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뚱냥다독님의 서재 (뚱냥다독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서평단 활동/ 읽은 책 서평 글 씁니다. </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19 Sep 2026 04:24:02 +0900</lastBuildDate><image><title>뚱냥다독</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뚱냥다독</description></image><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독서는 눈으로 하는 듣기 - [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59552</link><pubDate>Wed, 19 Aug 2026 13: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5955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21&TPaperId=174595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8/84/coveroff/k10213022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21&TPaperId=1745955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a><br/>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8월<br/></td></tr></table><br/><h1 class="wrap_item item_type_text" style="-webkit-font-smoothing: antialiased; backface-visibility: hidden; font-family: &quot;Noto Sans DemiLight&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margin: 9px auto 0px; padding: 0px; text-rendering: inherit; font-weight: normal; width: auto; font-size: 28pt; letter-spacing: 0.8px; line-height: 36.5pt; white-space: pre-wrap; min-width: auto; color: rgb(51, 51, 51);">독서는 눈으로 하는 듣기<br></h1><br><h3 class="wrap_item item_type_text" style="-webkit-font-smoothing: antialiased; backface-visibility: hidden; font-family: &quot;Noto Sans DemiLight&quot;, &quot;Malgun Gothic&quot;, sans-serif; margin: 2px auto 0px; padding: 0px; text-rendering: inherit; font-weight: normal; width: auto; font-size: 14pt; letter-spacing: 0.8px; line-height: 21.5pt; white-space: pre-wrap; min-width: auto; color: rgb(51, 51, 51);"><br>— 유지영, 《심장 듣기》를 읽고<br></h3><br><br>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SNS를 열면 수많은 사람의 일상과 생각이 실시간으로 흘러들고, 우리는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며 빠르게 반응한다. 그러나 연결의 수가 늘어난 만큼 한 사람의 이야기에 깊이 머무는 시간도 늘어났을까. 화면에는 상대가 고른 문장과 사진이 남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와 대답하기 전의 머뭇거림, 애써 삼킨 말과 침묵은 쉽게 탈락한다. 상대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우리는 내가 무엇을 대답할지, 어떤 입장을 드러낼지를 준비한다. 타인의 말은 이해해야 할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내 반응을 생산하기 위한 재료가 되고, 화면은 보고 있지만 정작 사람에게는 가닿지 못한다.<br><br>그래서 유지영의 《심장 듣기》가 말하는 ‘온몸을 총동원한 듣기’는 파편화된 관계의 시대에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온몸으로 듣는다는 것은 속도를 늦추고 판단과 대답을 잠시 미룬 채 한 사람의 말과 몸과 침묵 앞에 머무는 일이다. 효율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가 아니라 효율을 위해 잘게 쪼개진 관계를 다시 한 사람의 크기로 복원하는 행위에 가깝다. 저자가 말하는 듣기는 귀의 기능인 청음과도 구별된다. 청음이 들려오는 소리 신호를 인식하는 일이라면, 듣기는 그 말의 의미를 해석하고 자기 안에 받아들이려는 주체의 의지가 더해진 행위다.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은 나는 때로 흔들리고 일부가 찢어지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br><br>여기서 책의 제목이 왜 ‘귀로 듣기’가 아니라 ‘심장 듣기’인지 선명해진다. 저자가 말하는 듣기는 음성을 정확히 포착하는 기술에 머물지 않는다. 상대의 눈동자가 향하는 방향과 손짓, 자세와 표정, 말과 말 사이에 놓인 침묵까지 온몸으로 감각하는 일이다. 침묵한다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할 것이 없어서 침묵하는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무는지, 마음속에서 자신의 말을 정리하느라 잠시 멈춘 것인지는 귀만으로 알 수 없다. 심장으로 듣는 사람은 입 밖으로 나온 문장뿐 아니라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마음에도 자리를 내어준다.<br><br>저자가 반려견 밤이와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배워가는 대목에서 나는 함께 사는 열일곱 고양이를 떠올렸다. 내 고양이들은 아프거나 기력이 떨어지면 평소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내 몸에 붙는다. 다묘 가정에서 약해진 몸을 지키기 위해 가장 안전한 존재를 찾는 생존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본능이 하필 내게로 향한다는 사실에는 우리가 함께 견딘 시간도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내가 아이들의 신호를 배워온 만큼 아이들 역시 내 목소리와 체온, 손길과 밤샘 곁을 안전의 언어로 기억했을 것이다. 생존본능과 사랑은 반드시 서로 반대편에 놓인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br><br>달땡이의 림프종과 마루와 새론이의 복막염, 라온이와 풀잎이의 허피스를 함께 통과했다. 가온이의 식도확장증과 유문부 다발성 염증을 돌보았고, 보담이의 자궁 염증 수술과 꽃길이의 발바닥 신경 접합 수술, 아름이의 피부염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의 중성화부터 임신과 출산, 양육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순간에는 가능한 한 곁에 머물렀다. 말로 어디가 아픈지 물을 수 없었기에 나는 더 자세히 보고, 만지고, 기다려야 했다. 평소와 다른 울음 한 번, 밥그릇 앞에서의 짧은 망설임, 달라진 걸음걸이와 호흡, 몸을 웅크리는 각도는 모두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 작은 차이를 알아채는 일이 때로는 아이들의 생명과 이어져 있었다.<br><br>고양이는 인간의 문장으로 말하지 않지만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컨디션에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와 울음의 길이가 달라지고, 눈빛과 꼬리의 움직임, 걸음걸이와 몸을 기대는 방식도 달라진다. 나는 귀뿐 아니라 눈과 손, 오랜 시간 축적된 기억을 동원해 그 말을 듣고 해석하는 일이 좋다. 내가 언제나 옳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신호를 뒤늦게 알아차리기도 하고, 걱정 때문에 작은 변화를 과도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해하려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는다.<br><br>책에는 듣기란 “매 순간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듣는 일이 한 명의 인간을 이해하는 최선의, 그리고 최소한의 행위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나는 이것이 듣기에 대한 가장 정직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에 직접 들어갈 수 없으며 같은 사건을 겪어도 서로 다른 감정과 기억을 갖는다. 아무리 오래 듣더라도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확신에는 오만이 섞이기 쉽다. 그러므로 듣기의 성공은 상대를 남김없이 해석하는 데 있지 않다. 이해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사람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것, 바로 그 불완전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데 있다.<br><br>이 말은 비인간 존재와의 관계에서도 유효하다. 나는 고양이가 무엇을 느끼는지 완전히 알 수 없고, 아이들도 내가 흘린 눈물이나 두려움의 의미를 인간처럼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아이들이 밤새 곁을 지킨 내 마음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듣고 기억한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그들의 언어를 다 알지 못하면서도 계속 귀 기울이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내 목소리와 손길에 담긴 마음을 감각했을지 모른다. 심장 듣기란 완벽하게 번역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이해의 불완전함은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날 때 반드시 감수해야 할 조건인지도 모른다.<br>그러나 《심장 듣기》는 듣기를 한 사람의 다정한 성품이나 사적인 관계의 기술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삼각지 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참여한 저자의 경험은 듣기가 개인의 인품을 넘어 권력과 연결된 문제임을 드러낸다. “장애인도 지하철을 타게 해달라”는 외침은 분명 역사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비장애인 시민과 경찰, 지하철을 운영하는 교통 체계는 그 절박한 요구를 동등한 시민의 발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열차의 안내방송과 역장의 경고는 즉시 질서의 언어로 승인되는 반면, 장애인의 목소리는 시민의 이동을 방해하는 소음과 불편으로 처리되었다. 음성은 모두의 귀에 도달했지만 사회적으로는 말이 되지 못했다.<br><br>우리는 들려오는 말을 모두 같은 무게로 듣지 않는다. 어떤 말은 정보와 명령으로 즉시 받아들이고, 어떤 말은 과장이나 투정으로 축소하며, 어떤 말은 아예 소음으로 밀어낸다. 누가 말했는지, 그가 어떤 몸을 가졌는지, 사회에서 어느 자리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말의 신뢰도와 가치가 미리 결정되기도 한다. 듣기란 단순히 귀의 기능이 아니라 누구의 말을 ‘말’로 인정하고 누구에게 발언의 자리를 허락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력의 문제다. 듣지 않는 사회는 타인을 침묵시키기 전에 먼저 그의 말을 소음으로 명명한다.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처리되는 것이다.<br><br>저자는 시위에 참여한 자신의 정의로움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지친 몸으로 현장에 도착해 경찰의 손에 밀려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느낀 서러움,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웃던 경찰들의 표정, 자신 역시 피로와 당혹감 속에서 타인의 절박함을 얼마나 끝까지 들을 수 있었는지를 함께 돌아본다. 듣지 않는 권력은 언제나 노골적인 폭력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못 들은 척하는 표정, 고통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웃음, 모두에게 질서를 지키라고 말하는 듯한 중립적인 안내방송 속에도 숨어 있다. 거대한 사회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그 구조 안에 놓인 자기 몸의 피로와 모순까지 감추지 않는 정직함이 이 장면을 구호 이상의 글로 만든다. 타인의 말을 듣는 일은 나를 언제나 옳은 편에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외면해온 것과 내 안의 모순을 함께 마주하게 한다.<br><br>“장애인도 시민”이라는 외침과 장애인의 시위를 “역사 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행위”라고 규정하는 말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다. 첫 번째 말은 장애인을 이동권을 가진 동등한 시민으로 호명하지만, 두 번째 말은 그들을 정상적인 일상을 방해하는 존재로 밀어낸다. 같은 행동도 누가 이름 붙이느냐에 따라 정당한 권리 요구가 ‘소란’이 되고, 절박한 호소가 ‘불편’과 ‘민폐’로 바뀐다. 시민의 권리는 조용히 부탁할 때만 허락되는 호의가 아니다. 지켜지지 않는 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해 소란을 피워야만 하는 사람에게 왜 조용하지 못하냐고 묻는 것은 이미 안정된 질서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의 언어일 수 있다.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목소리의 크기를 탓하기 전에 그 말이 왜 그렇게 커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는 일이다.<br><br>여기서 《심장 듣기》는 좋은 경청법을 알려주는 에세이를 넘어 듣기의 윤리와 정치학을 다루는 인문서가 된다. 개인의 태도에서 출발하되 그것을 개인의 친절이나 인품 문제로 끝내지 않고, 누가 말할 자리를 얻으며 누구의 목소리가 삭제되는지를 사회 구조까지 밀고 나간다.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단지 귀를 열어두는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말로 인정받지 못했던 목소리가 왜 들리지 않았는지, 그 침묵을 만들어낸 질서 속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타인의 말을 들으려면 때로는 내가 편안하게 누려온 자리를 비워야 한다. 나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 타자의 삶이 들어올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br><br>《심장 듣기》를 읽으며 나는 듣기가 내가 오랫동안 해온 책 읽기와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책이라는 도구를 통해 유지영이라는 한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 저자는 내 앞에 앉아 있지 않고 그의 눈빛이나 손짓도 볼 수 없지만, 문장은 시간과 거리를 건너 그의 목소리를 내게 데려온다. 나는 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이해하지 못한 페이지로 되돌아가며, 불편한 주장 앞에서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오래 머문다. 그것은 귀 대신 눈과 손과 기억을 사용하는 느린 청취다. 독서는 어쩌면 눈으로 수행하는 듣기인지도 모른다.<br><br>물론 책을 읽는다고 언제나 저자의 말을 듣는 것은 아니다. 줄거리와 핵심만 빠르게 수집하고, 이미 가진 생각을 확인해주는 문장만 골라 읽는다면 독서 역시 청음에 머물 수 있다. 책을 몇 권 읽었는지 기록하고 결론만 소비하는 동안에는 눈으로 글자를 좇아도 그 안에 담긴 타인의 세계와 만나지 못한다. 독서가 듣기가 되기 위해서는 문장 앞에서 판단을 잠시 미루고, 나와 다른 삶이 내 안에 머무르도록 허락해야 한다. 저자의 뜻을 정답처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내 삶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질문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듣기와 읽기는 모두 타인의 말을 내 안에 들임으로써 변화될 가능성을 감수하는 일이다.<br><br>책을 듣는다는 것은 저자의 말에 모두 동의하거나 비판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다만 책이 자기 이야기를 충분히 펼치기도 전에 내가 가진 취향과 경험으로 결론을 내려버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책을 펼칠 때 가능한 한 기존의 판단을 잠시 내려놓으려 한다. 낯선 작가의 글과 익숙하지 않은 장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소재의 책도 우선 그 세계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들어본다. 사실과 주장에는 검증과 비판이 필요하지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통과했고 그 경험에 어떤 이름을 붙였는지는 먼저 그의 언어로 들을 필요가 있다. 동의하지 않는 것과 듣지 않는 것은 다르다.<br><br>편견 없이 읽는다는 것은 비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판보다 이해를 먼저 놓는 일이다. 익숙한 장르의 문법이나 유명 작가의 성취를 낯선 책의 기준으로 앞세우지 않고, 그 책이 무엇을 하려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다. 책이 자기 언어와 질서로 충분히 말할 시간을 허락하면 나는 취향의 경계를 넘어 낯선 세계의 재미를 발견한다. 평소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장르에서 뜻밖의 질문을 만나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소재를 통해 내가 알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었음을 배운다. 많이 읽는 일의 가치는 이미 좋아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데만 있지 않다. 내 바깥에서 도착한 목소리를 성급히 돌려보내지 않는 데에도 독서의 기쁨이 있다.<br>좋은 독서는 이미 잘 들리는 목소리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내 경험과 사회적 위치 때문에 그동안 듣지 못했던 존재의 말을 읽어내고, 누군가의 삶을 소음이나 통계로 처리해온 내 인식의 한계를 발견하게 한다. 책은 전쟁과 가난, 질병과 장애, 차별과 상실을 통과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붙인 이름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들의 말을 읽으며 나는 세계가 내 경험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배웠다. 독서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게 해준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섣불리 단정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법을 조금씩 가르쳐주었다.<br><br>저자는 경청이 단순히 듣기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과거의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변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말을 제대로 들으면 내 삶이 흔들리고 일부는 찢어지며, 나는 어제와 다른 형태가 된다. 그래서 저자가 경청을 마친 뒤 던지는 질문은 “잘 들었나요?”가 아니라 “무엇이 변했나요?”이다. 이 질문은 독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책을 얼마나 정확히 요약하고 많은 문장을 기억하는가보다, 그 책을 읽은 뒤 내가 무엇을 이전처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은 채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를 받아들인 탓에 더는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일이다.<br><br>한 문장이 오래 지켜온 확신에 균열을 내고, 낯선 삶을 내 안에 머물게 하며, 그동안 소음으로 여겼던 목소리를 비로소 말로 알아듣게 할 때 독서는 눈으로 하는 경청이 된다. 한 권을 다 읽고도 아무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이미 믿던 것만 더 단단해졌다면, 그것은 독서라기보다 자기 확신을 확인한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반대로 한 문장 때문에 익숙한 판단을 의심하고, 쉽게 미워하거나 외면했던 존재에게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면 그 책의 목소리는 이미 내 안에 들어온 것이다. 독서를 마친 뒤 내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만이 아니다. 무엇을 예전처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는지, 누구의 말을 새롭게 듣게 되었는지, 그래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변화는 제대로 읽고 들었다는 가장 깊은 흔적이다.<br><br>나 역시 《심장 듣기》를 읽기 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처음에는 듣기에 관한 책을 펼쳤지만, 밤이의 이야기를 통해 열일곱 고양이와 맺어온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삼각지역의 장면에서는 듣기가 개인적인 다정함만이 아니라 시민권과 권력의 문제임을 발견했다. 저자가 경청의 본질을 변화에서 찾는 대목에서는 내가 오랫동안 해온 독서의 의미를 새로 정의하게 되었다. 이 책은 내게 새로운 독서 습관을 가르쳤다기보다, 내가 왜 낯선 작가와 장르와 소재를 편견 없이 만나려 했는지를 설명할 언어를 건넸다. 나는 이 책을 요약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목소리 때문에 내 독서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br><br>나는 살아남고 싶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책이 내 삶의 문제에 분명한 답을 내려주기를 바랐고, 무너진 일상을 다시 세우는 방법을 얻고 싶었다. 그렇게 자기계발서에서 시작한 독서는 문학과 과학, 철학과 사회, 역사로 점차 반경을 넓혀갔다.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해서 세상의 답을 모두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저자의 말을 오래 듣는 동안 사람과 삶을 쉽게 단정할 수 없게 되었다. 독서가 내게 돌려준 것은 확신의 양보다 질문을 품고 머무를 수 있는 힘이었다.<br><br>책 속의 문장은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동시에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내 고통과 욕망에도 언어를 건넸다. 