 재심신청을 담당했던 재판부의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지요.

심지어 저는 오휘웅씨 사건과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별건고소로 구속기간까지 연장하면서 고문을 방관하고,  짜맞추기 수사로 억울한 피의자 또는 피고인을 만들어낸 사건들의 수사검사, 기록상의 사실관계를 다퉈보지도 않고 무성의한 정상 변론에 치중했던 변호사, 기록을 제대로 살펴보고 판결서를 썼는지 의심되는 판사들의 이름과 기수, 학력 등을 토대로 현재도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서초동, 창원지법 등등에 사무실을 걸어놓고 있더군요. 다들 하나같이 자기 사진은 공개하지 않고 있었고요.

오휘웅씨의 대법원 국선 변호인이었던 이범렬 변호사(판사 재직 중 사법파동 때 퇴직)께서 하신 "나도 변호사를 해보니까 비로소 사물을 보는 새로운 눈이 생기더라.", "미국처럼 우리나라도 변호사 중에서 판사가 선임되야 한다.", "당해보는 입장에 한 번 쯤 서본 사람이라야 당하는 사람들의 심경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들도 머리에 콱콱 박히고요.

제10장 <고문과 자백>은 왜 형사소송법이 지금과 같은 체계를 갖추고 있는지 그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들로 가득합니다. 이 책 중에서도 단 한꼭지만 꼽는다면 이 챕터는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네요. 범인조작의 공식, 고문수사를 자행하는 경찰 수사관들의 심리와 제약요건, 허위자백에 속은 저자 본인의 경험 등을 말하는데 '수원역 노숙소녀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의 재심에서 피고인들의 무죄를 밝힌 박준영 변호사님의 사례를 보면 사회적 약자들이 강압수사와 짜맞추기 수사에 의해 범인으로 만들어지는 건 엄혹하던 시절의 옛이야기는 아닙니다.

예전 민변 연수를 갔을 때 당시 유우성씨의 변호인이셨던 장경욱 변호사님께서 초면에 신출내기인 저와 동기들에게 국정원 사람에 대해서 이 책에 나오는 고문경찰과 비슷하게 묘사하시길래 내색은 안했지만 '이 분 옛날에 NL쪽 학생운동을 너무 많이 하신 분 아닌가? 요즘 시대에' 하면서 뜨악했었는데 얼마 후 국정원 직원들의 유우성씨 동생에 대한 고문, 유우성씨에게 유리한 증거의 은닉, 선양 총영상관까지 동원한 중국 공문서 조작등 희대의 간첩 조작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던 기억이 나네요.

빨리 다음 판을 찍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 언론인 조갑제씨가 왜 이렇게 극우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좀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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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쪽

형법 제66조에 사형은 교도소 안에서 교수형으로 하고, 군형법은 지정된 장소에서 총살로 집행하도록 정해 놓았다. 사형이 교수형과 총살형으로 정해진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다. 법에 명시된 것은 1905년 형법대전 제94조가 "사형은 絞(교)로 한다."고 못 박은 것이 처음이다. 교수형은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채택되고 있는 사형 방법이다.

59쪽

심장이 멎는 것을 죽음으로 정의할 때 교수형의 경우 평균 사망시간은 교수 시작으로부터 14분쯤이라는 것이 일본 측 통계다. 개인차가 많아 최단 4분 35초, 최장 37분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어느 퇴직 교도소장은 사망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균 14~15분이라고 말했다.

64쪽

사형집행에 참여한 직원들에겐 오후에 자유 시간을 준다. 집행이 끝났을 때 참여 직원들은 눈에 핏발이 서는 등 제정신이 아니다. 이들은 서둘러 구치소 근처의 술집으로 몰려간다. 깡소주만 1,2,3차로 밤새도록 퍼 마신다. 거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 전날 밤에도 잠을 못 이룬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도. 아무리 합법적인, 또 사회정의를 위한 '살인'이라 해도, 그들의 손에 죽어간 사형수들은 오랫동안 부대끼면서 정이 들었던 얼굴들이다.

106쪽

어떤 자백이 진실된 것인지, 거짓인지를 가리는 기준으로 흔히 '비밀의 폭로'란 말이 쓰이고 있다. 즉, 진실된 자백에선 수사관도 미처 몰랐고, 현장에서도 드러나 있지 않았던, 범인만이 알고 있는 새로운 사실이 반드시 폭로된다는 것이다. 이 비밀의 폭로가 없는 자백은, 일단 그 신빙성을 의심해야 한다는 논리다.

