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랄핑크] 2024 말씀과 함께 다이어리 - With the Word 2024 2024 말씀과 함께 다이어리
김윤희 그림 / 바오로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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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024 말씀과 함께>는 바오로딸 출판사에서 나온 가톨릭 신자용 다이어리다. 양장으로 두껍지 않은 수첩 크기에 코랄 핑크, 베이지, 카키 세 가지 색상이 있다. 속지는 동일하다. 이번 해는 멸종위기 동물이 컨셉이다. 기후위기와 개발로 멸종 위기를 맞은 동물 일러스트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생명을/사랑하시는 주님/모든 것이/당신의 것이기에/당신께서는/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지혜11.26. 



세상에, 수달도 있다. "온순하고 귀여운 외모의 수달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에 널리 퍼져서 살고 있다. 이미 일본에서는 멸종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희귀종이다.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이 함부로 포획하고 하천이 오염되어 급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라고 설명돼 있다. 내가 애정하는 쿼카, 판다, 여우, 북극곰도 언젠가 사라질지 모른다니. 가슴이 찡하다. 우리나라에 흔한 고라니지만 엄연히 다른 나라에선 희귀종이다. 경각심을 일으켜야 하는데, 솔직히 일러스트가 귀엽다. 인간이 미안해...



데일리 타입 다이어리다. 날짜마다 축일과 주일이 적혀 있고, 중간에 성경 통독 계획표가 있다. 가톨릭 교회, 성당에서 세례성사를 받고 한 동안 미사에 참석할 때였다. 무슨 축일이 그렇게 많고, 이번 주는 무슨 주일이라는데.....어질어질했다. 



성경 통독 계획표가 참 괜찮다.<요한의 첫째 서간>, <요한 복음서>부터 시작해 <신명기>로 맺음한다. 하루치는 1~3장 정도로 부담스럽지 않고, 동시에 시편 한 장씩을 더불어 읽어나간다. 읽은 날짜와 체크 표시를 하도록 배려했다. 올해는 성경을 몇 번 읽어야지 다짐하지만, 연초에 바짝 읽다가 연말이 되어서 구약 오경이나 사복음서를 중반쯤 읽은 나를 발견하기 십상이다. 꾸준히, 천천히, 곱씹어 읽어나갈 수 있는 스케쥴이다. 무엇보다 성경읽기를 처음 도전하는 신자에게 도움이 된다.



통독 순서가 생소할 수 있다. 요나 아빕 신부가 쓴 <<영적 일기와 함께하는 내 하루의 성경>>, 바오로딸, 을 인용했다고 한다. 궁금해서 다이어리와 함께 책을 사서 읽어봤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먼저 심어주기 위해서였다.<요한의 첫째 서간>과 <요한 복음서>가 맞춤이기 때문이다. 신약을 읽고 다음은 구약으로 넘어간다. 구약은 오경 중 <레위기>, <신명기>를 구약 읽기 마지막 순서로 넣었다. 구약을 처음 통독하리라 마음 먹은 사람에게 통곡의 벽이 될 수 있는 편들이라 납득이 간다.



가격이 저렴하고 색상과 크기가 아기자기하다. 신자라고 엄숙하고 구닥다리 다이어리 쓰란 법 없다. 일상 용도로 써도 괜찮겠지만, 오롯이 신앙 다이어리로 쓰기에 더 적합하다. 귀여운 멸종위기 동물 일러스트와 함께 성경 구절이 곳곳에 있다. 여백지가 몇 장 없어 사무용으로 쓰기엔 부적합하다. 성경 통독이나 신앙 생활 계획을 간단히 적는 용도에 알맞다. 이름 그대로 올해는 "말씀과 함께", 신앙과 함께 하고픈 신자에게 선물로 나누고 싶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지혜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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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16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매년 이 다이어리 사용하고 있어요.
두껍지 않아 가볍게 메모할 수 있어 좋더라고요.
올해는 성경 통독 계획표따라 성경 통독을 시작했어요.
소개해주신 <영적 일기와 함께하는 내 하루의 성경> 읽어보고 싶어요.
이 다이어리를 알라딘에서 판매하고 있다는 거 몰랐어요.

