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이정철 지음 / 너머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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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하게 선조대 역사를 복원해 동서분당과 이이 등 사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제목의 답은 이렇게 길게 서술된 역사에서가 아니라 저자의 짧은 논평에서만 찾을 수 있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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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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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시 강의를 들은 수강생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추운 겨울밤 일이 끝나자마자 저녁도 거르고 달려오던 친구가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강좌 도중 이직을 한데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짬을 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늙고 아픈 부모를 지켜보는 그에게 힘이 되어줄 말을 찾다가 늦은 답을 보냈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을 읽어봤나요. 어쩌면 위로가 될 거예요.

내 답이 그에게도 답이 되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뒤엉킨 근심의 타래를 풀 실마리를 내가 이 책에서 찾았듯 그도 그러기를 바랄 뿐.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리베카 솔닛처럼 자기 앞에 놓인 숙제를 해결하며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길 바랄 뿐이다.

 

왜 하필 이야기인가? 살기 위해서는, 나를 정당화하고 고통을 견디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삶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쓰도록 요구하고 종종 뜻밖의 이야깃거리를 던진다. 리베카 솔닛 앞에 불쑥 나타난 살구처럼. 어느 날 갑자기 집안 가득 쌓인 살구,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집에서 마지막으로 딴 살구, 병든 어머니처럼 막무가내로 그녀의 손길을 요구하는 살구. 그것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이며 말해야 할 이야기. 솔닛은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 미지의 땅 아이슬란드로 떠난다. 제대로 보려면 거리가 필요하고, 이야기를 쓰려면 내면으로의 침잠만큼 밖으로 나아가 다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세상에 자신을 비춰봐야 하므로.

 

낮과 밤, 빛과 어둠의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그녀는 극지의 얼음에 자신을 비춰보며, 자신을 거울 삼아 그 거울을 질투하고 비난했던 어머니 -그래서 가까이하기엔 너무도 멀었던 어머니가 사실은 자신의 거울이 되어 자신을 되비추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다른 듯 닮은 두 거울상에 드리운 완강한 세상의 이야기를 읽는다. 거기엔 아버지, 사회, 교회가 말하는 결점 없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붙들려 평생 상처 입고 상처 입혔던 어머니가 있다. 자신은 그 어머니로부터 벗어나려 싸우면서 세상의 이야기를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꿈꿨으나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음을 그녀는 비로소 깨닫는다.

 

그래서일까, 치매로 이야기를 잃은 어머니는 아잇적처럼 다시 행복해한다. 비록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고 어머니는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지만, 솔닛은 자신과 어머니의 다름 대신 어머니의 못 다 쓴 이야기가 자신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음을 확인한다. 그러므로 거울은 냉담한 이야기가 켜켜이 얼어붙은 얼음이되, 얼음을 녹이는 것은 차가운 이야기 속에 얼어붙은 뜨거운 눈물이다. 그것은 사랑과 원망의 원환이며 입구가 곧 출구인 미로다. 이 미로를 벗어날 길이 있을까?

 

이야기의 마지막은 다시 살구다. 어머니가 심고 가꾼 살구로 그녀는 잼과 시럽을 만들어 사랑하는 이들과 나눈다. 살구가 서로의 몸으로 들어가듯, 사랑이란 그의 이야기로 들어가는 것. 그녀는,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슬픔과 이야기를 먹고 살며 그러다 때론 쓰디쓴 실패에서 달콤한 꿀을 만들기도 한다고 말한다. 끝까지 지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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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구전서사의 부친살해
김영희 지음 / 월인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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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자식은 독립하고 부모는 자식을 놓아주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이들이 경제, 도덕, 건강 등을 이유로 부모를 떠나지 않고 자식을 놓지 않는다. 이유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 아래 깔린 심리는 똑같다. 분리되는 것, 불안전한 자신을 확인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부모에게 자식은 자신의 존재 증명이며 또 다른 자기다. 그래서 자식이 자신의 말을 거역하고 떠나려 할 때 부모는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고통을 느낀다. 한편, 아이에게 부모는 안전과 안락을 제공하는 울타리다. 자식은 그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보한다. 그러나 부모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언제든 버려질 수 있기에 그 존재는 위태로우며 그래서 자식은 독립을, 자신이 주인인 새 세계를 꿈꾼다.

