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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칭찬의 힘 - 나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
어린이행복발전소 글, 박종연 그림 / 청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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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칭찬의 힘 - 현희(어린이행복발전소) 지음>
 

  이 책 <어린이를 위한 칭찬의 힘(이하 칭찬의 힘)>의 각 장은 저자의 경험담으로 시작해서, 소설과, 전기와, 대화록을 거쳐, 체크 포인트(혹은 매뉴얼)로 마무리 짓고 있다. 사실과 허구를 짝지어 배치하고 끄트머리에 실천 방법을 제시하는 형식인데, 이는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데는 물론이고 학부형이나 교사에게 제시하는 지침서로도 썩 훌륭한 짜임새로 보인다.

  ‘칭찬의 힘’은 틀림없이 가르침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계몽서이다. 가르침의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터이다. ‘회초리나 잔소리’도 그 중 하나이고 심지어 ‘눈물과 포옹’도 때에 따라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 중 하나가 서사(이야기)일 텐데, ‘칭찬의 힘’은 바로 이 방법을 택하고 있다. 자, 그럼 이 책이 이야기로서의 흥미와 교훈, 두 마리의 토끼를 어떻게 획득하는지 살핀다.  

 

들어가는 글   

  이것은 신뢰라고 할 수도 있고, 친근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저자는 본인이 경험한 소박한 일화를 책머리에 소개함으로써, 책을 보는 동안 ‘읽는다’라기보다는 ‘듣는다’는 느낌을 준다. 제시하고 있는 일화들은 적절한 직접 인용과 세밀한 묘사를 통해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실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진정이 흠뻑 배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디테일’을 완성하는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경험이니까. 그렇게 ‘칭찬의 힘’은 신뢰와 친근감을 획득한 후에 본문으로 들어간다.

Part 1

  본문은 동화로 시작한다. 모든 주인공은 관계의 문제를 안고 있고 그것들은 그가 달성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한다. 도전은 편견에 의해, 꿈은 현실에 의해, 자신감은 시기와 질투에 의해 좌절의 위기를 맞는다. 이런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어쩌면 예측 가능한 교훈으로 마무리 되는데, 이는 ‘문제’라기보다는 ‘당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이 타협(흥미와 교훈 사이에서)해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일 텐데, 작가는 그 지점을 예상 가능한 곳으로 설정해놓고 그 안에서 재주를 부리기로 마음먹은 듯하다. 때문에 관건은 ‘확장’이 아니라 정해진 틀 안에서의 ‘밀도’인 것이다.

  여기부터 작가의 상상력과 장르적인 재주가 발휘 된다. 실려 있는 세 이야기 모두 매우 잘 읽히는데 그 이유는 대략 이러하다.

1. 뚜렷하고도 매력 있는 주인공 캐릭터

2. 모든 어린이들의 고민에 쉽게 대응 가능한 그들의 고민.

3. 시각적 상황 묘사와 사실적인 인물 묘사.

4. 흥미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간결한 문체.

5. 단순하되 견고한 플롯.

6. 무엇보다도 위의 요인들이 자아내는 긴장과 이완의 적절한 배치.

  책의 전체를 통틀어 작가의 능력이 가장 밀도 높게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Part 2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기에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효과적인 글쓰기 틀이 ‘위인전’일 것이다. 우화가 시(詩)라면 전기는 ‘르포’일 것이다. 르포의 힘은 ‘실재함’이 근본이다. 작가는 그 힘을 빌리기 위해 픽션의 울타리를 넘어 넌픽션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다. 독자들도 군말 없이 따른다. 이미 이야기꾼의 다음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안달이 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놀라운 점은 ‘Part 2' 역시 ’Part 1'과 마찬가지로 매우 드라마틱하다는 것이다. 사건은 매우 긴박하거나 애타고, 인물에는 쉽게 감정이입 된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사실이 그러했음’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실재이든 허구이든) 글로 옮겨짐에 있어 최소한의 윤색이 필연이라면 작가의 재주가 이 장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숨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Part 3

  가장 흥미로운 형식을 띠고 있는 장이다. 허구와 실재가 서로 만나고 있다. 이 쯤 되면 독자들에게 허구와 실재의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작가는 본인이 만들어낸 인물과 실재하고 있는 인물을 책 속에서 만나게 한다. 이는 방금 전에 3인칭 시점으로 지켜보았던 인물을 1인칭 시점으로 대면할 뿐 아니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 가상의 공간은 그 자체로서 묘한 울림을 준다. ‘안티’와 싸워 이기고 꿈을 이룬 선배가 어린 후배에게 들려주는 따뜻한 조언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아늑한 공기. 그 촉각적인 감동.