캐모마일 2024-01-16 10:11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저는 바오로딸 다이어리를 올해 알았네요. 내년부터 꾸준히 쓰려고 합니다.
저도 이번에 포켓성경 사서 통독 진행 중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서니데이 2024-01-16 2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1월인데, 이 다이어리 시리즈는 모두 품절이네요.
데일리도 있다고 하니 구성은 좋을 것 같아요.
요즘엔 연말이 아니라 가을부터 다이어리가 나와서 그런가 빨리 품절되네요.
잘읽었습니다. 캐모마일님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캐모마일 2024-01-16 20:19   좋아요 1 | URL
말씀처럼 작년 구 월 가을부터 판매하고 올해 지나자 품절됐습니다. 저도 이 다이어리를 12월 말에 아는 바람에 당시 카키색이 품절이었습니다. 종교인을 위한 다이어리라 추천드리기 망설였는데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기쁜 일 가득하시길 에세이를 읽으며 기도드립니다.
 
2024년 에드워드 호퍼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 탁상달력 - 260*190mm 2024 북엔 달력/다이어리
북엔 편집부 지음, 애드워드 호퍼 그림 / 북엔(BOOK&_)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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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나를 위로한다. 



세상에 길은

수없이 많지만

모두가 

목적지가 같다.


말을 타거나, 차를 타고 달릴 수 있고

둘이서, 셋이서 달릴 수도 있지만

마지막 걸음은

혼자서 디뎌야 한다.


때문에 모든 고난을 

혼자 짊어지는 것보다

더 나은 지식도

능력도 없다.


헤르만 헤세 '홀로'



혼자 있으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느끼게 된다.

초라한 자는 자신의 초라함을,

위대한 정신은 자신의 위대함을 

온전히 느낀다


쇼펜하우어



2024년 1월이 벌써 중반을 지났다. 늦은 달력 후기다.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 에드워드 호퍼 달력 첫 장에 적힌 글귀다. 파스칼은 그랬던가. "모든 인류의 문제는 인간이 혼자 방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고독한 사람은 세다. 적어도 휘둘리지 않는다.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를 챙겨본다. 주인공은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재원이지만, 절친과 남자친구, 직장 상사 등 주변인들로부터 끊임없이 가스라이팅을 당한다. 1화는 고구마라 턱턱 막히는 바람에 스킵했다. 2화부터 빠져들었다. 월, 화요일에 자양강장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주인공이 10년 전으로 회귀하여 가스라이팅에 맞서고, 가스라이팅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인연을 통해 연대하며, 자기가 가진 재능을 발휘하여 진정한 삶을 찾아간다. 전개가 빨라서 사이다 장면이 나온다. 



주책맞게 그 드라마 재밌다고 막 이러고 다닌다. 가스라이팅과 은밀한 괴롭힘, 감정과 삶을 갈취하는 인간 유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잘나디 잘난 여주가 왜 가스라이팅에 취약한지, 벗어나지 못하고 악순환에 빠졌는지를 보여준다. 똑똑하고 못 배우고 문제가 아니다. 잘 나고 못 나고의 문제도 아니다. 데이트 폭력, 정서적 폭력 피해자를 함부로 탓해선 안 된다. 



가까이서 보면 모른다. 멀리서 봐야 안다. 자기가 멀리서 본다고 피해자를 어리석다 탓해선 안 된다. 왜 배울대로 배운 사람이, 사회적으로 꿀릴 거 없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 저리 살까 쉽게 말한다. 저 멀리서 요약된 스토리와 맥락을 다 알고 보니까. 남일은 다 쉽지. 달리 헤아려보면 그런 사람들일수록 스스로를 더 억죈다. 수치심 때문에 남에게 숨기려고 멀어진다. 쳇바퀴는 더욱 빨리 돌아간다. 지친 나머지 판단력을 잃어버린다. 돌아가는 쳇바퀴에 맞춰서 자신을 소모시킨다.



