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속으로 - 한국 문학사에서 지워진 이름. 평생을 방랑자로 산 작가 김사량의 작품집
김사량 지음, 김석희 옮김 / 녹색광선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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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량 작가의 단편집 <빛 속으로>

한때는 남과 북에서 모두 잊혀진 작가였던 김사량 작가의 <빛 속으로>를 읽었다. 4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마지막의  「노마만리 」는 김사량이 타이항산 지구의 항일근거지로 떠나는 과정을 담은 탈출기로서, 이 책에서는 망명기 도입부만 실려 있다. 그럼에도 흥미진진하여 그 전편이 궁금했다.


단편인 「빛 속으로」는 작가가 일본에서 일본어로 써서 발표였으며 아쿠타가와상 후보에도 올랐다.  

이 작품의 배경은 동경이며 화자인 '나'는 동경 제대에 다니는 조선인 학생으로 빈민촌의 S협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름은 '남(南)'이지만 아이들은 모두 일본어인 '미나미'라고 부른다. 이렇게 불리지만 굳이 바꾸어 부르게 만들지 못한다. 이는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둘러싼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는 요소로 작용한다. 자신이 감추고자 하는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입을 통하여 폭로 되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안에 감춰진 수치심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천마」, 「풀이 깊다」의 두 단편도 일본어로 발표하는데 일본의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작품이다.

「천마」는 일제에 기생하여 경성에서 제일 가는 작가인 체 하는 '현룡'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일본 관리의 위세를 등에 업고 위세를 떨치지만 제대로 된 글을 보여주지 못하고 결국 폐기되어 버림받을 위기에 처한다. 허세로 가득찬 기인 행세를 하고 여류 작가를 유혹하기 위해 감언이설을 일삼는 우스꽝스러운 현룡의 꼬락서니야 말로 일제에 빌붙어 이익을 취한 앞잡이들의 모습이 아닐런지...



「풀이 깊다」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박인식은 농촌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방학을 맞아 농촌 활동을 하러 가는 길에 첩첩산중 오지 마을의 군수인 작은 아버지에게 들렀다가 옛 은사였던 코풀이 선생님을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은 아버지가 산민(山民)을  모아 놓고 행하는 이름도 생소한 '색의 장려(색의 장려운동. 조선 총독부가 흰옷이 생산력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해 백의 착용을 금지했던 정책 - 옮긴이)'에 대해 연설하기 위해 연단에 서고 통역을 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옛 은사였던 '코풀이 선생님'이다. 코풀이 선생님은 인식의 중학교 은사였는데, 인식과 친구들의 시위로 인하여 학교에서 쫓겨난 것을 인식의 작은아버지가 교화 주사로서 조선어 통역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일본어로 연설을 하는 작은 아버지 옆에서 쭈뼛쭈뼛 통역을 하며 더러운 행카치에 빨개진 코를 누르거나 닦는 모습은 인식에게 견디기 힘든 안쓰러움과 혐오를 남긴다. 아울러 "내일 아침 일용할 양식도 없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상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작은아버지의 모습도 참을 수 없지만 "척 봐도 여기에 흰옷을 두른 이는 하나도 없"고, "몇 년간 세탁을 하지 않았는지 그들의 낡아 빠진 복장은 마치 죄수복 같은 흙빛"인데 '색의 장려' 정책이라니 너무도 바보스러운 상황에 인식은 오히려 강한 반발심을 느낀다. 특히, '색의 장려운동'의 폭력성이라고 말할 장면은 연설이 끝난 뒤 돌아가는 산민들의 옷에 먹칠을 하는 장면에서 극명해진다. 


   그리고 갑자기 흐흐흐 웃더니 인식의 소매을 끌어당기며 창문 쪽을 가리켰다.

   "저기를 봐, 저기를 보라구.

   창 너머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아까 회당에 모였던 남자와 여자들이 놀랍게도 등짝에 검은 먹으로 O나 △나 X표시를 한 채 한 사람 두 사람 머뭇거리며 지나간다. 아무리 작은 아버지라도 조금은 뒤가 켕기는지 괜스레 한층 더 흐흐거리며 웃어댔다.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저 사람들한테... ."

   인식은 핏기가 싹 가신 창백한 얼굴로 일어나, 분노에 차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격렬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작은 아버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154 ~ 155쪽)


   차는 낡고 작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사람이 적어서 쉽게 탈 수 있었다. 그는 가솔린 연기와 냄새 속에서 웃옷을 벗고 손수건으로 목덜미의 땀을 닦으며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그의 눈은 얼어붙은 듯 고정되었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장 입구 포플러나무 아래, 군청 직원 두세 명과 함께 먹 그릇과 붓을 든 채 서 있는 비실비실 키가 큰 코풀이 선생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뒤에는 숙부와 내무 주임이 부채질을 해 가며 벙글벙글 유쾌한 듯 지휘를 하고 있었다. 젊은 장정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시장으로 들어가는 사내들과 아낙네들을 붙잡아 오면, 코풀이 선생은 그 꼬지지한 옷에 먹물로 표시를 했다. 다들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하지만 코풀이 선생은 얼굴에 맺힌 땀과 콧물을 열심히 닦을 뿐이었고, 등에 먹을 묻힌 사람들 역시 땀을 손으로 훔치면서 사라져갈 뿐이었다. 한 아낙이 손을 내저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군수를 위시한 남자들은 점점 더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인식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부들부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의 분노를 억누를 길 없었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는 결국 아이처럼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171 ~ 172쪽)


