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기억에 오래 남을 문장이다.


그 일이 처음 일어난 것은 어느 따뜻한 봄날, 할리우드 근처평지에 있는 우리 집으로 서쪽 바다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와 화분에 새로 심은, 가운데가 검은 팬지 꽃잎을 흩어놓던 화요일 오후였다. - P11

그러나 바깥이 어둑해지고, 내가 베어 문 한 입의 케이크가 목구멍을 다 타고 넘어갔을 즈음, 그 첫맛이 사라져갈 즈음, 나는 예상치 못한 내 안의 미묘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내 안에 깊숙이 묻혀 있던 센서 같은 것이 이제 막 탐지기를 곧추세우고 몸속을 돌아다니며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고 내 입에 경고하는 것 같았다. 최고급 초콜릿과 가장 신선한 레몬 같은 좋은 재료들은 더 커다랗고 어두운 무언가를 덮어버리려는 연막에 불과한 양, 그 아래 숨어 있던 것의 맛이 치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분명 초콜릿 맛이었지만, 그 맛이 퍼지며 흔적을 남기는 동안 동시에 내 입안에 가득 차는 것은, 하찮음과 위축된, 화가 난 느낌의 맛, 어쨌든 엄마와 연관이 되어 있는 듯한 거리감의 맛, 엄마의 복잡한, 소용돌이 같은 생각의 맛이었다. 마치 아스피린을 여러 알 집어 먹게 만드는 두통 때문에 이를 앙다무는 엄마의 느낌까지 맛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 좀 누웠다 올게... 하던 엄마 말 속의 말줄임표처럼 침대 탁자 위에 흰 줄을 이루며 나란히 놓여 있던 아스피린의 맛... - P21


그중 어느 것도 아주 고약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맛에는 뭔가가 빠져 있는 듯한,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한 맛이 났다. 레몬과 초콜릿이 그 뚫린 구멍을 그저 감싸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엄마의 솜씨 좋은 손이 케이크를 만들었고 머릿속은 재료의 비율을 어떻게 맞추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거기, 그 케이크안에, 엄마는 없었다.

- P21

엄마 말에 따르면 나는 그때까지도 건널목에서 꼭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건넜다고 했다. 열 살에야 나는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번 오빠 손을 잡고 길을 건넜지만, 오빠 손을 잡는 것은 그저 식물을 붙잡는 느낌이었고, 맞잡아주지 않는 손가락에서 오는 실망은 너무나 날카로워 어떤 때는 대신 팔뚝을 잡는 쪽을 택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처음 몇 번은 길을 건널 때 그렇게 했지만, 오크우드 애비뉴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나는 충동적으로 조지 오빠의 손을 잡아버렸다. 곧바로 내 손을 꽉 잡는 손가락들, 태양, 진분홍 무더기를 이루며 창문 위로드리워진 더욱 탐스러운 부겐빌레아 넝쿨. 
그의 따뜻한 손바닥.
인도에 웅크리고 앉은 오렌지색 줄무늬고양이. 낡은 검은색 티셔츠 차림으로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 활짝 열리는, 도시. - P88


우리는 인도에 도착했고, 손을 놓았다. 얼마나 바랐던가, 바로 그때, 온 세상이 건널목이기를.

- P88

아이들은 겁이 없다. 두려움도 전과 같았고 희망도 변함 없었지만, 바로 그 희망 때문에, 나는 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작은 흰 접시 위에 놓인 엄마의 파이 한 조각을, 천장의 붙박이 이중 전구 아래서 입안으로 가져갔다. 목 늘어난 버니 양말에 데이지꽃 잠옷바람으로, 맛은 너무 고약해서 입안에 물고 있기조차 힘들었다.
어떠니? 엄마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맛을음미하며 물었다.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시작이 케이크였다면, 끝은 파이였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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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3-2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8페이지의 문장은 제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라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

