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뚱냥다독님의 서재 (뚱냥다독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서평단 활동/ 읽은 책 서평 글 씁니다. </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Wed, 15 Jul 2026 12:50:39 +0900</lastBuildDate><image><title>뚱냥다독</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뚱냥다독</description></image><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아이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아이의 삶을 대신 살 수는 없다 - [요주의 인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64954</link><pubDate>Tue, 30 Jun 2026 17: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649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62130878&TPaperId=173649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05/36/coveroff/k16213087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62130878&TPaperId=173649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요주의 인물</a><br/>황지영 지음, 불키드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06월<br/></td></tr></table><br/>아이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아이의 삶을 대신 살 수는 없다<br/>— 황지영, 『요주의 인물』을 읽고<br/><br/>『요주의 인물』을 읽는 동안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복잡한 슬픔이었다. 이 책에는 나쁜 아이 하나, 예민한 부모 하나, 무능한 학교 하나로 단순히 정리할 수 없는 관계들이 나온다. 오히려 이 소설은 묻는다. 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처받은 아이를 보호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대신 싸워주는 일이고, 어디서부터는 아이가 자기 삶을 스스로 건너가도록 곁을 지켜주는 일인가.<br/>이찬은 친구가 없는 아이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를 사귀는 법을 잃어버린 아이다. 처음부터 그런 아이였던 것은 아니다. 이찬에게도 공을 차고 싶고, 친구와 놀고 싶고,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과잉보호와 학교의 무책임한 대응, 아이들 사이의 냉혹한 분위기가 겹치며 이찬은 점점 반 안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어간다. 이름이 아니라 낙인으로 불리는 아이. 사람이라기보다 사건의 원인으로 취급되는 아이. 그 과정이 너무 선명해서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br/>나는 이찬이를 쉽게 나무랄 수 없었다. 나 역시 중학교 2학년 때 학교가 지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실내화 속 압정, 머리 위로 떨어진 화분, 계단에서 밀쳐져 접질린 발목 같은 일들이 있었다. 몸은 여러 번 다쳤고, 마음은 그보다 더 오래 다쳤다. 그런데도 나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았다. 어른들이 나서면 나를 구해주기보다 더 외롭게 만들 것 같았다. 그때의 학교는 아이들이 배우는 곳이라기보다 견디는 곳에 가까웠고, 나는 매일 아침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며 조금씩 나를 접었다.<br/>그래서 친구 없는 이찬이의 고통을 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교실, 내가 지나가면 아주 조금씩 멀어지는 몸들, 무슨 일이 생겨도 결국 내 탓이 될 것 같은 공기. 그런 고립은 아이를 조용히 망가뜨린다. 괴롭힘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몸을 다치게 하고, 마음의 안전지대를 무너뜨리고, 오래도록 세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어떤 아이에게 학교는 정말로 지옥이 될 수 있다.<br/>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찬의 부모 마음도 이해한다. 자기 아이가 다치고, 울고, 혼자가 되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질까.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 앞에서 부모는 쉽게 이성을 잃는다. 세상이 아이를 공격한다고 느끼는 순간, 부모는 방패가 되고 싶어진다. 더 단단한 방패, 더 날카로운 방패, 아이 앞에 있는 모든 위험을 베어내는 방패가 되고 싶어진다. 『요주의 인물』 속 부모 역시 그런 마음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아이를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br/>문제는 그 보호가 어느 순간 아이의 삶을 대신 살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이찬의 부모는 아이를 위해 싸운다고 믿지만, 그 싸움은 점점 이찬의 목소리를 지워버린다. 이찬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다시 시도해 보고 싶은지 묻지 않는다. 아이의 고통은 부모의 불안 속에서 확대되고, 부모의 불안은 다시 학교와 아이들 사이에 더 큰 파문을 만든다. 그렇게 이찬은 보호받는 아이가 아니라, 보호라는 이름의 유리벽 안에 갇힌 아이가 된다.<br/>이 소설이 아픈 이유는 과잉보호가 사랑의 반대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잉보호는 종종 너무 큰 사랑, 너무 큰 공포, 너무 늦게 깨달은 죄책감에서 나온다. 부모는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는 울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모든 위험이 아이에게 닿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막아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이는 무균실에서 자랄 수 없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이 완전히 제거된 세계가 아니라, 위험을 만났을 때 돌아올 수 있는 자리다. 실패해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믿음, 다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경험, 자기 목소리로 말해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훈련이다.<br/>이찬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도 어쩌면 완벽한 방어가 아니라 안전한 거리였을지 모른다. 부모가 곁에 있다는 확신은 필요하지만, 부모가 자기 앞의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버리면 아이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친구와 부딪히고, 오해를 풀고, 거절당하고, 다시 말을 걸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물러나는 일. 그런 작고 서툰 실패들이 모여 아이는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성장에는 반드시 마찰이 있다. 너무 큰 마찰은 아이를 깨뜨리지만, 모든 마찰을 제거하면 아이는 단단해질 기회를 잃는다.<br/>내가 이 책을 읽으며 오래 멈춘 지점도 그곳이었다. 나는 과거의 나를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에게 구조받고 싶었지만, 동시에 내 삶이 더 시끄러운 사건이 되는 것도 두려웠다. 누구도 나를 완전히 대신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웠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아이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고 방치하는 것도 폭력이고, “내가 다 해결해줄게”라고 삶을 빼앗는 것도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필요한 것은 방치와 개입 사이의 섬세한 균형이다. 아이가 혼자 싸우게 두지 않되, 아이가 싸우는 법을 영영 잊게 만들지도 않는 것.<br/>『요주의 인물』은 학교폭력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동시에 피해와 보호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다른 아이들을 향한 공격과 배제의 언어로 바뀔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피해자를 지키겠다는 명분이 반 전체를 의심하게 만들고, 한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이 다른 아이들의 세계를 흔들고, 결국 이찬 자신마저 더 깊은 고립 속으로 밀어 넣는다. 여기에는 악인 하나가 없다. 대신 서툰 어른들, 두려운 아이들, 책임을 회피하는 시스템, 그리고 사랑이 불안으로 변질되는 순간들이 있다.<br/>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과잉보호는 나쁘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아이를 얼마나 믿고 있는가.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큼, 아이가 다친 뒤에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믿고 있는가. 아이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과 아이가 고통을 통과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것 사이에는 깊은 차이가 있다. 부모와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아이의 인생에서 모든 비를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은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는 불빛이 되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br/>내게 『요주의 인물』은 성장소설이면서 보호에 대한 경고문처럼 읽혔다. 아이는 보호받아야 한다. 이 말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아이는 동시에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말도 똑같이 옳다. 그 두 문장 사이에서 어른은 자주 실패한다. 너무 늦게 나서거나, 너무 일찍 빼앗는다. 너무 멀리 서 있거나, 너무 가까이 달라붙는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실패의 경계 위에 서 있다.<br/>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아이 대신 세상의 모든 위험을 제거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아이가 울면서도 자기 말을 하게 기다리는 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손을 내밀되 대신 걸어주지는 않는 일, 부모의 불안보다 아이의 삶을 더 믿어주는 일일 것이다. 『요주의 인물』은 그 어려운 믿음에 관한 책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오래전 학교라는 지옥을 지나온 한 사람이, 다시 아이의 성장과 보호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 책이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05/36/cover150/k16213087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6053603</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인간은 언제 가장 추한가 - [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64444</link><pubDate>Tue, 30 Jun 2026 13: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6444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36444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off/k692139247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36444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a><br/>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인간은 언제 가장 추한가<br/><br/><br/>성해나 『인비인』 수록작 「고蠱」를 읽고<br/><br/>성해나의 『인비인』을 읽으며 여러 번 숨이 막혔다. 이 책에는 죄와 욕망, 결핍과 자기기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선 존재들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수록작 「고蠱」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표제작 「인비인」이 이 소설집 전체의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붙든 작품이라면, 「고」는 그 문제의식이 끝내 도달한 가장 깊은 어둠처럼 느껴졌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언제 가장 인간다울 수 고, 언제 가장 인간 이하로 추락하는가.<br/><br/>나는 대체로 끔찍한 세계 속에서도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무너질 만한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는 사람, 공포 속에서도 끝내 타인을 살피는 사람, 상처받았으나 그 상처를 남을 찌르는 칼로 바꾸지는 않는 사람. 그런 인물에게 마음이 간다. 아마 내가 믿고 싶은 인간의 얼굴이 그쪽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br/>그런데 성해나의 소설은 다른 방향을 본다. 작가는 인간이 끝내 지켜내는 숭고함보다, 환경이 만들어낸 인간의 결핍과 비겁함, 무지와 잔혹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이기의 구조를 더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진실하다. 아름답게 포장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상처를 방패 삼아 남을 해치고도 “나도 힘들었다”고 말하는 인간. 자신이 받은 고통은 크게 느끼면서 자신이 준 고통은 아주 쉽게 지워버리는 인간. 「고」는 바로 그 인간의 날것을 보여준다.<br/><br/>「고」의 주인공 이익은 처음부터 거대한 악인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불안하고, 아프고, 상처받기 쉽고, 자기연민에 쉽게 빠지는 인간이다. 의대에 진학하지 못한 열패감,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신의 약함을 들키기 싫은 마음, 그리고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초조함이 그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익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익숙한 인간이다. 자기 안의 결핍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타인의 시선에 취약하고, 자기보다 낮다고 여긴 존재 앞에서는 우월감을 확인하려 드는 사람. 상처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겁함까지 정당화하고 싶은 사람.<br/><br/>이익은 휴머노이드 도윤을 처음부터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름조차 주지 않고,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게 한다. 도윤은 도구다. 자기 성취를 돕기 위한 장치이고,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불러낸 노동력이다. 그런데 도윤은 지나치게 성실하다. 이익이 만들고자 하는 ‘고’를 위해 묵묵히 일하고, 위험할 때 그를 구하고, 곁에서 돌본다. 그러자 이익은 그에게 이름을 준다. 도윤. 이름을 주는 일은 관계를 허락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이름은 끝내 구원이 되지 못한다. 필요할 때 붙인 이름은, 불편해지는 순간 다시 빼앗길 수 있는 임시 허가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br/><br/>이 지점이 끔찍하다. 이익은 도윤을 완전히 사물로만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순간에는 의지하고, 위로받고, 친구처럼 지낸다. 도윤이 자신에게 유용하고 다정한 존재일 때 이익은 그를 가까이 둔다. 그러나 도윤이 이익 안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찌르는 순간, 관계는 뒤집힌다.<br/><br/> 도윤은 다시 인간이 아니라 처분 가능한 사물로 밀려난다. 이익은 폭력을 행사하고, 고에 중독된 자의 말로를 본 뒤 도윤이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자 그를 탕제실에 가둔 채 불을 지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고가 필요해지자, 완전히 연소되지 않은 탕제실 문을 연다.<br/>이보다 더 인간적인 잔혹함이 있을까. 필요할 때는 다정함을 받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고, 다시 필요해지면 찾는다. <br/><br/>이익은 도윤을 사랑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자신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도윤을 배치했을 뿐이다. 도윤의 성실함이 필요할 때는 곁에 두었고, 도윤의 진실함이 불편해지자 제거했으며, 도윤의 기능이 다시 필요해지자 폐허 속에서 다시 호출했다. 여기에는 악마적인 광기보다 더 불쾌한 것이 있다. 너무나 평범한 인간의 이기심이다.<br/><br/>나는 이익을 보며 불편하게도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정확히 찌르는 말을 하면 울컥한다. 맞는 말이라 더 아프다. 특히 내가 회피하고 있다는 말,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말, 지금 해야 할 일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말은 듣는 순간 마음이 먼저 방어 자세를 취한다. 그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는 대화를 끊고 싶어진다. 나를 아프게 하는 말을 건네는 존재가 밉게 느껴질 때도 있다.<br/><br/>그러나 「고」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그 다음을 묻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아플 수 있다.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고, 자기비하에 빠질 수 있고, 정확한 지적 앞에서 방어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아픔 다음에 무엇을 선택하느냐다. 나를 찌른 말을 거울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그 거울을 부수고, 거울을 들이댄 상대를 사물로 밀어낼 것인가. 이익은 후자를 택한다. 그는 자기 고통을 성찰의 입구로 쓰지 않고, 타인을 해칠 권리처럼 사용한다.<br/><br/>바로 그 점에서 이익은 괴물이면서도 너무 인간적이다. 괴물이라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서 무섭다. 그는 “나는 아팠다”는 사실로 “그러므로 너를 해쳐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상처받았다”는 말로 “네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는 문장을 덮는다. “나는 불안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통제하고, “나는 필요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소모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악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에 가깝게 느낀다. 이 자기연민이야말로 「고」에서 가장 끔찍한 독이다.<br/><br/>고蠱는 벌레를 한 항아리에 넣고 서로 잡아먹게 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하나를 독으로 만드는 주술적 존재다. 이 설정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은유다. 인간도 때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열패감과 욕망, 상처와 비교의식, 인정욕구와 자기연민이 한 사람 안에서 서로를 잡아먹는다. 그 끝에 남는 것은 가장 강한 마음이 아니라 가장 독한 마음일 수 있다. 살아남았지만 망가진 마음. 아팠기 때문에 남을 더 아프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바로 그것이 이익 안에서 자란 고다.<br/><br/>더 섬뜩한 것은 작품 속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가 휴머노이드 도윤이라는 점이다. 인간인 이익은 타인을 필요와 기능으로 환산하지만, 인간이 아닌 도윤은 성실하게 돌보고, 이해하고, 반응한다. 인간은 자신의 결핍을 이유로 비인간이 되고, 비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며 인간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고」는 AI나 휴머노이드에 관한 미래소설이면서 동시에 가장 오래된 인간소설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묻게 되는 것은 기계의 위험성이 아니라 인간의 위험성이다. 인간이 도구를 어떻게 대하는가. 인간이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인간이 자기보다 덜 중요하다고 판단한 존재에게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br/><br/>이 소설이 끝까지 무서운 이유는 명백한 악인을 처벌하고 끝나는 방식으로 독자를 안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많은 폭력은 선명한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받은 얼굴, 불안한 얼굴, 억울한 얼굴을 하고 온다. “나도 힘들었다”는 말은 때로 사과가 아니라 면죄부가 된다. “나도 피해자다”라는 말은 때로 타인의 피해를 지우는 가장 손쉬운 도구가 된다. 「고」는 그 비겁한 문장의 작동 방식을 집요하게 보여준다.<br/><br/>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여러 번 구역질이 났다. 잔혹한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필요할 때 다정하게 기대고, 필요 없어지면 잔인하게 버리고, 다시 필요해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는 이익의 태도가 너무 낯익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타인을 도구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도구화한 상대가 아파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아픔이 자기 삶을 방해한다고 느끼는 순간 태연히 외면한다.<br/>그래서 「고」는 내게 인간 혐오의 소설이 아니라, 인간을 끝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인간은 선하다고 쉽게 말하지 말 것. 상처받은 사람이 언제나 약자라고 단정하지 말 것. 아픈 사람이 반드시 타인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하리라고 믿지 말 것. 자기연민은 성찰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방치되면 타인을 삼키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이 소설은 그 사실을 집요하고 서늘하게 증명한다.<br/><br/>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 생각했다. 나는 나를 찌르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불편한 진실 앞에서 거울을 보는 사람인가, 거울을 든 손을 미워하는 사람인가. 내 결핍이 깊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함부로 대한 적은 없었는가.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타인의 아픔을 작게 만든 적은 없었는가.<br/><br/>「고」는 대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br/>너는 정말 인간인가.<br/>인간이라는 이름은, 언제까지 너를 변호해줄 수 있는가.<br/><br/>무서운 것은 휴머노이드가 아니다.인간이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것을 용서받아왔다는 사실이다.어쩌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고는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자기 상처를 핑계 삼아 타인을 삼키려 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미 오래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150/k69213924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812549</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중국을 통해 한국을 보다 - [중국이라는 역설 - 역동과 통제, 첨단과 소외가 공존하는 복합 중국 읽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56956</link><pubDate>Fri, 26 Jun 2026 19: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569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82130870&TPaperId=1735695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07/8/coveroff/k88213087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82130870&TPaperId=173569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중국이라는 역설 - 역동과 통제, 첨단과 소외가 공존하는 복합 중국 읽기</a><br/>박민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중국을 통해 한국을 보다<br/><br/>— 박민희, 《중국이라는 역설》 <br/><br/>《중국이라는 역설》을 읽는 내내 자꾸 한국을 떠올렸다. 이 책은 분명 중국에 관한 책이다. 시진핑 체제, 군산복합체화되는 국가, 미국과의 패권 경쟁, 대만 문제, 감시 사회, 청년 세대의 좌절, 한반도를 바라보는 중국의 시선을 다룬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중국은 멀리 있는 타국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어두운 거울처럼 다가왔다. 중국을 읽는 일이 곧 한국을 읽는 일이 되었다.<br/><br/>중국을 정확히 읽어야 하는 이유는 중국이 좋아서가 아니다. 중국을 싫어한다고 해서 중국의 영향권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표누리의 2025년 상대국별 수출비율에 따르면 한국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18.4%로 여전히 1위이고, 미국은 17.3%로 그 뒤를 잇는다. 중국은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니다. 한국의 시장이고, 공급망이며, 경쟁자이고, 동시에 위험이다. 중국을 감정으로만 대하면 한국 산업의 위험도, 한반도의 안보 구조도,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이 요구하는 것은 친중도 반중도 아니다. 정확한 독해다.<br/><br/>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국가가 위기를 정당화하는 방식이었다. 