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입니다 - 수동적으로 공격하는, 보이지 않는 악인들에 대하여
데비 미르자 지음, 김미덕 옮김 / 수오서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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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심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울 뉴론으로 칭해지는 신경 작용에 의해 발생합니다. 상대의 태도나 말투를 따라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선택과 다른 선택을 한다면 다수와 똑같은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이 심리를 이성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A라고 칭합시다. A는 자신이 들어가려는 다수를 집요하게 관찰합니다. 다수의 패턴을 익힙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씩 분석합니다. 설령 다수의 패턴이 자신의 패턴과 다르더라도 다수의 패턴을 따라합니다. 다수 안에 들어가려면 다수의 패턴을 맞춰주어야 하니까요. 다수 안에 들어간 A는 개개인을 분석합니다. 더 정교하게 자신을 다듬어 갑니다. 다수는 A를 일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순간, A의 정교함이 빛을 발휘합니다. A는 지금까지 구축한 이미지를 방패로 다수의 지지를 얻습니다. 다른 이에게 잘못을 저질러도, 다른 이와 문제가 생겨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A라면 그렇게 할 때는 이유가 있다고 다수가 A를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다수가 모인 곳은 A가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는 집단으로 변합니다. , A는 모방심리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A처럼 민낯을 사회화로 가리며 살아가는 사람을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책에서는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와 타깃의 관계를 중심으로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그 사례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는 다수도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타깃을 뺀 다수는 자신의 편이어야 합니다. 이를 달성하려고 끊임없이 이미지 메이킹을 합니다. 다수를 모방하며 자신을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 포장합니다. 타깃을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다수가 타깃을 비난하도록 만듭니다. 타깃에게 모방 심리가 발동하게 합니다. 타깃이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 내현적 나르시시스트, 다수, 타깃의 행동거지는 모방 심리를 기반으로 형성됐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차이는 모방 심리를 이용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지요.

 

이 지점에서 제 행동거지를 살펴봅니다. 사회화에 가려진 민낯이 없는지 생각합니다. 아예 없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업무가 잘 굴러가지 않을 때, 제 잘못은 없다는 듯 누군가에게 포장해서 이야기하니까요. 때로는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상대가 잘못했다고 몰아붙이기도 합니다. 책에서 읽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의 행동거지와 비슷합니다. 잘못됐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몰라서 성격의 일부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제 행동거지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성격이라는 변명으로 둘러대며 빠져나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 행동거지를 바꾸어 건강한 관계로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내현적 나르시시스트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전에, 제가 내현적 나르시시스트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습니다. 내현적 나르시시트로부터 연습과 노력을 빼내와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해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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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에이저
신아인 지음 / 한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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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주요 배경은 학교입니다. 학교 구성원은 교사, 학생입니다. 관계도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이 대부분입니다. 학교라는 공간만 두고 보면 꽤 폐쇄적입니다. 그런 공간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당연히 교사와 학생을 중심으로 수사를 합니다. 그 끝에 소년이 존재한다면 교칙은 법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소년법이 있습니다. 소년시절에 죄를 저지른 경우 가벼운 징계를 받습니다. 아예 징계를 받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화를 통해서 충분히 개선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고스란히 미디어를 통해서 알려집니다. 그 수는 매우 많습니다. 이 현상을 지켜본 소년은 죄를 저질러도 빠져 나갈 구멍이 있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이 사항을 이용할 생각으로 죄를 저지르는 소년도 있습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징계를 받게 만든 소년을 찾아내서 2차 가해를 가하기도 합니다. (덧붙여 교화를 통해 반성하는 소년도 있습니다.) 때로는 징계가 별 거 없다고 여기며 다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피해 학생은 유혹을 받습니다. 왜 자신만 당해야 하는가. 복수를 해도 좋지 않을까? 어차피 복수를 해도 가벼운 징계로 끝날 테니까. 이런 생각의 유혹입니다. 그 유혹을 물리치는 피해 소년도 있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는 피해 학생도 있습니다. , 소년들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을 모두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상태로 어른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른들은 소년과 소년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도 소년일 때 다 그랬다고 말합니다. 범죄로 발전 수 있는 행위를 성장과정의 일부로 치부합니다. 어느 소년이 강도 높은 피해를 입어야 관심을 보입니다. 뒤늦게 피해 소년의 말과 행동에 주목합니다. 뒤늦게 가해 소년의 말과 행동을 분석합니다. 뒤늦게 이유를 분석합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입니다.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분석을 하는 데 왜 우리는 사건을 예방할 수 없을까요?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의 전조를 패턴화하지 못했을까요? 패턴화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패턴화의 목적이 사건 예방이 아니라 범인을 찾는 데만 활용될 뿐입니다. 전조를 느낀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해도 눈에 보이는 증거’, ‘직접적인 피해 사실이 없다는 이유로 도와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 사건 발생을 예방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셈입니다. 동일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이 무색합니다. 거기에 강도 낮은 징계까지 더해집니다. 소년의 범죄 강도와 빈도가 날로 높아지는 이유입니다.

