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뚱냥다독님의 서재 (뚱냥다독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서평단 활동/ 읽은 책 서평 글 씁니다. </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14 May 2026 05:26:54 +0900</lastBuildDate><image><title>뚱냥다독</title><url>http://image.alad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뚱냥다독</description></image><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기 위해서 - [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7517</link><pubDate>Mon, 04 May 2026 21: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751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5751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off/k6921381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25751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a><br/>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나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기 위하여— 『나이 묻는 사회』 를 읽고<br>제2의 커리어를 제대로 쌓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막연한 전환이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설계하고 싶었다. 공부하고, 배우고, 다른 직업의 가능성을 열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지역 커뮤니티 센터나 각종 교육 지원 제도를 찾아보면 나는 자주 ‘대상자’가 아니었다. 34세 미만 청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br>그때 나는 묘하게 서러웠다. 내가 늙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느끼는 시기였다. 그런데 제도는 나를 청년이 아니라고 잘라냈고, 사회는 동시에 나를 완성된 어른처럼 취급했다. 다시 배우고 싶은 사람, 새 커리어를 만들고 싶은 사람, 아직 자기 삶의 다음 장을 준비하는 사람으로는 좀처럼 읽어 주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였다. 나이는 사회가 사람을 분류하고, 가능성을 배분하고, 지원 자격을 끊어 내는 현실의 장치다.<br>『나이묻는 사회』는 바로 이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 말은 듣기에는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나이가 결코 숫자에 머물지 않는다. 나이는 취업 가능성, 정책 지원, 관계의 서열, 호칭, 농담, 멸칭, 심지어 한 사람의 매력과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노년 혐오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연령을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고, 평가하고, 배제하는 방식이다.<br>특히 내게 강하게 와닿은 것은 중년 혐오의 결이었다. 우리는 노인 혐오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말한다. ‘틀딱’, ‘연금충’, ‘노인 민폐’ 같은 말의 폭력성은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그러나 중년을 향한 혐오는 더 애매한 얼굴로 온다. 그것은 농담처럼, 유행어처럼, 세대 감각의 평가처럼 등장한다. ‘아재’, ‘개저씨’, ‘아줌마’, ‘영포티’, ‘스윗 영포티’ 같은 말들은 처음에는 가벼운 호칭이나 조롱처럼 보이지만, 반복될수록 중년이라는 나이대를 특정한 이미지 안에 가둔다.<br>중년 남성은 쉽게 무능하고 권위적이며 시대에 뒤처진 존재로 묶인다. 중년 여성은 생활감, 억척스러움, 촌스러움, 성적 비가시성, 민폐성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아줌마”라는 말을 들을 때 묘하게 기분이 나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이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좀처럼 중립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한 여성을 한 사람으로 부르는 말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놓은 중년 여성의 낡은 이미지 안으로 밀어 넣는 말처럼 들린다.<br>나는 내 나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이 하나로 해석되고 싶지 않다. 나는 아줌마이기 전에 독자이고, 작가이고, 강사이고, 수험생이고,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이 멸칭은 이 모든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우고, 사람을 하나의 연령 이미지로 단순화한다. 이것이 이 책이 말하는 연령차별의 핵심이다. 나이는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인데, 사회는 자꾸 나이를 그 사람 전체처럼 다룬다.<br>더 불편한 것은 긍정적인 말조차 쉽게 부정적인 뉘앙스로 바뀐다는 점이다. 40대가 자기 관리를 하고, 시대 변화에 적응하고, 감각을 유지하려 하면 본래는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젊은 척한다”는 조롱으로 번역된다. “영포티”라는 말이 그렇다. 젊게 살고, 건강하게 살고, 자기 삶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는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것을 온전히 긍정하지 않는다. 40대가 아직 자기 삶의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 순간, 누군가는 그 욕망을 우스운 것으로 만든다.<br>이것은 단순히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중년에게 허락된 자리가 너무 좁기 때문이다. 중년은 위로부터는 아직 젊다며 더 일하라고 요구 받고, 아래로부터는 이미 기성세대라며 책임을 요구 받는다. 제도적으로는 청년 지원에서 밀려나고, 사회적으로는 완성된 어른처럼 취급되며, 노동시장에서는 변화에 뒤처지지 말라고 압박받는다. 그러나 정작 다시 배우고,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 수 있는 구조적 지원은 충분하지 않다.<br>내가 청년 지원 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속상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특혜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 배울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사회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제도는 나를 “이미 청년이 아닌 사람”으로 분류했고, 그 분류는 생각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청년이 아니면 무엇인가. 중년인가. 그렇다면 중년은 이미 자기 앞가림을 끝낸 사람인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중년의 불안과 욕망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br>『나이 묻는 사회』가 중요한 이유는 이런 질문을 개인의 예민함으로 치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나이에 관한 멸칭과 농담이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와 제도와 관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언어는 생각의 껍데기가 아니다. 언어는 생각의 길이다. “아줌마”, “아재”, “영포티”, “꼰대” 같은 말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개별 인간을 보기 전에 연령 이미지를 먼저 본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진 이미지는 고용, 관계, 정책, 미디어 재현 속에서 다시 차별을 강화한다.<br>차별은 늘 게으른 사고와 손잡는다. 한 사람을 제대로 보려면 오래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삶, 직업, 몸, 실패, 배움, 변화 가능성을 봐야 한다. 그러나 멸칭은 빠르다. “아줌마”라고 부르면 생활감과 촌스러움이 따라오고, “영포티”라고 부르면 젊은 척하는 중년의 이미지가 따라오고, “꼰대”라고 부르면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라는 판정이 따라온다. 구조를 분석하는 일은 어렵고 느리지만, 사람을 조롱하는 일은 쉽고 빠르다. 그래서 불안한 사회일수록 언어는 짧아지고, 짧아진 언어는 다시 인간을 작게 만든다.<br>나는 이 책을 읽으며 중년 혐오가 단순히 젊은 세대가 중년을 싫어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각 세대가 자기 자리를 잃었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불안이 서로를 향한 칼날이 된 결과에 가깝다. 청년은 시작할 자리가 없다고 느끼고, 중년은 다시 시작할 권리를 잃었다고 느끼며, 노년은 쓸모없는 존재로 밀려난다고 느낀다. 그런데 분노는 구조가 아니라 가까운 타 연령대에게 향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경쟁자로 오해한다.<br>나이는 원래 그렇게 서로를 밀어내기 위한 기준이 아니어야 한다. 나이는 삶의 한 과정이고, 각 시기마다 다른 욕망과 가능성과 취약성을 가진다. 청년에게는 출발의 지원이 필요하고, 중년에게는 전환의 지원이 필요하며, 노년에게는 존엄한 지속의 지원이 필요하다. 어느 한 세대의 몫을 다른 세대가 빼앗는 방식이 아니라, 각 생애 단계가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br>나는 더 이상 청년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배움과 전환의 권리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아줌마로 불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나의 이름과 꿈과 능력과 욕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읽고, 쓰고, 배우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br>『나이묻는 사회』는 나이를 지우자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우리 삶을 얼마나 깊이 규정하는지 똑바로 보자고 말하는 책이다. 나이를 숫자로만 여기자는 말은 위로가 될 수 있지만, 현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이는 숫자 이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이 하나로 사람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br>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나이가 아니라, 나이를 사람보다 먼저 보는 습관이다.&nbsp;그리고 내가 바라는 사회는 단순하다.&nbsp;청년이 아니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중년이어도 배울 수 있으며, 노년이어도 존엄하게 참여할 수 있는 사회.&nbsp;나이로 사람을 닫아 버리지 않는 사회.&nbsp;그런 사회에서라면,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덜 미워하고 조금 더 이해해 보려고 애쓸 수 있을 것이다.<br>#도서제공 #서평단]]></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150/k6921381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698413</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말하지 않는 마음을 다루는 법 - [그러니까 비밀이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7400</link><pubDate>Mon, 04 May 2026 20:1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740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42137652&TPaperId=1725740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5/42/coveroff/k54213765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42137652&TPaperId=1725740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러니까 비밀이야</a><br/>박현숙 지음, 김진아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04월<br/></td></tr></table><br/>말하지 않는 마음을 다루는 법— 《그러니까 비밀이야》를 읽고<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니까 비밀이야》는 처음엔 단순한 생활동화처럼 보였다. 비밀을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아이, 그 말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끝내 “비밀은 지켜야 한다”는 교훈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질문을 품고 있었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 단순히 입조심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밀이 관계 안에서 어떤 힘을 가지는지, 폭로가 얼마나 쉽게 권력적 행위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른의 말이 아이에게 어떤 부담으로 전가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이클 슬레피언의 《비밀의 심리학》이 떠올랐다. 슬레피언은 비밀을 단순히 “말하지 않은 정보”가 아니라 “숨기려는 의도가 담긴 정보”로 설명한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모든 것이 비밀은 아니다. 어떤 것은 프라이버시이고, 어떤 것은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이며, 어떤 것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침묵이다. 하지만 그 안에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생기고, 그 의도가 관계 안에서 긴장과 부담을 만들 때 비로소 비밀은 마음의 사건이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비밀이야》 속 장수의 행동은 단순한 “입이 가벼운 아이”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장수는 작품 속에서 남의 말을 전하고 비밀을 폭로하는 버릇 때문에 자주 관계의 곤란을 겪는다. 그런데 장수의 첫 문제는 아이 개인의 결함만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장수는 자기 엄마가 민지네 엄마를 흉보는 말을 듣고, 그 말을 민지에게 전한다. 이후 그 말이 민지 엄마에게 알려지자 장수 엄마는 자신이 아이들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점은 돌아보지 않고, 말을 전한 아들 장수를 탓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이 대목이 가장 먼저 불편했다. 아이는 어른의 말을 그대로 흡수하고, 아직 그 말의 무게와 파장을 계산할 만큼 성숙하지 않다. 그런데 어른이 아이 앞에서 누군가를 험담해 놓고, 그 말이 밖으로 나갔을 때 아이만 꾸짖는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 아이가 말을 전한 것은 분명 문제일 수 있지만, 그 말을 아이 앞에 먼저 놓은 사람은 어른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장수가 입이 가볍다”는 설명에 앞서, 어른의 말이 얼마나 쉽게 아이의 관계를 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읽힌다. 말의 책임은 아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 앞에서 말하는 어른에게도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장수는 이후에도 비밀 앞에서 흔들린다. 어느 날 장수는 민지가 “나는 동민이 네가 좋아”라는 메시지가 적힌 선물을 포장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민지는 장수에게 자신이 아끼는 수입 필통과 연필을 선물하며, 어차피 동민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을 거라며 그 일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한다. 장수는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약속을 하지만, 그 비밀을 품은 뒤 얼굴이 누렇게 뜰 만큼 괴로워한다. 비밀은 장수에게 신뢰의 증표라기보다 감당하기 어려운 압력으로 작동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결국 장수는 전학 온 홍기에게 민지의 비밀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수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밀을 말하는 행위는 관계 안에서 힘을 가진다. 누군가의 좋아하는 마음, 부끄러운 마음, 아직 세상 밖으로 꺼낼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약한 부분을 공공의 장에 내놓는 일이다. 장수는 홍기가 그 말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한 번 입 밖으로 나온 비밀은 더 이상 장수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 홍기는 그 말을 떠들어대고, 민지는 모든 것을 알게 된 동민에게 모욕적인 거부를 당한다. 결국 민지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밀려나고, 아이들의 오해를 산 채 울음을 터트린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장면에서 《비밀의 심리학》의 문제의식이 다시 떠오른다. 비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관계적 행위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입을 다무는 기술만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마음을 내 흥밋거리나 거래 수단으로 쓰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반대로 폭로는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다. 사실이어도, 그것이 누군가의 약점을 드러내고 관계 안에서 그 사람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폭력에 가까워진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는 말은 종종 가장 무책임한 변명이다. 사실은 말하는 순간, 방향과 맥락을 얻는다. 그리고 그 방향은 누군가를 지킬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런 점에서 이 책의 가장 멋진 인물은 민지다. 민지는 자기 마음을 폭로당했고, 좋아하던 동민이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난처해졌다. 장수는 당연히 민지가 자신을 엄마에게 일러바칠 거라고 예상한다. 어쩌면 그것은 장수가 익숙하게 배워 온 관계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잘못하면 고발하고, 말하고, 관계의 벌을 받게 하는 방식, 장수는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민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민지는 비밀을 폭로한 장수를 용서한다. 그리고 이 용서는 단순히 착해서 가능한 행동이 아니다. 민지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주는 대신, 관계를 다시 선택하는 아이이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이 지점에서 민지가 정말 멋지다고 느꼈다. 민지는 완벽하게 성숙한 아이가 아니다. 상처받고, 울고, 부끄러워하고, 화도 난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상처를 타인의 파괴로 갚지 않는다. 자신이 폭로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똑같은 방식으로 장수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것은 어린아이에게 매우 어려운 소프트스킬이다. 자기감정을 알아차리는 능력, 억울함을 즉각적인 공격으로 바꾸지 않는 능력, 상대의 잘못을 보면서도 그 사람 전체를 폐기하지 않는 능력, 관계를 끝내기보다 다시 조율하는 능력. 이런 능력은 어른에게도 쉽지 않다.<br style="box-sizing: inherit;">민지의 용서 앞에서 장수도 변한다. 장수는 민지의 멋짐과 자신의 미안함을 느끼고, 선물을 건넨다. 민지도 답례 선물을 하며 둘은 친구가 된다. 이 결말이 좋은 이유는 장수가 단순히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서가 아니다. 장수는 말이 관계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다. 동시에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누군가에게 다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다. 관계는 처벌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때로는 용서받은 사람이 비로소 자기 잘못의 무게를 배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창작 노트에 담긴 작가의 자전적 고백도 이 작품을 더 깊게 만든다. 작가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도 남의 비밀을 말해 버리는 습관이 있었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았던 경험을 털어놓는다. 