먹물을 뿌리거나 낙서를 하는 행위는 결코 허구의 사실이거나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상복을 입은 여인에게 먹물을 뿌리거나 여자들의 치마를 들치고 속바지에 먹물을 뿌리는 일조차 있었다고 하니 더욱 충격적이다. 이를 행하는 조선인들의 행동을 대체 어찌 해석해야할지 도무지 말이 안나온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는 인식이 농촌 계몽 운동을 떠난 산촌 마을에서 발견한 사당에서 지금 우리가 '백백교'라고 알고 있는 사이비 종교 집단을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백백교는 실제로 1920~40년대 사이에 유행했던 종교로서 백색 옷을 입어야만 구원에 이른다고 믿게 만들고 그러면서 온갖 악행을 일삼으며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등의 희생자를 만들어낸 집단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색의 장려 정책에 반발하여 흰옷을 입는 것이 민족적 구원의 상징이라도 되는 양 선전했던 백백교의 교리는 색의 장려 정책 이상의 폭력이었다."(옭긴이의 말 중에서)  

인식이 그 집단의 희생자가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만 코풀이 선생은 그렇지 못한 듯하여 그 인물의 됨됨이와 무관하게 비극적이 아닐 수 없다. 코풀이 선생은 인식과 만난 해 가을, 산으로 '색의 장려'차 출장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니 말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경성에서 떨어진 촌구석에 조그만 의원 간판을 내걸고 청년 의사로 일하고 있던 인식은, 경성에서 배달된 잡지에서 지금까지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무도한 백백교의 공판기록을 읽으며 오싹한 한기를 느낀다. 마교의 간부들이 가여운 백성이나 산민들을 속이고, 피땀 흘려 모은 재산과 양식을 빠앗았을 뿐만 아니라 그 처와 딸들까지 겁탈하고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314명이나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마교의 살인 현장 중 하나로 거론된 곳이 그가 일찍이 방문했던 폐사 부근 산골짜기라는 것을 발견하고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라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코풀이 선생이 생각나서 놀란 듯 다시 한번 공판기록을 끌어당겨 읽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법이다. 어쩌면 남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닌지,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억측을 하다 보니 영락없이 또 그럴 것만 같았다. 인식은 다시 잡지를 덮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흰옷의 종교인 만큼 '색의 장려' 정책과 대립하지 않았을까? 가여운 코풀이 선생은 그 깊은 산 속 폐사로 출장을 나가 어떻게든 해서 화전민들을 모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혼자 흥분하여 그 이상한 일본어로 떠들며 그걸 또 자랑스럽게 스스로 통역하다가 나중에 그 두사람에게 들켜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닐까?

   인식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끝없는 슬픔에 젖었다. (186 ~187쪽)  


한쪽에서는 색깔을 장려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와 반대로 백색을 장려하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정책과 사이비 종교 사이에서 색의 권력에 희생 당하는 식민지 조선의 구조가 코풀이 선생과 같은 희생자를 만들고 백백교라는 사이비 집단이 위세를 떨치도록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로 그들의 정책을 비판했던 김사량의 작품이 잊히지 않고 널리 읽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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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0-0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하수 님도 이 책 읽으셨군요~! 이 책에 실린 단편 모두 좋았습니다. 마지막에 실린 ‘노마만리‘는 후속 이야기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더라구요. 전 그래도 표제작이 가장 좋았었습니다 ^^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은하수 2023-10-03 16:09   좋아요 1 | URL
저도 이 책 단편들이 모두 다 좋았어요^^
정말 ‘노마만리‘는 아쉽게도 너무 짧게 끝나버려서 뒷부분이 자꾸 궁금해지지 뭐예요.
약간의 유머도 가미가 되고 무언지 모를 통쾌함,시원함이 느껴졌죠~~

꼬마요정 2023-11-12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았어요^^
시대의 아픔이 정말 와닿더라구요. 아고타 크리스토퍼를 읽을 때 살짝만 공감했다면, 이 책은 정말 공감했어요ㅠㅠ
저도 <노마만리> 뒷 이야기 궁금하네요^^

은하수 2023-11-13 21:52   좋아요 1 | URL
기대하지 않고 읽었는데 대어를 낚은 것 같았죠!
하지만 다른 작품 만나기 쉽지 않을듯하여 아쉽네요.
저도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책은 ... 책장이 안넘어가요
ㅠㅠ
 
맛있는 사형 집행 레시피 - 제3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우수상 수상작
이석용 지음 / &(앤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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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발하고 있는 강력 사건들을 뉴스로 접할 때마다 사형제도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이미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흉악무도한 저들에게 인권이란 것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할 수 있을지, 인간의 존엄이라는 명제를 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속된 말로 인간 같지도 않은데 국민의 세금을 써가면서 계속 살려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곤 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목숨을 잃은 피해자의 유가족은 오히려 늘 그렇듯이 보호받지 못하는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은 외면 받아 마땅한 것일까. 