은하수 2023-03-21 19:14   좋아요 0 | URL
ㅎㅎ
사실은 저도 반가웠어요^^
다락방님 글에 등장할 때마다 궁금했거든요. 발견의 기쁨이 꽤 큽니다. 잊기 힘들거 같아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1970년 학생들의 요구로 ‘여성과 법‘ 과목을 개설한 그는 여성이 토지와 같은 재산으로 취급되던 판례집을 보면서 말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여겼다.
그래서 곧장 다른 여성 교수들과 힘을 모아 부당한 급여 체계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까지 간 끝에 승소했다 - P56

그는 자신의 싸움이 자기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1970년 미국 최초의 여성 인권법 전문 저널인 《여성 인권법리포터>를 창간한 그는 제자와 동료 변호사 들의 연구와 도움에 힘입어 젠더 차별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1972년 컬럼비아대 로스쿨에서 종신재직권을 받은 첫 여성 교수가 된 그는 같은 해 미국시민자유연맹 여성권익증진단을 창립했다.
 1970 년대초부터는 변호사로서 중요한 젠더 차별 사건 대부분을 맡게 된다. 페미니즘 제2물결을 일으킨 페미니스트들과 교유했고, 흑인여성 변호사이자 여성 시민권 운동가인 폴리 머리 등 자신에게영감을 불어넣어준 여성들을 긴즈버그는 결코 잊지 않았다. 
대법원에서 소수 의견을 제출할 때도 그는 다른 여성들의 어깨 위에 서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훗날 자신은 먼저 길을 간여성들의 뒤를 따랐던 것이며 마침내 세상이 자기 말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라고 밝혔다. - P56

긴즈버그는 직장 내 괴롭힘, 일과 가정 양립을 위한 가족 및의료휴가법, 정부가 선거철 기업의 지출을 얼마나 규제할 것인가를 두고 다툰 사건 등에서 진보적이고도 강력한 소수 의견을냈다. 2015년 4월 연방대법원의 역사적인 동성결혼 허용 결정심의에서 결혼이란 수천 년의 유구한 전통이므로 동성 간 결합 - P57

을 결혼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긴즈버그는 "결혼제도는 변했고 동성 결합은 지난날의 협소한 결혼 개념을 뛰어넘는 형태"라고 반박했고 승리했다.  - P58

그는 종종 욕심 많은 여성 판사로 여겨지곤 했다. 그에게 사람들이 "미국 연방대법원에 여성 대법관이 몇 명이 있어야 충분하다고 보십니까?"라고 물을 때마다 긴즈버그는 "아홉 명입니다"라고 답했다. "오랫동안 대법관 아홉 명이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여성 대법관이 아홉 명이 되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 P58

"판사는 그날의 날씨가 아니라 시대의 기후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가장 유명한 그의 명언 중 하나다. 긴즈버그는 판사가 플라톤처럼 판결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민주주의가 파괴될 수 있다고 여겼다. 스스로가 중립적이라는 착각과 오만을내려놓고, 자신조차 의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 P58

그가 물러나지 않는 것에 ‘노욕‘이라며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보수적 대법관의 최고 어른으로서 역할을 자임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2020년 9월 18일, 미국 대통령 선거를 얼마 앞둔상황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

긴즈버그의 후임 대법관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보수성향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지명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여성의 임신중단을 강력하게 반대해온 후임자는 판사 시절 관련 판결에서 모두 낙태를 제한하는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1993년 대법관 인준청문회에서 긴즈버그가 임신중단권의 현실적인 필요성을 밝히며 "정부가 여성의 자율적 결정을 통제한다면, 여성은 자기 선택을 책임지는 온전한 성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게 된다"고 말한 것과 대비된다." ‘악명 높은‘ 긴즈버그의 빈자리가 과연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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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세상을 활보한 여자들, 그 용기에 대하여


지적인 파도 속에 몸을 던지기 전이니 워밍업하는 기분으로 읽어보겠다^^


-나혜석, 하야시 후미코, 버지니아 울프

거의 동시대에 살다 간 이들 세 여성이 유럽 한가운데에서 옷깃을 스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만 서구에서 근대가 막을올리고 여성들이 참정권 보장을 외치며 스커트 자락을 걷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직후, 내로라하는 당대 여성 작가였던 이들또한 보행의 자유를 누리기 시작한 여성들의 물결 속에 스스로몸을 던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 때였으니 이른바 역사의 대전환을 코앞에 둔 시기였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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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르작의 《신세계로부터》 듣다 드는 생각