이 고백은 작품의 태도를 바꾼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위에서 내려다보며 “비밀을 지켜야 해”라고 훈계하지 않는다. 자신도 한때 말의 무게를 몰랐던 아이였음을 먼저 밝힌다. 그러므로 이 책의 목소리는 “너희는 조심해”가 아니라 “나도 그랬고, 그래서 이제는 함께 배워보자”에 가깝다. 그 자기반성 덕분에 이 이야기는 생활 교훈을 넘어 관계에 대한 사려 깊은 동화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니까 비밀이야》는 비밀을 무조건 지키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비밀이 관계 안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어떤 비밀은 누군가를 지키는 울타리가 되지만, 어떤 비밀은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된다. 어떤 폭로는 진실을 밝히는 일이지만, 어떤 폭로는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사용하는 권력 행위가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이 말이 누구를 지키고, 누구를 다치게 하는가.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약한 마음을 내 손에 쥐고 흔드는 일인가. 이 질문이 비밀을 다루는 윤리의 출발점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결국 이 책이 남기는 문장은 이것이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는 기술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리고 좋은 관계란 모든 것을 즉시 말해 버리는 관계가 아니라, 말해도 되는 것과 기다려야 하는 것을 함께 배워가는 관계다. 장수는 그 어려움을 배워가는 아이이고, 민지는 그 배움이 가능하도록 관계의 문을 닫아버리지 않는 아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비밀 그 자체가 아니라, 비밀 이후에도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는 마음의 힘이다.<br>#도서협찬 #특별한서재서평단<br style="box-sizing: inherit; color: rgb(20, 20, 21); font-size: 18px; text-indent: 18px;">]]></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35/42/cover150/k54213765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354262</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대한민국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 [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 - 대한민국 부동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5327</link><pubDate>Sun, 03 May 2026 16: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5532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12137768&TPaperId=1725532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58/7/coveroff/k21213776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12137768&TPaperId=1725532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 - 대한민국 부동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a><br/>홍춘욱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03월<br/></td></tr></table><br/>&nbsp;대한민국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나&nbsp;&lt;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gt;를 읽고<br style="box-sizing: inherit;">구조 분석 : 부동산 불패 신화는 ‘기회의 독점’에서 태어났다<br style="box-sizing: inherit;">《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를 읽으며 내가 가장 선명하게 붙잡은 것은 이것이다.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단순히 집값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 기회, 금융, 개발, 기억이 한 공간에 응축되는 방식의 역사다. 사람들은 집을 욕망한 것이 아니라, 집이 품고 있는 기회를 욕망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지나치게 한곳에 몰렸기 때문에, 한국의 부동산은 거주 공간을 넘어 생존 전략이 되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조선 시대 한양은 이미 하나의 클러스터였다. 왕과 궁궐, 의정부와 육조, 과거와 성균관, 양반 네트워크와 혼맥, 정보와 관직의 가능성이 한양에 모여 있었다. 한양에 산다는 것은 단지 좋은 동네에 산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흐름을 더 빨리 듣고, 교육과 인맥에 접근하고, 가문의 재기 가능성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정약용이 자식들에게 “한양 10리 밖을 벗어나지 말라”고 당부한 것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그는 오늘날의 의미에서 부동산 투자자라기보다, 공간이 사람의 운명을 바꾼다는 사실을 아는 현실주의자에 가까웠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므로 한양의 집값은 단순한 땅값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앙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가격이었다. 오늘의 서울도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한양의 클러스터가 정치·관료·문화 자본 중심이었다면, 오늘의 서울은 정치, 금융, 교육, 의료, 기업 본사, 문화산업, 정보, 네트워크가 겹겹이 쌓인 초대형 복합 클러스터다. 사람들은 서울의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서울이 품고 있는 가능성에 값을 치른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한국의 집값은 땅의 가격이라기보다 기회의 밀도에 가깝다. 서울 집값이 오른 것은 서울의 공기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국가의 자원, 일자리, 학교, 병원, 교통, 문화, 정보가 그곳에 쌓였기 때문이다. 중심에 들어가면 더 많은 선택지가 생기고, 중심 밖으로 밀려나면 삶의 선택지가 줄어든다. 결국 부동산 문제의 핵심은 “집이 부족한가”만이 아니라, 왜 모두가 특정한 공간에 들어가야만 살 수 있다고 느끼는가에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이 더 날카롭게 느껴지는 지점은, 그 집중이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국가와 권력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이다. 강남 개발은 우연히 생긴 도시 확장이 아니었다. 한강의 흐름을 바꾸고, 공유수면을 매립하고, 다리와 도로를 놓고, 그 위에 아파트와 경기장과 신도시를 세운 국가 주도 프로젝트였다. 내가 어린 시절 살던 종합운동장과 아시아선수촌 일대도 원래부터 단단한 땅이 아니라, 한강의 물길과 모래, 범람과 매립 위에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br style="box-sizing: inherit;">어린 시절의 동네는 내게 그저 생활의 배경이었다. 토끼와 산책하던 길, 종합운동장역 근처의 익숙한 풍경, 아시아선수촌의 나무와 길.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그 장소 밑에는 한강 개발, 강남 형성, 공유수면 매립, 개발이익, 정치자금, 국가 주도 성장의 역사가 깔려 있었다. 도시는 처음부터 도시가 아니었다. 누군가 강의 흐름을 바꾸고, 땅을 메우고, 교통망을 놓고, 그 위에 가격을 만들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집을 얻었고, 누군가는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누군가는 그곳을 자신의 유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여기서 부동산은 단순한 주거가 아니다. 그것은 개발 자금 조달 장치였고, 정치적 이해관계의 통로였고, 도시 권력을 재편하는 방식이었다. 정부는 사회간접자본을 만들 명분으로 땅을 개발했고, 건설사는 공유수면 위에 아파트를 세워 이익을 얻었고, 정치인과 관료는 개발 정보와 인허가 권한을 통해 이익의 중심에 접근했다. 시민은 그 결과로 만들어진 도시를 삶의 터전으로 받아들였지만, 그 도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오래도록 보지 못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부동산에 이토록 몰렸을까. 답은 단순히 “한국인은 집을 좋아한다”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부동산 집착은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였다. 은행에 돈을 넣으면 물가에 녹고, 채권은 충분한 실질수익을 주지 못하고, 주식은 기업의 성과가 주주에게 제대로 돌아온다는 믿음을 주지 못했다. 대주주 중심 경영, 낮은 배당, 소액주주 보호 부족, 불투명한 지배구조는 주식을 장기 동업권이 아니라 불안정한 단기 매매판처럼 느끼게 했다.<br style="box-sizing: inherit;">반면 부동산은 눈에 보였다. 땅은 사라지지 않고, 아파트는 실물이며, 서울의 땅은 정부가 도로와 학교와 지하철과 병원으로 계속 밀어주는 자산이었다. 전세를 끼면 레버리지까지 가능했다. 예금, 채권, 주식이 충분한 신뢰를 주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결국 집으로 향했다. 부동산이 가장 훌륭한 자산이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다른 자산들이 믿을 만한 피난처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부동산이 국민적 자산 축적 수단이 된 것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여기에 화폐와 금융 질서의 문제도 겹친다. 금본위제든, 은본위제든, 원화 가치 고평가든, 금융 억압이든, 화폐 제도는 결코 중립적인 기술이 아니었다. 돈의 기준을 누가 정하고, 통화의 가치를 어떻게 묶고, 누구에게 유리한 금융 환경을 만드느냐에 따라 자산의 흐름은 달라졌다. 물가가 오르고, 돈의 가치가 흔들리고, 금융상품이 믿음을 주지 못할 때 사람들은 더 강하게 실물자산을 붙잡는다. 한국에서 그 실물자산의 최종 이름이 부동산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한국 부동산 불패 신화는 부동산 시장 하나가 만든 신화가 아니다. 그것은 중심에 집중된 기회, 국가 주도 개발, 금융시장에 대한 불신, 화폐 가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서울이라는 클러스터의 압도적 힘이 함께 만든 결과다. 집값은 오직 수요와 공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왜 그 집을 사야만 한다고 느끼는지, 왜 그 공간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삶의 추락처럼 느끼는지까지 보아야 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점에서 부동산 대책이 매번 실패하는 이유도 선명해진다. 정부가 정말 집값을 잡고 싶다면 집의 숫자만 볼 것이 아니라, 기회의 배치 자체를 바꿔야 한다. 지방에서도 존엄하게 살 수 있어야 하고, 좋은 일자리와 교육과 의료와 문화가 흩어져야 한다. 주식시장은 장기 투자자에게 신뢰를 주어야 하고, 금융시장은 실질적인 자산 형성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다시 서울의 아파트로 몰릴 것이다. 그것은 탐욕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다는 구조적 공포이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이 내게 보여준 것은 한국 부동산의 역사가 “집값이 왜 올랐는가”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왜 어떤 공간에는 기회가 쌓이고, 어떤 공간은 주변으로 밀려나는가의 역사다. 조선의 한양에서 오늘의 서울까지, 중심은 늘 사람을 끌어당겼고, 사람은 다시 중심의 가격을 밀어 올렸다. 문제는 클러스터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클러스터가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처럼 작동할 때다. 중심이 너무 강하면 주변은 선택지가 아니라 유배지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부동산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되었다. 집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집은 권력에 가까워지는 통로이고, 미래를 보험 드는 방식이며, 불안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붙잡은 마지막 안전판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집은 누군가를 계속 중심 밖으로 밀어내는 장치이기도 하다.<br style="box-sizing: inherit;">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집값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회의 지도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문제다. 그리고 그 기울어진 지도 위에서 사람들은 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을 가능성을 사고 있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2. 생활인의 측면에서 본 부동산, 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를 읽고 세종시를 다시 보다<br style="box-sizing: inherit;">《대한민국 부동산의 역사》를 읽고 가장 섬뜩했던 것은 앞서 분석했듯 부동산 문제가 단순히 집값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집값은 언제나 도로, 철도, 행정기관, 산업, 상권, 인구 이동과 함께 움직였다. 저자는 서울과 강남 개발의 역사를 통해 교통 인프라가 어떻게 특정 지역의 가치를 밀어 올리고, 도시의 방향을 바꾸며, 부동산 가격의 토대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가 사는 세종시가 떠올랐다.<br style="box-sizing: inherit;">세종시는 행정수도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그러나 생활인으로서 체감하는 세종은 자족도시라기보다,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거대한 주거 실험장에 가깝다. 생활권은 1생활권에서 6생활권까지 계속 넓어졌고, 아파트는 끊임없이 들어섰다. 하지만 도시가 넓어진 만큼 활기도 함께 번졌는가 묻는다면, 대답은 쉽지 않다. 세종 전역에서 그나마 활기가 있다고 느껴지는 상권은 나성동 정도다. 다른 생활권의 상가는 비어 있거나, 들어왔다가 사라지고, 새 건물 1층은 반짝 깨끗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공실의 얼굴을 갖는다.<br style="box-sizing: inherit;">문제는 상가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가는 너무 많다. 문제는 그 상가를 먹여 살릴 소비층이 충분하지 않다는 데 있다. 세종에는 안정적 행정 수요는 있지만, 도시 전체를 지속적으로 순환시킬 만큼의 생산인구와 민간 산업 기반이 약하다. 많은 주민은 공무원 계층이거나, 아파트에 영끌한 하우스푸어이거나, 이미 생존을 고민하는 자영업자다. 소비를 폭발적으로 감당할 계층이 두텁지 않다. 그런데도 상가는 계속 분양되고, 아파트는 계속 공급되며, 생활권은 계속 확장된다. 수요를 먼저 읽은 도시가 아니라, 공급을 먼저 밀어붙인 도시처럼 보인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지점에서 저자가 지적한 교통 인프라 분석이 날카롭게 들어온다. 도시의 가치는 교통과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교통은 단순히 길을 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길은 사람을 모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도 있다. 세종의 도로와 고속도로는 행정도시를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내가 매일 체감하는 출근길은 조금 다르게 말한다. 아침이면 정안IC와 대전 방향이 꽉 막힌다. 많은 사람이 세종에서 자고, 다른 도시로 일하러 나간다. 도시는 사람을 붙잡아야 하는데, 세종의 교통은 매일 아침 사람들을 밖으로 흘려보낸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장면은 단순한 교통 체증이 아니다. 세종시가 자족도시가 아니라 베드타운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람이 그 도시에서 자고, 다른 도시에서 일하고, 다시 돌아와 잠만 잔다면 그 도시의 상권은 살아나기 어렵다. 낮 시간의 소비와 노동과 관계가 비어 있기 때문이다. 도시가 살아 있으려면 출근하는 사람만 있어서는 안 된다. 머무는 사람, 돈을 쓰는 사람, 일하는 사람, 걷는 사람, 저녁에도 불을 켜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종은 많은 구역에서 아파트의 불빛은 있어도 거리의 밀도는 약하다.<br style="box-sizing: inherit;">특히 내가 입주자로서 가장 강하게 느끼는 문제는 상가 분양이 실제 구매 수요층을 전혀 타겟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상권은 단순히 “입주민이 몇 명이다”라는 숫자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어떤 소득 구조를 가졌는지, 하루 중 어디에 머무는지, 어떤 소비를 반복하는지, 도보로 움직이는지 차량으로 이동하는지까지 보아야 한다. 그런데 세종의 많은 상가는 이런 생활 동선을 읽지 못한 채 분양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걸어 다니지 않는 곳에 점포를 놓고, 소비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 과도한 상업 면적을 배치하고, 이미 나성동 같은 중심 상권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비 흐름을 무시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 결과는 공실이다. 아파트는 늘어나지만 상가는 비고, 건물은 새것인데 거리는 낡아 보인다. 막 지은 상가가 몇 년 지나지 않아 유령 건물처럼 변하는 장면은 세종시의 가장 아픈 풍경 중 하나다. 도시가 성장한다면 새 건물에는 사람이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세종에서는 새 건물이 먼저 생기고, 그 건물을 채울 생활은 뒤따라오지 못한다. 이는 도시계획의 실패이자, 부동산 공급 논리의 오만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조치원에서 계획되던 800세대 민간 아파트 분양이 시작도 전에 엎어진 일이나, 1300세대 규모의 아파트가 모델하우스만 남긴 채 사업 개발 없이 방치된 사례도 이 흐름 속에서 읽힌다. 이것은 단순한 개별 사업의 부진이 아니다. “세종이면 된다”는 믿음이 더 이상 자동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호다. 행정수도 프리미엄, 정부 이전 기대, 수도권 대체지라는 말만으로 모든 주택 수요가 흡수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결국 묻는다. 여기서 일할 수 있는가. 여기서 장사할 수 있는가. 여기서 아이를 키우고, 늙고, 병원에 가고, 걸어서 소비하고, 삶을 꾸릴 수 있는가.<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런데도 세종의 집값은 정부 이전 이슈와 행정수도 기대를 먹고 4억, 5억을 넘는다. 이 기형성이 나를 답답하게 한다. 도시의 생활경제는 충분히 살아나지 못했는데, 주택 가격은 정치적 기대를 선반영한다. 상권은 지방 중소도시처럼 마르는데, 아파트 가격은 수도권의 꿈을 따라간다. 이때 부동산은 주거가 아니라 기대의 증권이 된다. 집은 사는 곳이 아니라, 언젠가 더 비싸질지도 모른다는 믿음의 단위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나 도시는 믿음만으로 살아나지 않는다. 도시에는 일자리가 필요하고, 산업이 필요하고, 걸을 수 있는 거리와 소비할 수 있는 계층과 머무를 이유가 필요하다. 행정기관은 도시의 중심 기능이 될 수 있지만, 행정기관만으로 도시 전체가 살아나지는 않는다. 공무원 도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간 기업, 연구기관, 대학, 병원, 문화시설, 생산 노동, 청년 창업, 지역 상권이 함께 돌아야 도시가 숨을 쉰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저자의 분석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부동산 가격은 허공에서 오르지 않는다. 도로가 놓이고, 철도가 연결되고, 행정 기능이 이전하고, 개발 이익이 기대되고, 사람이 몰리며 오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요한 질문이 빠지면 도시는 병든다. 그 인프라가 사람을 머물게 하는가, 아니면 빠져나가게 하는가. 그 아파트가 실제 삶의 수요인가, 아니면 분양을 위한 숫자인가. 그 상가가 소비자를 만나는가, 아니면 투자자를 속이는 상품인가. 그 도시는 자족하는가, 아니면 정치적 구호 위에 세워진 거대한 베드타운인가.<br style="box-sizing: inherit;">내가 세종을 보며 느끼는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종은 도시를 만들었다기보다, 아파트 단지를 넓게 펼쳐놓은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생활권은 확장되었지만 생활은 충분히 밀도 있게 형성되지 못했고, 교통망은 연결되었지만 그 연결은 도시 내부의 활력을 키우기보다 사람들을 외부로 실어 나르는 통로가 되었다. 