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시선을 감당할 준비를 하고서 얼굴을 들었다. 역시,
변함없는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았다.
"감독님은 작품에서 리얼을 추구하고 있잖아요. ‘한 시간전‘에서도, 죽음을 전혀 미화하지 않았죠. 그래서 평가가 높았겠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비슷하게 높았어요. 소중한 사람을자살로 잃은 사람의 심정을 짓밟고 있다고 말이에요. 하지만감독님은 자신의 신념을 굽힐 마음이 없………는 거죠?"
"네, 맞아요." - P251

"이렇게 인식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실제로 발생한 일은 사실, 거기에 감정이 더해지면 진실이라고 인식하고 있어요. 재판에서 공표되는 내용은 사실뿐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공평하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인간의 행동에는 반드시 감정이 따르잖아요. 그 감정을 배려할 필요가 있으니 재판에서 판가름하는 것도 그 진실이어야 마땅할 텐데, 과연 그게 진짜 진실일지."
"진짜?"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아 고개를 기울였다.
"사실이 있고, 감정을 뒤에 갖다 붙인 게 아닐까, 하는 거죠.
피고인의 범행 당시의 기분이나 심리 상태가 아니라, 재판에유리한 감정을 나중에 덧붙여서, 그걸 발표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아하"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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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미나토 가나에
역시나.. 가독성 최고!


ㆍ에피소드 1
떠오르는 것은 그 아이의 하얀 손. 잊히지 않는 것은 그 손끝의 온도, 감촉, 나눴던 마음. - P9

지금도 그게 학대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훈육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엄마도그렇게 말했다. 순서는 반대였을지 모르지만. - P9

부모가 내게 손찌검했던 기억은 한 번도 없다. 다만 엄마에게 자주 혼났다. 컵의 물을 쏟거나, 그림을 그리고 난 다음 크레파스를 제자리에 정리하지 않으면 엄마는 "조심해야지!"
하거나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니!" 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베란다로 쫓겨나는 것은 그런 일 때문이 아니었다. - P9

ㆍ에피소드 3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마주하기 위해서인데, 어째 나는 과거의 자기 모습마저 비천하게그리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좋을지 모른다. 스스로는 순수하다고 여겼던 모습도 누군가의 눈에는 비천하게 비쳤을 수 있으니까.
오히려 그 무렵부터 내 눈은 동정이라는 이름의 베일을 쓴경멸의 빛을 띠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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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함정임

황금 장미를 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오후의 정적과 석양. 몽파르나스 묘원을 산책하는 나는 자주 저 먼 하늘을 본다. 하늘 이외에 달리 어디를 볼 것인가. 죽은 자들의 빈집들과 그들의 상징들, 그리고 이제는 먼지보다 가볍게 사그라진 그들의 육신을 처음부터 짓누르고 있는 현재의 검고 붉고 흰 묘석들. 영원과 순간의 교차가 파도처럼 휘몰아쳐 메마른 가슴팍을 찔러대고, 나는 지상에서 가장 깨끗한 울음을 울고 싶어진다. 나를 위해서도 저들을 위해서도 아닌 단지 이 세상 혹은 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위해서 우는 것이다. 울음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 P68

막강한 돌조차도 고사목처럼 삭은 몸을 내보이는
저 시간의 위녁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이 덧없는 발
길과 저 덧없는 마음의 경미한 충동들을 이리저리 흘려보내며 마침내 도달한 곳이 ‘세기의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Marguerite Duras, 1914~1996의 집이다.

열다섯 살 반, 날씬한, 오히려 연약하다고 할 수 있는 육체, 아기 젖가슴, 연한 분홍빛 분과 루주를 바른 얼굴. (중략)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고, 아직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 P69

모든 것이 ‘거기 있다‘ 또는 ‘거기 있었다‘. 실존철학자들과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즐겨 쓰는 이 시제時制만 달리한 두 문장에는 아찔한 의식의 벼랑, 시간의 벼랑이 가로놓여 있다. 나는 삶이 혹은 글쓰기가 권태로울 때는 지루한 허공에 침을 뱉기라도 하듯 뒤라스의 작품들을 충동적으로 펼쳐보곤 한다. 유년을 송두리째 인도차이나의 이방인으로 보낸 뒤라스적인 벼랑 의식이 나를 다시 글쓰기의 욕망으로 인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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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삶》 그라실리아누 하무스






