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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평점 :
지난겨울 시 강의를 들은 수강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추운 겨울밤 일이 끝나자마자 저녁도 거르고 달려오던 친구가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강좌 도중 이직을 한데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짬을 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늙고 아픈 부모를 지켜보는 그에게 힘이 되어줄 말을 찾다가 늦은 답을 보냈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을 읽어봤나요. 어쩌면 위로가 될 거예요.
내 답이 그에게도 답이 되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뒤엉킨 근심의 타래를 풀 실마리를 내가 이 책에서 찾았듯 그도 그러기를 바랄 뿐.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리베카 솔닛처럼 자기 앞에 놓인 숙제를 해결하며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길 바랄 뿐이다.
왜 하필 이야기인가? 살기 위해서는, 나를 정당화하고 고통을 견디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삶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쓰도록 요구하고 종종 뜻밖의 이야깃거리를 던진다. 리베카 솔닛 앞에 불쑥 나타난 살구처럼. 어느 날 갑자기 집안 가득 쌓인 살구,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집에서 마지막으로 딴 살구, 병든 어머니처럼 막무가내로 그녀의 손길을 요구하는 살구. 그것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이며 “말해야 할 이야기”다. 솔닛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 미지의 땅 아이슬란드로 떠난다. 제대로 보려면 거리가 필요하고, 이야기를 쓰려면 내면으로의 침잠만큼 밖으로 나아가 다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세상에 자신을 비춰봐야 하므로.
낮과 밤, 빛과 어둠의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그녀는 극지의 얼음에 자신을 비춰보며, 자신을 거울 삼아 그 거울을 질투하고 비난했던 어머니 -그래서 가까이하기엔 너무도 멀었던 어머니가 사실은 자신의 거울이 되어 자신을 되비추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른 듯 닮은 두 거울상에 드리운 완강한 세상의 이야기를 읽는다. 거기엔 아버지, 사회, 교회가 말하는 결점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붙들려 평생 상처 입고 상처 입혔던 어머니가 있다. 자신은 그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려 싸우면서 세상의 이야기를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꿈꿨으나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음을 그녀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래서일까, 치매로 이야기를 잃은 어머니는 아잇적처럼 다시 행복해한다. 비록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고 어머니는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지만, 솔닛은 자신과 어머니의 다름 대신 어머니의 못 다 쓴 이야기가 자신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음을 확인한다. 그러므로 거울은 냉담한 이야기가 켜켜이 얼어붙은 얼음이되, 얼음을 녹이는 것은 차가운 이야기 속에 얼어붙은 뜨거운 눈물이다. 그것은 사랑과 원망의 원환이며 입구가 곧 출구인 미로다. 이 미로를 벗어날 길이 있을까?
이야기의 마지막은 다시 살구다. 어머니가 심고 가꾼 살구로 그녀는 잼과 시럽을 만들어 사랑하는 이들과 나눈다. 살구가 서로의 몸으로 들어가듯, 사랑이란 그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 그녀는,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슬픔과 이야기를 먹고 살며 그러다 때론 쓰디쓴 실패에서 달콤한 꿀을 만들기도 한다고 말한다. 끝까지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기만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