그래서 작가는 이 작품으로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과연 작가는 사형 찬성인지, 반대인지, 아니면 사형은 언도하면서 집행은 하지 않고 있는 이 '어정쩡한 경계'에 머무는 현실을 고발하고 공론화하고 싶은 것인지... (그런데 작품의 내용은 진지하고 심각한데 왜인지 제목은 '맛있는'이라네! 차라리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작품 속에서는 실제로 두 명의 사형수의 사형이 집행된다. 사실이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사형 집행 과정이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그리고 사형수의 행동, 그가 느끼는 두려움까지도 하나하나 느껴지도록 한다. 

사실 그 장면을 읽을 땐 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한 순간 내가 그 상황에 처해 있는 것처럼 두렵고 떨리고 무서웠다. 감정이입이 너무 잘돼서 아무튼 문제다. 솔직히 책을 놓고 잠시 자리를 피했었다.



그리고 나도 평소 흉악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보면서 저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 잠깐 글로써만 맞닥뜨린 것인데도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너무도 쉽게 드는 거여서 순간 놀랐다.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범죄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행하는 사형이라는 제도도 따지고 보면 사회적 살인이 아닐까 하고... 나도 그 살인에 가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합의된 법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침묵하고 있는 나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그 살인에 동조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생각.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



이 작품에서는 사형수가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식사를 준비하는 '요리사 X'와 마지막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있는 '재형'의 개인사가 얽히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사형 제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었다면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뻔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장면을 보면서 그 동안 우리가 사형을 언도받은 사람들과 집행된 사람들이 모두 정당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좀 더 신중히 결정해야할 문제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지금 잠깐일 뿐이고 또 다른 흉악범을 접하게 된다면... 그것이 나의 현실이 된다면...

그때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피해자 유가족들은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가해자는 죽음으로 그 벌을 다하는 것이 너무 쉽게 느껴질까, 살려 놓고 좀 더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두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게 가장 정당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 어떻게 변할지 사실 알 수 없다! 아니 내가 만약 피해자나 유가족이 된다면? 가해자의 인권 따위 결코 생각하지 않을 거 같다. 나는 죽을 거 같은 고통 속에 살고 있는데, 누군가는 가해자의 손에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겼는데(빼앗겼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어떻게 인권 따위를 논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작가가 말하는 '내가 선택한 중도'에 대해서 이해도 안되고 수긍이 잘 안된다. 공권력을 가진 정부, 사법체계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는 것도 쉽지 않을 거 같은 회의감... 생각만 해도 무기력해진다...



   "이 소설도 특별한 해결책은 없다. 먼저 머릴 맞대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하는 건 아닌가 싶다. 먹고사는 문제에 매몰되어가는 동안 한쪽에선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들어가는 사회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형은 선고되지만, 집행은 하지 않는 '어정쩡한 경계'에 머무는 게 아니라, 떳떳하게 적극적으로 '내가 선택한 중도'라면 결과가 사뭇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석용.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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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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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호프 밀러, 그는 과연 어디에서 멈춰야 했을까?!


어제였나 그제였나???...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 읽다 잠시 쉬고 있던 시간이었는데, 어느 플친 님 글이 눈에 들어오는 거다.  '좋은 책이란 읽는 사람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생각이 솟아나게 해야 한다는, 즉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것... 문장을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이런 취지의 말이었던 거 같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는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책을 읽을 때 나의 뇌 속에서 어떤 반응들이 나타날지! 뇌파 검사를 한다면 아마도 그래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짧은 시간을 주기로 심하게 요동을 치지 않았을까. 어설픈 연민을 주제로 츠바이크가 보여주는 심리의 묘사는 너무나도 탁월해서 결코 짧지 않은 길이의 작품을 결국 순식간에 읽어내게 만드는 힘이 넘쳤다. 역시 하고 감탄을 했지만 읽는 내내 주인공인 호프 밀러에게 끊임없이 외칠 수 밖에 없었다. 제발 그만 둬 그만 두라고. 아 놔 정말 또... 이번엔 제발... 그만, 여기서 멈춰!!  그만 그만....!!! 마음 속에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어설픈 연민의 감정으로 실수를 거듭하고 오해하게 만들고 다시 두려움에 물러났다 다시 또 끌려 들어가고 다시 또 물러나고 ... 이런 유유부단한 성격의 남자를 또 옆에서 끊임없이 닥달하면서 끌어들이고 이용하고... 이러는 주위의 주인공들도 용서가 안되고...  난 자꾸만 호프 밀러의 감정에 이입이 됐다가 다시 이해가 안됐다가 하면서 마음이 널을 뛰는데 츠바이크는 일부러 더 그러는 것인지(?), 끝까지 물고 놓아주지를 않는 거다. 아 놔, 정말 츠바이크 님, 존경합니다. 정말 너무하잖아요! 내 맘도 들었다 놨다! 호프 밀러도 들었다 놨다!  물론 난 이 작품의 결말이 비극으로 끝나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츠바이크의 작품을 여럿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더라는 거다.



