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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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대온실이 지어진 일제 시대와 6.25, 그리고 현재로까지 이어지는 여러 층위의 사람들이 지닌 사연을 추적해가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돋보였던 작품. 무엇보다 가장 짜릿했던 건 영두가 사랑했던 할머니의 집을 리사가 상속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인과응보지 뭐! 대온실도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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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필링스 -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앳(at) 시리즈 1
캐시 박 홍 지음, 노시내 옮김 / 마티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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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는 코로나 대확산 이전에도 있었고 작가도 누누이 말했듯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어져 왔으며 살아오는 내내 있었고, 인종주의가 전혀 새롭지도 않고 결코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가장 최근에 뉴스로 접한 것은 아마도 코로나 대확산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확산으로 인하여 유럽에서 이미 인종주의와 아시아인 차별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고 곧 미국에서도 아시아인에 대한 증오 범죄가 뉴스에서 빈번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아시아계 노인과 여성을 표적으로 삼고 자행된 폭행 - 침 뱉기, 괴롭히기, 인종차별적 욕하기, 얼굴을 겨냥해 주먹으로 치기 -과 식당에서 서비스를 거부한다는 뉴스,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가게를 훼손하고 불을 지르는 등의 뉴스를 거의 매일 접할 수 있었다. 가장 충격이었던 건 2021년 3월 16일,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마사지숍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사망자 8명 중 4명이 한국계였다. 범인은 일부러 아시아계가 많은 마사지샵을 골라 범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너 필링스>는 코로나 확산 직전에 출판이 되었고 "이 불안하고 사나운 시기"에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 책을 읽고 책을 추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종차별 급증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시의적절성 덕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읽게 되었다. 물론 이 책 집필 이전에도 아시아인 혐오 정서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는 배경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작가가 자신의 인종 정체성을 나름대로 솔직하게 성찰하고 따져본 결과물인 것이다. 

이 정도의 정보는 솔직히 약간의 관심만 가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정도이지만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환경에 노출이 되어 살아왔고 나는 이 작가의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인지라 건조한 문체로 쓰여진 작가 소개의 글을 읽노라면 시인으로 작가로 대학 교수로 성공한, 정말 잘 자란 한국계 미국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마이너 필링스'.... 

그런데 이 책의 첫 문장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내 우울증은 가상의 틱 장애와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한 시간이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꺼풀에 경련이 일어나거나 입 한구석이 따끔거리기를 기다렸다.(19쪽)" 가상의 틱 장애, 한 시간이나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꺼풀이 경련이 일어나길 기다리다니... 대체 어떤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기에 이러는 건지, 이어지는 과정들을 읽는다고 해서 작가의 상황에 대해 다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면 정말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깊이 빠져들고 싶은데 이 사람들이 겪은 깊이 만큼 나도 그만큼 깊이... 그게 안돼서 안타깝다. 더 잘 알지 못해서 답답하다. 평생 조국을 떠나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인종주의와 유독 아시아인 차별을 당하고 그것이 트라우마로 남아 정신적인 문제를 가질 정도의 경험을 한다는 게 흔히 일어나는 일일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계속 읽어나가면서 이 생각은 점차 바뀌고 있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유나이티드 항공기에서 '데이비드 다오(호치민 의대를 졸업한 내과 전문의이며 부인은 소아과 전문의이다)'라는 베트남계 미국인이 강제로 끌려나가는 영상에 대한 글을 읽을 땐 나도 같이 분노했고 다오 박사가 겪었을 '깊은 수치심'에 대해 공감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름만 검색해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아마 그 수치심이란 건 평생 씻기지 않을 거라는 걸... 그 수치와 굴욕을 극복하기 쉽지 않을 거다. 다오 박사와 가족은 명예훼손과 심리적, 육체적 피해보상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였고 막강 변호인단을 구성하였다.





성장하는 동안 작가를 비롯해서 아시아인으로 사는 굴욕은 (흑인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근면한 한국인, 소득 수준이 높은 소수 인종 한국인은 흑인이나 남미 국가에 비해 좋은 처지에 있다는 거짓말에 주눅이 들어있다. 그와 같은 신화는 너무도 은근히 퍼져 있어서 작가는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남들에 비해 나쁜 처지가 아니었던 거 아닌가 하는 의심에 시달린다. 

