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차일드》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가 있었던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 7편, 그리고 짧은 에세이까지 읽고 나서 작가에게 드는 이 친근감의 원인이 뭘까 잠시 생각해본다.
공통점이라고는 ‘여자라는 것‘ 한 가지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타비아 버틀러, 그녀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보다 훨씬 심한 부당한 대우 속에서 자란 약자 흑인 여성이었지만, ‘훗날 자신이 SF를 쓰는 작가가 될 거라는 것‘을 여섯 살 이후로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 기어코 이루어 냈다는 것이 흑인 여성 작가로 우뚝 선 그녀의 대단함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읽고 매일 일정하게 쓰기를 행하고 워크숍이나 글쓰기 모임에 나가 기꺼이 자발적인 평가를 당하고, 수정하고 또 수정하고, 아무리 두려워도 거절 당하더라도 글은 꼭 출판사에 보내야하고, 영감이나 재능 따위는 잊어야하고 쓰는 습관으로 승부해야하며,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물고 늘어지기˝ 즉, 집요함을 가지는 것. 그것이 작가 자신과 우리를 얼마나 먼 곳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를 안다면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작가는 이러한 사실을 작가를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글이라고 했지만 이것은 백퍼센트 작가의 경험이라는 것에 ... 뭘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이러한 긍정적인 집착, 물고 늘어지기, 집요함 등(프로르 시크리벤디)은 작가에게만 통용되는 법칙은 아닐 것이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ㅠㅠ 그건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거라고요. 그래서 그게 제일 어려운 거고요...



7편의 소설에 작가의 후기가 있어서 내가 더 친근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말들이니까 작가가 직접적으로 하는 말과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겠지만 어쨌든 옥타비아 버틀러 자신이 직접 쓴 후기라서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책을 읽으며 느꼈던 궁금증도 직접 말해주니 이중의 효과이기도 하다. 친밀감 증진과 궁금증 해소라는!

예를 들어, 소설 두번째 수록작인 <저녁과 아침과 밤>은 읽는 내내 조마조마하고 으스스 무서웠다. 거기에 나온 DGD(듀리에ㅡ고드 질환)라는 병은 자신을 죽이거나 심각한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그러나 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유전이 되는 무서운 질병이다. DGD의 원인은 ‘헤던코‘라고 하는 치료제의 일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헤던코‘는 세상에‘ 존재하는 암의 상당수와 많은 바이러스 질환의 치료제‘이자 DGD의 원인이다. 이 질환자들은 대부분 단명한다는 것이 통례였으나 ‘헤던코‘의 개발회사가 기증한 병원에서는 환자의 충동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다른 관심사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환자가
평화로운 상태로 오래 사는 실험이 진행중이었다.



아무튼,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은 ‘작가가 이런 병에 대한 아이디어는 대체 어디서 얻는지, 정말 이런 병이란 것이 생길 수 있는지, 우리가 많은 실험을 거치고 개발한 신약의 피해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친절하게도 후기에 설명이 붙어 있었다.~~



˝나는 세 가지 유전질환의 요소를 가지고 듀리에ㅡ고드 질환을 만들었다. 첫번째는 헌팅턴병이다. 유전되고, 우성이므로 부모 중 한 명에게 유전자가 있으면 피할 수 없다. 이 병은 단 하나의 비정상적 유전자에 기인한다. 또 헌팅턴병은 환자가 중년에 이르기 전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헌팅턴병에 더하여 페닐케톤뇨PKU 증을 이용했다. 유아가 특별한 규정식을 먹지 않으면 심각한 지적 장애를 유발하는 열성 유전 질환이다.
마지막으로는 심각한 지적 장애와 자해행위를 유발하는 레슈ㅡ니한 질환Lesch-Nyhan Disease을 이용했다.
나는 이 세 질환의 요소에 나만의 특별한 비틀기를 추가했다. 페로몬에 대한 민감성, 그리고 자기가 몸 안에 갇혀 있으며 그 살덩이는 진정한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환자의 지속적인 환각이 그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많은 종교와 철학에 나타나는 생각을 차용해서 극단으로 밀어 붙였다.˝ (169/459)


