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기억한다 -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김현수 감수 / 을유문화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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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무심하다. 그리고 무지하다. 과거는 그만 잊어라. 지나간 일인데 왜 그렇게 집착하냐. 너만 힘드냐 다른 사람들도 다 힘들게 산다. 그냥 용서해라. 라는 말을 조언이라며 서슴없이 한다. 하지만 당사자에게 과거의 아픔과 정신적 외상인 트라우마는 아직도 생생하다. 아픔이 남긴, 아픔보다 더 고통스러운 수치심과 함께 남들의 무지한 시선까지 감내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정신분석학, 아들러 심리학 관련 서적의 인기는 이렇게 남들에게 털어놓아도 이해받지 못하고 역효과만 돌아오는 마음 속 상처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 베셀 반 데어 콜크는 정신의학 전문의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권위자이다. 그의 최신작 "몸은 기억한다"는 트라우마 전반을 다룬 책으로, 육백 여 페이지의 적지 않은 분량과 트라우마와 관련된 뇌의학, 다양한 치료방법 등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상담 사례, 저자의 수기 형식, 힐링서적이나 여타 심리학 대중서적에서 피상적으로 다뤘던 내용들을 뇌 신경과학을 통해 구체적으로 풀어내어, 전문서적의 분위기보다는 전문의의 이야기를 듣는 듯 편안했다.

저자가 보훈병원에서 베트남 참전군인들을 상담하기 시작한 이례로, 트라우마를 본격적으로 탐구한 이야기는 바로 트라우마 치료의 산 역사였다. ​다양한 임상사례들은 고전적인 정신분석학부터, 약리학, 신경과학, 그리고 현대의 치료법들 -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MDR), 뉴로피드백, 인지치료(CBT) 등을 담고 있다. 환자의 심박수, 뇌파, 뇌 측정을 통한 과학적인 검증은 이 책의 장점이다.

 

특히 트라우마 문제를 개인과 사회의 차원에서 동시에 다루고 있는데, 트라우마 환자의 경우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인지하고 감정을 느끼게 하는"(p.325) 내수용감각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심지어 사건 당시에 상황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무력감과 수치심을 느끼며, 정서적으로 통제감을 느끼기 위해서 비슷한 상황과 감정을 만들거나 자해 등의 부적절한 방법을 선택하기도 했다. 실제로 내수용감각 영역인 내측 전전두엽 피질과 언어와 관련된 브로카 영역이 상대적으로 비활성화된 것을 알수 있었다. 뇌뿐만 아니라 자율신경계, 소화기관, 호르몬계 등 트라우마는 단순히 정서적인 문제만이 아닌 인체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실제 트라우마 치료란, "트라우마는 유기체인 한 사람 전체, 즉 몸과 마음, 뇌에 모두 영향을" 주고, "이 지속적인 스트레스 유도 과정이 종료되고 유기체 전체가 안전한 상태로 회복되어야"(p.100) 하는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아동학대를 다룬 장도 흥미롭다. 미국의 통계에서도 구타, 방임, 성적 아동학대의 문제가 광범위한 것으로 나온다. 학대 아동들은 트라우마뿐 아니라 정상적인 애착관계에서 형성되는 자신과 사회적 관계의 조율 능력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가 없었다. 평생의 짐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 일제 위안부, 남북 분단 등 우리 사회는 다양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가장 대대적인 발전은 트라우마를 계기로 얻은 결과물인 경우가 많다. 남북 전쟁 이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고, 대공황 이후 사회보장제도가 신설되었으며..."(p.564) 과연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아픔들을 계기로 반성과 통찰을 얻었던 것일까. 정치적 당파논리와 이념싸움으로 변질되어 오히려 트라우마를 재생산한 것은 아닐까. 아프다.