인종주의의 특징은 아동을 성인처럼 취급하고 성인을 아동처럼 취급한다는 점이다. 부모가 아이처럼 굴욕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깊은 수치심" 을 유발한다. 우리 부모가 백인에게 무시당하거나 놀림 당하는 것을 수없이 보면서 성장한다. 그 일이 너무 관행처럼 발생해서 엄마가 어떤 백인과 상대할 때면 자신이 항상 끼어들거나 엄마를 옆으로 잡아 끌 준비를 한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자란다는 것은 권위 있는 사람이어야 할 부모의 굴욕을 목격한다는 것, 그리고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뜻한다.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112쪽)." 

차라리 영화에서"만" 보았으면 싶은 굴욕적인 일을 일상적으로 겪으며 성장하는 작가의 여러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이런 나라도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아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어찌 보면 정말 사소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일도 있었다.

동생이 아홉 살이고 내가 열세 살일 때였다. 쇼핑몰에 갔다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어느 백인 부부가 안으로 들어오려고 유리문을 열었다. 나는 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줄 알고 남자가 마지못해 문을 붙잡고 있는 동안 재빨리 그리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가 고함쳤다. "난 중국놈들한테는 문 안 열어줘!" 동생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 남자가 왜 그렇게 못되게 구는지 동생이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일은 처음 당해봐." 동생이 울었다. 나는 쇼핑몰로 되돌아가 그를 죽이고 싶었다. 나는 어린 여동생을 보호하지 못했으며, 증오 때문에 우리를 아이로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성인 남자에게 살인적인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116쪽)


선진국 국민이라고 해서 모두 선진 국민이라고 누가 그래. 너무 무식하고 혐오스러워서 말을 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 순간에 나였대도 죽이고 싶었을 거다. 그 순간에 "난 중국인이 아니야!" 라고 쏘아붙이기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곱씹으며 자신을 좀 먹었을지 상상이 다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보다 더한 일도 있었다.




서울에 사시던 외할머니가 작가와 동생을 돌봐주기 위해 오셔서 같이 살고 있을 때였다. 작가의 아버지의 사업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아 그 당시에 교외 백인 주거지역의 새 집에서 함께 살던 할머니는 외로워하셨다. 산책하러 나가시면 어떤 때는 남의 집 쓰레기통에 버려진 물건들을 들고 오기도 했는데 어느 날 할머니의 산책길에 따라 나섰다가 생긴 일이다. 


할머니가 우리와 같이 살게 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캘리포니아 교외의 인도는 깨끗하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집집이 스프링클러가 잘그락거리며 잔디밭에 물 주는 소리를 빼면 우리 동네는 고요했다. 할머니는 어느 집 앞뜰에서 레몬이 달린 가지 하나를 꺾어 집으로 가져가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노닥거리던 한 무리의 백인 아이들을 만났다.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기로 마음먹었고, 나는 불안해졌다. 할머니는 아이들 속으로 무턱대고 걸어 들어가 악수를 하기 시작했다. 그게 미국식이니까. 아이들은 깜짝 놀랐지만 차례로 할머니와 악수를 했다. 걔들이 할머니의 손을 조금 지나치게 세게 잡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헬로'라고 하자, 아이들이 '헤로'하고 응수했다. 그중 한 아이가 할머니 얼굴에다 대고 엉터리 수화 동작을 흉내 냈다. 그러더니 갈색 머리카락을 축 늘어뜨린 키 크고 마른 여자애가 슬그머니 할머니 뒤로 가서 온 힘을 다해 할머니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할머니가 땅에 넘어졌다. 애들이 전부 웃음을 터뜨렸다.(115쪽)



뭐 이 정도면 거의 악마지 악마! 나도 머리가 하얘지고 창피하고 너무도 굴욕적이어서 그 당시엔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었을 거다. 하물며 8살 어린 여자 아이와 나이 많으신 할머니의 조합이니 무슨 대응을 할 수 있었을까! 할머니는 그 일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했고 아버지는 차로 이동하면서 그 여자애가 보이는지 살피라고 강조했다. 정지 신호에 멈췄을 때 그 아이가 보였는데 아버지는 창문을 내리고 그 애에게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백인 아동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백인에게 그토록 격분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아이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그 아이는 거부했고 우리를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차에서 내려 쫓아가자 잽싸게 도망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작가는 아버지가 "나대는 행동, 과민 반응"을 한다고 이웃들이 생각할까 봐, 그래서 아버지가 벌이라도 받게 될까 봐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잘못한 건 그 아이들을 비롯한 백인들인데 그 백인들의 국가는 아시아계 국민을 지켜주지는 않는다. 