특별한 비틀기, 페로몬에 대한 민감성 ㅡ이 부분이 독특해서 인상적이었지 ㅡ 그리고 진정한 살덩이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해 극단적으로 자기 몸을 물어뜯는 환자들의 모습은 진짜 끔찍, 끔찍 그 자체였다. 이것은 지옥... 지금도 생각나.... 계속 생각날 듯 ㅠㅠ

                                  *********************************************************

이와 반대로 <마사의 책>은 소설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작가의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유토피아를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 마지막 작품은 예외였다. 작가인 주인공 마사에게 어느 날 전지전능하신 ‘신‘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할 일은 이렇다. 너는 인류가 탐욕스럽고, 잔인하고, 낭비 심한 청소년기에서 살아남도록 도울 것이다. 인류가 덜 파괴적이고, 더 평화롭고, 더 지속가능한 생활 방식을 찾아내도록 도와라. ˝


도와라!!!
한 마디로 인류의 미래에 대해 전권을 위임하겠단 말이다.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전제로...... 너무 무섭고도 두려운 어마무시한 권력이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피해가 가지 않을 결정은 없을 것이므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더더더 무섭고 힘든 결정이 되는 것이다. 나라면 대체 뭘 선택할 수 있을까. 하나를 선택할 수나 있을까. 그것에 따를 피해를 상상할 수 없으니 어떠한 결정도 내리기가 진짜 어려울 거다. 신은 뜬금없이 왜 내게 이런 어마어마한 결정을 맡겨놓고 피하지도 못하게 하는건지 신을 원망하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겠지. 피할 길은 없는데도...


마사는 꿈으로 해답을 내놓는다. 사실 해답인지는 잘 모르겠다. 작가는, 마사는 그랬다. 제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꿈을 꾸게 하고, 개인의 관심이 바뀌면 꿈도 달라지게 하는 거다. 무엇을 욕망하든 자는 동안 꿈에서는 가질 수 있고, 그것을 물리치지도 피할 수도 없는데, 그 대신 그 꿈은 현실보다 훨씬 더 깊게, 속속들이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니까 만족이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시도에 있지 않고 그 꿈속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유토피아를 주고 싶˝은 것이 마사의 이유이다.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밤마다 자신만의 유토피아, 대립과 투쟁을 갈망하든 평화와 사랑을 원하든 꿈속에서 천국을 경험한다면 깨어있는 동안 파괴하거나 지배하거나 정복하려는 욕구를 줄어들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것이 마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이다.
물론 이것의 폐해도 분명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작가는 조금도 유토피아를 믿지 않고, 내 유토피아는 누군가의 지옥일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내밀하고 개인적인 꿈속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에서 유토피아가 가능하겠는가˝(418/459)라고 말한다.
이것이 옥타비아 버틀러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이다. 냉정하지만 너무 맞는 말이라서 ‘반박불가‘로군! 이런 생각이 들었다가, 한편으론 따뜻하고 희망적인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많은 SF작품들도 있는데... 이렇게 살며시 입속말로 속삭여보다 말았다. 두고 떠나는 세계는 유토피아와 거리가 너무도 먼 세상일테니까.



난 유토피아라는 것에 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현실이기를, 좀만 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이기를 바랄 뿐이었지 이상적인 사회, 무릉도원식의 유토피아를 원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는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말에 공감할 수 밖에 없지만 유토피아가 실재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운 것은 아니다. 이미 난 유토피아는 인간 세상에선 있을 수 없는 상상 속의 산물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세상이 있을수가 있나. 꿈꾸고 있네? 이런 생각을 했었다.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은 나와 같은 것이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그래서 꿈속에서나 경험해보라는 거겠지! 살짝 비틀린 듯한 작가의 허탈한 웃음 한 스푼 투척에 나도 그냥 웃을 밖에.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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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작가 폴 오스터의 리커버 특별판이라니...
폴 오스터 책 세트 4권이 집에 다 있고(그러고보니 다 열책에서 출간된 책들이네! 표지는 좀 별로..)
<공중곡예사> 빼곤 다 읽은 책인데 사고 싶다!
리뷰 당첨금 받은거로 사고 싶다!
사서 다시 읽어 보고 싶어진다.
특히, <뉴욕 3부작>은 평론들과 달리 내겐 너무 별로였기 때문에 언젠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맘이 있었다. 대체 왜 별로였던건지...
언제나 문제는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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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05-12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로인 책들이 일으키는 마음은 신기하네요..이제 별로 읽고 싶지 않다…이기도 하고 아니 남들은 다 좋다는데 왜 나만 별로야? 하고 다시 읽기도 하고 ㅋㅋㅋ저도 둘다 느껴봤네요. 폴오스터는 좋다니까 막 몇 권 집에 어느새 모여 있긴 하던데 한 권도 안 읽은 게 새삼 신기합니다…신기함 남발해서 송구합니다…