만약 그가 무언가를 배웠다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 했을 것이고, 결코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비아누는 제분소의 토마스 씨를 생각했다. 세르탕. 사람중 가장 불행한 이는 제분소의 토마스 씨였다. 왜일까? 아마도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 것 같았다. 파비아누는 여러차례 말했었다. "토마스 씨, 어르신은 정상이 아니에요. 뭐하러 그렇게 종이 더미에 파묻혀 지내요? 재난이 닥치면, 토마스 씨도 다른 사람들처럼 망할 거예요." 
그러다 가뭄이 왔고,그렇게 착하고 책을 많이 읽은 그 불쌍한 노인은 모든 것을 잃고 나약하게 거리에 나앉았다. 아마도 이미 살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사람이 혹독한 여름을 견디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 P26

제분소의 토마스 씨는 말을 잘했다. 신문과 책을 너무 많이읽어 시력이 나빠질 정도였지만, 명령할 줄은 몰랐다. 대신요청했다. 가진 사람이 예의 바르다는 것이 이상했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도 그의 태도를 비난했다. 하지만 모두 그의 말에복종했다. 
아! 누가 복종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P27

다른 백인들은 달랐다. 가령 현재의 주인은 쓸데없이 고함을 쳤다. 거의 농장에 오지 않다가 무언가 흠잡으려 할 때만농장을 찾았다. 가축이 늘어나고 농장 일도 잘 돌아갔지만,
주인은 소몰이꾼을 나무랐다. 당연했다. 그는 나무랄 수 있는 자였기 때문에 나무랐고, 파비아누는 겨드랑이에 가죽 모자를 끼운 채 그의 핀잔을 듣고 용서를 구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 P27

하지만 그는 마음속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수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주인은 그저 자기가 주인이라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 화를 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의심의 여지가 있을까? - P28

파비아누는 농장의 일부이자 무용한 물건처럼 보였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해고될 것이 분명했다. 농장에 고용되면서 파비아누는 종마와 다리 보호대, 가죽 재킷, 가슴 보호대와 생가죽 신발을 받았지만, 나갈 때는 그를 대신할 
소몰이꾼에게 모든 것을 내주게 될 것이다. 
비토리아 어멈은 제분소의 토마스 씨의 것과 같은 침대를 갖고 싶어 했다. 정신 나간 생각이었다. 파비아누는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정신나간 생각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들 같은 아무개 따위가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그들은 그저 그곳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주인은 언제든지 그들을 내쫓을 수 있었고, 그들은 목적지도 없이 세상을 떠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잡동사니를 싸 들고 갈 방법도 없었다. 파비아누의 가족들은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한 채 살았고, 나무 밑에서도 금세 잠들었다. - P28

"언젠가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불행을 자초한다."
그도 살과 피를 지닌 엄연한 사람이 아닌가? 물론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일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괜찮았다. 그러한 운명으로 태어난 것이다.
나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어쩌겠는가?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만약 더 나은 운명으로 바꿀 수 있다고 누군가 그에게 말한다면, 그는 놀랄 것이다. - P121

그는 야생동물을 길들이고, 주술로 상처를 치료하며, 겨울부터 여름까지 울타리를 수리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그렇게 살았고,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윗대의 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만다카루 선인장을 자르고, 가죽 채찍에 그리스 칠을 하는 것, 그것이 핏속에 있었다. 그는 운명에 순응했고,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만약 그의 몫을 주었다면,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몫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미천한 존재였다. 강아지나 매한가지였다. 뼈다귀나 받아먹는 존재였다. 부자들은 왜 그 뼈다귀의 일부마저 차지하려는 것일까? 그처럼 고귀한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 그런 미천한 사람들의
것까지 차지하려 한다는 사실이 역겨웠다. - P121

파비아누가 바로 서서 군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그는 눈길을 피했다. 파비아누는 사람이었다. 여생 동안 힘없이 축처져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끝난 인생이라고? 파비아누는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비틀거리며 주저앉기 바쁜 저 병약한 자를 왜 없애야 할까? 장터에서 어슬렁거리며 가난한 사람들을 모욕하는 그런 제복 입은 자들의 나약함 때문에 스스로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파비아누는 자신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일따윈 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었다. 그는 힘을 비축했다. - P135

파비아누는 주저하며 이마를 긁었다. 그런 나쁜 작은 짐승들이 많았다. 그렇게 약하고 나쁘며 작은 짐승들은 너무나 많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파비아누가 비굴하고 순종적인모습을 보이자 군인은 용기를 얻고 다가와 단호한 태도로 길을 물었다. 파비아누는 가죽 모자를 벗었다.
"정부는 정부니까요."
가죽 모자를 벗은 그는 허리를 굽힌 채 노란 제복의 군인에게 길을 알려주었다. - P135

