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멜론 슈가에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최승자 옮김 / 비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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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란 게 있다 치고,

유형을 여럿으로 나누면 작가와 나는 같이 묶일 것이다.

가능성이 있다 치고,

내가 소설을 쓴다면

'A가 X에게'와 '좋은사람은찾기힘들다'와 이 책을

세 꼭지점으로 한 도형 안에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모든 이야기를 통틀어

이렇게 희한한 방식으로 사람을 슬프게하는 것은

전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전현무후무, 하다.

많은 이들이 좋아할 만한 소설은 아니다.

그래서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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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하는 말들 - 2006-2007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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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화서보다 먼저 읽었다. 둘 다 아주 좋았다.

시에 관한 책을 읽는 이유가 있다.

시를 쓰려는 게 아니다.

개그 치는데 시적 감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행복한 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누구나 그런 것으로 안다.

그런데, 가끔,

개그 하나 무심코 던졌을 때 누군가 활짝 웃어주면

그것처럼 기쁜 게 없다.

아껴 읽은 부분 중 세 개만 옮긴다.

 

6

동산병원 의사로 계시는 임만빈 선생님이

수필집을 내셨는데 제목이 참 예뻐요.

[선생님, 안 나아서 미안해요]

 

이렇게 책임을 자기 쪽으로 돌려놓으면 예뻐져요.

'의미 있는 나'라는 것은 '깨지는 나'예요.

내가 깨져야 세상이 달라져요.

 

 

32

중얼중얼하는 것 같은데,

확 빨려 들어가도록 말하세요.

쓰레기 태우는 데 가까이 있다가

불길이 확 다가오면 놀라지요?

그렇게 하세요.

파도가 왔다 갔다 하면서

확 다가오면 깜짝 놀라지요?

그렇게 하세요.

 

지난번 동해에서 6미터 높이의 해일이

소리 없이 다가와 몇 사람 데리고 갔지요.

좋은 시는 그런 거예요.

 

 

109

번번이 힘들 거예요.

그렇지만 귀한 건 다 어렵게 얻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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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화서 - 2002-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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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감상평을 읽고 서둘러 구입했다.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친구가 늘 것이다.

밑줄 친 부분을 옮긴다.

좀 많다.

 

 

1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에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버리면 그 전제를 무시하는 거예요.

 

11

시 또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다 계속해서 실패하는 형식이에요.

 

12

시인은 알몸으로 언어와 접촉하는 사람이에요.

 

26

시는 말의 춤이에요. 시의 쾌감은 마찰과 낙차에서 생겨요. 무엇보다 에로티시즘이 있어야 해요.

말에도 '넣고, 빼고' 하는 관능이 있어요. 말과 섹스하세요. 말의 경계 너머로 우리가 모르는 말이 태어나도록.

 

36

시는 빗나가고 거스르는 데 있어요. 이를테면 '서재'와 '책' 대신 '서재'와 '팬티'를 연결하는 식이지요.

 

37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건 이별하는 순간이듯이, 리듬이 중요하다는 건 리듬이 깨지는 순간에 알게 돼요.

 

47

계단 잘 내려가다가도 '조심해야지' 하면 걸음이 어켜 비틀거려요. 몸 하는 일에 머리가 개입해서 생기는 혼란이지요.

 

50

손을 신뢰하면서 가급적 신속히 쓰세요.

 

71

거창하게 인간의 운명에 대해 애기할 것 없어요. 그런 건 내가 안 해도 벌써 다 나와 있어요.

그냥 우리 집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만 쓰세요.

 

77

시는 감정도 비유도 아니고, 패턴이에요. 패턴은 소급적인 동시에 예시적이에요.

 

85

전환이 있어야 해요. 가령

'꽃이 피었다. 새가 울었다' 는 연결보다

'꽃이 피었다. 새가 죽었다' 가 힘이 있어요.

 

95

'햇빛이 빛난다'는 사구예요. '햇빛이 울고 있다'는 활구에 가까워요.

'헷빛이 울고 있다. 어디서 본 얼굴이다'

 

120

시를 쓸 때는 광이 아니라 피를 모으세요.