트라우마 치료의 방향과 치료법들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트라우마를 벗어나 자기조절 능력을 향상시키고 합리적인 감정과 대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훈련법, 관계맺기부터 전문적인 인지행동, 약물, 다양한 요법들은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전문적인 치료는 여건상 어려울 수도 있지만, 구체적인 문제와 치료의 방향성, 요가 등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은 트라우마 환자에게 크나큰 보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시시때때로 내면의 상처가 불쑥 떠오르고, 자라보고 놀란 마음은 솥뚜껑만 봐도 두려워 삶이 힘들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 동안 막연한 지식으로, 내면의 트라우마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는지, 무엇보다 남에게 조언한다고 하며 무지로 인해 비수를 꽂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몸은 기억한다"는 분량은 적지 않지만, 두번 세번 읽을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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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읽는 밤
장샤오헝 지음, 이성희 옮김 / 리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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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이가 들수록 걱정과 근심으로 뜬 눈으로 새벽을 맞기도 하고, 때때로 인간관계 혹은 업무를 되돌아보며 경망스럽게 부화뇌동하지 않았나 후회가 들기도 한다. '철학 읽는 밤'을 보면서 공감을 하고 따끔한 일침을 듣기도 했다. 왜 제목을 '철학'과 '밤'으로 정했는지 짐작이 간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고즈넉한 밤에 선현들의 인생 교훈을 음미해 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철학 읽는 밤'은 북경대학교 교수, 학자들의 철학을 엮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전략가입니까' 와 같이 세계 유수의 명문대 강의를 엮은 책들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저자 장샤오헝은 '느리게 더 느리게' 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이 책은 강의록은 아니지만 북경대학교의 정신과 인성교육의 정수를 담고자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일견 생소하지만 중국 최고 명문대학교의 명맥을 이어간 선현과 원로 대학자들 -  지셴린, 후스, 루쉰(아큐정전으로 유명한) 등 - 의 인생관과 철학을 다루지만, 인물의 일생과 철학 사조를 설명한 철학개론서 형식이 아니라 명심보감, 채근담처럼 그들의 아포리즘을 주제별로 묶어 설명한 것이라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다루는 철학 또한 형이상학, 학술적인 분야가 아니라 일상과 비근한 주제를 다룬 것이 공감이 되었고, 저자가 고사와 사례 등을 곁들여 풀어서 설명한 덕분에 이해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다루는 명사들 모두 사상, 학문적으로 명망가인지라 읽기에 편했지만 무게감이 있었다.


"완벽한 인생을 살았노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그러니 '불완전한 것이야말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 지셴린 (북경대학교 종신교수, 중국 동방학의 대가이자 작가, 중국의 정신적 스승) p. 18


"고독을 참고 인내하며, 대우주를 묵묵히 담당하라. 마치 대자연이 묵묵히 담당하듯." - 펑즈 p. 68


특히 이 책의 첫 장은 성패와 명리에 집착하지 말라고 역설한다. 불완전한 것이 삶이고, 명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인심이니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고 초연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의 잘못된 모습 때문에 내 인생의 아름다운 색채를 잃어버릴 필요 없다. 야박한 세상사와 인간의 본성에 너무 집착하지 않길. 인생은 훨씬 더 간단하고 홀가분한 것이니 말이다."(p.52)


가치관을 가지고, 목표를 세워 성공을 향하여 근면하게 노력하되, 성패와 명리에 연연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걷기를 주문한다. 물론 여기서 성공이란 명리가 목적이 아닌 가치관에 바탕을 둔 자아의 실현이다. 굴원과 도연명이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았다고 하여 실패한 인생이라 단정할 수 없듯이 말이다. 외물과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끊임 없이 정진하는 삶.


"넘어지면 얼른 다시 일어나라. 자신이 넘어진 그 구덩이를 감상하지 마라. - 선충원 p. 296

물론, 책에 있는 교훈들은 특별할 것 없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삶의 담금질 속에서 고된 일들에 중심을 잃고 흔들린 나날들을 돌이켜보고 노력 대신에 기회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갖지 않았는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공자께서 도는 비근한 곳부터 시작하라 하지 않으셨던가. 조용한 밤 나를 돌아보는 응축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나도 저런 재주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면서 한탄하는 청년에게, 늙은 어부는 말했다. "연못가에 앉아서 물고기만 탐내느니 집으로 돌아가 그물을 짜는 것이 낫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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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바 1 - 제152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4
니시 카나코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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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삶이란 흔들리고 부유하는 궤적임을, 이렇게 흔들리는 삶에서 때로 넘어지는 것은 실패의 결과가 아니라 찾고 있는 것을 향해 내딛는 착실한 걸음이라는 사실을 멋지게 그려낸 작품이다."(출판사 책소개)를 읽고 책에 이끌렸다. 우리나라는 스펙사회다.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아야 하고, 낙오된 인생을 피하려고 분투한다. 하지만 현실이 기성복처럼 규격화될수록, 개성과 자아 찾기에 대한 욕구가 내면에서 불쑥 올라온다. 소설 사라바는 "나는 이 세상에 왼발부터 등장했다."(p.7) 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해서 "나는 왼발로 내디딘다."(p. 420, 2권)로 맺는다. '사라바'(さらば, 안녕), 남 부러울 것 없었던 남자가 서른 즈음에 인생의 추락을 겪고 되돌아본 자아의 궤적과 참 나를 찾는 여정이다.