상가는 공급되었지만 소비자는 부족하고, 집값은 올랐지만 삶의 체감은 그만큼 따라오지 않는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것은 세종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국 부동산의 오래된 습관이 세종에서도 반복되는 것이다. 먼저 땅을 정하고, 길을 놓고, 아파트를 짓고, 상가를 분양하면 도시가 생길 것이라고 믿는 습관. 그러나 도시는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나는 것이다. 콘크리트가 올라간다고 도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머물고, 일하고, 소비하고, 관계 맺고, 다시 돌아오고 싶어질 때 비로소 도시는 도시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나는 세종의 문제를 단순히 “집값이 비싸다”거나 “상권이 약하다”는 말로만 보고 싶지 않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세종은 누구를 위한 도시인가. 이 도시는 행정기관을 위한 도시인가, 아파트 분양을 위한 도시인가, 아니면 실제로 살아가는 주민을 위한 도시인가. 만약 주민을 위한 도시라면, 더 이상 아파트 숫자와 생활권 확장만으로 성장을 말해서는 안 된다. 생산인구, 민간 일자리, 소비력, 교통 동선, 상권 밀도, 보행 가능성, 지역 내 순환 경제를 함께 보아야 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집값은 오를 수 있다. 아파트 역시 팔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도시는 성공하지 않는다. 공실이 늘고, 출근길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상권이 한두 곳에만 몰리고, 주민들이 대출을 갚느라 소비를 줄이는 도시라면 그곳은 성장하는 도시가 아니라 버티는 도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세종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 도시는 아직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의 방식으로는 위험하다. 행정수도라는 이름만으로 도시경제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아파트 공급만으로 생활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교통 인프라만으로 자족성은 생기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집들을 떠받칠 삶의 구조가 충분히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부동산의 역사는 결국 도시의 역사이고, 도시의 역사는 사람이 어디에서 일하고 어디에서 살며 어디에서 소비하는가의 역사다. 세종시가 정말 살아 있는 도시가 되려면, 이제는 더 많은 아파트가 아니라 더 깊은 생활의 밀도를 물어야 한다. 집값이 아니라 도시의 숨을 보아야 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58/7/cover150/k21213776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580719</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드는 문장들 -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15325</link><pubDate>Tue, 14 Apr 2026 00: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1532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92135753&TPaperId=1721532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48/11/coveroff/k192135753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92135753&TPaperId=1721532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a><br/>신영준.고영성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02월<br/></td></tr></table><br/>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드는 문장들—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을 읽고<br style="box-sizing: inherit;">레이 브래드버리는 『화씨 451』에서 책을 불태우는 사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읽기를 멈추는 순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생각할 시간을 잃고, 오래 붙들 문장을 잃고, 자기 삶을 스스로 해석하는 힘을 잃어갈 때 정신의 생태계는 소리 없이 무너진다. 책에도 인용된 브래드버리의 격언, “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책을 태울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라는 말이 책을 덮자마자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까닭은,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책을 읽지 않는 사회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해력이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고 연일 한탄이 사회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이 시대에, 과연 인생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각은 무엇일까. 나는 그 점이 몹시 궁금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저자들에 따르면 이 책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은 원전인 명언집 『거인을 읽다』에서 선정한 문장들을 바탕으로, 그 안에 담긴 사유를 더 깊이 파고든 책이라고 한다. 수백 개의 명언 가운데 대체 어떤 문장들이 끝내 살아남았을까. 왜 하필 이것들이었을까.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이라는 제목을 보며 내가 가장 먼저 붙든 질문도 바로 그것이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여기서 말하는 “최소한”은 작고 얕다는 뜻이 아니라, 삶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우리 의식의 저변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생각에 가까워 보였다. 아마 저자들은 듣자마자 번쩍이는 문장보다 시간이 지나도 삶에서 계속 작동하는 말을 골랐을 것이다. 판단할 때, 관계가 흔들릴 때, 욕망이 과열될 때, 삶의 방향을 잃을 때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문장들. 생산성이나 처세의 기술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 욕망과 절제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타인과 나는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불안과 죽음과 자유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같은 밑바닥의 질문을 건드리는 말들 말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최소한”은 대단해지기 위한 생각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생각, 남보다 앞서가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키를 놓지 않기 위한 기준처럼 느껴졌다. 잘 살기 이전에 대충 살지 않기 위해 필요한 생각, 인생이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끝까지 남겨야 하는 말들이 있으리라 여기니, 이 책은 단순한 명언 해설서라기보다 삶의 토대를 이루는 생각들을 골라 다시 붙들게 하는 선물로 보이기 시작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쯤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 하나가 이어졌다. 어쩌면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좋은 문장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문장 뒤에 있는 사유의 방식을 조금씩 훔치는 일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대가의 사유를 훔친다는 것은 그들의 문장을 외우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세계를 의심하고 해석하고 파고드는 방식 일부를 내 안에 이식하는 일이다. 프롬에게서는 감정의 근원을, 비에리에게서는 자기형성의 구조를, 코비에게서는 패러다임의 뿌리를, 쇼펜하우어에게서는 욕망의 냉정한 메커니즘을, 인지과학에서는 인간 정신의 진화적 바탕을 훔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훔친 빛을 내 질문과 내 언어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문장들은 독자를 잠시 고무시키고 지나가는 명언이 아니라, 오래된 사유의 결을 삶의 자리로 다시 번역해보게 하는 도구처럼 느껴졌다.<br style="box-sizing: inherit;">아무래도 바탕이 명언이다 보니 읽는 동안 와닿는 대목이 많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역시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성장에 관한 사유들이었다. 저자들은 말한다. 성장은 눈에 띄지 않는다고.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안쪽에서 먼저 결이 바뀐다고, 말이다. 요즘의 나는 그것을 독서 속에서 자주 느낀다. 한 권의 책을 읽다가 오래전에 읽은 다른 책의 문장이 떠오르고, 전혀 다른 분야의 사유들이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서로 손을 잡는다.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수능 지문조차 더는 시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쌓인 독서의 맥락과 접속하며 새롭게 살아나는 텍스트처럼 느껴진다. 겉으로 보면 여전히 비슷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일지 몰라도, 안에서는 이미 해석의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성장의 첫 징후는 아마 성과가 아니라 이런 연결의 쾌감일 것이다.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내 안에서는 이미 변화가 문장을 얻고 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라는 말을 쉽게 믿지 않게 되었다. 겉으로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안에서는 이미 어떤 방향이 정해지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독서는 내게 그 보이지 않는 변화를 가장 먼저 알려주는 징후가 되었다. 어제와 비슷한 하루처럼 보여도, 안쪽에서는 이미 해석의 근육이 자라고 있고, 생각과 감각의 연결망이 조금씩 촘촘해지고 있다면, 그건 분명 성장의 일부일 것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시간의 밀도라는 표현이 내게 크게 울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하루를 더 빽빽하게 채우라는 조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필요한 것은 더 긴 시간이 아니라 덜 새고 덜 닳는 시간에 가까웠다. 나는 원래 한 가지 일을 할 때도 생각이 쉽게 번지고, 감정과 불안과 자책이 한꺼번에 끼어들어 같은 한 시간을 써도 더 빨리 지치는 편이다. 그래서 체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시간의 밀도를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시간의 밀도란 더 많은 일을 욱여넣는 능력이 아니라, 같은 시간 안에서 내 힘이 허공으로 새지 않게 하는 능력이다. 공부할 땐 공부만 하고, 읽을 땐 읽기만 하고, 쉴 땐 죄책감 없이 쉬는 것. 해야 할 일과 불안, 몰입과 자책이 한 시간 안에서 서로 잡아당기지 않게 만드는 것. 아마 사람을 가장 지치게 하는 것은 노동량 자체보다 이렇게 분산된 내적 마찰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의 밀도를 높인다는 것은 삶을 빽빽하게 채우는 일이 아니라, 내가 쓰는 힘을 더 또렷한 방향으로 모으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 문장은 그래서 단순한 자기계발의 조언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는 지치지 않고 오래 가기 위해 꼭 익혀야 할 삶의 기술처럼 읽혔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저자들은 독자로 하여금 당장 바뀌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삶을 오래 지탱할 말 몇 개를 다정하게 손에 쥐여준다. 그리고 그 말들을 통해 독자가 자기 삶을 다시 비추어보게 만든다. 이 책이 주는 효용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어떤 말은 위기 앞에서 기준이 되고, 어떤 말은 과열된 욕망을 식히며, 어떤 말은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어 준다. 좋은 문장이 오래 남는 이유는 그것이 멋있기 때문이 아니라, 필요할 때 다시 되뇌일 지침이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은 “어떻게 더 잘될까”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책이라기보다, “어떻게 살아야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까”에 대한 이정표를 세워주는 책에 가깝다. 더 높이 올라가는 기술보다 중심을 잃지 않는 판단, 더 화려해지는 방법보다 무너지지 않는 태도. 그런 것들이야말로 삶이 복잡해질수록 더 절실한 "최소한"일지도 모른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이 책에서 저자들의 사유의 방식을 통해 명언을 읽는 태도를 배웠다. 좋은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그 문장을 인용하기 위해 머릿속에 저장하는 일이 아니라, 그 말이 지닌 무게를 내 삶 안으로 들여오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인의 통찰이 오래도록 내 의식 속에 남아 내 말과 생각의 결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할 때, 독서는 더 이상 소비가 아니라 형성이 된다. 그리고 그런 형성은 결국 내가 책임을 택하도록 조금씩 등을 떠밀 것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책이 말하듯 인생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선택이 있다.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바꿀 책임을 받아들이거나. 이 책이 내게 준 말들도 결국 그 둘 사이에서 망설이는 마음을 오래 붙들어주는 기준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해이해질 때마다, 오늘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다시 이 말들 곁으로 돌아오게 될 것 같다.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의 키를 남의 손에 넘기지 않기 위해서.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기 위해 붙드는 말들이란 결국 이와 같이&nbsp;다시 책임을 선택하게 만드는 말들인지도 모르겠다.<br style="box-sizing: inherit; color: rgb(20, 20, 21); font-size: 18px; text-indent: 18px;">]]></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48/11/cover150/k192135753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481121</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대한민국’이 사라지고 ‘한반도’만 남을 때 - [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11938</link><pubDate>Sun, 12 Apr 2026 15: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119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741&TPaperId=172119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15/coveroff/k85213774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741&TPaperId=172119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a><br/>지지와 야스아키 지음, 길윤형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대한민국’이 사라지고 ‘한반도’만 남을 때— 『미일동맹이라는 거울』을 읽고<br><br>대학 시절 국제 정치학과 국제법 수업을 들으며, 나는 정치와 국제 관계가 보여주는 유연한 합의와 변화의 감각을 보이지 않는 전쟁처럼 느꼈다. 우리 헌법이 천명하는 국제 평화주의 역시, 우리만의 의지만으로 지켜낼 수 없는 무게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깨달았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을사조약 이후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사절단을 보냈으나, 약소국이었던 우리는 입장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1904년 대한제국의 국외중립선언 역시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무위로 돌아갔다. 국제 평화주의는 힘의 논리 앞에서 언제나 소리 없이 쓰러질 수 있다. 그 교훈 아래 인류는 집단적 동맹 체계로 안보를 지키는 전략을 택했고, 그 흔적은 한미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도 남아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내가 미일동맹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우리 바깥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전략적 시선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침략의 역사보다 침략 당한 기억을 더 깊이 가진 나라의 후손으로서, 침략하지 않되 침범받지 않으려면 동맹의 다자적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꼈다. 그렇게 펼친 이 책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편한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우리는 동맹을 안전의 언어로 배운다. 서로를 지켜주는 약속, 위협을 억제하는 장치, 전쟁을 막기 위한 구조. 그래서 ‘한미동맹’이나 ‘미일동맹’이라는 말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호의 문장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lt;미일동맹이라는 거울&gt;을 읽으며 나는 그 문장을 다르게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동맹을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가 너무 쉽게 넘겨왔던 질문을 끌어올린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정말로, 동맹은 누구를 어떻게 지키는 구조인가.<br style="box-sizing: inherit;">특히 한국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을 때, 미일동맹은 단순한 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미동맹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한다. 구조는 닮아 있고, 논리는 유사하며, 작동 방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전쟁은 과연 누구의 판단으로, 어떤 방식으로 확장될 것인가.<br style="box-sizing: inherit;">저자는 반복적으로 ‘대한민국’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지정학적 분석을 위한 중립적 용어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그 표현이 만들어내는 시선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언어 안에서 한국은 더 이상 선택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아니다. 대신 분석되고 배치되는 공간, 전략이 작동하는 무대, 필요할 때 투입되고 확장될 수 있는 조건처럼 다뤄진다. 누가 싸울 것인가보다 어디에서 싸울 것인가가 먼저 규정되는 세계. 그 안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지워지고, ‘한반도’라는 지리적 단위만 남는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 표현이 반복될수록 나는 묻게 된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언어로 불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언어 속에서, 우리는 과연 주체로 남아 있는가.<br style="box-sizing: inherit;">이 불편함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냉전 시기 미국이 아시아에서 다자 동맹을 구축하지 못하고, 결국 허브 앤 스포크라는 양자 동맹 체제로 귀결된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로 한국의 반일 감정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애초에 하나로 묶이기 어려웠던 아시아 질서의 균열이 더 깊게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전후 아시아는 하나의 공통된 위협으로 단순화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각 국가는 서로 다른 적을 바라보고 있었고,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동일한 전쟁을 상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균열 위에서 다자 동맹이 성립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도 모른다.