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비행사>, <그라이펜 호수>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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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사람 느뵈

"자, 용기를 냅시다. 고통은 잠시뿐입니다. 
그 후에는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합니까?"
"물론입니다. 자, 용기를 냅시다."
계속 팔의 똑같은 부분을 붙잡혀 있다 보니,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게가 발을 물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등골이 오싹했다.
"잠깐만요. 우선 이 팔 좀 놔주세요."
나는 죽기 싫었다. 게다가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타인에게 끌려서 억지로 죽기는 싫었다. 자살이란 완벽하게 자유로워야 한다. 자살은 보통어 일반적인 죽음과는 다르니까. - P96

뜻밖에도 그는 내 말대로 순순히 팔을 놓아주었다.
마치 목을 졸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팔을 놓아주자 폐 속으로 시원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그가 몸을 웅크리더니 마디가 굵은 손가락 두 개로 강물의 온도를 쟀다.
"좀 차갑군."
그는 손가락을 빼며 말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죠."
"아뇨. 지금 결말을 지어야 합니다." - P97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와 비슷한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그 원인은 언제나 나의 고독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싶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싶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갈망한다. 다만 아는 사람이 없으니,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리로 나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기회가 없다. 그렇게 하다 보니 결국 이런 꼴이 되고 만것이다. - P97

신사 라카즈

나는 이 남자에게 내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어쩌면 흥미를 가져줄지도 모른다. 지금 큰맘 먹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히 후회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평소에 내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그런이야기를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절대 입도 뻥긋 못 할 것도 같았다. 특히 누군가에게 작정을 하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잘 안되었다.
그 남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구나 큰맘 먹고 말을걸어 볼라치면 그때마다 그는 주머니 속을 뒤지거나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것만으로도 내 용기를 꺾기에 충분했다. 이런 멋진 신사의 사색을 방해하거나 억지로 이쪽으로 관심을 돌릴 용기가 내겐 없었다. 정말로 말을 걸려면,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잘 포착해야만 한다. - P115

나는 라카즈 씨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부자여서만이 아니라 선의를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침대에서 상상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있는 일이다. 

망상을 하지 않도록 늘 나 자신을 설득하지만, 나의 상상력은 전혀 말을 듣지 않는다.

라카즈 씨의 태도에는 나를 깔보는 경향도 있
었다. 그렇지만 그가 나를 잘 모르니까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 P130

블랑셰

만약 여기서 블랑셰의 친구와 맞닥뜨린다면, 
그녀는 어떻게 행동할까? 나를 두고 둘이 가버릴까? 갑자기 내가 통증으로 걸을 수 없게 된다면 그녀는 어떻게 할까?
만약 어딘가의 유리창을 깬다면? 만약 스커트가 찢어진다면? 행인과 부딪친다면……………. - P163

가끔 하는 생각인데, 어쩌면 나는 머리가 좀 이상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늘 행복을 손에 넣으려 하면서도,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라 모든 걸 망쳐 버리고 만다. - P163

에필로그

나는 7층 옥탑방에서 조용히 살아왔다. 노랫소
리나 웃음소리를 내지 않도록 늘 신경 썼다. 
왜냐하면 일을 하고 있지 않으니까.

나처럼 일을 하지 않는 인간,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인간은 언제나 미운 오리 새끼이다. 이곳은 노동자들이 사는 아파트이다. 그들과 한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 일을 하지 않는 나는, 그들에게 분명 바보로 보였을 것이다. - P170

하지만 사실은 그들 모두 나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나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고기도, 영화도, 털스웨터도 단념한 사람이다.
 그런 나와 마주치면 그들은 자신들의 구속된 
생활을 자각해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내 입장을 자랑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유롭게 사는 것도,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용납해주지 않는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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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들》 에마뉘엘 보브 × 최정은, 빛소굴

구입해놓은 지 한참 됐는데 이제서야 읽는다.
사놓고 한참 되고 보니 살 때의 설렘은 점차 줄어들고 책등만 봐도 그냥 지루해진다. 그래서 얼른 읽어보기로 했다.

에마뉘엘 보브가 1924년 발표한 이 작품의 주인공 빅토르 바통...
세계대전에 참전해 한쪽 손에 부상을 입어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는 상이군인 연금으로 겨우겨우 연명해 살아간다.
진정한 친구가 너무 그리운 이 친구,
친구를 만들고 싶은 열망이 너무 큰 그의 고독과 단절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외부와의 단절이 오히려 주인공 내면의 생각의 흐름을 디테일한 묘사로 파헤치고 있어 더욱 부각된다.