"언어적, 신체적 충동에 노출될 가능성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게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주류 다수 백인 남성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다" 이러한 심정을 그 사회에 토로한들 들어주기나 할까. 우리는 작가가 느끼는 감정을 일정 부분 공감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느끼는 "소수적 감정(minor feelings)"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소수적 감정"은 "일상에서 겪는 인종적 체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 받거나 무시 당하는 것에 자극 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따라서 보기에도 안좋은 일련의 인종화된 감정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어떤 모욕을 듣고 그게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뻔히 알겠는데도 그건 전부 너의 망상일뿐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소수적 감정이 발동한다.(84쪽)"



"소수적 감정"은 인종화된 현실을 부정하는 미국식 긍정성을 강요 당해 인지 부조화를 겪을 때, 나는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상황이 훨씬 좋아졌다"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실패자로 느껴지는데 "아시아계 미국인은 성취가 대단하다"라는 소리를 들을 때 발동한다. 또 '소수적 감정'은 어느 교사의 증언에서 "아이들이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자기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자기 회의와 행동 장애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또 우리가 까다롭게 굴려고 마음 먹을 때-다시 말해 솔직하려고 마음 먹을 떄-배어나오는 감정이라고 비난받는다. 소수적 감정이 촉발되면 적대, 배은망덕, 시샘, 우울, 공격의 감정으로 해석되며, 백인들이 도가 지나치다고 여기는 인종화된 행태가 그런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간주되고 그러한 아시아인의 감정은 한마디로 "과잉반응"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미국에 살고 있는 재미교포들 중 일부는 주류사회의 편입과 성공을 목표로 교육에 열을 올렸고 일부는 현실에 한탄하며 경쟁에서 밀려나기도 했지만 우리가 알기로 대다수는 근면과 노력으로 개인적 성취를 이루었다. 작가도 예외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성취와는 별개로 이 "소수적 감정"에서 해방되어 초연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성공한 아시아인으로 평가받는 한국계 미국인 사회가 개인적 성공의 한계를 앞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해결해 나갈지, 어떻게 연대하고 변화해나갈지, 작가가 말하는 소수적 감정이 어떻게 변해갈지 그 무엇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나는 그저 작게나마 응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아차차... 그리고 절대 빼놓으면 안되는 부분이 바로 '예술가의 초상'에서 다룬, 이렇게 시작하는 문장이라 결코 잊고 싶지 않은...

"1982년 11월 5일, 그러니까 그해 가을 들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추워진 날에 31세의 미술가 겸 시인 테레사 학경 차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직물 부서에서 사직했다. 그는 하얀 앙고라 스웨터에 빨간 가죽 코트를 입고 적갈색 베레모를 썼다. 가죽 장갑도 끼고 양말도 두 겹으로 신었다(207쪽)" 바로 <딕테>의 저자 차학경에 대해 쓴 에세이이다. 차학경은 앞서의 문장에서 보이는대로 "하얀 앙고라 스웨터, 빨간 가죽 코트, 적갈색 베레모, 가죽 장갑과 양말"의 차마 언급하기도 힘든 끔찍한 모습으로 -후일 언론에서 불의의 사고라고만 언급되고 있는 -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딕테>를 읽고 나서 꼭 다시 읽어봐야 한다. <마이너 필링스>를 읽고 나면 <딕테>에 이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문했다. 책은 내일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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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키스의 말 - 2024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배수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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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바우키스의 말>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 바우키스와 그녀의 남편 필레몬은 변장한 신을 잘 대접한 보상으로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을 말한다.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순간 서로의 몸에서 자라나는 잎사귀를 보는 순간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배수아 작가의 <바우키스의 말>은 이 마지막 순간에 관한 아름다운 소설이다. 하지만 바우키스의 말이 무엇이었을지 알 수 없듯이 배수아 작가의 소설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붙잡으려는 생각에 문장을 여러번 자꾸 읽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리듬을 발견하게 된다. 