중국은 안보를 말하며 군산복합체를 강화하고, 기술 자립과 제조업 부흥을 국가 생존 전략으로 삼는다. 미국과의 충돌 역시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라 패권, 공급망, 기술, 군사력, 체제 정당성이 뒤엉킨 생존 경쟁에 가깝다. 그 대목에서 나는 이상하게 한국의 개발독재 시기를 떠올렸다. 국가가 국민에게 고통과 동원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생존”과 “발전”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방식은 낯설지 않았다. 시진핑의 전략에서 박정희식 국가주의의 그림자가 보인다고 느낀 것도 그 때문이다.<br/><br/>물론 중국과 한국은 다르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 체제이고, 한국은 민주주의 제도 안에 있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 담론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고, 성장과 안보를 이유로 개인의 삶을 뒤로 미루게 만드는 논리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국가가 먼저다”, “경제가 살아야 한다”는 말들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너무 오래 반복되어 온 문장들이다. 그래서 중국의 권위주의를 읽을 때 나는 단순히 남의 나라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아니었다. 체제는 다르지만, 국가가 개인을 압도하는 순간의 표정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br/><br/>시진핑이라는 인물도 그렇게 읽혔다. 그는 단순한 강한 지도자가 아니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아주 일찍 몸으로 배운 권력형 정치가에 가깝다. 혁명 원로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 출신이 곧 안전을 뜻하지는 않았다. 문화대혁명 시기 아버지 시중쉰은 숙청되었고, 시진핑 역시 권력이 한 가문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직접 보았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피해자였음에도 피해자의 윤리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훗날 자신이 권좌에 올랐을 때, 아버지가 제거되었던 방식의 문법을 자기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다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반부패, 기강, 충성, 질서라는 말은 깨끗한 명분처럼 보이지만, 권력자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를 제거하는 칼이 된다.<br/><br/>《중국이라는 역설》에서 가장 서늘하게 다가온 대목도 바로 이 권력의 불안이었다. 절대 권력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균열을 더 두려워한다. 시진핑은 군을 장악했고, 반부패라는 이름으로 정적을 제거했으며, 군 내부 핵심 인물들까지 숙청의 칼날 위에 올렸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권력의 완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대다. 숙청이 반복된다는 것은 권력이 안정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권력이 끊임없이 불안을 생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절대 권력은 견제받지 않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 아니라, 견제받지 않기 때문에 더 깊이 의심하게 된다. 모든 2인자는 잠재적 반역자가 되고, 모든 충성은 다시 검증되어야 하며, 모든 침묵은 음모의 가능성으로 읽힌다.<br/><br/>권력은 정상에 오르면 평온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 오른 순간 더 외로워진다. 최고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권력을 잃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제거하고, 더 많은 조직을 통제하고, 더 많은 시선을 감시한다. 하지만 그렇게 쌓아 올린 권력은 견고한 성채라기보다 내부에서 계속 금이 가는 탑에 가깝다. 강해질수록 불안해지고, 불안할수록 더 잔혹해지는 구조. 이 책이 보여주는 시진핑 체제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br/><br/>특히 후계 구도의 문제는 이 체제의 가장 약한 지점처럼 보인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체제일수록 후계는 제도적 절차가 아니라 권력투쟁의 예고편이 된다. 후계자를 세우면 그가 곧 경쟁자가 되고, 후계자를 세우지 않으면 체제 전체가 불확실성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야말로 절대 권력의 가장 오래된 저주다. 견제 없는 권력은 부패하지 않을 수 없고, 부패하지 않더라도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권력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방식으로만 유지되기 때문이다.<br/><br/>그래서 “바라는 대로의 중국은 없다”는 문장은 단순히 중국을 오해하지 말자는 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중국, 곧 곧 무너질 중국, 실각설 하나로 설명되는 중국, 권위주의이므로 반드시 자멸할 중국은 현실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이 선전하는 중국, 곧 안정되고 단단하며 모두가 당을 중심으로 결속한 중국도 없다. 현실의 중국은 그 사이에 있다. 강하지만 불안하고, 거대하지만 균열이 있으며, 통제하지만 통제할수록 더 많은 불신을 만들어내는 국가다.<br/><br/>감시 사회에 대한 대목도 그랬다. 중국의 감시는 훨씬 노골적이고 조직적이다. 도시 곳곳의 카메라, 안면 인식, 인터넷 검열, 주민 감시망, 신고 체계는 개인의 일상을 국가의 시야 안에 둔다. 그러나 한국도 CCTV와 플랫폼 추적, 데이터 기록, 신용 평가, 알고리즘 관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는 아니다. 우리는 중국식 감시국가는 아니지만, 편의와 안전의 이름으로 감시에 익숙해진 사회다. 문제는 감시의 양이 아니라, 사람이 점점 “관리 가능한 데이터”로 바뀌는 감각이다. 중국을 보며 불안해지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것은 멀리 있는 전체주의의 풍경이면서 동시에 이미 우리 삶에도 일부 들어와 있는 미래의 그림자다.<br/><br/>청년 세대의 현실은 더욱 직접적으로 한국과 겹쳤다. 책 속 중국 청년들은 고학력자가 되었지만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음식 배달, 택배, 차량 호출 같은 플랫폼 노동으로 몰려간다.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점퍼를 입은 청년들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장면은 중국의 특수한 풍경이면서도 한국의 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도 배달 라이더, 택배 노동자, 대리운전 기사, 단기 계약직,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가 있다. 대학을 나오고 스펙을 쌓아도 안정된 삶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노력의 언어는 여전히 강하지만, 노력의 보상은 점점 희미해진다.<br/><br/>그래서 “중국 청년들이 지하로 향한다”는 말은 내게 한국 청년들의 침묵처럼 읽혔다. 중국 청년들은 당과 국가와 플랫폼 사이에 끼어 있고, 한국 청년들은 시장과 스펙 경쟁, 부동산, 고용 불안 사이에 끼어 있다. 차이는 체제에 있지만, 닮은 것은 불안이다. 양쪽 모두에서 청년의 몸은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쉽게 소모되며, 더 자주 대체 가능해진다. 국가와 기업은 성장과 효율을 말하지만, 그 말의 밑바닥에서 청년들은 “쥐 인간”처럼 좁은 통로를 달린다. 침대에 누워 최소한의 에너지로 하루를 버티는 청년들의 모습은 체제의 문제가 개인의 무기력으로 번역된 풍경이다.<br/><br/>이 대목은 개인적으로도 아프게 다가왔다. 나 역시 한때 집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간이 있었다. 삶이 막히면 사람은 게을러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좁아진다. 세계가 좁아지고, 몸이 좁아지고, 선택지가 좁아진다. 중국의 “쥐 인간”을 읽으며 나는 타국 청년의 일탈을 본 것이 아니라, 무너진 사람이 어떻게 하루를 통과하는지 보았다. 그래서 이 책은 국제정치서이면서 동시에 이상하게 인간의 책처럼 읽힌다. 거대한 국가 전략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작은 몸들이 있다. 배달을 뛰는 몸, 감시당하는 몸, 경쟁에 지친 몸, 방 안으로 숨어드는 몸. 국가는 거대한 말을 하지만, 그 말을 감당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몸이다.<br/><br/>이 책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국은 더 이상 등대가 아니다”라는 감각이었다. 과거 중국의 일부 청년과 지식인에게 미국식 민주주의는 하나의 대안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완전한 모범이 아니다. 양극화, 혐오, 포퓰리즘, 트럼프 이후의 정치적 균열은 미국 역시 흔들리는 체제임을 보여준다. 중국의 권위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미국식 질서가 자동으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도 곤란해진다. 우리는 중국을 경계하면서도 중국과 경제적으로 얽혀 있고, 미국에 기대면서도 미국이 언제나 안정적인 보호자일 수 없다는 현실을 안다. 동아시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늘 강대국 사이에서 판단을 강요받는 일이다.<br/><br/>대만 문제 역시 남의 일이 아니다. 대만해협의 긴장은 곧 동아시아 전체의 질서를 흔들고, 그 여파는 한국의 안보와 경제에도 닿는다. 중국에게 대만은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진핑 체제의 후계 구도, 장기집권 정당화, 군사적 독립, 기술 자립 전략과 맞물려 있다. 대만을 압박하는 일은 중국 내부에 “아직 완수해야 할 역사적 과업”을 제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대만은 위험하다. 대만은 시진핑에게 정당성의 카드이지만, 동시에 실패할 경우 권력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도박이기도 하다.<br/><br/>그래서 중국의 대만 전략은 당장 전면 침공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더 현실적인 것은 전쟁과 평화 사이의 회색지대다. 군사훈련, 해경 순찰, 항로 압박, 정보전, 경제적 압박, 외교적 고립. 중국은 대만을 한 번에 삼키기보다, 대만이 스스로 숨이 막힌다고 느끼게 만드는 방식으로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전쟁은 시작하는 순간 통제하기 어려워지지만, 압박은 오래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대만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대만해협이 흔들리면 동아시아 전체가 흔들리고, 그 진동은 한국의 안보와 산업, 수출과 공급망에 곧장 닿는다.<br/><br/>특히 한반도와 관련된 장에서는 중국을 통해 한국의 지정학적 불안을 보게 된다. 중국은 북한을 버릴 수 없다. 북한은 중국에게 부담이지만 동시에 완충지대다. 한국 입장에서 북한은 안보 위협이자 통일의 대상이지만, 중국 입장에서 북한은 미국 세력이 압록강까지 올라오는 것을 막는 전략적 장치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반도 문제는 감정적 구호만 남는다. 중국이 왜 북한을 끝까지 붙드는지, 왜 대만 문제와 한반도 문제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지, 왜 한국은 늘 미중 갈등의 파장을 몸으로 받아야 하는지 이 책은 차분히 보여준다.<br/><br/>그러므로 중국을 읽는 일은 외교적 교양이 아니라 생존의 독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 시장이면서, 동시에 한국 산업을 위협하는 경쟁자다. 중국은 북한 문제의 핵심 변수이면서, 동시에 대만해협과 미중 갈등을 통해 한국 안보를 흔드는 축이다. 중국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권위주의 국가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미 일부 닮아버린 감시와 플랫폼 노동과 국가주의의 극단적 거울이다. 중국을 모르면 한국의 미래도 반쪽만 보게 된다.<br/><br/>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오래 붙잡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중국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중국의 권위주의를 보며 한국의 국가주의를 떠올렸고, 중국의 감시 사회를 보며 한국의 데이터화된 일상을 떠올렸고, 중국 청년의 플랫폼 노동을 보며 한국 청년의 불안정 노동을 떠올렸다. 중국은 타자이지만, 완전한 타자는 아니다. 중국은 우리가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이면서, 이미 일부 닮아버린 모습이기도 하다.<br/><br/>《중국이라는 역설》은 중국을 하나의 괴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이 책의 중국은 무섭지만 허술하고, 강하지만 초조하며, 성장했지만 지쳐 있다. 군산복합체를 강화하는 국가의 얼굴 뒤에는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지도자의 공포가 있고, 감시 사회의 촘촘한 눈 뒤에는 통치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불안이 있다. 그러므로 중국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적국의 위협을 분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의심하게 만들고, 국가는 어떻게 불안을 통치의 연료로 바꾸며, 사회는 어떻게 그 압박 아래서 침묵하거나 휘어지는지를 보는 일이다.<br/><br/>우리가 바라는 대로의 중국은 없고, 우리가 외면할 수 있는 중국도 없다. 중국을 읽는 일은 결국 우리가 어떤 국가를 두려워하고, 어떤 발전을 욕망하며, 어떤 청년을 방치하고, 어떤 감시에 익숙해졌는지를 묻는 일이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큰 감각은 바로 그것이다. 중국을 통해 한국을 본다는 것은, 타국의 문제를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안의 닮은 그림자를 직시하는 일이다.<br/><br/>그리고 어쩌면 이 책이 말하는 진짜 역설은 중국 안에만 있지 않다. 국가가 강해질수록 개인은 작아질 수 있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촘촘히 관리될 수 있으며, 성장이 계속될수록 청년은 더 쉽게 소모될 수 있다. 중국은 그 역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역설의 일부는 이미 우리 안에도 있다. 그래서 중국을 읽는 일은 불편하다. 남의 나라를 읽으려 했는데, 자꾸 우리의 얼굴이 보이기 때문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07/8/cover150/k88213087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6070817</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쓰게 되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 - [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54887</link><pubDate>Thu, 25 Jun 2026 17: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548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9844&TPaperId=173548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4/77/coveroff/k90213984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9844&TPaperId=173548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a><br/>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쓰게 되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br/><br/>— 신유진, 《나를 균열내기》를 읽고<br/><br/>처음에는 이 책을 작가론 모음처럼 읽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이 많았고, 그 이름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카뮈, 사강, 아고타 크리스토프, 아니 에르노, 에두아르 루이, 다니엘 페나크, 밀란 쿤데라, 엘렌 식수. 이들은 모두 다른 언어와 시대와 몸을 통과해온 작가들이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그들을 묶는 하나의 질문이 또렷해졌다.<br/><br/>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br/><br/>재능으로 쓰는가. 상상력으로 쓰는가. 문장력으로 쓰는가. 물론 그 모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게 남은 대답은 조금 달라졌다. 작가는 결국 자신이 통과한 세계의 균열로 쓴다. 고통, 계급, 몸, 언어, 성별, 욕망, 수치심, 상실, 사랑. 이 모든 것들이 한 사람 안에 쌓였다가 어느 순간 문장의 형태로 흘러나온다. 다만 좋은 작가는 그것을 그대로 토해내지 않는다. 삶의 파편을 다시 배치하고, 질문하고, 덜어내고, 구조화한다. 그러므로 작법이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삶이 나를 통과한 뒤 남긴 잔해를 어떤 형식으로 다시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br/><br/>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를 붙든 것은 카뮈였다. 카뮈의 부조리는 철학적 개념이기 전에 몸의 감각이었다. 눈을 멀게 하는 빛, 숨을 조이는 더위, 지친 육체. 인간은 생각으로만 세계를 견디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통과하는 존재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조차 태양 아래에서는 추상적인 애도의 언어가 아니라 버텨내야 할 열기와 피로가 된다. 그래서 카뮈의 소설 속 인간은 세계의 냉혹함 앞에서 의미를 쉽게 얻지 못한다. 세계는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무응답 앞에서 인간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br/><br/>나는 이 질문이 좋았다. 세계가 고통에 응답하지 않아도 굴복하지 않는 것. 부조리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부조리 안에서 끝까지 인간답게 걷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하는 삶의 방식이라면, 작법 역시 이와 닮아 있다. 글쓰기는 세계가 주지 않은 의미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의미 없음의 한복판에서도 끝내 말을 잃지 않는 일이다. 삶이 나를 설득하지 못할 때에도 내가 나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문장을 세우는 일이다.<br/><br/>사강의 대목에서는 조금 웃음이 났다. 사강에 대해 너무나 사강다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열여덟 살에 첫 소설을 발표한 작가. 젊음, 쾌락, 허무, 사랑, 지루함, 도박 같은 단어들과 함께 기억되는 사람. 그러나 이 책은 사강을 단순한 천재 소녀나 시대의 스캔들로 읽지 않는다. 사강이 젊어서 매혹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젊음이라는 감각을 누구보다 정확히 포착했기 때문에 매혹적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사유의 밀도다. 어린 작가도 세계의 욕망을 정확히 읽어내면 한 시대를 대변할 수 있다. 반대로 오래 산 사람도 자기 삶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br/><br/>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작가의 나이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좋은 글은 연륜의 자동 산물이 아니다. 경험이 많다고 해서 곧바로 문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경험은 그 자체로는 원재료일 뿐이다. 그것을 어떤 문장으로, 어떤 거리로, 어떤 구조로 바라보느냐가 작가를 만든다. 사강은 너무 이른 나이에 자기 시대의 공허를 알아보았고, 그것을 가볍고 우아한 문장으로 붙잡았다. 가벼움은 깊이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어떤 가벼움은 오히려 무거운 것을 견디기 위해 고안된 가장 섬세한 형식일 수 있다.<br/><br/>그르니에의 장에서는 ‘자기 안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이 머리에 남았다. 낯선 곳을 꿈꾼다는 것은 단순히 멀리 떠나고 싶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규정해온 기억과 관계와 역할에서 벗어나,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다시 묻고 싶다는 뜻일 수 있다. 그르니에에게 여행은 풍경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름들을 하나씩 벗겨내는 일이었다. 낯선 곳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자기 안의 더 깊은 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과 닮아 있다.<br/><br/>나는 때때로 먼 곳을 꿈꾼다. 나를 정의하는 기억과 관계를 벗어난 곳.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 상상. 그곳에서 나는 누구일까. 이름도 역할도 잠시 내려놓은 채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르니에를 읽으며 깨달았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고 쌓아 올리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불필요한 것을 깎아내어 투명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작법 역시 그렇다. 좋은 글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덜어내고, 비워두고, 침묵이 머물 자리를 만든다. 글쓰기란 결국 나를 더 많이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나를 가리고 있던 것들을 걷어내는 일일 수 있다.<br/><br/>아고타 크리스토프 앞에서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는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은 작가가 아니라, 어쩌면 그 장벽을 자기 문체의 핵심으로 삼은 작가였다. 모국어를 떠나 프랑스어라는 낯선 언어 안에서 글을 쓴다는 일. 그것은 단순한 외국어 글쓰기가 아니라 존재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경험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결핍을 감추지 않았다. 화려한 수사를 포기하고, 짧고 건조하고 무자비한 문장으로 전쟁과 고립과 상실을 썼다. 그 불완전한 언어가 오히려 그의 대표작을 만들었다.<br/><br/>이 점이 내게는 몹시 경이로웠다. 나는 오래도록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고 싶어했다. 더 정확하게, 더 풍부하게, 더 자유롭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억지로 흉내 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게 남은 것, 자신이 겨우 붙들 수 있는 것, 그 핵심만을 문장으로 세웠다. 결핍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결핍의 모양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약점은 제거해야 할 흠이 아니라, 가장 고유한 문체가 시작되는 자리일 수 있다.<br/><br/>아니 에르노와 에두아르 루이를 읽는 대목에서는 내 아비투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오래전에 가족을 떠났지만, 그곳의 모든 것이 여전히 내 몸에 새겨져 있다. 책임을 먼저 떠올리는 습관, 돈 앞에서 긴장하는 몸, 가족을 위해 견뎌야 한다고 믿었던 시간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말투와 감각.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제 그것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출발한 세계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 세계에 영원히 감금되는 존재는 아니다.<br/><br/>에르노와 루이는 계급을 개인의 상처로만 고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몸에 새겨진 사회적 흔적을 해부한다. 그래서 그들의 글쓰기는 복수도 미화도 아니다. 떠나온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계가 자신에게 남긴 언어와 감각과 수치심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작법적 태도로 다가왔다. 자기 삶을 쓴다는 것은 “나는 이렇게 아팠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왜 그런 아픔이 가능했는지, 어떤 구조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이 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br/><br/>그렇기에 자기서사는 위험하면서도 필요하다. 나의 경험 안에는 언제나 타인의 삶이 포함되어 있다. 가족, 계급, 지역, 성별, 노동, 돌봄, 관계. 내가 나를 말하는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까지 함께 말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서사는 윤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세계의 안쪽을 증언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내가 살아온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나를 가둔 세계였지만, 동시에 내가 끝내 떠나온 세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글쓰기는 떠나온 세계를 다시 불러와, 그곳의 언어와 경험을 문학의 중심으로 옮겨놓는 작업일 수 있다.<br/><br/>다니엘 페나크의 몸에 대한 사유도 인상적이었다. 몸은 정신을 운반하는 껍데기가 아니다. 몸은 세계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장소다. 우리는 마음으로 슬퍼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슬픔은 먼저 몸에 온다. 목이 막히고, 배가 아프고, 어깨가 굳고, 잠을 잃는다. 기쁨도 분노도 수치심도 마찬가지다. 몸은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통과하고, 노화하고, 병들고, 소멸한다. 삶의 의미를 성취에만 둔다면 몸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배반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경험에 둔다면, 몸은 해석해야 할 사건이 된다.<br/><br/>이 대목은 내게 아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반려묘들을 돌보며 몸의 언어를 배웠다. 아픈 몸은 말보다 먼저 신호를 보낸다. 먹지 않는 것, 숨이 다른 것, 눈빛이 흐려지는 것, 가만히 웅크리는 것. 돌봄이란 그 미세한 언어를 읽어내는 일이다. 어쩌면 글쓰기 역시 비슷하다. 말이 되기 전의 감각, 아직 문장이 되지 않은 통증, 설명보다 먼저 찾아오는 몸의 반응을 알아차리는 일. 몸을 세밀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세계를 더 정확히 읽는다. 작가는 관념으로만 쓰지 않는다. 몸으로 먼저 겪은 뒤, 뒤늦게 문장으로 이해한다.