타인의 말을 듣는 일이 나를 지우는 과정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의 언어를 통과하면서 나는 내 안에 있던 목소리를 발견했다. 책이 나를 살린 것은 삶의 정답을 대신 내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삶 쪽에서 건너오는 수많은 목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도록 붙잡아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혼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감정의 이름과 삶의 방향을 보여주었다. 나는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나 자신의 목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br><br>비인간의 몸짓을 인간의 말로 완벽하게 번역할 수 없듯, 한 권의 책을 읽는다고 저자의 내면을 남김없이 이해할 수도 없다. 사람을 마주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전부 살아볼 수 없기에 언제나 어느 정도는 오해하고 실패한다. 그러나 이해의 불가능성이 듣기의 무용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매 순간 이해에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눈을 맞추고 몸을 기울이는 것이 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이자 최소한의 행위다. 듣기의 윤리는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실패 이후에도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지속적인 노력 속에 있다.<br><br>저자는 “댓글과 좋아요, 구독자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타인의 고통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단 한 명의 진지한 청자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수많은 사람에게 노출되는 것과 한 사람에게 온전히 들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 삶을 놓지 않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듣기는 거창한 해답을 내놓거나 상대의 고통을 대신 해결하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그 사람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곁에 머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소한의 일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안 우리는 그가 이 세계에 존재할 자리를 함께 지켜준다.<br><br>나는 지금 책이라는 도구로 유지영의 말을 듣고 있다. 그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내가 무엇을 어떻게 들어왔고 또 어떤 목소리를 듣지 않았는지를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책에서 구했던 것은 정답이 아니라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살아보지 못한 삶의 이야기, 혼자서는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 사회가 소음으로 밀어냈던 존재의 외침, 절망 속에서도 삶을 놓지 말라고 건너온 수많은 목소리. 그것들을 오래 들은 끝에 나는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조금 더 잘 듣는 사람이 되었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이 듣기는 끝나지 않는다.<br><br>우리는 제대로 듣는 순간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 타인의 말이 나를 흔들고 일부를 바꾸도록 허락하는 것이 듣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심장 듣기》는 더 잘 말하고 더 많이 드러내야 살아남을 것 같은 시대에 말하는 몸에서 듣는 몸으로 옮겨갈 용기를 건넨다. 이제 내게 남은 질문은 얼마나 많은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가 아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말로 인정해왔으며, 한 존재의 목소리 앞에 얼마나 오래, 얼마나 온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가이다. 귀로 들을 수 없는 말과 사회가 소음으로 밀어낸 외침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눈과 손과 기억을 열고 심장으로 듣는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8/84/cover150/k10213022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388400</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지워진 이름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 [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33276</link><pubDate>Wed, 05 Aug 2026 08: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3327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130423&TPaperId=1743327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52/36/coveroff/k74213042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130423&TPaperId=1743327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a><br/>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08월<br/></td></tr></table><br/>지워진 이름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br>《비밀의 들판》을 읽고<br>어떤 역사는 기록되지 않아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 아픈 기억이라 말할 수 없어서 사라진다.<br>마거릿 주혜 리의 《비밀의 들판》은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한 명의 위대한 인물을 발굴하는 역사책이 아니다. 저자가 찾아가는 것은 한 사람의 업적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라진 뒤 남겨진 가족의 시간이다.<br>1970년대 미국 텍사스에서 자란 저자는 늘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싶었지만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가족에게 할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br>누군가에게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숨겨야 하는 상처가 될 수 있다. 같은 사건도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br>저자가 오랜 추적 끝에 발견한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공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었고, 긴 시간이 흐른 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비밀의 들판》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왜 이제야 그 이름이 돌아왔는가”에 머물지 않는다.<br>왜 한 사람의 삶은 오랫동안 기록되지 못했는가.왜 그 가족은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못했는가.그리고 침묵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견뎌야 했는가.<br>역사는 언제나 기록하는 사람의 선택으로 남는다. 무엇이 기록되었는지만큼 중요한 것은 무엇이 기록되지 못했는지다.<br>한 독립운동가의 삶이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한 것은 단순한 행정적 누락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이념 갈등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한 가족은 자신의 과거를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br>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한 사람이 감옥에 갇힌 사실 자체보다,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이었다.&nbsp;고문과 수감은 한 사람의 몸을 파괴한다. 그러나 침묵된 역사는 남겨진 가족의 삶에도 오래 흔적을 남긴다.<br>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행동과 선택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대의 맥락 속에서 다시 보이는 순간이 있다.<br>책 속 저자의 부친 역시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기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에게 남겨진 것은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기억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은 수치와 침묵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했는지 알지 못한 채 자란 아이에게 역사는 자부심이 아니라 혼란과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깊이 와닿았다.<br>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 역시 가족의 역사를 떠올렸다.<br>나의 증조부는 구한말 고종의 근위대장이었다고 가족에게 전해 들었고, 한일병합 직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들었다.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 선택에 이르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시대의 질서가 무너지고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경험한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br>하지만 역사의 상처는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nbsp;이후 가족이 겪은 몰락 속에서 친할머니는 더 많은 배움과 가능성을 펼칠 기회를 잃었고, 현실 속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숙명여고까지 다녔던 분이 생계를 위해 꿈을 접어야 했고, 영특하고 공부를 잘했던 아버지도 가난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온전히 펼치기 어려웠다.<br>어릴 때의 나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를 나와 어머니를 미워했던 사람으로 기억했고, 그 감정은 오래 남았다.&nbsp;<br>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다른 질문을 하게 되었다.“그 사람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이 질문은 누군가의 잘못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다.<br>상처받은 사람이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시대의 피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도 있다.&nbsp;그러나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함께 바라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br><br><br>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이 책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이철하를 완벽한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nbsp;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어서 시대에 맞선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현실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고민했고, 두려움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선택했던 사람이었다.&nbsp;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특별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불안하고 흔들리는 한 인간이다. 다만 자신의 두려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었기에, 어려운 선택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br>하지만 그의 삶에서 더욱 오래 마음에 남은 부분은 가족을 대하는 태도였다.&nbsp;그는 시대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가능성 역시 존중했다. 당시 여성의 교육 기회가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아내의 배움과 성장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기록은 의미 있게 다가왔다.사회적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신의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도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바깥세상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도 가족 안에서는 익숙한 질서를 반복한다.<br>그런 점에서 이철하 지사가 가족이라는 작은 세계 안에서도 한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그가 왜 시대의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처럼 느껴졌다.<br>한 사람이 가진 가치관은 거대한 역사적 선택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지에서도 드러난다.그래서 이 책이 더욱 깊게 다가왔다.<br>그러나 《비밀의 들판》이 끝내 보여주는 것은 한 독립운동가의 위대한 삶만이 아니다. 역사의 격랑은 영웅 한 사람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 곁에 있던 가족들, 이름 없이 기다린 사람들, 자신의 꿈보다 생존을 먼저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이 함께 통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br>이철하 지사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마주한 것은 할아버지의 용기만이 아니었다. 그 곁에서 긴 시간을 견뎌낸 할머니의 삶이었다.&nbsp;남편을 잃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뒤로 미뤄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의 이름 뒤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가 무너뜨린 자리에서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운 또 하나의 주체로 볼 수 있었다.<br>그녀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라는 이름으로만 살아간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남긴 흔적과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서 두 아들을 키워냈고, 손주들을 돌보았으며, 흩어질 수 있었던 가족을 붙잡았다.<br>저자가 “할머니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br>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해서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상처를 품은 채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삶을 지켜낸 사람이었다.<br>나는 이 부분에서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br>우리는 흔히 역사를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로 기억한다. 하지만 한 시대를 버티게 만든 힘은 기록에 남은 몇 명의 영웅만이 아니다. 그들의 곁에서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운 사람들이 있었다.이름을 남기지 못했지만 누군가를 먹이고, 기다리고, 돌보고, 다음 세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버틴 사람들이 있었다.<br>그래서 나는 이제 할머니를 단순히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nbsp;그녀 역시 한 시대의 폭력과 상실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꿈을 잃은 사람이었고, 자신의 가능성을 접어야 했던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끝까지 가족을 지켜낸 사람이었다.<br>나의 할머니처럼 저자의 할머니가 남긴 것은 완벽한 사랑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견뎌낸 생존의 기록이었다.&nbsp;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그녀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버텨낸 사람이었다.&nbsp;물론 고통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권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피해자가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nbsp;그렇기에 이해한다는 것은 용서하거나 미화하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행동만 바라보는 대신, 그 사람이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br><br>그런 의미에서 내게《비밀의 들판》은 기억에 대한 책이었다.&nbsp;사라진 기록을 찾아내는 일, 침묵 속에 묻힌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상처를 물려받고, 또 어떻게 다르게 이어갈 것인지 묻는 과정이다.<br>우리는 이전 세대가 남긴 선택과 결과 위에 서 있다. 그들의 용기뿐 아니라 두려움도, 희생뿐 아니라 상처도 때로는 다음 세대에게 이어진다.&nbsp;그러나 과거가 우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nbsp;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반복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는 일이다.<br>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시간을 이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그리고 어느 순간 그 타인의 시간이 나의 가족과 나 자신의 시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때, 책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는 거울이 된다.<br>시대의 광풍 속에서도 끝내 남는 것은 거대한 이름만이 아니다.<br>싸운 사람, 기다린 사람, 살아남은 사람이 함께 역사를 만든다.<br>우리가 기록하는 이유는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같은 상처가 다음 세대에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역사는 영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br>누군가는 싸웠고, 누군가는 기다렸으며, 누군가는 살아남았다.<br>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이어져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52/36/cover150/k74213042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523666</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불안의 시대, 나를 이해하는 언어를 찾는 법 -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31405</link><pubDate>Tue, 04 Aug 2026 09: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314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0124&TPaperId=174314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1/76/coveroff/k99213012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0124&TPaperId=174314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a><br/>노은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7월<br/></td></tr></table><br/>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br>불안의 시대, 나를 이해하는 언어를 찾는 법<br><br>1. 연결은 많아졌지만 마음을 이해받는 경험은 줄어든 시대<br>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이 연결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세계 곳곳의 정보와 사람에게 닿을 수 있고, SNS를 통해 타인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바라본다.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웠던 속도로 관계가 확장되었고, 우리는 언제든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다.그러나 역설적으로 연결의 증가는 마음의 고립을 해결하지 못했다.<br>오히려 많은 현대인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할까”, “나는 왜 인정받고 싶을까”, “나는 왜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도망치고 싶을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br>인간은 본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배운다. 어린 시절 부모의 표정과 반응을 통해 내가 사랑받는 존재인지 확인하고, 친구와 학교생활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 타인의 반응은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었다.<br>하지만 현대 사회의 관계 구조는 크게 변했다.