앙리 비야르
1
고독이 나를 짓누른다. 친구가 그립다. 진실한 친구가………….
이런 나의 탄식을 곁에서 들어줄 사람이라면 아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그 누구하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거리를 헤매다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손톱만큼밖에 안 되는 우정과 사랑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것이다.

진심으로 우정을 베풀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한없이 친절해질 수 있다. 연금도 침대도 독차지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상대방을 거역하거나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 P37

나의 희망은, 그 사람이 원하는 바를 전부 들
어주는 것뿐이다. 강아지처럼 어디든 따라다닐 것이다. 그 사람이 농담하면 나는 항상 통쾌하게 웃어 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 사람을 슬프게 한다면, 나 역시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나는 한없이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 - P38

그렇다. 비야르도 다른 인간들과 다르지 않았다. 앙리비야르, 내가 그와 만난 것은 약국 앞의 군중들 틈에서였다.
나는 길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불안에 떤다. 시체가 누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렇지만 호기심과는 또 다른 어떤 욕구에 이끌려 군중사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된다. 언제나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라도 눈을 가릴 준비는 하고 있다. 주위에 있는 구경꾼들이 떠드는 소리는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 먼저 알고 싶기 때문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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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쓰코는 삶의 보람을 느꼈다.
그날부터 10월 10일 가을 축제날의 그 가증스러운 사건이 있기까지, 에쓰코는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면서 살아왔다.
에쓰코는 결코 구원을 바라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도 삶의 보람이 생긴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인생이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한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조금이라도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다름 아닌 이 어려움이 에쓰코가 느끼는 행복의 근거이며, 세상에서 말하는 ‘삶의 보람‘과도 같은 것이다. 즉, 우리는 삶의 의미를 모색하고, 아직 그것을 구하지 못한 동안에도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 - P116

이때부터 에쓰코의 본능은 사냥꾼의 본능과 비슷해졌다. 어쩌다 저 멀리 조그만 덤불 속에서 산토끼의 하얀 꼬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녀의 지혜는 날카로워지고, 온몸의 피가 요동치고, 근육이 꿈틀거리며, 신경 조직이 날아가는 화살처럼 팽팽하게 긴장한다. 이런 삶의 보람이 사라진 한가한 날에는 사냥꾼도 언뜻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아궁이 옆에서 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기력한 세월을 보내게 된다. - P118

어떤 사람에게는 사는 것이 너무나 쉽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어렵다. 인종 차별보다 더 심한 이런 불공정에 에쓰코는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못했다.
‘쉬운 게 좋은 건 당연하다‘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는 것이 쉬운 사람은 그 쉬운 것을 삶의 핑계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려운 사람은 그걸 금세 삶의 핑계로 삼는다. 사는 게 어렵다는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삶에서 어려움을 찾아내는 능력은 어떤 의미에선 우리의 삶을 사람답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삶은 어렵지도 쉽지도 않은, 발을 디딜 수도 없는 진공의 구슬이 되어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능력은 삶이 그렇게 보이지 않게 방해하는 능력이며, 삶이 쉬운 사람들에겐 알 수 없는 능력이긴 해도, 그것은 특별한 능력이 아닌 그저 일상의 필수품에 지나지 않는다.  - P118

그녀가 느끼는 삶의 보람은 더 이상 내일도, 모레도, 모든 미래도 짐으로 여기지 않게 했다. 그것이 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없지만, 무게 중심이 미묘하게 이동함으로써 에쓰코의 몸을 가볍게 미래로 향하게 했다.
희망 때문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 P119

에쓰코는 하루 종일 사부로와 미요의 행동을 감시했다. 그들이 어딘가 나무 그늘에서 입술을 맞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밤중에 멀리 떨어진 방과 방 사이에 실 같은 걸 연결해 둔 것은 아닌지……………. 그런 발견은 그녀를 괴롭힐 뿐일 텐데, 그렇다고 해도 불확실성에서 오는 고통은 그 이상일 것 같아서, 에쓰코는 두 사람의 사랑의 증거를 찾기 위해 어떤 비열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그녀의 행동은 인간이 스스로를 괴롭히기 위해 쏟을 수 있는 열정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섬뜩할 정도로 확실하게 증명했다고 볼수 있다. 단지 희망을 잃기 위해서 이토록 쏟아붓는 열정은 어쩌면 인간 존재의 가시적인 형식, 그것이 유선형이든 아치형이든 어떤 형식의 충실한 모형일지도 모른다. 열정이라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을 그토록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 P119