<숫다니파타>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는 구절이 돌림노래처럼 반복된다. 고독을 견디고 즐기기가 그렇게 어렵다. 에드워드 호퍼는 일상의 풍경에서 고독을 그려냈다. 현대 사회인이 가진 고독을 그려냈지만, 한편으로 감상자는 드러난 고독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 1월은 호퍼의 유명작 <밤을 세우는 사람들> 작품이 그려져 있다. 에드워드 호퍼 작품과 맞춤하여, 헤르만 헤세와 쇼펜하우어의 글을 비롯해 고독을 성찰한 여러 글귀들을 실었다.



올해는 더욱 단단해지기를 바라며 에드워드 호퍼 달력을 샀다. 고독할 줄 아는 힘이 얼마나 위대한가. 몇 년 전만 해도 달력이 흔했다. 은행이나 어디 가면 공짜로 받고 그랬는데, 요즘은 드문 거 같다. 자축인묘 60간지가 적힌 일력은 프리미엄이 붙는단다. 아는 세무사 사무소에서 낼름 가져왔다. 옛날엔 달력 사면 등싸대기를 맞았는데, 가족에게 에드워드 호퍼 달력을 선물주니 좋아한다. 



내년에 달력 필요하시면 <에드워드 호퍼> 추천드린다.




고독이 나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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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16 0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개한 드라마 유튜브에서 찾아봐야 겠네요. 쇼펜하우어의 글이 눈에 들어옵니다. 글자에 점 하나 찍고 남이 되어버린 이혼한 아내에겐 무척 미안한 일이지만, 독거노인이 되고 보니 고독, 외로움을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조차 놀란 답니다. 요즘은 달력을 제작하는 곳이 많지 않아 구하기도 힘들어져 저도 ‘허영만의 식객 캘린더‘를 구입했어요. 무튼 글 잘 읽었습니다.

캐모마일 2024-01-16 07:12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저는 미혼입니다. 그런데 혼자가 익숙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드라마를 감명깊게 보는 이유도 아마 사람에게 지쳤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주변에서 성화입니다만, 그때마다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립니다. 그래도 마음 속에 고독과 의존감은 분명히 한 구석에 있네요.....ㅜ.ㅜ 저는 솔직히 부정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고독에 익숙해지고 단단해 지려고 결심했습니다.

호시우행 2024-01-16 07: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응원할게요.

캐모마일 2024-01-16 07:14   좋아요 0 | URL
저도요. 정말입니다.

호시우행 2024-01-16 0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믿어요.감사합니다.

카스트로폴로스 2024-04-0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보며 구매하려 보다가 글일고 공감과 깨달음 얻고 가요~ 건강지키시며 지내셔요~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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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나란 본체를 찾아가는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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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1-01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캐모마일님, 오늘부터 2024년이 되었습니다.
올한해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캐모마일 2024-01-01 18:14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의 에세이 덕분에 하루를 마감하며 위로받습니다. 꼭꼭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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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작가로서 경험을 쌓아가며 나이가 들면서, 그것으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미완성 작품에 - 혹은 작품의 미숙성에- 적절한 결말을 냈다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도 한 가지 대응이긴 했지만, 다른 형태의 대응이 또 있어도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덮어쓰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병립하는, 가능하면 상호 보완적인 작품이."(p.765)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학창 시절에 읽었다. 주인공은 어딘지 기묘하게 떨어져 있지만 연결돼 있는 두 세계를 경험하고, 일각수 혹은 단각수, 외뿔 달린 황금색 동물, 들이 다니는 도시에서 일각수의 꿈을 읽는 이였다. 하루키 작가의 작품 세계를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로 입문한 독자로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사뭇 달랐다. <<상실의 시대>>보다 미스테리하고 환상적인, 한편 독자에게 끊임없이 추리를 하게 만드는 작품 분위기에 놀랐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출간되고 베스트셀러 올해의 책에 올랐다. 작가가 1980년에 쓴 중단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모티브로 하였다. 그리고 이미 1985년 즈음<<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해당 중단편을 장편화한 소설임을 알았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작가가 작품을 쓰고도 "목에 걸린 생선 가시"(p.766)처럼 여겨졌던 못다한 세계를 2022년 일흔의 원로 작가가 되어 또 하나의 장편으로 냈다. 작가 후기처럼 병립 가능하고 상호 보완적인 작품으로. 하루키스트부터 일반 독자까지 눈길을 사로잡을 만했다.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p.11) 소설은 시작한다. 주인공 '나'는 17세로 고등학교 에세이 대회 시상식에서 16살의 "너', 소녀를 만난다. 그후 첫사랑에 빠지고 소녀가 구상한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듣는다. 둘은 데이트를 하면서 가상의 도시를 구상한다. 묘사를 덧대고 구체화시킨다. 소녀는 말한다. 현실에서 자신은 그림자이고, 진짜는 그 도시에서 도서관 일을 한다고. 마치 청춘 로맨스처럼 진행되던 이야기는, 갑자기 소녀가 사라진 뒤 미궁에 빠진다.