<br>가족과 지역 공동체는 이전보다 약화되었고, 직장은 더 이상 평생 소속감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온라인 관계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 관계가 반드시 깊은 정서적 지지와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br>많은 사람이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해석해 줄 관계는 부족한 시대가 되었다.그래서 현대인은 자신의 마음을 설명해 줄 새로운 언어를 찾기 시작했다.MBTI, 심리 테스트, 사주와 타로, 각종 성향 분석 서비스가 인기를 얻는 현상은 단순한 유행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것은 복잡하고 모호한 내면을 이해하고 싶다는 인간의 오래된 욕구가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br>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왜 같은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상처받을까.왜 원하는 관계를 선택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할까.<br>현대인은 자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한다.<br>《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질문에서 출발하는 책이다.노은정 작가는 정신분석과 심리학의 언어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지만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의 패턴을 들여다본다.<br>완벽해야 한다는 압박.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해지는 마음.도움을 받고 싶으면서도 의존하는 자신을 불편해하는 태도.사랑받고 싶지만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지는 관계 방식.<br>책은 이러한 감정을 단순히 성격의 문제나 의지 부족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과거의 경험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적응 방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br>중요한 것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빠르게 결론 내리는 것이 아니다.왜 나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AI 시대, 마음의 해석을 외부에 맡길 때 생기는 것최근 많은 사람이 AI에게 자신의 감정과 고민을 묻는다.<br>“내가 왜 이런 기분일까.”“나는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br>이 현상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이해해 줄 거울을 필요로 했다.<br>정신분석가 하인츠 코헛이 말한 자기대상(selfobject)의 개념처럼 인간은 타인의 공감과 인정 속에서 안정적인 자기감을 형성한다. 누군가가 나의 감정을 알아보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해주는 경험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는 중요한 힘이 된다.<br>AI 역시 현대 사회에서 그러한 역할의 일부를 수행할 수 있다.판단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언어를 제공하며, 감정의 구조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nbsp;특히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AI는 하나의 안전한 대화 공간이 될 수 있다.<br>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위험도 존재한다.AI가 제공하는 설명을 하나의 확정된 정답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자기 이해는 오히려 자기 제한으로 변할 수 있다.<br>“나는 불안형 인간이다.”“나는 회피형이라서 관계가 어렵다.”“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br>이런 문장은 나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나를 고정된 틀 안에 가둘 수도 있다.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목적은 나를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br>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이해하고, 앞으로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다.불안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다.이해해야 할 신호다.<br><br>2. 복잡한 이론보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심리학<br>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어려운 정신분석 이론을 지식으로 전달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nbsp;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지만 쉽게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의 움직임을 보여준다.<br>누군가의 인정이 끊임없이 필요한 사람.혼자 해결하려 애쓰다가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버림받을까 두려워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br>책 속 사례들은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경험과 겹쳐진다.<br>“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진단을 받는 느낌보다,“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br>이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br>심리학 책은 때때로 전문 용어가 많아 독자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공부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는 사례 중심의 구성으로 독자가 자신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만든다.<br>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어렵고,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진입장벽이 낮은 책이다.<br>한 사례를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나는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그때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책은 대신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대신 내가 내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질문을 건넨다.그리고 그 질문 앞에 머무르는 시간이야말로 진짜 자기 이해의 시작이 된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31/76/cover150/k99213012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317621</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자주국방과 전시작전통제권, 한 국가가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의 의미 - [자주국방의 가성비 - 대한민국, 누가 어디까지 지킬 것인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31393</link><pubDate>Tue, 04 Aug 2026 09:0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3139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0120&TPaperId=1743139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29/76/coveroff/k12213012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22130120&TPaperId=1743139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자주국방의 가성비 - 대한민국, 누가 어디까지 지킬 것인가</a><br/>정욱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8월<br/></td></tr></table><br/>《자주국방의 가성비》를 읽고<br>자주국방과 전시작전통제권, 한 국가가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의 의미<br>하나의 단어는 언제나 하나의 의미만 갖지 않는다. ‘자주국방’이라는 말 역시 누군가에게는 국가 주권과 독립성을 상징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동맹 약화와 안보 불안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주국방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 한 국가가 자신의 안전을 어떤 방식으로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br>《자주국방의 가성비》를 읽으며 가장 오래 머문 지점은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문제였다. 이전까지 나는 전작권 논쟁을 주로 “한미동맹 강화인가, 자주국방인가”라는 정치적 구도로만 이해했다. 하지만 책은 이 문제가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br>전작권은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군사 작전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권한이다. 한국의 현재 작전권 구조는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역사에서 출발했다. 전쟁 초기 한국군은 북한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유엔군 지휘 체계 아래 들어갔고, 이후 한미동맹이 형성되면서 한미연합사 중심의 독특한 지휘 구조가 만들어졌다.<br>당시에는 국가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후 세계적인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 성장했고, 상당한 수준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등장한다.<br>강대국의 보호가 필요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안보 구조를, 성장한 한국이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인가.<br>전작권 문제는 단순히 “미국이 한국군을 지휘하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다. 평시와 전시의 지휘 체계가 다르고, 한미연합사와 유엔사 등 여러 조직이 연결되어 있는 복잡한 구조 속에서 유사시 누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책임질 것인가의 문제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는 빠르고 일관된 지휘 체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 사령부와 다국적 전력이 어떻게 조율되는지는 중요한 안보 과제가 된다.<br>전작권 전환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주권국가라면 자국 군대의 작전 판단 권한을 스스로 가져야 하며, 동맹 역시 일방적 의존이 아니라 책임 있는 파트너십 위에서 더욱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신중론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한반도의 특수한 안보 환경을 고려할 때, 미국의 전략 자산과 한미 연합 지휘 체계가 현실적인 억제력이라고 주장한다.흥미로운 점은 두 입장 모두 안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차이는 무엇을 더 큰 위험으로 보는가에 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국가의 위험을 우려하고, 또 다른 사람은 충분한 준비 없이 지휘 권한만 바꾸는 위험을 우려한다.<br>결국 전작권 문제는 “미국인가 한국인가”의 선택이 아니다. 동맹과 자주성, 억제력과 책임 있는 판단 능력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다.<br>최근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의 군사적 판단이 주변 국가의 운명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보며 이 질문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안보와 미래에 대해 얼마나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는 단순한 군사 문제가 아니라 국가 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자주국방’이라는 익숙한 단어 뒤에 숨겨진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주국방은 단순히 무기를 많이 확보하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력, 기술력, 산업 기반, 외교 전략, 동맹 관리 능력이 함께 갖추어져야 가능한 개념이다.<br>결국 국가의 힘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뿐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는가에서 드러난다.<br>전작권 논쟁은 우리에게 묻는다.<br>한 국가는 언제까지 보호받는 존재로 남아야 하는가.그리고 언제부터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br>좋은 사회과학 책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던 단어 속에 담긴 역사와 이해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자주국방의 가성비》는 ‘자주’와 ‘동맹’이라는 두 단어를 대립시키는 대신, 변화한 한국이 어떤 국가로 성장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29/76/cover150/k12213012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297693</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보이지 않는 일을 처음으로 노동이라 부르게 된 날 -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02454</link><pubDate>Mon, 20 Jul 2026 19: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024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00&TPaperId=174024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81/77/coveroff/k1021302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02130200&TPaperId=174024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a><br/>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07월<br/></td></tr></table><br/>보이지 않는 일을 처음으로 노동이라 부르게 된 날<br/><br/>《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를 읽고<br/><br/><br/>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보았다. 고양이 화장실 모래가 할인 중인지 확인하고 종류별로 세 상자를 주문했다. 키친타월과 휴지의 남은 수량을 세어 필요한 만큼 구매했고, 독서모임 책을 주문했다. 종량제 봉투를 사러 갈 시간을 계산하고, 아름이와 약속한 저녁 산책과 길고양이 밥 주기를 머릿속 일정표에 넣었다. 파일집 정리, 화장실 청소, 걸레질, 구토 치우기, 쓰레기 배출, 택배 상자 정리, 고양이 화장실 모래 전체 갈이, 오줌 묻은 이불 빨래, 설거지, 열 마리의 심장사상충 접종 일정, 서평단 마감까지 확인했다. 그 와중에 나는 모의고사 오답을 풀고 있었다.<br/>언뜻 세어보아도 서른 개가 넘는 일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이것을 가사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 때만 집안일을 한다고 여겼다. 무엇이 부족한지 알아차리고, 언제 사야 하는지 판단하고, 여러 선택지를 비교하고, 일정을 조정하고, 다른 존재의 필요를 예측하는 일은 그저 내가 원래 잘하는 일, 혹은 내가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는 바로 그 믿음에 이름을 붙였다. 내가 그동안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수많은 생각과 판단이 모두 ‘인지노동’이었다.<br/>미국 사회학자 앨리슨 데이밍거는 이성애·퀴어 커플 172명을 심층 인터뷰해 가정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추적한다. 저자가 말하는 인지노동은 단순히 할 일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족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예상하고, 가능한 선택지를 조사하고, 그중 하나를 결정한 뒤, 일이 제대로 끝났는지 다시 확인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아이의 병원 예약을 잡는 행위만 놓고 보아도, 이상 증상을 알아차리고 병원을 비교하고 가능한 시간을 조율하고 진료 이후의 약 복용과 다음 예약까지 관리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한 번의 행동 뒤에는 여러 갈래의 판단과 책임이 겹쳐 있다.<br/>이 정의를 읽는 순간 내 머릿속이 해체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일정만 관리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시험 일정과 보충 계획, 과제와 성적을 챙기고, 여러 마리 고양이의 식사와 약, 병원과 접종 일정을 기억한다. 그 모든 일정은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수업이 바뀌면 병원 시간이 밀리고, 한 아이의 상태가 나빠지면 공부 계획과 집안일이 함께 재조정된다. 실제 노동은 손을 움직이는 시간보다, 계속 충돌하는 변수들을 머릿속에서 맞물리게 하는 과정에 더 가까웠다. 나는 언제나 피곤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언어가 없었다. 이 책은 그 피로가 의지 부족이나 체력 저하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료 지점 없는 관리 시스템을 계속 가동한 결과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br/>저자는 인지노동을 ‘예상하기, 선택지 확인하기, 결정하기, 결과 지켜보기’의 네 단계로 나눈다. 이 구분은 너무 정확해서 조금 잔인하다. 고양이 모래를 주문하는 일만 해도 남은 양과 교체 시기를 예상하고, 가격과 품질을 비교하며, 구매 수량과 배송일을 결정하고, 실제로 도착했는지 확인한 뒤 보관과 폐기까지 처리해야 한다. 개별 행동은 짧아 보이지만 결정의 사슬은 길다. 더구나 이 일들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휴지가 도착하면 다음에는 사료가 떨어지고, 예방접종이 끝나면 다음 병원 일정이 생긴다. 집과 돌봄은 완결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계속 갱신되는 시스템이다.<br/>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정리할 수 있다.<br/>역할은 성격을 반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처럼 보이는 능력과 습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br/>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원래 계획적이고, 꼼꼼하며, 주변 사람의 필요를 잘 알아차린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누군가는 즉흥적이고 세부적인 일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차이가 반드시 타고난 성격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한 사람이 계속 가족의 일정과 필요를 책임지면 그는 더 빨리 위험을 감지하고, 더 많은 가능성을 예측하며, 더 촘촘하게 계획하는 능력을 익히게 된다. 반대로 그러한 역할에서 비켜나 있던 사람은 그 기술을 연습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역할이 반복되면 능력이 되고, 능력은 다시 성격처럼 보인다.<br/>이 대목은 성별을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여성은 원래 더 세심하고 남성은 원래 큰일에 집중한다는 식의 설명은, 이미 성별에 따라 다르게 배분된 경험을 타고난 본성으로 오해할 위험이 있다. 누가 더 많이 계획하고 기억해왔는지, 누가 실패의 결과를 더 직접적으로 감당해왔는지를 보지 않은 채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면 현재의 역할 분담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굳어진다.<br/>그러나 나는 책을 읽으며 모든 문제를 성별 하나로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로 저자가 만난 커플들 가운데에는 여성이 인지노동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남성이 더 많은 인지노동을 담당하거나 두 사람이 비교적 균형 있게 나누는 사례도 있었다. 퀴어 커플 역시 자동으로 평등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명칭만이 아니라, 한 관계 안에서 누가 가족 운영의 중심축이 되고 누가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가였다.<br/>이 점에서 이 책은 인지노동을 주도권의 문제로 확장한다. 가정의 필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정보를 모으고, 일정과 기준을 세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결정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주도권은 곧 부담이기도 하다. 계획하는 사람은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더 큰 불안과 짜증을 느낀다. 그 사람이 통제적인 성격이라서 모든 것을 관리하는 것인지, 오랫동안 관리 책임을 맡은 결과 통제적인 습관을 갖게 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 통제광처럼 보이고, 통제하려 할수록 다른 사람은 더욱 수동적으로 물러서는 악순환도 가능하다.<br/>나 역시 여러 일정과 돌봄을 총괄하면서 내가 정한 방식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믿는 순간이 많았다. 