은하수 2023-05-12 16:25   좋아요 1 | URL
제 마음을 딱 집어 표현하셨네요^^
근데 그래도 폴 오스터 꼭 읽어보셨으면 해요. 그것이 언젠가는일지라도요.
신기함 남발? 덕분에 웃었습니다~~

잠자냥 2023-05-12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공중곡예사>가 가장 좋던데, 그걸
안 읽으셨다니!

유수 2023-05-12 13:35   좋아요 1 | URL
저도 최애가 공중곡예사입니다!

은하수 2023-05-12 16:28   좋아요 1 | URL
정말요~~~???
전 달의 궁전이요. 초반엔 지루하다 중반부터 몰아치듯 전개되는 이야기에 푹 빠졌더랬죠~~
한동안 폴 오스터 책을 몰아서 계속 읽다보니 자꾸 밀리더라구요
책장에 꽂혀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데 이 참에 세트 구입해서 첫 책으로 읽어야겠단 생각이 부르르 드네요~~
 

I
날이 저물고 있었다. 고요한 대저택의 복도에는 어둠이드리웠고, 크레이프 천으로 된 가림막 커튼이 내려졌다.
위그 비안은 늦은 오후가 되면 매일 그랬듯 외출할 채비를 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위그는 2층에 있는 널따란 방에서 온종일을 보냈다. 방 창문으로는 로제르 강둑이 보였고, 강기슭을 따라 지어진 그의 저택이 물에 비치고 있었다. - P11

그에게 아내와의 이별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는 호화롭게 여가와 여행을 즐기며, 새로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새로운 지역에서 사랑을 맛보았었다. 전형적인 부부의 삶에서 느낄 수 있는 평온한 즐거움뿐만 아니라 순수한 열정, 지속되는 열기, 계속되는 성관계, 둑길이 서로 평행하게 위치하지만 물 위에서는 두 그림자가 뒤섞이는 것처럼 서로 먼 듯하면서도 결합하고 있는 영혼의 일치 같은 것 말이다.
이 행복했던 십년을 제대로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이 그렇게나 빠르게 흘러버렸다! - P13

그렇게 서른을 갓 넘긴 아내는 죽어버렸다. 몸져누운지 몇 주도 안 되어 이내 쓰러져버린 날을 마지막으로 그는 그녀를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위그는 양초가 비추는 것처럼 생기 없고 창백한 그녀의 꽃처럼 아름다운얼굴빛, 크고 검은 눈동자를 지닌 진주 같은 눈, 그리고 눈동자와 대조를 이루는 호박색 머리카락, 길고 구불구불하게 늘어져 등을 모두 덮어버리는 그 머리카락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 P13


위그는 이제 겨우 마흔 살이었지만, 불확실한 걸음걸이와 약간은 구부정한 자세로 둑길을 따라 같은 여정을 매일 저녁 되풀이했다. 혼자가 된 삶은 그에게 일찍 찾아온가을이었다. 관자놀이는 텅 비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잿빛가루로 가득했다. 생기 없는 그의 눈은 멀리 삶의 아득한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브뤼주 역시 어찌나 슬픈 도시인지! 위그는 그런 도시를 사랑했다! 그는 바로 그 슬픔 때문에 이 도시를 선택했고, 그런 큰일을 겪은 후 이곳에 와서 살게 된것이다. 한때 행복했던 시절, 아내와 함께 원하는 대로 여러 나라를 떠돌며 살아가고, 파리로, 외국으로, 바닷가로여행을 다니던 때에는 그녀와 이곳에 오더라도 도시의 엄청난 우울함이 그들의 기쁨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혼자가 되자 위그는 브뤼주를 회상했고 이제는 그 도시에 정착해야 한다는 직감을 순간적으로 느끼게 되었다. - P22