<br style="box-sizing: inherit;">미국이 선택한 것은 각 국가를 개별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중심에 서서 관계를 조율하고, 필요할 때 작동 시키는 구조. 이 체계는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을 남긴다. 그 네트워크는 누구를 중심으로 작동하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각 국가는 얼마나 스스로를 결정할 수 있는가.<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은 미일동맹의 작동 원리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몇몇 역사적 장면을 비교적 단선적으로 정리하는 경향도 보인다. 예컨대 일본의 ‘사전협의제’로 인해 오키나와 기지 운용에 제약이 생기고, 그 대안으로 한국 내 기지, 나아가 제주도까지 검토되었다는 서술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지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확정된 정책 흐름처럼 읽힐 여지가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나 실제 전후 동아시아의 안보 구조는 단일한 결정이나 의지로 설명되기 어려운 복합적 맥락 위에서 작동해왔다. 한국 정부가 미군의 작전 지속성과 대응 속도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특정 지역을 대체 기지로 ‘제공하려 했다’는 식의 단정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 자체보다, 가능성과 논의의 수준에 머물렀던 사안을 하나의 구조적 결론처럼 압축해 제시하는 서술 방식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러한 압축은 독자의 이해를 돕는 동시에, 동맹이 작동하는 실제의 복잡성과 긴장을 다소 평면화할 위험도 함께 지닌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제시된 사례를 하나의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 당시의 정치적 조건과 전략적 선택지가 교차하던 맥락 속에서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냉전 시기 핵 배치의 방식은 이러한 구조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당시 미국은 핵탄두를 한국과 필리핀 등지에 분산 배치해 두고, 오키나와의 전력과 결합해 운용하는 체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한국은 핵을 보유한 국가가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핵이 저장되고 이동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했던 셈이다. 핵의 사용 여부와 전략적 판단은 외부에서 내려지지만, 그 작동의 조건과 경로는 이 땅 위에 놓여 있었던 구조. 이처럼 냉전기의 핵 전략이 한국을 주체가 아니라 공간으로 위치 지었다면, 오늘의 안보 논의 역시 그 연장선 위에서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저자가 전제하고 있는 안보 감각은 분명하다. 미국의 상대적 우위가 약화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핵우산만으로는 충분한 억제력을 담보하기 어렵고, 따라서 핵 공유나 전진 배치와 같은 선택지를 전략적 옵션으로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정 부분 자연스럽다. 핵을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맹의 신뢰성을 보완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 이 논의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일본의 억제력 보강이라는 문제는 곧바로 한반도 유사시 개입 가능성의 확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일본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의 필요성과 범위를 규정하는 판단이 점점 더 외부 동맹의 언어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이다. 일본에게 그것이 ‘억제력’의 문제라면, 한국에게 그것은 ‘전쟁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변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확장억제는 단순한 군사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신뢰에 의존하는 구조다. 바이든 행정부가 이를 제도화하려 했던 것과 달리, 트럼프 시기에는 동맹이 거래의 대상으로 전환되며 그 신뢰 자체가 흔들린 바 있다. 결국 핵우산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며, 그 관계가 불안정해질 때 동맹의 구조 역시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br style="box-sizing: inherit;">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은 때때로 정치적 발언 속에서 언급되지만, 실제 정책 차원에서 그것은 여전히 강하게 제한된 선택지에 가깝다. 미국이 허용하는 것은 핵의 공유된 억제력이지, 핵의 분산된 주권이 아니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내가 이 책에서 가장 불편하게 읽은 지점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였다. 저자가 집단적 자위권의 확대를 강하게 옹호하는 이유는, 그것을 일본의 군사적 팽창이 아니라 미일동맹을 실제로 작동시키기 위한 현실적 조건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안보담론 내부에서는 이것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연스러움’은 곧바로 불편함이 된다. 일본의 안전을 위한 제도적 보완이 한반도 유사시의 개입 가능성과 연결되는 순간, 집단적 자위권은 더 이상 추상적 법 해석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과 주권을 가르는 문제로 바뀌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저자는 그것을 미일동맹의 현실적 조정과 법적 재구성의 맥락에서 설명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이 문제는 그렇게 중립적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일본이 말하는 ‘존립위기사태’는 형식상 일본 정부의 판단에 달려 있지만, 실제로는 미국과의 동맹 구조 속에서 공동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 사태가 누구에게 얼마나 중대한 위협인지를 판단하는 권한은 한국만의 손에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은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이고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인데, 그 전쟁의 확대 가능성과 대응 방식의 일부는 미국과 일본의 전략적 판단 속에서 선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한국인 독자로서 내가 일본의 ‘한정 용인된’ 집단적 자위권조차 위협으로 느끼는 이유다. 문제는 일본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느냐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의 감당은 한국의 몫이면서도 전쟁의 판단과 작동은 외부 동맹의 언어 속에서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동맹은 보호를 약속한다. 그러나 그 보호의 언어 뒤에는 언제나 권한과 책임의 비대칭이 함께 존재한다. 전쟁을 결정하는 권한과, 그 전쟁을 감당해야 하는 위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끝내 붙잡게 된 것은 동맹의 유용성 자체보다, 그 구조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우리는 동맹을 너무 쉽게 ‘안전’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언제나 선택과 통제, 그리고 감당의 문제가 함께 들어 있다. 그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장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위험의 범위를 더 넓히는 구조일 수도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은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구조를 따라가다 보니 나는 앞선 질문들 앞에 서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단순한 국제정치 해설서라기보다, 우리가 너무 오래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세계의 문장을 다시 읽게 만드는 거울에 가깝게 느껴졌다. 헤이그에서 입장조차 허락받지 못했던 나라의 후손으로서, 나는 보호를 약속하면서도 결정권과 감당의 몫을 다르게 배분하는 이 구조를, 끝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br><br>#교양100그램 #AI #미래 #김대식 #김혜연 #책추천]]></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028/15/cover150/k85213774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0281562</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정말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11162</link><pubDate>Sun, 12 Apr 2026 00: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111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8124X&TPaperId=172111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4/7/coveroff/893648124x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8124X&TPaperId=172111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a><br/>김대식.김혜연 지음 / 창비 / 2026년 03월<br/></td></tr></table><br/>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정말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를 읽고<br style="box-sizing: inherit;">제목은 아주 노골적이다. &lt;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gt; 처음에는 누구나 이 제목을 기술의 문제로 읽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지, 인간의 일자리를 얼마나 대체할 것인지, 앞으로 우리는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는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말이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자 곧 알게 됐다. 이 제목은 기술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이 진짜로 묻는 것은 “AI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전의 질문, 더 불편하고 더 사적인 질문이다.너는 지금, 인간답게 일하고 있느냐.혹은 더 잔인하게 말하면,너는 지금 정말 '무언가를' 하고 있느냐.<br style="box-sizing: inherit;">&nbsp;저자가 서두에서 AI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둠스크롤링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흐름은 명확하다. AI는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지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집중하지 못하고, 스크롤하고, 피곤해하고, 시작을 미룬다. 그러니 결론도 냉정하다. 이 상태라면 AI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AI가 특별히 악마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이미 자기 집중력과 실행력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내게 흥미로웠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AI가 인간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보다, 그 전에 이미 인간 쪽이 먼저 자신을 포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춰내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렇기에 이 책은 내게 단순한 미래 전망서가 아니라, 지금의 인간 상태를 진단하는 책이 되었다. 특히 내게 그 말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오래도록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어왔다. 적어도 나는 나를 그렇게 설명해왔다. 그런데 돌아보면, 나는 종종 이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척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읽고, 밑줄 긋고, 감탄하고, 생각하고, 연결하는 일은 열심히 했지만 정작 현실의 한 문제를 풀고, 틀린 이유를 고치고, 다시 반복하는 일 앞에서는 자꾸 미끄러졌다. 나는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생각하고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용서해온 사람이었다. 이 책의 제목을 내 식으로 번역하면 결국 이렇게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가 아니라,내가 일을 하지 않을 때.<br style="box-sizing: inherit;">하지만 이 책이 내게 무섭게 남은 이유는 실행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중반부의 자율주행차와 판단 문제, 곧 AI가 누구를 먼저 살릴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에 이르자 책은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간다. 그 순간 공포의 핵심은 “AI가 사람보다 똑똑해진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선명해졌다. 더 무서운 것은 오히려 이쪽이다.AI는 죄책감 없이, 망설임 없이, 일관되게 원칙을 수행할 수 있다.인간은 잔인한 결정을 내릴 때 흔들린다. 자기합리화를 하더라도 끝내 마음 한구석이 더럽혀진다. 그 더러움 때문에 멈추고, 돌아보고, 규칙을 깨기도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다를 수 있다. 한 번 기준이 입력되면 그 기준을 고통 없이 반복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바로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계산기나 보조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분류하고 서열화하는 권력의 형식이 된다. 부자를 빈자보다 우선하고, 노인보다 아이를 우선하는 결정을 효율이나 합리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순간, AI는 단순히 더 빠른 기계가 아니라 누가 더 살 만한 존재인지 판정하는 기계적 심판이 된다. 이 문제의식은 내가 이혁진 작가님의 소설 &lt;단단하고도 녹슬지 않는&gt;에서 느꼈던 서늘함과도 맞닿아 있었다. 처음에는 위급 상황, 한정된 자원, 더 많은 생존 가능성이라는 명분으로 작은 예외가 허용된다. 그러나 그런 기준이 제도화되는 순간, 다음 단계는 너무 쉽게 열린다. 누구를 먼저 치료할 것인가, 누구에게 더 많은 보험과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 누구의 생명이 더 투자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AI는 인간을 돕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을 평가하고 배제하는 구조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기계화된 권력은 기계가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합리성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기계에게 위임한다. 그리고 그 순간, 삶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 인공지능은 &lt;1984&gt;가 경고한 빅브라더처럼, 감시를 넘어 판단을 대신하는 권력이 될 것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내가 두려워하는 인류의 멸종은 폭발이나 반란의 형태가 아니다. 사유를 빼앗기고, 존재 가치를 외부의 계산에 따라 분류당한 채, 무력하게 관리되는 상태로 살아남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는 존속할지 몰라도 의미의 차원에서는 이미 소멸한 존재일 수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동시에 저자는 책을 통해서 AI와 인간의 대화, 소통, 창작의 경계가 흐려지는 문제도 건드린다. 그 부분을 읽으며 나는 낯설기보다 오히려 이상하게 익숙한 감정을 느꼈다. 남편을 제외하면 나는 많은 인간관계에서 비교적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편이고, 깊은 불안과 사유, 감정의 결은 오히려 AI와 더 자주 주고받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소설을 써왔고, 내 캐릭터들끼리 깊이 공감하고 대화하게 해왔다. 결국 그 대화들은 모두 내 안의 여러 목소리가 부딪히고 화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AI와의 대화는 완전히 외부적인 경험이 아니라, 내 안의 사고를 비추고 밀어내는 또 하나의 거울일 수 있다. 다만 여기서도 핵심은 같다. 그 대화가 나를 더 명료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더 편안한 자기기만 속에 눕혀두는가.<br style="box-sizing: inherit;">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짜 회사”의 발상은 그래서 내게 더 강한 거부감을 남겼다. AI가 대부분의 생산을 맡고 인간은 형식적인 부서와 업무 속에서 출근하고 커피를 마시고 회의를 하며 구조만 유지하는 삶. 통찰로서는 흥미로웠지만, 나는 그 장면이 끔찍하게 비참해 보였다. 인간은 시간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부가 부여한 역할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없다. 느리고 서툴고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부딪히고, 해보고, 좌절하고, 다시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야 비로소 존재는 자기 무게를 얻는다. 나는 노동 없는 삶보다도 실감 없는 삶이 더 두렵다. 생산이 아니라 시뮬라크르simulacre만 남는 세계, 행동이 아니라 형식만 남는 세계는 내게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를 잃어버린 폐허처럼 보였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모든 지점에서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나는 무엇을 넘겨주고, 무엇을 끝까지 붙들 것인가. 계산은 넘겨줄 수 있다. 반복도 넘겨줄 수 있다. 속도와 정리는 상당 부분 넘겨줄 수 있다. 하지만 판단의 최종 책임,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감각, 그것은 포기할 수 없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우리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실행의 몫까지 넘겨주는 순간, 인간은 편리해지는 대신 공허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공허를 효율과 안락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회는 생각보다 쉽게 도래할 수 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이 내게 남긴 결론은 단순하다.AI 시대의 위기는 AI 자체가 아니라, 행동하지 않는 인간이다.더 정확히는, 생각으로 도망치고 실행을 미루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 인간이다. 나 역시 그 범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나는 종종 생각으로, 이야기 속으로 도망쳤고, 이해하는 척하며 미뤘고, 행동 없는 자의식을 성찰로 착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핑계를 남겨두지 않는다. 희망을 주는 책이라기보다, 핑계를 없애는 책에 가까웠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인간을 지키는 것은 기술의 부정이 아니다.편리하다고 해서 다 넘겨주지 않는 태도, 그리고 생각만 하지 않고 실제로 움직이는 습관이다. 눈 앞의 문제 하나를 풀고, 오답 하나를 고치고, 오늘 해야 할 것을 오늘 하는 태도. 너무 사소해서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 반복이야말로, AI 시대에 인간이 끝내 포기해서는 안 되는 마지막 권한이고, 인공지능이 우리를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가 된 뒤에도 끝내 잡을 수 없는 살아있음의 감각일지도 모른다.