내가 전체 구조를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일부만 보고 내린 판단은 불완전해 보였다. 그러나 모든 정보를 나만 쥐고 있는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이 독립적으로 판단할 기회도 줄어든다. 내가 과도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책임 때문에 주도권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이 책은 인지노동의 부담을 가시화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책임과 권한이 어떻게 함께 축적되는지까지 보여준다.<br/>책의 상당 부분은 인지노동이 여성에게 더 많이 배분되는 현실을 분석한다. 그러나 나는 일부 대목에서 저자의 해석이 다소 공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남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말해주어야 움직인다는 사실을 곧바로 책임 회피 전략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우리 남편 역시 내가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야 정확히 움직이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것을 무능력이나 악의로 규정하고 싶지 않다. 사람마다 정보를 인식하고 행동을 시작하는 방식은 다르며, 관계에는 건강, 직업, 경험, 기질, 돌봄 능력처럼 성별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변수도 존재한다.<br/>특히 책이 개인의 성향을 문화적 각본의 결과로 강하게 해석할 때에는, 사회구성론적 분석이 개인의 고유성을 다시 지워버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별 규범이 사람의 선택과 능력을 형성한다는 통찰은 유효하다. 그러나 모든 차이를 사회구조의 산물로만 읽으면, 한 사람의 기질과 선호, 실제로 주고받은 돌봄의 역사까지 설명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구조를 발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구조라는 하나의 언어로 모든 관계를 판결해서는 안 된다.<br/>다행히 결론부에서 저자 역시 이러한 위험을 보완한다. 인지노동 불평등을 인식했다고 해서 곧바로 분노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커플이 불평등을 인정하면서도 쉽게 역할을 바꾸지 못하는 까닭은, 그 역할이 이미 자신의 성격과 관계의 정체성처럼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계획과 돌봄을 내려놓는 일은 단순히 할 일을 덜어내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정하는 문제다. 반대로 지금껏 인지노동을 덜 맡아온 사람이 그 책임을 넘겨받는 일 역시 새로운 기술과 자신감을 익혀야 하는 변화다.<br/>따라서 저자의 결론은 개인을 악당으로 만들기보다, 개인과 관계가 놓인 조건을 바꾸어야 한다는 쪽으로 향한다. 인지노동의 문제를 당사자 커플만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되며, 학교·직장·병원·공공기관도 가족에게 떠넘기는 예측과 조정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을 줄이고, 필요한 정보를 명확히 제공하며, 돌봄 친화적인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가정 내부의 인지노동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킨다. 개인에게 더 잘 계획하고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애초에 누군가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조율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br/>결국 이 책이 다루는 핵심은 단순한 가사 분담이 아니다. 무엇을 노동으로 인식할 것인지, 그 노동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 그리고 책임과 정보를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의 문제다. 두 사람이 각각 절반씩 일을 맡았다는 숫자만으로는 평등을 판단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전체 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이 지시받은 일부 행동만 수행한다면, 육체적 노동은 나누었어도 인지적 부담은 여전히 한쪽에 남아 있다. 반대로 정확히 50 대 50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이 현재의 역할을 함께 선택했다고 느끼고, 서로의 부담과 기여를 충분히 알고 있다면 관계의 만족도는 달라질 수 있다.<br/>그래서 공정함은 동일한 양의 일을 나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맡은 일이 무엇인지 상대가 알고, 상대의 일이 내 삶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 이해하며, 상황이 달라질 때 역할을 다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인지노동은 생각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에 쉽게 과소평가되고, 과소평가되기에 한 사람의 성격이나 사랑으로 흡수된다. “당신은 원래 꼼꼼하잖아”, “당신이 더 잘하잖아”라는 칭찬은 때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영구 배정하는 문장이 될 수 있다.<br/>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하는 수많은 판단을 노동으로 세지 않았다. 그저 내가 책임감이 강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누군가가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도록 필요한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사고가 나지 않게 순서를 짜고, 선택지를 비교하고, 일정을 기억하며, 결과를 확인하는 일도 분명한 노동이다. 그것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노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기꺼이 했다고 해서 피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br/>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변화는 불만을 키운 것이 아니라, 피로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준 것이다. 나는 내가 왜 늘 지쳤는지 조금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책임을 많이 맡았기 때문에 더 많은 권한을 쥐고, 그 권한을 놓지 못한 순간도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누가 더 나쁜 사람인지 판정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이 누구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지를 함께 꺼내놓는 일이다.<br/>《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는 가사노동에 관한 책이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얼마나 많이 생각하며 살아가는지에 관한 책이다. 가족을 유지하는 것은 손으로 수행하는 일만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고, 여러 사람의 필요를 조율하며, 실패를 예방하는 정신적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그 노동을 가시화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피로를 정당하게 이해하고, 타인의 기여를 제대로 바라보며, 관계를 다시 설계할 가능성을 얻는다.<br/>구조를 보되 사람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책임을 인정하되 비난을 자동화하지 않는 것. 그리고 각자가 어떤 부담을 지고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 것. 이것이 내가 이 날카롭고 때로는 아픈 책에서 건져 올린 가장 중요한 결론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81/77/cover150/k1021302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817710</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고통을 운명으로 두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 - [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00643</link><pubDate>Sun, 19 Jul 2026 21:2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0064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0502&TPaperId=1740064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00/45/coveroff/k00213050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02130502&TPaperId=1740064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a><br/>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7월<br/></td></tr></table><br/>고통을 운명으로 두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비주얼 의과학사》를 읽고<br><br>나는 의학의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몸을 이해하는 일은 당연히 현대 과학에 가까운 것이고, 고대의 의술은 주술과 미신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막연히 여겼다. 히포크라테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전의 이집트 의학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몸을 관찰하고 기록했는지, 그리스 의학이 이집트의 지식 위에서 발전했는지, 갈레노스와 베살리우스와 하비와 데카르트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몸을 다시 보게 만들었는지는 거의 알지 못했다.<br>《비주얼 의과학사》는 그런 나의 무지를 조용히 깨뜨린 책이다. 이 책은 의학사를 단순히 의사와 발견의 연표로 나열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 몸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 몸을 둘러싼 신비와 금기가 어떻게 지식과 관찰로 바뀌었는지, 그 지식이 다시 해부학, 생리학, 철학, 미생물학, 유전학, 영상의학의 언어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장을 넘길수록 나는 의학이 단지 병을 고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가장 오래된 지적 모험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br>가장 먼저 놀라웠던 것은 고대 이집트 의학이었다. 나는 의학사의 출발점으로 히포크라테스를 먼저 떠올렸다. “의학의 아버지”라는 이름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은 그보다 앞선 자리, 고대 이집트의 의술을 보여준다. 인류 최초의 의사로 기록된 임호텝, 그리고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에 담긴 외상 치료 기록은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고대 의술과 전혀 달랐다. 그 문서에는 머리, 얼굴, 목, 팔, 가슴, 어깨, 척추 등 신체 부위별 외상 사례가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두개골과 뇌를 구분하고, 머리 손상과 뇌 손상을 관찰한 기록은 놀라웠다. 고대의 의술을 막연히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낮춰 보았던 나에게, 이 장면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br>고대 이집트의 의술은 이미 아픈 몸을 그냥 운명이나 신의 뜻으로만 넘기지 않았다. 누군가 다쳤고, 누군가는 그 상처를 보았다. 어디가 손상되었는지,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어떻게 처치할 수 있는지 기록했다. 물론 그들의 지식은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불완전했고, 틀린 설명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완전한 정답을 가졌는가가 아니다. 그들은 아픈 몸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고통을 이름 붙이고, 손상된 부위를 구분하고, 다음 환자를 위해 경험을 남기려 했다. 의학은 완성된 과학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런 태도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br>더 흥미로웠던 것은 이집트의 의술이 그리스로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히포크라테스를 의학사의 거의 출발점처럼 생각했지만, 책을 읽다 보니 히포크라테스 역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고대 이집트 의술이라는 거대한 전통 위에 서 있었다. 이집트에서 축적된 의학 지식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그리스로 전달되었고, 그리스 철학과 자연관 속에서 다시 정리되고 발전했다. 히포크라테스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것을 처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질병을 초자연적 힘이나 신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환자를 관찰하고, 경험을 중시하고, 진찰과 진단, 치료를 체계화했다. 의학을 기도와 주술의 영역에서 관찰과 판단의 영역으로 옮겨놓은 것이다.<br>이 대목에서 나는 지식의 흐름이 얼마나 겸손한 것인지 생각했다. 우리는 자주 어떤 위대한 이름 하나로 역사를 기억한다.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아비센나, 베살리우스, 하비 같은 이름들은 의학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름들 뒤에는 수많은 무명의 관찰자와 기록자가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의사들, 알렉산드리아의 해부학자들, 로마의 의사들, 이슬람 세계의 번역자와 의학자들, 중세의 수도원과 대학에서 의학 문헌을 읽고 베낀 사람들까지. 의학은 한 문명의 단독 발명이 아니라, 문명 사이를 이동한 지식의 연쇄였다.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그리스에서 로마로, 로마와 그리스의 의학이 이슬람 세계에서 보존되고 발전한 뒤 다시 서방으로 환류했다. “서양 의학”이라는 말 안에는 사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아랍, 중세 유럽의 지식이 겹겹이 들어 있었다.<br>갈레노스의 사례도 흥미롭다. 그는 수많은 해부와 실험, 관찰을 통해 인체를 체계화하려 했고, 그의 의학은 오랫동안 서양 의학의 권위가 되었다. 현대 의학의 눈으로 보면 틀린 설명도 많이 남겼다. 동물 해부를 바탕으로 인간의 몸을 추론했기 때문에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자기 시대의 한계 안에서 몸을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려 했다. 그는 동물을 해부하고, 혈관과 신경과 장기의 기능을 추론했으며, 동맥 안에 공기가 아니라 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br>이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동맥에 공기가 흐른다고 믿었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살아 있는 동물의 동맥을 묶고 절개하여 그 안에 피가 있음을 보았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실험이지만, 그 순간 인간은 몸에 대한 오래된 오해 하나를 벗겨냈다. 의학의 진보는 언제나 거창한 선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정말 그런가?”라는 질문 하나, 묶고 절개하고 확인하는 작은 실험 하나가 세계를 바꾼다.<br>물론 갈레노스 역시 틀렸다. 그는 인체의 혈액이 되돌아오지 않는 열린 흐름이라고 보았고, 심장의 구조와 기능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오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는 천재 한 명이 완벽한 진리를 발견하며 단번에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관찰하고, 다른 사람이 그 관찰을 이어받고, 누군가는 틀리고, 누군가는 그 틀림을 고치며 지식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역사는 기형적인 천재의 폭발이 아니라, 거인의 어깨 위에 또 다른 거인이 올라서는 과정이었다.<br>그 흐름 속에서 이슬람 세계의 역할도 새롭게 보였다. 흔히 근대 의학을 유럽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의학 지식은 이슬람 세계를 거치며 보존되고 발전했다. 라제스는 홍역과 두창을 구분했고, 아비센나의 《의학정전》은 오랫동안 의학 교과서로 쓰였다. 이들은 단순한 보관자가 아니었다. 기존 지식을 종합하고, 비판하고, 체계화하며 자신들의 임상 경험과 결합했다. 지식은 한곳에 머무를 때보다 이동할 때 더 오래 살아남는다. 의학의 역사는 바로 그 사실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관찰은 다른 문명의 언어로 번역되고, 번역된 지식은 다시 교육과 진료의 체계가 되며, 그 체계는 또 다른 시대의 의학을 준비한다.<br>그러나 지식은 때로 권위가 되면서 다음 지식을 가로막기도 한다. 갈레노스의 의학은 한때 새로운 관찰이었지만, 이후에는 너무 큰 나무가 되어 작은 새싹들이 자라기 어려운 그늘이 되었다. 중세의 금기 속에서 해부는 오랫동안 제한되었고, 의학 교육은 고대 권위의 문장을 읽는 데 머물렀다. 교수는 책을 낭독하고, 이발사 겸 외과의가 시체를 절개하며, 학생들은 그것을 지켜보는 방식이었다. 몸은 눈앞에 있었지만, 진리는 여전히 책 속에 있다고 여겨졌다.<br>그 질서를 뒤집은 인물이 베살리우스였다. 그는 직접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접 해부하고, 직접 확인하고, 눈앞의 몸이 책과 다르면 책이 아니라 몸을 믿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장면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전환 중 하나였다. 인간의 몸이 다시 학문의 대상으로 돌아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는 단순한 해부학 책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몸을 권위가 아니라 관찰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사건이었다.<br>여기서 나는 지식이란 결국 “직접 보려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금기와 권위 앞에서 멈추지 않고, 정말 그런가 묻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려 했을 때 세계는 조금씩 달라진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권위와 교회의 시선 아래에서도 몸을 다시 보았다. 그는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보았다. 그 태도가 근대 해부학의 문을 열었다.<br>하비의 혈액순환 발견도 마찬가지였다. 동맥에는 공기가 아니라 피가 흐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혈액이 몸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질문은 오래 이어졌다. 하비는 심장이 한 번 수축할 때 내보내는 혈액량을 계산했고, 그 양이 간에서 계속 새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계산은 완전하지 않았지만, 질문은 정확했다. 혈액은 새로 만들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순환한다. 몸은 열린 흐름이 아니라 닫힌 순환계로 작동한다.<br>나는 이 대목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몸 안에서 피가 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는 상식이다. 그러나 그 상식 역시 누군가의 의심과 계산,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심장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펌프로, 혈관은 길로, 피는 생명을 실어 나르는 흐름으로 다시 이해되었다. 이때 의학은 몸을 구조로 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스템으로 보기 시작한다. 장기 하나하나가 아니라 연결과 순환, 기능과 관계가 중요해진 것이다.<br>데카르트의 등장은 의학사가 단순히 해부와 혈액순환의 발견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나는 데카르트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철학자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 속의 데카르트는 인간의 몸과 생명, 작동 원리와 건강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신이 만든 정교한 기계로 설명하면서도, 인간을 단순한 기계로만 환원하지 않았다. 몸과 영혼을 구분한 그의 사유는 오늘날에는 이분법적 한계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중요한 전환이었다. 몸은 더 이상 신비와 금기의 영역에만 갇혀 있지 않고, 구조와 기능의 단위로 분석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영혼과 의미의 문제는 철학과 신학의 영역에 남겨짐으로써, 믿음과 과학이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br>데카르트에게 철학은 추상적 사고의 놀이가 아니라 몸과 삶을 이해하기 위한 실천적 학문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공부가 깊어지면 왜 여러 분야로 관심이 확장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을 이해하려면 해부학만으로는 부족하다. 생리학이 필요하고, 철학이 필요하고, 종교와 역사, 기술과 예술까지 필요하다. 하나의 질문을 깊이 파고들면 결국 세계 전체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복잡계와 통섭이라는 말이 멀리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인간의 몸 하나를 이해하려 해도 이미 세계는 연결되어 있었다.<br>이후 의학사는 보이는 몸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으로 나아간다. 