 

세계의 수많은 신화와 동화에 부친살해’ ‘자식살해라는 패륜의 주제가 거듭해서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친살해는 프로이트가 말했듯 문명의 원천이며, (가부장제에서) 사회적 주체로 서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다. ‘부친살해없이는 심리적 주체의 독립은 물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역사적 주체의 등장도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한국의 전통서사에 부친살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국문학자 김영희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한국 구전서사의 부친살해>라는 보기 드문 저작에서 그는 부친살해보다 자식살해가 더 자주 발견되는 한국의 서사 전통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천착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 신화에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나 오이디푸스처럼 아버지를 부정한 아들이 없다. 나라를 세운 주몽, 불법(佛法)을 세운 아도는 아비 없는 자식으로서 부친살해가 아니라 부친탐색에 나선다. 그들은 어머니를 떠나 아버지의 세계로 가서 정체성을 인정받고 권력을 위임받는다. 때문에 그들의 세계는 아버지의 후광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자식의 분리는 수동적인 미완의 것으로 남는다.

 

반면, 아버지의 분리는 자식살해라는 능동적인 모습을 띤다. 구전서사에는 부모를 위해 아이를 죽이는 수많은 효행담이 등장한다. 개중엔 실수로 손자를 삶아먹은 시부모를 감싸 효부상을 받은 며느리 이야기도 있다. ‘를 내세워 엽기적인 자식살해를 옹호하고 권장하기까지 하는 이 이야기들은 기존 질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저자는 부친살해서사가 공동체의 미래 주체를 만드는것과 달리 자식살해공동체의 과거에 고착된 주체를 생산한다고 지적한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아이를 부모와 공동체가 집단 살해하는 아기장수설화는, 이 수구적 주체들이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얼마나 가혹하게 억압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의 욕된 현실은 몰상식한 아버지의 딸이 낳은 파행이 아니라 부친살해를 통해 미래 주체를 만들지 못한 오랜 과거의 복수다. 만약 이번에도 아버지를 죽이는 철저한 부정과 반성을 이루지 못하고 또 다른 아버지의 이름에 기댄다면, 그가 아무리 자애롭고 훌륭하다 해도 새로운 주체는 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어버이는 루쉰이 그랬듯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올라가라고 자신을 내주어야 할 것이며, 자식 된 자는 그들을 사뿐히 즈려 밟고 나아가야 한다. 한국사 최초의 부친살해’, 그것이 지금 우리의 과제고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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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몸짓 - 동물은 어떻게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가?
칼 사피나 지음, 김병화 옮김 / 돌베개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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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엔 젬병임에도 인문서보다 자연과학 책들에 자꾸 손이 간다. 몇 해 전 TV에서 본 영상 때문이다. 밀렵꾼에게서 자신들을 구해준 은인이 죽자 20여 마리의 코끼리가 집 앞에 모여 애도하는 장면이었는데, 그걸 보자 인본주의에 의심이 생겼다. 내레이터는 그들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먼 곳에서 찾아와 장례식 내내 그렇게 있었고, 이듬해 기일에도 다시 왔다고 했다. 죽은 건 어찌 알았으며 동물이 어떻게 문상을 할까? 게다가 제사까지? 묵념하듯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는 코끼리들을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봤는데도 시간이 흐르자 내 기억이 의심스러웠다.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일이니까.

 

다행히 생태학자 칼 사피나의 <소리와 몸짓> 덕분에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물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소통하는지 다룬 이 책의 첫 번째 주인공은 코끼리. 그들에 관한 긴 이야기 속에 내가 본 에피소드가 있었는데(171), 그쯤 읽었을 땐 이런 일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지능이 높고 사회적이고 조상을 존중하고 자신을 인식하고 공감할 줄 알고심지어 슬퍼서 죽을 수도 있는코끼리에 관한 있을 수 없는 이야기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잊히지 않는 건 가족을 모두 잃은 육지의 코끼리를 바다의 흰긴수염고래가 위로하는 대목이었다. 믿을 수 있는가? 바다와 육지에 사는 전혀 다른 동물이 종()을 초월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것을. 하지만 가모장이 이끄는 복잡하고 끈끈한 공동체, 초음파를 이용한 놀라운 소통력, 큰 두뇌와 긴 수명 등 그들이 가진 여러 공통점을 생각하면 둘의 대화를 의심하는 것이 더 이상한지 모른다. 같은 인간보다 개나 고양이와의 소통에 열심인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걸 보면 더욱.