내일은 시엄니 7주기이다. 남편 손 위 누님(큰형님, 작은형님) 두 분 정말 몇 년 만에 오신대서 열심히 욕실 청소하면서 라디오 듣는데 드보르작의 《신세계로부터》가 나오는거다.
평소 이 음악 들을 땐 뭔가 거룩한 것에 둘러싸인듯 벅찬 감정을 느꼈었는데 오늘은 요즘 내가 읽는 책이 미국의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의 《하워드 진, 역사의 힘》,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이다보니 이 음악이 그냥 벅찬 감정으로 들리지 않는거다. 마침 어젯 밤 인디언들이 땅을 지키기 위해 벌인 전쟁 부분을 읽었으니 더 그랬다.

내 기억으로 드보르작은 1892년 뉴욕 내셔널 음악원 원장으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인디언들의 민속음악과 흑인영가를 채집하였고 이에 자극을 받아 작곡을 하고 작품의 제목도 직접 붙였다. 1892년 쯤에는 미국이
인디언들의 땅을 ‘사유화‘라는 이름으로 인디언들이 살고 있던 땅을 훔치고 빼앗고 죽이고 좁은 구역에 몰아넣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던 시기였을텐데...
드보르작은 이런 모든 것을 다 보고 알았고 느꼈을까. 이런 거대한 슬픔의 감정을 곡에다 반영했을까? 그걸 모르겠네!

이런 심각한 글을 읽으면서도 배는 고프고
음악 틀어놓고 썬룸에 앉아 풍경보며 먹는 샌드위치도 맛있고 낫또도 맛있고. 언제나 빵과 장미는 중요한 가치이다!




1880년대에 미 의회는 인디언들이 살고 있던 공유지를 해체해 사적 소유지로 만드는 법안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찬양하는 ‘사유화‘였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인디언들이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법안을 입안한 상원 의원 헨리 도스는 체로키 족을 방문했을 당시 자신이 발견한 것을 이렇게 묘사했다.

"개인 소유의 집을 가진 가족은 하나도 없었다. 극빈자도 없었고, 달러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 학교와 병원을 지었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에는 명백한 단점이 있다. 이 사람들은 땅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땅을 차지할 수 있다...... 이웃집보다 자기 집을 더 번창하게 만들려는 적극성이 없다. 문명의 근저에 흐르는 이기심이 없는 것이다."
- P142

1933년 발표한 자서전에서 루서 스탠딩 베어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로 백인들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백인들의 문명이 꽃피운 열매는, 때깔도 곱고 맛도 있어 보이지만, 사람을 병들게 하고 말라 죽인다. 사지를 절단하고 약탈하고 분탕질하는 것이 문명의 일부라면, 도대체 진보란 무엇이란 말인가? 감히 말하건대, 원뿔형 천막 속에 앉아서 삶 자체와 삶의 의미를 명상하고, 모든 피조물을 혈족으로 받아들이고, 우주 만물과의 합일을 인정하는 사람이아말로 자신의 존재에 문명의 진정한 정수를 불어넣는 것이다."


1. Luther Standing Bear(1868-1939). 아메리카 원주민 작가. 인디언 문화의 가치를 옹호하는 책들을썼으며, 인디언의 권리를 위한 활동에 앞장섰다. - P143

이렇듯 콜럼버스를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은 진보, 문명, 우리가타인들과 맺는 관계, 우리가 자연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콜럼버스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나 역시 이런 말을 꽤 자주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당신은 전후 맥락을 무시한 채 콜럼버스를 20세기의 눈으로 보고 있다. 500년 전의 사건들을 우리 시대의 가치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역사적인 것이다." - P144

이런 주장은 참으로 이상하다. 잔혹 행위, 착취, 탐욕, 노예화,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 등이 15~16세기에는 다른 특별한 가치가 있었다는 말일까? 20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는 말일까? 콜럼버스 시대와 우리 시대에 공통적인 인간의 가치는 없을까? 콜럼버스 시대에나 우리 시대에나 타인을 노예로 만드는 사람과 착취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권을 위해 그런 자들에게 저항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그런 가치의 존재를 증명해준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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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콜럼버스와 서구 문명

˝이교도에 맞서 화약을 사용하는 것은 신께 경의를 표하는 것˝,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문명화하는 것˝이 미국의 의무라고? 뭔 개소리여... 그리스도교가 문명이면 인디언들은 문명이 없었단 말인건가?
그나저나 그런 의무를 지라고 아무도 부탁한 적 없는데...ㅆㅂ 욕나오네...