"소설의 배경은 제 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접경지역이다. 헝가리의 주둔지로 발령을 받은 안톤 호프밀러 소위는 무료한 생활을 하던 중, 그곳의 부유한 실업가인 라요스 폰 케케스팔바의 집으로 초대를 받는다. 그곳에서 그는 케케스팔바의 딸 에디트를 만난다. 에디트가 불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는 그녀에게 춤을 청하게 되고, 커다란 소동이 일어난다. 에디트의 사촌인 일로나를 통해 알게 된 그는 죄책감을 느낀 나머지 도망치다시피 그 집을 빠져나간다. 이때부터 호프밀러는 자신의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일에서 희열을 느끼게 되고, 이러한 감정은 점차 고조되어 그의 삶을 가득 채우게 된다."(468쪽, 옮긴이 해설 중에서 )



그렇다. 호프밀러는 자신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기쁨을 줄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쥐꼬리만큼의 재산도 가지지 못한 자신이 부유한 노인과 불구의 소녀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데서 태어나 처음으로 희열을 경험한다. 어린 시절부터 사관학교의 폐쇄된 공간에서 적은 소득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순진한 청년 소위는 이러한 벅찬 경험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도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점점 빠져든다. 연민으로 시작한 관계는 점점 꼬이기만 하고, 새로운 치료법으로 그녀의 다리가 곧 낫게 되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었고, 그리하여 상황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간다. 거기다 호프밀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  호프밀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에디트는 그의 감정이 연민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한 발작을 일으키고 다시 또 화해를 하는 등의 과정이 이어진다.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한 에디트는 호프밀러에게 격정적인 키스로 자신을 내보이고 이에 호프밀러의 영혼이 위험을 느끼고 뿌리치지만 다시 에디트의 절절한 사랑 고백의 편지가 당도하자 이에 과도한 책임감에 질식할 듯한 반응을 보이면서 친구의 도움을 빌어 멀리 도망가려 한다. 아무튼 그 사랑이 문제인 거다.



이 부분에서 차라리 지금이라도 도망가, 도망가, 하고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불구의 몸으로 힘겹게 세상의 끈을 놓고 싶어하는 소녀를 돕고 싶어하는 측은지심의 마음 연민....!  그 연민의 감정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야만 하는 감정이란 말인가!  어째서 호프밀러는 연민의 감정일 뿐이었는데... 사랑한 것이 아닌데 왜 끝까지 에디트를 책임져야만 한다는 말인가!  에디트, 에디트의 아버지 케케스팔바, 그리고 에디트를 돕기 위해 와있는 사촌인 일로나, 그리고 콘도어 박사... 이들은 호프밀러의 마음이 단지 연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에디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1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마음이 약하고 남에게 나쁜 행동을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하지 못하는 호프밀러는 심한 갈등을 겪는다. 그런데 그 갈등을 친구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고 케케스팔바네 사람들은 간절히 매달리면서 상황을 자꾸 이용하려 한다. 

이렇게 우왕좌왕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휘둘리는 호프밀러에게 에디트의 담당 의사이며 자신도 눈 먼 여인과 결혼한 콘도어 박사는 여러 차례 조언을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뒤로 한걸음 물러나려는 호프밀러를 다그치기도 한다. 어설픈 연민으로 에디트를 위험에 빠뜨리지 말라고. 니가 여기서 발을 빼고 멀리 달아난다면 그것은 살인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살인, 살인이라니... 이러니 호프밀러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에디트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고 걸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감정이었던 것이지 사랑은 결코 아니었던 건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호프밀러는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이나 했겠냐구. 그러나...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콘도어 박사는 자신이 고치겠다고 약속한 환자는 그 약속을 꼭 지켰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단 한사람이었던 눈 먼 여인과 결혼을 함으로써 끝까지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 그 사람이라면 호프밀러에게 연민으로 시작했다 해도 자신의 결정을 끝까지 책임지라고 말할 수 있겠지! 거기다 호프밀러는 경솔하게도 불구의 다리가 곧 낫게 될 것이라고 거짓을 말함으로써 자기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말을 한다. 그러니까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셈이 되는 거다. 그러니 호프밀러에게 도망가 도망가 지금이라도 도망가 하고 말하고 있지만, 꼬여만 가는 그 상황이 에디트나 콘도어 박사, 케케스팔바의 다그침으로 인한 것만은 아녀서 더 답답해지는 거다. 이러니 츠바이크 선생, 우리 독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이러면서 끊임없이 이래야하나 저래야하나 이게 맞은가 지금이라도 도망가라고 해야 하나 어느 한 편만을 들지 못하게 만드는 거다. 결국 끝까지 책임지지도 못할 어설픈 연민이 문제가 되는 거다. 그래, 충분히 이해한다. 그것이 문제였다는 거. 어설픈 연민에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또 약한 마음에 약혼을 당하고 다시 또 부인하고 도망치고... 그건 너무너무 비겁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젊은 소위의 심정이 다 느껴지는 거다. 내 마음도 이랬다 저랬다... 