그는 진지하게 오랫동안 자살을 생각했었다. 아! 그 여인을 그는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녀의 눈은 여전히 그를향해 있다! 그가 항상 쫓아다니던 그녀의 목소리는 지평선끝에, 너무나도 멀리 잠겨 있다! 그 여인이 세상을 떠난 뒤그가 그녀를 전적으로 따르게 하고 온 세상으로부터 그를분리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사해의 열매처럼 입안에 영원히 재의 맛만을 남기는 사랑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 P26

그런데 갑자기, 그가 정신을 집중하여 기억 속에서 이미 반쯤 지워진 특성들을 재구성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다가, 행인들을 거의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런 일은너무나도 드물었던 위그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젊은 여인에게 돌연 마음의 동요를 느꼈다. 처음에 그는 거리 반대편 끝에서 다가오는 그녀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본 위그는 굳은 것처럼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 P28

반대 방향에서 오던 사람은 그를 스쳐 갔다. 그것은 충격이고, 예기치 않은 출현이었다. 위그는 잠시 어지러운 듯보였다. 그는 환영을 멀리하려고 눈에 손을 갖다 댔다. 위그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천천히 걸어가며 멀어지는 미지의 여인을 향해 몸을 돌려 가던 방향을 바꾸고 그가 내려가던 둑길을 벗어나 느닷없이 그녀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여자를 따라잡기 위해 그는 빠르게 걸어가 인도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가까이 다가갔고, 그녀가 넋이나간 듯 보이지 않았다면 무례하다고 느꼈을 정도로 집요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젊은 여자는 길을 걸어가며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냉담했다. 위그는 점점 더 이상한기분이 들고 얼이 빠진 것 같았다. 그가 이 길에서 저 길로돌아다니며 그녀를 쫓아간 지 벌써 몇 분이 흘렀다. 때때로 그녀에 대해 정확히 알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에게다가갔다가 너무 가까이 간 것 같으면 놀란 기색으로 멀리 물러났다. 위그는 어떤 얼굴을 알아내기 위해 찾아간우물을 발견한 듯 매혹당한 듯하면서도 겁에 질린 듯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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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볼 때 울프가 지닌 천재성의 일면은바로 그런 알지 못함, 즉 소극적 능력이었다.
언젠가 하와이의 어느 식물학자 이야기를들었다. 그는 새로운 종을 찾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는데, 그가 밝힌 요령은 밀림에서 길을 잃는 것, 자신이 아는 지식과 방법을 넘어서는 것, 경험이 지식을 압도하도록 허락하는 것, 계획이 아니라 현실을 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울프는 정신과 다리가 둘 다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배회하는 산책을 유용하게 활용했을 뿐 아니라 글에서도 칭송했다. 그녀가 1930년에 쓴 근사한 에세이[ 거리 떠돌기: 런던 모험(StreetHaunting: A London Adventure)」은 초기의 여느 에세이들처럼 어조는 가볍고 경쾌하지만
사실은 깊은 어둠을 여행하는 글이다.
(172/305)

그 글에 묘사된 산책은 실제 일화를 픽션화한 것일 수도 있고 아예 지어낸 것일 수도있다. 어느 겨울날 해거름녘에 그녀가 연필을 사기 위해서 런던 거리로 나선다는 설정인데, 사실 그 설정은 어둠을, 방랑을, 창조성을, 정체성의 소멸을, 육체가 일상적인 경로를 거니는 동안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대단한 모험을 경험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않는다. 울프는 이렇게 썼다. "저녁시간 또한 우리에게 어둠과 램프 불빛이 제공하는무책임함을 선사한다. 우리는 더이상 우리자신이 아니다. 날이 좋은 저녁 네시에서 여섯시 사이에 집을 나설 때, 우리는 친구들이아는 우리의 자아를 벗어둔 채 익명의 보행자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공화국 군대의 일부가 된다. 자기만의 방에서 고독을 맛본 뒤라서, 그들과의 사교는 참으로 기껍다." 울프
(173/305)

울프가 여기에서 묘사한 사회는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해방시키는 사회, 낯선 사람들의 사회, 거리들의 공화국, 대도시가 발명한 익명성과 자유의 경험이다. (174/305)