198쪽

많은 피고인들은 2심이 끝날 때 비로소 (형사)재판이 뭔가를 알게 된다고 한다. 공판정에서 자신을 어떻게 변호하고, 어떻게 해야 좋은 인상을 재판부에 줄 수 있으며, 소송법상 보장된 피고인의 권리를 어떻게 하면 활용할 수 있는지를 뒤늦게 깨닫는다는 것이다.

재판은 피고인 자신의 죄상에 대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검사, 변호사, 판사가 어려운 법률용어를 구상하면서 진행을 주도해 가고 피고인은 구경꾼이 된 듯한 기분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2심이 끝났을 때 무엇을 깨달았다 해도 너무 늦다. 사실심은 끝났고, 법리의 적용이 타당한지 여부를 따지는 상고심만 남겨둔 상태에서는 그 깨달음이 별 무소용인 것이다.

278쪽

오 씨가 사형수 대우를 받기 시작한 1975년 서울구치소에서는 복역수들이 불교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었다. 개신교와 천주교만 목사와 신부들을 보내 선교를 하고 있었다. 불교에서 승려를 보내려고 해도 개신교와 천주교계, 그리고 교무계 담당직원들이 반발을 하여 성사되지 않았다.(불교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은 1976년 3월부터였다.)

368쪽

한국의 언론은 용어선택에서부터 인권의식이 결여돼 있고, 경찰의 수사풍토를 닮은 보도풍토를 이루고 있다. 이런 풍토에서는 '용의자 체포'는 박력도 없고, 자신도 없어 보이고, 모험을 해서라도 '진범 체포'라고 해야 한발 앞서간 취재라는 인상을 준다고 기자들은 믿고 있다.

378쪽

고문의 버릇을 익힌 경찰은 수사능력이 약해진다. 은밀하게 증거를 수집하고, 뒤를 쫓아 그 범인을 붙들었을 때는 이미 상당량의 증거를 손에 넣고 있는, 그런 식의 수사는 시간도 걸리고 이력도 많이 듦으로, 의심이 가는 사람을 일단 족쳐서 거기서 자백과 물증을 얻어내자는 식의, 쉽게 먹으려 드는 수사습관을 갖게 되면, 정교한 수사기술이 발달할 리가 없다.

428쪽

'자유 심증주의'란 어마어마한 재량권을 가진 판사는 자신만의 믿음으로써도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한 인간의 주관적 확신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재판의 본질은 중세 암흑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달라진 것은 그 확신에 도달하는 절차를, 현대에서는 형사소송법으로 엄격히 규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송절차야말고 인간이 오판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그 수많은 누명 썼던 사람들의 한과 피가 스며 있는, 지혜의 보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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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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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 지금은 페북을 접으신 것으로 추정되는 예전 페친님께서 격찬하신 소설입니다. 과연 문학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빼어난 작품이더군요. 바로 전에 읽었던 국내 유명 작가의 신작이 실망스런 태작이어서 다시는 이 사람 소설은 찾아보지 말아야지 다짐할 정도의 내상을 입었는데 치유가 잘 됐습니다.

 

어제 밤늦게 다 읽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말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듯 얼떨떨했습니다. 책을 덮을 때 내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읽었다 싶었거든요. 그래서 잠자고 읽어나 다시 한 번 읽었네요. 다시 읽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줄리언 반스는 에이드리언 핀의 입을 빌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말로 가상의 인용처리를 합니다. 이 책의 주제가 되는 문장이죠.

 

두 번째 읽으며 당사자 본인의 증언이 없더라도 에이드리언 핀의 결단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부정확한 기록들을 꽤 찾을 수 있었습니다.(제 독해력이 이 소설을 겨우겨우 이해할 정도라도 돼서 다행입니다.) 헌트 선생의 역사학자들에 대한 변호가 일리가 있었던 셈이죠.

 

같이 살아갔던 친한 개인에 대한 기억과 예감도 이리 부정확한데 그러한 개인들이 연쇄사슬처럼 얽혀있는 역사에 대해서 아는 척을 하고 내 분석이 맞다고 뿌듯해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싶어 울적해지네요. 제가 관심 있고 좋아한다고 생각해온 역사가 무엇인지 그 바탕부터 다시 생각하게 해준 좋은 소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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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책임의 고리 하나하나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모두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슬이 긴 건 아니죠. 하지만 물론, 책임소재를 묻고자 하는 저의 바람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대한 공정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제 사고방식의 반영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중점적인 문제 아닌가요, 선생님? 주관적 의문 대 객관적 해석의 대치, 우리 앞에 제시된 역사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가가 해석한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101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162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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