체크 포인트

  술술 읽히는 책들은 많은 경우 쉽게 잊힌다. 그런 의미에서 이 페이지는 흥미롭다. 서사의 감동으로 어린이들을 이끌어 칠판 앞에 앉혀 놓고 숙제를 낸다. 그 숙제를 받은 어린이들은 과연 한숨을 쉴까?

  이 구성은 얄미운 구석이 있다. 이 페이지를 다른 이야기들에 앞서 우선 제시했다면 양상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숙제를 좋아하는 어린이를 누군들 보았을까. 하지만 차근차근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소통하여, 믿음을 준 후에, 자신감을 갖게 하고, 드디어 숙제. 이미 아이들은 이 숙제가 자신에게 왜 필요한지, 하고 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알고 있는 바, 기꺼이 실천하게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숙제를 누구나 해낼 수 있다는 것.

  작가는 어쩌면 아이들과 어떻게 하면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이어서 어린이들은 선생님의 숙제를 꼼짝없이, 하지만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숙제 검사는 우리 모두가 두고두고 해야 할 일이다.  

* 오해, 질투, 따돌림과 그로 인한 반칙, 반목. 이 책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은 ‘반성’을 통해 해소 되고, 그런 후에야 성취가 이루어진다. 핵심어인 ‘칭찬’과 더불어 이 책엔 쓰다듬거나 포옹하는 장면이 적잖이 나온다. 성취가 ‘탐욕만의 성취’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반성이고 그러기 위해서 지혜로운 어른의 ‘어루만짐’과 ‘안아 주기’가 필요하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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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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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추한 사람'에 관한 문제이다. 추한 것을 다루는 것은 쉽다. 그건 그냥 눈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좀더 적극적이라면 뜯어고치거나 없애면 된다. 하지만 대상이 '추한 사람'이라면 어렵다. 추한 사람은 내 동포일 수도 있고, 내 이웃일 수도 있고, 내 가족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다.

박민규는 이 문제에 대해 근본을 파헤치지는 않는다(혹은 못한다). 파헤쳐 봤자 정답이란 것이 나오진 않을 테니. 그 대신 그것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에 대해 말한다. 남자 주인공인 '나'는 추녀인 '그녀'에게 친구하자고 제안하고 이내 서로 사랑하게 된다. 어째서 미남인 '나'가 추녀인 '그녀'에게 끌렸는지 소설은 그럴싸한 개연성을 마련해 놓고 있지 않다.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다. 동의한다. 작가는 서사적인 개연성이 필요한 부분에 적잖이 이런 식으로 피해 간다.

생각해 보니 인생은 과연 싱거운 것이었다.

뭐, 누구나 애환은 있는 거니까

그게 인간이야  등등.

작가 스스로는 이를 미진함으로 보지 않고 ‘관건이 아니다’라고 보는 듯싶다. 동의한다. 부조리는 개연성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니까.

 

그는 다만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당시는 좋은 것이 옳은 것을 이기기 시작한 시대 였다 고. ‘좋은 것’이 호오의 문제라면 ‘옳은 것’은 선악의 문제일 것이다. ‘좋은 것’이 감각의 문제라면 ‘옳은 것’은 이성의 문제일 것이다. ‘좋은 것’이 말초적이라면 ‘옳은 것’은 성찰적일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성찰을 요구한다.

그는 개체군(평균)이 평균 이하의 개체를 어떤 식으로 괴롭히는지, 선두 그룹의 소수 개체에게 어떤 식으로 복종하게 되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본문에는 7,80년대의 경제 상황과 대중문화의 소비 형태와 매스미디어의 영향 등을 슬쩍슬쩍 비꼰다.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의 천박함을 어떤 식으로 조장해 왔는지 암시한다.

작가는 7,80년대를 이야기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빙크로스비, 마돈나, 찰슨브론슨, 크리스밋첨, 로버타플랙, 까뮈, 닐영, 블랙사바쓰, 핑크플로이드, 생택쥐페리, 밥로스, 장그르니에, 특히 존레넌과 밥딜런

그런데 현재를 이야기하면서는 단 한명의 이름만 들고 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 게다가 노래 제목은 베이비 원 모어 타임.

이것을 단순 비교하여 현재가 과거에 비해 얼마나 천박하냐를 이야기한다면 무리이겠지만
적어도 ‘얼마나 노골적이냐’를 이야기하는데는 딱이지 않은가? 