하지만, 부유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원하는 남자라면 누구라도 가질 수 있었을 이 에디트란 소녀는 불의의 사고로 걸을 수 없게 되었고 벌써 몇 년 간을 집안에 갇혀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다. 죽으려고 여러 번 시도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실패했지만. 그런데 그런 소녀 앞에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거기다 "훤칠한 키에 젊고 건강해 보이는 얼굴, 관자놀이에 흘러내리는 매혹적인 잿빛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는 모습", "꼿꼿한 자세와 걸음걸이"를 가진, 이런 사람이라니. . .  딱 봐도 젊고 잘생긴 청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 남자가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어린 소녀 앞에 어느 날 떡하니 나타난 거란 말이다. 그런데 그 청년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눈빛으로 매일 찾아와 말동무도 해주고 체스도 두고 격려도 해주고 한결같이 행동한다면... 사랑이라곤 해본 적 없는 순진한 소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을 거다. 소녀의 아버지인 케케스팔바는 어떠한가. 사랑하는 딸이, 하나뿐인 딸이, 자신의 삶의 전부인 딸이 불구가 되어 걷지도 못하고 하루하루 죽어가는데 한껏 마음이 약해져 있는 그 앞에 나타난 마음도 순수하고 넓은 듯한, 이해심 많고 한결 같은 젊은이라니... 오해하고 싶지 않았을까. 연민이라고만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희망을 가지지 않겠는가! 딸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라고 딸 옆에 데려다 놓고 싶었을 것이다. 딸의 병을 낫게 할 수만 있다면 지옥이라도 뛰어들 아버지 앞에 나타난 젊은이가 약해져 있는 그들의 마음을 그저 연민으로만 바라보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는 말이다. 그것은 아무리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그저 연민의 감정이었고 사랑의 감정이라곤 1도 없고 무거운 책임감으로만 느껴졌다 해도 상황이 악화되는 모든 순간에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 무책임하고 또 무책임한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호프밀러 소위는 처음부터 그러면 안됐던 거다.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계속 행동으로 옮기면서 불편한 상황을 끌고 가선 안됐던 거다. 거짓으로 그 관계를 이어가선 안됐던 거다. 대체 자신이 뭐라고 그런 믿음에 반하는 행동을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인가. 호프밀러 소위와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제발 사랑을 줄 것도 아니면서 감정을 함부로 질질 흘리고 다니지 말란 말이다!!! 



호프밀러가 자신의 입으로 작가인 나에게 직접 고백하는 형식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의 결말은 그래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모든 일은 결국 어리석은 행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호프밀러의 첫 고백의 말이 모든 것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상적인 연민이라고 하는,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초조한 마음,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연민이라는 감정은 처음부터 자라나면 안되는 거였다. 처음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달리는 말에 올라타고 있는 것처럼 멈추지 못하고 파국을 향하여 달려갈 수 밖에 없었다. 사실이 이러할진데 호프밀러가 자신의 죄가 어디서부터 성립되는지 그 경계를 알지 못한다는 그 말이 너무 안타까웠고 그래서 꽤 오래 가슴에 남을 거 같다. 



   "모든 일은 어리석은 행동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런 악의가 없는 서투른 행동, 프랑스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프gaffe'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물론 나는 곧바로 내 어리석은 행동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지만, 고장 난 시계 속 톱니바퀴를 급하게 고치려다 보면 대개 시계 전체를 망가뜨리는 법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어디까지나 나의 단순한 실수이고 어디서부터 나의 죄가 성립되는지 그 경계를 구분 짓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19쪽) 



   "오전에 동료들과 말을 타고 나가도, 근무수칙에 따라 꼼꼼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후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케케스팔바 저택으로 향하는 내 어깨는 마치 귀신이 올라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묵직했다. 그것은 이제부터 내가 짊어지게 될 짐이, 그 책임감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공원에서 노인에게 딸아이가 곧 치료될 거라고 말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저 연민에 사로잡혀 진실을 숨긴 것이었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내 의지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246쪽)



   "연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대신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한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으로,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 (17쪽)



우리는 흔히 츠바이크가 말하는 '진정한 연민',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그 연민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거 아닐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끝까지 한 여인을 책임지는 콘도어 박사가 보여주는 아내에 대한 연민?사랑? 내 눈에는 그것이 그저 연민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결코 꾸며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명 진정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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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9-18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초조한 마음>보다 <감정의 혼란>에 한표~!! 초조한 마음도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ㅋ

한번 시작했다면 멈추기는 쉽지 않은거 같아요 ㅎㅁ

은하수 2023-09-18 16:40   좋아요 1 | URL
전... 음. .. 뭘 선택할지 망설여져요. 두 작품의 개성이 너무 강하니까요. <감정의 혼란>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죠! 츠바이크 소설은 단편, 중편, 장편이 모두 뛰어나게 좋네요^^
 
사랑하는 여자들에게
이사벨 아옌데 지음, 김수진 옮김 / 시공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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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자들에게>이사벨 할머니와 수다를 ......

이사벨 아옌데의 에세이 <사랑하는 여자들에게>를 읽는 동안 정말 이사벨 할머니와 수다를 떨고 온 듯한 경험을 했다.

그 수다를 언제까지라도 ... 그래서 다시 또 만나서(물론 직접 만난다 해도 대화가 안될테니 책을 통해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수다를 떨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글을 읽으면서도 정말 이 할머니의 수다를 듣고, 박수 치고 맞아요 맞아요 그러니까요 하면서 공감하고 있는 기분이 수시로 들었지만 -물론 더 할 수 없이 멋진 할머니인건 말할 것도 없고 - 그 수다가 끝나지 않고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동네 가까이 사는 분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사벨 아옌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 작가이지만 나는 그의 소설(영혼의 집, 운명의 딸)을 접한 것 뿐이어서 내밀한 속내는 알 수가 없었는데 이 작품을 대하면서 노년의 이사벨의 속내를 조금은 알게 된 기분이었다. 좀 더 친근해진 느낌이 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줄 수 있는 작가가 같은 여자라서, 그리고 작품의 엄청난 성공으로 편안하고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어서, 또 그리고 이런 뜻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 기분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너무너무 기분이 좋다는 것이지 암... 그렇고 말고... 내가 왜 뿌듯한 기분이 드는 건지는...  읽어보면 알게 될 거라고 마구마구 말해주고 싶다~~^^