 

다 그렇게 성장하는 거야.’ 이 말만큼 환경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말은 없습니다. 어른의 소년 시절은 과거입니다. 과거의 환경과 현재의 환경은 다릅니다. 현재 소년들은 손쉽게 폭언, 폭력, 혐오 콘텐츠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콘텐츠에 반복적으로 노출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연히 자신의 행동이 폭언, 폭력, 혐오에 해당하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에는 어른의 과거가 아니라 소년의 현재가 반영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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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에서 - 박솔뫼 소설집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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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책은 박솔뫼 작가님의 소설집입니다. 박솔뫼 작가님이 쓴 에세이를 읽고 읽은 첫 작품이라서 선명하게 다가오는 지점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영릉에서>를 읽었습니다.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크게 다가온 작품은 <아오모리에서>입니다. 저자는 에세이에서 일본 작가를 언급하기도 했고, 일본 여행 이야기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 경험을 <아오모리에서>에 반영합니다.

 

<아오모리에서>를 다 읽은 뒤, ‘타협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힙니다. 후반부에 투명한 염소와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염소는 배를 타고 뭍으로 옵니다. 염소들은 같이 뭍에 왔는데 순서대로 내려서 각자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같이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면 왜 무리를 지어서 왔을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염소에게는 자신이 꿈꾸는 초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각자 자신만의 초원을 꿈꿉니다. 바다에는 자신이 원하는 초원이 없기 때문에 뭍으로 와야 합니다. 뭍으로 향하려면 항해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여정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일단 공통된 목적지로 향하는 염소들끼리 무리를 지어서 항해한 셈입니다. 서로 뭍에는 자신만의 초원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서로 격려하면서 힘을 아끼면서.

 

글쎄요. 어떨까요? 염소들은 어쩌면 항해했던 시간을 평화로운 시간이었다며 그리워할지도 모릅니다. 혼자서 자신만의 초원을 발견하거나 구축하기는 어렵다는 걸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힘들기는 했지만 뭉치면 포기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다다른 경험을 떠올립니다. 염소는 뭍에서 뭉치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타협합니다. 자신이 꿈꾸던 초원의 일부만 실현합니다. 무리를 지어 무한한 초원을 차지합니다. 그곳에서 각자 적당히 자신의 구역을 차지하고, 그 구역에서만 자신의 꿈을 실현합니다. 구역을 나눌 때 치열한 타협 과정이 존재했겠지요. 구역을 나누는 방식, 먹이의 분포, 천적의 분포 등을 고려하며 얻기도 양보하기도 합니다. 염소들은 초원에서 살아가며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평화로운 순간을 갈망하면서.

 

이는 아야가 친구와 피스 한 갑을 다 피우고 헤어지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담배 한 개비는 몇 분이면 다 피웁니다. 그 짧은 시간을 더 오래 지속하려고 친구를 만나 담배 한 갑을 피웁니다. 그러고는 헤어집니다. 또 다시 만나서 피스 한 갑을 다 피울 때까지 같이 있겠지요. 염소들과 아야는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셈입니다.

 

가 투명한 염소를 느낀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무한한 초원에서 타협하는 과정에 올라타지 못한 염소는 어떻게 될까요? 좁은 공간에서 자신만의 유니버스를 구축하며 지내다 밀려납니다. 존재감을 잃습니다. 무리 속에서 투명한 염소가 됩니다.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초원, 반드시 실현하고 싶었던 초원을 간직한 채 투명해집니다. ‘역시 투명한 염소와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형태를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와 투명한 염소는 자신의 형태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무한한 초원에서 무리는 복수로 존재합니다. 그중 한 무리에만 정착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여러 무리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존재를, 유니버스를 알려야 합니다. 한 무리에서 도태되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이기만 해도 에너지가 많이 소비됩니다. 여러 무리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당연히 에너지를 충전할 틈이 없습니다. 자신을 돌볼 에너지까지 고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는 운전대를 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투명한 염소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투명한 염소는 의 원초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원초를 놓칠 수 없기 때문에 는 투명한 염소와 함께 나아가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화를 갈망하면서 무엇을 하시나요? 평화를 위한 원초는 무엇이었나요? 원초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나요? 만일 그렇다면 원초를 되살리나요? 아니면 바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요? 원초를 벗어나든 벗어나지 않든 선택의 주체가 본인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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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위험한 이름, 비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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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쿠로는 동물병원에서 일합니다. 어느 날, 동물병원에 가에데라는 여성이 옵니다. 가에데는 자신을 동생 아키토의 부인이라고 말하며, 실종된 아키토를 찾기 위해서 일본에 왔다고 말합니다. 실종된 동생을 찾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도와달라고 말합니다. 가에데의 끈질긴 설득 끝에 연을 끊고 살아온 본가에 가에데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같이 본가를 방문하기로 합니다. 동생을 찾기 위한 일이니 딱 한 번 도와주겠다는 선의로. 선의는 새로운 문제와 맞닥뜨리며 하쿠로가 가에데와 같이 움직여야 하는 이유를 제공합니다.