과문한 탓에 전문가, 또는 호사가들이 박민규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들은 바 별로 없다. 내가 염려 안 해도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 사람은 매우 정치적인 소설가이다. 그의 전작들을 보면 이 사람이 반미반자본주의자인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착한 사람같으니. 하지만 주변에서(평단이나 시장에서) 그를 그렇게 바라보지도, 부르지도 않는다. 이건 마치 '괴물'이라는 (꽤) 노골적인 반미 영화가 나왔을 때 기겁을 하고 개봉을 막았어야 할 부류의 인간들이 '이건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라고 호들갑 떨던 현상과 흡사하다. 누가 물어? 딱한 사람들같으니.


어떤 의도도 지니지 않은 채 그냥 태어
세상이 내뱉는 말, 던지는 시선의 폭력에 시달리다 독일로 이민 간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에서 겪은 일들은 매우 야만적인 것이었다고.
자, 이건 한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독일은 천국이냐고? 물론 아니다. 그러나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이 지구 어디엔가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한 걸음 만큼이라도 더 나아져야 할 것 아닌가. 진보해야할 것 아닌가.

박민규는 ‘美醜(미추)’의 이데올로기가 일으키는 도저한 부조리에 대해 만족스런 성찰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모범 답안은 잊지도 않거니와 결국 세상의 매듭을 푸는 것은 시간 일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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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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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떠나신 커트 선생.
커트 러셀도 아니고
커트 코베인도 아니고
커트라인(?)도 아닌
그 이름도 빛나는 커트 보네거트 선생.

말로써 의사소통을 할 때 쓰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 일 터.
속삭일 수도 있고, 꾸짖을 수도 있고,
읊조릴 수도 있고, 웅변할 수도 있으니.

'나라 없는 사람'의 메시지는 마치 촘스키 선생의 그것과 매우 닮았다.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이 조국을 꾸짖는 이야기인 것이 공통점이라면
하나가 고급스런 다큐멘터리이고, 다른 하나가 코메디인 것이 다른 점. 

그는 인류를 사랑하고 측은해하며, 지구를 사랑하고 동시에 딱히 여긴다.
자유를 지향하고 정의를 따르며 무엇보다도 유머를 실천하고 사랑하신다.  


세상은 변해야 하고 변할 것이다.
나도 내가 누리는 혜택만큼 역할을 해야겠지.
그러함에 있어 나의 역할 모델은 커트 선생.
이름하야
'유머로 세상 바루기'
 

오늘 문득, 떠나신 그를 위해 묵념.
'선생의 뜻을 받들어
 저의 유머 감각 일신우일신 하겠으나
 아직 갈길이 머니 굽어보소서'


'기독교'라는 말이 사악하지 않다면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스페인 종교재판을 지시하지 않았던 것과 마친가지로 사회주의도 요제프 스탈린과 그의 비밀경찰을 찬양하고 교회를 박살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 기독교와 사회주의는 똑같이,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어느 누구도 굶주려서는 안 된다는 명제를 실현하고자 한다.

 

독재자들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들이댄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그 말을 했던 1844년 당시, 아편과 아편 추출물은 누구나 복용할 수 있는 유일한 진통제였다. 마르크스 자신도 아편을 복용한 적이 있다.

 

우리는 중독 사실을 부인하는 중증의 화석연료(석유) 중독자다. 그리고 금단 현상을 코앞에 둔 많은 중독자처럼 우리 지도자들은 남아 있는 소량의 약물을 긁어모으기 위해 폭력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부부싸움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대개 돈이나 권력이나 섹스나 자녀 양육 같은 것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한다. 사실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만으론 사람이 너무 모자라!"   - 그는 대가족 예찬론자이다

 

사람들은 나를 러다이트라 부른다. 마음에 쏙 드는 말이다. - 선생님 브라보

 

빌 게이츠는 "가만히 앉아서 컴퓨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지켜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변해야 하는 쪽은 빌어먹을 컴퓨터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다. - 선생님 나이스

 

수소폭탄과 제리 스프링어 쇼는 정말 혐오스럽다.

 

한 남자가 익명으로 편지를 보냈다.

"만일 어떤 남자가 주머니에 총을 감추고 당신을 위협하고 있는데 당신이 보기에 그가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것 같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라크가 우리를 위협할 뿐 아니라 전세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어떻게 아무런 위험이 없는 듯 그냥 앉아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알카에다와 9.11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이라크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그냥 이대로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떨면서 기다려야 할까요?"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제발 부탁하건대, 엽총을 들고 거리로 나가시오. 12구경 2연발총이면 딱 좋을 거요. 거기 당신 동네에서 경찰은 제외하고 무장했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머리를 날려버리시오." - 선생님 천재!!

 

아름다운 지구여. 우리는 그대를 구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 속악하고 게을렀도다. - 묵념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사람들에게 웃음으로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 유머는 아스피인처럼 아픔을 달래준다. 앞으로 백 년 후에도 사람들이 계속 웃는다면 아주 기쁠 것 같다. - 따르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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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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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은 모욕을 동반하지만 않으면 오랜 기간이라도 불평 없이 견딜 수 있다. 병사나 탐험가들이 그런 예다.