현미경을 통해 인간은 눈으로 볼 수 없던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레이우엔훅은 작은 렌즈를 통해 미생물의 세계를 보았고, 정자와 미세한 생명체를 관찰했다. 그가 만든 렌즈 하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보는 방식을 바꾼 장치였다. 몸 밖에서 몸 안으로, 장기에서 세포로, 세포에서 미생물로 시선이 깊어지면서 의학은 다시 한 번 확장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자, 병의 원인도 새롭게 질문될 수밖에 없었다.<br>미생물학의 역사는 세균을 발견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필터로 세균을 걸러냈는데도 병은 남았고, 감염성은 다음 숙주로 건너갔다. 그 빈칸에서 인간은 바이러스를 만났다. 세균보다 작고, 세포보다 단순하며, 생명과 물질의 경계에 놓인 존재. 특히 박테리오파지는 내게 익숙한 생명과학의 개념과 맞닿아 있어 더 흥미로웠다. 세균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 유전물질을 주입하고 증식하는 존재. 의학사는 여기서 다시 확장된다. 인간은 장기와 혈액, 세균을 넘어 이제 생명을 움직이는 정보의 층위까지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br>의학은 적을 없애는 방식으로만 발전하지 않았다. 때로는 적의 적을 발견하고, 그 생물학적 전략을 치료의 언어로 바꾸었다. 박테리오파지는 그 극적인 사례다. 세균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이용해 병원균만 선택적으로 겨냥하려는 발상은, 의학이 점점 더 거칠고 넓은 공격에서 정밀한 표적 치료로 이동해왔음을 보여준다. 몸의 구조를 보던 의학은 이제 생명체 사이의 관계와 정보, 숙주와 감염의 전략까지 치료의 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br>나는 CRISPR 대목에서 의학사의 방향이 한 번 더 크게 꺾이는 것을 느꼈다. 이전의 의학이 몸을 보고, 기록하고, 설명하고, 치료하는 역사였다면, CRISPR 이후의 의학은 생명의 문장 자체를 고칠 수 있는 가능성 앞에 선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출발점이 인간의 발명이 아니라 세균의 면역 기억이었다는 사실이다. 세균은 바이러스의 침입 흔적을 자기 유전체 안에 저장했고, 같은 적이 다시 침입하면 그 서열을 알아보고 잘라냈다. 인간은 그 오래된 생존 전략을 발견해 유전자 편집 도구로 바꾸었다. 세균이 살아남기 위해 진화시킨 무기가, 인간에게는 생명의 문장을 고치는 칼이 된 것이다.<br>그러나 이 지점에서 경이는 곧바로 두려움과 만난다. 유전자 편집은 유전 질환 치료의 희망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어디까지 생명을 고쳐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의학사는 고통을 줄이려는 인간의 역사였지만, CRISPR는 그 선의가 언제든 인간 자체를 설계하려는 욕망으로 넘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기술 앞에서 필요한 것은 흥분만이 아니다. 생명을 고칠 수 있는 힘만큼,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않을 윤리의 감각도 함께 자라야 한다.<br>MRI의 원리도 뜻밖의 지적 즐거움을 주었다. 나는 MRI가 자기력을 이용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몸속 수소 원자핵이 작은 자석처럼 반응하고, 자기장과 고주파 자극 속에서 발생한 미세한 신호를 읽어 영상으로 재구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MRI는 몸을 직접 “보는” 장치라기보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해석하는 장치였다. 수소 원자핵의 흔들림과 공명, 회복 속도의 차이를 읽어내고, 그 차이를 영상으로 바꾸는 기술. 몸은 이제 칼로 열어야만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물리학적 신호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세계가 되었다.<br>이 대목에서 의학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실감했다. 고대의 의사는 상처를 보았고, 베살리우스는 시체를 열었고, 하비는 피의 흐름을 계산했다. 레이우엔훅은 렌즈로 보이지 않는 생명을 보았고, 현대 의학은 원자핵의 신호를 읽어 몸속을 영상으로 재구성한다. 의학은 신비에서 관찰로, 관찰에서 구조로, 구조에서 시스템으로, 시스템에서 정보와 신호의 해석으로 나아갔다. 몸은 점점 더 깊이 읽히는 텍스트가 되었다.<br>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지식을 얻는 기쁨을 자주 느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상식의 뒤편에 수천 년의 관찰과 오류와 용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기쁨이었다. 고대 의학을 무시하고 있던 나의 편견이 깨졌고, 히포크라테스 한 사람으로만 기억하던 의학의 뿌리가 이집트와 그리스, 이슬람 세계와 중세 대학, 르네상스 해부학과 근대 생리학, 미생물학과 유전학, 영상의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 속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br>이 책의 장점은 바로 그 흐름을 눈으로 보게 해준다는 데 있다. 제목 그대로 비주얼 자료가 풍부하다. 파피루스, 중세 필사본, 해부도, 실험 그림, 의학자들의 초상과 도판, 현미경 이미지와 MRI 원리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식이 어떻게 기록되고 전승되고 수정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림 하나, 도표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의학의 역사가 더 이상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생생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시체 앞에 섰고, 누군가는 동맥을 묶었고, 누군가는 심장의 혈류를 계산했으며, 누군가는 렌즈 앞에서 미지의 생명체를 보았고, 누군가는 세균의 면역 기억에서 유전자 편집의 가능성을 읽어냈다.<br>이 책을 읽으며 나는 수의학을 향한 내 마음도 다시 떠올렸다. 인간의 의학이든 동물의 의학이든 출발점은 같다. 아픈 몸을 자세히 보는 것.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읽으려 하는 것. 증상을 운명이나 성격이나 약함으로 돌리지 않고, 그 안에 어떤 신호가 있는지 묻는 것. 고대 이집트의 의사들이 상처를 기록하고, 히포크라테스가 환자를 관찰하고, 갈레노스가 몸속 구조를 설명하려 하고, 베살리우스가 직접 해부하고, 하비가 혈액의 흐름을 계산한 일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고통을 이해하려는 방향이다.<br>그러므로 이 책은 단순한 의학사가 아니다. 인간이 자기 몸을 신비에서 지식으로, 금기에서 관찰로, 구조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정보와 신호와 정신의 관계로 확장해온 역사다. 인간은 몸을 몰랐고, 그래서 두려워했다. 그러나 동시에 알고 싶어 했다. 병을 이해하고 싶었고, 고통을 줄이고 싶었으며, 죽음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판단을 하고 싶었다. 그 욕망이 의학을 만들었다.<br>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결말이라기보다 다시 시작점처럼 느껴졌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현미경 앞에 앉아 있고, 누군가는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찾고 있으며, 누군가는 오래 붙들어 온 질문의 답에 막 다가서고 있다. 의학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간은 여전히 몸을 모르고, 그래서 계속 묻는다. 어디가 아픈가. 왜 아픈가. 어떻게 하면 덜 고통받고 더 살릴 수 있는가.<br>《비주얼 의과학사》가 내게 남긴 감정은 바로 그 질문의 생생함이었다. 미지의 세계가 열릴 때의 기쁨, 내가 당연하게 여긴 상식 뒤에 수많은 사람의 관찰과 오류와 용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이. 이 책을 읽고 나니 의학사는 차갑고 딱딱한 과학의 연대기가 아니라, 고통을 운명으로 두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이 남긴 가장 오래되고 치열한 질문의 기록처럼 느껴졌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00/45/cover150/k00213050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004532</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달이 부서진 세계, 멸망과 일상의 간극을 헤아리다 - [시간의 끝]</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00525</link><pubDate>Sun, 19 Jul 2026 20: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40052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92130109&TPaperId=1740052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69/32/coveroff/k09213010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92130109&TPaperId=1740052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시간의 끝</a><br/>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달이 부서진 세계, 멸망과 일상의 간극을 헤아리다<br>— 김성일, 《시간의 끝》을 읽고<br><br>최근 SF나 판타지 계열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래서 김성일의 《시간의 끝》을 펼쳤을 때도 처음에는 장르적 재미를 기대했다. 달이 파괴되고, 사교도들이 출몰하며, 수학자가 시간의 비밀을 추적하고, 형사가 사건의 뒤를 쫓는 이야기. 설정만 놓고 보면 종말을 배경으로 한 SF 미스터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니 이 소설은 우주의 끝보다 더 오래 남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세계가 해석되지 않을 때 인간은 무엇을 믿는가. 멸망이 끝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br>《시간의 끝》의 세계는 처음부터 정상적이지 않다. 달은 파괴되었고, 밤하늘에는 온전한 달이 아니라 부서진 파편이 떠 있다. 테러가 벌어지고, 괴물에 대한 목격담이 떠돌며, 사교도들은 혼란을 자신들의 언어로 해석한다. 좋은 소식은 사라지고 세계는 점점 흉한 곳이 되어간다. 이 세계의 무서움은 단순히 멸망이 가까워졌다는 데 있지 않다. 더 두려운 것은 아무도 이 세계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과학도, 수사도, 종교도, 개인의 기억도 현실의 균열을 완전히 붙잡지 못한다.<br>이런 세계에서 종교적 광신은 단순한 배경 장치가 아니다. 사교도 집단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해석 체계의 어두운 형식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혼란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결론을 오래 버티지 못한다. 달이 부서졌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계시라고 부르고, 시간이 뒤틀렸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예언이라고 부르며, 멸망이 가까워졌다면 누군가는 그 멸망의 의미를 독점하려 한다. 광신은 비이성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든 설명하려는 인간 욕망의 뒤틀린 결과이기도 하다.<br>이 점에서 《시간의 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은 전혀 다른 결의 소설이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하늘 아래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1Q84》에서는 두 개의 달이 뜨고, 《시간의 끝》에서는 달이 파괴된다. 하나는 세계가 어긋났다는 신호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가 이미 부서졌다는 증거다. 달이 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이전의 현실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현실이 믿을 수 없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새로운 믿음을 만든다. 그 믿음은 사랑이 될 수도 있고, 구원이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종교적 폭력과 광신이 될 수도 있다.<br>《시간의 끝》이 흥미로운 것은 멸망을 단순한 최종 사건으로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이야기에서 멸망은 막아야 할 대상이고, 결말은 그 멸망을 막았는지 실패했는지로 결정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멸망은 직선적인 끝이라기보다 되돌아오는 구조에 가깝다. 시작은 끝을 낳고, 끝은 다시 시작의 조건이 된다. 누군가의 죽음은 세계를 막아 세우지만, 동시에 다른 믿음과 세계관이 자라나는 토양이 된다. 파국은 종결되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재배치된다.<br>처음에는 이 구조가 거대한 SF적 장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읽을수록 이것이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도 한 번의 결심이나 한 번의 사건으로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오늘 수영장에 가면 내일도 수영장에 갈 확률이 높아지고, 오늘 책상 앞에 앉으면 내일의 공부가 조금 덜 낯설어진다. 반대로 오늘 흐름이 끊기면 내일도 그 끊김 위에서 시작하게 된다. 오늘 글을 쓰면 내일의 문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오늘 미루면 내일의 미룸은 더 자연스러워진다. 삶은 극적인 전환보다 이런 작은 관성들에 의해 더 많이 움직인다.<br>물론 되풀이되는 일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우리 집 고양이들의 구토와 방뇨로 인한 청소는 끝나지 않는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매일 약을 먹이고, 오줌과 똥을 치우고, 아무 데나 방뇨한 자리를 닦고, 토사물을 치우고, 깨진 그릇 조각을 쓸어 담는다. 그 순간에는 당연히 투덜대고 지친다. 겨우 치웠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곳에서 냄새가 나고, 겨우 정리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사고가 벌어진다. 돌봄은 종종 숭고한 마음보다 먼저 몸을 숙여 닦고 치우는 일로 나타난다.<br>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지겨운 반복이 아주 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들이 사고칠 만큼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말썽은 살아 있음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다. 오늘 또 치워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오늘도 내 곁에 돌봐야 할 생명들이 있다는 뜻이다. 매일의 청소는 끝나지 않는 노동이지만, 동시에 내가 지키고 싶은 삶의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지치면서도 안도한다. 투덜대면서도 고맙다. 아이들이 여전히 뛰고, 먹고, 아프고, 사고치며, 내 생활을 어지럽힐 만큼 살아 있다는 사실이.<br>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의 끝》 속 인물들이 여러 사람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멸망을 막으려 하는 이유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대단히 찬란한 미래만은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다시 반복될 평범한 하루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밥을 먹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익숙한 길을 걷고,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살아가는 시간. 멸망을 막는다는 것은 세계 전체를 구한다는 거창한 말 이전에, 그런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하루 더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다.<br>그래서 이 소설의 희생은 허무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완전한 구원을 만들지 못한다. 희생을 치러 막은 세계의 멸망은 다른 시간축 위에서 또 다른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 시작은 결백하지 않고, 끝은 완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이상하게 현실적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일상의 안정도 어쩌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선택과 손실, 돌봄과 버팀 위에 잠시 허락된 시간일 수 있다. 평범한 하루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은 지겨운 굴레이면서 동시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귀한 유예다.<br>《시간의 끝》을 읽고 남은 것은 멸망의 공포만이 아니었다. 끝나지 않는 세계 속에서도 사람들이 왜 다시 멸망을 막으려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었다. 그들은 완벽한 희망을 믿어서가 아니라, 다시 돌아올 하루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거대한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도 밥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바닥을 닦고, 책상 앞에 앉고, 수영장에 가고, 문장을 잇는다. 사소하고 지겹고 때로는 버거운 그 반복 속에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br>어쩌면 인간이 멸망 앞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희망이 분명해서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하루가 사실은 너무나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끝》은 세계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결국 일상의 가치를 묻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달이 부서지고, 시간이 뒤틀리고, 광신이 세계를 해석하려 들 때에도 인간이 지키려는 것은 어쩌면 가장 평범한 삶이다. 다시 아침이 오고, 누군가가 살아 있고, 투덜대며 치워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세계. 그 지루하고 아름다운 유예를 위해 사람들은 끝내 멸망을 막으려 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69/32/cover150/k09213010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693256</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아이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아이의 삶을 대신 살 수는 없다 - [요주의 인물]</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64954</link><pubDate>Tue, 30 Jun 2026 17:2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6495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62130878&TPaperId=1736495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05/36/coveroff/k16213087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62130878&TPaperId=1736495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요주의 인물</a><br/>황지영 지음, 불키드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06월<br/></td></tr></table><br/>아이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아이의 삶을 대신 살 수는 없다<br/>— 황지영, 『요주의 인물』을 읽고<br/><br/>『요주의 인물』을 읽는 동안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복잡한 슬픔이었다. 이 책에는 나쁜 아이 하나, 예민한 부모 하나, 무능한 학교 하나로 단순히 정리할 수 없는 관계들이 나온다. 오히려 이 소설은 묻는다. 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처받은 아이를 보호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대신 싸워주는 일이고, 어디서부터는 아이가 자기 삶을 스스로 건너가도록 곁을 지켜주는 일인가.<br/>이찬은 친구가 없는 아이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를 사귀는 법을 잃어버린 아이다. 처음부터 그런 아이였던 것은 아니다. 이찬에게도 공을 차고 싶고, 친구와 놀고 싶고,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과잉보호와 학교의 무책임한 대응, 아이들 사이의 냉혹한 분위기가 겹치며 이찬은 점점 반 안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어간다. 이름이 아니라 낙인으로 불리는 아이. 사람이라기보다 사건의 원인으로 취급되는 아이. 그 과정이 너무 선명해서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br/>나는 이찬이를 쉽게 나무랄 수 없었다. 나 역시 중학교 2학년 때 학교가 지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실내화 속 압정, 머리 위로 떨어진 화분, 계단에서 밀쳐져 접질린 발목 같은 일들이 있었다. 몸은 여러 번 다쳤고, 마음은 그보다 더 오래 다쳤다. 그런데도 나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았다. 어른들이 나서면 나를 구해주기보다 더 외롭게 만들 것 같았다. 그때의 학교는 아이들이 배우는 곳이라기보다 견디는 곳에 가까웠고, 나는 매일 아침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며 조금씩 나를 접었다.<br/>그래서 친구 없는 이찬이의 고통을 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교실, 내가 지나가면 아주 조금씩 멀어지는 몸들, 무슨 일이 생겨도 결국 내 탓이 될 것 같은 공기. 그런 고립은 아이를 조용히 망가뜨린다. 