한편,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장을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나'는 첫사랑 당시 이야기 나누던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오래된 꿈을 읽는 이'다. 마을에 들어가기 위해 그림자를 떼어내고 꿈을 읽기 위해 눈에 상처를 낸 채. 저녁에 도서관에 출근해 어느날 사라졌던 첫사랑 소녀의 도움 아래 오래된 꿈을 읽는다. 도서관 소녀는 바깥 세계의 자신과 '나', 그 관계를 알지 못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단각수의 두개골에서 그들의 꿈을 읽었던 것처럼.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시간 관념이 없다. 시계는 있다. 문자반은 있으나 바늘은 없다. 문지기가 출입자를 단속하고 단각수 무리가 드나든다. 주민은 각자 지구에서 단소한 삶을 살며 도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각자 일을 한다. 개체로서의 의식은 희미해지고 도시인이 된다. 마치 전작 설정이 떠오른다.



"간소하고 정밀한, 그리고 완결된 장소"(p.53)지만, 주인공은 의문을  품는다. 꿈은 왜 읽어야 할까. 도시를 탐험한다. 높은 벽은 견고하나 스스로 움직인다. 경계는 계속 움직이며 하나의 세포같다. 떼어낸 '나'의 그림자는 주장한다. "도시는 벽 안에서 빈틈없이 완결된 상태"(p.91를 유지하기 위해 모순을 품고 있다고. 



1부는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은 총 3부로 이뤄져 있다. 2부는 '나'가 그림자와 함께 바깥 세계로 돌아와 작은 마을 도서관 관장으로 정착하며 벌어지는 일들, 3부는 마을 도서관에서 만난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얽힌 기묘한 이야기다. 옐로 서브마린은 비틀즈가 부른 노래이자 그것을 모티브로 만든 동명의 만화 영화다. 만화 영화의 시그니쳐인 노란 잠수함이 그려진 파카를 주로 입어 옐로 서브마린 소년으로 불린다.  M**으로 실명은 언급되지 않지만, 작중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하루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미스테리를 품고 있다. 그만의 공식을 따른다. 처음엔 청춘 로맨스로 시작하다 갑자기 사라지는 인물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바깥 세상처럼 기묘하게 나눠진 세상, 기시감이 드는 예지몽, 계속 드러나는 비유와 상징, 거기서 진실을 찾아가며 어떤 식으로든 변화, 성장하는 주인공이 그렇다.  



책은 750여 페이지로 두껍지만, 이틀 만에 읽었다. 문장은 현학적이지 않아 가독성이 높다.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그와 연관된 퍼즐을 나름대로 풀어간다. "우린 아무래도 가설에 가설을 더하고 있는 것 같네요. 뭐가 가설이고 뭐가 사실인지, 점점 구별하기 힘들어져요."(p.216) "생각할수록 혼란스럽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추론인가?"(p..494). 주인공과 함께 추리극 속으로 들어간다. 주인공과 여러 인물들의 아이디어를 분석한다. 놓친 단서 혹은 비유와 상징이 없을까. 사흘째는 덮은 책을 열어 표시해 둔 부분 위주로 속독했다. 