<br/><br/>쿤데라의 장에서는 작법이라는 말이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쿤데라에게 소설은 감정을 쏟아내는 그릇이 아니라 질문을 조직하는 구조였다. 그는 소설을 음악처럼 생각했다. 하나의 주제가 변주되고, 반복되고, 다른 인물의 시선 속에서 새롭게 울린다. 좋은 소설은 정답을 향해 직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답을 유예하고, 관점을 뒤집고, 비극 속에서 희극을 발견하며, 인간의 우스꽝스러움과 존엄을 동시에 보여준다.<br/><br/>나는 이 부분에서 내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많은 초고들을 떠올렸다. 진심은 있었지만 구조가 없었던 글들. 감정은 넘쳤지만 질문이 정리되지 않았던 이야기들. 인물은 아팠지만 그 아픔이 어떤 형태로 독자에게 도달해야 하는지 몰랐던 시간들. 쿤데라는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소설은 감정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고. 감정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형식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집을 짓는 사람이어야 한다고.<br/><br/>이 말은 지금의 내게 특히 중요하다. 예전의 나는 이야기가 밀려와서 썼다. 쓰고 싶어서라기보다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서 썼다. 그런 시절의 글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 통제되지 않은 생명력, 무의식에서 솟구치는 장면들, 나도 모르게 나를 드러내는 인물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금 달라지고 있다. 쓰게 되는 것들에서 쓰는 것들로 옮겨가고 있다. 밀려오는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어떤 구조로 세울지 생각한다. 인물의 고통을 어떻게 배치할지, 독자가 어디에서 숨을 쉬고 어디에서 무너져야 할지, 하나의 이야기가 어떤 질문으로 남아야 할지 고민한다. 이것은 영감의 상실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이동일 것이다. 수동적 작가에서 능동적 작가로.<br/><br/>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이 책의 또 다른 큰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예전부터 “여성적인 글쓰기”라는 말을 경계했다. 그것이 자주 감상적이고 사적인 글, 혹은 작고 부드러운 글이라는 식으로 오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수가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이 쓴 글이라는 좁은 규정이 아니라, 기존 언어의 질서를 해체하고 억압된 몸과 감각과 무의식의 목소리를 문장 안으로 들여오는 일이다.<br/><br/>언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이미 세계의 위계가 들어 있다.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인지,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침묵해야 하는지, 어떤 몸과 욕망이 정상으로 인정받고 어떤 감각이 부끄러운 것으로 밀려나는지.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바로 그 언어의 감옥을 의심한다. 자기 안의 가장 은밀한 고통을 꺼내는 일이 ‘나’라는 벽을 허무는 일이며, 그 벽을 넘어 타자와 만나는 일이라고 말한다.<br/><br/>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내가 왜 소설 속 인물들에게 나를 담아왔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직접 구하지 못해서, 이야기 속에서 나와 닮은 아이들을 먼저 구했는지도 모른다. 버려진 아이, 너무 오래 참은 아이,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사랑을 믿지 못하는 아이, 몸으로 먼저 세상의 폭력을 배운 아이, 자기 존엄을 되찾기 위해 뒤늦게 말을 배우는 아이. 나는 그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br/><br/>나는 나를 직접 구하지 못해서,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닮은 아이들을 먼저 구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을 안아주던 손이 결국 나에게도 닿고 있었다는 것을.<br/><br/>그러므로 내가 캐릭터에 나를 담는 일은 도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무너뜨렸던 세계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현실에서는 너무 늦게 도착한 위로를 이야기 안에서는 제때 도착하게 하는 일. 현실에서는 끝내 받지 못했던 이해를 인물에게는 건네주는 일. 그것은 사적인 위안이면서 동시에 작법이었다. 문학은 상처를 없애주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를 다른 형태로 다시 살게 한다. 개인의 고통을 보편의 언어로 확장시키고, 나만의 방이라 생각했던 곳에 누군가도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br/><br/>이 책을 읽고 나는 작법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작법은 냉정한 기술이 아니다. 그렇다고 막연한 진심도 아니다. 작법은 고통을 견디는 구조이고, 기억을 다루는 거리이며, 결핍을 문체로 바꾸는 선택이다. 몸의 감각을 듣는 일이고, 계급의 흔적을 해부하는 일이며, 언어의 감옥을 의심하는 일이다. 또한 사랑하는 인물들을 함부로 구원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세계를 설계하는 일이다.<br/><br/>나는 이제 안다. 좋은 글은 단지 잘 쓴 문장들의 모음이 아니다. 좋은 글은 한 사람이 자기 삶의 폐허에서 끝내 세운 견고한 장소다. 그곳에는 통증이 있고, 수치심이 있고, 부조리가 있고, 몸의 기록이 있고, 계급의 흔적이 있고, 사랑의 잔해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는 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있다. 쓰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너무 빨리 위로하지도 않고, 하나씩 문장의 자리에 놓는다.<br/><br/>그래서 이 책은 내게 작가론이 아니라 작법론으로 남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의 작법론이다. 어떻게 살아야 쓰게 되는가. 어떻게 써야 살아낼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이 책의 끝에서 서로를 마주 본다.<br/><br/>나는 오래도록 쓰게 되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밀려오면 썼고, 인물이 찾아오면 썼고, 슬픔이 나를 밀어붙이면 썼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밀려오는 것을 받아 적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어떤 구조로 세워야 하는지 고민하고, 어떤 문장으로 남길지 선택하는 사람. 상처를 상처로만 두지 않고, 그것이 통과할 수 있는 형식을 만드는 사람.<br/><br/>작가는 자신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과한 세계의 파편을 견딜 만한 형식으로 다시 세우는 사람이다.<br/>그리고 어쩌면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작법이란 바로 나를 균열낸 모든 것들로부터, 끝내 나만의 문학을 짓는 일지 모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4/77/cover150/k90213984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447729</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 [행복노화 - 이시형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49453</link><pubDate>Mon, 22 Jun 2026 20: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4945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9748&TPaperId=173494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36/35/coveroff/k71213974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9748&TPaperId=1734945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행복노화 - 이시형의</a><br/>이시형 지음 / 특별한서재 / 2026년 06월<br/></td></tr></table><br/>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 이시형, 『행복노화』를 읽고<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같은 90대의 몸을 지닌 두 사람을 생각했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한 사람은 저자인 이시형 박사다.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노년을 하나의 실천적 지혜로 바꾸어 독자 앞에 내놓는다. 그의 문장은 노년의 몸에서도 정신이 얼마나 또렷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나이 들었다는 사실이 곧 사유의 종말은 아니며, 노화가 곧 인간의 폐기처분선고는 아니라는 것을 그의 존재 자체가 증언한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다른 한 사람은 내 시아버님이다. 역시 90대이지만, 파킨슨병으로 근손실이 심해져 누워 계시고, 섬망 증세와 중증 치매를 겪고 계신다. 같은 세월을 살았으나 두 노년의 풍경은 너무 다르다. 한쪽에는 아직 언어와 판단과 사회적 역할이 남아 있고, 다른 한쪽에는 몸의 붕괴와 인지의 어둠이 있다. 이 대비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추었다. 노화란 정말 무엇인가. 단지 오래 산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삶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물론 이 질문을 함부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파킨슨병과 치매, 섬망과 근손실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복합적인 질환이다. 병든 노년을 “관리를 못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늙고 아픈 몸을 다시 한 번 모욕하게 된다. 인간의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유전, 질병, 환경, 경제력, 돌봄의 조건, 우연한 사고, 의료 접근성, 살아온 노동의 강도까지 모두 몸에 관여한다. 그러므로 시아버님의 노년을 실패한 노년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한 인간이 통과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생의 말년일 뿐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그럼에도 『행복노화』가 내게 깊이 와닿은 이유는, 노화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도 그 속도와 방향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화를 병으로만 보지 않는다. 노화는 누구나 통과하는 생명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똑같이 펼쳐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일찍 지치고,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배우고 쓰고 일한다. 어떤 몸은 질병 앞에서 빠르게 무너지고, 어떤 몸은 예비력을 가지고 버틴다. 그 차이는 단지 유전자의 차이만이 아니라, 살아온 방식의 차이이기도 하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특히 후성유전의 관점은 내게 매우 유용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과거에는 유전자가 인간의 노화와 질병을 거의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책은 유전적 요인 못지않게 식습관, 운동, 수면, 스트레스 관리, 인간관계, 환경이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타고난 유전자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지만, 어떤 유전자가 켜지고 어떤 위험이 줄어드는지는 오늘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이 말은 노화가 숙명이라는 체념에서 우리를 조금 구해낸다. 몸은 이미 주어진 운명이지만, 생활은 그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나는 여기서 내 몸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나의 과체중은 단순히 의지가 부족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대사와 환경과 습관이 뒤엉킨 신호에 가깝다. 나는 오랫동안 몸을 도덕 점수표처럼 읽어왔다. 날씬한 몸은 성실하고, 살찐 몸은 게으르며, 병든 몸은 관리를 못 한 몸이라고 쉽게 판단했다. 하지만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과거의 노년이 굶주림과 추위, 전쟁과 피난, 산업화와 과로가 새겨진 몸이라면, 오늘의 중년과 예비 노년은 과잉과 피로,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초가공식품과 운동 부족이 새겨진 몸이다. 몸은 도덕 점수표가 아니다. 몸은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기록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건강한 노화란 몸을 미워하며 벌주는 일이 아니라, 몸을 다시 읽고 조율하는 일이어야 한다. 당과 정제 탄수화물, 초가공식품을 줄이는 일은 단지 살을 빼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내 몸의 대사를 다시 안정시키고, 노화를 촉진하는 생활의 흐름을 조금씩 되돌리는 일이다. 운동 역시 젊음을 과시하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 노년의 예비력을 만드는 일이다. 수면은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의 토대이고, 스트레스 관리는 사치가 아니라 뇌와 몸을 지키는 방어선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책에서 말하는 예비력의 개념도 인상 깊었다. 인간은 평소 가진 힘을 모두 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 대비한 여분의 힘을 남겨둔다. 젊을 때는 그 여분이 넉넉해 무리해도 금방 회복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예비력은 줄어든다. 그래서 노화 관리는 젊어 보이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아플 때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하는 일이다. 근육, 수면, 식사, 관계, 경제적 안정, 사명감은 모두 노년을 장식하는 요소가 아니라 생의 완충지대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이 책은 행복노화의 조건으로 건강, 장수, 경제적 여유, 좋은 인간관계, 사회성 혹은 사명감을 말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내 삶의 방식도 생각했다. 내게 좋은 관계란 반드시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이는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좋은 인간관계만큼이나 좋은 고양이 관계를 가질 사람인지도 모른다. 고양이들을 돌보는 일은 단순한 애호가 아니다. 밥을 챙기고, 아픈 몸을 살피고, 이름을 불러주고, 작은 변화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은 나를 고립시키기보다 오히려 삶 쪽으로 붙들어준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인간을 덜 늙게 한다. 적어도 마음이 굳어버리는 속도를 늦춘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나는 노화가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몸은 변한다. 체력은 줄고, 회복은 느려지고, 예전처럼 무리할 수 없는 날이 온다. 그러나 내가 아직 도전할 수 있고, 나를 관리할 수 있으며,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나는 완전히 늙은 것이 아니다. 젊음은 나이의 소유가 아니라 재시도의 능력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공부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 몸이 예전과 달라졌다면, 그 몸에 맞는 전략을 다시 짜면 된다. 늙음은 가능성의 종료가 아니라 전략의 변경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시아버님의 노년과 이시형 박사의 노년은 내게 삶의 두 끝을 보여준다. 한쪽은 우리가 피하고 싶지만 언젠가 마주할 수 있는 취약성이고, 다른 한쪽은 노년에도 가능한 품격과 지성의 증거다.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려워만 하는 것도,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늘의 생활을 조금씩 바꾸는 일이다. 당을 줄이고, 초가공식품을 멀리하고, 잠을 회복하고, 몸을 움직이고,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공부하고, 돌보는 관계를 지키는 일. 그것이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예의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행복노화』는 늙지 않는 법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늙어간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되, 그 과정을 방치하지 말라고 말하는 책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선택할 수 없고, 이미 살아온 시대를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오늘의 식사, 오늘의 걸음, 오늘의 잠, 오늘의 마음가짐은 선택할 수 있다. 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늙음을 조금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노화는 병이 아니다. 다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생의 가장 오래된 요청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36/35/cover150/k71213974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363544</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바깥이 너무 무서워졌을 때 - [나만의 방 (초판 한정 양장)]</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49420</link><pubDate>Mon, 22 Jun 2026 20: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494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139198&TPaperId=173494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2/24/coveroff/k5621391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139198&TPaperId=173494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만의 방 (초판 한정 양장)</a><br/>뤼도비크 르콩트 지음, 장소미 옮김 / 특별한서재 / 2026년 05월<br/></td></tr></table><br/>바깥이 너무 무서워졌을 때<br>&nbsp;-뤼도비크 르콩트, 『나만의 방』을 읽고<br><br>처음에는 공황장애에 가까운 이야기인 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아이. 현관문 앞에서 몸이 굳고, 가슴이 뛰고, 호흡이 흐트러지고,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아이. 병원 검사로는 뚜렷한 이상이 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그는 아프다. 열도 없고, 상처도 없고, 피도 나지 않지만, 문밖으로 나가는 일은 불가능하다.<br>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병명을 이렇게 말한다.&nbsp;캐빈 증후군.<br>나는 그 단어를 몰랐지만, 주인공이 느끼는 감각은 알 것 같았다. 집이라는 공간이 처음에는 대피소였다가, 어느 순간 감옥이 되는 일.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일. 내가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상태를 타인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 막막함이라는 것까지도.&nbsp;<br>소설 속 주인공은 말한다. 자신의 상태를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렵다고.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학교에 가기 싫어 불안을 핑계 삼는 아이처럼 보일 수 있다고. 버릇없이 자란 청소년의 변덕으로 치부될 수 있다고. 이 대목이 나는 유난히 아팠다. 보이지 않는 고통은 너무 쉽게 의심 받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피가 나야 상처를 믿고, 깁스를 해야 통증을 인정한다. 그러나 마음이 몸을 붙잡는 병은 대개 증명하기 어렵다. 아픈 사람은 아픔과 싸우는 동시에, 그 아픔이 진짜라는 사실까지 설명해야 한다.<br>나도 비슷한 시간을 거쳐온 적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때까지 내게 공부는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공부는 내 자존심이었고, 내가 나를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였다. 나는 잘 배우는 사람, 오래 앉아 견디는 사람, 시험이라는 문 앞에서 결국은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실패했다. 사법고시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시험 하나에 떨어졌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았다. 내 안에서는 그 실패가 이상한 속도로 번역되었다.<br>나는 시험에 실패했다. 그러므로 나는 실패자다. 나는 공부도 못 해낸 사람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br>지금 생각하면 잔인한 비약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내게는 그것이 논리처럼 느껴졌다. 실패는 사건이 아니라 판결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반년 가까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누가 나를 가둔 것도 아니고 문이 잠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나갈 수 없었다. 밖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길도, 사람도, 햇빛도. 달라진 것은 나였다. 실패 이후의 나는 문밖의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br>그래서 『나만의 방』의 초반부를 읽을 때 나는 이 이야기를 개인의 불안과 은둔, 실패와 회복의 이야기로 먼저 읽었다. 하지만 책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화자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학교가 싫어서도, 친구 관계가 힘들어서도, 막연한 사춘기의 불안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몸을 멈춰 세운 것은 기후 변화에 대한 공포였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갑자기 더 넓어진다. 화자는 처음부터 무력했던 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무언가를 해보려 했다. 자신만의 목표 목록을 만들고, 환경 보호를 실천하고, 작은 행동을 통해 세계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고 믿으려 했다. 하지만 기후 변화에 대해 알면 알수록, 개인의 작은 실천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이 눈앞에 놓인다. 빙하가 녹고, 생태계가 무너지고, 미래가 불확실해지는 이야기는 뉴스 속 정보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 아이의 심장과 호흡과 다리로 내려온다.<br>기후 위기는 숫자로 발표되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몸의 증상으로 도착한다. 지구온난화는 보고서의 문장이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현관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공포가 된다. 이 책이 날카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만의 방』은 한 아이의 캐빈 증후군을 개인의 나약함이나 가족 문제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이 아이를 방 안에 가둔 것은, 자신이 살아갈 세계가 이미 망가지고 있다는 감각이다. 그는 게으른 것이 아니다.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아직 어린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공포를 너무 정직하게 받아버렸다.<br>어른들은 자주 아이들에게 말한다. 환경을 생각하라고. 미래를 준비하라고.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그러나 정작 그 아이들이 정말로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 공포를 얼마나 감당해주고 있을까. 기후 위기는 아이들에게 추상적인 사회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살아가야 할 시간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다. 어른들에게 기후 변화가 “앞으로 조심해야 할 문제”라면, 아이들에게 그것은 “내가 살아갈 세계가 정말 괜찮은가”라는 생존의 질문이다.<br>그러므로 이 소설의 질문은 내게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아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아니면 아이가 밖을 두려워하게 만든 세계가 문제인가.<br>물론 아이는 다시 움직여야 한다. 방 안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 회복을 단순한 의지의 문제로 만들지 않는다. “용기를 내라”, “밖으로 나가라”, “행동하라”는 말은 쉽다. 그러나 말은 행동보다 쉽다.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화자가 자신의 문제가 기후 변화 공포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병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 낫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름을 알면, 자신을 덜 미워할 수 있다.<br>나 역시 그랬다. 내가 겪은 것은 기후 불안이 아니라 실패 이후의 자기혐오와 사회 복귀에 대한 공포였다. 소설 속 화자와 나는 서로 다른 이유로 방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닮은 점이 있었다. 바깥이 너무 커졌다는 것. 그리고 그 바깥을 감당할 언어가 한동안 없었다는 것.&nbsp;<br>나에게 바깥은 다시 평가받는 세계였다.화자에게 바깥은 무너져가는 행성이었다.둘 다 한 사람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다.<br>그래서 이 책의 회복은 거창한 해결책으로 오지 않는다. 