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RHK코리아.

초판본은 구매했다 내내 못읽고 책장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길래 이사 오면서 팔아먹고, 무슨 바람이 불어 다시 중고로 같은 책을 또 사들였다.
그러고도 내내 안읽고 있었는데 집에 왔던 딸램이 빌려가 먼저 읽고는 재밌다고.. 그냥 특별한 뭔가가 없는데 이상하게 술술 잘 읽힌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궁금해 이제야 읽기 시작했다.
정말로 무언가 특별하게 큰 사건이 없는 듯 전개되는데..
그런데 또 한편으로 순간순간 묘하게 긴장감이 흐른다.
뭐지?

... 이디스는 가방에서 종이 한 묶음을 꺼내더니 작은 쪽지 하나를 윌리엄에게 건네주었다.
6천 달러짜리 수표였다. 윌리엄 스토너 부부 앞으로 되어 있는 이 수표에는 거의 알아보기 힘들 만큼 힘차게 갈겨쓴 호러스 보스트윅의 서명이 있었다. 
"이게 뭐요?" 스토너가 물었다.
이디스가 나머지 종이도 그에게 건넸다. "빌려온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여기에 서명만 하면 돼요. 난 이미 서명했어요."
"하지만 6천 달러라니! 어디에 쓰려고?"
"집을 살 거예요." 이디스가 말했다. "우리의 진짜 집."
윌리엄 스토너는 다시 종이 다발을 바라보며 재빨리 뒤적였다.
"이디스, 안 되오. 미안하지만…………… 이디스, 내년에 내 연봉은 겨우 1600달러에 불과해요. 이 빚을 갚으려면 한 달에 60달러 이상을 내놓아야겠지. 그건 내 월급의 거의 절반이오. 게다가 세금이며 보험이며...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소. 미리 나한테 이야기를 하지 그랬소?"
이디스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를 외면했다. 
"당신을 놀래주고 싶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없잖아요. 그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는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이디스의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난 당신과 아기를 생각해서 이렇게 한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한테는 서재가 생길 거고, 그레이스도 마당에서 뛰어놀 수 있어요" - P134

"알아요" 윌리엄이 말했다. "몇 년 뒤에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몇 년이라니요." 이디스가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고는 침묵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렇게 살 수없어요. 더 이상은 안 돼요. 이런 아파트라니. 집 안 어디서든 당신. 소리와 아기 소리가 들려요. 게다가・・・・・・ 냄새는 또 어떻고요? 나는. 그 냄새를 참을 수 없어요! 날이면 날마다 기저귀 냄새∙∙∙∙∙∙ 참을 수 없다고요. 그런데 도망칠 수도 없어요. 모르겠어요? 몰라요?"
결국 그들은 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스토너는 연구와 집필을 위해 여름 강의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적어도 몇 년 동안은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 P135

파티가 끝난 뒤에도 남은 사람들은 거의 새벽 4시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술을 계속 마셨는데도 말소리가 점점 조용해지더니 나중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파티의 잔해 속에서 온기와 위안을 얻기 위해 섬에 고립된 사람들처럼 가까이 붙어 앉았다. 얼마 뒤 고든 핀치와 캐롤라인 핀치가 일어서더니 로맥스를 집까지 태워다주겠다고 제의했다. 로맥스는 스토너와 악수하며 그가 쓰고 있는 책에 대해 묻고는 책이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등받이가 곧은 의자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있는 이디스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파티에 대해 감사인사를 했다. 그러더니 조용한 충동이라도 일었는지 살짝 몸을 수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이디스의 손이 그의 머리를 향해 가볍게 뻗어 올라갔고, 두 사람은 다들 지켜보는 가운데 잠시 그 자세를 유지했다. 스토너는 그렇게 정숙한 키스를 본 적이 없었다. 흠 잡을 데 없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키스였다. - P140

이디스의 옷이 침대 옆 바닥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고, 이불도 아무렇게나 젖혀져 있었다. 이디스는 주름 하나 없는 하얀 침대보 위에 알몸으로 누워 빛을 받고 있었다. 알몸으로 널브러진 그녀의 모습이 느슨하고 방탕하게 보였다. 게다가 연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윌리엄은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디스는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빛의 장난 때문에 살짝 벌어진 입술이 소리 없이 열정과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한참 동안 선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련한 연민과 내키지 않는 우정과 친숙한 존중이 느껴졌다. 또한 지친 듯한 슬픔도 느껴졌다. 이제는 그녀를 봐도 예전처럼 욕망으로 괴로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이는 일도 다시는 없을 터였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그는 그녀의 몸에 부드럽게 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끈 뒤 그녀 옆에 누웠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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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를 골다‘
남편이 시를 쓴다면~~~
이런 시가 나올지도 ㅎㅎ


오랜만에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에서‘
괜히 반갑고 반갑다!