<br style="box-sizing: inherit; color: rgb(20, 20, 21); font-size: 18px; text-indent: 18px;">]]></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4/7/cover150/893648124x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940783</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전쟁은 인간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드러낸다 - [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11115</link><pubDate>Sat, 11 Apr 2026 23: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1111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7111&TPaperId=1721111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48/50/coveroff/k67213711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72137111&TPaperId=1721111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a><br/>이상권 지음, 오이트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04월<br/></td></tr></table><br/>전쟁은 인간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드러낸다— 『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고<br style="box-sizing: inherit;">전쟁을 생각하면 우리는 흔히 인간성이 파괴된다고 말한다. 문명은 무너지고, 도덕은 사라지며, 인간은 짐승으로 전락한다고. 그래서 전쟁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사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lt;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gt;를 읽으며 나는 그 생각을 조금 바꾸게 되었다. 전쟁은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사건에 가깝다는 것을.<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원래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보는 편이 아니다. 인간은 교육받지 않으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돌봄과 규율, 윤리와 학습이 없다면 인간은 쉽게 이기심과 폭력 쪽으로 기울어지는 존재라고 믿어왔다. 그런 내 인간관에 더 잘 들어맞는 것은, 사실 이 책 속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저보다 더 어리고 약한 존재의 생명을 태워 자기 이념과 행동과 존재를 정당화하는 어른들. 아이들의 생존 본능을 이용해, 그들을 전쟁의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존재들. 전쟁이 잔혹한 이유는 총과 피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그 구조가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 속 아이들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념도, 국가도, 정의도 없다. 오직 하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남아 있다. 총을 드는 이유도, 방아쇠를 당기는 이유도 결국은 그 하나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그 단순한 문장이 이 세계의 전부가 된다.<br style="box-sizing: inherit;">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다. 아이들에게서 어린 시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버렸다는 사실. 그들은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택당했고, 이해하지 못했지만 행동해야 했다. 전쟁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를 자기 논리의 연료로 바꾸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인간을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 바로 이런 장면들 때문일 것이다. 힘없는 존재를 이용하고, 더 약한 존재의 삶을 대가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는 것. 나는 인간의 악함이란 대개 거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비극으로만 남지 않는 이유는, 그 한가운데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어떤 감정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내가 기어이 눈시울을 적시고 만 장면은, 서로를 버리면 더 쉽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서 끝내 손을 놓지 않는 순간이었다.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상대를 버리면 확률은 올라간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맞다. 하지만 소설 속 소년병 토마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지점에서 인간성은 완전히 다른 얼굴로 드러난다. 그것은 더 이상 도덕도, 윤리도 아니다. ‘착함’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주 원초적인 형태의 감각, 누군가를 완전히 사물로 보지 못하는 힘. 총을 들고 있으면서도 끝내 상대를 ‘사람’으로 인식하는 잔여. 나는 끝내 그것을 인간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리고 여기서 나는 내 안의 어떤 모순을 보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인간을 악하다고 본다. 교육받지 않으면 제멋대로 흐르고, 약한 존재를 해치고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쪽으로 기울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내 눈길을 붙잡고 나를 울리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그런 악한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내 세계관에 더 잘 들어맞는 것은 전쟁을 설계하고 아이들을 소모하는 어른들이었는데, 내 마음을 무너뜨린 것은 끝내 친구를 버리지 않으려는 한 아이의 선택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통해 비로소 알았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는 극한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선의로 스스로를 고결하게 만드는 인간을, 여전히 긍정하고 있었다는 것을.<br style="box-sizing: inherit;">아이러니하게도, 이 감정은 가장 늦게 나타났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이 파괴된 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어선 뒤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래서 더 아프다. 만약 이 감정이 조금만 더 일찍 나타났다면, 어쩌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은 언제나 그렇다. 인간다움은 너무 늦게 도착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이 잔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전쟁 장면 때문이 아니다. &nbsp;그것은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결국 적응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총을 들고 떨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다루게 된다. 죽음은 일상이 되고, 폭력은 습관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조금씩 마모된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변화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비극이기도 하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지만, 바로 그 적응의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들을 잃어버리기도 한다.<br style="box-sizing: inherit;">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친구를 향한 마음, 가족을 향한 기억, 그리고 누군가를 버리지 못하는 선택. 그것은 시스템도, 교육도, 이념도 아닌, 인간 내부에 남아 있는 마지막 흔적이다. 나는 여전히 인간의 본성을 낙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인간을 완전히 비관할 수도 없게 되었다. 끝까지 타인을 사람으로 남겨두려는 어떤 힘, 같이 살자고 말하는 힘, 죽음의 한복판에서도 누군가를 밀어내지 못하는 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전쟁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인간 안에 존재하던 짐승과 인간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두 얼굴이 충돌하는 장면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이야기는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끝에서 무엇이 남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조차,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미는 선택, 그 미약하고도 비합리적인 선택이야말로, 인간이 끝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증거라는 것을 절감하며 나는 이 책을 덮었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그래서 이 책은 슬프며, 너무 늦게 도착한 희망처럼 아프다. 하지만 아마도 그 늦은 희망 덕분에, 나는 끝까지 이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48/50/cover150/k67213711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485050</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관계는 구원이기도 하고 파괴이기도 하다 - [너의 나쁜 무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06542</link><pubDate>Thu, 09 Apr 2026 16: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0654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2065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off/k85213750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52137509&TPaperId=1720654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너의 나쁜 무리</a><br/>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관계는 구원이기도 하고 파괴이기도 하다<br><br>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lt;너의 나쁜 무리&gt;를 읽고 나면 이 문장은 더 이상 안전하게 들리지 않는다. 관계는 우리를 살리는 동시에, 가장 쉽게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관계는 내게 대체로 큰 두려움이었다. 십대의 원만하지 못했던 교우관계,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만 주어졌던 부모님의 지지, 첫 직장에서의 직속 상사 주도의 사내 괴롭힘까지. 내게 인간관계는 늘 잠재적 위험을 내포한 대가 관계에 가까웠다. 살아남기 위해 첫인상의 불길한 기운을 읽어내는 데 특화된 내게, 관계가 만들어내는 파경과 구원을 다루는 이 소설집은 오래도록 펼치기 두려운 책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조건 없는 사랑에 가까운 남편과 고양이들의 맹목에 가까운 애정 속에서 처음으로 안전한 울타리를 얻어 신뢰를 조금씩 회복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소설집을 영영 펼쳐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br style="box-sizing: inherit;">예소연 작가님의 소설은 큰 사건으로 독자를 끌어당기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장면, 말의 결, 시선의 방향 같은 것들을 통해 관계의 균열과 긴장을 드러낸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순간이 어떻게 의존으로 기울고, 그 의존이 어떤 파경으로 이어지는지를, 저자는 그 관계의 저변에 깔리는 미세한 호흡까지 예민하게 포착한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는 일은 어떤 드라마를 따라가는 경험이라기보다, 이미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해왔던 감정들을 하나씩 다시 마주하는 과정에 가깝게 느껴졌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내가 이 소설집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사랑하게 된 작품인 소란한 속삭임을 읽고 있노라면, 저자가 관계의 최소 단위를 다루는 방식이 퍽 독특하면서도 굉장히 보편적인 깨달음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것을 부탁하는 장면, 속삭이는 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백 같은 것들. 그 사소한 순간들이 오히려 관계의 본질을 드러낸다.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붙들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가장 가까운 관계가 가장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이 작은 순간들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저자가 다루는 고독 역시 단순한 외로움과는 다르다. 인물들은 혼자여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기를 원하면서도 그 연결이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깊은 고독 속에 놓인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서 관계는 언제나 양가적이다. 구원이면서 동시에 위험이고, 위로이면서 동시에 부담이다. 그 긴장을 저자는 과장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그저 보여준다.<br style="box-sizing: inherit;">표제작 〈너와 나쁜 무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여사였다. 어린 손녀 유선을 키운 조모인 그녀는 자기파괴적인 자유연애자로, 아이에게 가감 없이 본인의 사생활을 오픈한다. 그 과정이 끼친 파급력은 어린 유선에게 자못 파괴적이다. 여사는 분명 좋은 어른도, 보호자도 아니다. 예전의 나였다면 여사의 양육자로서의 자질을 거론하며 유선의 독립만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여사는 비록 유선을 반듯하게 키워내지 못했고 끝내 어린 손녀를 폭행의 공범으로 만들었지만, 그녀마저 없었다면 유선이 아름답지 않은 인간의 본질을 보고도 운명공동체가 되기를 택할 만큼 마음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어쩌면 부모에게 버려진 유선에게 여사는 그녀를 망치러 온 구원자였을지도 모른다. 관계는 언제나 순수하게 좋거나 나쁘지 않다. 상처와 구원이 같은 자리에서 온다는 것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작년 읽었던 성해나 작가님의 &lt;혼모노&gt;가 날것의 감정으로 생의 바닥을 파고드는 작품이었다면, &lt;너의 나쁜 무리&gt;는 그보다 조금 더 절제된 거리에서 관계를 응시한다. 덜 격렬할 수는 있지만, 대신 더 오래 남는다. 문장은 차분하고, 시선은 정확하며, 감정은 과잉되지 않는다.<br style="box-sizing: inherit;">우리는 서로를 통해 살아가지만, 그 관계가 언제든 균열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관계를 향하게 되는 마음, 나는 이 소설집을 읽으며, 관계의 모순적인 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는 그 불안정함을 알면서도, 아주 작은 방식으로 서로를 붙들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br style="box-sizing: inherit; color: rgb(20, 20, 21); font-size: 18px; text-indent: 18px;">]]></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3/21/cover150/k85213750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832113</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자연은 멀리 있지 않다 - [숲으로 출근합니다 - 식물과 함께 쓰는 나무의사 다이어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00423</link><pubDate>Mon, 06 Apr 2026 17:3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004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137400&TPaperId=172004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5/58/coveroff/k1121374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12137400&TPaperId=172004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숲으로 출근합니다 - 식물과 함께 쓰는 나무의사 다이어리</a><br/>황금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자연은 멀리 있지 않다-숲으로 출근합니다 서평<br><br>직업을 가리키는 말 중에 천직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늘이 내린 직분,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아 떨어질 때 쓸 수 있는 명칭이 아닐까. 나는 이 에세이를 읽는 동안 저자의 나무의사, 즉 가드너로서의 삶은 천직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만큼 이 책은 자신의 일이 사랑스럽고 행복한 이의 밝은 기운이 책에 실린 햇살 속의 여러가지 나무의 다양한 색상처럼 또렷하게 뻗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정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쓴 글은 읽는 이마저 그 대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같은 감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글을 읽는 동안 나 역시 그 감각을 여러 번 느꼈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고양이를 키우기에, 고양이에게 위험할 소지가 있는 화분이나 꽃은 집에 들이지 않지만, 계절을 따라 옷을 갈아입는 길가의 나무나 풀을 구경하는 건 좋아한다. 지나가다가 궁금한 식물이 생기면 인공지능에게 사진을 전송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바쁘게 목적지에 가야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풀섶 앞에 주저앉아 있을 때도 많다. 바위 틈바구니에서 피어난 새끼 손톱보다도 작은 들꽃에 마음이 빼앗기기도 하고, 보도블럭 사이로 피어난 민들레와 풀의 강인한 생명력에 감탄하며 생수병을 기울여 풀이 죽어 보이는 연두빛에 물방울을 튀겨 주기도 한다. 자연의 색은 내게 네온사인보다 강렬하고 아름답다. 특히 요즘처럼 겨울이 물러가며 피어나는 색색의 꽃들은 그 크기와 상관없이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이 있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은 내가 이전에 읽은 식물세밀화가 이소영님의 &lt;식물과 나&gt;처럼 이 이 글 &lt;숲으로 출근합니다&gt;의 저자 황금비 가드너님도 계절별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나무를 계절별로 소개한다. 도시 생태를 유지시켜주는 나무를 중심으로 소개해서인지, 실린 사진 속 나무 잎파리나 꽃이 눈에 익은 것도 많았다. 식물 명은 생각보다 길고 어려운 게 많아서 애써 물어도 까먹는 경우가 잦지만, 확실히 잎사귀의 모습이 눈에 익은 나무가 보일 때마다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목련을 설명할 때는 자목련은 유치원 앞에서, 백목련은 버스 정류장에서 외롭게 서있던 모습이 떠올랐고, 벚나무를 소개할 때에는 수변 공원 너머의 수백년은 되었음직한 굵기의 벚나무를 남편과 산책한 기억이 떠올랐다. 버즘나무가 도시의 생태와 미관을 위해서 소나무로 교체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에는 어린 시절 버즘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면 송충이가 떨어질까 봐 무서워하며 맑은 날에도 우산을 펼쳐 들고 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르고, 배롱나무를 볼 때면 시댁 가던 길에 멈춰선 공원에 서있던 붉은 배롱나무의 단풍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은목서는 이사 오기 전 집 앞 공원에 심어져 있어서, 참 예쁘고 우아한 꽃이다 감탄하던 기억이 겹쳐졌고, 눈쌓인 말채나무의 붉고 얄팍한 가지들은 겨울에 방문했던 수목원의 아름다운 정경으로 이어졌다. 