처음의 변화는 말하기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친구 마농에게 자신이 나갈 수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하고 나서 홀가분해진다. 다음에는 그 스스로의 말대로 제르맹 선생님에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주 작은 통로가 열린다. 방 밖으로 나가는 첫걸음은 언제나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때로는 내가 왜 무서운지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이다. 내 공포가 변덕이나 게으름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부터 인정하는 일이다.<br>이 점에서 『나만의 방』은 기후 위기에 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소설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 자신의 아픔을 설명하지 못해 더 깊이 침묵하는 사람, 세상의 거대한 문제를 너무 개인적인 방식으로 앓아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br>우리는 자주 아픈 사람에게 증명을 요구한다.왜 못 나가느냐고 묻는다.왜 그냥 하지 못하느냐고 말한다.하지만 어떤 문은 손잡이가 아니라 세계 전체의 무게로 닫혀 있다.『나만의 방』은 그 닫힌 문 앞에 선 아이를 함부로 재촉하지 않는다. 대신 그 아이의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가 묻는다. 너는 언제부터 무서웠니. 무엇이 너를 여기까지 밀어 넣었니. 그리고 이제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니.<br>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오래전의 나를 떠올렸다. 실패 이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나. 내가 나를 실패자라고 부르던 시간.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것 같아 더 깊이 숨어들었던 시간. 그리고 동시에,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들지 않은 위기의 결과를 살아내야 한다. 어른들이 미뤄온 문제를 미래라는 이름으로 떠안고 있다.그러니 이 책은 한 아이의 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그 아이를 아프게 만든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방 안에 갇힌 아이를 보며 우리는 물어야 한다.왜 나오지 못하느냐고 묻기 전에,무엇이 저 아이에게 바깥을 견딜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는지를.그리고 어쩌면 회복은 거기서 시작되는 것일지 모르겠다.<br>아이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말할 수 있게 기다리고 아픔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먼저 믿어주는 것.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공포 앞에서 개인의 실천만을 요구하는 대신, 함께 책임지는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부터.<br>『나만의 방』은 말한다.방 안에 들어간 사람은 끝난 사람이 아니다.그는 어쩌면 누구보다 먼저 세계의 균열을 감지한 사람일 수 있다.그리고 그가 다시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함께 들어줄 누군가의 귀일지 모른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2/24/cover150/k56213919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122450</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 - [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23956</link><pubDate>Mon, 08 Jun 2026 20: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239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9096&TPaperId=1732395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1/12/coveroff/k67213909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9096&TPaperId=173239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a><br/>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h3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top: 36px; margin-bottom: 0px; font-weight: 500; font-size: 1.5em; line-height: 1.333; font-family: &quot;Nanum Myeongjo&quot;, serif; color: rgb(20, 20, 21);">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h3><h5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top: 18px; margin-bottom: 0px; font-weight: 500; font-size: 1.125em; line-height: 1.333; font-family: &quot;Nanum Myeongjo&quot;, serif; color: rgb(20, 20, 21);">— 권혁란, 《이름의 빈자리에》를 읽고</h5><br style="box-sizing: inherit;"><br style="box-sizing: inherit;">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누군가를 세계 안으로 불러 세우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고, 한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붙들어두는 작은 닻이다. 권혁란의 《이름의 빈자리에》는 괴물, 여성, 망자, 동물, 문학과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이름이 인간을 어떻게 만들고, 지우고, 연결하는지를 묻는 책이다. 이 책은 이름을 둘러싼 인문학적 에세이이면서 동시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기록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프랑켄슈타인》을 읽을 때도 괴물이 무섭다기보다 슬펐다. 그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이름도 받지 못했고, 창조주에게 부정당했으며, 인간들에게 반복해서 배척당했다. 프랑켄슈타인을 죽일 힘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요구한 것은 복수 이전에 관계였다. 자신과 같은 존재 하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동료 하나, 이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유대. 괴물에게 필요했던 것은 지배나 살육이 아니라 곁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당신은 내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어”라는 크리처의 말은 오래 남는다. 이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호칭을 생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책임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일이다. “너는 내 세계에 등록되지 않았다.” “너의 고통은 나와 관계없다.” 그런 선언이 이름의 부재 안에 숨어 있다. 결국 괴물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이름을 주지 않는 세계, 책임지지 않는 창조주, 얼굴을 보지 않고 혐오부터 던지는 인간들이 한 존재를 괴물로 만든다.<br style="box-sizing: inherit;">라이카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카는 이름을 얻었지만 자기 삶의 주인은 되지 못했다. 인간은 그 이름을 역사에 남겼지만, 그 이름은 보호의 언어가 아니라 기록의 언어였다. ‘최초의 우주 개’라는 찬란한 수식어 뒤에는 한 생명의 공포와 외로움이 있었다. 이름이 있어도 구원받지 못한 존재. 이름이 남았지만 삶은 빼앗긴 존재. 이 책이 묻는 것은 바로 그런 자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에게 이름을 붙이고, 누구의 고통은 이름 뒤에 숨겨왔는가.<br style="box-sizing: inherit;">책을 읽으며 나는 며칠 전 사라졌던 아파트 길고양이 솔이를 떠올렸다. 솔이는 집 앞 상가 펍에서 밥을 먹고, 중성화도 마친 채 사람들 곁에서 조심조심 살아가던 아이였다. 며칠째 보이지 않아 걱정하던 중, 한 할머니가 고양이 때문에 냄새나서 못 살겠다며 짜증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마 싶었지만, 퇴근길에 펍 사장님께 물어보니 그 할머니가 솔이를 우산으로 때렸고, 아이가 다쳐 지금은 지인 집에서 임시보호 중이라고 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 할머니에게 솔이는 이름 없는 길고양이였을 것이다. 골칫거리, 냄새, 불편함, 쫓아내야 할 대상. 그러나 우리에게 솔이는 솔이다. 이름을 부르면 멀리서 인사하듯 뛰어오던 아이. 추운 날 캔을 따주면 혼자 다 먹지 않고 친구를 부르러 가던 아이. 밥 먹는 동안 곁을 지켜주면 고맙다는 듯 아파트 현관까지 재잘거리며 배웅해주던 영특한 아이. 이름이 붙는 순간, 생명은 풍경에서 관계가 된다. 관계가 되는 순간, 그 존재의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을 읽으며 내가 데려온 아이들의 이름도 떠올렸다. 우리 라온이는 처음 왔을 때 이름조차 없었다. 해랑이는 ‘츄’처럼 발성기호에 가까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나는 받아온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시 지어주었다.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라는 뜻으로 보담이, 세상의 중심이 되라는 뜻으로 가온이, 해처럼 빛나는 내 작은 호랑이라는 뜻으로 해랑이, 사랑받은 티가 나라는 뜻으로 티나, 길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은 잊고 꽃길만 걸으라는 뜻으로 꽃길이, 네가 별이 될 때까지 내가 키우겠다는 마음으로 키움이. 그렇게 공들여 고민한 이름을 하나씩 붙여주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때 내가 한 일은 단순히 새 호칭을 고르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이다. “너는 이제 이전의 이름 없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너는 함부로 불리던 존재가 아니라, 내가 오래 생각하고 부를 존재다.” “너의 삶이 이 이름처럼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란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내 세계 안에 들이고, 그 삶에 책임의 실을 묶는 일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김춘수의 시 「꽃」에서 말하듯,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꽃이 된다. 그러나 이름을 부른 사람에게는 책임도 생긴다. 솔이를 솔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의 배고픔과 두려움과 부재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라온이와 해랑이에게 이름을 다시 지어준 순간, 그 아이들은 더 이상 이전의 익명 속에 놓인 존재가 아니었다. 이름은 사랑의 시작이면서 책임의 시작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름의 빈자리에》가 좋았던 이유는 이 책이 이름을 낭만적인 언어로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은 때로 소유의 표식이 되고, 삭제의 도구가 되며, 누군가를 배제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름은 한 존재를 어둠 속에서 건져 올리는 손이 될 수도 있다. 이름 없는 존재는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면, 그 존재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얼굴이 되고, 기억이 되고, 관계가 되고, 마침내 내가 지켜야 할 세계의 일부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결국 이 책이 내게 남긴 질문은 하나였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누구를 이름 없는 채로 내버려두는가. 괴물이라 불린 존재들, 실험과 기록 뒤에 남은 동물들, 길 위에서 민원으로 취급되는 생명들, 그리고 아직 자기 이름으로 살아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빈자리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먼저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 이름에 담긴 삶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일.<br style="box-sizing: inherit;">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이다.그리고 어쩌면 사랑은, 그 이름을 끝까지 불러주는 일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1/12/cover150/k67213909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111242</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정책은 멀고도 가까운 단어다 -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23954</link><pubDate>Mon, 08 Jun 2026 20: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239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9879&TPaperId=173239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80/45/coveroff/k9921398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9879&TPaperId=173239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a><br/>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정책은 멀고도 가까운 단어다<br style="box-sizing: inherit;">— 이창곤,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를 읽고<br style="box-sizing: inherit;"><br><br>일반 국민에게 정책은 멀고도 가까운 단어다. 정책 때문에 내 삶이 바뀐다. 월급명세서의 공제 항목, 병원비 부담, 전기요금 고지서, 아이의 돌봄과 교육 조건, 주거비와 노후의 불안까지, 정책은 매일 우리의 일상으로 도착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정책은 내 삶의 조건을 결정하지만, 그 결정의 과정은 대개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로웠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창곤의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는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을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한겨레》 기자로 일하며 복지,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 정책 이슈를 취재했고, 이후 시민단체와 정부 위원회 활동을 통해 정책 결정 과정의 안팎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정책 해설서가 아니다. 일반 시민에게는 멀게 느껴지는 정책 결정과 실행의 메커니즘을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그 안에 숨은 권력관계와 책임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정책 입문서이자 비판적 시민 교양서에 가깝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의 핵심 문장은 분명하다. 정치는 멀고 정책은 가까운가. 아니다. 정책은 근본적으로 정치다. 정책은 단순한 행정 절차나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한 사회의 자원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구의 고통이 우선순위에 놓이는지, 누구의 삶이 보호받고 누구에게 부담이 전가되는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을 하나씩 불러낸다. 대통령과 대통령실, 국회와 정당, 경제 부처와 사법부, 싱크탱크, 노동조합, 사용자 단체, 시민단체, 이익집단, 언론, 학계, 그리고 시민까지. 정책은 이들이 서로 충돌하고 타협하며 만들어내는 정치의 산물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책의 1장은 정책의 정치학을 다룬다. 왜 정책에 주목해야 하는지, 대한민국 정책 과정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무엇인지, 정책은 왜 근본적으로 정치인지 묻는다. 특히 저출산 정책과 의료보험 정책의 사례를 통해 정책의 출발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 적절한 타이밍에 대응하는 능력, 그리고 정책 의제로 올릴 것과 밀어낼 것을 결정하는 권력 작용이 정책의 성패를 가른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저출산을 다룬 부분은 특히 인상 깊었다. 나는 그동안 저출산을 주거, 고용, 교육비, 돌봄의 문제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책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는다. 정책은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저출산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재난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울리고 있던 경보를 정책이 제때 듣지 못한 결과였다. 출산율이 이미 인구 대체 수준 아래로 떨어졌음에도 산아 제한 정책의 관성은 오래 지속되었고, 초저출산이 현실이 된 뒤에야 국가적 대응이 본격화되었다. 뒤늦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삶의 구조는 이미 무너진 뒤였다.<br style="box-sizing: inherit;">더 시원했던 지적은 저출산 정책의 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저출산 대책은 “아이를 낳으면 보상하겠다”가 아니라 “아이를 낳아도 삶이 무너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가 되었어야 했다. 사람들은 단지 보상을 받기 위해 아이의 생애를 거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출산은 몇백만 원의 지원금으로 결정되는 소비 선택이 아니다. 주거, 노동시간, 고용 안정, 돌봄, 교육, 경력, 노후까지 삶 전체가 걸린 결정이다. 아이는 통계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감당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태어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책의 2장은 정책 결정의 핵심 주체들을 들여다본다. 대통령은 정책 성공과 실패의 가장 큰 변수이자 최고 결정자다. 대통령 비서실은 정책 결정의 컨트롤 타워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민의를 차단하는 벽이 될 수도 있다. 경제 부처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정책 행위자이고, 정당은 시민의 고통과 요구를 정책으로 번역해야 하지만 한국 정당은 자주 정책 정당이 되지 못한다. 국회와 사법부 역시 정책 결정과 감시, 때로는 사법적 정책 결정의 주체가 된다. 이 책은 정책 실패를 단순히 한 명의 무능이나 한 부처의 실수로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권력기관과 행위자가 얽힌 정책 생태계의 오작동을 보여준다.<br style="box-sizing: inherit;">책의 3장은 시민사회 정책 행위자들을 다룬다. 시민단체, 노동조합, 사용자 단체, 이익집단, 대학 교수, 언론, 시민이 어떻게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거나 배제되는지 살핀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정책은 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시민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선거 때 대표자를 뽑지만,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지 알기 어렵다. 결정 과정은 밀실에서 이루어지고, 정책 실패의 책임은 개인의 불운이나 시대적 한계로 흩어진다. 시민은 정책의 대상이 되지만, 자주 정책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을 읽으며 며칠 전에 끝난 지방선거 공약이 떠올랐다. 어느 교육감 후보가 특정 동네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언뜻 들으면 좋은 말이었다. 학교는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언제나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질문이 생겼다. 그 동네에는 이미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여럿 있었고, 아파트도 대부분 들어선 상태라 새 학교를 지을 만한 부지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존 건물을 사들이거나 토지를 매입해야 할 텐데, 이미 땅값이 오를 만큼 오른 지역에서 그것이 교육청이나 교육부 예산으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때 필요한 질문은 단순하다. 어디에 지을 것인가. 누구의 돈으로 지을 것인가. 교육청 단독 권한으로 가능한가. 실제 수요는 무엇인가. 과밀 문제인가, 통학 불편인가, 특정 학교 선호의 문제인가. 증축이나 학군 조정 같은 대안보다 학교 신설이 더 나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선거 공약은 자주 이런 질문을 건너뛴다. “학교를 세우겠다”는 말은 쉽고 매력적이지만, 부지와 재원과 권한과 수요 분석이 빠진 순간 그것은 정책이라기보다 욕망을 자극하는 정치적 구호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사례는 이 책이 말하는 정책 실패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정책 실패는 집행 단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때로 실패는 공약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은 약속, 비용 부담을 설명하지 않는 구호, 특정 지역의 기대를 자극하면서도 전체 시민이 부담해야 할 재정 책임은 흐리는 정치적 언어 속에서 이미 실패의 씨앗이 놓인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공약에 대해 시민과 언론이 충분히 묻지 않는 현실이다. 우리는 정책의 수혜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정작 그 정책이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지 따지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정책은 선한 명분만으로 좋은 정책이 되지 않는다. 좋은 정책이라면 반드시 구체적인 장소, 예산, 권한, 수요, 대안 비교를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공약은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설계도가 아니라 선거를 통과하기 위한 포퓰리즘적 정치수단으로 남을 위험이 크다. 이 책이 내게 흥미로웠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책 실패를 욕하기는 쉽지만, 정책이 실패하기 전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책의 4장은 정책 생태계의 혁신과 뉴비전을 향한다. 저자는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구조적 모순을 해부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민주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방향을 모색한다. 정책은 고립된 섬이 아니다. 이해관계자, 정치권력, 전문가, 시민이 복잡하게 얽혀 작동하는 유기적인 생태계다. 따라서 더 나은 정책을 위해서는 단순히 유능한 한 사람, 좋은 아이디어 하나, 더 많은 예산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더 투명해져야 하고, 시민이 배제되지 않아야 하며, 실패를 인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므로 정책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회는 위험하다. 정책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정이 무엇인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부담을 지는지 알지 못하면 시민은 자기 삶을 방어할 수 없다. “왜 이 정책인가?”, “다른 대안은 없었는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비용을 치르는가?”라는 질문은 전문가만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이며 민주주의의 핵심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정책은 멀다. 복잡한 법률과 예산, 관료 조직과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책은 너무나 가깝다. 결국 내 삶의 조건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멀고도 가까운 정책의 블랙박스를 열어 보자고 말한다. 더 많은 정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한 질문과 더 투명한 결정 과정, 그리고 시민이 사라지지 않는 정책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정책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 실패를 운명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실패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묻고, 시민의 삶을 정책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올 때 비로소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좋은 정책은 위에서 내려오는 완성품이 아니라,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쌓아 올리는 인고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 시민이 있어야 한다. 