 

하쿠로가 학생이었을 때, 어머니 데이코가 야스하루와 재혼한 일을 더 이상 헤어나올 수 없는 레일 위에 올라탄 것이나 다름없다(38) 표현합니다. 하쿠로는 이 감정을 가에데와 만났을 때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쿠로는 혼자서 움직이려는 가에데와 동행할지 말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여러 번 맞이합니다. 초반에는 병원에서 일하는 선택을 하지만, 후반에는 가에데와 동행하는 선택을 합니다. 하쿠로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가에데의 언행에 일희일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가에데가 미리 깔아놓은 레일 위에서 흔들리던 하쿠로가 레일 위를 나아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도 하쿠로와 비슷한 상황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맨 처음 레일 위에 오를 때 지녔던 의도. 그 의도를 바꾸지 않고 끝까지 관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레일을 타고 가다 보면 많은 것이 가치관이 바뀝니다. 인간관계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합니다. 레일을 가로막는 문제와 직면하기도 합니다. 이런 변화는 레일 위를 계속 나아갈지 내려올지 망설이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선택지를 만들고야 맙니다. 바로 의도를 수정하고 보완한다는 선택지입니다.

 

레일을 타고 나아가다 보면 자신도 환경도 변화합니다.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경험이 축적됩니다. 맨 처음 다짐했던 의도에서 바꿀 부분이 보입니다. 나름대로 의도를 수정하고 보완하며 레일 위를 나아갑니다. 맨 처음 의도와는 다른 의도를 지닌 셈입니다. 같은 레일 위를 나아가지만 의도의 내용이 바뀌었습니다. 레일 위를 내려오는 선택지를 골랐다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바뀐 의도와 일치하는 다른 레일을 찾기까지의 과정을 우리는 방황한다고 표현하는지도 모릅니다.

 

방황하는 시간을 쓸 데 없는 시간으로 취급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의도를 다듬어서 다시 나아갈 레일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선택한 레일이 이미 누군가가 나아간 레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그 레일을 타고 나아가며 자신만의 경험을 쌓아가며 전혀 다른 레일로 만들어 갈 테니까요. 지금 여러분은 어떤 레일을 만들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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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워
폴라 호킨스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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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떠올리는 섬은 어떤 섬인가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인가요? 다른 특징을 지닌 섬을 떠올릴 수 있나요? <블루 아워>에는 다른 종류의 섬이 등장합니다. 밀물일 때는 섬이 되고, 썰물일 때는 육지의 일부가 되는 섬입니다. 고립됐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외부와 지속적으로 교류하기는 어렵습니다. 바로 에리스섬입니다. 우거진 숲과 깎아지른 절벽이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에리스섬 주위에 밀물이 서서히 차오르면 한층 더 깊은 어둠에 잠깁니다.

 

그런 곳에도 사람이 살아갑니다. 그레이스 헤스웰도 그 중 한 명입니다. 간호사입니다. 간호사로서 섬 주민들을 살뜰하게 살핍니다. 남편의 폭력에 휘둘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마거리트를 매일 방문하여 살핍니다. 은둔 예술가 버네사 체프먼의 집에 머물면서 집안일을 돕기도 합니다. 그레이스 헤스웰은 간호사로서 신체의 상처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섬세히 살핍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레이스 헤스웰은 숲에서 절벽에서 바다에서 흉터를 느낍니다. 흉터는 무엇을 가리킬까요? 제 생각에는 그레이스 헤스웰 자신의 생명입니다.

 

그레이스 헤스웰이 에리스섬에 들어오기까지의 여정, 에리스섬에서 보낸 고요한 시간, 그곳에서 버네사 체프먼을 만나면서 깨어나는 감각에 휩쓸리는 여정. 이 여정 속에서 고비를 겪을 때마다 그레이스 헤스웰이 묻어왔던 순간들. 그 순간들이 모두 모여서 하나가 됐을 때, 그레이스 헤스웰의 생명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그레이스 헤스웰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읽으면서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레이스 헤스웰은 두 명의 친구와 겉돌면서 생활합니다. 같이 겉도는 사람이 있기에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러던 중 두 명의 친구가 증발하면서 안정감이 깨집니다. 그레이스 헤스웰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아내고 싶습니다. 동시에 이런 문제에 매달리는 사람은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레이스 헤스뤨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밟습니다.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존 본능이 발동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레이스 헤스웰 스스로도 모범답안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니까요.

 

그레이스 헤스웰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사회는 사회를 뒷받침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원합니다. 설령 흉터를 끌어안고 있어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흉터를 구석에 밀어두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해야 할 일에 떠밀려 흉터를 돌볼 여력이 없습니다. 흉터는 부패됩니다. 흉터가 부패될수록 혼자서 감당할 수준을 넘어섭니다. 끝내는 완치되지 않은 흉터를 알립니다. 나와 같은 흉터가 있다면 함께 바꿔보자고 호소합니다. 그 순간부터 사회의 냉대를 견뎌야 합니다.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몸부림을 치다가 사회의 눈총을 받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터를 드러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꺼이 힘을 보태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실패하면 주눅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명이라면 실패해도 좌절해도 앞으로는 이렇게 해 보자고 의논할 기회가 생깁니다. 다시 나아갈 길과 용기를 얻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흉터를 같이 돌볼 사회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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