특별한 줄거리를 찾을 수 없는 소설이지만 그래도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음악가(이 작품에서는 등장 인물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모형 비행기 수집가, 예술가, 음악가'라는 식으로 호명이 된다)'의 즉흥 퍼포먼스에 초대를 받았을 때의 일을 쓴 문장들이었다. 음악이 연주된 홀은 텅 비어 있고 초대를 받은 몇 사람만이 연주회장에 모여있었는데 음악가는 오래전부터 피아노 앞에 앉아 뚜렷한 음악의 시작도 알 수 없고 "최초의 음이 발현하기를 기다리는 행위"를 하는 것, 그것이 전부인, 그럼에도 계속해서 계속해서 듣고 있는 행위..., 그러면서 음악가는 여기에 없는 것들을 향해서 귀 기울임으로써 음악을 시작하고 있었다 말한다. 


"보리수 안의 바람, 강비탈에 핀 부처꽃들의 기울어짐, 언젠가 붉은 가을, 자갈을 밟으며 다가오는 발자국, 기차가 도착하는 신호음, 창으로 들어온 바람에 책상 위의 편지들이 흩어지는 소리, 서로 은밀하게 마주 잡는 두 손, 새들이 만들어내는 허공, 하나의 편지 위로 내려앉는 또 다른 편지, 그리고 붉은 가을, 오직 하나의 어휘가, 하나의 음이, 하나의 그림이 떠오를 때까지 마침내 모든 음들이 소리의 최소 성분으로 수렴될 때까지. 멜로디 없는 음악, 최소의 음악. 돌과 나모의 내부로부터, 저절로_중얼거림. 겨울 아침 서리의 속삭임. 지금 여기 없는 것들의 기억. 그 어휘가 무엇일까. 강물에 비친 하루. 아무도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음악가는 피아노 건반을 하나 누르고 소리의 울림이 사라질 때까지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았다.(45쪽) 




이어서 연주회장의 몇몇 사람들이 돌을 하나 들고 음악가의 연주에 공명하여 어느 순간, 자신이 원하는 순간, 음악의 일부가 되어 돌을 떨어뜨리면서 하나의 어휘를 발설하는 행위를 하게 되는 이 퍼포먼스, 이 연주가 아주 아주 느리게 느리게 천천히 이어져 나간다. 그 어휘가 무엇일까! 이 문장들은 자연스럽게 마지막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마지막 발화를 삼킨 바우키스를 연상하게 만들고, 돌과 돌이 떨어지는 사이, 음악가는 사람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해주는데 "이 곡의 이름은 '바우키스의 말'입니다.(51쪽)"   


"말을 꺼내려는 인간이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이미지는 소설 전체를 장악하면서 여러 번 반복된다. 이를 테면 '나'는 언젠가 모형 비행기 수집가와 숲을 산책하다가 각각 나무를 깊이 껴안고 포옹한 적이 있다. 나무의 떨리는 내면이 느껴질 때까지. 그제야 마침내 입 없이도 하나의 어휘가 발설되고, 두 사람은 숲속 나무의 이미지와 포개진다. 그러니까 가장 결정적인 말이 나오기 위해서는 언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이 영원히 발설되지 못할 것 같은 어휘가 언어의 차원에서 음악의 차원으로 변신하는 순간에 예상치 못하게 온다."(8~9쪽, 심사평 중에서) 


이 단편의 의미를 '나무'에서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본다. 최후의 순간 바우키스는 나무로 변하는 자신을 느끼고 지금 이 순간 나무로 변하고 있을 필레몬을 느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이 나무껍질로 변하기 직전, 바우키스는 사랑하는 필레몬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으리라. 마침내 도달한 최후의 순간, 하나의 어휘가 해방되었으리라. 그리고 나는... 배수아 작가의 잡히지 않지만 아름다운 문장들을 되풀이해서 읽고 있었다.