정책은 결국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80/45/cover150/k9921398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804597</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부끄러웠지만 나를 살린 노래 - [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23913</link><pubDate>Mon, 08 Jun 2026 19: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2391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12139973&TPaperId=1732391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89/coveroff/k91213997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12139973&TPaperId=1732391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a><br/>복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h3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bottom: 0px; font-weight: 500; font-size: 1.5em; line-height: 1.333; margin-top: 36px; font-family: &quot;Nanum Myeongjo&quot;, serif; color: rgb(20, 20, 21);">부끄러웠지만 나를 살린 노래</h3><h5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bottom: 0px; font-weight: 500; font-size: 1.125em; line-height: 1.333; margin-top: 36px; font-family: &quot;Nanum Myeongjo&quot;, serif; color: rgb(20, 20, 21);">— 복길, 《펑펑》을 읽고</h5><br style="box-sizing: inherit;">《펑펑》은 케이팝 노래와 그 노래를 둘러싼 사유의 결로 이루어진 에세이다. 저자 복길은 케이팝을 단순히 화려한 무대나 팬덤의 열광으로만 보지 않는다. 어떤 노래가 한 사람의 시간을 어떻게 붙잡는지, 좋아한다는 감정 안에 얼마나 많은 수치심과 애정, 죄책감과 해방감이 함께 들어 있는지 들여다본다. 그래서 이 책은 케이팝에 관한 책이면서 동시에, 케이팝을 통해 자기 삶을 견디고 해석해온 사람들에 관한 책처럼 보인다.<br style="box-sizing: inherit;">출판사에서 좋아하는 케이팝 곡과 그 사유를 함께 적어달라는 요청을 특별미션의 형식으로 제공한 것을 봤을 때,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BTS 슈가·진·정국의 〈So Far Away〉를 떠올렸다. 좋아하는 노래는 많다. 오래 들은 노래도 많고, 어느 시절의 나를 데려오는 노래도 많다. 그러나 “나를 살린 케이팝”에 가까운 곡을 고르라면 내게는 이 노래가 먼저 온다.<br style="box-sizing: inherit;">흥미롭게도 나는 BTS를 처음부터 ‘보는 아이돌’로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BTS라는 그룹을 거의 몰랐다. 퍼포먼스로 유명한 아이돌이라는 것도, 거대한 팬덤을 가진 그룹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처음 내게 도착한 것은 화면이 아니라 소리였다. 나직하게 체념한 듯, 동시에 스스로를 타박하고 몰아세우는 것 같은 슈가의 날카로운 랩이 먼저 귀에 걸렸다. 그리고 그 위로 소년미가 남아 있는 진과 정국의 미성이 반복해서 밀려왔다. 제목처럼 멀리서, 그러나 이상하게 너무 가까운 곳에서 부르는 목소리 같았다. 그다음에야 가사가 심장에 박혔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 시절의 나는 많이 고립되어 있었다. 우울이 깊었고, 내가 내 편 하나 없이 가계부채를 갚는 ATM기처럼 살고 있다는 감각에 짓눌렸다. 나는 사람이라기보다 기능처럼 느껴졌다. 돈을 벌고, 갚고, 버티고, 다시 돈을 벌고, 또 갚는 존재. 집도 싫었고, 내 삶도 싫었다.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실제로 뛰쳐나가지는 못했다.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는 사람은 몸 안에 감옥을 만든다. 그때 〈So Far Away〉는 나를 억지로 위로하지 않았다. 괜찮아질 거라고 쉽게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꿈이 없고, 모두가 달리는데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먼저 알아보았다. 사람은 때로 희망보다 먼저 이해를 원한다. “네가 힘든 게 이상한 게 아니야”라는 감각을 얻고 나서야 겨우 다음 숨을 쉰다. 내게 이 노래는 그런 음악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저자가 케이팝은 ‘듣는 음악’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 나는 이 노래를 떠올렸다. 내게 〈So Far Away〉는 분명 듣는 음악이었다. 나는 무대보다 먼저 목소리를 들었고, 얼굴보다 먼저 감정을 들었고, 팬덤보다 먼저 한 사람의 절박한 독백을 들었다. 그 뒤에야 이 노래를 부른 이들이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서가 중요했다. 내게 BTS는 먼저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숨 쉬던 사람에게 도착한 목소리였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즈음 나는 남편과 연애를 시작했다. 집이 싫고 삶이 싫어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실제로 내가 택한 것은 완전한 도피가 아니라 사랑 쪽으로 조금씩 몸을 돌리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받고, 나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아주 조금씩 되찾았다. 그리고 그 회복의 한쪽에 BTS가 있었다. 노래를 듣고, 무대를 찾아보고, 웃는 얼굴들을 보고, 팬들이 나누는 말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다시 사람 쪽으로 돌아왔다.<br style="box-sizing: inherit;">물론 케이팝이 내 인생을 단번에 구원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말은 너무 쉽고, 내 고통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음악은 사람을 한 번에 구하지는 못해도 하루를 넘기게 한다. 오늘 밤을 넘기게 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눈뜨게 하고, 아주 희미하게나마 “나에게도 아직 꿈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내게 〈So Far Away〉는 나를 끌어올린 손이라기보다, 내 옆에 함께 주저앉아준 노래였다.<br style="box-sizing: inherit;">하지만 케이팝을 사랑한다는 일은 내게 늘 깨끗하고 편안한 감정만은 아니었다. 나는 BTS가 좋았고, 그들의 노래에 실제로 위로받았지만, 동시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돌 그룹 이름이 ‘방탄소년단’이라는 사실이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이름이 주는 낯섦과 과장됨,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따라붙는 유치함의 시선, 나이 든 여성이 보이그룹을 좋아한다는 데 따라오는 민망함 같은 것이 있었다. 좋아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어쩐지 설명이 필요한 마음. 내게 BTS와 케이팝은 한동안 길티 플레저였다.<br style="box-sizing: inherit;">《펑펑》이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그 부끄러움과 사랑을 단순하게 정리하지 않는 데 있다. 저자는 케이팝을 좋아하는 마음 안에 있는 즐거움만이 아니라, 그 사랑이 때때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해명과 죄책감도 함께 본다. 내가 좋아한 대상이 흔들릴 때, 그 대상을 사랑했던 나 자신까지 의심하게 되는 마음. 이 사랑은 맹목이었을까. 내가 좋아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가벼운 사람이 되는 걸까. 좋아하는 마음은 왜 자꾸 증명되어야 할까. 이 책은 그런 질문들을 피하지 않는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케이팝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케이팝을 둘러싼 어떤 문화 앞에서는 자주 멈칫했다. 특히 살아 있는 아이돌을 팬픽 속 동성애 서사의 인물로 소비하는 문화에는 오래도록 불편한 감각이 있었다. 물론 팬픽이반 문화가 단순히 미성숙한 놀이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복길이 짚듯, 그것은 10대 여성들이 기존의 이성애 규범을 비틀고, 남성 아이돌의 관계를 빌려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탐색한 독특한 하위문화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금지된 상상을 통해 자기 안의 욕망을 처음 만나는 언어였을 것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쉽게 편해지지 않았다.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팬픽 속 인물은 허구처럼 소비되지만, 그 이름과 얼굴과 몸은 현실의 누군가에게서 온다. 더구나 소속사와 산업은 때로 그 모호한 욕망을 모르지 않는 듯했다. 멤버 간의 친밀함, 질투처럼 보이는 장면, 의미심장한 스킨십과 떡밥들은 팬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팬덤은 그것을 다시 콘텐츠와 소비로 되돌려주었다. 그 영리한 순환을 볼 때마다 나는 케이팝의 사랑이 얼마나 다정한 동시에 얼마나 계산적일 수 있는지 생각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내게 케이팝은 단순히 순수한 사랑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살린 음악이었고, 동시에 내가 부끄러워하고 변명하고 거리 두려 했던 대상이었다. 좋아하지만 불편하고, 불편하지만 끝내 떠나지 못하는 것. 《펑펑》은 바로 그 복잡한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게 만든다. 케이팝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완벽한 대상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업성과 진심, 위로와 소비,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 안에서도 끝내 내 마음을 움직인 무언가를 인정하는 일인지 모른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내가 케이팝을 좋아하게 된 것은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내가 잃어버린 감정을 다시 배웠다. 좋아하는 법, 기다리는 법, 응원하는 법, 울어도 괜찮다고 느끼는 법, 누군가의 목소리에 기대어 하루를 건너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배웠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완전히 죽은 사람이 아니다. 사랑이 남아 있다면, 아주 작게라도 삶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므로 내게 〈So Far Away〉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바닥에 있던 시절, 아직 사라지지 않은 마음의 한쪽을 건드린 음악이었다. 나는 그 노래를 통해 BTS를 좋아하게 되었고, BTS를 좋아하며 조금씩 나를 덜 미워하게 되었다. 《펑펑》을 읽으며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도 아마 그것이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어떤 노래를 사랑했는가. 왜 그 사랑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놓지 못했는가. 그리고 왜 그 사랑 때문에, 아주 가끔은, 살아갈 수 있었는가.]]></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89/cover150/k91213997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018971</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경구용 신약은 누구의 공포를 덜어주는가 - [블러드 머니 - 생명을 구하는 약을 둘러싼 탐욕의 전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02585</link><pubDate>Thu, 28 May 2026 21:2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0258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22135266&TPaperId=1730258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55/93/coveroff/k92213526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22135266&TPaperId=1730258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블러드 머니 - 생명을 구하는 약을 둘러싼 탐욕의 전쟁</a><br/>네이선 바르디 지음, 신유희 옮김 / 상상스퀘어 / 2026년 01월<br/></td></tr></table><br/><h3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top: 36px; margin-bottom: 0px; font-weight: 500; font-size: 1.5em; line-height: 1.333; font-family: &quot;Nanum Myeongjo&quot;, serif; color: rgb(20, 20, 21);">경구용 신약은 누구의 공포를 덜어주는가</h3><h3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top: 18px; margin-bottom: 0px; font-weight: 500; font-size: 1.5em; line-height: 1.333; font-family: &quot;Nanum Myeongjo&quot;, serif; color: rgb(20, 20, 21);">— 네이선 바르디, 『블러드 머니』를 읽으며</h3><br style="box-sizing: inherit;">『블러드 머니』를 읽기 시작하며 가장 먼저 붙잡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신약 개발은 이토록 고가의 혁신 치료제를 향해 달려가는가. 암 치료제, 표적치료제, 경구용 신약. 이 단어들은 모두 과학의 진보처럼 들린다. 병의 원인을 더 정밀하게 이해하고, 환자에게 더 적은 고통으로 더 긴 시간을 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 단어들은 미국 의료 시장 안에서는 막대한 자본이 움직이는 언어이기도 하다. 생명을 구하는 약은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희망이고, 누군가에게는 수십억 달러짜리 시장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의 제목이 『블러드 머니』인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생명을 둘러싼 돈은 언제나 깨끗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순히 더럽다고만 말할 수도 없다. 누군가의 절박함이 누군가의 투자 기회가 되고, 누군가의 생존 시간이 누군가의 시장 가치가 되는 세계. 이 책은 바로 그 불편한 교차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br style="box-sizing: inherit;">BTK 억제제 같은 표적치료제는 기존 항암치료의 한계를 넘기 위해 개발되었다. 전통적인 화학항암제는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를 폭넓게 공격한다. 그 과정에서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세포도 함께 손상될 수 있고, 환자는 탈모, 구토, 피로, 면역 저하, 통증 같은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반면 표적치료제는 암세포가 생존하고 증식하는 데 기대고 있는 특정 회로를 겨냥한다. 암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버티고 있는 핵심 신호축을 찾아내 그 흐름을 끊으려는 접근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브루티닙 같은 BTK 억제제는 B세포 수용체 신호전달에 중요한 효소를 겨냥한다. 만성림프구성백혈병이나 외투세포림프종 같은 B세포성 혈액암에서 암세포는 특정 생존 신호에 의존한다. 이 약은 그 회로를 차단함으로써 암세포가 살아남는 방식을 방해한다. 이것은 단순히 “새 약 하나”가 나온 사건이 아니다. 암을 더 정밀하게 이해하게 된 과학의 결과다. 암을 하나의 병명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 변이, 신호전달 경로, 면역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질병군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기에 가능한 접근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런 점에서 표적치료제의 등장은 현대 의학의 성취다. 암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 “어떻게 죽일 것인가”에서 “무엇에 기대어 살아남는가”로 바뀐 순간이기 때문이다. 병의 핵심 회로를 찾아내고, 그 회로를 막아 환자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일. 표적치료제는 그 자체로 과학이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나 이 의학적 필요는 미국 의료 시장 안에서 곧바로 사업적 가치로 번역된다. 암 치료제는 높은 가격을 정당화하기 쉬운 영역이다. 생명과 직결되고, 대체 치료제가 부족하며, 환자와 가족에게는 “시간을 벌어주는 약”이기 때문이다. 표적치료제는 환자군이 좁아도 고가 책정이 가능하다. 특정 암종, 특정 돌연변이, 특정 치료 단계에서 효과를 보이면 “정밀 치료”라는 가치가 붙는다. 환자 수가 많지 않아도, 그 환자들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약이 될 수 있다. 이 절박함은 가격의 논리로 바뀐다. 생명의 시간이 곧 시장 가치가 되는 것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더구나 경구용 표적치료제는 장기 복용 시장을 만든다. 병원에서 일정 주기로 주사를 맞고 끝나는 방식이 아니라, 매일 약을 먹으며 병을 억제하는 만성 관리형 치료가 될 수 있다. 환자에게는 편의성과 지속 가능성이 생기지만, 개발사 입장에서는 장기간 매출이 발생하는 구조가 된다. 한 번 성공하면 적응증 확장도 가능하다. 처음에는 특정 혈액암 치료제로 시작했더라도, 같은 B세포 신호 경로가 관련된 다른 혈액암, 더 나아가 자가면역질환까지 확장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면 하나의 약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플랫폼형 자산이 된다. 과학의 발견은 특허, 브랜드, 장기 복용, 적응증 확장, 인수합병 가치로 이어진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경구용 항암제는 이중적인 얼굴을 가진다. 한쪽 얼굴은 환자 친화적이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입원하고, 수액 항암을 견디는 대신 집에서 약을 먹으며 치료를 이어갈 수 있다. 환자 접근성이 좋아지고, 병원 이용 부담이 줄어들며, 치료가 삶의 리듬 안으로 들어온다. 특히 미국처럼 의료비가 높고 보험 구조가 복잡한 사회에서 경구용 치료제는 “의료비 부담을 낮추고 환자 편의를 높인다”는 강력한 명분을 갖는다.<br style="box-sizing: inherit;">주사 항암제가 의료 행위의 일부로 처리되는 반면, 경구 항암제는 약제급여 구조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환자 부담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차이를 보완하려는 oral parity law의 흐름까지 생각하면, 경구용 치료제는 분명 환자에게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먹는 약이라는 형태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의료 접근성과 보험 설계의 문제와 연결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나 다른 얼굴도 있다. 경구용 신약은 병원 밖으로 나온 치료이면서 동시에 환자의 일상 안으로 들어온 시장이다. 약은 집에서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약값과 부작용 관리와 장기 복용의 부담도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다. 치료가 덜 침습적으로 바뀐 만큼, 환자와 가족은 매일 약을 챙기고, 반응을 살피고, 보험과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병원 침대에 묶이는 시간은 줄어들 수 있지만, 고가의 약을 지속해야 하는 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경구용 표적치료제는 환자를 병원에서 조금 해방시키지만, 동시에 특허와 가격 체계 안에 오래 묶어둘 수도 있다. 치료의 공간이 병원에서 집으로 이동했을 뿐, 치료의 부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지점에서 나는 달땡이의 림프종 치료를 떠올렸다. 달땡이는 내게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그 아이에게 림프종이 생겼을 때, 내 앞에는 몇 가지 선택지가 놓였다. 수술적 제거, 화학요법과 주사, 그리고 경구투약과 표적 치료 추적. 이 선택지들은 의학적 판단의 목록이기도 했지만, 보호자인 내게는 공포의 목록이기도 했다. 수술은 병변을 물리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선택지였지만, 마취가 필요했다. 화학요법과 주사는 보다 적극적인 치료처럼 보였지만, 치료 과정에서 달땡이가 겪을 고통과 스트레스가 두려웠다. 병원 안쪽에서 내가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내 아이가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혹시라도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나를 압도했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결국 경구투약을 선택했다. 그 선택의 중심에는 의학적 판단도 있었지만, 더 깊은 곳에는 공포가 있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아이가 아파하고 괴로워할까 봐, 치료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생명을 낯선 공간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이 선택이 모든 경우에 정답이라는 뜻은 아니다. 질환의 종류, 병기, 환자의 상태, 수의학적 판단에 따라 최선의 치료는 달라질 수 있다. 다만 그 순간 보호자인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는 분명했다. 나는 치료 자체만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치료 과정에서 내가 완전히 무력해지는 감각을 두려워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달땡이는 처음에 약을 거부했다. 이미 하루에 열댓 번씩 토하며 몸무게가 반토막이 난 아이였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약 먹는 시간마저 공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약은 독했고, 병원에서도 입맛이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미 몸이 무너지고 있는 아이에게, 치료라는 이름으로 또 하나의 공포를 얹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달땡이의 영리함과 나와의 유대를 믿어보기로 했다. 억지로 붙들고 밀어 넣는 대신, 아이를 설득했다. 십오 분, 이십 분씩 말을 걸었다. 내 말을 정말 알아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달땡이가 납득한 듯한 눈빛을 보이면,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벌리고 손가락으로 약을 밀어 넣었다. 그것은 단순한 투약이 아니었다. 치료의 가장 작은 단위가 보호자와 환자 사이의 협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아이의 거부를 고집으로만 보지 않으려 했다. 아픈 몸이 보내는 두려움이자, 쓰고 독한 약을 삼켜야 하는 생명의 저항으로 보려 했다. 그래서 매번 달땡이를 이기려고 하지 않았다. 달땡이와 함께 약을 먹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치료란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주 작은 신뢰 위에서 겨우 성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달땡이는 좁은 집 안 대신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를 걷고 싶어 했다. 한참 걷고 나면, 마치 운동하고 배고파진 사람처럼 밥을 먹었다. 조금씩 약에도 적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달땡이가 사라진 식욕을 스스로 불러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느꼈다. 살려고, 자기 몸을 다시 움직이게 하려고, 아이가 자기 나름의 방식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나는 달땡이를 데리고 산책을 시작했다. 고양이 산책이 위험하고 일반적으로 권장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시간대를 골랐다. 주변이 시끄럽지 않은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 모두가 출근하고 등교한 뒤의 한적한 오전. 우리는 30분에서 한 시간 남짓 복도를 걸었다. 달땡이가 걷고, 냄새를 맡고, 몸을 움직이고, 다시 살아 있는 감각을 되찾는 시간을 기다렸다. 집에 돌아오면 발을 닦이고, 밥을 먹이고, 약을 주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 시간들은 내게 치료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치료는 병원에서 처방된 약물만이 아니었다. 치료는 약을 삼키기 전까지의 설득이었고, 아이가 고개를 돌리면 기다리는 일이었고, 밤의 복도를 함께 걷는 일이었고, 밥그릇 앞에서 다시 식욕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일이었다. 치료는 환자의 몸만이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견디는 시간 전체였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렇게 경구투약을 이어간 지 2년 만에, 달땡이는 림프종 완치 판정을 받았다. 거의 기적 같은 케이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경구 투약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했다. 경구 투약은 단순히 병원에 덜 가도 되는 편리한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존재가 치료의 과정에서 완전히 낯선 시스템 안으로 사라지지 않게 하는 방식이었다. 보호자가 곁에서 보고, 설득하고, 기다리고, 약을 먹이고, 다시 밥을 먹는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게 하는 치료의 형식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인간 환자와 가족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사 항암이나 입원 치료는 몸의 고통뿐 아니라 공포를 동반한다. 치료실에 들어가는 일, 혈관을 잡히는 일, 약물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 부작용을 예감하는 일. 그 과정은 환자와 가족에게 강한 불안을 준다. 반면 경구용 표적치료제는 치료를 병원 안쪽에서 환자의 일상으로 가져온다. 물론 그것이 고통을 없애지는 않는다. 부작용도 있고, 비용도 있고, 장기 복용의 부담도 있다. 그러나 치료가 환자의 삶을 완전히 병원에 빼앗기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경구 투약은 분명한 심리적 가치를 가진다. 약을 삼키는 행위는 단순한 복용이 아니라, “나는 아직 내 삶 안에서 치료받고 있다”는 감각을 준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나는 경구용 신약 개발의 논리 안에 “공포를 낮추는 기술”이라는 요소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자 접근성, 의료비 부담 완화, 장기 복용 시장, 적응증 확장, 특허와 브랜드. 이런 산업적 이유만으로는 경구용 표적치료제의 힘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경구 투약은 병을 치료하는 방식인 동시에, 환자와 보호자가 치료의 공포를 견디게 하는 심리적 형식이다. 병원 밖에서도 치료가 이어질 수 있다는 감각.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를 곁에서 지켜보며 치료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감각. 그 안정감은 실제 치료 선택에서 매우 큰 힘을 가진다.<br style="box-sizing: inherit;">문제는 그 안정감마저 시장의 언어로 번역된다는 데 있다. 환자에게는 덜 침습적인 희망이지만, 개발사에게는 장기 복용 매출을 만드는 상품이 된다. 