성찰은 대개 고독한 실내활동으로 묘사되곤 한다. 독방에 든 수도사, 책상에 앉은 작가. 
울프는 여기에 반대하면서 "집에서는 우리가 옛 경험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물체들에 둘러싸여 앉아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물체들을 묘사한 뒤에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문이 닫히면, 그런 것들은 사라진다. 우리 영혼이 자신을 담아두기 위해서, 남들과는 다른 형태를 스스로 빚어내기 위해서 분비한 껍데기와도 같은 외피가 갈라지며, 주름지고 거친 그 껍데기 중심에 진주알과도 같은 지각만이, 하나의 거대한 눈만이 남는다. 겨울 거리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174/305)

거리를 걷는 것은 사회에 관여하는 행위일 수 있으며, 봉기나 시위나 혁명에서처럼 여러 사람이 함께 걸을 때는 정치적 행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또한 걷기는 몽상과 주관성과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수단일 수도 있다. 그런 걷기는 바깥세상의 자극과 방해가 내면에서 흐르는 이미지나 욕망(그리고 두려움)과 함께 연주하는 이중주이다. 생각은 때로 야외활동, 육체적인 활동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훼방받지 않는 집중이 아니라 가벼운 주의산만이 상상력을 추동하곤 한다. 그럴 때 생각은 우회로로 간다. 곧 (175/305)

곧 바로는 가닿을 수 없는 장소를 향하여 슬렁슬렁 에둘러 간다. 울프가 「거리 떠돌기」에서 묘사한 상상의 산책은 오락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울프는 실제로 그런 산책의 와중에 『등대로』를 구상했으며, 책상에 앉은 채로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창작을 북돋웠다. 창조작업이란 무릇 예측 불가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법이다.
배회할 공간이 필요하고, 일정과 체계는 거부된다. 그 방식은 복제 가능한 공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176/305)

몇몇 구체적인 사회 변화를 요구했다는점에서, 울프는 혁명가였다. (그녀에게도 물론 자신이 속한 계급, 장소, 시대에서 비롯한 결함과 맹점이 있었고, 어떤 측면에서 그녀는 그것들을 넘어서서 바라볼 줄 알았음에도 전부 다 넘어서진 못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도 후세대가 어쩌면 비난할 수도, 비난하지 않을 수도 있는 맹점들이 있다.) 그러나 그녀가 꿈꾼 해방은 또한 내면적이고 감정적이고 지적인 해방이었다. (187/305)

 내 친구 칩 워드(ChipWard)는 "계량 가능한 것의 폭압"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측정될 수 없는 것에 거의 언제나 우선한다는 뜻이다. 사익이 공익에, 속도와 효율이 즐거움과품질에, 공리주의가 미스터리와 의미에 우선한다. 사실 우리의 생존에는, 또한 우리의 생존 이상의 차원에는, 또한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모종의 목적과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문명이 간직할 필요가 있는 다른 생명들에는 후자가 훨씬 더 유용한데도 말이다. (188/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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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 내가 뽑혔는지 얘기해 줘, 마난."
"오, 다 알면서 그러는구나, 꼬맹아."
사실 전부 알고 있었다. 키 크고 목소리가 꼬장꼬장한 무녀 사르가 그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 주어서 이미 다 외울 정도였다.
"그래, 알고 있어. 아투안 무덤의 유일 무녀가 죽음을 맞이할때 장례와 정화의 의식은 태음력으로 한 달 안에 전부 마치게 되지. 그런 다음 묘역의 무녀들과 시종관들 몇몇이 사막을 가로질러 나아가 아투안의 마을과 성읍들을 두루 다니면서 찾고 수소문을 해. 유일 무녀가 죽은 밤에 태어난 여자애를 찾는 거지. 그런 애를 찾으면 기다리면서 지켜보는 거야. 그 아이는 심신이 모두 잘못된 곳 없이 건강해야 하고 자라나면서 뼈가 굽거나 마마를 앓거나 결함이 생겨나도 안 돼. 눈이 멀어도 안 되고, 그애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아무 흠 없이 크면 비로소 그 애의 몸 - P20