문지혁의 <허리케인 나이트>는 마지막의 반전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도 이 단편의 줄거리는 계속해서 기억할 수 있을 거 같다. 문지혁의 단편과 더불어 예소연 작가의 <그 개와 혁명>은 《2025이상문학상작품집》에서 이미 읽었기 때문에 다시 여기서 새삼스레 리뷰를 쓰지는 않겠다. 예소연 작가의 단편은 이상문학상 대상수상작이었는데 아버지의 장례와 관련한 단편이었고 개인적으로는 사실 공감하기는 어렵고 너무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작품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과정도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면서 하나도 재미있지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재미있게 읽은 단편이 있는데 예소연 작가의 작품 외에 아버지의 장례와 관련한 작품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박지영 작가의 <장례 세일>이었다. 이 세상 모든 물건들, 아니 인간 비인간 할 거 없이 모든 것들을 다 파는 세상인데 아버지의 장례를 세일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는 전제 하에 아버지 독고 씨의 장례 비용을 가늠하고 한편으로는 지극히 상식적으로 최소한의 체면을 차려줄 수 없을 지도 모를 얼마되지 않을 조문객을 걱정하면서 공정한 죽음 비용에 대해 생각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리고 그 과정이란 것이 아버지란 사람의 애도를 소비할 가능성이 있는 지인의 지인들까지 찾아낸, 최대한 많은 예비 조문객들에게 앞서서 "따뜻하고 육즙이 가득한 맛있는 동그랑땡의 맛을 보여주고 애도를 준비하게 하는 것"을 영업 목표로 하여 아버지의 영업일지와 수첩들을 토대로 감사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흥행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시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하지만 평생을 그러한 기회와는 등을 지고 산 아버지가 그럴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현수의 노력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인연과 뜻밖의 대가 없는 순수한 애도를 받게 되면서 현수는 깨닫게 된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는데 애써 하는, 어떤 가격을 매겨도 공정하지 않은 완벽히 불공정한 선의"(143쪽)에 대해! 아무 관계 없는, 아무 이유 없는 완벽한 타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완전한 선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한 사람 몫의 공정. 

현수는 아들이면서도 아버지의 인생을 '그래도 싼' 인생으로 비하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나간다는 사실이 먹먹하게 다가왔다. 아버지의 인생을 '그래도 싼' 인생이라고 말하는 이면에는 자신에 대한 비하도 담겨 있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의 삶과 죽음에 가능한 애도란 없을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지금부터 천천히 공정가를 높이는 장례 세일을 준비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그 늦은 밤, 뜻밖의 완전한 타인의 완벽한 선의에 의해 이루어진 애도의 몫을 보면서 오늘밤만큼은 "아버지 독고 씨의 죽음과 함께 세상의 모든 '그래도 싼' 죽음을 모르는 자의 선의로 다만 애도해보고 싶어지는 것"이었고, 내 애도의 값은 내가 결정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전춘화 작가의 <여기는 서울>은 조선족 청년인 '영화'가 한국의 서울에 있는 대학에 대학원생으로 유학을 오게 되고 연변에 있는 아버지의 소개로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본부'라는 단체에서 일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잘 보여주어 흥미로웠다. 여태는 우리 눈에 비친 조선족, 연변 동포(혹은 고려인, 새터민, 일본 교포 등으로 치환가능하다)를 우리의 시각으로 조명했다면 이 작품은 조선족 청년의 눈으로 본 현재의 한국과 청년세대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한국말을 쓰니까 그저 적응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결코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하물며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다르고 우리와 달리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라서 우리의 역사를 배울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해나가고 원활하게 대화를 해 나간다는 것이 어려운 과정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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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다니엘 J. 옮김 / 오픈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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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커버가 되어 스스로 적진에 뛰어든 리처의 원맨쇼 같은 활약은 이번에도 멋졌다. 악당을 처단하는데 화려한 수사 따윈 필요 없다. 오직 한번의 단호함이 필요할 뿐.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옳은 일을 하는 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문장이 잭 리처에게 딱 맞는 문장이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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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4-02 0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어제 드라마로 이거 다 봤어요. 역시 재미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섹스신 싫어..
이제 책을 읽는 일만 남았습니다!!

은하수 2025-04-02 10:45   좋아요 0 | URL
저 근데 그 섹스신이 꼭 필요한가 싶었어요. 굳이...
철저히 남자의 시각이랄까... 제가 그때의 도미니크 입장이었으면 백퍼 안했을텐데...
책. 금방 읽으실겁니다^^

단발머리 2025-04-02 1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영화와 책 모두 봐야겠습니다! 으앙~~