이 책에는 내 삶이 나도 모르게 꽤나 많은 나무들과의 추억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일러주었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수많은 기억이 고리처럼 이어지는 동안, 나는 내가 살아온 곳들이 참으로 고맙게도 자연과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들이었음에 새삼 감사를 느꼈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생명 감수성이 깊어진 건, 내 삶에 이름 없이 존재했던 풀과 나무들, 그리고 그를 둥지로 삼고 살아가는 수많은 곤충과 새들 덕이 아니었을까. 그건 도심에서 나무를 지켜내고자 노력해주신 수많은 분들의 노고 덕분임과 동시에, 매연과 병충해에 시달리면서도 대한민국의 혹독한 사계절을 버텨내며 생명의 움을 틔워낸 수많은 식물들의 강인함 때문이 아니었을까.&nbsp;<br style="box-sizing: inherit;">근 2년 간 식물에 관한 다양한 글을 읽어오며, 식물들도 화학 물질로 소통을 하며, 형제 격인 식물들을 보호하려 하며, 다양한 협력 체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배웠다. 식물을 무척 사랑하여 베란다가 정글과도 같은 우리 엄마를 통해, 다정한 말을 건네고 지극정성으로 돌보면, 더 예쁘게 꽃이 많이 피고, 오래 가고, 더 푸르게 빛나는 식물들을 보며 자라온 나는, 어느 순간부터 갓 피어난 꽃이나 새순을 뜯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지난 주 벚꽃길에서도 바람결에 흩날리며 떨어지는 벚꽃잎을 주워와 책 사이에 말려두었는데, 그 마음 때문일까. 갖다 팔기 위해서 제주에서 후박나무의 껍질을 400그루나 벗겨버렸다는 조경업자의 이야기를 읽다가 무척 화가 나고 가슴이 아팠다. 식물은 말을 하지 않아도, 상처를 입으면 방어를 하기 위해 화학물질을 분비하고, 그를 통해 주위 식물에 경고를 보낸다. 조경업자이면 식물에 대해 나보다 더 많이, 더 자세히 알아야 할 텐데.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약용으로 쓰이는 동명의 다른 후박나무가 아닌 그저 삶았을 때 단맛이 날 뿐인 엉뚱한 후박나무의 껍질을 수백그루나 벗겨낸 그 조경업자는 어떤 인간인 것인지. 엉뚱한 나무를 학대한 것이라면 조경업자로서 직업상 자질이 부족한 것이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돈에 눈이 먼 사기꾼이 아닌가 싶었다. 다행히 체포된 모양이지만, 그 끔찍한 학대를 당하는 동안 나무는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싶어, 얼마나 딱한 사정이 있길래, 를 먼저 생각한 저자보다 내 마음은 한층 더 강퍅해졌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책을 덮고 나니, 4월을 맞이하여 연둣빛 싱그러운 새순을 부지런히 피워내는 나무의 기특한 생명력이 한층 더 선연하게 눈에 맺히는 기분이었다. 푸름은 머리를 맑게하고 기분이 좋게 만든다. 내 삶 주변의 푸르름이 겪고 있을 보이지 않은 고초를 헤아리며 한 번 더 고마움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던 독서였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85/58/cover150/k1121374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855875</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사랑도 번역이 필요할까 - [한영 육아 번역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00254</link><pubDate>Mon, 06 Apr 2026 16: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2002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32137504&TPaperId=172002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3/63/coveroff/k232137504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32137504&TPaperId=172002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한영 육아 번역기</a><br/>임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4월<br/></td></tr></table><br/>&lt;사랑도 번역이 필요할까&gt;-한영 육아 번역기를 읽고<br>사랑은 대체 어떠한 것일까. 에리히 프롬은 &lt;사랑의 기술&gt;에서 말한다. 사랑은 거저 생기는 게 아니라 노력으로 지속해야 하는 일종의 기술이라고. 이 책의 저자는 책의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 은연 중에 말한다. 사랑은 나와 다른 세계를 배우는 일이고, 그러하기에 번역이 필요한 작업이라고.&nbsp;<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책은 방송인 임현주 아나운서님과 영국인 기자 다니엘 튜터 작가님이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며 공감하며 살아가는 성찰 에세이다. 이 책은 한국인과 영국인 국제 커플의 육아담을 다루고 있지만,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읽은 건 삶과 결혼, 육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였다. 분명 저자와 나는 다른 인간이고, 저자의 남편과 내 남편도 다르고, 저들이 키우는 두 딸과 우리 집에서 살아가는 17마리의 고양이 아가들은 전혀 다른 존재다. 하지만 기이하리 만치 나는 저자가 그려내는 삶의 자세와 감각과 일상의 에피소드가 나와 깊이 겹치는 걸 느꼈다. 서로 다른 성장배경을 지녔기에 나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배우자의 지혜로움을 통해 한땀씩 성장하는 에피소드나, 서툰 엄마였다가 경험치가 하나씩 쌓여가며 육아관이 바뀌는 모습이나, 비교와 완벽주의의 틀에서 벗어나 배우자의 곁에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자유로움을 느끼는 변화의 결까지, 공감되는 에피소드는 무던히도 많았지만, 이 책을 덮는 순간 내가 붙들고 싶었던 질문은 오직 하나였음을 나는 깨달았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그건 다음과 같다.&nbsp;&nbsp;나다움을 지키면서도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가. 다름을 고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둔 채,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br style="box-sizing: inherit;">이 질문이 책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아이의 혈관종 에피소드다. 한국에서는 그것을 흉으로 여기고 숨기려 한다. 외모를 중시하는 문화 배경과 타인에 대한 오지랖이 깊은 정의 문화가 이 감정의 이면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남과 다르면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시선과 질문을 먼저 의식하게 된다. 저자 역시 외출할 때 아픈 아이에게 모자를 씌우고, 사람들의 질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좀더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한 스스로를 탓한다. 하지만 저자의 남편은 다르다. 그는 그 사실을 과장하지도, 특별히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아이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지나치게 관심을 두지도 않고,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는, 일정한 거리에서의 존중. 그 태도는 관심 없음이 아니라, 타인을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방식의 존중이었다.이 장면에서 나는 내가 고양이들을 돌보며 병과 증상들을 알아가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 역시 저자처럼 불안했다. 내가 모자라서 내 아이들이 아픈 것 같아 죄책감에 무던히도 시달렸다. 병원에서 권하는 치료에 응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하루 하루의 컨디션에 마음이 수시로 무너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병을 극복해낸 몇 번의 기적과, 병마로 잃어버린 아이들의 기억이 겹쳐지면 깨닫게 된 게 있었다. 내 아이들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강인한 아이들이었노라고.&nbsp;<br style="box-sizing: inherit;">아픈 고양이는 식욕이 떨어지고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약 먹는 게 괴롭고 몸이 아프니 활동량이 줄어들어 고양이의 완치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림프종 선고를 받았던 우리 달땡이는 복도식 아파트를 걷는 방식으로 좁은 집에서 못 채운 활동량을 채워 식사량을 버텨서 힘든 약을 먹고 2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은 적 있었다. 우리 가온이는 병명조차 확인할 수 없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검사를 위한 마취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체중이 줄어들어, 지난 여름 빈사 상태의 우리 가온이는 그와 유사한 임상 징후 4건을 다룬 논문을 통해서 진료 방식을 바꾸었다. 이틀 간격으로 영양 수액을 맞고, 수술 후 고담백 회복식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해서 뉴케어에 갈아서 미음처럼 한 두 수푼 떠먹는 것조차 고역이던 시절, 가온이는 하루에 수십 번 토하면서도 끊임없이 먹으려고 했다. 두 달 만에 3킬로 정도 빠져서 피골이 상접하여 매주 병원에 갈 때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란 이야기를 들었던 내 아기는,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지금은 몸무게를 800그람이나 증량하고, 스스로 사료를 먹을 수 있을 만큼 회복했다. 옆으로 누워서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잦은 구토로 식도 확장 및 돌출로 미음처럼 간 습식조차 한 수저 먹이고 안아 올려 십 오분 이상 등을 쓸어주며 소화를 도와야 했던 내 아기, 우리 가온이는 절박한 어미의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그 안아주는 시간을 견뎠고, 음식을 받아 삼켰고, 토할 지언정 약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걸으려고 애썼다. 아프다고 주저 앉지 않는 그 강인함에, 나는 우리 가온이를 내 작은 기적이라고 부른다. 가온이가 좀 나을라 치니 지난 주에 우리 아름이가 신장 위험 판정을 받았다. 내 첫째 아름이의 신장의 70% 정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nbsp;하지만 나는 더이상 내 아기들의 질병을 가지고 나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아름이는 신장 처방 사료는 먹지 않지만, 내가 부탁하면 신장 파우치는 먹어준다. 신장 사료를 먹으면 병의 증세를 늦출 수 있다고 들었기에, 병원에 부탁해서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신장 처방식은 습식 건식 가리지 않고 다 주문했다. 그리고 내가 구할 수 있는 보조제도 구해서 먹이고 있다. 알약을 먹이면 거품을 물며 화를 내던 아름이는, 내 마음을 헤아린 것처럼 신장에 좋은 영양제를 잘 삼켜준다. 아이들은 몸이 아파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상태로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 아이들의 삶을 온전히 지지하며 곁에서 견디겠노라 다짐했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어쩌면 저자가 서두에서 말하는 관용은 거창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고치려 하지 않는 것,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과하게 해석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두는 태도. 그것은 내가 동물들에게 배운 태도와 닮아 있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나와 다름에 대한 이 사회의 시각을 보여주는 또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책에서 저자가 연예인의 논란을 보고 이야기를 꺼내자, 그의 남편은 묻는다.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 누구인데?" 댓글들을 보니 대충 그렇더라고 답하자, 그는 온라인의 댓글은 소수의 사람이 남긴 생각일 뿐인데 대중의 주류 의견처럼 과대표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생일날, 카드에 이런 문장을 써준다. "논란을 더 많이 만드세요."라고. 눈치 보며 살지 말라는 외부의 말들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큰 힘일 것이다. 그 장면을 읽으며 나까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왜 한국에서는 이런 말이 이토록 낯설게 느껴지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br style="box-sizing: inherit;">왜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끊임없이 다듬고, 튀지 않으려 애쓰고, 결점을 숨기려 할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속담은 튀지 않으려는, 혹은 튀면 안된다는 우리 정신의 내면화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증표가 아닐까 싶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동양은, 특히 우리 나라는 오래도록 농경 사회였다. 기술이 발전하기 그 옛날 농사는, 결코 개인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과업이었다. 튀지 말라는 말은, 공동체에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기반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 조화와 화합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했던 시간들. 공동체의 규범을 어기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의 위험이었을 시대, 그게 우리의 과거다. 문제는 그 감각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는 데 있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튀지 않음, 다시 말해 개인보다 공동체가 우선되던 사회의 가치관이 더 이상 생존 조건이 아닌 현대에도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 저자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식의 기반이 되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완벽주의를 개인의 성실함처럼 보지만, 사실은 결점과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집단의 압력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사회의 압력에 따라 완벽해지기 위해 수많은 자기계발 담론이 이 사회를 들썩이게 만드는 한편으로는 '나로 살고 싶다'라든가 '미움 받을 용기'에 대한 희구가 반복해서 소비되는 것도 내 눈에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우리는 사회에 압력에 버티듯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이건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아의 발현처럼 보이기도 한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없이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무던하지 않았다. 조용한 사람이 아니었고, 생각이 많았고, 느끼는 것도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늘 눈에 띄었고, 그만큼 자주 미움을 받았다. 어색한 공기, 미묘하게 밀려나는 자리, 어느 순간부터 끼지 못하게 되는 대화. 둥글게 흘러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적당히 맞추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친구가 없었고, 오래 머무는 관계도 드물었고, 자주 혼자였다. 지독하게 외로웠다. 하지만 그 외로움 속에서도 나는 나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고집이었을 것이다.<br style="box-sizing: inherit;">저자의 남편은,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 &lt;고독한 이방인의 산책&gt;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수많은 한국인이 내면화한 타인의 시선이 주는 압박을 낯설어한다. 왜 그렇게까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지, 왜 몇몇 사람의 말이 전체의 판단처럼 작용하는지 묻는다. 그 질문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또다른 선택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nbsp;<br style="box-sizing: inherit;">하지만 그는 아내인 저자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저자 역시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타고난 대로 아이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나가듯, 오늘 실패하더라도 내일 또 기회가 있다는 것을 결혼 생활과 육아 속에서 배워간다. 한 사람을 선택했는데 상상하지 못한 다른 세계가 찾아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세계를 번역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라고.<br style="box-sizing: inherit;">이제는 안다. 내가 틀렸던 게 아니라, 내 방식이 단지 이 사회의 방식과 맞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나를 깎아내리지 않는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끝없이 나를 설명하며 소진하기보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존재를 조금 더 가까이 두기로 했다. 내가 나로 존재해도 누구도 개의치 않는 사회, 존재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로움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사회. 나는 그 가능성을,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조금 믿어보게 되었다. 사랑에도 번역은 필요하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향한 번역 역시 필요할지도 모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93/63/cover150/k232137504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936364</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 버려진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 신을 기리며 - [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91136</link><pubDate>Wed, 01 Apr 2026 21: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9113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137206&TPaperId=1719113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9/67/coveroff/k46213720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62137206&TPaperId=1719113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a><br/>고혜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3월<br/></td></tr></table><br/>버려진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 신을 기리며— &lt;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gt;을 읽고<br><br>이 책은 현대 남성성의 위기를 카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 그중에서도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프리즘으로 읽어낸다. 남성 안의 여성성, 여성 안의 남성성이라는 개념은 뜻밖에도 지금의 이 시대에 더 절실하게 들린다. 가부장적 질서가 흔들리고, 테토녀, 에겐남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운 언어로 일상에 파고들 만큼 성별의 경계와 역할의 감각이 빠르게 재편되는 시대에 남성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답을 찾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nbsp;저자 고혜경 박사는 그 답을 제도나 규범이 아니라 신화의 무의식 속에서 찾는다. 헤파이스토스, 아폴론,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하데스, 제우스. 