이 죽은 무녀의 새로운 몸이라는 게 밝혀지지. 그리고 그 사실이 아와바스의 신왕(神)께 알려지게 되고, 그 애는 이곳 사원으로 오게 되지. 와서는 1년동안 교육을 받아. 그렇게 해서 그해가 다할 무렵 그 애는 옥좌관으로 끌려가 주어졌던 이름을 자기 주인이신 이름 없는 존재들께 돌려 드리는 거야. 왜냐하면 그 애는 이름 없는 사람이며 영영 환생하는 무녀이니까." - P21

묘역. 이곳은 오로지 이렇게만 불렸고 그 외의 다른 명칭이 필요 없었다. 이곳이야말로 카르그제국의 네 땅을 통틀어 가장 오래되고 가장 신성한 장소인 것이다. 
묘역 경내에는 사람이200명쯤 살고 있었고 건물도 여러 채였다. 세 채의 사원, 대관과 소관, 거세남인 시종관들의 거처, 그리고 담 밖 가까운 곳에호위대 막사며 노예 오두막이 즐비하고 창고, 양 우리, 염소 우리, 농원 건물들이 있었다. 얼마만큼 떨어져서 보면, 그러니까 샐비어와 헝클어진 바랭이 덤불, 자잘한 잡초며 황무지에 나는 풀 이외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메마른 서쪽 구릉지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그곳은 작은 마을처럼 보였다. 
그리고 동쪽 평원에서는 아주 멀리에서도 암반 속에 박혀 있는 운모 조각인 양산맥 아래 반짝이며 빛을 뿜는 쌍둥이 신 사원의 황금 지붕이 우러러보였다. - P28

동쪽에서 접근하는 여행자라면 우선 황금 지붕과 환히 빛나는 기둥들을 본 뒤에야 그 모든 것들 위로 묘역 언덕 좀 더 높은곳에 자리 잡은, 둘러싼 황무지처럼 쇠락한 채 갈색을 띤 민족최고(最古)의 사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하고 나지막한 옥좌관의 벽은 낡아 얼룩졌으며 둥근 지붕은 군데군데 푹푹꺼져 납작하게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 P29

육중한 돌담이 옥좌관 뒤켠에서 시작되어 언덕 전체를 둥글게 감싸며 달렸다. 이겨 붙이는 진흙을 쓰지 않고 쌓아 올린 담벼락은 곳곳에서 반쯤 무너진 채였다. 
이 담장이 둥글게 에워싼 안쪽으로 높이 열여덟 자에서 스무자에 이르는 검은 돌들이 몇개나 땅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손가락들인 양 곧추서 있었다. 
일단 한번 그것을 본 사람은 다시 돌아보게 되고야 말았다. 그것들이 거기 서 있는 데에는 뚜렷한 의미가 있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돌은 모두 아홉 개였다. 하나는 똑바로 서 있고 다른 것들은 약간씩 기울었으며 두 개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 P29

단 하나만 빼고는 도료를 바른 듯 얼룩덜룩하게 회색과 주황색 돌이끼가 끼어 있었다. 유일하게 벌거벗은 기둥은 까맸고 둔한 광택을 띠었다. 그 기둥은 감촉이 매끄러웠지만, 다른 것들은 달라붙은 돌이끼 밑으로 알아보기 힘든 새김자국이 드러나 보이거나 뭔가 형체며 기호 같은 것들이 더듬는 손끝에 느껴졌다. - P30

이 아홉 돌기둥이 바로 ‘아투안의 무덤‘이었다. 전해지기로 그 돌들은 첫 인간들의 시대 이래, 어스시가 창조된 이래 내내 존재해 왔다고 했다. 땅들이 대양의 심연으로부터 솟아올랐던 그때 그 돌들은 암흑에 뿌리를 박았다. 카르그의 신왕들보다도 오래고 쌍둥이 신보다도 오래며 빛보다도 더 오랜 존재들이었다. 그것들은 인간 세상이 있기 전에 지배하던 자들의 무덤이었다. 그들은 이름 지어지지 않은 자들이며, 그들을 섬기는 그녀 역시 이름이 없었다. - P31