칠레에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볼리비아로 망명을 하고 다시 미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이제는 미국의 작가가 되었지만 그녀는 영원히 남미 칠레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이다. 자신의 조국은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칠레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노년에 만난 현재의 남편과 지내면서 강아지를 키우고 글을 쓰는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행동하는 페미니스트이다. 이 책은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그의 나이 78세에 쓴 에세이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삶을 토대로 자신이 살아왔고 이제 자신의 딸과 아들, 그리고 손자, 손녀들, 사랑하는 여자들이 살아갈 세상은 가부장제라는 제도로 고통받지 않는 세상이기를 염원하면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가부장제 아래 고통받는 여성들이 힘을 모아 연대하기를 바란다. 여성들이 연대하는 힘은 누구보다도 강하기 때문이다. 몇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남성들의 가부장제가 불과 몇 십년 사이에 여성들의 힘으로 변화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 멋진 이사벨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는 글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 중에 내가 몰랐던 부분은 딸 파울라가 유전성 혈액 질환을 앓다가 이사벨의 나이 50 무렵에 엄마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파울라>라는 작품을 발표하였고(우리나라엔 출간되지 않았나봐요..ㅠ.ㅠ 엄청난 성공이었대서 너무 궁금함), 그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재단(www.isabelallende.org)을 설립하고 전 세계의 여성들을 돕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페메니스트 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또는 겪은 일들을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는데, 여성들이 연대했을 때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는지, 그리고 아는 것을 행동으로 실행하지 않는 것은 가부장제를 심지어 돕는 여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무거운 내용들이 많지만 그 분위기를 바꿔가면서 무겁게 이야기하지 않아서 더 좋은 이 기분을 다른 모든 여자들이 느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많은 여자들이 다 읽었으면 좋겠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이 책을 구입해야겠다.  내 맘에 들어온 문장들을 남겨본다.


                 





*** 문장들


   일반적으로 언어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말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가부장제에는 남녀의 구분이 유용하며, 젠더를 구분해야 통제가 훨씬 쉬워진다. 우리는 젠더와 인종, 나이 등등의 구분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왔지만 젊은 세대 다수는 이러한 구분에 반기를 든다. (86쪽)



   내 딸 파울라를 떠나보내면서, 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항상 우리 곁에 잇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깨달았다.  칠십 줄에 접어든 지금 죽음은 어느덧 나의 친구가 되었다. 죽음은 낫을 든 썩은 냄새를 풍기는 해골이 아니다. 죽음은 성숙하고 우아하며 치자꽃 향기를 풍기는 상냥한 여인이다. 전에는 우리 동네 어귀를 어슬렁거리더니 얼마 전에는 우리 이웃집에 와 있다가 지금은 우리집 마당에서 참을성 있게 대기하고 있다. 가끔 그녀 앞을 지나칠 때면 서로 인사를 나눈다. 그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누리라고 일깨워준다. (146쪽)



   남성은 여성의 힘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법과 종교, 관습의 힘을 빌어 수 세기동안 여성들의 지적 계발과 예술적, 경제적 발전을 가로막는 온갖 제한을 가해왔다. 한때는 수만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너무 많이 안다는 이유로,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로 마녀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산 채로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여자들은 도서관에도 갈 수 없었고, 대학에도 갈 수 없었다. 물론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그런 관행이 유지되고 있다. 남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성적인 모습은 여성을 문맹화하여 고분고분 복종하게 만들고, 쓸데없이 질문하거나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여성들이 남성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너무 두드러지거나 리더의 위치에 오르려고 하면 2016년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겪은 것과 같은 공격을 당하게 된다. (162쪽) (그러게나 말입니다. 힐러리 클린턴의 대안이 미치광이 백인 트럼프였다니 믿어지십니꽈!!!)



   미국의 연쇄살인범들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백인에 공통적으로 여성혐오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여성 혐오는 가정 폭력, 여성에 대한 위협과 폭행의 이력을 보면 확인된다. 이런 사이코패스들 상당수는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겪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성의 거절과 무관심, 조롱을 견디지 못한다. 즉, 여성이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신들을 비웃을까봐 두려워하고, 여자들은 남자들이 자신들을 죽일까봐 두려워한다." 여성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이다.(163쪽)



   여성의 학대는 곧 여성의 평가 절하와 맥을 같이한다. 페미니즘은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이, 여성도 사람이라는 급진적인 개념이다. 수 세기 동안 여성에게도 영혼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165쪽)



   이제 평화를 이야기해 보자. 전쟁은 마초이즘 표출의 극한이다. 모든 전쟁에서 희생되는 대부분의 희생자는 군인이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이다. 14세에서 44세 여성의 주요 사망 원인 가운데서도 첫 번째로 꼽히는 원인은 바로 폭력이다. 폭력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암, 말라리아, 사고사를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인신매매 희생자의 70퍼센트도 여성과 아이들이다. 한 마디로, 선전포고만 없었지 여성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그러니 우리 여성들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그 무엇보다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174쪽) (으... 마초이즘 너무 싫어...ㅠ.ㅠ)