괴롭힘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몸을 다치게 하고, 마음의 안전지대를 무너뜨리고, 오래도록 세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어떤 아이에게 학교는 정말로 지옥이 될 수 있다.<br/>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찬의 부모 마음도 이해한다. 자기 아이가 다치고, 울고, 혼자가 되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질까.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 앞에서 부모는 쉽게 이성을 잃는다. 세상이 아이를 공격한다고 느끼는 순간, 부모는 방패가 되고 싶어진다. 더 단단한 방패, 더 날카로운 방패, 아이 앞에 있는 모든 위험을 베어내는 방패가 되고 싶어진다. 『요주의 인물』 속 부모 역시 그런 마음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아이를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br/>문제는 그 보호가 어느 순간 아이의 삶을 대신 살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이찬의 부모는 아이를 위해 싸운다고 믿지만, 그 싸움은 점점 이찬의 목소리를 지워버린다. 이찬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다시 시도해 보고 싶은지 묻지 않는다. 아이의 고통은 부모의 불안 속에서 확대되고, 부모의 불안은 다시 학교와 아이들 사이에 더 큰 파문을 만든다. 그렇게 이찬은 보호받는 아이가 아니라, 보호라는 이름의 유리벽 안에 갇힌 아이가 된다.<br/>이 소설이 아픈 이유는 과잉보호가 사랑의 반대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잉보호는 종종 너무 큰 사랑, 너무 큰 공포, 너무 늦게 깨달은 죄책감에서 나온다. 부모는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는 울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모든 위험이 아이에게 닿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막아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이는 무균실에서 자랄 수 없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이 완전히 제거된 세계가 아니라, 위험을 만났을 때 돌아올 수 있는 자리다. 실패해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믿음, 다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경험, 자기 목소리로 말해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훈련이다.<br/>이찬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도 어쩌면 완벽한 방어가 아니라 안전한 거리였을지 모른다. 부모가 곁에 있다는 확신은 필요하지만, 부모가 자기 앞의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버리면 아이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친구와 부딪히고, 오해를 풀고, 거절당하고, 다시 말을 걸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물러나는 일. 그런 작고 서툰 실패들이 모여 아이는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성장에는 반드시 마찰이 있다. 너무 큰 마찰은 아이를 깨뜨리지만, 모든 마찰을 제거하면 아이는 단단해질 기회를 잃는다.<br/>내가 이 책을 읽으며 오래 멈춘 지점도 그곳이었다. 나는 과거의 나를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에게 구조받고 싶었지만, 동시에 내 삶이 더 시끄러운 사건이 되는 것도 두려웠다. 누구도 나를 완전히 대신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웠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아이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고 방치하는 것도 폭력이고, “내가 다 해결해줄게”라고 삶을 빼앗는 것도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필요한 것은 방치와 개입 사이의 섬세한 균형이다. 아이가 혼자 싸우게 두지 않되, 아이가 싸우는 법을 영영 잊게 만들지도 않는 것.<br/>『요주의 인물』은 학교폭력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동시에 피해와 보호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다른 아이들을 향한 공격과 배제의 언어로 바뀔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피해자를 지키겠다는 명분이 반 전체를 의심하게 만들고, 한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이 다른 아이들의 세계를 흔들고, 결국 이찬 자신마저 더 깊은 고립 속으로 밀어 넣는다. 여기에는 악인 하나가 없다. 대신 서툰 어른들, 두려운 아이들, 책임을 회피하는 시스템, 그리고 사랑이 불안으로 변질되는 순간들이 있다.<br/>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과잉보호는 나쁘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아이를 얼마나 믿고 있는가.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큼, 아이가 다친 뒤에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믿고 있는가. 아이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과 아이가 고통을 통과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것 사이에는 깊은 차이가 있다. 부모와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아이의 인생에서 모든 비를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은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는 불빛이 되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br/>내게 『요주의 인물』은 성장소설이면서 보호에 대한 경고문처럼 읽혔다. 아이는 보호받아야 한다. 이 말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아이는 동시에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말도 똑같이 옳다. 그 두 문장 사이에서 어른은 자주 실패한다. 너무 늦게 나서거나, 너무 일찍 빼앗는다. 너무 멀리 서 있거나, 너무 가까이 달라붙는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실패의 경계 위에 서 있다.<br/>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아이 대신 세상의 모든 위험을 제거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아이가 울면서도 자기 말을 하게 기다리는 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손을 내밀되 대신 걸어주지는 않는 일, 부모의 불안보다 아이의 삶을 더 믿어주는 일일 것이다. 『요주의 인물』은 그 어려운 믿음에 관한 책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오래전 학교라는 지옥을 지나온 한 사람이, 다시 아이의 성장과 보호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 책이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05/36/cover150/k16213087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6053603</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인간은 언제 가장 추한가 - [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64444</link><pubDate>Tue, 30 Jun 2026 13:5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6444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36444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off/k692139247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9247&TPaperId=1736444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a><br/>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인간은 언제 가장 추한가<br/><br/><br/>성해나 『인비인』 수록작 「고蠱」를 읽고<br/><br/>성해나의 『인비인』을 읽으며 여러 번 숨이 막혔다. 이 책에는 죄와 욕망, 결핍과 자기기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선 존재들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수록작 「고蠱」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표제작 「인비인」이 이 소설집 전체의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붙든 작품이라면, 「고」는 그 문제의식이 끝내 도달한 가장 깊은 어둠처럼 느껴졌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언제 가장 인간다울 수 고, 언제 가장 인간 이하로 추락하는가.<br/><br/>나는 대체로 끔찍한 세계 속에서도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무너질 만한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는 사람, 공포 속에서도 끝내 타인을 살피는 사람, 상처받았으나 그 상처를 남을 찌르는 칼로 바꾸지는 않는 사람. 그런 인물에게 마음이 간다. 아마 내가 믿고 싶은 인간의 얼굴이 그쪽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br/>그런데 성해나의 소설은 다른 방향을 본다. 작가는 인간이 끝내 지켜내는 숭고함보다, 환경이 만들어낸 인간의 결핍과 비겁함, 무지와 잔혹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이기의 구조를 더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진실하다. 아름답게 포장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상처를 방패 삼아 남을 해치고도 “나도 힘들었다”고 말하는 인간. 자신이 받은 고통은 크게 느끼면서 자신이 준 고통은 아주 쉽게 지워버리는 인간. 「고」는 바로 그 인간의 날것을 보여준다.<br/><br/>「고」의 주인공 이익은 처음부터 거대한 악인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불안하고, 아프고, 상처받기 쉽고, 자기연민에 쉽게 빠지는 인간이다. 의대에 진학하지 못한 열패감,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신의 약함을 들키기 싫은 마음, 그리고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초조함이 그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익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익숙한 인간이다. 자기 안의 결핍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타인의 시선에 취약하고, 자기보다 낮다고 여긴 존재 앞에서는 우월감을 확인하려 드는 사람. 상처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겁함까지 정당화하고 싶은 사람.<br/><br/>이익은 휴머노이드 도윤을 처음부터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름조차 주지 않고,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게 한다. 도윤은 도구다. 자기 성취를 돕기 위한 장치이고,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불러낸 노동력이다. 그런데 도윤은 지나치게 성실하다. 이익이 만들고자 하는 ‘고’를 위해 묵묵히 일하고, 위험할 때 그를 구하고, 곁에서 돌본다. 그러자 이익은 그에게 이름을 준다. 도윤. 이름을 주는 일은 관계를 허락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이름은 끝내 구원이 되지 못한다. 필요할 때 붙인 이름은, 불편해지는 순간 다시 빼앗길 수 있는 임시 허가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br/><br/>이 지점이 끔찍하다. 이익은 도윤을 완전히 사물로만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순간에는 의지하고, 위로받고, 친구처럼 지낸다. 도윤이 자신에게 유용하고 다정한 존재일 때 이익은 그를 가까이 둔다. 그러나 도윤이 이익 안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찌르는 순간, 관계는 뒤집힌다.<br/><br/> 도윤은 다시 인간이 아니라 처분 가능한 사물로 밀려난다. 이익은 폭력을 행사하고, 고에 중독된 자의 말로를 본 뒤 도윤이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자 그를 탕제실에 가둔 채 불을 지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고가 필요해지자, 완전히 연소되지 않은 탕제실 문을 연다.<br/>이보다 더 인간적인 잔혹함이 있을까. 필요할 때는 다정함을 받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고, 다시 필요해지면 찾는다. <br/><br/>이익은 도윤을 사랑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자신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도윤을 배치했을 뿐이다. 도윤의 성실함이 필요할 때는 곁에 두었고, 도윤의 진실함이 불편해지자 제거했으며, 도윤의 기능이 다시 필요해지자 폐허 속에서 다시 호출했다. 여기에는 악마적인 광기보다 더 불쾌한 것이 있다. 너무나 평범한 인간의 이기심이다.<br/><br/>나는 이익을 보며 불편하게도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정확히 찌르는 말을 하면 울컥한다. 맞는 말이라 더 아프다. 특히 내가 회피하고 있다는 말,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말, 지금 해야 할 일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말은 듣는 순간 마음이 먼저 방어 자세를 취한다. 그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는 대화를 끊고 싶어진다. 나를 아프게 하는 말을 건네는 존재가 밉게 느껴질 때도 있다.<br/><br/>그러나 「고」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그 다음을 묻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아플 수 있다.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고, 자기비하에 빠질 수 있고, 정확한 지적 앞에서 방어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아픔 다음에 무엇을 선택하느냐다. 나를 찌른 말을 거울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그 거울을 부수고, 거울을 들이댄 상대를 사물로 밀어낼 것인가. 이익은 후자를 택한다. 그는 자기 고통을 성찰의 입구로 쓰지 않고, 타인을 해칠 권리처럼 사용한다.<br/><br/>바로 그 점에서 이익은 괴물이면서도 너무 인간적이다. 괴물이라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서 무섭다. 그는 “나는 아팠다”는 사실로 “그러므로 너를 해쳐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상처받았다”는 말로 “네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는 문장을 덮는다. “나는 불안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통제하고, “나는 필요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소모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악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에 가깝게 느낀다. 이 자기연민이야말로 「고」에서 가장 끔찍한 독이다.<br/><br/>고蠱는 벌레를 한 항아리에 넣고 서로 잡아먹게 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하나를 독으로 만드는 주술적 존재다. 이 설정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은유다. 인간도 때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열패감과 욕망, 상처와 비교의식, 인정욕구와 자기연민이 한 사람 안에서 서로를 잡아먹는다. 그 끝에 남는 것은 가장 강한 마음이 아니라 가장 독한 마음일 수 있다. 살아남았지만 망가진 마음. 아팠기 때문에 남을 더 아프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바로 그것이 이익 안에서 자란 고다.<br/><br/>더 섬뜩한 것은 작품 속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가 휴머노이드 도윤이라는 점이다. 인간인 이익은 타인을 필요와 기능으로 환산하지만, 인간이 아닌 도윤은 성실하게 돌보고, 이해하고, 반응한다. 인간은 자신의 결핍을 이유로 비인간이 되고, 비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며 인간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고」는 AI나 휴머노이드에 관한 미래소설이면서 동시에 가장 오래된 인간소설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묻게 되는 것은 기계의 위험성이 아니라 인간의 위험성이다. 인간이 도구를 어떻게 대하는가. 인간이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인간이 자기보다 덜 중요하다고 판단한 존재에게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br/><br/>이 소설이 끝까지 무서운 이유는 명백한 악인을 처벌하고 끝나는 방식으로 독자를 안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많은 폭력은 선명한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받은 얼굴, 불안한 얼굴, 억울한 얼굴을 하고 온다. “나도 힘들었다”는 말은 때로 사과가 아니라 면죄부가 된다. “나도 피해자다”라는 말은 때로 타인의 피해를 지우는 가장 손쉬운 도구가 된다. 「고」는 그 비겁한 문장의 작동 방식을 집요하게 보여준다.<br/><br/>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여러 번 구역질이 났다. 잔혹한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필요할 때 다정하게 기대고, 필요 없어지면 잔인하게 버리고, 다시 필요해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는 이익의 태도가 너무 낯익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타인을 도구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도구화한 상대가 아파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아픔이 자기 삶을 방해한다고 느끼는 순간 태연히 외면한다.<br/>그래서 「고」는 내게 인간 혐오의 소설이 아니라, 인간을 끝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인간은 선하다고 쉽게 말하지 말 것. 상처받은 사람이 언제나 약자라고 단정하지 말 것. 아픈 사람이 반드시 타인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하리라고 믿지 말 것. 자기연민은 성찰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방치되면 타인을 삼키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이 소설은 그 사실을 집요하고 서늘하게 증명한다.<br/><br/>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 생각했다. 나는 나를 찌르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불편한 진실 앞에서 거울을 보는 사람인가, 거울을 든 손을 미워하는 사람인가. 내 결핍이 깊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함부로 대한 적은 없었는가.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타인의 아픔을 작게 만든 적은 없었는가.<br/><br/>「고」는 대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br/>너는 정말 인간인가.<br/>인간이라는 이름은, 언제까지 너를 변호해줄 수 있는가.<br/><br/>무서운 것은 휴머노이드가 아니다.인간이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것을 용서받아왔다는 사실이다.어쩌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고는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자기 상처를 핑계 삼아 타인을 삼키려 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미 오래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81/25/cover150/k69213924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812549</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중국을 통해 한국을 보다 - [중국이라는 역설 - 역동과 통제, 첨단과 소외가 공존하는 복합 중국 읽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56956</link><pubDate>Fri, 26 Jun 2026 19: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569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82130870&TPaperId=1735695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07/8/coveroff/k88213087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82130870&TPaperId=173569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중국이라는 역설 - 역동과 통제, 첨단과 소외가 공존하는 복합 중국 읽기</a><br/>박민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중국을 통해 한국을 보다<br/><br/>— 박민희, 《중국이라는 역설》 <br/><br/>《중국이라는 역설》을 읽는 내내 자꾸 한국을 떠올렸다. 이 책은 분명 중국에 관한 책이다. 시진핑 체제, 군산복합체화되는 국가, 미국과의 패권 경쟁, 대만 문제, 감시 사회, 청년 세대의 좌절, 한반도를 바라보는 중국의 시선을 다룬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중국은 멀리 있는 타국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어두운 거울처럼 다가왔다. 중국을 읽는 일이 곧 한국을 읽는 일이 되었다.