어머니가 딸에게 대답한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뿐이란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다수는 착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므로, 친절보다는 엄격함에 의지해야 한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적 가치를 녹여 교환가치를 만들어 냈다. 

노동자는 고통을 느낀다. 

우선 분명한 점은 삶이 '비평이 필요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어떤 것에 계속 눈이 가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것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을 자꾸 보게 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이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임과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이야기를 나눌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 들끓는다.

이 세상에서는 외로움이냐 천박함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쇼펜하우어의 말 인용).

불안은 야망의 하녀다.

 
알랭 드 보통의 연애 소설은 최고다.
소설 이외의 책은 이것이 처음이다.
뭐 나쁘지 않다(최고는 아니란 얘기다)
그는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의 총체를 심리학과 경제학과 그의 전공인 철학 이론들을 버무려, 불안을 정의하고 원인을 진단하고 해법을 처방한다.
(특유의 유머를 때때로 섞는 것도 잊지 않았고)
그래 나쁘지 않다. 시도는 괜찮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 빌어먹을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이들에겐 상식 수준일 뿐이고
이 빌어먹을 사회를 (도대체 어쩌자고) 그냥 두고 싶은 이들은 설득하기엔 매가리가 없다.
(나도 잘 안다 그들의 귓구녁을 여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그에 앞서 그런 편가르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에 앞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자격 결핍인지)
또 그러나, 이 책 한 권이 이문열의 삼국지 한 질에 비하면 얼마나 소중한가.
(비교 자체가 알랭드보통에겐 실례지만)
적어도 이 책은 이문열이 그랬듯이 처절한 자본쟁탈전이 벌어지는 이 지구에서 (필론의) 돼지처럼 굴진 않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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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코레아니쿠스 - 미학자 진중권의 한국인 낯설게 읽기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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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성은 이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 이론의 반성 없이 습관으로 존재한다.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는데도 그저 익숙하기 때문에 집요하게 존속하는 폭력들이 있다. 그것을 없애려면 우리 주위의 익숙한 모든 것들을 한 번쯤 낯설게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왜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가" 어느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몰라서 묻는가? 거대한 것은 우리에게 분노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뭔가에 가로막힌 물이 제 갈 길을 찾아 우회하듯이 분노의 흐름도 도전을 허용하지 않는 거대한 것을 피해 사소한 곳으로 흐를 수밖에.

평균적 한국인은 박정희가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이다(책 속의 맥락을 통해 이해 가능, 오해 없으시길-블로거 주)

종교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과학은 의심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종교와 과학의 차이이자 중세와 근대의 차이다.

자신이 먹고사는 것을 정치 지도자의 덕으로 돌리는 봉건적 어법이 존재하는 곳은 남한과 북한뿐이다. 남한은 박정희 덕, 북한은 김일성 덕. 남들 다 제 덕에 먹고살 때, 남북의 인민들은 여전히 왕의 은덕으로 살아간다. 

카리스마를 열망하는 것은 한국에서 '자율적 주체'라는 근대의 신체 프로젝트가 미완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인이 돼서도 판단과 행위의 자율성에 도달하지 못한 미성숙한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정신을 대신하여 판단해주고, 자신의 신체에 명령을 내려줄 카리스마를 요구하게 된다. 

실제로 한국에서 논쟁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정서적'이며, 판단은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감정이입적'이다.  ...... 토론을 할 때 사안의 논리적 해결보다는 인격의 명예를 건 승패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 어떤 이가 주장하는 논리보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의 솜씨에 더 관심이 많다. ...... 토론보다 내기를 좋아한다.

진중권 그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꼬이고 어딘가 막나가는 데가 있지만
'어찌 아니 그럴 수 있으랴' 이 꼬이고 막나가는 땅에서...
꼬인 꽈배기를 풀려면 반대로 꼬아야 하고
막나가는 무언가를 막으려면 반대 방향으로 막나가야 하는 법.

나 스스로도 진중권 씨가 이따금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 정도로도 꿈쩍 않는 인간들이 수두룩하니...
그는 계속 그리하여야 한다.
이따금 '오버'하지만 늘 옳았으니까.

여기저기서 부당한 욕지거리를 듣고 심지어는 폭행, 협박도 당하는 터여서
'계속 애써 달라'고 말씀 드리기 참으로 면목없지만
그의 '독설'과 '추상같은 글쓰기'가 간절히 필요하다, 한국의 현재는.

그에 비하면 나는 지나치게 얌전하여서 지나치게 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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