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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평점 :
<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지음 / 북다 펴냄
황석희 번역가를 처음 알게 된 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다룬 예능 프로그램 ‘돌아온 방구석 1열’을 통해서였다. 그의 이름은 익히 들어봤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의 세계를 들여다본 건 처음이었다. 500편이 넘는 영화를 번역한 경력자라는 수식보다 더 와닿았던 건, 그는 늘 “단속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번역체를 쓰게 된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조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의 책 『오역하는 말들』을 집어 들었다.
책을 읽으며 놀란 건, 황석희는 단지 외국어를 한국어로 바꾸는 번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우리말을 우리끼리도 ‘오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춰낸다. 같은 말을 하고도 서로 상처받고, 진심을 전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오해를 낳는 일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책을 읽다 보니, 내 일상도 수많은 오역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마음에 남았던 건 “우리는 주변만 오역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나의 진의조차 오역한다”는 문장이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 나는 내 마음을 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쳤던가. 말로 설명하지 못한 감정들을 ‘대충 이쯤이겠지’ 하며 얼버무리고, 상대방의 말도 그저 내 방식대로 받아들였던 일이 떠올랐다. 언어는 단어가 아니라 맥락과 감정, 숨결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황석희는 자막 번역이라는 물리적 한계 속에서도, 최대한 원문의 감정과 뉘앙스를 살리고자 고군분투한다. “He who the most regrets the most. Let’s not live in a fantasy.”라는 문장을 직역하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후회하는 거야. 환상 속에 살지 말자>이다. 하지만 이 부분을 중국어 전문 번역가 김소희 번역가에게 해당 대사를 문의하여 청나라 시인 위자안이 쓴 <화월혼>이란 협사소설의 인용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탄생한 번역은 <정이 깊을수룩 상심이 크고 아름다운 꿈은 쉽게 깨는 법>이다. 직역하면 어색하고 생뚱맞을 수 있는 문장이, 그의 번역을 통해 마음을 울리는 문장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저 멋있는 자막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고 싶고 필사하고 싶은 문장이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최근에 본 영화 <원더>를 다시 떠올렸다. 나에게 깊은 감동을 준 영화다. 특히 “엄마의 생각이니까 안 중요한 게 아니라, 엄마의 생각이니까 제일 중요한 거야. 세상에서 너를 제일 잘 알고, 제일 아끼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라는 대사는 나를 붙잡았다. 평소에도 나는 내 아이들에게 “엄마니까, 네가 잘되길 바라니까 하는 말이야”라고 말하곤 했지만, 이 책을 통해 다시 그 말을 돌아보게 되었다. 진심으로 아이를 아끼는 마음이 전달되기 위해선, 단순한 말이 아니라 ‘진정한 번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책은 말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분위기까지 들여다본다. “누굴 욕하든 몰아붙이든, 그 사람이 숨이라도 한번 크게 쉬도록 그의 남은 땅은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구절에 오래 머물렀다. 나도 모르게 타인을 판단하고, 먼저 화를 내며 나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 속에 살아왔던 것 같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서로를 너무 빠르게 ‘해석’하고, 너무 빨리 ‘오역’하기 때문은 아닐까.
『오역하는 말들』은 단순히 언어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단어보다 마음을 더 잘 읽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말이란 결국 사람을 향해 가는 다리라는 걸, 황석희 번역가는 조용하고도 강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그 다리를 잘 만들기 위해선 번역가처럼 예민하고도 따뜻한 눈으로 ‘말’을, ‘삶’을 바라봐야 한다는 걸 느끼게 한다.
이제 나는 내 아이들에게 “엄마니까, 네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야”라고 말할 때, 그저 습관처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진심이 ‘오역’되지 않도록, 내 말이 아이의 마음에 진짜 닿을 수 있도록 더 신중하게, 더 따뜻하게 말할 것이다. 황석희의 책은,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잘 말하고 싶다는 마음을 다시 일으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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