17. 새로운 역사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점점 더 주목받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는 파괴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민중운동이 어떻게 부자와 권력층에게 위협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심지어 우리는 그들을 권좌에서 물러나게도 할 수 있다. 게다가 권력자들이 다른 사람을 위해 준비해 놓은 피고석에 그 자신들을 앉힐 수도 있다.》(181)



군사 정복에서는 언제나 여성이 잔혹한 취급을 당한다. 쿠네오라는 이름의 한 이탈리아인 귀족은 초기 성적 접촉을 기록해 뒀다. 쿠네오가 ‘제독‘이라고 언급한 이는 콜럼버스다(스페인 군주와 맺은 협정 가운데 하나가자신을 제독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쿠네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우 아름다운 카리브 여인을 붙잡았다. 제독은 그 여자를 내게 준다고 말했고나는 즐기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나는 욕망을 실행에 옮기고 싶었지만 그 여자는 원하지 않았고, 나라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방식으로 내게 손톱을 들이댔다. 그러나 난 그런 행동을 보자마자, 밧줄로 그 여자를 마구 때렸다. ......마침내 우리는 합일(合一)에 다다랐다.

... - P127

몇몇 선생님들은 불필요하게 아이들을 겁주지 않으면서도 실제 일어난 역사의 진실을 왜곡 없이 들려줄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진실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다 자란 아이들조차도 여전히 진실을 듣지 못하고 있는 미국 사회의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앞서도 밝혔지만, 나는 대학원을 다닐 때에도 내가 저학년일 때 들은 콜럼버스 신화를 반박하는 정보를 보지 못했다. 모든 연령의 독자들이 내게 충격적이었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미뤄 볼 때, 내 경험이 전형적임이 분명하다. - P131

성인용 책인 <컬럼비아 백과사전>을 보면, 매우 길게 약 1000단어로 된콜럼버스 항목이 있다(나는 1950년판을 갖고 있지만, 모리슨의 전기를 포함해 당시까지의 모든 관련 정보가 들어 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콜럼버스와 부하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언급한 문구는 찾을 수 없다. - P131

1986년판 《컬럼비아 세계사》도 마찬가지다. 콜럼버스에 대한 언급은 몇몇 있지만, 콜럼버스가 원주민에게 한 짓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아메리카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할애된 몇몇 쪽에서도, 당대의 신학자들이나 오늘날의 역사가들 사이에서 당시의 원주민들 처우가 논란이 되고 있다고 적혀 있을 뿐이다. 《컬럼비아 세계사》의 한 구절을 통해서,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이 ‘균형 잡힌 접근법‘의 특징을 잡아낼 수 있다. - P132

인디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라는 왕실과 교회의 결정, 신대륙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 인디언들을 보호하려는 몇몇 스페인 사람들의 시도는 매우 두드러질 만큼 복잡한 풍습, 법, 제도를 낳았다. 이 때문에오늘날까지도 역사가들은 아메리카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수행한 구실에관해 상반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논란의 여지가 있을 뿐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이 질문을 놓고 학술적 논쟁이 무성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소름 끼칠 정도로 인디언들의 수를 감소시킨 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잔혹 행위, 과로, 질병이었다. 최근 계산에 따르면, 1519년에 멕시코에는 인디언들이 약 2500만 명이 있었지만, 1605년에는 그 수가 100만 명을 약간 넘길 정도였다. -1986년판 《컬럼비아 세계사》
- P130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카리브 해와 태평양까지 뻗어 간 미국의 새로운 팽창주의는, 미국인들이 자신들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니 괜찮다는 식으로 용납됐다.  - P136