 

129

모든 미친 것들에게, 미치지 않으면 안 될 사연 하니씩 찾아주는 게 시예요.

 

151

신기한 것들에 한눈팔지 말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세요

 

153

시는 인식이 오기 전의 뒤척임이에요. 가령 그토록 바라던 칭찬을 받았을 때 왜 눈물이 나는지 생각해보세요.

 

154

가령 아빠 장례식 날, 다섯 살짜리 사내애가 제상 위의 촛불을 불면서 노는 모습을 무어라 하겠어요.

 

173

윤리나 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도 포르노예요. 에로티시즘으로 하세요.

 

179

아무일 없었던 듯이 시작하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끝내세요. 호들갑 떨지 않는 거예요.

 

194

시는 이미지와 메시지 사이에 있어요.

 

211

교황님 말씀이에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남에게서 빼앗은 것입니다."

이보다 뼈아쁜 시가 있을까요.

 

215

시는 자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혼잣말이에요.

최근에 어떤 여자가 남편하고 자다가, 다른 남자 이름을 불러서 목 졸려 죽었어요.

 

219

죽은 청설모가 아무 일 없는 듯이 솔밭 위에 누워 있는 그 느낌이 시예요.

 

234

시는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잇어요.

 

235

시는 정말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끝내 안 하는 거예요.

 

277

사랑을 못 받아도, 못 주어도 응어리가 남아요.

그 응어리를 뒤늦게 풀어주려는 게 시예요.

 

282

시는 대단한 게 아니에요. 그냥 식당에서 나올 때 뒷사람 구두를 돌려놓아 주는 거예요.

 

368

피상적인 말이 떠오를 때는 입술을 꽉 깨무세요.

 

419

자기 위주로 생각하면 또라이고, 남 위주로 생각하면 속물이에요.

 

448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의 주인이고, 모르는 것의 하인이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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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번째 파도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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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이 작품의 전편인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를 읽었다.

별을 세 개 주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술술 잘 읽혀서 좋았다.

통속적인 이야기인 듯해서 색안경을 쓰고 읽었는데도 재미있었다.

결국 나도 한 통속인 걸까? 

 

속편이 있는 줄 알았지만, 속편까지 읽을 만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우연히 이 책을 손에 넣었다.

소일하는 셈치고 읽었다.

아주 좋았다.

 

소설을 읽으며 나를 보여 주는 거울을 찾는 경향이 있다.

서른이 되어 읽은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 와타나베를 통해 20대의 나를 보여 줬다.

그는 겁이 많으면서도 '가오'를 중요하게 여기는 찌질남이었다.

 

와타나베의 30 중후반을 상상하면 이 책의 남자 주인공인 레오와 닮았다.

겁이 많은데 가오는 중요해. 게다가 외로워.

 

레오는 운 좋게 에미를 만난다.

이건 순전히 에미가 레오에게 베푼 행운이다.

레오가 모자라기는 해도 나쁜 인간은 아니다.

 

에미는 미도리에 대응한다.

나오코가 죽지 않았다면 에미처럼 나이 먹었을 수 있다.

에미를 흉보는 게 아니다.

책을 읽는 동안 에미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나중에 레오가 행복을 찾는다면 에미 덕분이다.

93쪽에서 에미가 레오에게 화낸다.

"이 남자는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아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기가 그 사실을 안다는 걸 남에게 전달할 줄도 알아요."

내가 언젠가 들었거나, 곧 듣게 되거나

할 법한 말이다.

이 책은 하루 만에 읽었다.

결말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들의 중년이 궁금하다.

속편이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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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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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미셸 투르니에가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에 토를 단 책이다.

투르니에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뒤쪽이 진실이다'

라며 '남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러쿵저러쿵 한다.

한 작가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옆모습, 뒷모습을 고루 다룬다면 오케이.

그렇지 않고, 오직 뒷모습을 편애한다면 그 지점에 의미 생성.

미셸 투르니에 선생님, 어째서 뒷모습을 특히 좋아하세요?

그거 제게는 조금 이상하네요.

괜한 시비라고 하시겠지만,

책 한 권 나올 만한 의미 다툼의 가치는 있다고 봤기에 한번 던져 본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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