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파도에 빠지다
아오바 유 지음, 김지영 옮김 / 시월이일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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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흐리고 으슬으슬한 날 탓일 수도 있겠지만 요즘 내 독서생활이 영 재미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슨 책을 읽을까 망설이다 역시 나는 소설이야 술술 읽히는 소설을 읽어보자 싶어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온 아오바 유의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를 집어들었다. 2000년생이라는 작가가 2016년에 처음 쓴 작품인 <별에 소원을, 그리고 별을>로 스바루 신인상을 최연소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하였고, 3 년 후 이 작품을 발표했다니 고작 우리 나이로 20살??? 와 이 사람 천잰가 봐 하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데 작품은 20살이라는 나이가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라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진짜.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자. 28살에 요절한  가수이자 작곡가, 그리고 밴드 '노이즈 오브 타이드'의 프런트맨인 '기리노 줏타'의 노래가 갑자기 역주행을 타기 시작하고 무명 밴드의 음악으로는 이례적으로 유튜브 조회수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알고리즘으로 타고 들어온 사람들이 그의 영상을 접하고 그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가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데뷔도 하기 전에 갑자기 죽어버린데다 블로그나 영상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밴드의 새로운 소식으로 그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이 올라오게 되고, 그가 이미 1 년 전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망연자실해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년 전 사망한 가수의 소식을 지금 갑자기 올리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그에게 과연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그의 음악을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것인지 그의 음악을 좋아하게 된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고 허탈해한다.



그가 작사, 작곡하고 부른 노래인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는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극적인 감정의 변화를 겪게 하는 힘이 있다. 뭐랄까...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느낌, 그러면서 무슨 일인가가 반드시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일면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든다고 할까... 그 느낌의 정체가 무언지 궁금해 하지만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아름다운 변화가 일어나는 건 분명하다. 우연한 기회로 그의 노래를 접하게 된 2019년의 하루카, 그와 밴드 활동을 같이 했던 마사히로, 아즈사, 히로키, 그리고 기리노 줏타가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노래의 주인공이랄 수 있는 일본의 올림픽 수영 대표 나쓰카와 기리노 줏타가 가고 그의 아이인 노조미(일본어로 '희망'이라는 뜻이라고 한다)를 낳은 세이라, 다시 기리노 줏타와 그를 찾으려 애쓰는 프리랜서 기자인 히카리의 이야기가 서로 얽히면서 마침내 기리노 줏타의 이야기가 히카리의 블로그에 게재가 된다. 꽤 큰 반향을 일으킨다.

요절한 예술가의 음악과 삶은 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



기리노 줏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뭔지 모르게 이 상황과 비슷한, 뭔가 비슷한 느낌의 가수가 있었는데 있었는데... 하는 감정이 자꾸만 들었다. 생각이 날듯 말듯 뭔가 아련한 느낌이 들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게 뭐였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점심도 못 먹고 책을 봤던지라 에어프라이어에 고구마 두 개 넣어 놓고, 다락방에 있는 CD를 보러 올라갈까 하다가 거실 한 켠에 LP판을 뒤적뒤적해보고 있었다. 그 시절, 나의 2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던 그 시간들에 들었던 가수의 음반들... 김종찬, 양수경, 조하문, 김민우, 이문세도 있고... 갑자기 눈에 들어오는 음반 하나! 찾았다. 유. 재. 하....!



비운의 요절 가수라면 우리에게도 있다. 불과 25살의 나이로 음반 하나 달랑 남기고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나간 그 사람. 유. 재. 하이다. 음반을 제작해주겠다는 곳을 찾을 수 없어 자비로 음반을 제작했다지 아마. 수록곡 하나 하나 가사를 음미하며 들어본다. "지난 날/ 텅 빈 오늘 밤/ 우리들의 사랑/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대 내 품에/ 가리워진 길/ 우울한 편지"와 "Minuet", 건전 가요 하나. 어느 곡 하나 안 좋은 게 없지만 난 역시 "사랑하기 때문에"를 가장 좋아했다. 텐테이블에서 나오는 한 곡, 한 곡 다 흥얼거리며 따라 불러 보았다. .. 이 노랜 가사를 안 적을 수가 없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

   어제는 떠난 그대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헤어지지 말아요.