‘진보‘와 ‘문명‘이 가져다준 이득들, 그러니까 기술, 지식, 과학, 보건, 생활수준 등의 발전을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진보는 좋지만 인류는 그것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이다.
인류에게 끼친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산업과 기술상의 통계 수치 변화만 측정해, 진보했는지 안 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러시아를 강력한 산업국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스탈린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러시아의 주장을 받아들여야 할까?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었는데도? - P140

그런데 우리는 이 거대한 산업상의 진보를 위해 인류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배우지 못했다.

흑인 노예들의 노동이 어떻게 목화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는지, 열두 살에 공장에 들어와 스물 다섯에 죽은 어린 소녀들의 노동이 어떻게 방직 산업 발전시켰는지, 한여름의 더위와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 말 그대로 죽도록 일한 아일랜드인과 중국인 이민자들이 어떻게 철도를 건설했는지, 파업을 벌인 이민자들과 본토 노동자들이 경찰에게 두들겨 맞고 방위군들에게 체포돼 가며 어떻게 하루 8시간 노동을 쟁취했는지, 도시 빈민가에 사는 노동계급의 어린아이들이 오염된 물을 마시며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얼마나 일찍 죽었는지 등을 배우지못했다. 이 모든 것이 ‘진보‘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 P141

콜럼버스의 원정이 야만에서 문명으로의 전환이었는가? 콜럼버스가 상륙하기 전에 이미 수천 년 넘게 이룩돼 온 인디언들의 문명은 무엇인가? 라스카사스 같은 이들은 인디언 사회의 특징인 공유와 관용의 정신, 공동체 생활, 미적 감수성, 남녀평등 등에 경탄했다. - P141

북아메리카의 영국인 식민지 개척자들은 뉴욕과 펜실베이니아에 걸쳐살던 이로쿼이 족의 민주주의에 깜짝 놀랐다. 미국 역사가 게리 내시는이로쿼이 족의 문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동부 산림지대에서는 법령이나 규정도, 보안관이나 경찰관도, 판사나 배심원도, (유럽 사회의 권력기관인) 법정이나 감옥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용인될 수 있는 행동의 경계선은 명확하게 존재했다. 각자의 자율성을 무척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이로쿼이 족은 옳고 그름은 엄격히 구분했다."
- P141

콜럼버스 이야기, 더 나아가 전통적인 역사의 모든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우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고 언론의 자유를 훼손한다는 비난을 흔히 받는다.
 참으로 기이하다. 생각의 폭을 넓히고 새로운 책, 새로운 접근법, 새로운 정보,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낡은 이야기와 표준적인 역사의 수호자들이 아닌가. 그들은 ‘자유시장‘을 믿자고 주장하면서도, 온갖 사상이 존재하는 자유 시장은 믿지 않는다. 오직 상품과 서비스의 자유 시장만 믿을 뿐이다.
물질적 상품에 관해서든 생각에 관해서든, 그들은 권력과 부를 쥐고 있는사람들이 지배하는 시장을 원한다. 그들은 새로운 생각이 시장에 유입된 탓에, 사람들이 지난 500년의 ‘문명‘ 동안 너무도 많은 고통, 너무도 많은 폭력, 너무도 많은 전쟁을 야기한 사회구조를 다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정치적 올바름 Political Correctness. 1960년대의 신좌파들이 시작해 1990년대 유행한 일종의 언어 순화 운동. 인종, 민족, 종교, 성별 등과 관련돼 차별이나 편견이 포함되지 않은 표현을 쓰자는 운동이었다. - P149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른바 문명의 혜택에서 제외됐던 사람들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세계를 다른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단순한 일이지만, 우리가 애써서 성취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곧 다음 세기에 들어서게 될 우리에게는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다가올 세기가 뭔가 다르기를 원한다면, 다가올 세기가 미국이나 서구, 백인이나 남성, 또는 또 다른 국가나 집단의 세기가 아니라, 그저 인류를 위한 세기가 되기만을 바란다면 말이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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