최정례

코를 골다

코를 골았다고 한다. 내가 코를 골아 시끄러워 잠을 못잤다고 한다. 그럴 리 없다. 허술해진 푸대자루가 되어 시끄럽게 구는 그자가 바로 나라니, 용서할 수가 없다. 도대체 몸을 여기 놓고 어느 느티나무 그늘을 거닐었단 말인가. 십년을 키우던 고양이 코기토도 코를 골았었다. 그 녀석 죽던 날, 걷지도 못하면서 간신히 간신히 자기 몸을 제집 문 앞까지 끌고가 이마 반쪽만을 문턱에 들여놓은 채 죽어 있었다. 아직도 녀석은 멀고 먼 자기 집을 향해 가고 있을 것이다. 끌고가기 너무 고단해 몸을 버리고 가는 자들, 한심하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 내 숨소리에 놀라 깨는 적이 있다. 내 정신이 다른 육체와 손잡고 가다가 문득 손 놓아버리는 거기. 너무나 낯설어 여기가 어디냐고 묻고 싶은데 물어볼 사람이 없다. - P84

곽재구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P104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 P104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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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발견~~ 3.그리고


...나는 이렇게 느낀다. 사랑하는 이를 발견하는 
일은 (심보르스카의 시 제목을 빌리자면) "경이"다. 우주적으로 볼 때,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없는 시공간이 너무나 광대해서다. - P230

누군가 그녀를 만나기 전의 내게 종이와 펜, 그리고 천 년의 시간을 주면서 어느 날 사랑하게 될 사람을 묘사해보라고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녀와 같은 사람을 꿈도 꾸지 못했으리라.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그런 나날들을 보내던 와중에 나는 한없는 경이와 감사를 느끼며 C에게 묻곤 했다.  - P232

이 질문에 대해 가장 확실한 답변일지도 모를 
그녀의 집 한가운데 서있자니 이보다 심오하면서도 신비로운 질문은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여기서 그녀는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까? 어떻게 여기서 그녀는 나와 함께하게 되었을까? - P233

누군가를 발견한다는 건 한없이 경이롭다. 
우리 감각의 척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엄청나게 작은 데 비해 이 세상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걸 새삼 깨달으며 바뀔지도 모른다. 발견 역시 같은 역할을 한다. 유일한 차이는 우리가 발견에서 절망이 아닌 경이를 느낀다는 점이다.
끝없이 드넓은 이 우주에서, 삶이 무한히 변이하는 가운데,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경로들, 그리고 가능성들 중에서, 나는 여기 이 집, C의 곁에 있다. 그녀는 내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내 손을 잡고 거실을 나와 주방으로 간다. 나는 장작 난로 선반에서 그것을 집어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직 내가 뭘보고 있는지 잘 모른다. 운석이야, 그녀가 말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소년 시절 들판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발견했던 바로 그 운석이라고. - P233

최근 나는 이런 매일의 비범함remarkableness을 거의 압도적이라 여기게 되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극기주의와는 딱히 관련이 없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감정들에, 특히 하나의 감정에 민감해졌다. 내가 아는 한 우리 언어에는 이 감정을 지칭하는 이름이 없다. 아마 포르투갈어로 사우다지 saudade, 일본어로 ‘모노노아와레‘라 부르는 것에 가까울 것 같다.
이 감정은 찰나의 폭로를 통해 우리의 실존적 조건을 깨닫는 느낌이다. 삶이 얼마나 근사한가, 얼마나 허약한가, 얼마나 찰나인가. 이 감정이 우주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조그만 위치에 대한 반응에서 일부 비롯되기는 해도, 경이로움awe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이 감정에는 너무 많은 일상이, 또 너무 많은 슬픔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 P284