가족들은 말라비틀어진 키샤베이라 나뭇가지 아래에서 쉬었고, 밀가루 한 줌과 고기 조각을 씹은 뒤 물병의 물 몇 모금을 마셨다. 파비아누의 이마에서 땀이 마르며 깊은 주름 속먼지와 함께 가죽 모자의 끈에 스며들었다. 현기증은 사라졌고, 요동치던 배도 가라앉았다. 다시 길을 나설 때는 물독의 무게로 비토리아 어멈의 등골이 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는 들판에서 물줄기의 흔적을 찾았다. 날카로운 추위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더러운 이를 드러내며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이렇게 더운데 어떻게 추울 수 있을까? 그는 그렇게 아이들과 아내, 무거운 짐을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 P156

물통의 무게는 하찮았지만, 파비아누는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며 힘차게 걸음을 옮겨 물웅덩이로 향했다. 그들은 밤이 되기 전에 도착할것이고, 물을 마시고 휴식을 취한 뒤 달빛 아래 여정을 이어갈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불확실했었지만 나름의 규칙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다시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보다 더한 일도 겪어봤어." 파비아누는 하늘과 가시덤불, 그리고 독수리에게 도전하듯 말했다.
"왜 아니겠어요?" 비토리아 어멈이 묻는다기보다 그저 그가 한 말을 확인하듯이 중얼거렸다.
조금씩 희미하게나마 새로운 삶의 윤곽이 그려졌다. 가족은 작은 농장에 머물 것이다. 덤불숲에서 자유롭게 자란 파비아누에게 그것은 어려워 보였다. 가족은 몇 마지기의 땅을 경작할 것이다. 도시로 이주하면,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부부와는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비토리아 어멈은 흥분했다. 파비아누는 웃었다. 그는 손을 비비고 싶었지만 자루와 수발총의 개머리판을 잡고 있어야 했다. - P160

 그는 비토리아 어멈이 확신에 차서 중얼대는 소리를 그대로 따라 했다.
그렇게 가족은 꿈에 부풀어 남쪽을 향해 걸었다. 힘센 사람들이 가득한 대도시. 아이들은 학교에서 어렵지만 필요한 것들을 배울 것이다. 파비아누와 비토리아 어멈은 나이 들어 결국 강아지와 같이 쓸모가 없어지면, 발레이아처럼 
사라져갈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식들이 떠난 집에 남아 걱정만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가족은 문명화된 낯선 땅에 도착해서 그곳에 갇히게 될 터였다. 그리고 세르탕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대도시로 보낼 것이다. 세르탕은 파비아누, 비토리아어멈, 그리고 두 아이들과 같이 강하고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을 도시로 보낼 것이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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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파르나스 묘지/장미와 함께 잠들다
표지의 ‘유럽 묘지 기행‘이라는 문구에 끌렸다.
체코 프라하 여행 갔을 때 비셰흐라드 공동 묘지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보았던 묘지가 굉장히 인상 깊었었다. 보통은 여행 가서 묘지는 잘 가지 않는데 그 때는 여행 코스에 비셰흐라드 묘지가 있었다. 아름답게 조성된 묘지는 공원으로서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드보르작과 스메타나, 알폰스 무하, 카렐 차페크, 얀 네루다의 묘지를 봤던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우리와는 너무 다른 유럽 묘지 분위기라 기억에 남아 잊히지 않았다. 아름다웠다. 묘지도 베드로와 바울 성당도 녹음도...
그리고 휴일을 즐기는 프라하 시민들의 여유로운 일상의 모습도...

그래서 이 책에 끌렸을 거다.






푸른 문의 종소리
그때, 느닷없이 종이 울렸다. 종소리는 내 몸 바로 앞에서, 옆에서, 아니 지금까지 걸어온 발걸음 뒤, 지치고 메마른 영혼의 바닥을 치고 울리듯 돌발적이었다. 몽파르나스 타워를 등지고 아카시아 꽃잎 눈처럼 하얗게 떨어진 에드가 키네 대로를 느리게 걸어가고 
있던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그곳이 어디든 종소리와 마주치면 나는 헛것에 홀리기라도 한듯 눈이 멀어 길을 잃곤 했다. 
경주 계림의 고택에 누워 있다가도 분황사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대릉원과 황룡사 터를 한달음에 내달려 석양빛 경내로 들어서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고, 센강에서 한참 멀어졌다가도
노트르담 대성당의 저녁 미사 종소리에 자석처럼 이끌려 발길을 되돌린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종소리를, 태초의 종소리처럼 듣고 있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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