   경제적 자립 없이는 페미니즘도 없다. ...2015년에 전 세계 문맹자의 3분의 2는 여성인 것으로 추산되었고,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동의 대다수는 여자 어린이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여성은 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에 비해 낮은 급여를 받고 있으며, 교사나 간병인 같이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었던 직군은 급여가 낮고, 가사 노동은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건 물론 대가도 전혀 지급받지 못한다. 요즘같이 여성도 밖에서 일을 하는 시대에는 이런 사실에 훨씬 더 화가 치민다. 어차피 외벌이로서 가족을 충분히 부양할 수 있는 남자가 별로 많지 않아서 바깥일을 같이 하는데,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고도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집안일을 하는 건 다 여자 몫이기 때문이다. 관습과 법이 바뀌어야 한다. ... ...누군가에 의존하는 삶은 어린시절에도 지금 느끼는 것만큼의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 스스로 내 밥벌이를 하고자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가능하면 엄마도 부양하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늘 말했다. 돈을 내는 사람이 명령도 내리는 것이라고. 할아버지의 그 말이 내 초기 페미니즘 사상에 도입한 최초의 공리였다. (180 ~ 183쪽)



   나는 내 소설에 등장시킬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여주인공을 굳이 창조해낼 필요가 없다. 나 자신이 늘 그런 여성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사지에서 도망쳐 나와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모든 것을 다 잃고 심지어 자식까지 잃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걸어나가고 있다. 그들은 단지 생존자일 뿐 아니라 조금씩 성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기도 한다. 그들은 몸에 난 흉터와 영혼에 생긴 상처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들 자신이 회복력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희생자로 취급되기를 거부한다. (185쪽)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는 여성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빈곤 지역의 경우, 어머니들은 소득의 전부를 가족을 위해 쓰는 반면, 아버지들은 소득의 3분의 1만 가족에게 쓴다. 다시 말해, 어머니들은 돈을 버는 대로 가족의 식비와 의료비, 자녀들 학비를 충당하는 반면, 아버지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쓴다는 것이다. 어디 가서 재미를 보느라 탕진하는 것일 수도 있고, 휴대폰이나 자전거 같은 평소 갖고 싶었던 물건을 사는데 쓸 수도 있겠다. (191쪽)


 

  1960년대에 피임약을 비롯한 다양한 피임 기구들이 대중화되면서 여성 해방의 범주도 더욱 확대되었다. 마침내 여성도 원하지 않는 임신에 대한 불안감 없이 온전한 성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즈음 칠레 종교계와 마초이즘의 반발이 얼마나 강력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 ... 지금까지 이미 우리는 많은 것을 이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전쟁, 근본주의, 독재, 경제 위기, 각종 재난에 이르는 온갖 구실로 우리 여성의 인권은 짓밟히고 있다. 우리에게 정말로 인권이 있다면 말이다. 미국에서도, 그것도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린 이 시대에, 여전히 낙태권뿐만 아니라 여성의 피임 기구 사용 문제는 뜨거운 논란의 주제가 되고 있다. 남성의 정관 수술이나 콘돔 사용을 문제 삼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면서 말이다. (198 ~ 199쪽) (내말이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임신은 여성의 몸에서 일어났는데... 내 몸에 생긴 일인데 왜 결정을 남자들이 해주는 거죠? 여성들이 그걸 원한건 아닌데 말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남성의 가치 그리고 단점만 부각시키고 인류의 절반인 여성을 짓눌러온, 천 년을 이어온 가부장제 문화를 종식시켜야 한다. 종교와 법률로부너 학문과 관습에 이르는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우리의 분노가 이 문화를 지탱해온 근간을 산산이 부숴버릴 수 있도록 진심으로 분노하자. 여성 최고의 미덕으로 꼽히는 순종의 미덕은 우리의 가장 큰 적이며, 남성에게만 유익할 뿐 우리 여성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237쪽) (맞아요~~~ 순종, 복종 이런 단어는 종교인들이나 사용하는 걸로!!!)



   이미 40여 년 전에 저명한 활동가이자 뉴욕 주 하원의원이었던 벨라 앱저그는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에 담아낸 바 있다. "21세기에는 권력이 여성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대신, 여성이 권력의 본질을 변화시킬 것이다. (238쪽)



   나는 딸(파울라)에게 아직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체념한 채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그랬듯이 그 여성들도 원래 세상이 그런 거고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페미니즠'이란 이름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좋은 이름을 찾아보렴. 이름은 중요하지 않으니까. 정말 중요한 건 너 자신과 이 세상의 행동을 필요로 하는 숱한 자매들을 위해 일하는 거야." 파울라는 별 다른 대답 없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240쪽)



   이제 잠시 숙고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하자.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핵심적인 화두이며, 의식 있는 남녀 모두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며, 옛이야기 속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도둑에게 물었어야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다. 단순히 오감을 만족시키는 그런 아름다움이 아니라 열린 마음과 맑은 생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움이 가득한 세상 말이다. 우리는 모든 폭력으로부터 보호 받는 평화로운 지구를 원한다. 우리는 사람 사이의 상호 존중, 다른 종과 자연에 대한 존중에 입각한 지속 가능하고 균형 잡힌 문명을 원한다. 우리는 성별, 인종, 계급, 나이 등 우리를 갈라 놓는 각종 구분에서 비롯된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포괄적이고 평등한 문명을 원한다. 우리는 평화와 공감, 품위, 진리, 연민이 충만한 친근한 세상을 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한 세상을 원한다. 그것이 우리 착한 마녀들이 추구하는 세상이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든 여성이 함께 완성해낼 수 있는 계획이다. (249 ~ 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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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구름사이로 흘러가는 가을