 

'사라바'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방불케 한다."는 평처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연상되기도 했다. 일인칭 시점의 자아 찾기, 예술적 감성과 편력, 기이한 주변인물과 이야기 등 하루키와 닮았지만, 작중 신흥종교 사토라코몬사마교처럼 의미있으면서 유머러스한 전개, 보다 뚜렷한 이야기 흐름과 주제의식이 한결 읽기에 편했다.

 

 

소설은 일인칭 주인공 아쿠쓰 아유무(步)의 자기고백이다. 아유무는 여성적인 수려한 외모 덕분에 별다른 노력 없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다. 그러나 신경질적이고 기가 센 어머니와 기행을 일삼는 누나로 인해, 유아기적부터 남들에게 주목 받지 않으려고 애쓴다. 무엇보다 아유무의 가족력이 독특하다. 아버지의 해외 주재로 이란, 이집트의 생활을 경험했다. 특히 누나는 아유무의 회상에 따르면 남들의 시선을 강박적으로 끌고 싶어했다. 마이너리티한 감성을 고수하며 기행을 일삼다가 결국 학창시절에 왕따를 당해 등교를 거부한다. 고둥에 집착하여 방 안을 쥐꼬리가 달린 고둥으로 도배하고, 종교에 심취하기도 한다. 모녀 사이의 기싸움은 날로 심해지며, 그럴수록 아유무는 더욱 타인의 시선을 회피한다. 학창 시절도 마찬가지. 자신은 뛰어난 외모로 학내에서 선망받는 입장이었지만, 다수의 편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고 타인에게 호감을 표하거나 연애를 하는 것조차 남들의 시선이 신경쓰여서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학창시절 동네에 번성했던 기이한 종교 사토라코몬사마교의 흥망성쇠와 주변인들의 변화, 죽음을 겪고, 특히 일본 경제 불황의 심화로  잘 나가던 프리랜서 기고가로서의 지위도 타격을 입는다. 서른 즈음 아유무의 신상 변화와 추락은 탈모로 구체화된다. 인기의 원천이었던 외모의 변화. 소극적인 성격이었음에도 학창시절 선망 받을 수 있었고, 대학생으로서 난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외모가 주는 호감 덕분이었다. 한편으론 코미디 촌극 같지만 탈모는 아유무의 자존감과 아이덴티티에 심각한 손상을 입힌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나락에서 '아유무의 시간'은 흘렀다. 옛 동네의 정신적 지주였던 야다 할머니의 죽음과 사토라코몬사마교의 진정한 의미. 출가한 아버지와 결혼한 누나, 지인들의 속내를 들으면서, 남들의 시선과 소극적인 태도로 정체되어 있던 아유무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유년기를 보냈던 아랍권에서는 재스민 혁명이 일어나고, 동경대지진을 겪는다. 나락을 맛본 아유무는 오히려 동경에 남고, 콥트인 교회가 테러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집트를 방문한다. 거기서 동경과 동성애적 감정을 느꼈던 이집트 콥트인 친구 야곱과 재회한다. 아유무는 묻는다.

 

"믿는다는 건 뭘까?"(p.394, 2권)

 

소설에서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정체모를 사토라코몬사마 등 다양한 종교가 언급된다. 결국 서른이 넘어 아유무는 자신의 줄기, 믿음을 찾아 여정을 떠난 것이다. 아마도 작품이 종교적 문제를 다룬 것은, 그 자체보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마음의 지주' 처럼 자아의 버팀목, 스스로가 찾아야 하는 내면의 사랑과 보금자리, 실존적 의미를 찾는 여정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야곱과 나눴던 그들만의 밀어. '사라바'처럼.

 

"우리의 '사라바'는 '안녕'이라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말이 되었다. '내일도 만나자''잘 있어' '약속이야''굿 럭''갓 블레스 유', 그리고 '우리는 하나야'"'사라바'는 우리를 이어주는 마법 같은 말이었다."(p.257, 1권)

 

아유무는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정체되어 보지 못했던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인정하고, 자신의 기원을 찾는 여행을 간다. 태어난 곳, 이란에서 아유무는 말한다.