   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후략)



지금 이 노래를 따라부르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떠나간 연인을 못 잊는 그런 아름다운 사연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20 대 초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그 시기에 난 공부도 하면서 돈도 벌어야할 때여서 옆을 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에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엄마는 우리 3 남매를 어떻게든 잘 키워야한다는 압박감에 그러셨겠지만 정말 어마무시하게 우리를 닦달하셨다. 엄마만 남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우리도 아버지가 갑자기 이 세상에서 사라지신건데 그런 우리 마음은 생각지도 않으신건지 그땐 우리도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엄마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차라리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가 우리한테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고 동생들과 되도 않게 그런 모진 말들을 주고받곤 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를 쥐 잡듯 하셨는데 큰 게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밑에 동생들도 본을 받아서 따라간다고 하시면서 정말 나를 무지무지 힘들게 하셨다. 아빠가 살아 계실 때도 엄마와는 상극이었는데 그나마 내 편을 들어주시고 다정다감한 성격이셨던 아빠가 안 계시니 집안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하루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을 정도로 집안엔 엄마와 내가 핏대를 올리며 고래고래 싸우는 소리, 물건 집어 던지는 소리, 문 쾅 닫고 나가는 소리,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붓는 엄마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의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카세트 테이프로 유재하를 들었다(음악 틀어놓고 몇 번을 불러야 대답한다고 문 쾅 열어 젖히던 엄마 모습 지금도 생각나...으..... 다시 싸움 시작).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듣고 듣고 또 들었다. 정말 노래 하나하나 어쩜 그렇게 다 좋냐.  분명 남자지만 젊고 아름다운 미성의 담백한 그 목소리가 나는 뭐랄까, 유재하의 노랠 듣고 있으면 보호 본능을 느낀달까... 소년의 모습은 벗었지만 아직 강인한 남자는 아닌, 여리고 매끈한 그의 얼굴과 목소리가 어우러지고, 그러나 노래할 땐 단단함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애잔함이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더 빠져든다.  

그땐 집에 턴테이블이 없었고. 결혼을 하면서 오디오 콤포넌트를 장만하고 하나씩 하나씩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LP를 사서 모았었는데 반복되는 이사에 아이들이 태어나고 짐이 늘어나면서, 그리고 고장난 오디오 콤포넌트를 대체할 제품을 살 수가 없더라는... 현실이 내 발목을 잡는구나. 아무튼 열심히 모았던 수백장의 LP를 중고처분했다는 사연 ㅎㅎㅎ. 너무 후회된다.

유재하의 LP는 2016년인가에 서울 혁신 파크라는 곳에서 레코드 & CD 페어 할 때 딸과 함께 구경가서 다시 구입해왔다. 예전의 처음 자켓은 아니고 리마스터링된 LP였는데 유재하의 흑백 사진이 인쇄된, 그 나름의 멋이 있는 앨범이었다.



에어프라이어에 넣었던 고구마가 노릇노릇 잘 익었다. 유재하 노래 들으며, 내가 기르고 수확해서 담근 맛있는 동치미에 군고구마 한 개 얼른 먹고 생각을 해봤다. 유재하 노래 듣는데 왜 눈물이 나고 난리지? 저게 그리 슬플 일인가 하고... 왤까?