이런 이유에서 낭만주의자들이 숭고sublime라 부른 것(물리적인 세계의 비인간적이고 광막한 장엄함이 불러내는 찬탄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과도 다르다. 내가 지금 얘기하는 감정에는 광휘도 공포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대신 감사한 마음과 갈망, 그리고 예측된 슬픔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로 구성되어 있다. 영어 단어에서 이 감정과 가장 가까운 혈족은 ‘달콤 쌉싸름한bittersweet‘일 것으로, 사포Sappho가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표현하려고 고안한 그리스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사랑의 기쁨을 사랑의 고통으로 처음, 그리고 영원히 땜질한 이는 사포였다. 그러나 ‘달콤 쌉싸름한‘이 행복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해도, 이 단어의 내밀한 기원은 우리가 세계와 마주할 때의 필연적인 측면, 즉 문제를 어느 정도로 감각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을 드러낸다. 우리가 가진 전부를 언젠가는 상실하게 된다는 문제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유형의 ‘그리고‘에 대해 이 말이 가장 적확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형태건 우리의 슬픔과 분리할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는 자각.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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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논하는 사람은 드물어졌지만, 
적어도 연애담에서는 행복이 여전히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문학에서 사랑을 바라보는 방식은 자주 암울하고, (톨스토이처럼) 기쁨보다는 고통을 강조하며, 난기류가 만족감보다 먼저 찾아오고, 로맨스보다 비극이 앞선다. 제인 오스틴이나 발자크, 동화, 로맨틱코미디, 로맨스 소설처럼 이 규칙에는 수많은 예외가 있지만, 사랑을 분홍빛으로 전망하는 시각조차, 사랑을 지속하는 것보다는 획득하는 것에 집중한다. - P224

"그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결말이지 이야기가 아니다. 이 표현은 행복을 고정된 상태로 간주하며, 더는 할 말이 없는 것으로 본다. 이런 유형의 사랑은 찾아내면 이내 
지루해진다. 더 나쁘게는, 실제로는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 P224

이는 고릿적부터 끈질기게 이어진 관념이다. 낭만적인 사랑이란 실제로는 한낱 욕망이며, 욕망은 늘 아직 갖지 못한 것을 갈망하는 것이라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가 마침내 사랑을 찾아낸 이후가 아니라 찾아다니는 이야기를 전한다. 소년은 소녀를 만나고, 소년이 소녀를 잃고, 소년은 소녀를 다시 만난다. 낙관적인 이야기에서도 사랑을 얻는 순간 종결이 찾아온다. 우리 대부분이 진짜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에. - P225

다시 말해서 로맨스 작가들은 대개 사랑의 시작이나 끝에 매달리면서 그 중간을 무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별로 관심이 없기에 작가들은 중간을 최대한 짧게 만들 방법을 강구한다.  - P225

하지만 실제 연인들은 정확히 반대를 행한다. 중간을 가능한 한 길게 만들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이들은 중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이미 가진 것을 욕망하는 일이 완벽히 가능하다는 의미다.  - P225

나는 C가 바로 옆에 있지만 짜증 나 있거나 
딴생각에 빠졌을 때, 그녀가 다른 도시에 가 있는데 나는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그녀를갈망한다. 그녀는 내 품에서 잠들어 있는데 나는 실존적인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그녀가 내 곁에 있기를 절망적으로 원하면서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그녀를 갈망한다. 응답받은 연인들은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 욕망이 항구적으로 형태를 바꾸기에 고통받는다. 우리가 욕망하는 건 동시대 문화가 기본적으로 갈구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 P225

상실은 세계를 축소하지만, 발견은 풍성하게, 풍부하게, 재미있게 한다. 나는 C와 만나고 사랑에 빠져 있었고, 바람이 불어와 눈부시게 반짝이는 겨울철 밀은 내 눈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녹색으로 보였다. 나는 들판 한구석에서 필멸자들의 세상을 떠나 저들만의 마법 왕국으로 향하는 듯 날아오르는 수백 마리의 흰기러기들을 보았고,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시골로 이사를 왔고, 바다의 힘으로 대지 위에서 장애물 없이 불어대는 바람에 기대어 오후 달리기를 했고,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처럼 순수한 상쾌함을 느꼈다. 
나는 C의 부모님과 자매들을 비롯한 대가족들과 가까워졌고, 부활절 아침이면 그들과 같이 교회에 가고, 크리스마스면 그들의 트리 아래 선물을 놓는다. 나는 태어난 집과 마찬가지로 근사한 또 하나의 집을 발견했고, 그 전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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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간되어 나왔다니 읽어보고 싶다!

예상은 했지만 책값이 이리 후덜덜할 줄이야...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신청사유는 소장가치 충분한 신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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