 

 

"나는 왼발로 내디딘다."(p.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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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1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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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 소녀의 삶과 가슴 아픈 인연을 통해 2차세계대전의 비극을 영화처럼 그려낸 소설입니다. 영화화 판권이 팔렸다고 하는데,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전개가 활자매체보다는 영상매체에 가까운 느낌이었습니다. 올해의 퓰리처상 수상작이기도 했구요...제가 읽은 감동에 비해서 독자들에게 조금 덜 사랑을 받은 것 같아 아쉽기도 한 작품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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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이장미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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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진정 자립을 한다는 것. 사람이 진정 어른이 되어 자기를 책임진다는 것은 간단하더라도 자기가 먹을 음식을 만든다는 것이 포함돼. 아주 중요한 요소지."(p.239)


엄마가 딸에게 전하는 삶이 깃든 레시피. <딸에게 주는 레시피>이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이후 공지영 작가가 맏이딸 위녕에게 전하는 편지글 형식의 두 번째 에세이이자, 엄마로서 뜻 깊은 레시피들을 담았다. 나는 아들래미인지라 모녀 간 정담이 오글거리고 어색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러나 작가가 겪은 곡절과 마음을 담은 멘토링은 공감이 되었다. 무엇보다 일용할 양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지가 놀랍다.

"얼마 전 어떤 사회복지사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독거노인 중 남자 노인의 자살 충동 중에는 먹거리를 한 번도 책임져보지 못해 이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절망도 상당히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더라." (p.239) 무슨 음식을 어떻게 먹는가는 생각 이상으로 사람의 자존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마치 삶이 지치고 귀찮을 때, 허기를 간단히 떼우기 위해 인스턴트 음식으로 연명하는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다. 작가가 굳이 레시피를 딸에게 가르치는 이유. 자연 재료로 간단하지만 건강한 레시피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이 점이 아닐까. 고난과 역경은 늘 있지만, 그럴수록 함부로 먹거리를 먹고 스스로 비하하며 존엄성을 깎지 말라는 엄마의 따뜻하면서도 따끔한 마음. 실로 먹거리는 생명과 연관되어 있으니, 건강한 자연 재료를 먹고 힘내라는 엄마의 마음이 아닐까.

그렇다고 거창한 레시피를 다루지는 않는다. 요리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10분에서 15분 사이의 초간단 요리법들이 주류를 이룬다. 음식도 가지가지. 안심 스테이크, 알리오 올리오부터 어묵두부탕, 시금치 된장국까지 ​한식, 양식을 오가는 27가지 요리들이다. "당연한 것은 없다. 내가 이 간단한 시금칫국을 끓이는 법을 모르고 살았듯이 끓이기 전에는 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쉽고 간단해도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기 전에는 없는 것이지."(p,102) 요리법 하나하나에는 작가의 삶과 성찰이 담겨 있었다. 특히 시금치 된장국에는 친정 엄마와의 애증이 담겨 있었는데, 딸이 만드는 법을 물었을 때의 심정이란. 작가의 뛰어난 글솜씨로 표현한 문장을 너머 마음으로 느끼게 했다.

요리법에 담긴 조언들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삶이 다사다난해서일까. 특히 인간관계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 스스로 자기의 영역을 가지고, 남의 영역을 인정하고 이해할 줄 알라는 일상의 진리도 상투적이지 않다. 다만 이해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러기에 사귀지 사람들에 대한 충고를 한다. 폭력적이니 사람, 자존감이 낮은 사람, 불행한 사람은 절대 만나지 말라고 한다. 때로는 딸이 연애와 실연에 지혜롭게 대처하기를 바라는 조언들. 그리고 스스로 일어서기와 노동이 삶에 주는 신성한 건강함까지. 한편으론 작가가 직접 살갗을 맞대며 깨달은 삶의 날것같은 성찰들이라, 아픔이 느껴진다. 작가가 직접 겪은 아픔의 시간들을 푹 고아서 딸에게 보약을 주는 것일까.


"위녕,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 의미있게."(p.27) 실로 산다는 것은 의미를 모르는 부조리와 문제의 연속이고, 더구나 예측할 수도 없다. 작가가 서른 초반 파경을 맞고 어린 딸과 더불어 친정집에 빈손으로 돌아갈지를 어떻게 알았을까. 애증의 관계였던 친정 엄마에게 손을 벌리며 죽고 싶은 충동이 순간순간 일어난 시절. 그리고 그 후에도 다사다난했던 작가의 인생이 담긴 레시피이기에, 소금 한 꼬집, 간장 한 숟깔까지 허투루 다가오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시금치 된장국과 어묵두부탕을 끓여보고 싶다. 삶의 애증이 따뜻하고 정감있게 승화된 요리를 직접 보글보글 끓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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