은하수 2025-04-02 20:30   좋아요 0 | URL
저도 함 보고 싶어요~~~
아마존프라임도 가입해야 할까요 ㅠ
 
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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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11월'을 지나 '불확실한 그해 봄'을 지나는 팬데믹 기간 동안 확실한 것은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것 뿐이었다. 미국에서 그렇게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들도 없었을 거다. 코로나 초기, 혼란 속에 확진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또 그렇게 "어이없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을 보면서 진정 놀라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는 빠르게 봉쇄되었고 멀리 집을 떠난 사람들은 한동안 그곳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작중 화자인 노년의 작가는 2020년 봄, 뉴욕이 봉쇄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지인의 앵무새를 돌보는 일을 대신하게 된다. 전임자였던 지인의 친구 부부의 아들이 불가피하고도 무책임하게 도시를 탈출하면서 어쩔 수 없이 버려진 앵무새는 지능이 높고 영리한데다 활달하기까지 해서 이틀 이상을 돌보는 사람이 없이 버려진 채로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말에 지인의 앵무새를 돌보기 시작한다. 앵무새의 이름은 '유레카'이다. 유레카와 작가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둘은 이러저러한 놀이를 하기도 하고 하는 사이에 약간의 유대감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뉴욕으로 자원봉사를 하러 온 호흡기 내과 의사가 거처를 마련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자신의 집을 내어주면서 유레카가 있는 지인의 집으로 들어와 동거를 시작한다. 



산책을 즐기는 작가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며 점점 긴 시간 동안 밖에서 머물게 되었고 유레카와 같은 야생 동물들과의 유대, 교감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기도 하는데, 이어져 나가는 생각의 방향을 읽어나가는 것도 흥미로웠다. 다큐멘터리로 보았던 내용들도 떠올리며 생각을 이어나가는데. 그 생각이란 크레이크 포스터라는 사람이 제작한 프랑스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내용이다. 그가 우울증에 시달릴 때 그에게 삶의 활력을 다시 찾게 도와준 문어와 우정을 쌓아나갔던 시간들을 영상으로 제작한 것이다. 그 우정과 유대감은 분명 문어의 호기심과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문어가 험난한 삶의 여정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다시 일어나 자신감을 되찾는 자신을 보게 해준다. 그러한 자신감을 함께 다이빙을 시작한 어린 아들에게 불어 넣어주고자 애쓴다. 

    "그리고 그는 아들이 더 위대한 교훈을 체득하는 걸 지켜본다. 그것은 '온화함'이다. 온화함은 자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배우게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크레이그 포스터는 말한다... ... 아마도 영상에 담긴 증거가 없었더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생의 문어와 인간의 다정한 상호작용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114~115쪽)



이러한 다정함과 온화함이야말로 팬데믹 시기에 처한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일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을 읽으면서 그래서 너무 좋았다. 다정함, 온화함. 마음이 따뜻해지는 말이다.

팬데믹으로 도시가 봉쇄되었지만 작가의 산책과 유레카와의 놀이, 그리고 먹고 자는 일상은 계속되어야 하고 작가는 작가들의 글쓰기에 대한 견해들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글을 생각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 어서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한다. 



작가가 잠든 어느 날, 앵무새를 버리고 도시를 탈출했던 대학생이 연락도 없이 불쑥 돌아온다. 노년의 작가와 에코 테러리스트이며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어린 대학생과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부모와의 관계에서 어릴 때부터도 어려움을 겪었던 대학생 '베치'와는 결과적으로 함께 동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서로의 생활을 방해하지 않고 피해다니기에 좋을 정도로 넓은 집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어려움을 인정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세대를 뛰어넘고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도시에서 두 사람은 그 관계에서 일말의 안정을 찾기도 했다. 이 모든 일들이 그해 봄의 불확실성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노 작가의 생각의 갈래들은 여기로 저리고 흘러가는데 독백인 듯한 어린 시절의 회상들이 에세이처럼 편하게 읽힌다. 한편으로는 노년의 작가로서의 생각들에 공감이 가기도 했다. 그리고 노년의 작가와 Z세대 대학생의 연결이 흥미롭게 다가와 따뜻함을 느꼈다. 노 작가 생각의 한 편...