소녀는 창 없는 자기 방에 앉아 있었다. 명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넋놓고 있던 터였다.
딱딱하고 둔감하게 굳어 있던 오만한 표정이 바뀌는 데엔 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긴 했어도 그녀의 표정은 확실히 변하여 영악한 흥미를 뚜렷이 비쳤다.
"미궁 말인가?"
"미궁에 들어가지 않아요. 하지만 지하 무덤은 가로질러야할 겁니다."
코실의 목소리엔 두려운 기색이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아르하를 겁주려고 짐짓 꾸며 보인 것일지도 몰랐다. 소녀는 서두름없이 일어서서 무감정하게 말했다.
"좋아, 그러지."
그러나 신왕 사원 무녀의 육중한 그림자를 따라 나설 때 그녀는 마음 깊숙이 기뻐 날뛰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이제야 드디어 내 영토를 보게 되는구나! - P44

아르하는 열다섯 살이었다. 성인식을 치르고 아투안 무덤의유일 무녀로서 모든 권력을 갖게 된 지도 1년이 지났다. 카르그땅의 모든 고위 무녀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이자 신왕조차도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제는 모든 이들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절했다. 심지어는 엄격한 사르나 코실조차도 그랬다. 말을 할 때도 모두들 신경 써서 말투를 바꿨다.  - P44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성한 취임 의식이 끝나자 세월은 옛날과 다름없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흘러갔다. 털실을 잣고, 검은 천을 짜고, 곡식을 빻고, 의식을 집행했다. 밤마다 아홉 성가를 불러야 했으며 문마다 축성을 하고 1년에 두 번씩 돌들에 염소 피를 먹이고 빈 옥좌 앞에서 그믐의 춤을 추어야 했다. 그렇게 꼬박 한 해가 지나갔다. 이전의 해들과 똑같이 일생이 그렇게 흘러가 버리는 걸까?
지루함은 때때로 너무나도 강하게 솟구쳐 올라 거의 공포처럼 느껴졌다. 그 감정이 숨통을 죄었다. 얼마 전 아르하는 누군가와 이야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해야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미쳐 버릴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가 고른 말상대는 마난이었다. 다른 소녀들에게는 자존심 때문에 털어놓을 수 없고, 나이 든 여자들에게는 노파심 때문에 고백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충실한 늙은 숫양 마난,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털어놓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난은 해결책을 갖고 있었다.
- P45

아르하는 며칠간 앓았다. 사람들은 열병에 듣는 치료를 베풀었다. 그녀는 침대에 갇혀 있든가, 따사로운 가을볕을 받으며 소관 현관에 앉아 서쪽의 언덕들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약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똑같은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까무러쳤던 것이 창피했다. 무덤 담장에는 보초가 세워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결코 코실에게 그 일을 다그칠 수 없게 되었다. 아르하는 코실을 아예 만나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수치스럽게도기절을 했기 때문이다. - P65

아무튼 과거에도 봤던 것들이 아닌가?
자신이 죽기 전에 본 것이며 말한 것에 대하여 사르나 코실이 언급할 때면 아르하는 아직까지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죽었던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나이 든 몸이 죽은 그때에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 번뿐이 아니다. 15년 전의 그때뿐 아니라 50년 전에도 그랬고, 그 전에도 다시 더 전에도, 세월을 거슬러 그 수백 곱에 이르기까지 앞 세대의 앞 세대로 거슬러 올라 미궁이 파이고 돌들이 세워지고 이름 없는 존재들을 위한 최초의 대무녀가 묘역에 살며 빈 옥좌 앞에서 춤을 추었던 그 첫 시대로부터 줄곧 그래 왔다. 그 모든 삶과 자신의 삶은 하나였다. 자신이 바로 최초의 대무녀였다. 모든 인간은 영원히 환생하지만 오직 한 사람 아르하만이 영원히 자기 자신으로 환생한다. 그녀는 수백 번이나 거듭 미궁의 길과 모퉁이들을 배워 마침내 감춰진 방에 도달하곤 했던 것이다.
간혹 기억이 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언덕 아래 암흑의 성소들은 너무나도 친숙해서 그녀에게 영토일 뿐 아니라 고향 같았다. 그믐에 약초 연기를 들이 마시며 춤출 때면 머리가 가벼워지고 몸은 자기자신의 것이 아닌 듯했다. 여러 세기를 통해 검은 옷을 걸치고 맨 발로 추어 온 그녀의 춤은 결코 그치지 않을 터였다. - P82