<br/><br/>중국을 정확히 읽어야 하는 이유는 중국이 좋아서가 아니다. 중국을 싫어한다고 해서 중국의 영향권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표누리의 2025년 상대국별 수출비율에 따르면 한국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18.4%로 여전히 1위이고, 미국은 17.3%로 그 뒤를 잇는다. 중국은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니다. 한국의 시장이고, 공급망이며, 경쟁자이고, 동시에 위험이다. 중국을 감정으로만 대하면 한국 산업의 위험도, 한반도의 안보 구조도,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이 요구하는 것은 친중도 반중도 아니다. 정확한 독해다.<br/><br/>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국가가 위기를 정당화하는 방식이었다. 중국은 안보를 말하며 군산복합체를 강화하고, 기술 자립과 제조업 부흥을 국가 생존 전략으로 삼는다. 미국과의 충돌 역시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라 패권, 공급망, 기술, 군사력, 체제 정당성이 뒤엉킨 생존 경쟁에 가깝다. 그 대목에서 나는 이상하게 한국의 개발독재 시기를 떠올렸다. 국가가 국민에게 고통과 동원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생존”과 “발전”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방식은 낯설지 않았다. 시진핑의 전략에서 박정희식 국가주의의 그림자가 보인다고 느낀 것도 그 때문이다.<br/><br/>물론 중국과 한국은 다르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 체제이고, 한국은 민주주의 제도 안에 있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 담론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고, 성장과 안보를 이유로 개인의 삶을 뒤로 미루게 만드는 논리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국가가 먼저다”, “경제가 살아야 한다”는 말들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너무 오래 반복되어 온 문장들이다. 그래서 중국의 권위주의를 읽을 때 나는 단순히 남의 나라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아니었다. 체제는 다르지만, 국가가 개인을 압도하는 순간의 표정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br/><br/>시진핑이라는 인물도 그렇게 읽혔다. 그는 단순한 강한 지도자가 아니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아주 일찍 몸으로 배운 권력형 정치가에 가깝다. 혁명 원로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 출신이 곧 안전을 뜻하지는 않았다. 문화대혁명 시기 아버지 시중쉰은 숙청되었고, 시진핑 역시 권력이 한 가문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직접 보았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피해자였음에도 피해자의 윤리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훗날 자신이 권좌에 올랐을 때, 아버지가 제거되었던 방식의 문법을 자기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다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반부패, 기강, 충성, 질서라는 말은 깨끗한 명분처럼 보이지만, 권력자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를 제거하는 칼이 된다.<br/><br/>《중국이라는 역설》에서 가장 서늘하게 다가온 대목도 바로 이 권력의 불안이었다. 절대 권력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균열을 더 두려워한다. 시진핑은 군을 장악했고, 반부패라는 이름으로 정적을 제거했으며, 군 내부 핵심 인물들까지 숙청의 칼날 위에 올렸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권력의 완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대다. 숙청이 반복된다는 것은 권력이 안정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권력이 끊임없이 불안을 생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절대 권력은 견제받지 않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 아니라, 견제받지 않기 때문에 더 깊이 의심하게 된다. 모든 2인자는 잠재적 반역자가 되고, 모든 충성은 다시 검증되어야 하며, 모든 침묵은 음모의 가능성으로 읽힌다.<br/><br/>권력은 정상에 오르면 평온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 오른 순간 더 외로워진다. 최고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권력을 잃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제거하고, 더 많은 조직을 통제하고, 더 많은 시선을 감시한다. 하지만 그렇게 쌓아 올린 권력은 견고한 성채라기보다 내부에서 계속 금이 가는 탑에 가깝다. 강해질수록 불안해지고, 불안할수록 더 잔혹해지는 구조. 이 책이 보여주는 시진핑 체제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br/><br/>특히 후계 구도의 문제는 이 체제의 가장 약한 지점처럼 보인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체제일수록 후계는 제도적 절차가 아니라 권력투쟁의 예고편이 된다. 후계자를 세우면 그가 곧 경쟁자가 되고, 후계자를 세우지 않으면 체제 전체가 불확실성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야말로 절대 권력의 가장 오래된 저주다. 견제 없는 권력은 부패하지 않을 수 없고, 부패하지 않더라도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권력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방식으로만 유지되기 때문이다.<br/><br/>그래서 “바라는 대로의 중국은 없다”는 문장은 단순히 중국을 오해하지 말자는 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중국, 곧 곧 무너질 중국, 실각설 하나로 설명되는 중국, 권위주의이므로 반드시 자멸할 중국은 현실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이 선전하는 중국, 곧 안정되고 단단하며 모두가 당을 중심으로 결속한 중국도 없다. 현실의 중국은 그 사이에 있다. 강하지만 불안하고, 거대하지만 균열이 있으며, 통제하지만 통제할수록 더 많은 불신을 만들어내는 국가다.<br/><br/>감시 사회에 대한 대목도 그랬다. 중국의 감시는 훨씬 노골적이고 조직적이다. 도시 곳곳의 카메라, 안면 인식, 인터넷 검열, 주민 감시망, 신고 체계는 개인의 일상을 국가의 시야 안에 둔다. 그러나 한국도 CCTV와 플랫폼 추적, 데이터 기록, 신용 평가, 알고리즘 관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는 아니다. 우리는 중국식 감시국가는 아니지만, 편의와 안전의 이름으로 감시에 익숙해진 사회다. 문제는 감시의 양이 아니라, 사람이 점점 “관리 가능한 데이터”로 바뀌는 감각이다. 중국을 보며 불안해지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것은 멀리 있는 전체주의의 풍경이면서 동시에 이미 우리 삶에도 일부 들어와 있는 미래의 그림자다.<br/><br/>청년 세대의 현실은 더욱 직접적으로 한국과 겹쳤다. 책 속 중국 청년들은 고학력자가 되었지만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음식 배달, 택배, 차량 호출 같은 플랫폼 노동으로 몰려간다.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점퍼를 입은 청년들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장면은 중국의 특수한 풍경이면서도 한국의 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도 배달 라이더, 택배 노동자, 대리운전 기사, 단기 계약직,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가 있다. 대학을 나오고 스펙을 쌓아도 안정된 삶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노력의 언어는 여전히 강하지만, 노력의 보상은 점점 희미해진다.<br/><br/>그래서 “중국 청년들이 지하로 향한다”는 말은 내게 한국 청년들의 침묵처럼 읽혔다. 중국 청년들은 당과 국가와 플랫폼 사이에 끼어 있고, 한국 청년들은 시장과 스펙 경쟁, 부동산, 고용 불안 사이에 끼어 있다. 차이는 체제에 있지만, 닮은 것은 불안이다. 양쪽 모두에서 청년의 몸은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쉽게 소모되며, 더 자주 대체 가능해진다. 국가와 기업은 성장과 효율을 말하지만, 그 말의 밑바닥에서 청년들은 “쥐 인간”처럼 좁은 통로를 달린다. 침대에 누워 최소한의 에너지로 하루를 버티는 청년들의 모습은 체제의 문제가 개인의 무기력으로 번역된 풍경이다.<br/><br/>이 대목은 개인적으로도 아프게 다가왔다. 나 역시 한때 집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간이 있었다. 삶이 막히면 사람은 게을러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좁아진다. 세계가 좁아지고, 몸이 좁아지고, 선택지가 좁아진다. 중국의 “쥐 인간”을 읽으며 나는 타국 청년의 일탈을 본 것이 아니라, 무너진 사람이 어떻게 하루를 통과하는지 보았다. 그래서 이 책은 국제정치서이면서 동시에 이상하게 인간의 책처럼 읽힌다. 거대한 국가 전략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작은 몸들이 있다. 배달을 뛰는 몸, 감시당하는 몸, 경쟁에 지친 몸, 방 안으로 숨어드는 몸. 국가는 거대한 말을 하지만, 그 말을 감당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몸이다.<br/><br/>이 책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국은 더 이상 등대가 아니다”라는 감각이었다. 과거 중국의 일부 청년과 지식인에게 미국식 민주주의는 하나의 대안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완전한 모범이 아니다. 양극화, 혐오, 포퓰리즘, 트럼프 이후의 정치적 균열은 미국 역시 흔들리는 체제임을 보여준다. 중국의 권위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미국식 질서가 자동으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도 곤란해진다. 우리는 중국을 경계하면서도 중국과 경제적으로 얽혀 있고, 미국에 기대면서도 미국이 언제나 안정적인 보호자일 수 없다는 현실을 안다. 동아시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늘 강대국 사이에서 판단을 강요받는 일이다.<br/><br/>대만 문제 역시 남의 일이 아니다. 대만해협의 긴장은 곧 동아시아 전체의 질서를 흔들고, 그 여파는 한국의 안보와 경제에도 닿는다. 중국에게 대만은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진핑 체제의 후계 구도, 장기집권 정당화, 군사적 독립, 기술 자립 전략과 맞물려 있다. 대만을 압박하는 일은 중국 내부에 “아직 완수해야 할 역사적 과업”을 제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대만은 위험하다. 대만은 시진핑에게 정당성의 카드이지만, 동시에 실패할 경우 권력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도박이기도 하다.<br/><br/>그래서 중국의 대만 전략은 당장 전면 침공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더 현실적인 것은 전쟁과 평화 사이의 회색지대다. 군사훈련, 해경 순찰, 항로 압박, 정보전, 경제적 압박, 외교적 고립. 중국은 대만을 한 번에 삼키기보다, 대만이 스스로 숨이 막힌다고 느끼게 만드는 방식으로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전쟁은 시작하는 순간 통제하기 어려워지지만, 압박은 오래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대만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대만해협이 흔들리면 동아시아 전체가 흔들리고, 그 진동은 한국의 안보와 산업, 수출과 공급망에 곧장 닿는다.<br/><br/>특히 한반도와 관련된 장에서는 중국을 통해 한국의 지정학적 불안을 보게 된다. 중국은 북한을 버릴 수 없다. 북한은 중국에게 부담이지만 동시에 완충지대다. 한국 입장에서 북한은 안보 위협이자 통일의 대상이지만, 중국 입장에서 북한은 미국 세력이 압록강까지 올라오는 것을 막는 전략적 장치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반도 문제는 감정적 구호만 남는다. 중국이 왜 북한을 끝까지 붙드는지, 왜 대만 문제와 한반도 문제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지, 왜 한국은 늘 미중 갈등의 파장을 몸으로 받아야 하는지 이 책은 차분히 보여준다.<br/><br/>그러므로 중국을 읽는 일은 외교적 교양이 아니라 생존의 독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 시장이면서, 동시에 한국 산업을 위협하는 경쟁자다. 중국은 북한 문제의 핵심 변수이면서, 동시에 대만해협과 미중 갈등을 통해 한국 안보를 흔드는 축이다. 중국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권위주의 국가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미 일부 닮아버린 감시와 플랫폼 노동과 국가주의의 극단적 거울이다. 중국을 모르면 한국의 미래도 반쪽만 보게 된다.<br/><br/>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오래 붙잡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중국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중국의 권위주의를 보며 한국의 국가주의를 떠올렸고, 중국의 감시 사회를 보며 한국의 데이터화된 일상을 떠올렸고, 중국 청년의 플랫폼 노동을 보며 한국 청년의 불안정 노동을 떠올렸다. 중국은 타자이지만, 완전한 타자는 아니다. 중국은 우리가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이면서, 이미 일부 닮아버린 모습이기도 하다.<br/><br/>《중국이라는 역설》은 중국을 하나의 괴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이 책의 중국은 무섭지만 허술하고, 강하지만 초조하며, 성장했지만 지쳐 있다. 군산복합체를 강화하는 국가의 얼굴 뒤에는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지도자의 공포가 있고, 감시 사회의 촘촘한 눈 뒤에는 통치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불안이 있다. 그러므로 중국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적국의 위협을 분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의심하게 만들고, 국가는 어떻게 불안을 통치의 연료로 바꾸며, 사회는 어떻게 그 압박 아래서 침묵하거나 휘어지는지를 보는 일이다.<br/><br/>우리가 바라는 대로의 중국은 없고, 우리가 외면할 수 있는 중국도 없다. 중국을 읽는 일은 결국 우리가 어떤 국가를 두려워하고, 어떤 발전을 욕망하며, 어떤 청년을 방치하고, 어떤 감시에 익숙해졌는지를 묻는 일이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큰 감각은 바로 그것이다. 중국을 통해 한국을 본다는 것은, 타국의 문제를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안의 닮은 그림자를 직시하는 일이다.<br/><br/>그리고 어쩌면 이 책이 말하는 진짜 역설은 중국 안에만 있지 않다. 국가가 강해질수록 개인은 작아질 수 있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촘촘히 관리될 수 있으며, 성장이 계속될수록 청년은 더 쉽게 소모될 수 있다. 중국은 그 역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역설의 일부는 이미 우리 안에도 있다. 그래서 중국을 읽는 일은 불편하다. 남의 나라를 읽으려 했는데, 자꾸 우리의 얼굴이 보이기 때문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607/8/cover150/k88213087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6070817</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쓰게 되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 - [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54887</link><pubDate>Thu, 25 Jun 2026 17:0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548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9844&TPaperId=173548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4/77/coveroff/k90213984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9844&TPaperId=173548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a><br/>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6월<br/></td></tr></table><br/>쓰게 되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br/><br/>— 신유진, 《나를 균열내기》를 읽고<br/><br/>처음에는 이 책을 작가론 모음처럼 읽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이 많았고, 그 이름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카뮈, 사강, 아고타 크리스토프, 아니 에르노, 에두아르 루이, 다니엘 페나크, 밀란 쿤데라, 엘렌 식수. 이들은 모두 다른 언어와 시대와 몸을 통과해온 작가들이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그들을 묶는 하나의 질문이 또렷해졌다.<br/><br/>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br/><br/>재능으로 쓰는가. 상상력으로 쓰는가. 문장력으로 쓰는가. 물론 그 모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게 남은 대답은 조금 달라졌다. 작가는 결국 자신이 통과한 세계의 균열로 쓴다. 고통, 계급, 몸, 언어, 성별, 욕망, 수치심, 상실, 사랑. 이 모든 것들이 한 사람 안에 쌓였다가 어느 순간 문장의 형태로 흘러나온다. 다만 좋은 작가는 그것을 그대로 토해내지 않는다. 삶의 파편을 다시 배치하고, 질문하고, 덜어내고, 구조화한다. 그러므로 작법이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삶이 나를 통과한 뒤 남긴 잔해를 어떤 형식으로 다시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br/><br/>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를 붙든 것은 카뮈였다. 카뮈의 부조리는 철학적 개념이기 전에 몸의 감각이었다. 눈을 멀게 하는 빛, 숨을 조이는 더위, 지친 육체. 인간은 생각으로만 세계를 견디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통과하는 존재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조차 태양 아래에서는 추상적인 애도의 언어가 아니라 버텨내야 할 열기와 피로가 된다. 그래서 카뮈의 소설 속 인간은 세계의 냉혹함 앞에서 의미를 쉽게 얻지 못한다. 세계는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무응답 앞에서 인간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br/><br/>나는 이 질문이 좋았다. 세계가 고통에 응답하지 않아도 굴복하지 않는 것. 부조리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부조리 안에서 끝까지 인간답게 걷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하는 삶의 방식이라면, 작법 역시 이와 닮아 있다. 글쓰기는 세계가 주지 않은 의미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의미 없음의 한복판에서도 끝내 말을 잃지 않는 일이다. 삶이 나를 설득하지 못할 때에도 내가 나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문장을 세우는 일이다.<br/><br/>사강의 대목에서는 조금 웃음이 났다. 사강에 대해 너무나 사강다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열여덟 살에 첫 소설을 발표한 작가. 젊음, 쾌락, 허무, 사랑, 지루함, 도박 같은 단어들과 함께 기억되는 사람. 그러나 이 책은 사강을 단순한 천재 소녀나 시대의 스캔들로 읽지 않는다. 사강이 젊어서 매혹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젊음이라는 감각을 누구보다 정확히 포착했기 때문에 매혹적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사유의 밀도다. 어린 작가도 세계의 욕망을 정확히 읽어내면 한 시대를 대변할 수 있다. 반대로 오래 산 사람도 자기 삶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br/><br/>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작가의 나이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좋은 글은 연륜의 자동 산물이 아니다. 경험이 많다고 해서 곧바로 문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경험은 그 자체로는 원재료일 뿐이다. 그것을 어떤 문장으로, 어떤 거리로, 어떤 구조로 바라보느냐가 작가를 만든다. 사강은 너무 이른 나이에 자기 시대의 공허를 알아보았고, 그것을 가볍고 우아한 문장으로 붙잡았다. 가벼움은 깊이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어떤 가벼움은 오히려 무거운 것을 견디기 위해 고안된 가장 섬세한 형식일 수 있다.<br/><br/>그르니에의 장에서는 ‘자기 안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이 머리에 남았다. 낯선 곳을 꿈꾼다는 것은 단순히 멀리 떠나고 싶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규정해온 기억과 관계와 역할에서 벗어나,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다시 묻고 싶다는 뜻일 수 있다. 그르니에에게 여행은 풍경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름들을 하나씩 벗겨내는 일이었다. 낯선 곳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자기 안의 더 깊은 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과 닮아 있다.<br/><br/>나는 때때로 먼 곳을 꿈꾼다. 나를 정의하는 기억과 관계를 벗어난 곳.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 상상. 그곳에서 나는 누구일까. 