 

그러므로 정말 이상한 일은 동물도 생각하고 느끼고 함께 어울려 놀고 웃고 우는 존재란 것을 무수한 증거 -이 책은 750쪽이 넘는다-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특히 과학자들이 부정하는 것이다. 필자는 과학자들이 가짜 동물이나 거울 따위를 이용한 실험을 근거로, 동물에겐 마음이론도 자기 이해도 없으며 오직 인간만이 타자의 마음을 읽고 자아를 인식한다고 주장하는 데에 분통을 터뜨린다. 그는 자아 개념을 보여준다고 알려진 저 유명한 거울테스트를 비판하면서, 늑대가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자기 다리를 뜯어먹을 것이니 거울은 자기 이해가 아니라 반영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사람뿐 아니라 영장류, 돌고래, 코끼리, 까마귀 등도 이를 이해하며, 인간성의 지표로 여겨지는 거울뉴런 역시 원숭이에게서 가장 먼저 발견되었음을 일깨운다. 한마디로 인간만의 고유성이나 특별함을 주장할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동물의 특별함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솔직히 압도적인 힘을 갖고도 관대함과 솔선수범으로 무리를 통솔하는 늑대나, 평생 서로를 기억하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고 생선 한 마리도 나눠먹는 고래를 보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필자는 누가 우월하다고 말하는 대신, 모든 동물은 나름의 특별함을 갖고 있으며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말한다. 네게도 내게도 그들에게도 삶은 무겁다. 그 무거움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바탕이며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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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넷페미史 - 우리에게도 빛과 그늘의 역사가 있다
권김현영 외 지음 / 나무연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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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페미니즘 책을 멀리했다. 그 책들을 읽는 바람에 오랜 우정을 잃었고 사랑이 위태로워졌기에. 페미니즘은 가장 친밀한 관계들에 균열을 일으켰고 차별에 분개하면서도 당연시하는 나 자신의 이중성을 일깨웠다. 독서는 괴로웠고,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채 분노만 쌓는 것이 싫어 페미니즘이 이슈가 되고 책들이 쏟아져 나와도 선뜻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대한민국 넷페미사>는 달랐다. 제목이 이상해서(‘넷페미가 뭐지?’) 집어 들었다가 빵 터졌다. 책을 보다가 이렇게 웃은 게 얼마만인지. 이 책은 201610페미니즘 라운드 테이블이 기획한 강의와 토론을 정리한 것인데, 생생한 입말 덕에 여느 페미니즘 책보다 쉽고 즐겁게 읽힌다. 기막힌 현실을 한숨이 아니라 웃음으로 전하는 권김현영과 손희정의 입담은 감탄스럽거니와, 그 입담에 담긴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까지의 온라인 여성운동사는 더욱 감탄스럽다. 특히 이들의 강의에 이어진 박은하이민경의 3강은, 90년대 영 페미니스트들을 자신의 계보로 인정하면서도 그들과는 독립적으로 새로운 활동을 전개해가는 뉴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통해, 나 같은 비관주의자의 예단과 달리 여성주의의 역사는 도도히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내가 산 시대였으나 내가 아는 역사는 아니었다. 내가 아는 역사에서 여성은 언제나 대사 없는 보조출연자거나 말 못하는 피해자였다. 그러나 이 책은 말하는 여성, 말로 싸우는 영혼들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 역사는 메갈리아의 언어만큼이나 낯설고 뜨겁다. 이상한 것은 언론에서 메갈리아의 언어를 처음 접했을 때 눈살을 찌푸렸던 내가 이 책에서 그걸 봤을 때는 웃음을 터뜨렸고 통쾌함마저 느꼈다는 점이다. 왜 똑같은 언어가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그것은 언어가 놓인 맥락이 달랐기 때문이리라. 권김현영은 과거 영 페미니스트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주장을 했을 때 이를 맥락적으로이해하고 그 가치를 지켜가려는 사회가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란 과정과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고 지적한다.

 

그 지적은 오늘날의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워 소수자의 언어를 검열하고 예스컷을 외치는 사회, 양성평등의 이름으로 다수자가 억울함을 토로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아버지들은 버림받았다며 흐느끼고, 아들들은 자신은 이 가부장제의 수혜를 받은 적이 없다고 광광 울고있다. 현 사회의 시대정신과도 같은 이런 자기연민은, 자신의 인생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고 전가하는 미성숙함을 반영한다. 그러니 이들에게 넷페미들이 그만 징징대라고 일갈하는 것은 얼마나 올바른가.

 

물론 필자들이 인정하듯 넷페미나 여성이 늘 옳은 말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많아지는 게 진보지 그 목소리가 다 옳은 얘기여야 진보는 아니다.” 진보란 올바른 하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온갖 목소리들의 아우성이 올바름을 만든다고 믿는 낙관이다. 영웅의 웅변이 아니라 아우성의 낙관이 역사를 만든다. <대한민국 넷페미사>를 읽고 영화 <파란 나비효과>를 본 지금, 나는 비로소 역사를 믿게 되었다. 내가 역사임을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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