기리노 줏타를 사랑하고 기리노의 아이 노조미를 낳아 살아가는 세이라는 기리노와 고등학생일 때 만난 사이다. 그 때 이미 기리노는 "잔잔한 파도에 빠지다"를 만들어 부르고 있었는데 기리노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옆 마을 중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일본 올림픽 수영선수인 나쓰카를 만났고 그 노래는 나쓰카를 보며 작사를 한 곡이었던 것. 서로는 수영을, 음악을 계속하자고 약속을 했었다. 세이라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였는데 졸업 후 고향에 눌러 앉으려는 세이라를 기리노가 데리고 함께 도쿄로 오게 된 것이어서 기리노로서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기도 하고 나중엔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했다. 뭐든지 멋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겉돌면서 친구들과의 사이가 깊어지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겨 친구들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던 세이라. 엄마에게 맞고 자란 것이 모든 일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기리노의 죽음에 의도하지 않게 일조를 하게 되었으니 등장하는 캐릭터들 중에 가장 비호감이긴 하지만 아이를 낳아 홀로 살아가야 할 그녀에게 마냥 미운 감정을 가지게 되지만은 않았다. 아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게 될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애달픈 감정이 든다. 가장 마음이 쓰인다. 그리고 차마 말하기 힘든 또 한 사람도 생각나고. 우리 조카도.



일본에 징용가셨다 돌아가신 우리 엄마의 아부지, 그리고 남은 남매를 키우시느라 악바리가 되신 외할머니의 사랑을 못받고 구박뎅이로 자랐다고 맨날 한탄하시던 우리 엄마... 그런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기보단... 

아무튼 우리 엄마도 불쌍해. 아버지 복도 없어, 남편 복도 없어, 거기다 하나 뿐인 아들 손써볼 새도 없이 병으로 보내고.... 이제는 이빨 빠진 호랑이야. 성질은 불같은데 아무튼 너무 반듯해. 절대 부러지지 않아. 정말 잔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어서 그렇지! 그런 엄마를 견디고 나도 반듯한 사람이 되었는데 왜 눈물이 날까. 

시리고 아픈 세이라와 노조미를 따뜻하게 품어준 건 결국 기리노의 엄마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견딘 엄마, 징글징글하게 피 터지게 싸우던 엄마와 동남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나(기대되는지 오늘도 전화왔다. 우리 엄마).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정말 이상해. 그래서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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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 SHG EP 코판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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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드는 건 신맛 없는거 하나.
그냥 무맛. 싱거움.
내가 강배전에 너무 길들어 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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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2-1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저는 심지어 세 봉다리 샀답니다. ㅜㅜ

은하수 2023-12-13 16:45   좋아요 0 | URL
어째요 ㅠㅠ
전 좀 더 다크 로스팅했으면 좋겠던데요. 저도 이거 먹다 그라인더에서 다시 빼놨어요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3-12-13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커피 먹느라 애 먹었어요…봉지도 불편 맛도 불편 분쇄도 선택 안 되는 거도 불편… ㅋㅋㅋㅋㅋ

은하수 2023-12-13 21:33   좋아요 1 | URL
그러셨군요^^
봉지는 참 예뻤는데...
커피가 참 아쉬웠죠.
저만 그런게 아니었어요~~
전 다 못먹고 밀폐용기에 그냥 쏟아놨어요.. 안먹게 될 거 같지만 버리긴 또 그러네요^^
 