처음에는 눈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한 칠흑의 어둠 속에서는 종종 그런 경우가 있었다. 눈을 감자 가물거리던 빛은사라졌다. 그러나 눈을 뜨자 다시 보였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암흑이 아니라 잿빛이었다. 아무것도 보일 리 없고 모든 것이 암흑이어야 할 이곳에 창백한 빛의 끝자락이 어려 있었다. 몇 발짝 앞으로 나아가 통로 벽 모서리로 손을 뻗자, 몹시 흐릿하게나마 움직이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아르하는 더 나아갔다. 암흑의 핵심인 무덤굴 속, 이제껏 그어떤 빛도 비친 적이 없는 이곳에 희미하게 피어난 빛이란 너무나 괴이해 생각을 초월하고 두려움을 이겼다. 맨발에 검은 옷을 입은 아르하는 기척 없이 걸어갔다. 통로 끝의 꺾인 곳에서 그녀는 멈춰 섰다가 아주 천천히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고는 바라보았다. 그러자 보였다.
한번도 그렇게 많은 생을 살아왔어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다. 바로 대공동이다.  - P100

그곳은 수정들로 총총히 수놓이고 새하얀 석회석으로 된 조그만 탑들이며 섬세한 조형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지하수가 여러 시대에 걸쳐 이루어 놓은 결과이다. 반짝이는 천장과 벽으로 이루어진 압도적으로 거대한 그 공간이 빛 속에 섬세하며 정교한 자태를 드러냈다. 해묵은 암흑이 찬란함 앞에 쫓겨나버린 그곳은 금강석의 궁전이며, 자수정과 수정으로 빛나는 집이었다.
이처럼 경이로운 광경을 드러낸 빛은 그다지 밝지 않았으나 어둠에 익은 눈에는 눈이 부셨다. 도깨비불처럼 부드러운 번득임이 동굴을 가로질러 천천히 움직여 가며, 보석 박힌 천장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반짝임을 이끌어 내는 동시에 동굴 벽면을따라 몽환적인 그림자들을 무수히 끌어올렸다. - P101

그 빛은 나무 지팡이 끝에서 타오르고 있었는데, 연기도 없고무엇인가를 태우고 있지도 않았다. 지팡이는 인간의 손에 들려있었다. 아르하는 그 빛 가까이 드러난 얼굴을 보았다. 검은 얼굴이었다. 
남자의 얼굴이었다.

아르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나이는 오랜 시간을 들여 널찍한 공동 안을 이리저리가로질렀다. 뭔가를 찾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돌의 레이스 너머 탐색을 하며 지하 무덤에서 나가는 몇몇 통로들을 살펴보았지만 어느 길로도 들어서지는 않았다. - P101

"가라! 가거라! 사라져라!"
아르하는 느닷없이 온 힘을 다해 고함질렀다. 커다란 반향음이 대공동을 쩌렁 울려 전율하며 터져 나왔다. 그 소리가 깜짝놀라 이쪽을 돌아본 검은 얼굴을 흐려 놓는 것처럼 보였다. 윙윙 울리는 찬란한 공동 너머로 한순간 그가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빛은 꺼졌다. 모든 찬란함도 사라졌다. 눈이 먼 것 같은 캄캄함과 침묵이 뒤덮었다.
이제 아르하는 다시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빛의 마법에서 풀려난 것이다. - P103

그가 등을 대고 눕자 작고 동그란 도깨비불은 지팡이에서 두둥실 떠올라 머리 뒤쪽 몇 자 높이에서 어둑하니 빛을 발했다.
가슴에 올려 둔 왼손으로는 목에 건 묵직한 사슬에 매달린 뭔가를 쥐고 있다. 그는 두 다리를 발목에서 어긋맞긴 자세로 아주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그의 눈길이 엿보기구멍 근처를 떠돌다가 다른 데로 흘렀다. 그는 한숨을 쉬곤 눈을 감았다. 불빛이 서서히 침침해졌다. 그는 잠이 들었다.
가슴에 얹은 채 꽉 쥐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며 옆으로 흘러떨어졌다. 위에서 엿보던 사람은 그 사슬에 걸려 있는 호신부를보았다. 그것은 초승달 모양을 한 거친 금속 조각으로 보였다.
요술이 빚어낸 희미한 빛이 사그라졌다. 사내는 침묵과 어둠속에 누워 있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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