...... 인생을 살다 보면 무엇이든 가능할 것처럼 믿어지는 순간이 몇 번 도래하고, 아마도 이 순간에 사람들은 평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엿보게 된다. 그것들은 한번 망각의 늪에 깔려 있다가도 가끔씩 되살아나 세상의 고통과 환희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지 다시금 우리에게 암시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운명적인 순간을 피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어떤 인간도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보게 되는 불행과 한 번쯤은 맞닥뜨린다...... - P137

이 말할 수 없는 즐거움, 이 침묵의 말할 수 없는 풍요로움은 에쓰코에게 일종의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자신의 고통을 완성하기 위해 허락한 잠깐의 여유를 이렇게까지 즐기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끝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인가? 고통스럽지만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 P159

"그래." 에쓰코는 지친 듯이 말했다. 그 말에는 힘이 없었다. "그래서, 너는 미요를 사랑하니?"
사부로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이 단어였다.
그 단어는 자신과는 거리가 먼, 뭔가 특별한, 사치스러운 어휘에 속하는 것 같았다. 그 말에는 무언가 잉여의 것, 절실하지 않은 것, 불필요한 것이라는 어감이 있었다. 자신과 미요를 이어주는 절실한 관계, 그러나 반드시 영속적이지는 않은 관계, 어느 반경 안에 놓이면 서로를 끌어당기지만 그 밖으로 나가면 더 이상 끌어당기지 않는 자석과 같은 관계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았다. 사부로는 야키치가 아마 미요와 자기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예측은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미요의 임신 소식을 듣고도 이 젊은 일꾼에겐 도무지 아버지라는 자각이 생기지 않았다. - P163

하지만 지금 에쓰코가 느끼는 불안에는 그녀의 독창적인 불안과 이질적인, 뭔가 평범한 요소가 있었다. 미요를 내쫓는 행동을 했을 때 이미 이 새로운 불안의 첫 징후가 보였지만, 그녀가 이렇게 서서히 저지르는 과오의 크기는 그녀가 이 땅에서 부여받은 하나의 역할, 이땅에서 그녀가 간신히 앉을 수 있게 허용된 하나의 의자를 잃게 할지도 몰랐다. 누군가에겐 입구인 것이 그녀에겐 출구일 수도 있었다. 그 문은 망루만큼 높은 곳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 입구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지만, 처음부터 그곳에 살았던 에쓰코가 창문이 없는 방에서 나가기 위해 출입문을 열면 발을 헛디뎌 추락사할지도 모른다. 이 방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는 전제가 이방을 떠나기 위해 이용되는 모든 지혜의 유일한 초석일지도 모르는데………… - P217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또! 또 시작이다.
얼핏 유용해 보이는 이 단어는 여전히 그에겐 아무렇게나 살아왔던 평온한 삶에 불필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삶에 불필요한 틀을 끼우는, 잉여의 개념으로만 느껴졌다. 이 단어가 생활필수품으로 존재하고,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이 단어에 생사를 걸 수있는, 그런 삶이 영위되는 공간을 그는 가지고 있지 않다. 가지고 있기는커녕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그런 공간의 주인이 그 방을 없애기 위해 집 전체에 불을 질러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그가 이해할 수 있을까? - P230

이 순박한 소년을 여기까지 몰아붙인 건 누구였을까?
여기까지 몰아넣고 단지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어설픈 대답을 말하게 한 것은 누구의 죄일까?
사부로는 감정보다는 세상 물정이 가르쳐주는 판단에 의지하기로 했다. 어릴 때부터 남의 밥을 먹고 자란 소년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해결책이다.
잠시 생각해 보면 에쓰코의 눈빛이 자신의 이름을 말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걸 그도 금방 읽어낼 수 있었다. - P231

여태까지 귀찮고 성가신 응대에 지쳐 있는 동안 사부로가 가끔씩 눈을 치뜨고 바라본 에쓰코는 여자가 아니라 일종의 정신적인 괴물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정신의 살덩어리,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피를 흘리기도 하고, 기뻐서 비명을 지르기도 하는, 노골적인 신경조직의 덩어리였다.
그런데 일어서서 옷을 여미는 에쓰코에게 사부로는 처음으로 여자를 느꼈다. 에쓰코가 온실을 나가려고 한다. 그가 팔을 뻗고 막아선다.
에쓰코는 몸을 비틀어 사부로의 눈동자를 찌를 듯이 들여다본다.
물풀이 우거진 어두운 물속에서 보트의 노가 다른 보트의 선저에 부딪히듯, 이때 몇 겹의 옷을 사이에 두고 그의 단단한 팔 근육과 에쓰코의 가슴께 부드러운 살이 생생하게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사부로는 더 이상 그녀가 쳐다봐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입을 벌리고 소리는 내지 않지만 안심시키려는 듯한 쾌활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두세 차례 재빨리 눈을 깜박였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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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운동이 단순하게 장애인 당사자가 참여했느냐 안 했느냐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장애인들이 이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 하는 차원에서 싸움의 내용을 함께 만들어가는 게 정말로 중요한 이유도 바로 운동이 이렇게 되면 안 되기 때문이에요. 
전체의 구조적 맥락 속에서 무엇이 진짜 당사자성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계속 현미경 통해서 감각해가지 않으면은 졸지에 저렇게 되어버리는 거거든. - P322