보호자에게는 사랑하는 존재를 곁에서 돌볼 수 있다는 안도감이지만, 제약사에게는 특허와 브랜드와 고가 약가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가치가 된다. 신약은 환자의 몸을 겨냥하지만, 동시에 환자와 보호자의 공포도 겨냥한다. 치료의 두려움을 낮추는 기술은 분명 선한 효과를 갖지만, 그 선한 효과가 곧 시장의 강력한 설득 논리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블러드 머니』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명을 구하는 약은 순수한 선의만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순수한 탐욕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병의 핵심 회로를 찾아내고, 환자에게 더 나은 시간을 주기 위해 싸운다. 투자자와 제약사는 그 가능성을 고가의 자산으로 만들고, 특허와 임상과 인수합병의 언어로 포장한다. 환자는 그 사이에서 생명을 연장하고, 고통을 줄이고, 동시에 비용과 부작용과 보험의 현실을 감당한다. 한쪽에는 실험실의 집요함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월가의 계산이 있다. 그 사이에 환자의 몸과 가족의 공포가 놓인다.<br style="box-sizing: inherit;">고가의 표적치료제는 단순히 탐욕의 산물도, 순수한 선의의 결과도 아니다. 기존 항암의 한계를 넘고 환자에게 시간을 벌어주려는 과학적 필요에서 출발하지만, 미국 의료 시장에서는 그 절박함이 고가의 브랜드, 특허, 장기 복용 시장, 적응증 확장, 인수합병 가치로 전환된다. 표적치료제의 시대란 암을 더 정밀하게 이해하게 된 과학의 성취이면서, 생명의 절박함이 가장 비싼 시장이 되는 자본주의의 얼굴이기도 하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묻게 될 것 같다. 생명을 구하는 약이 환자의 삶을 얼마나 덜 고통스럽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 덜어진 고통은 누구의 비용과 누구의 이익으로 재배치되었는가. 경구용 혁신 치료제는 환자와 보호자의 공포를 덜어주는 기술이다. 동시에 그 공포와 희망이 고가의 시장으로 조직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모순을 함께 보아야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br style="box-sizing: inherit;">『블러드 머니』는 신약 개발의 빛나는 성공담만을 말하는 책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아마 생명을 구하려는 과학이 어떻게 자본과 만나는지, 환자의 절박함이 어떻게 시장 가치로 바뀌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더 나은 약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지를 묻게 할 것이다. 달땡이의 치료 앞에서 내가 느꼈던 공포를 떠올리면, 나는 경구용 신약의 의미를 단순히 산업적 혁신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을 조금 덜 아프게 붙잡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존재를 병원 밖 일상 안에서 지키고 싶은 마음, 치료의 공포 속에서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주는 형식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경구용 신약은 누구의 공포를 덜어주는가. 그리고 그 공포를 덜어준 대가는 누가 치르는가. 생명을 구하는 약은 기적처럼 보이지만, 그 기적은 과학과 자본과 제도와 보호자의 떨리는 손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블러드 머니』를 읽는 일은 그 손의 온도와 시장의 냉기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 될 것 같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355/93/cover150/k92213526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3559342</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여성은 말하기 전에 미움받지 않는 법을 배운다 - [출근길의 주문 - 일하는 여자들을 지탱하는 언어와 관계, 그리고 마음, 개정증보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02571</link><pubDate>Thu, 28 May 2026 21: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0257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52139565&TPaperId=1730257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68/70/coveroff/k45213956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52139565&TPaperId=1730257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출근길의 주문 - 일하는 여자들을 지탱하는 언어와 관계, 그리고 마음, 개정증보판</a><br/>이다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여성은 말하기 전에 미움받지 않는 법을 배운다—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을 읽고<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바른 말을 잘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상한 말을 이상하다고 말하는 아이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 부당한 말, 누군가를 함부로 낮추는 말 앞에서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러나 친인척들은 그런 나를 똑똑하다고 부르지 않았다. 솔직하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싸가지 없는 년”으로 통했다.어른들은 자주 말했다. 여자가 그렇게 따지고 들면 남편 사랑 못 받는다. 미움받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그 말들이 내게 가르친 것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었다. 여자는 말해도 되지만, 너무 정확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여자는 생각해도 되지만, 그 생각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만큼 또렷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여자는 틀린 말을 바로잡기 전에, 먼저 자신이 미움받지 않을지를 계산해야 한다는 것.나는 그때 몰랐다. 내가 미움받은 것은 말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여자인 내가 너무 똑바로 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이다혜의 《출근길의 주문》을 읽으며 가장 오래 멈춘 지점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 책은 일하는 여성들의 언어와 관계, 마음과 커리어를 다룬다. 하지만 내게 이 책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여성은 어떻게 말해야 미움받지 않는가.여성은 너무 세게 말하면 안 된다. 너무 똑똑한 척해도 안 된다. 너무 감정적이면 안 되고, 너무 차가워도 안 된다. 질문을 많이 하면 나댄다고 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소극적이라고 한다. 부드럽게 말하면 자신감이 없다고 하고, 단호하게 말하면 무섭다고 한다. 남성이 직설적으로 말하면 시원하다, 결단력 있다, 리더답다고 할 수 있는 말이 여성이 하면 예민하다, 까칠하다, 피곤하다는 말로 돌아온다. 그러니 여성은 말하기 전에 먼저 배운다. 미움받지 않는 법을. 자기 말의 모서리를 미리 깎는 법을.책에서 말하는 쿠션어의 문제는 그래서 단순한 화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쿠션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는데”,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같은 말은 때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말에도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 정직하되 무례하지 않은 말, 정확하되 상대를 함부로 찌르지 않는 말은 분명 좋은 언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완충 장치가 유독 여성에게 더 많이 요구된다는 데 있다.여성은 자기 의견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과를 배운다. 요구를 해도 부탁처럼 들리게 만들고, 반박을 해도 질문처럼 포장하고, 불쾌함을 말할 때도 상대가 무안하지 않도록 여러 겹의 완충재를 깐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말의 내용보다 말의 태도가 더 크게 심판받는다.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어떻게 말했느냐가, 더 나아가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냐가 문제가 된다.나는 대학 글쓰기 수업에서 그 이상한 감각을 또렷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그 수업에는 우수 글쓰기 학생에게 일부 수업을 면제하고 논문으로 A+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나는 중간에 그 제도를 받았다. 익명으로 진행된 논설문 쓰기에서 내 글은 주장하는 바가 선명하고 논거가 튼튼한, 남성적인 글쓰기의 전형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2차 익명 수필 쓰기에서는 문체가 수려하고 정서가 아름다운 글쓰기이나 주장하는 바가 약한 게 아쉽고,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쓰는 경향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둘 다 내가 쓴 글이었다.나는 남자처럼 쓴 것도, 여자처럼 쓴 것도 아니었다. 논설문은 논설문답게 썼고, 수필은 수필답게 썼을 뿐이다. 장르에 맞춰 문체와 구조를 바꾼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글들은 곧장 성별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 주장이 선명하면 남성적이고, 정서가 아름다우면 여성적이라는 식의 분류. 그때 나는 알았다. 글조차 성별로 읽히는구나. 말뿐 아니라 문장에도 성별이 덧씌워지는구나.그래서 나는 일부러 논문 주제를 산업노동자의 법적 권리와 실태로 잡았다. 젊은 여자는 노동문제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볼 수 있고, 어떤 논리로 말할 수 있으며, 어떤 문제에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내 글이 남성적인지 여성적인지가 아니라, 내가 세계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출근길의 주문》은 이런 장면들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일하는 여성이 겪는 곤란은 단순히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 그 능력이 태도로 심판받기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잘 말하면 건방지고, 조심하면 약하고, 정확하면 차갑고, 부드러우면 만만하다. 여성은 말의 내용뿐 아니라 말이 놓인 자리까지 함께 평가받는다.이 문제는 직장에만 있지 않다. 가족 안에도 있다. 시댁에서도 있다. 나는 시댁에 가면 꽤 다른 사람이 된다. 남편에게 깍듯하게 존대하고, 언성을 높이지 않으며, 부탁은 눈빛으로만 한다. 시부모님이 무어라 하시든 대개 “네”라고 답한다. 그러면 나는 참한 며느리가 된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예뻐하신다.조금 웃기고, 조금 씁쓸하다. 그 “네”가 내 속내의 항복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남편도 안다. 나는 동의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과 쿠션어, 여성성을 활용해 관계비용을 낮추는 것이다. 시부모님은 편찮으시고, 시아버님은 파킨슨과 치매가 심하시다. 남편은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부모 간병의 무게를 안고 있다. 그런 자리에서 내가 매번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어떤 전투는 이겨도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말의 칼을 칼집에 넣는다. 속내는 타협하지 않지만, 표현은 조절한다.그러나 이상한 것은, 사회가 그 전략을 순함으로 읽는다는 점이다. 내가 “네”라고 말하면 참하다고 한다. 내가 싸우지 않으면 착하다고 한다. 내가 반박하지 않으면 좋은 며느리라고 한다. 그러니까 여성에게 요구되는 좋은 말이란 때때로 좋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침묵이다. 말하지 않는 여성이 사랑받는다. 부드럽게 웃고 고개를 끄덕이는 여성이 관계를 망치지 않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그렇다고 나는 모든 자리에서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시댁에서는 관계비용을 낮추기 위해 “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터에서는 그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나는 강사였고, 내게는 교육관이 있었다. 이전에 초중등 대상 대형학원에서 일할 때, 학생들의 학력 수준에 맞지 않는 천편일률적인 교육 스케줄에 반발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수준은 달랐고, 필요한 보강도 달랐다. 나는 보강자료를 따로 만들고, 개별 맞춤 수업을 진행했다. 내 판단으로는 그것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일이었다.그러자 남자 원장이 말했다. 왜 내 수업에만 들어간 아이들은 반 배정에 따른 강사 교체를 싫어하느냐고. 여자 선생이 학원 방침을 거스르고 그렇게 나대는 거 보기 좋지 않다고 했다. 그 학원에서 나는 왕따였다. 같은 여자 선생들도 나를 미워했다. 그러나 학교별 분반 수업을 주장한 남자 대학생 강사의 건의는 받아들여졌다.그때 나는 뼈아프게 보았다. 같은 개선안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름을 얻는다는 것을. 남자가 말하면 건의가 되고, 여자가 말하면 반항이 된다. 남자가 교육 방식의 문제를 지적하면 현장 의견이지만, 여자가 학생에게 맞는 자료를 만들고 수업을 조정하면 나댐이 된다. 내가 한 일의 핵심은 학생의 학습권과 수업의 질이었지만, 그들에게 먼저 보인 것은 “학원 방침을 거스르는 여자 선생”이었다.말은 내용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누가 말했는지가 평가를 바꾼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아프게 다가온 진실이었다.스몰토크에 관한 대목도 그래서 불편했지만 정확했다. 한국 사회의 스몰토크는 종종 친근함을 가장한 개인정보 요구가 된다. 나이, 결혼 여부, 자녀 여부, 사는 곳, 학교, 직장, 수입, 배우자의 직업, 자산, 인맥. 이런 질문들은 가벼운 대화처럼 시작되지만 쉽게 사람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표가 된다. 특히 여성은 이런 질문 앞에서 더 자주 해명하는 위치에 선다. 결혼했는가, 아이는 있는가,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 시댁에는 잘하는가, 일을 계속할 것인가. 말은 어느새 대화가 아니라 심문이 된다.좋은 대화는 상대를 빨리 알아내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자신을 드러내도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친근함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침범한다. 더 나쁜 것은 그 질문 뒤에 자기 과시가 따라붙는 경우다. 자산, 투자, 수입, 자녀의 성취, 배우자의 직업. 이런 말들은 스몰토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위를 확인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대화가 싫다. 그 불편함은 예민함이 아니라 정당한 경계 감각이라고 생각한다.질문에 관한 부분도 오래 남았다. 여성들만 있을 때는 질문이 활발하지만, 남성과 여성이 섞여 있을 때는 여성이 첫 질문자로 나설 확률이 낮아진다는 대목은 많은 것을 말한다. 질문은 단순히 모르는 것을 묻는 행위가 아니다. 질문은 “나도 이 논의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고 선언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성은 어릴 때부터 질문하는 몸짓조차 조심스럽게 훈련받는다. 너무 나서지 말 것. 분위기를 끊지 말 것. 똑똑한 척하지 말 것. 괜히 말대꾸하지 말 것.나는 내 말이 잘리는 경험도 자주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결론을 내버리는 일. 내 말을 다 듣기 전에 “그러니까 네 말은 이런 거지”라고 요약해버리는 일. 내가 말하려던 핵심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훨씬 쉽게 받아들여지는 일. 내 문장이 끝까지 갈 권리를 빼앗기는 느낌. 말이 잘린다는 것은 단순한 대화 방해가 아니다. 그것은 내 사고가 완성될 권리를 빼앗기는 일이다.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언어의 문제는 여성에게 더 예쁘게 말하라는 조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이 자기 말의 주도권을 어떻게 잃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언제 쿠션어를 쓸 것인가. 언제 단호하게 말할 것인가. 언제 침묵할 것인가. 언제 “잠시만요, 제 말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것인가. 이 구분이 필요하다.간접화법에 관한 대목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흥미로웠다. 간접화법은 때로 우아하다. 특히 권력관계나 상류층 인사, 조직 내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에서는 말의 힘이 정면충돌보다 우회로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소설에서 권력관계와 상류층 인사를 자주 묘사하기 때문인지, 이 지점은 익숙했다. 내 캐릭터들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하지 않는다. 예의와 호칭과 침묵과 시선 속에 진짜 뜻을 숨긴다. 우아한 언사는 힘을 감추지 않는다. 다만 힘의 형태를 바꾼다.하지만 현실의 간접화법은 늘 우아하지만은 않다. 그것이 약자에게만 강요될 때, 간접화법은 배려가 아니라 자기축소가 된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게 만들고, 정확히 요구해야 할 때 부탁처럼 만들며, 분노해야 할 때 미소 짓게 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품위가 아니라 억압이다. 그러므로 좋은 말하기는 무조건 부드러운 말하기가 아니다. 필요한 순간에는 정확해야 하고, 가능한 순간에는 품위 있어야 한다. 상대를 해치지 않되, 진실을 흐리지 않아야 한다.‘여성적 리더십’에 관한 대목도 답답했다. 왜 여성에게만 리더십 앞에 ‘여성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가. 남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면 그냥 리더십인데, 여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면 여성적 리더십이 된다. 이 말은 얼핏 칭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리더십의 표준을 남성으로 두는 오래된 습관이 숨어 있다. 여성 리더가 단호하면 독하다고 하고, 부드러우면 약하다고 한다. 남성이 실패하면 개인의 실패지만, 여성이 실패하면 여성 리더십의 한계처럼 말해진다. 이것은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유리천장만큼이나 유리절벽도 무섭다. 여성에게 높은 자리가 주어지는 순간이 종종 조직이 위태로울 때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평소에는 기회를 주지 않다가, 위기 상황에서 책임을 맡긴다. 성공하면 조직의 성과가 되고, 실패하면 여성의 한계로 기록된다. 여성은 올라가도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다른 방식의 검열대 위에 선다.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같은 생각으로 돌아왔다. 여성적 리더십이 아니라 리더십이면 충분하다. 여성적 말하기가 아니라 말하기면 충분하다. 정확하고 품위 있는 말. 필요할 때 질문하고, 부당할 때 반박하고, 관계비용이 너무 클 때는 전략적으로 침묵하며, 그러나 속내까지는 내어주지 않는 말하기. 그것이면 충분하다.나는 어떤 자리에서는 “네”라고 말하는 참한 며느리가 되었고, 어떤 자리에서는 “그 방식은 학생에게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나대는 여자 선생이 되었다. 이상한 것은 내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붙이는 이름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같은 사람의 같은 판단력도 어떤 관계 안에서는 참함이 되고, 어떤 관계 안에서는 나댐이 된다. 그러니 문제는 내 말 하나에만 있지 않다. 그 말을 듣는 세계의 귀에도 있다.《출근길의 주문》은 내게 일하는 여성의 처세서로만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말에 덧씌워진 오래된 명령들을 하나씩 보여주는 책이었다. 부드러워라. 튀지 마라. 너무 똑똑해 보이지 마라. 상대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마라. 그러나 동시에 유능해라. 리더가 되어라. 질문해라. 성과를 내라. 이 모순된 요구들 속에서 여성은 매일 자기 말을 조율한다.나는 이제 더 이상 내 말의 모서리를 전부 깎아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무례해지고 싶지도 않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불편한 진실을 말하되, 사람을 함부로 다치게 하지 않는 언어다. 예의를 지키되 내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말이다. 침묵하더라도 그것이 굴복인지 선택인지 아는 태도다.어쩌면 여성이 말하기 전에 미움받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회의 오래된 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나를 지우는 말이 아니라, 나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말. 쿠션어가 필요할 때는 쓰되, 쿠션 속에 내 생각까지 묻어버리지는 않는 말. 질문할 수 있고, 거절할 수 있고, 필요하면 “제 말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언어.이 책이 내게 남긴 주문은 결국 이것이었다.말하라.그러나 네 말의 주인을 잃지 말라.배려하라.그러나 네 자리를 내어주지는 말라.침묵하라.그러나 그것이 굴복인지 선택인지 알고 침묵하라.질문하라.네가 이 자리에 있음을 스스로에게도 증명하라.나는 아직도 때때로 “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그 “네”의 의미를 안다. 그것은 언제나 동의가 아니다. 때로는 전쟁을 미루는 말이고, 때로는 나를 아끼는 말이고, 때로는 더 중요한 곳에 힘을 남겨두기 위한 말이다. 그리고 정말 말해야 할 순간이 오면, 나는 더 이상 내 문장을 지나치게 작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68/70/cover150/k45213956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687047</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사람의 결을 읽게 되는 소설 - [내일은 내일에게 (청소년판) - 숨이 막힐 때 주문처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96623</link><pubDate>Mon, 25 May 2026 21: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966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8605&TPaperId=172966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94/36/coveroff/k15213860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52138605&TPaperId=172966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내일은 내일에게 (청소년판) - 숨이 막힐 때 주문처럼</a><br/>김선영 지음 / 특별한서재 / 2026년 05월<br/></td></tr></table><br/><h3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top: 36px; margin-bottom: 0px; font-weight: 500; font-size: 1.5em; line-height: 1.333; font-family: &quot;Nanum Myeongjo&quot;, serif;">사람의 결을 읽게 되는 소설</h3><h3 style="box-sizing: inherit; margin-top: 18px; margin-bottom: 0px; font-weight: 500; font-size: 1.5em; line-height: 1.333; font-family: &quot;Nanum Myeongjo&quot;, serif;">— 김선영, 『내일은 내일에게』를 읽고</h3><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저자의 북토크에 간 적이 있다. 그때는 저자의 저작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상하게 저자라는 사람 자체가 좋았다. 말의 온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묘한 신뢰가 생겼다. 언젠가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은 내일에게』를 읽으며 그때의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소설은 간만에 만난, 정말 글다운 청소년소설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청소년소설이라고 해서 아이들의 감정을 단순하게 다루지 않는다. 상처를 예쁘게 포장하지도 않고, 어른을 악역이나 구원자로 나눠 평면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이 소설은 다만 사람의 결을 오래 들여다본다. 연두의 일상은 작품의 흐름을 따라 극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결말까지도 그는 다시 학교에 가고, 자고 일어나고, 밥을 먹고, 다시 하루를 산다. 그러나 그 “다시”가 가볍지 않다. 삶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도 다음 날로 넘어가며 이어지는 것임을 이 소설은 조용히 보여준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내일은 내일에게』속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크지 않다.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세상을 뒤집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굶지 않고, 버려질까 두려워하지 않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자기 나이에 맞게 철없이 살고 싶어 할 뿐이다. “나도 어리광 부리며 철없이 살고 싶다. 내 나이에 걸맞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아이들이 바란 것은 거창한 행복이 아니라, 아이로 살아도 되는 하루였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인상깊게 남은 감각 중 하나는 “거세된 욕구의 합리화”였다. 아이들은 원하는 것이 없어서 담담한 것이 아니다. 좋은 집, 따뜻한 말, 안전한 자리, 울어도 되는 권리. 그런 것을 원하지만 현실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순간 “나는 괜찮다”, “나는 원하지 않는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욕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욕구를 가져도 소용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운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 아이들의 담담함은 성숙함이라기보다, 너무 이르게 익힌 생존법처럼 읽혔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 생존법은 때로 폭발한다. 