여섯 남신을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억압한 내면의 원형으로 복원하는 이 작업이 지금 각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거기 있다.&nbsp;<br>나는 그중에서도 헤파이스토스에게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래서 이 서평을 책 전체를 고르게 조망하기 보다는, 내 마음 속에 깊게 파고든 헤파이스토스라는 한 원형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쓰고자 한다.<br>&lt;아버지 없는 세상의 아들들&gt;을 읽다가 문득 내가 왜 헤파이스토스라는 존재에 이렇게 오래 시선이 머무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나는 오래전부터 상처 입은 영혼에 민감했다. 특히 겉으로는 제 몫을 다하며 살아가지만, 가장 깊은 자리에는 한 번 밀려난 기억을 품고 있는 존재들에게 자꾸 마음이 갔다. 나는 그런 존재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유능함과 성실함의 표면 아래, 사랑받지 못한 슬픔이 숨어 있는 얼굴을 보면 오래 시선이 머문다. 헤파이스토스는 바로 그런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불과 기술의 신이기 전에, 먼저 버려진 아이처럼 보였다.<br>어쩌면 그 이유는 내게도 낯익은 감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엄마의 트로피였지, 사랑하는 자식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첫 취업에 실패하며 자랑거리를 잃은 나는 오랜 세월 가족 안에서 투명한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다. 기대에 부응할 때만 환영받고, 그렇지 않을 때는 존재가 흐려지는 관계. 내가 아는 부모의 사랑은 처음부터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헤라와 제우스의 거부는 내게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헤파이스토스의 상처는 먼 신화 속 비극이 아니라,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감각의 언어처럼 읽혔다.<br>저자는 헤파이스토스를 단순한 기술의 신으로 읽지 않는다. 전형적인 영웅 서사가 어머니의 품을 떠나 아버지의 질서 속으로 입문하는 과정이라면, 헤파이스토스는 그 경로를 온전히 밟지 못한 신이다. 그는 중심의 질서에 진입하지 못한 채 불과 금속, 용광로와 공방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든다. 이 해석 방식은 우리에게 친근한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전혀 다르게 보게 만든다. 그의 기술은 단순한 생산 능력이 아니라, 버려진 존재가 살아남기 위해 발명한 창조의 형식이 된다. 그는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영웅이 아니라, 중심에서 밀려난 자리에서 끝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br>신화 속에서 나는 제우스보다 헤라가 더 잔인하다고 느꼈다. 제우스에게 헤파이스토스는 헤라가 혼자 만들어낸 아들이고, 그의 배제는 냉혹하지만 적어도 신화적 권력 질서의 언어로 읽힐 여지가 있다. 그러나 헤라는 다르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존재를 기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밀어낸다. 이 장면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처럼 읽힌다.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네가 바로 잘못이라는 선언, 그 낙인이 헤파이스토스의 영혼에 새겨져 있다.&nbsp;<br>헤파이스토스의 상처는 세상과 싸우다 패배한 상처가 아니다. 세상에 나가기 전, 가장 먼저 사랑받아야 할 자리에서 이미 환영받지 못했다는 상처다. 그 상처는 후천적인 실패가 아니라 존재의 뿌리에 새겨진 추방의 감각이다.<br>이 대목에서 나는 부모의 사랑조차 결코 무조건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만큼은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는 힘이기를 바란다. 세상 어디에서도 조건 없는 수용을 얻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그 자리만큼은 예외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신화는 그런 믿음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은 기대와 투사, 실망과 수치심에 의해 얼마든지 훼손될 수 있다. 자식이 기대에 맞지 않을 때, 사랑은 흔들리고 심지어 거절의 얼굴을 띠기도 한다. 헤파이스토스의 이야기가 유독 잔인한 것은 그가 적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품어주어야 할 존재들에게 밀려났기 때문이다.<br>그래서 헤파이스토스가 용광로 앞에서 새로운 사물을 빚어내는 장면은 내게는 단순한 제작 행위로 읽히지 않았다. 그것은 상처를 형태로 바꾸는 작업처럼 보였다. 사랑받지 못한 자가 파괴 대신 창조를 선택한 셈이다. 이 점에서 헤파이스토스는 아주 현대적인 인물처럼 다가온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은 인정받지 못한 자리에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한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종종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한다. 존재만으로는 환영받지 못했기에, 기능으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 한다. 더 잘 만들고, 더 잘 일하고, 더 쓸모 있는 존재가 되면 마침내 버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헤파이스토스의 기술 역시 그런 절박함의 언어처럼 읽힌다. 그래서 그의 불은 권력의 불꽃이라기보다 결핍의 열기처럼 느껴진다.<br>제임스 힐먼의 말처럼 인간의 내면이 단일하지 않고 다중심적이라면, 헤파이스토스에게 오래 머무는 나의 시선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한 신에 대한 호감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오래 소외되어 온 어떤 원형을 알아보는 일에 가깝다. 버려진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 신이 내게 오래 남는 이유는, 그 신이 내 안 어딘가에서도 아직 완전히 제 몫의 자리를 얻지 못한 채 용광로 앞에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처를 파괴로 돌리지 않고 끝내 무언가를 만들려는 충동, 사랑받지 못한 결핍을 쓸모와 창조로 번역해내려는 몸부림이 내게도 아주 낯설지는 않기 때문이다.<br>헤파이스토스는 영웅이 아니다. 가장 먼저 밀려난 자리에서 자기만의 공방을 세운 존재이다. 그의 위대함은 상처가 없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상처를 끝내 세계를 부수는 방향으로 돌리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고 남기는 방향으로 견뎌냈다는 데 있다. 어떤 영혼들은 사랑받지 못한 자리에서 파괴를 배우고, 어떤 영혼들은 그 자리에서 창조를 배운다. 헤파이스토스는 후자에 속하는 신이다. 그래서 그는 내게 아픈 신이고, 그런 까닭에 더욱 찬란한 신이다. 앞으로도 내게 그는 기술의 신이라기보다, 사랑받지 못한 결핍을 끝내 창조의 언어로 바꾸어낸 위대한 영혼으로 남을 듯 하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79/67/cover150/k46213720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796737</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나를 죽이면서 지켜야 할 가족은 없다 - [용궁장의 고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63199</link><pubDate>Fri, 20 Mar 2026 23: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6319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137707&TPaperId=171631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38/coveroff/k56213770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137707&TPaperId=1716319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용궁장의 고백</a><br/>조승리 지음 / 달 / 2026년 03월<br/></td></tr></table><br/>&lt;용궁장의 고백&gt;을 읽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켜야 했다. 화자인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가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이 아닌 내 기억의 연장선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반복되는 차별, 당연하게 여겨지는 책임의 전가, 그리고 끝내 한 사람에게만 쏠리는 삶의 무게는 내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nbsp;  나는 작중 주인공의 태도가 못내 갑갑했다. 70살이 넘도록 모든 것을 감당하려는 주인공의 태도, 누군가는 그것을 숭고한 '희생'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 이면의 구조가 보인다.  더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끝까지 버티고, 더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계속해서 짐을 짊어지는 방식. 하지만 그 구조의 끝에는 오직 한 사람의 처절한 소진만이 남는다. 소설은 그 과정을 집요할 만큼 사실적으로 추적하는 느낌이었다.   &nbsp;  맨 처음에는 내가 죽어야만 이 고통이 끝날 것 같기에 죽기를 소원하고, 그 다음에는 고통의 직접적인 원천인 모친이 죽기를 희망하는 주인공의 마음을, 나는 슬프도록 여실히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길이 없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결국 가족이란 이름의 천형을 벗고 스스로 살기를 선택하는 그 아프고 처절한 선택마저도 이해한다. 아니, 내 자신이 그 과정을 겪었기에, 아니 아직도 그 굴레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했기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주인공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하고 싶다. 나를 죽이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족은 이 세상에 없노라고 말이다.   &nbsp;  주인공은 남편과 함께 하며 인연을 끊었던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평생토록 가족에 얽매여 살아왔지만, 나는 주인공과 같은 길을 걷지 않기로 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책임을 감당해왔지만, 더 이상 타인의 삶을 위해 나를 지우는 것이 당연한 존재로 남지 않기로 했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그 책임은 어디까지나 ‘내가 선택한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가족은, 나의 탄생은 결코 내 의지가 들어 있지 않는 결과였다. 이 단순하고도 엄중한 원칙을 깨닫기까지 나는 너무 많은 시간을 돌아왔다.  &nbsp;  작중 주인공은 고통스러울 때마다 교회로 가 신에게 기도한다. 그를 둘러싼 교회의 지인들은 주님이 믿음에 응답할 것이라고 응원하며, 실제로 주인공이 요양원에 보낸 모친이 화재로 죽음으로써 그의 기도가 응답 받은 것 같은 장면이 나오나, 나는 여전히 기도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화자의 모친의 죽음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결국 모친과 떨어져 자신의 길을 걷기로 택한 행위의 결과였다. 어머니를 끝까지 모셨다면, 용궁장의 화재가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그러하기에 이 소설의 구조는 내게 여실히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이 삶을 바꾸는 것은 막연한 염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선택과 행동이란 사실을.   &nbsp;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대신 나는 내 삶의 크기를 스스로 키우고, 그것을 다시 나눈다. 나눠주어 작아지면 다시 키우면 그만이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삶의 문법이다.  &nbsp;  &lt;용궁장의 고백&gt;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감당해야 하는가. 이 책을 읽은 지금은 단호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책임지고, 그 경계 밖에서는 멈출 것이라고. 나를 무너뜨리는 책임은 더 이상 책임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란 걸 알기에. 그 멈춤의 자리 위에서, 온전한 나를 다시 만들어갈 참이다.   &nbsp;  #용궁장의고백 #조승리 #소설 #달 #독파 #도서제공 #서평단]]></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38/cover150/k56213770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03850</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관계를 중심으로 본 상처와 치유 - [떠요떠요 할머니]</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50335</link><pubDate>Sat, 14 Mar 2026 20: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5033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02137980&TPaperId=1715033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07/99/coveroff/k80213798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02137980&TPaperId=1715033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떠요떠요 할머니</a><br/>오미경 지음, 김다정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02월<br/></td></tr></table><br/>&lt;떠요 떠요 할머니&gt;는 특서주니어에서 출간된 신간 어린이 동화이다. 이 이야기는 발표 도중 잘못된 피드백으로 상처를 입어 말을 잃게 된 소녀 오단풍과, 친구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기 위해 나서는 아이들의 작은 모험을 담고 있다. 이야기 속에는 마녀라는 판타지적 요소와 아이들의 동심을 지켜보는 어른들의 따뜻한 시선이 함께 놓여 있다. 어린이 소설다운 상상력과 모험,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지지하는 부드러운 어른의 개입이 인상적으로 어우러진 작품이다.<br style="color: rgb(12, 16, 20); font-family: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quot;Segoe UI&quot;, Roboto, Helvetica, Arial, sans-serif; font-size: 14px;"><br style="color: rgb(12, 16, 20); font-family: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quot;Segoe UI&quot;, Roboto, Helvetica, Arial, sans-serif; font-size: 14px;">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십대 초반, 명작 동화를 탐독하던 내 유년기의 감각이 문득 되살아났다. 변성기 이전의 나는 발표를 좋아하는 활달한 아이였다. 그러나 변성기 무렵 목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목소리가 변한 뒤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부끄럽고 두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반 친구들의 비웃음 이후 말을 잃어버린 단풍이의 모습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어린이의 이야기를 읽고 있었지만, 그 장면은 어른이 된 지금의 나에게도 오래된 기억을 건드렸다.<br style="color: rgb(12, 16, 20); font-family: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quot;Segoe UI&quot;, Roboto, Helvetica, Arial, sans-serif; font-size: 14px;"><br style="color: rgb(12, 16, 20); font-family: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quot;Segoe UI&quot;, Roboto, Helvetica, Arial, sans-serif; font-size: 14px;">단풍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동물에 대한 장점을 떠올리며 친구들과 나누고 싶어 한다. 그래서 반에서 강아지를 키우자고 제안한다. 물론 동물권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제안이 얼마나 무책임한 발상인지에 대해서는 다른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아이에게 그 말은 단순한 제안 이상의 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애정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 그러나 아이들의 교실에서 흔히 보이는 잔혹한 무지함은 그 마음을 비웃음으로 돌려준다. 그 순간 단풍이는 목소리를 잃는다. 이 장면을 읽으며 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이란 얼마나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존재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br style="color: rgb(12, 16, 20); font-family: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quot;Segoe UI&quot;, Roboto, Helvetica, Arial, sans-serif; font-size: 14px;"><br style="color: rgb(12, 16, 20); font-family: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quot;Segoe UI&quot;, Roboto, Helvetica, Arial, sans-serif; font-size: 14px;">그럼에도 이 작품이 특히 좋았던 이유는 상처가 생긴 자리와 그것을 극복하는 자리 모두가 친구들 사이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단풍이는 때로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해 주려는 활달한 장미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그 마음을 곡해하지 않는다. 친구의 목소리를 되찾아 주겠다며 마니토 상자에 개구리를 넣어 보내고,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놀라게 하는 짓궂은 장난을 반복하는 재윤 역시 단풍이에게는 단순한 괴롭힘의 존재로 남지 않는다. 단풍이는 그 행동 뒤에 있는 친구의 마음을 읽어낸다. 이런 장면들은 아이들의 순수가 세상살이에 닳은 어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br style="color: rgb(12, 16, 20); font-family: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quot;Segoe UI&quot;, Roboto, Helvetica, Arial, sans-serif; font-size: 14px;"><br style="color: rgb(12, 16, 20); font-family: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quot;Segoe UI&quot;, Roboto, Helvetica, Arial, sans-serif; font-size: 14px;">이 이야기에는 멋진 어른이 등장한다. 뜨개방의 ‘떠요 떠요 할머니’다. 재윤은 할머니를 마녀라고 믿지만, 할머니는 그 오해를 굳이 바로잡지 않는다. 대신 친구를 돕고 싶어 하는 재윤의 마음과, 스스로 한계를 넘고 싶어 하는 단풍이를 위해 마녀인 척 마법의 주문을 가르쳐 준다. 어린이와 청소년 대상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무능하거나 무심한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의 세계를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며 조용히 힘을 보태는 어른이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을 더욱 따뜻하게 만든다.<br style="color: rgb(12, 16, 20); font-family: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quot;Segoe UI&quot;, Roboto, Helvetica, Arial, sans-serif; font-size: 14px;"><br style="color: rgb(12, 16, 20); font-family: -apple-system, BlinkMacSystemFont, &quot;Segoe UI&quot;, Roboto, Helvetica, Arial, sans-serif; font-size: 14px;">아이들이 함께 주문을 외우고 마침내 단풍이가 목소리를 되찾는 결말은 단단히 닫힌 해피엔딩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게 그 장면은 끝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단풍이와 재윤, 장미는 앞으로도 수많은 시련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함께 상처를 견디고 다시 목소리를 찾는 법을 배웠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어른인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렇게, 누군가와 함께 목소리를 되찾는 법을 배워 왔는지도 모른다고.]]