나도 모르게 센치해지는 가을밤...
이 밤과 어울리는 음악들을 들었다. 작가가 알려주는대로...
영화 <나자라노>의 주제가 <아이가 태어나면(When a Child Is Born)>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달빛>
멕시코 3인조 밴드 로스 트레스 디아만테스(Los Tres Diamantes)가 부른 <보름달(Luna Llena)>

어젯밤은 슈퍼문이라서 그런지 크고 하얀달이 동쪽하늘로부터 떠오르더니 오늘은 어쩐지 달이 노란빛이 더 강해진거 같다. 그래도 평소보다 커보인다. 크고 환한 달이 떠서 저녁 먹고 소화시킬 겸 조금 걸었는데 서늘해서 걷기 좋았다.




자연의 숨결은 감정을 자극하여 처음 그 품에 안겼던 시절로 우리를 데려간다. 이럴 때 낙엽 진 숲에서 첼로 소나타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악기의 밤색 목재는 가을의 색을 닮았다. 특히 첼로는 두터운 몸집에서 나오는 중후한 음색으로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장 밥티스트 바리에(Jean-Baptiste Barrière)의 <첼로 소나타> 4번 2악장에서 두 대의 첼로는 서로 주거니 받거니 우아하게 대화를 나눈다. 
조금 걸으면 오르막이 나오고 구부러진 내리막을 돌면 또다시 오르막이다. 그렇게 낙엽 진 숲을 걷다 보면 어느새 추억 속의 내가 음악을 통해 지금의 나에게 속삭인다. 지난 계절의 풍파를 견뎌온 삶의 의미를 깨우쳐주는 것 같기도 하고, 다가올 추운 겨울도 이겨내라는 따스한 격려의 말을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 P152

낙엽이 오감을 홀리는 동안 나도 모르게 단풍의 인생사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가을로 접어들면 추분이 지나면서 밤이 낮보다 길어진다. 낮에는 햇빛을 받아 기온이 오르고, 밤에는 대지가 하늘을 향해 적외선 에너지를 내보내는 만큼 땅과 주변 대기가 차갑게 식어간다. 밤이 길어질수록 이렇게 잃는 에너지가 늘어나고, 가을이 깊어갈수록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뚝뚝 떨어진다. - P153

나무는 생리적으로 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는 월동을 위해 이파리와 줄기 사이에 물과 양분이 흐르는 통로를 떨켜로 막아 이파리를 떼어낼 준비를 한다. 또한 광합성을 하는 클로로필도 더는 만들어내지 않는다. 남아 있는 클로로필은 분해되고 녹색 색소는 점차 사라진다. 그러면서 이파리에 남아 있던 카로티노이드나 크산토필 같은 노란 색소가 전면에 드러난다. 광합성으로 이파리에 쌓인 설탕은 떨켜층에 막혀 줄기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일부가 이파리에 남아 안토시아닌이라는 붉은 색소를 만들어낸다.
- P153

둥근 달을 바라보면 밤하늘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빛과, 밤의세계를 깨우는 인력이 동시에 느껴진다. 밝은 면을 보면 추석에가족이 모여 보름달에 소원을 빌거나 달나라에 산다는 토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떠오른다. 멕시코의 3인조 밴드 로스트레스디아만테스(Los Tres Diamantes)가 부른 <보름달(Luna Llena)>에는달빛이 비치는 숲과 들판을 거닐 때의 한적함과 애달픈 정서가담겨 있다. 
"어스름한 빛과 고요함. 푸르스름한 땅거미. 부엉이가 멀리서 알린다. 오늘 밤 보름달이 뜨리라는 걸..... 그(달)의 푸른 망토를 밤에게 입힐 것이다." 남미 가수의 목소리는 악기로 치면 플루트를 닮았다. - P158

그런가하면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달빛>은 한 폭의 인상파 그림이다. 피아노의 부드러운 선율 사이로 새어나온 달빛이밤거리로 쏟아진다. 가면을 쓴 무희들이 소란한 축제의 거리에서빠져나와 <달빛>에 맞추어 우아한 춤사위를 선보인다. 마치 달빛과 함께 잠시 꿈길을 걷는 느낌이다. - P159

반면 어두운 면을 보면 보름달의 인력에 이끌린 무언가가 무덤에서 일어난다느니 하는 기이한 서양 미신이 떠오른다. 아르헨티나의 어느 시골에는 일곱 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사랑에 빠지면 보름달이 뜰 때 늑대로 변한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영화 <나자리노>에서 늑대인간은 금발 소녀 크리셀다와 사랑에 빠지고 두 연인은 결국 마을 사람들의 총에 맞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다.

주제가 <아이가 태어나면(When a Child Is Born)>은 나자리노의 슬픈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다. "아이가 자라게 되면 눈물이 웃음으로, 증오가 사랑으로, 전쟁이 평화로 바뀌어 모두가 이웃이 되고, 비애와 고통은 영원히 잊히게 될 겁니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꿈이고 환상이지만."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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