브라질 산타 루시아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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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함이라는데...
난 고소함도 별로고.. 음, 뭐지 싶다! 심심한 맛.
별로 다크하지 않다.
조금더 강했으면... 좀더 볶아주세요
강배전이라는데 아닌 듯 해요~~
신맛 없는건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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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정희진의 글쓰기 4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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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야 할 영화와 읽어야 할 책을 잔뜩 남겨준 아주 유익한 책. 숙제를 잔뜩 받았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너무 자극적이다!! 끊임없이 자극을 주는 정희진 선생님, 계속 자극적으로 남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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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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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면서 한번도 여기 대한민국을 벗어나 이민자의 삶을 꿈꾸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민자들, 혹은 망명자들의 삶이라는 것이 어떨지 모두 다 안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내가 이민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던 시간들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애초에 다른 나라에 가서 산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쩔 수없이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생존을 위해서, 혹은 좀 더 나은 삶의 조건들을 위해서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의 이런 바람은 그저 한낱 바람으로만 남을 것이고, 그것이 긍적적인 선택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몹시 괴로운 감정적 고통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고향을 두고 떠나간 그곳은 낯설고 힘겹기 그지 없으리라. 그곳에서의 삶이 힘겨울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점점 커지고 돌아갈 수 없는 이민자의 삶은 상실에 따른 고통, 방황, 향수병에 시달리고 오래도록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기억을 상실한 채 현실과 유리된 삶을 살아가게 되기도 한다. 제발트의 <이민자들>에는 다양한 이유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의 삶의 여정들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화자(작가 자신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이자 이 글을 기록한 작가는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고, 눈으로 확인하고 관찰하고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기록하면서 그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서 어떤 식으로 서서히 무너져내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헨리 쎌윈 박사, 파울 베라이터, 암브로스 아델바르트, 막스 페르버 이 사람들을 추적한 기록들이 픽션인지 팩션인지 모호하고 의심스럽게 잘 버무려져 있어 읽는 내내 사실인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거기에 딱 맞는 사진 자료까지 제시가 되어 있으니 사실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암브로스 아델바르트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것이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그렇다고 암브로스 아델바르트가 이민자로서 겪는 평생의 서사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피해 노동 이민으로 우리에게도 많은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이 꾸준히 늘고 있는 만큼이나, 혹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민자로서의 삶을 선택해야했던 그의 운명은 결코 낯선 것이 될 수 없다. 



점차 쇠락해가는 그의 집의 커다란 정원만큼이나 헨리 쎌윈 박사의 삶도 그러하다. 어릴 적에 리투아니아의 흐로드나 근처 마을에 살다가 일곱 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그곳을 떠나 이민길에 올라 미국의 뉴욕으로 가는 배를 탔지만 그들 가족이 도착한 곳은 영국의 런던이었다. 오랜 시간 엄청나게 열심히 공부했고 헤르슈 쎄베린에서 헨리 쎌윈으로 이름을 바꾸고 의사가 되었으며 전쟁에 참전하고, 젊고 부유한 아내를 만나 결혼하면서 화려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린다. 그러나 아내가 그의 유대인 혈통을 알게 되면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인생도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 화려하고 풍족했던 생활은 끝이 나고 부부의 사이도 틀어진다. 결국 그는 어디에도 마음을 붙일 수 없는 채로 몇 년 전부터 심한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나치의 등장으로 평화로운 삶이 일시에 무너지는 것에 비하지는 못한다. 파울 베라이터와 막스 페르버의 삶은 나치의 발흥으로 인하여 고향에서 내쳐진 것이고 스스로 원하자 않았음에도 이민자로서의 삶이 주어진다. 그럼에도 파울 베라이터는 고향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 고향에서 내쳐지는데 자꾸 돌아가려고 하는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끝내 알 수 없어서 더 애잔하고 처절하다.

파울은 4분의 1만 유대인이지만 그의 삶은 철저하게 독일인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운명을 더욱 파탄으로 몰고 갔을지 모른다.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교사의 길은 그가 종파에 소속되어 있지 않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유지할 수 없었고, 사랑했던 여인 헬렌은 어머니와 함께 강제 수용소로 이송 되었다. 반半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 처참하게 거세지던 때에 두려움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죽었고, 독일인인 어머니는 남은 재산을 빼앗기고 우울증을 앓다가 몇 주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독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자신 스스로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맹목적인 분노"와 "도착적인 기분" 때문이었는지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4분의 3만이 아리아인이었던 그에게 징집 영장이 발부되었고 군대에서 6 년간 복무한다. 전쟁이 끝난 후 그가 자신을 몰아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교편을 잡은 것도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고, 뼛 속 깊이 그곳을 혐오했지만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모든 사실들을 조사하여 알게 된 파울 베라이터의 삶은 오히려 고향에서 더 배척당하고 무시당하며 심지어 목숨을 위협 당하기도 한다. 사랑하면서 혐오하고 배척 당하는데 떠나지 못하는 그는 대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결국 이야기의 결말처럼 그곳의 철도에 머리를 밀어넣고 스스로의 목숨을 끝내는 것 뿐이었을까.

그럼에도 "친애하는 동료 시민에 대한 애도"라는 제목의 조사의 내용은 성의도 없고 책임감도 없었다.