    "그날 그렇게 바위에 앉아 있으려니 차가운 물속의 손이 시리기 시작했지만, 중대한 깨달음에 이르기 직전인 것 같아서 집중력을 잃고 싶지 않아 그냥 참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가는 건 이 지나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 한 방향으로 빠르게 흐르고 붙잡거나 멈출 수 없다. 그게 어른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피할 수 없는 힘이다. 삶도 다른 모든 사람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지나간다. 나는 그걸 이해했다.하지만 아직 어린애라 두려움을 몰랐다. 그저 내 마음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것에 대한 흥분 뿐이었다. 나는 자랑스러움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249쪽)




노작가의 일상은 온통 작품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니까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이 재밌으면서도 코믹하고 유머러스해서 하나도 심각하지 않았다. 때론 뭐 이런 생각까지 다하지? 싶은 하등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나 이야기들도 들려주고 있어서 이 작가가 꽤 긍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인가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평생 심각한 정신적 외상은 겪지 않고 살아내는 사람이 아닐까도 생각하게 되었다. 좋은 자세가 아닐런지... 그래야 힘든 시기를 잘 버텨낼테니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바닷가의 루시>도 같은 팬데믹 기간 중에 일어난 일을 소재로 했는데 이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일단 그 저변에 심각함이 짙게 깔려있다. 그래서 좋아하는 작가였고 루시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윌리엄과 무사히 잘 견뎌내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는 없었다. 메인 주 바닷가로 탈출한 루시의 이야기가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나의 처지와 감정과 부합하는 면이 있었다. 힘들고 감정 소모가 많으면서 스트레스가 쌓이는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이 걱정되고 만나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럴 수 없어 몹시 괴로웠다.  



그해 봄, 온통 불확실성 투성이인 시간에 난 마스크를 끼고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사가 모기업이 위치한 곳으로 이전을 하게 되면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고 다행히 출퇴근이 원활하지 않은 30km 이상의 거리로 이전하였기 때문에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다음 해 봄부터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는 1년 과정 수업을 듣게 되었다. 집에서만 갇혀있다시피 생활했지만 그 덕분에 힘든 시간을 잘 견딜 수 있었다. 저녁에는 아파트 바로 옆 공원으로 매일 운동을 다녔다. 잘 닦인 산책로를 따라 더 멀리까지 갔다올 때도 있었다. 오로지 할 게 공부밖에 없어서였는지 다행히 성적은 굉장히 잘 나왔다. 6개월 과정의 줌으로 하는 원격 강의도 그때 처음 경험했다. 색다르면서 어색하고 그러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 재밌었다. 문제는 학과 과정이 끝나고였다. 아파트 문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마스크를 끼어야하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너무 어렵고 조심스럽던 시기여서 무언가 집중하던 일이 갑자기 끝나버리니 너무 힘이 들었다. 그래서 그 힘든 시간과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튕겨져 나온 곳이 지금 이곳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건 잘한 일이었다! 새삼스럽게 그 시기를 돌아보니 인생이 정말 예상치 못한 곳으로 나를 덜렁 들어 데려다 놓은 것처럼 의외의 곳에서 살게 되었지만, 직장을 다니고 또 1년 반이라는 기간 동안 공부를 하면서 보낸 시간 동안 어려운 시기를 잘 견뎌낼 수 있었고, 이곳으로 이사한 후엔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대문 밖을 나설 수 있고 동네를 산책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가족들도 건강하게 잘 지나왔다. 이렇게 생각하니 난 루시보다는 노작가와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저 긍정적인거 말이다. 그래서 다행이지 뭔가. 그리고...느닷없이 창궐한 코로나는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노작가와 베치와 유레카의 동거는 아기를 낳은 집주인이 돌아오면서 끝나게 된다. 베치는 로프트 아파트를 세 내어 떠나면서 유레카를 데려갔다. 노작가 나름의 애정을 쏟았던 유레카를 향한 마음은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유레카의 야생성을 키워주고 싶어하는 베치의 노력을 인정하기로 했다. 별로 필요하지 않는 문장일 수도 있는데 작가는 다시 자기만의 몽상에 빠져 이러한 생각을 들려준다. 


    에드먼드 화이트에 따르면, 제임스 메릴이 한 젊은 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팬은 왜 우리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할까? 우리의 알맹이는 책 속에 있기에 결국 빈 껍데기만 만나게 되리란 걸 깨닫지 못한 걸까?>


    질문: 어떤 사람이 당신의 인생 이야기를 써주기를 바랍니까?

    

    빼어난 글솜씨뿐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할 줄 아는 크나큰 마음까지 겸비한 사람. (307쪽) 






<불확실한 봄이었다.>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이 문장 말고는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책이 1880년에 시작되었다는 것도(나중에 찾아보기 전까지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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