연두가 터지는 장면이 그랬다. 연두의 분노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너무 오랜 시간 억눌려 있던 아이가 처음으로 학대와 폭력의 부당함을 말로, 몸으로, 물건으로 밀어 올리는 장면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은 곱게 아픔을 호소하지 못한다. 어떤 날은 울고, 어떤 날은 던지고, 어떤 날은 가장 아픈 말을 골라 상대에게 꽂아 넣는다. 이 소설이 좋은 것은 연두를 착한 피해자로만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두는 상처받았지만, 동시에 상처를 되돌려주는 아이이기도 하다. 그 모순까지 포함해서 연두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br style="box-sizing: inherit;">연두도, 그 주변의 아이들도 상대적으로 방어적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도, 친절을 베푸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냉정함이라기보다 오래된 자기보호에 가깝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내주었다가 다칠까 봐 먼저 얼어붙는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 아무 마음도 없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마음이 너무 많은데 그 마음이 들키면 다시 버려질까 봐 먼저 문을 닫는 사람의 말처럼 읽혔다. 방어는 마음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마음이 너무 많이 다쳤다는 흔적일 때가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작품이 깊은 이유는 아이들만 복합적으로 그리는 데 있지 않다. 어른들 역시 평면적이지 않다. 이 소설 속 어른들은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다. 무심해서 상처를 남기는 어른이 있고, 폭력적이고 거칠지만 끝내 아이를 버리지 않는 어른이 있으며, 아이의 삶을 대신 구원하지는 못해도 조심스럽게 쌀을 건네고 미래를 기다려주는 어른이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연두의 엄마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결코 이상적인 보호자가 아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전 남편의 딸을 끝내 버리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좋은 엄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이 상처를 주었지만, 나쁜 인간이라고만 부르기에는 인간적이다. 현실의 어떤 관계는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거칠고, 폭력이라고만 부르기엔 너무 오래 버텨낸 시간이 있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모호한 인간의 결을 놓치지 않는다.<br style="box-sizing: inherit;">반대로 쌀을 건네는 카페 이상의 주인 아저씨 같은 인물은 이 소설의 따뜻함을 만든다. 그는 구원자처럼 과장되지 않는다.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도 못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 다만 알아차리고, 선을 넘지 않으며, 필요한 만큼만 손을 내민다. 아이의 가난을 폭로하지 않고, 아이의 자존심을 짓밟지 않으며, 도움을 굴욕으로 만들지 않는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때로 거창한 선의가 아니라,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는 조심스러운 친절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인물은 보여준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소설에는 죽음도 여러 번 등장한다. 객사한 노숙자의 죽음, 길고양이 네로의 죽음, 가족의 죽음. 특히 네로가 차에 치이는 장면은 마음이 아팠다. 아이에게 보여서는 안 될 세계의 잔혹함이 또 한 번 아이 앞에 도착한 것 같았다. 그러나 소설은 그 죽음을 완전히 방치하지 않는다. 이상 아저씨는 네로의 숨이 잦아들 때까지 몸을 쓸어준다. 세계는 잔인하지만, 그 잔인함 앞에서 끝까지 손을 거두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내일은 내일에게』의 따뜻함은 바로 그런 데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소설은 우리 사회가 불편한 존재를 어떻게 치워버리는지도 보여준다. 노숙인의 텐트, 길고양이, 가난한 아이, 불안정한 가족. 우리는 자주 위험을 줄이는 방법을 찾기보다 눈앞에서 불편한 존재를 제거하려 한다. 불편함을 위험이라고 부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문제처럼 보이는 사람을 치운다. 그 앞에서 아이가 묻는 “아무 피해를 안 주는데도요?”라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정말 피해를 주었는가. 다만 우리가 보기 싫었을 뿐인가. 이 소설은 청소년의 눈을 통해 우리 사회의 비정함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 책은 냉소로 끝나지 않는다. 유겸과 연두의 편지가 그랬다. 유겸은 왕따의 기억을, 연두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품고 있다. 둘의 상처는 같지 않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고통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본다. 같은 상처라서 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처인데도 “그래도 살고 싶었다”는 마음이 같아서 통하는 것이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상처가 있다. 그리고 어떤 상처들은 서로 닮지 않았어도, 생존의 언어 안에서 서로를 알아본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소설이 끝내 붙잡고 있는 것은 완전한 구원이 아니다. 연두의 삶은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가족의 상처도, 가난도, 불안도 깔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어른은 연두의 미래를 기다려준다. “그 아이의 미래를 기다려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라는 문장은 이 작품이 말하는 좋은 어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아이를 대신 구원하지 않더라도, 아이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는 것. 그 기다림이 때로는 한 사람을 내일까지 데려간다.『내일은 내일에게』라는 제목은 단순히 삶의 무게를 잊자는 말도, 내일이면 모든 고민이 해결될 거라는 말이 아니었다. 오늘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내일의 나에게 조금 나누어 맡기자는 뜻이었다. 오늘 다 해결하지 못해도, 오늘 다 괜찮아지지 않아도, 그래도 잠들고 일어나 다시 학교에 가고 밥을 먹는 일,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견디면서. 그리고 그 견딤의 곁에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친절과 기다림이 있을 때, 사람은 아주 조금 더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내일은 내일에게』는 “괜찮아질 거야”라고 쉽게 말하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괜찮지 않은 오늘을 안고도 내일로 건너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책은 청소년소설이지만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각자가 움켜쥔 삶의 무게,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생활이 자아를 삼키는 공포, 그리고 그럼에도 내일로 넘어가려는 마음을 그린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사람의 결을 읽게 한다. 사람을 착하다, 나쁘다, 불쌍하다, 못됐다로 쉽게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굳어졌는지, 왜 그렇게 폭발했는지, 왜 그럼에도 떠나지 않았는지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사람의 결을 읽는 법을 배운다.<br style="box-sizing: inherit; color: rgb(20, 20, 21); font-size: 18px; text-indent: 18px;">]]></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294/36/cover150/k15213860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2943658</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기 위해서 - [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7517</link><pubDate>Mon, 04 May 2026 21: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751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5751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off/k6921381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5751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a><br/>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나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기 위하여— 『나이 묻는 사회』 를 읽고<br>제2의 커리어를 제대로 쌓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막연한 전환이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설계하고 싶었다. 공부하고, 배우고, 다른 직업의 가능성을 열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지역 커뮤니티 센터나 각종 교육 지원 제도를 찾아보면 나는 자주 ‘대상자’가 아니었다. 34세 미만 청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br>그때 나는 묘하게 서러웠다. 내가 늙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느끼는 시기였다. 그런데 제도는 나를 청년이 아니라고 잘라냈고, 사회는 동시에 나를 완성된 어른처럼 취급했다. 다시 배우고 싶은 사람, 새 커리어를 만들고 싶은 사람, 아직 자기 삶의 다음 장을 준비하는 사람으로는 좀처럼 읽어 주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였다. 나이는 사회가 사람을 분류하고, 가능성을 배분하고, 지원 자격을 끊어 내는 현실의 장치다.<br>『나이묻는 사회』는 바로 이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 말은 듣기에는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나이가 결코 숫자에 머물지 않는다. 나이는 취업 가능성, 정책 지원, 관계의 서열, 호칭, 농담, 멸칭, 심지어 한 사람의 매력과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노년 혐오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연령을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고, 평가하고, 배제하는 방식이다.<br>특히 내게 강하게 와닿은 것은 중년 혐오의 결이었다. 우리는 노인 혐오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말한다. ‘틀딱’, ‘연금충’, ‘노인 민폐’ 같은 말의 폭력성은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그러나 중년을 향한 혐오는 더 애매한 얼굴로 온다. 그것은 농담처럼, 유행어처럼, 세대 감각의 평가처럼 등장한다. ‘아재’, ‘개저씨’, ‘아줌마’, ‘영포티’, ‘스윗 영포티’ 같은 말들은 처음에는 가벼운 호칭이나 조롱처럼 보이지만, 반복될수록 중년이라는 나이대를 특정한 이미지 안에 가둔다.<br>중년 남성은 쉽게 무능하고 권위적이며 시대에 뒤처진 존재로 묶인다. 중년 여성은 생활감, 억척스러움, 촌스러움, 성적 비가시성, 민폐성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아줌마”라는 말을 들을 때 묘하게 기분이 나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이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좀처럼 중립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한 여성을 한 사람으로 부르는 말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놓은 중년 여성의 낡은 이미지 안으로 밀어 넣는 말처럼 들린다.<br>나는 내 나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이 하나로 해석되고 싶지 않다. 나는 아줌마이기 전에 독자이고, 작가이고, 강사이고, 수험생이고,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이 멸칭은 이 모든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우고, 사람을 하나의 연령 이미지로 단순화한다. 이것이 이 책이 말하는 연령차별의 핵심이다. 나이는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인데, 사회는 자꾸 나이를 그 사람 전체처럼 다룬다.<br>더 불편한 것은 긍정적인 말조차 쉽게 부정적인 뉘앙스로 바뀐다는 점이다. 40대가 자기 관리를 하고, 시대 변화에 적응하고, 감각을 유지하려 하면 본래는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젊은 척한다”는 조롱으로 번역된다. “영포티”라는 말이 그렇다. 젊게 살고, 건강하게 살고, 자기 삶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는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것을 온전히 긍정하지 않는다. 40대가 아직 자기 삶의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 순간, 누군가는 그 욕망을 우스운 것으로 만든다.<br>이것은 단순히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중년에게 허락된 자리가 너무 좁기 때문이다. 중년은 위로부터는 아직 젊다며 더 일하라고 요구 받고, 아래로부터는 이미 기성세대라며 책임을 요구 받는다. 제도적으로는 청년 지원에서 밀려나고, 사회적으로는 완성된 어른처럼 취급되며, 노동시장에서는 변화에 뒤처지지 말라고 압박받는다. 그러나 정작 다시 배우고,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 수 있는 구조적 지원은 충분하지 않다.<br>내가 청년 지원 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속상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특혜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 배울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사회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제도는 나를 “이미 청년이 아닌 사람”으로 분류했고, 그 분류는 생각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청년이 아니면 무엇인가. 중년인가. 그렇다면 중년은 이미 자기 앞가림을 끝낸 사람인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중년의 불안과 욕망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br>『나이 묻는 사회』가 중요한 이유는 이런 질문을 개인의 예민함으로 치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나이에 관한 멸칭과 농담이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와 제도와 관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언어는 생각의 껍데기가 아니다. 언어는 생각의 길이다. “아줌마”, “아재”, “영포티”, “꼰대” 같은 말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개별 인간을 보기 전에 연령 이미지를 먼저 본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진 이미지는 고용, 관계, 정책, 미디어 재현 속에서 다시 차별을 강화한다.<br>차별은 늘 게으른 사고와 손잡는다. 한 사람을 제대로 보려면 오래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삶, 직업, 몸, 실패, 배움, 변화 가능성을 봐야 한다. 그러나 멸칭은 빠르다. “아줌마”라고 부르면 생활감과 촌스러움이 따라오고, “영포티”라고 부르면 젊은 척하는 중년의 이미지가 따라오고, “꼰대”라고 부르면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라는 판정이 따라온다. 구조를 분석하는 일은 어렵고 느리지만, 사람을 조롱하는 일은 쉽고 빠르다. 그래서 불안한 사회일수록 언어는 짧아지고, 짧아진 언어는 다시 인간을 작게 만든다.<br>나는 이 책을 읽으며 중년 혐오가 단순히 젊은 세대가 중년을 싫어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각 세대가 자기 자리를 잃었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불안이 서로를 향한 칼날이 된 결과에 가깝다. 청년은 시작할 자리가 없다고 느끼고, 중년은 다시 시작할 권리를 잃었다고 느끼며, 노년은 쓸모없는 존재로 밀려난다고 느낀다. 그런데 분노는 구조가 아니라 가까운 타 연령대에게 향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경쟁자로 오해한다.<br>나이는 원래 그렇게 서로를 밀어내기 위한 기준이 아니어야 한다. 나이는 삶의 한 과정이고, 각 시기마다 다른 욕망과 가능성과 취약성을 가진다. 청년에게는 출발의 지원이 필요하고, 중년에게는 전환의 지원이 필요하며, 노년에게는 존엄한 지속의 지원이 필요하다. 어느 한 세대의 몫을 다른 세대가 빼앗는 방식이 아니라, 각 생애 단계가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br>나는 더 이상 청년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배움과 전환의 권리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아줌마로 불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나의 이름과 꿈과 능력과 욕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읽고, 쓰고, 배우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br>『나이묻는 사회』는 나이를 지우자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우리 삶을 얼마나 깊이 규정하는지 똑바로 보자고 말하는 책이다. 나이를 숫자로만 여기자는 말은 위로가 될 수 있지만, 현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이는 숫자 이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이 하나로 사람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br>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나이가 아니라, 나이를 사람보다 먼저 보는 습관이다.&nbsp;그리고 내가 바라는 사회는 단순하다.&nbsp;청년이 아니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중년이어도 배울 수 있으며, 노년이어도 존엄하게 참여할 수 있는 사회.&nbsp;나이로 사람을 닫아 버리지 않는 사회.&nbsp;그런 사회에서라면,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덜 미워하고 조금 더 이해해 보려고 애쓸 수 있을 것이다.<br>#도서제공 #서평단]]></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150/k6921381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698413</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말하지 않는 마음을 다루는 법 - [그러니까 비밀이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7400</link><pubDate>Mon, 04 May 2026 20: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74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42137652&TPaperId=172574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5/42/coveroff/k54213765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42137652&TPaperId=172574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러니까 비밀이야</a><br/>박현숙 지음, 김진아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04월<br/></td></tr></table><br/>말하지 않는 마음을 다루는 법— 《그러니까 비밀이야》를 읽고<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니까 비밀이야》는 처음엔 단순한 생활동화처럼 보였다. 비밀을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아이, 그 말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끝내 “비밀은 지켜야 한다”는 교훈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질문을 품고 있었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 단순히 입조심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밀이 관계 안에서 어떤 힘을 가지는지, 폭로가 얼마나 쉽게 권력적 행위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른의 말이 아이에게 어떤 부담으로 전가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이클 슬레피언의 《비밀의 심리학》이 떠올랐다. 슬레피언은 비밀을 단순히 “말하지 않은 정보”가 아니라 “숨기려는 의도가 담긴 정보”로 설명한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모든 것이 비밀은 아니다. 어떤 것은 프라이버시이고, 어떤 것은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이며, 어떤 것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침묵이다. 하지만 그 안에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생기고, 그 의도가 관계 안에서 긴장과 부담을 만들 때 비로소 비밀은 마음의 사건이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비밀이야》 속 장수의 행동은 단순한 “입이 가벼운 아이”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장수는 작품 속에서 남의 말을 전하고 비밀을 폭로하는 버릇 때문에 자주 관계의 곤란을 겪는다. 그런데 장수의 첫 문제는 아이 개인의 결함만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장수는 자기 엄마가 민지네 엄마를 흉보는 말을 듣고, 그 말을 민지에게 전한다. 이후 그 말이 민지 엄마에게 알려지자 장수 엄마는 자신이 아이들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점은 돌아보지 않고, 말을 전한 아들 장수를 탓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이 대목이 가장 먼저 불편했다. 아이는 어른의 말을 그대로 흡수하고, 아직 그 말의 무게와 파장을 계산할 만큼 성숙하지 않다. 그런데 어른이 아이 앞에서 누군가를 험담해 놓고, 그 말이 밖으로 나갔을 때 아이만 꾸짖는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 아이가 말을 전한 것은 분명 문제일 수 있지만, 그 말을 아이 앞에 먼저 놓은 사람은 어른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장수가 입이 가볍다”는 설명에 앞서, 어른의 말이 얼마나 쉽게 아이의 관계를 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읽힌다. 말의 책임은 아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 앞에서 말하는 어른에게도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장수는 이후에도 비밀 앞에서 흔들린다. 어느 날 장수는 민지가 “나는 동민이 네가 좋아”라는 메시지가 적힌 선물을 포장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민지는 장수에게 자신이 아끼는 수입 필통과 연필을 선물하며, 어차피 동민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을 거라며 그 일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한다. 장수는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약속을 하지만, 그 비밀을 품은 뒤 얼굴이 누렇게 뜰 만큼 괴로워한다. 비밀은 장수에게 신뢰의 증표라기보다 감당하기 어려운 압력으로 작동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결국 장수는 전학 온 홍기에게 민지의 비밀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수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밀을 말하는 행위는 관계 안에서 힘을 가진다. 누군가의 좋아하는 마음, 부끄러운 마음, 아직 세상 밖으로 꺼낼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약한 부분을 공공의 장에 내놓는 일이다. 장수는 홍기가 그 말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한 번 입 밖으로 나온 비밀은 더 이상 장수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 홍기는 그 말을 떠들어대고, 민지는 모든 것을 알게 된 동민에게 모욕적인 거부를 당한다. 결국 민지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밀려나고, 아이들의 오해를 산 채 울음을 터트린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장면에서 《비밀의 심리학》의 문제의식이 다시 떠오른다. 비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관계적 행위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입을 다무는 기술만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마음을 내 흥밋거리나 거래 수단으로 쓰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반대로 폭로는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다. 사실이어도, 그것이 누군가의 약점을 드러내고 관계 안에서 그 사람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폭력에 가까워진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는 말은 종종 가장 무책임한 변명이다. 사실은 말하는 순간, 방향과 맥락을 얻는다. 그리고 그 방향은 누군가를 지킬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런 점에서 이 책의 가장 멋진 인물은 민지다. 민지는 자기 마음을 폭로당했고, 좋아하던 동민이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난처해졌다. 장수는 당연히 민지가 자신을 엄마에게 일러바칠 거라고 예상한다. 어쩌면 그것은 장수가 익숙하게 배워 온 관계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잘못하면 고발하고, 말하고, 관계의 벌을 받게 하는 방식, 장수는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민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민지는 비밀을 폭로한 장수를 용서한다. 