  "파괴의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침묵하고, 모든 것을 감추고, 때로는 실제로 잊어버리기도 했는지요. 그런 것은 그들이 그전에 보여주었던 비열한 태도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는 것이에요. 커피가게 주인 쇠페를레가 파울의 어머니에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보세요. ... ... 쇠페를레는 테클라에게 반유대인과 결혼한 여자가 자신의 상점에 드나들면 다른 손님들이 싫어할 수 있으니, 아주 정중하게 부탁하건대 앞으로는 자신의 가게에 매일 드나드는 일은 삼갔으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베라이터 가족이 겪어야 했던 그런 비열하고 치졸한 일들을 당신이 몰랐다는 것이 내겐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에요."(65~66쪽)



파울 베라이터와 반대로 독일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한 이민자의 삶을 살았던 막스 페르버도 죽는 날까지 기억에서 지우지도 다시 모두 기억해내지도 못하는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나치에 의해 부모님이 강제 수용소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혼자만이 영국으로 보내져 삼촌의 도움으로 학교를 졸업하지만 그는 삼촌이 있는 미국으로도 자신의 고향으로도 돌아가지 않고 그와 닮은, 쇠락한 공업도시 맨체스터에서 영원한 이민자로서의 삶을 택한다. 독일어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독일 땅을 단 한번도 밟지 않았지만 잊었다고 생각했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억압할 수록 자꾸 튀어나와 그의 삶을 침잠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그는 그에게 단 하나 남은 어머니의 아름다운 시절의 동화와 같은 기록을 작가에게 넘긴 것이다. "결국에는 가슴을 옥죄어 지극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동화"(244쪽)같은 고통을 끝내기 위해. 


막스 페르버의 과거를 추적하던 작가는 이렇게 썼다. 

  "... 나를 에워싸고 있는 독일인들의 정신적 빈곤과 기억상실, 그리고 과거의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린 그들의 교묘함으로 인해 내 머리와 신경이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또렷하게 의식할 수 있었다."(287쪽)고. 



제발트는 독일인들이 행하고 있는 추모와 참회, 반성의 행동들이 진실하지 못하다고,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겐 모범적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 내 머릿 속엔 빌리 그란트 수상의 무릎꿇고 머리 숙인 그 사진이 또렷이 남아있고, 아직도 나치 협력자들을 법정에 세우고 있는 나라인데... 아니란다! 과거의 흔적을 교묘히 지우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일지 알 수 없지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지를 상상하면 무서워진다. 유대인 학살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사람들도,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도 그저 그 익명성에 묻혀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면 어떨 땐 끔찍하다. 그 익명성이... 그렇기 때문에 막스 페르버와 달리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죽는 날까지 독일 땅에 살았던 파울 베라이터는 자신의 생을 고향인 S시에서 자살로 마무리함으로써 그 비열한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일본의 현재와 비교해보면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제 <토성의 고리>를 끝까지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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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12-10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발트의 이민자들이군요! 저고 있는데, 이 양반 글이 좀 지루해서 이 작품을 읽엉야 하는지 망셜이다가 지금 커플들 행인들 읽고 있는데..그 다음 타자가 이민자들입니다. 계속 고민되고 이 리뷰를 읽으니 더 고민이 됩니다. 보토슈트라우스의 커플들은 만족하면서 읽고 있지만....제발트는...하~ 이거 이거 계속 미룰거 같아요..^^;;

은하수 2023-12-09 11:13   좋아요 0 | URL
미룰거 같은 그 마음 이해됩니다~~^^
저도 <토성의 고리> 먼저 시작했다 실패하고 이사하면서 알라딘 중고로 팔았는데... 어제 다락방 서재 올라갔다 혹시나 싶어 열심히 찾았잖아요..ㅠㅠ 없더라고요..ㅠ
지금은 후회해요. 이제 잘 읽을거 같은데..힝...하면서요
지루한감이 있긴해요 그래서 별네개... 근데 생각보다 또 재밌었단 말도 맞아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