그러고 보면 장애인들하고 같이 운동을 해 온 비장애인들도, 장애인 당사자는 아닐지라도, 장애인과 맺는 관계의 당사자일 수는 있는 거예요. 그러니께네 장애인들과의 관계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란 거를 계속 고민하는 사람들인 한에서는 이 사람들 입장이나 의견이란 것들도 절대 무시를 하면 안 되는 거죠. 비장애인들도 이미 장애인운동의 주체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걸 절대 잊으면 안 돼요. - P323

이 세상에 통용되는 기준이라는게 대부분 시간에 기초해서 만들어지는 거니까, 배제도 시간을 
가지고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지. 그러고 보면 시간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건데요. 자본이 요구하는 경쟁의 시간, 생산성 있는 비장애인들에게 맞춰진 시간, 그 시간이란 거에 딱 맞춰서 이 사회의 ‘정상적‘ 속도라는 게 
규정이 되고 있잖아. - P328

그런데요, 이 세상에는 사회가 규정해놓은
 ‘정상인‘의 속도에 못 따라간다는 이유로 곧바로 더 이상 이 사회가 감각할 필요도 없다고 치부되어 버리는 존재가 정말 많잖아요.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면 정말로 안되는 거죠. 장애인들이 딱 그렇게
사회에서 배제가 된거고, 차별을 받고 있는 거고
그러니까. 이게 어디 우리한테만 적용되는 이야기겠어? 누구든 속도로부터 낙오가 되면은 그렇게 되는 거야. - P329

우리가 그동안 정말 다양한 의제들을 걸고 싸워왔잖아요.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서부터, 교육권 보장,
활동지원서비스 보장, 탈시설, 자립할 권리 보장, 
노동권 보장 등등등. 

이런 것들은 대부분 지금 당장 법이나 
제도를 바꿔내고, 예산을 적절한 수준만큼 확보하는 거가 단기적 목표긴 하죠. 
그런데 그게 절대로 끝이 아니에요. 이 투쟁의 의미는 사실 더 넓은 차원에서도 발견이 되는 거거든. - P329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진 사람들의 존재를 이 사회가 감각하게 하는 거, 이 사회에 통용되는 속도라는 거가 얼마나 문제적인지를 드러내는 거 자체에 사실우 더 큰 의미가 있는 거지. - P330

그건 자기 몸 자체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몸짓으로 이 사회에, 이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란 것에 경종을 울리는 거야. 
긴다는 건이 사람들에게 결국 자기 언어였던 거고, 나아가서 새로운 시간성을 창조하는 무기이기도 했던 거야. 
이거 정말이지, 엄청난 자부심이 될 수 있는 거거든. 사람들이 완전 무시해왔던 자기 몸의 속도로 세상 한복판을 기면서 이렇게 세상을 멈춰낼 수 있는 거구나. 나의 몸이, 나의 속도가 이렇게나 힘을 가질 수가 있는 거구나,하고서. - P334

이건 투쟁을 통해 존재가 전환되는 거야. 이렇게
장애인의 존재가 전환되면서 세상의 기준도 전화되고. - P334

감히 말을 할게요. 우리는 이 세상의 속도를 멈춰가면서 우리 해방만 쟁취해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세상이 정상적이라는 기준, 하지만 알고 보면 굉장히 야만적인 기준을 벗어나서 될 수 있었던 나비가 꽃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듯이, 우리는 이 폭력적인세상의 기준을 바꿔낼 수 있는 씨앗을 이 사회 곳곳에 조금씩조금씩 흩뿌리고 있는 거죠. - P341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사회에 쌓여 있는 
애벌레의 기둥들을 허물어뜨리고 싶어요. 
제가 싸움의 현장에서 느끼는 내가 살아 있다는 이 감각을 여러분에게도 선물로 안겨다 드리고 싶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무감각하지 않을 수 있는 세상, 모두의 다른 존재와 속도가 존엄한 것으로 인정되는 세상, 그러한 존엄이 돈 논리나자본주의, 경쟁주의, 비장애중심주의의 속도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함께 공유해가면서 말이지요.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여러분, 저와 함께 나비가 되어그 길에 함께해주지 않으실래요? -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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