그리고 이 용서는 단순히 착해서 가능한 행동이 아니다. 민지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주는 대신, 관계를 다시 선택하는 아이이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이 지점에서 민지가 정말 멋지다고 느꼈다. 민지는 완벽하게 성숙한 아이가 아니다. 상처받고, 울고, 부끄러워하고, 화도 난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상처를 타인의 파괴로 갚지 않는다. 자신이 폭로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똑같은 방식으로 장수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것은 어린아이에게 매우 어려운 소프트스킬이다. 자기감정을 알아차리는 능력, 억울함을 즉각적인 공격으로 바꾸지 않는 능력, 상대의 잘못을 보면서도 그 사람 전체를 폐기하지 않는 능력, 관계를 끝내기보다 다시 조율하는 능력. 이런 능력은 어른에게도 쉽지 않다.<br style="box-sizing: inherit;">민지의 용서 앞에서 장수도 변한다. 장수는 민지의 멋짐과 자신의 미안함을 느끼고, 선물을 건넨다. 민지도 답례 선물을 하며 둘은 친구가 된다. 이 결말이 좋은 이유는 장수가 단순히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서가 아니다. 장수는 말이 관계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다. 동시에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누군가에게 다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다. 관계는 처벌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때로는 용서받은 사람이 비로소 자기 잘못의 무게를 배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창작 노트에 담긴 작가의 자전적 고백도 이 작품을 더 깊게 만든다. 작가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도 남의 비밀을 말해 버리는 습관이 있었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았던 경험을 털어놓는다. 이 고백은 작품의 태도를 바꾼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위에서 내려다보며 “비밀을 지켜야 해”라고 훈계하지 않는다. 자신도 한때 말의 무게를 몰랐던 아이였음을 먼저 밝힌다. 그러므로 이 책의 목소리는 “너희는 조심해”가 아니라 “나도 그랬고, 그래서 이제는 함께 배워보자”에 가깝다. 그 자기반성 덕분에 이 이야기는 생활 교훈을 넘어 관계에 대한 사려 깊은 동화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니까 비밀이야》는 비밀을 무조건 지키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비밀이 관계 안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어떤 비밀은 누군가를 지키는 울타리가 되지만, 어떤 비밀은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된다. 어떤 폭로는 진실을 밝히는 일이지만, 어떤 폭로는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사용하는 권력 행위가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이 말이 누구를 지키고, 누구를 다치게 하는가.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약한 마음을 내 손에 쥐고 흔드는 일인가. 이 질문이 비밀을 다루는 윤리의 출발점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결국 이 책이 남기는 문장은 이것이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는 기술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리고 좋은 관계란 모든 것을 즉시 말해 버리는 관계가 아니라, 말해도 되는 것과 기다려야 하는 것을 함께 배워가는 관계다. 장수는 그 어려움을 배워가는 아이이고, 민지는 그 배움이 가능하도록 관계의 문을 닫아버리지 않는 아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비밀 그 자체가 아니라, 비밀 이후에도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는 마음의 힘이다.<br>#도서협찬 #특별한서재서평단<br style="box-sizing: inherit; color: rgb(20, 20, 21); font-size: 18px; text-indent: 18px;">]]></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5/42/cover150/k54213765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354262</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대한민국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 [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 - 대한민국 부동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5327</link><pubDate>Sun, 03 May 2026 16: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532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12137768&TPaperId=1725532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58/7/coveroff/k21213776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12137768&TPaperId=1725532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 - 대한민국 부동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a><br/>홍춘욱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03월<br/></td></tr></table><br/>&nbsp;대한민국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나&nbsp;&lt;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gt;를 읽고<br style="box-sizing: inherit;">구조 분석 : 부동산 불패 신화는 ‘기회의 독점’에서 태어났다<br style="box-sizing: inherit;">《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를 읽으며 내가 가장 선명하게 붙잡은 것은 이것이다.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단순히 집값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 기회, 금융, 개발, 기억이 한 공간에 응축되는 방식의 역사다. 사람들은 집을 욕망한 것이 아니라, 집이 품고 있는 기회를 욕망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지나치게 한곳에 몰렸기 때문에, 한국의 부동산은 거주 공간을 넘어 생존 전략이 되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조선 시대 한양은 이미 하나의 클러스터였다. 왕과 궁궐, 의정부와 육조, 과거와 성균관, 양반 네트워크와 혼맥, 정보와 관직의 가능성이 한양에 모여 있었다. 한양에 산다는 것은 단지 좋은 동네에 산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흐름을 더 빨리 듣고, 교육과 인맥에 접근하고, 가문의 재기 가능성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한양 10리 밖을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그는 오늘날의 의미에서 부동산 투자자라기보다, 공간이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사실을 아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웠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므로 한양의 집값은 단순한 땅값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앙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오늘의 서울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한양의 클러스터가 정치·관료·문화 자본 중심이었다면, 오늘의 서울은 정치, 금융, 교육, 의료, 기업 본사, 문화산업, 정보, 네트워크가 겹겹이 쌓인 초대형 복합 클러스터다. 사람들은 서울의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서울이 품고 있는 가능성에 값을 치른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한국의 집값은 땅의 가격이라기보다 기회의 밀도에 가깝다. 서울 집값이 오른 것은 서울의 공기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국가의 자원, 일자리, 학교, 병원, 교통, 문화, 정보가 그곳에 쌓였기 때문이다. 중심에 들어가면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기고, 중심 밖으로 밀려나면 삶의 선택지가 줄어든다. 결국 부동산 문제의 핵심은 “집이 부족한가”만이 아니라, 왜 모두가 특정한 공간에 들어가야만 살 수 있다고 느끼는가에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이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지점은, 그 집중이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국가와 권력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이다. 강남 개발은 우연히 생긴 도시 확장이 아니었다. 한강의 흐름을 바꾸고, 공유수면을 매립하고, 다리와 도로를 놓고, 그 위에 아파트와 경기장과 신도시를 세운 국가 주도 프로젝트였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종합운동장과 아시아선수촌 일대도 원래부터 단단한 땅이 아니라, 한강의 물길과 모래, 범람과 매립 위에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br style="box-sizing: inherit;">어린 시절의 동네는 내게 그저 생활의 배경이었다. 토끼와 산책하던 길, 종합운동장역 근처의 익숙한 풍경, 아시아선수촌의 나무와 길.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그 장소 밑에는 한강 개발, 강남 형성, 공유수면 매립, 개발이익, 정치자금, 국가 주도 성장의 역사가 깔려 있었다. 도시는 처음부터 도시가 아니었다. 누군가 강의 흐름을 바꾸고, 땅을 메우고, 교통망을 놓고, 그 위에 가격을 만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집을 얻었고, 누군가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누군가는 그곳을 자신의 유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여기서 부동산은 단순한 주거가 아니다. 그것은 개발 자금 조달 장치였고, 정치적 이해관계의 통로였고, 도시 권력을 재편하는 방식이었다. 정부는 사회간접자본을 만들 명분으로 땅을 개발했고, 건설사는 공유수면 위에 아파트를 세워 이익을 얻었고, 정치인과 관료는 개발 정보와 인허가 권한을 통해 이익의 중심에 접근했다. 시민은 그 결과로 만들어진 도시를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오래도록 보지 못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부동산에 이토록 몰렸을까. 답은 단순히 “한국인은 집을 좋아한다”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부동산 집착은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였다. 은행에 돈을 넣으면 물가에 녹고, 채권은 충분한 실질수익을 주지 못하고, 주식은 기업의 성과가 주주에게 제대로 돌아온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다. 대주주 중심 경영, 낮은 배당, 소액주주 보호 부족, 불투명한 지배구조는 주식을 장기 동업권이 아니라 불안정한 단기 매매판처럼 느끼게 했다.<br style="box-sizing: inherit;">반면 부동산은 눈에 보였다. 땅은 사라지지 않고, 아파트는 실물이며, 서울의 땅은 정부가 도로와 학교와 지하철과 병원으로 계속 밀어주는 자산이었다. 전세를 끼면 레버리지까지 가능했다. 예금, 채권, 주식이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결국 집으로 향했다. 부동산이 가장 훌륭한 자산이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다른 자산들이 믿을 만한 피난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동산이 국민적 자산 축적 수단이 된 것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여기에 화폐와 금융 질서의 문제도 겹친다. 금본위제든, 은본위제든, 원화 가치 고평가든, 금융 억압이든, 화폐 제도는 결코 중립적인 기술이 아니었다. 돈의 기준을 누가 정하고, 통화의 가치를 어떻게 묶고, 누구에게 유리한 금융 환경을 만드느냐에 따라 자산의 흐름은 달라졌다. 물가가 오르고, 돈의 가치가 흔들리고, 금융상품이 믿음을 주지 못할 때 사람들은 더 강하게 실물자산을 붙잡는다. 한국에서 그 실물자산의 최종 이름이 부동산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한국 부동산 불패 신화는 부동산 시장 하나가 만든 신화가 아니다. 그것은 중심에 집중된 기회, 국가 주도 개발, 금융시장에 대한 불신, 화폐 가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서울이라는 클러스터의 압도적 힘이 함께 만든 결과다. 집값은 오직 수요와 공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왜 그 집을 사야만 한다고 느끼는지, 왜 그 공간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삶의 추락처럼 느끼는지까지 보아야 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점에서 부동산 대책이 매번 실패하는 이유도 선명해진다. 정부가 정말 집값을 잡고 싶다면 집의 숫자만 볼 것이 아니라, 기회의 배치 자체를 바꿔야 한다. 지방에서도 존엄하게 살 수 있어야 하고, 좋은 일자리와 교육과 의료와 문화가 흩어져야 한다. 주식시장은 장기 투자자에게 신뢰를 주어야 하고, 금융시장은 실질적인 자산 형성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시 서울의 아파트로 몰릴 것이다. 그것은 탐욕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다는 구조적 공포이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이 내게 보여준 것은 한국 부동산의 역사가 “집값이 왜 올랐는가”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왜 어떤 공간에는 기회가 쌓이고, 어떤 공간은 주변으로 밀려나는가의 역사다. 조선의 한양에서 오늘의 서울까지, 중심은 늘 사람을 끌어당겼고, 사람은 다시 중심의 가격을 밀어 올렸다. 문제는 클러스터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클러스터가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처럼 작동할 때다. 중심이 너무 강하면 주변은 선택지가 아니라 유배지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부동산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다. 집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집은 권력에 가까워지는 통로이고, 미래를 보험 드는 방식이며, 불안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붙잡은 마지막 안전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집은 누군가를 계속 중심 밖으로 밀어내는 장치이기도 하다.<br style="box-sizing: inherit;">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집값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회의 지도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문제다. 그리고 그 기울어진 지도 위에서 사람들은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을 가능성을 사고 있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2. 생활인의 측면에서 본 부동산, 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를 읽고 세종시를 다시 보다<br style="box-sizing: inherit;">《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를 읽고 가장 섬뜩했던 것은 앞서 분석했듯 부동산 문제가 단순히 집값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집값은 언제나 도로, 철도, 행정기관, 산업, 상권, 인구 이동과 함께 움직였다. 저자는 서울과 강남 개발의 역사를 통해 교통 인프라가 어떻게 특정 지역의 가치를 밀어 올리고, 도시의 방향을 바꾸며, 부동산 가격의 토대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사는 세종시가 떠올랐다.<br style="box-sizing: inherit;">세종시는 행정수도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체감하는 세종은 자족도시라기보다,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거대한 주거 실험장에 가깝다. 생활권은 1생활권에서 6생활권까지 계속 넓어졌고, 아파트는 끊임없이 들어섰다. 하지만 도시가 넓어진 만큼 활기도 함께 번졌는가 묻는다면, 대답은 쉽지 않다. 세종 전역에서 그나마 활기가 있다고 느껴지는 상권은 나성동 정도다. 다른 생활권의 상가는 비어 있거나, 들어왔다가 사라지고, 새 건물 1층은 반짝 깨끗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공실의 얼굴을 갖는다.<br style="box-sizing: inherit;">문제는 상가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가는 너무 많다. 문제는 그 상가를 먹여 살릴 소비층이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세종에는 안정적 행정 수요는 있지만, 도시 전체를 지속적으로 순환시킬 만큼의 생산인구와 민간 산업 기반이 약하다. 많은 주민은 공무원 계층이거나, 아파트에 영끌한 하우스푸어이거나, 이미 생존을 고민하는 자영업자다. 소비를 폭발적으로 감당할 계층이 두텁지 않다. 그런데도 상가는 계속 분양되고, 아파트는 계속 공급되며, 생활권은 계속 확장된다. 수요를 먼저 읽은 도시가 아니라, 공급을 먼저 밀어붙인 도시처럼 보인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지점에서 저자가 지적한 교통 인프라 분석이 날카롭게 들어온다. 도시의 가치는 교통과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교통은 단순히 길을 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길은 사람을 모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도 있다. 세종의 도로와 고속도로는 행정도시를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내가 매일 체감하는 출근길은 조금 다르게 말한다. 아침이면 정안IC와 대전 방향이 꽉 막힌다. 많은 사람이 세종에서 자고, 다른 도시로 일하러 나간다. 도시는 사람을 붙잡아야 하는데, 세종의 교통은 매일 아침 사람들을 밖으로 흘려보낸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장면은 단순한 교통 체증이 아니다. 세종시가 자족도시가 아니라 베드타운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이 그 도시에서 자고, 다른 도시에서 일하고, 다시 돌아와 잠만 잔다면 그 도시의 상권은 살아나기 어렵다. 낮 시간의 소비와 노동과 관계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도시가 살아 있으려면 출근하는 사람만 있어서는 안 된다. 머무는 사람, 돈을 쓰는 사람, 일하는 사람, 걷는 사람, 저녁에도 불을 켜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종은 많은 구역에서 아파트의 불빛은 있어도 거리의 밀도는 약하다.<br style="box-sizing: inherit;">특히 내가 입주자로서 가장 강하게 느끼는 문제는 상가 분양이 실제 구매 수요층을 전혀 타겟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상권은 단순히 “입주민이 몇 명이다”라는 숫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어떤 소득 구조를 가졌는지, 하루 중 어디에 머무는지, 어떤 소비를 반복하는지, 도보로 움직이는지 차량으로 이동하는지까지 보아야 한다. 그런데 세종의 많은 상가는 이런 생활 동선을 읽지 못한 채 분양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걸어 다니지 않는 곳에 점포를 놓고, 소비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 과도한 상업 면적을 배치하고, 이미 나성동 같은 중심 상권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비 흐름을 무시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 결과는 공실이다. 아파트는 늘어나지만 상가는 비고, 건물은 새것인데 거리는 낡아 보인다. 막 지은 상가가 몇 년 지나지 않아 유령 건물처럼 변하는 장면은 세종시의 가장 아픈 풍경 중 하나다. 도시가 성장한다면 새 건물에는 사람이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세종에서는 새 건물이 먼저 생기고, 그 건물을 채울 생활은 뒤따라오지 못한다. 이는 도시계획의 실패이자, 부동산 공급 논리의 오만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조치원에서 계획되던 800세대 민간 아파트 분양이 시작도 전에 엎어진 일이나, 1300세대 규모의 아파트가 모델하우스만 남긴 채 사업 개발 없이 방치된 사례도 이 흐름 속에서 읽힌다. 이것은 단순한 개별 사업의 부진이 아니다. “세종이면 된다”는 믿음이 더 이상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행정수도 프리미엄, 정부 이전 기대, 수도권 대체지라는 말만으로 모든 주택 수요가 흡수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결국 묻는다. 여기서 일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장사할 수 있는가. 여기서 아이를 키우고, 늙고, 병원에 가고, 걸어서 소비하고, 삶을 꾸릴 수 있는가.<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런데도 세종의 집값은 정부 이전 이슈와 행정수도 기대를 먹고 4억, 5억을 넘는다. 이 기형성이 나를 답답하게 한다. 도시의 생활경제는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는데, 주택 가격은 정치적 기대를 선반영한다. 상권은 지방 중소도시처럼 마르는데, 아파트 가격은 수도권의 꿈을 따라간다. 이때 부동산은 주거가 아니라 기대의 증권이 된다. 집은 사는 곳이 아니라, 언젠가 더 비싸질지도 모른다는 믿음의 단위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나 도시는 믿음만으로 살아나지 않는다. 도시에는 일자리가 필요하고, 산업이 필요하고, 걸을 수 있는 거리와 소비할 수 있는 계층과 머무를 이유가 필요하다. 행정기관은 도시의 중심 기능이 될 수 있지만, 행정기관만으로 도시 전체가 살아나지는 않는다. 공무원 도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간 기업, 연구기관, 대학, 병원, 문화시설, 생산 노동, 청년 창업, 지역 상권이 함께 돌아야 도시가 숨을 쉰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저자의 분석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부동산 가격은 허공에서 오르지 않는다. 도로가 놓이고, 철도가 연결되고, 행정 기능이 이전하고, 개발 이익이 기대되고, 사람이 몰리며 오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요한 질문이 빠지면 도시는 병든다. 그 인프라가 사람을 머물게 하는가, 아니면 빠져나가게 하는가. 그 아파트가 실제 삶의 수요인가, 아니면 분양을 위한 숫자인가. 그 상가가 소비자를 만나는가, 아니면 투자자를 속이는 상품인가. 그 도시는 자족하는가, 아니면 정치적 구호 위에 세워진 거대한 베드타운인가.<br style="box-sizing: inherit;">내가 세종을 보며 느끼는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종은 도시를 만들었다기보다, 아파트 단지를 넓게 펼쳐놓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생활권은 확장되었지만 생활은 충분히 밀도 있게 형성되지 못했고, 교통망은 연결되었지만 그 연결은 도시 내부의 활력을 키우기보다 사람들을 외부로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었다. 상가는 공급되었지만 소비자는 부족하고, 집값은 올랐지만 삶의 체감은 그만큼 따라오지 않는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것은 세종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국 부동산의 오래된 습관이 세종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먼저 땅을 정하고, 길을 놓고, 아파트를 짓고, 상가를 분양하면 도시가 생길 것이라고 믿는 습관. 그러나 도시는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는 것이다. 콘크리트가 올라간다고 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머물고, 일하고, 소비하고, 관계 맺고, 다시 돌아오고 싶어질 때 비로소 도시는 도시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나는 세종의 문제를 단순히 “집값이 비싸다”거나 “상권이 약하다”는 말로만 보고 싶지 않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세종은 누구를 위한 도시인가. 이 도시는 행정기관을 위한 도시인가, 아파트 분양을 위한 도시인가, 아니면 실제로 살아가는 주민을 위한 도시인가. 만약 주민을 위한 도시라면, 더 이상 아파트 숫자와 생활권 확장만으로 성장을 말해서는 안 된다. 생산인구, 민간 일자리, 소비력, 교통 동선, 상권 밀도, 보행 가능성, 지역 내 순환 경제를 함께 보아야 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집값은 오를 수 있다. 아파트 역시 팔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도시는 성공하지 않는다. 공실이 늘고, 출근길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상권이 한두 곳에만 몰리고, 주민들이 대출을 갚느라 소비를 줄이는 도시라면 그곳은 성장하는 도시가 아니라 버티는 도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세종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 도시는 아직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방식으로는 위험하다. 행정수도라는 이름만으로 도시경제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아파트 공급만으로 생활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교통 인프라만으로 자족성은 생기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집들을 떠받칠 삶의 구조가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부동산의 역사는 결국 도시의 역사이고, 도시의 역사는 사람이 어디에서 일하고 어디에서 살며 어디에서 소비하는가의 역사다. 세종시가 정말 살아 있는 도시가 되려면, 이제는 더 많은 아파트가 아니라 더 깊은 생활의 밀도를 물어야 한다. 집값이 아니라 도시의 숨을 보아야 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58/7/cover150/k21213776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580719</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