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 전쟁을 배경으로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라는 소설을 썼다.그리고 2차 대전 당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발발한 독소 전쟁을 배경으로 바실리 그로스만은 2권의 소설을 집필한다.1부가 Stalingrad 2부가 Life and fate.이어 지는 내용으로 1부가 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부터 42년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개시되는 시점까지를 그린다면 2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진행 중인 9월부터 다음 해 2월 독일 제 6군 원수 파울루스가 항복하는 시점까지를 다루고 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를 모방한 소설이 아닌가 할 수 있겠지만(실제로 한 일가족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톨스토이는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한세대가 지난 후 사람이지만 그로스만은 2차 대전 당시의 주요전투,즉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그리고 마지막 베를린 전투까지 모두 참전한 종군기자라는 점이 아닌가 싶다.그는 주요 전투뿐만 아니라 트레블링카를 비롯한 독일의 절멸 수용소를 처음 발견해서 알린 사람으로 이런 그가 쓴 소설은 당연히 전쟁과 평화와는 다른 차원의 목소리를 가진다.
일단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지만 실제로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시공간은 훨씬 길고 넓으며 당시 독일과 소련 정권을 바라보는 그의 통찰력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정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회상과 대화를 통해 1930년대 우크라이나의 대기근,39~41년까지 스탈린의 대숙청, 소련의 강제수용소인 굴라그, 독일의 포로 수용소, 유대인 가스실 등 그가 다루는 영역은 체제와 시간을 넘나들며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심지어 충실한 공산당원이었슴에도 혹은 뛰어난 과학자였슴에도 누군가의 밀고로 과거의 모든 삶의 궤적이 추적당하고 그 과정에서 그의 진정성이 의심 받으며 결국 인간으로서 가진 존엄과 명예가 파괴되거나 혹은 스탈린과의 짧은 전화 한 통으로 모든 상황이 역전되는 모습은 개인이 우상숭배의 대상이 된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과 심리를 낯낯이 고발한다.( 전쟁 직후 1946년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이 소련을 방문해 쓴 여행기에는 소련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를 혼란스럽게 여기고 오히려 1인 독재를 우수하게 보는 듯한 심리가 그려지는데 이런 묘사가 지나치게 이분법 적이지 않나 했던 내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작품의 내용은 샤포시니코프라는 일가족을 중심으로 이들과 관련된 인물들을 통해 당시 다양한 소련의 면모를 그리고 있다. 가족 일원 중 누군가는 유대인 가스실에서 학살 당하고 전투 중 사망하거나 볼가강을 건너는 도중 익사하며 반 체제적이라는 이유로 심문을 받고 굴라그로 끌려가기도 하는 등 가족이 해체 되어 가는데 이 과정에서 파시즘과 공산주의 양 체제 모두를 객관적인 시선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심지어 스탈린까지도 이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늘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보다 착취하고 수탈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심지어 모두가 평등하다는 구호를 내건 사회주의 혁명 아래에서도 그런 모습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 조지 오웰은 동물 농장에서 스탈린 독재를 풍자해서 비판하지만 그로스만은 풍자가 아닌 있는 그대로 당시 소련의 실상을 낯낯이 고발한다.그리고 이런 내용 때문인지 이 책의 원고는 61년당시 KGB에 의해 압수되고 앞으로 200년은 출판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그리고 작가 사후 20년이 지나 1980년에 서방측으로 마이크로 필름으로 촬영된 원고가 밀반출되는데 성공,어렵게 출판된다.그리고 이 책은 작가의 말대로 20세기의 전쟁과 평화라는 평을 들으며 20세기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스탈린 치하 소련의 실상을 가장 잘 그린 소설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나아가 나치즘과 공산주의 사이에서 학살 당하는 사람들(국민들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이유는 이 지역-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3국 러시아 등-이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실상 무인지대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그런 참혹함 속에서도 존엄을 지키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작가 그로스만의 어머니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군 점령지에서 독일군에게 학살당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 그로스만은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한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그래서일까?번역가 로번트 챈들러는 그로스만이 이 소설을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한 것 같다고 말한다.그래서 이 책의 출판을 막는 것은 자신의 자유를 뺏는 것과 같다고 호소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의 백미 중 하나는 학살 당하기 직전 수용소에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20페이지가 안되는 이 편지가 영화 쉰들러 리스트보다 훨씬 강렬하게 다가왔다.그 중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When you were a child, you used to run to me for protection. Now, in moments of weakness, I want to hide my head on your knees; I want you to be strong and wise; I want you to protect and defend me. I`m not always strong in spirit, Vitya-I can be weak too. I often think about suicide, but something holds me back- some weakness, or strength, or irrational hope.[....] I`ve closed my eyes and imagined that you were shielding me, my dearest, from the horror that is approaching. And then I`ve remembered what is happening here and felt glad that you were apart from me- and that this terrible fate will pass you by!
[...]Remember that your mother`s love is always with you, in grief and in happiness,no one has the strength to destroy it.
(네가 어렸을때 넌 내게 보호해 달라고 달려오곤 했었다. 이제 약해진 이 시점에 난 네 무릎에 머리를 숨기고 싶단다. 난 네가 강하고 현명하길 원한다. 난 네가 나를 보호해주기를 원한단다. 내가 언제나 정신적으로 강하지는 못하단다. 나 또한 약해질 수 있단다. 난 종종 자살을 생각하지만 무언가가 나를 막는단다. 나약함 혹은 강인함 아니면 근거없는 희망이.[...]난 눈을 감고 다가오는 공포로부터 네가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상상해 왔단다. 그리고 나서 여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닫고는 네가 떨어져 있어서 이 끔찍한 운명이 너를 비켜간다는 사실에 안도한단다.[...] 이 엄마의 사랑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너와 함께 함을, 그리고 누구도 나의 사랑을 파괴할 수 없다는 걸 기억해라.)
*2013년 작가 사후 반세기가 지나 KGB는 작가의 친필 원고를 공개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