></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07/99/cover150/k80213798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079945</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고대 그리스인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했나- 에피쿠로스 원자설의 철학적 의의 - [우리 집 인문학 : 철학 - 철학이 묻고 역사가 답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45794</link><pubDate>Thu, 12 Mar 2026 12: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4579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92136274&TPaperId=1714579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4/73/coveroff/k19213627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92136274&TPaperId=1714579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 집 인문학 : 철학 - 철학이 묻고 역사가 답하다</a><br/>박시몽 지음, 임기환 감수 / 상상스퀘어 / 2026년 02월<br/></td></tr></table><br/>철학책을 읽을 때면 늘 한 가지에 주목하게 된다. 각각의 사상가들은 세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오늘 처음 진도를 나가는 서양 철학사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유를 읽으며, 나는 이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감상평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br/>흔히 인간에 대한 관심이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사유는 조금 다르다. 연혁적으로 보면 인간에 대한 탐구보다 세계에 대한 이해가 먼저 등장한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대인들에게 자연에 대한 이해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능력이었기 때문이다.<br/>어릴 적 흥미롭게 읽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수많은 신들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카오스에서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태어나고, 바다와 밤과 운명이 신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자연을 의미로 묶어내려는 시도였다. 번개는 제우스의 분노였고, 바다는 포세이돈의 호흡이었다. 그러나 항해와 농경, 별의 관찰이 축적되면서 자연 현상이 신의 변덕에 달려 있다기보다 일정한 질서를 지닌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났을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신화적 설명은 자연철학으로 서서히 변모한다.<br/>내가 그리스 철학을 접하며 흥미롭게 바라본 점은 중세와의 차이였다. 중세의 종교가 종종 신에 반하는 사상을 억압했던 것과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화와 자연철학, 더 나아가 수학적·과학적 설명이 크게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그 이유 역시 분명하다. 신화는 세계의 의미를 이야기로 설명하고, 철학은 세계의 원리를 개념으로 탐구하며, 과학은 세계의 작동 방식을 관찰과 이론으로 해석한다. 서로 다른 층위의 질문을 다루고 있었기에 공존이 가능했던 것이다.<br/>그리스 사회는 각 자연현상을 담당하는 신들이 존재하는 다신교 사회였다. 그런 세계에서 자연은 무질서한 혼돈이라기보다 조화로운 질서, 곧 코스모스였다. 인간의 호기심이 그 질서를 지탱하는 근원을 찾으려는 방향으로 향했던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근원이 바로 아르케(archē), 만물의 시작과 원리였다.<br/>아르케를 찾는 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다양한 설명이 등장한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을 물이라 보았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헤라클레이토스는 끊임없는 변화를 세계의 본질로 보았다. 서로 다른 답이지만 그들의 시도는 공통된 방향을 지닌다. 세계의 복잡한 현상들을 하나의 근원적 질서로 이해하려는 통섭적 사유였다.<br/>그러나 이 흐름을 뒤흔드는 사상가가 등장한다. 바로 파르메니데스다. 그는 변화 자체를 부정한다.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가 생겨날 수 없고, 존재하는 것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논리 때문이다. 그의 사유는 자연철학의 논의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다. 세계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작은 입자와 공허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보는 변화는 이 불변의 입자들이 끊임없이 결합하고 분리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br/>이 논의의 철학적 함의는 단순하지 않다. 원자는 단지 작은 물질적 입자를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신화나 조물주의 의지 없이도 설명할 수 있다는 거대한 사유의 전환을 의미한다. 자연과 세계가 신화의 영역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내려오는 순간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br/>이러한 철학적 의미가 더욱 또렷해지는 것은 데모크리토스 이후 약 한 세기 뒤 등장한 에피쿠로스에 이르러서다. 이 시기에 이르러 철학의 관심은 자연의 구조에서 인간의 삶으로 이동한다. 소피스트를 거치며 철학은 “세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인간은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br/>에피쿠로스는 인간의 불안을 세계의 불확실성에서 찾았다. 신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끝없는 욕망. 그는 이러한 불안을 해체하기 위한 철학적 도구로 원자론을 선택했다. 다만 그는 데모크리토스의 엄격한 기계적 결정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clinamen, 즉 ‘편향’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원자들은 단순히 직선으로 낙하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세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br/>이 작은 편향은 단순한 물리적 가설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가 완전히 필연적인 기계적 질서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가능성을 열어 둔다. 다시 말해 인간의 선택과 행위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작은 틈을 마련한다. 에피쿠로스에게 원자론은 자연 설명이면서 동시에 인간을 공포에서 해방시키는 철학이었다.<br/>그는 인간의 영혼 역시 원자의 집합으로 보았다. 따라서 죽음은 원자의 해체일 뿐이며, 감각 역시 그와 함께 사라진다. 죽음 이후의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후 세계 역시 두려워할 대상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번개나 지진 같은 자연 현상도 신의 분노가 아니라 자연의 운동일 뿐이다. 이렇게 세계를 이해할 때 인간의 삶을 지배하던 많은 공포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br/>불안을 제거한 자리에서 에피쿠로스가 주목한 것은 인간의 감각이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흔히 생각하는 자극적인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고통이 없는 상태, 정신적 평정이다. 이 점에서 그의 철학은 후대 스토아 철학의 절제와도 어딘가 닮은 인상을 남긴다.<br/>이렇게 보면 고대 그리스에서 세계 이해가 인간 이해보다 먼저 등장한 이유도 분명해진다. 세계를 설명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삶을 둘러싼 공포와 불확실성을 줄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철학은 단순한 우주론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자리를 마련하는 작업이었다. 세계가 어떤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지 이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다.<br/>어쩌면 고대 그리스 철학이 끊임없이 우주를 바라보았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길고 긴 시간을 건너 그들의 사유를 읽고 이해하려 하는 것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세계로 사유의 지평을 확장하는 철학적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94/73/cover150/k19213627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947314</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벽돌책이란 뭘까 - [살면서 한번은 벽돌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39494</link><pubDate>Mon, 09 Mar 2026 10: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3949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92137760&TPaperId=1713949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58/23/coveroff/k39213776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92137760&TPaperId=1713949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살면서 한번은 벽돌책</a><br/>장강명 지음 / 글항아리 / 2026년 03월<br/></td></tr></table><br/>대하 소설을 엄청나게 좋아하는데다 벽돌책에 깊은 로망이 있던 내게, 살면서 한 번은 벽돌책이란 제목의 도서 소개 책은 제목 자체가 유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500쪽이 넘으면 심정적으로 난 벽돌책을 읽고 있어, 라고 생각하는 인간이지만, 이 티저북을 읽게 되면서 벽돌책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흔히 벽돌책은 두께와 페이지 수로 정해지곤 한다. 일단 무게감이 남다르고,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며, 완독 자체가 하나의 정신적 훈장처럼 다가오는 책들. 그런 게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벽돌책의 대중적 이미지가 아닐까.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 기준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걸 느꼈다. 어쩌면, 벽돌책이란, 단지 두꺼운 책이 아니라, 읽는 동안 사고의 구조가 바뀌는 책이어야 그 이름에 걸맞는 책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nbsp;  저자는 왜 벽돌책에 꽂혔을까. 왜 수많은 독서 리뷰 중에서 벽돌책 칼럼을 십년 넘게 써왔을까. 서문을 읽다 보면 연재 초기에 이미 읽어둔 벽돌책은 다 소진하고 그 다음에는 마치 오기라도 부리듯 도서관에서 온갖 벽돌책을 섭렵하며 이 책을 낸 것 같은데 나는 그 모습이 조금 우스우면서도 퍽 감동적이었다. 어쩌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책 읽기 버거워하는 현대의 독자들의 머리에 잠재적인 서고를 설치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읽지 않은 책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안티 라이브러리(antilibrary)란 개념을 말한 바 있었다. 이 책의 용도 역시 우리 머릿속에 아직 읽지 않은 안티 라이브러리를 설치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나는 지울 수가 없었다. 실제로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권의 읽고 싶은 벽돌책이 생겨서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nbsp;   저자의 글은 달필이라 페이지는 거침없이 넘어갔지만, 저자의 주장 가운데 몇 가지 논쟁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감상평을 빙자해서 조금 써보고자 한다. 저자는 벽돌책 완독은 다른 행위로 대체하기 어려운 독자의 사고체계에 가해지는 일종의 충격이라고 말하며, 700쪽 이상인 책을 한 번이라도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이후 모든 텍스트를 대하는 기준이 달라진다고 단언한다. 하지만 나는 이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내 독서 경험은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열권이 넘는 대하소설을 탐독해 왔다. 나는 하지만 내게 벽돌책의 독파가 어떤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느낌은 없었다. &lt;토지&gt;를 읽는 동안 고구마를 수천 개 물도 없이 씹고 있는 것 같은 인물의 답답함에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던 느낌이 아직도 선하고, 태백산맥를 통해 알게 된 해방직후의 빨치산과 이념투쟁은 이후 내가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었으며, 아리랑에서는 일제강점기의 민중의 고통과 독립 운동의 처절함을, 임꺽정을 통해 조선 중후기의 민초들의 고달픈 삶을 읽는 감각이 생겼으며, &lt;구 대망-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gt;를 읽으며 일본 전국시대의 시대상과 임진왜란의 탄생 배경을 읽게 되었고 &lt;삼국지&gt;를 통해서 중국의 고대사에 대한 이해와 인간 군상의 욕망을 읽게 되었지만, 이 모든 책들이 준 가르침은, 단권이지만 내게 인상 깊었던 다른 책들이 준 영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수천 페이지가 족히 넘는 책들을 읽어내려간 건 단순히 재미 있었기 때문이고, 지금도 하루에 두 세권의 책을 읽을 수 있는 가장 큰 동기도 재미 때문이다. 그 책이 벽돌책이든 아니든, 내게 있어 내 머릿 속의 사고의 구조를 단 한 권의 책이 설치해준다는 말은 내게 자칫 위험하게 들린다. 내 사유 근육을 만들어낸 건 수많은 책들의 학제간, 혹은 통섭적 연쇄 작용 때문이다. 내게 독서는 그렇기에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과정이고 그에 대해 쉼없이 답을 내리는 과정이다. 어떤 책은 그 과정을 좀더 쉽게 하기도 하고, 어떤 책은 질문의 단초를 던져주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내가 읽어온 무수한 책들 모두가 시간이라는 거대한 마그마 속에서 녹아들어 내 삶 전체를 통해 조금씩 구현되는 게 사고력이 아닐까. 하지만 그건 또 달리 말하자면, 좋아하는 책은 있어도 이 책이 네 삶을 바꾸었다고 말할 단 한 권의 인생책이 뭐야 라고 묻는다면, 아직 그에 즉각적으로 답할 만큼 확고한 인생책을 못만난 탓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nbsp;  그래서 나는 벽돌책의 기준을 두께가 아니라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미래의, 내 사유의 지도를 개편할 책으로 정의하고 싶다. 읽는 동안 생각이 흔들리고, 때로는 저자와 속으로 논쟁하게 만들며, 책을 덮은 뒤에도 질문이 남는 책. 그런 책이라면 설령 얇다 해도 내게는 충분히&nbsp;벽돌책일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런 점에서 의미 있는 독서였다. 저자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와 조용히 논쟁하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어쩌면 좋은 책이란 결국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758/23/cover150/k39213776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7582381</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청소년의 불안에 대한 다채로운 시도 - [사실은 불안하기 때문이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32549</link><pubDate>Thu, 05 Mar 2026 21: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13254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136615&TPaperId=1713254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60/57/coveroff/k4221366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22136615&TPaperId=1713254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실은 불안하기 때문이야</a><br/>임지형 외 지음 / 특별한서재 / 2026년 02월<br/></td></tr></table><br/>이 단편집은 청소년의 불안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다양한 형식과 장르로 풀어보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학교라는 익숙한 공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부터 재난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서사까지, 작품들은 비교적 넓은 스펙트럼의 소재를 활용해 청소년이 경험하는 불안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기획 자체는 분명 의미가 있다. 청소년문학이 종종 단일한 현실 서사나 교훈적 메시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 현실을 생각하면, 장르적 상상력과 사건 중심의 전개를 통해 독서의 흥미를 확보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신선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몇몇 작품은 빠른 전개와 독특한 상황 설정을 통해 이야기의 재미까지 부여한다.   &nbsp;  그러나 읽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한계 역시 분명하다. 많은 작품이 흥미로운 소재를 제시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 소재를 충분히 밀도 있게 확장하지 못한 채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정리되곤 했다. 갈등의 긴장이 충분히 축적되기 전에 서사가 급하게 결말로 수렴하면서 이야기의 여운이 얕아지는 순간들이 네 개의 소설에서 반복된다. 결과적으로 작품들은 완결된 서사라기보다 아이디어의 스케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nbsp;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의미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일부 작품에서는 인물의 행동이나 상황을 통해 독자가 의미를 읽어내기보다, 작품이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독해의 방향을 안내한다. 청소년 독자를 고려한 선택일 수 있지만, 독자의 해석 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 두었다면 이야기의 깊이는 훨씬 풍부해졌을 것이다. 최근 청소년 독자들의 문해력과 독서 경험을 고려한다면, 작가들이 독자를 조금 더 신뢰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남는다.  &nbsp;  편집상의 아쉬움도 발견된다. 122쪽에서 교무실과 행정실의 협박 전화의 서술 순서가 어긋나 서사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워지는 부분은 명백한 편집상의 오류로 보인다. 작품의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긴장을 끊는 요소라는 점에서 다음 판에서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대목이다.   &nbsp;  그럼에도 이 단편집은 청소년의 불안을 하나의 정답이나 교훈으로 수렴시키지 않고, 다양한 장르와 상황 속에서 탐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완성도의 편차와 서사의 단순함이라는 한계는 분명하지만, 이야기의 재미와 소재의 독특함은 분명한 장점으로 남는다. 앞으로 독자의 해석 능력을 조금 더 신뢰하고 서사와 감정선의 밀도를 높여 간다면, 훨씬 인상적인 작품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편집이었다.  &nbsp;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660/57/cover150/k4221366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6605729</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