많은 독자들이 말하듯 메시지는 모호하다. 흥미롭게 책장을 덮고, 무언가 여러 감상이 떠오른다. 그러나 형언하기 어렵다. 작가는 소설 후반부에 가브리엘 마르케스를 언급한다. 매직 리얼리즘, 마술적 사실주의에 관해. "가르시아 마르케스 자신에게는 이런 이야기 방식이 지극히 평범한 리얼리즘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해. 그가 살던 세계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이 지극히 일상적으로 혼재했고, 그런 풍경을 보이는 대로 썼던 게 아닐까."(p.672)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굴곡진 남미 역사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환상적으로 풀어냈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나'와 소녀가 기묘한 도시를 만들어냈듯, 하루키 작가가 작품을 매개로 독자와 소통하는 듯하다. 독자가 주인공과 함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다앙햔 메타포를 통해 진실를 추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작가는 작품을 이야기하는 소녀가 되고, 독자는 작품을 읽고 구체화시키는 소년이 된다.



소년이 되어 보자. 예를 들면, <<데미안>>에서 아프락사스로 대표되는 자아의 통합적 성장이 떠오른다.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p.452)라거나, 소설에서 어디가 벽인지, 어디가 바깥 세상인지 알 수 없는 세계를 통합하며 성장하는 주인공의 서사로 읽을 수 있겠다. 그리고 전 마을 도서관장 고야스 씨, 나, 옐로 서브마린 소년으로 이어지는 인물 간의 관계도 독자라면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첫사랑에 실패하고 하루하루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면서 중년이 된 한 인간이, 첫사랑과 함께 구상했던 신비한 도시, 그와 관련된 기묘한 일들을 겪고 그림자같은 옛 삶과 더불어 잊고 있던 본질적인 정체성(본체)을 찾는다. '나'는 보다 원숙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연다. 일상의 의식에 대비해서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여정으로 볼 수 있다. 



개인을 넘어 사회적 은유로 보고 싶다. 첨단을 달리는 사회. 개인은 반대로 고립돼 간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확한 인과관계와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사회가 복잡할수록 일상의 개인은 단순해진다. 가상 현실의 관계망은 끝없이 넓어지지만 현실 삶은 고립되었다. '그 도시' 생활처럼 의식은 유지하지만 마음은 잃어가고 있을 지도. 작품은 현대 사회의 고립상을 현실과 비현실이 혼재하는 이야기로 기록한다. 



그 사회를 사는 독자는 주인공과 함께 진실을 찾는 여정을 나선다. 스스로 기계적 완결성을 가진 것 같지만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모순을 품고 있는 사회. 사회 속 개인 또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갖고 산다. 우리들의 소통과 관계에 관한 은유인가. 그래서 작가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으로 마술적 사실주의를 내세우며 독자와 작품을 구체화시킬 여백의 공간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p.767)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 P11

그리하여 나는 도시의 문을 넘었다. 그림자를 버리고, ‘꿈 읽는 이‘로서 눈에 상처를 내고, 두 번 다시 그 문을 넘지 않는다는 암묵의 ‘계약‘을 맺고. - P68

무언가와 무언가가 이어져 있다. - P263

이곳은 높은 벽돌 벽의 안쪽일까, 아니면 바깥쪽일까. - P426

이곳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마음을 받아들이는 특별한 장소여야 합니다. - P451

"본체와 그림자란 원래 표리일체입니다."..."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 P452

생각할수록 혼란스럽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추론인가? - P494

내가 품은 마음은 좀더 넓은 범위에 이르는 것이며, 보다 온당하고 부드러운 옷을 두르고, 나름의 지혜와 경험으로 억제된 것이었다. 그리고 보다 긴 시간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었다. - P682

"누군가가 땅에서 당신을 받아주리란 것을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겁니다. 보류하지 않고, 온전히, 무조건적으로." - P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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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1-03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집에 있어서,,, 함께 읽어보려고 꺼냈다가 시간에 쫒겨서 포기하고 다시 넣었습니다.
^^;;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지혜 11,26

You spare all things,
because they are yours,
0 Ruler and Lover of souls.
Wis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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