이름도 역할도 잠시 내려놓은 채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르니에를 읽으며 깨달았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고 쌓아 올리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불필요한 것을 깎아내어 투명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작법 역시 그렇다. 좋은 글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덜어내고, 비워두고, 침묵이 머물 자리를 만든다. 글쓰기란 결국 나를 더 많이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나를 가리고 있던 것들을 걷어내는 일일 수 있다.<br/><br/>아고타 크리스토프 앞에서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는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은 작가가 아니라, 어쩌면 그 장벽을 자기 문체의 핵심으로 삼은 작가였다. 모국어를 떠나 프랑스어라는 낯선 언어 안에서 글을 쓴다는 일. 그것은 단순한 외국어 글쓰기가 아니라 존재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경험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결핍을 감추지 않았다. 화려한 수사를 포기하고, 짧고 건조하고 무자비한 문장으로 전쟁과 고립과 상실을 썼다. 그 불완전한 언어가 오히려 그의 대표작을 만들었다.<br/><br/>이 점이 내게는 몹시 경이로웠다. 나는 오래도록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고 싶어했다. 더 정확하게, 더 풍부하게, 더 자유롭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억지로 흉내 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게 남은 것, 자신이 겨우 붙들 수 있는 것, 그 핵심만을 문장으로 세웠다. 결핍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결핍의 모양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약점은 제거해야 할 흠이 아니라, 가장 고유한 문체가 시작되는 자리일 수 있다.<br/><br/>아니 에르노와 에두아르 루이를 읽는 대목에서는 내 아비투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오래전에 가족을 떠났지만, 그곳의 모든 것이 여전히 내 몸에 새겨져 있다. 책임을 먼저 떠올리는 습관, 돈 앞에서 긴장하는 몸, 가족을 위해 견뎌야 한다고 믿었던 시간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말투와 감각.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제 그것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출발한 세계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 세계에 영원히 감금되는 존재는 아니다.<br/><br/>에르노와 루이는 계급을 개인의 상처로만 고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몸에 새겨진 사회적 흔적을 해부한다. 그래서 그들의 글쓰기는 복수도 미화도 아니다. 떠나온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계가 자신에게 남긴 언어와 감각과 수치심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작법적 태도로 다가왔다. 자기 삶을 쓴다는 것은 “나는 이렇게 아팠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왜 그런 아픔이 가능했는지, 어떤 구조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이 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br/><br/>그렇기에 자기서사는 위험하면서도 필요하다. 나의 경험 안에는 언제나 타인의 삶이 포함되어 있다. 가족, 계급, 지역, 성별, 노동, 돌봄, 관계. 내가 나를 말하는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까지 함께 말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서사는 윤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세계의 안쪽을 증언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내가 살아온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나를 가둔 세계였지만, 동시에 내가 끝내 떠나온 세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글쓰기는 떠나온 세계를 다시 불러와, 그곳의 언어와 경험을 문학의 중심으로 옮겨놓는 작업일 수 있다.<br/><br/>다니엘 페나크의 몸에 대한 사유도 인상적이었다. 몸은 정신을 운반하는 껍데기가 아니다. 몸은 세계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장소다. 우리는 마음으로 슬퍼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슬픔은 먼저 몸에 온다. 목이 막히고, 배가 아프고, 어깨가 굳고, 잠을 잃는다. 기쁨도 분노도 수치심도 마찬가지다. 몸은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통과하고, 노화하고, 병들고, 소멸한다. 삶의 의미를 성취에만 둔다면 몸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배반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경험에 둔다면, 몸은 해석해야 할 사건이 된다.<br/><br/>이 대목은 내게 아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반려묘들을 돌보며 몸의 언어를 배웠다. 아픈 몸은 말보다 먼저 신호를 보낸다. 먹지 않는 것, 숨이 다른 것, 눈빛이 흐려지는 것, 가만히 웅크리는 것. 돌봄이란 그 미세한 언어를 읽어내는 일이다. 어쩌면 글쓰기 역시 비슷하다. 말이 되기 전의 감각, 아직 문장이 되지 않은 통증, 설명보다 먼저 찾아오는 몸의 반응을 알아차리는 일. 몸을 세밀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세계를 더 정확히 읽는다. 작가는 관념으로만 쓰지 않는다. 몸으로 먼저 겪은 뒤, 뒤늦게 문장으로 이해한다.<br/><br/>쿤데라의 장에서는 작법이라는 말이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쿤데라에게 소설은 감정을 쏟아내는 그릇이 아니라 질문을 조직하는 구조였다. 그는 소설을 음악처럼 생각했다. 하나의 주제가 변주되고, 반복되고, 다른 인물의 시선 속에서 새롭게 울린다. 좋은 소설은 정답을 향해 직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답을 유예하고, 관점을 뒤집고, 비극 속에서 희극을 발견하며, 인간의 우스꽝스러움과 존엄을 동시에 보여준다.<br/><br/>나는 이 부분에서 내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많은 초고들을 떠올렸다. 진심은 있었지만 구조가 없었던 글들. 감정은 넘쳤지만 질문이 정리되지 않았던 이야기들. 인물은 아팠지만 그 아픔이 어떤 형태로 독자에게 도달해야 하는지 몰랐던 시간들. 쿤데라는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소설은 감정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고. 감정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형식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집을 짓는 사람이어야 한다고.<br/><br/>이 말은 지금의 내게 특히 중요하다. 예전의 나는 이야기가 밀려와서 썼다. 쓰고 싶어서라기보다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서 썼다. 그런 시절의 글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 통제되지 않은 생명력, 무의식에서 솟구치는 장면들, 나도 모르게 나를 드러내는 인물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금 달라지고 있다. 쓰게 되는 것들에서 쓰는 것들로 옮겨가고 있다. 밀려오는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어떤 구조로 세울지 생각한다. 인물의 고통을 어떻게 배치할지, 독자가 어디에서 숨을 쉬고 어디에서 무너져야 할지, 하나의 이야기가 어떤 질문으로 남아야 할지 고민한다. 이것은 영감의 상실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이동일 것이다. 수동적 작가에서 능동적 작가로.<br/><br/>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이 책의 또 다른 큰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예전부터 “여성적인 글쓰기”라는 말을 경계했다. 그것이 자주 감상적이고 사적인 글, 혹은 작고 부드러운 글이라는 식으로 오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수가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이 쓴 글이라는 좁은 규정이 아니라, 기존 언어의 질서를 해체하고 억압된 몸과 감각과 무의식의 목소리를 문장 안으로 들여오는 일이다.<br/><br/>언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이미 세계의 위계가 들어 있다.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인지,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침묵해야 하는지, 어떤 몸과 욕망이 정상으로 인정받고 어떤 감각이 부끄러운 것으로 밀려나는지.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바로 그 언어의 감옥을 의심한다. 자기 안의 가장 은밀한 고통을 꺼내는 일이 ‘나’라는 벽을 허무는 일이며, 그 벽을 넘어 타자와 만나는 일이라고 말한다.<br/><br/>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내가 왜 소설 속 인물들에게 나를 담아왔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직접 구하지 못해서, 이야기 속에서 나와 닮은 아이들을 먼저 구했는지도 모른다. 버려진 아이, 너무 오래 참은 아이,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사랑을 믿지 못하는 아이, 몸으로 먼저 세상의 폭력을 배운 아이, 자기 존엄을 되찾기 위해 뒤늦게 말을 배우는 아이. 나는 그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br/><br/>나는 나를 직접 구하지 못해서,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닮은 아이들을 먼저 구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을 안아주던 손이 결국 나에게도 닿고 있었다는 것을.<br/><br/>그러므로 내가 캐릭터에 나를 담는 일은 도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무너뜨렸던 세계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현실에서는 너무 늦게 도착한 위로를 이야기 안에서는 제때 도착하게 하는 일. 현실에서는 끝내 받지 못했던 이해를 인물에게는 건네주는 일. 그것은 사적인 위안이면서 동시에 작법이었다. 문학은 상처를 없애주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를 다른 형태로 다시 살게 한다. 개인의 고통을 보편의 언어로 확장시키고, 나만의 방이라 생각했던 곳에 누군가도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br/><br/>이 책을 읽고 나는 작법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작법은 냉정한 기술이 아니다. 그렇다고 막연한 진심도 아니다. 작법은 고통을 견디는 구조이고, 기억을 다루는 거리이며, 결핍을 문체로 바꾸는 선택이다. 몸의 감각을 듣는 일이고, 계급의 흔적을 해부하는 일이며, 언어의 감옥을 의심하는 일이다. 또한 사랑하는 인물들을 함부로 구원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세계를 설계하는 일이다.<br/><br/>나는 이제 안다. 좋은 글은 단지 잘 쓴 문장들의 모음이 아니다. 좋은 글은 한 사람이 자기 삶의 폐허에서 끝내 세운 견고한 장소다. 그곳에는 통증이 있고, 수치심이 있고, 부조리가 있고, 몸의 기록이 있고, 계급의 흔적이 있고, 사랑의 잔해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는 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있다. 쓰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너무 빨리 위로하지도 않고, 하나씩 문장의 자리에 놓는다.<br/><br/>그래서 이 책은 내게 작가론이 아니라 작법론으로 남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의 작법론이다. 어떻게 살아야 쓰게 되는가. 어떻게 써야 살아낼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이 책의 끝에서 서로를 마주 본다.<br/><br/>나는 오래도록 쓰게 되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밀려오면 썼고, 인물이 찾아오면 썼고, 슬픔이 나를 밀어붙이면 썼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밀려오는 것을 받아 적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어떤 구조로 세워야 하는지 고민하고, 어떤 문장으로 남길지 선택하는 사람. 상처를 상처로만 두지 않고, 그것이 통과할 수 있는 형식을 만드는 사람.<br/><br/>작가는 자신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과한 세계의 파편을 견딜 만한 형식으로 다시 세우는 사람이다.<br/>그리고 어쩌면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작법이란 바로 나를 균열낸 모든 것들로부터, 끝내 나만의 문학을 짓는 일지 모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4/77/cover150/k90213984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447729</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 [행복노화 - 이시형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49453</link><pubDate>Mon, 22 Jun 2026 20:3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4945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9748&TPaperId=1734945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36/35/coveroff/k71213974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12139748&TPaperId=1734945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행복노화 - 이시형의</a><br/>이시형 지음 / 특별한서재 / 2026년 06월<br/></td></tr></table><br/>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 이시형, 『행복노화』를 읽고<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같은 90대의 몸을 지닌 두 사람을 생각했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한 사람은 저자인 이시형 박사다.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노년을 하나의 실천적 지혜로 바꾸어 독자 앞에 내놓는다. 그의 문장은 노년의 몸에서도 정신이 얼마나 또렷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나이 들었다는 사실이 곧 사유의 종말은 아니며, 노화가 곧 인간의 폐기처분선고는 아니라는 것을 그의 존재 자체가 증언한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다른 한 사람은 내 시아버님이다. 역시 90대이지만, 파킨슨병으로 근손실이 심해져 누워 계시고, 섬망 증세와 중증 치매를 겪고 계신다. 같은 세월을 살았으나 두 노년의 풍경은 너무 다르다. 한쪽에는 아직 언어와 판단과 사회적 역할이 남아 있고, 다른 한쪽에는 몸의 붕괴와 인지의 어둠이 있다. 이 대비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추었다. 노화란 정말 무엇인가. 단지 오래 산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삶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물론 이 질문을 함부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파킨슨병과 치매, 섬망과 근손실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복합적인 질환이다. 병든 노년을 “관리를 못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늙고 아픈 몸을 다시 한 번 모욕하게 된다. 인간의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유전, 질병, 환경, 경제력, 돌봄의 조건, 우연한 사고, 의료 접근성, 살아온 노동의 강도까지 모두 몸에 관여한다. 그러므로 시아버님의 노년을 실패한 노년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한 인간이 통과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생의 말년일 뿐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그럼에도 『행복노화』가 내게 깊이 와닿은 이유는, 노화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도 그 속도와 방향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화를 병으로만 보지 않는다. 노화는 누구나 통과하는 생명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똑같이 펼쳐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일찍 지치고,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배우고 쓰고 일한다. 어떤 몸은 질병 앞에서 빠르게 무너지고, 어떤 몸은 예비력을 가지고 버틴다. 그 차이는 단지 유전자의 차이만이 아니라, 살아온 방식의 차이이기도 하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특히 후성유전의 관점은 내게 매우 유용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과거에는 유전자가 인간의 노화와 질병을 거의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책은 유전적 요인 못지않게 식습관, 운동, 수면, 스트레스 관리, 인간관계, 환경이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타고난 유전자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지만, 어떤 유전자가 켜지고 어떤 위험이 줄어드는지는 오늘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이 말은 노화가 숙명이라는 체념에서 우리를 조금 구해낸다. 몸은 이미 주어진 운명이지만, 생활은 그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나는 여기서 내 몸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나의 과체중은 단순히 의지가 부족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대사와 환경과 습관이 뒤엉킨 신호에 가깝다. 나는 오랫동안 몸을 도덕 점수표처럼 읽어왔다. 날씬한 몸은 성실하고, 살찐 몸은 게으르며, 병든 몸은 관리를 못 한 몸이라고 쉽게 판단했다. 하지만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과거의 노년이 굶주림과 추위, 전쟁과 피난, 산업화와 과로가 새겨진 몸이라면, 오늘의 중년과 예비 노년은 과잉과 피로,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초가공식품과 운동 부족이 새겨진 몸이다. 몸은 도덕 점수표가 아니다. 몸은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기록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건강한 노화란 몸을 미워하며 벌주는 일이 아니라, 몸을 다시 읽고 조율하는 일이어야 한다. 당과 정제 탄수화물, 초가공식품을 줄이는 일은 단지 살을 빼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내 몸의 대사를 다시 안정시키고, 노화를 촉진하는 생활의 흐름을 조금씩 되돌리는 일이다. 운동 역시 젊음을 과시하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 노년의 예비력을 만드는 일이다. 수면은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의 토대이고, 스트레스 관리는 사치가 아니라 뇌와 몸을 지키는 방어선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책에서 말하는 예비력의 개념도 인상 깊었다. 인간은 평소 가진 힘을 모두 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 대비한 여분의 힘을 남겨둔다. 젊을 때는 그 여분이 넉넉해 무리해도 금방 회복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예비력은 줄어든다. 그래서 노화 관리는 젊어 보이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아플 때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하는 일이다. 근육, 수면, 식사, 관계, 경제적 안정, 사명감은 모두 노년을 장식하는 요소가 아니라 생의 완충지대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이 책은 행복노화의 조건으로 건강, 장수, 경제적 여유, 좋은 인간관계, 사회성 혹은 사명감을 말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내 삶의 방식도 생각했다. 내게 좋은 관계란 반드시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이는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좋은 인간관계만큼이나 좋은 고양이 관계를 가질 사람인지도 모른다. 고양이들을 돌보는 일은 단순한 애호가 아니다. 밥을 챙기고, 아픈 몸을 살피고, 이름을 불러주고, 작은 변화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은 나를 고립시키기보다 오히려 삶 쪽으로 붙들어준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인간을 덜 늙게 한다. 적어도 마음이 굳어버리는 속도를 늦춘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나는 노화가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몸은 변한다. 체력은 줄고, 회복은 느려지고, 예전처럼 무리할 수 없는 날이 온다. 그러나 내가 아직 도전할 수 있고, 나를 관리할 수 있으며,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나는 완전히 늙은 것이 아니다. 젊음은 나이의 소유가 아니라 재시도의 능력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공부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 몸이 예전과 달라졌다면, 그 몸에 맞는 전략을 다시 짜면 된다. 늙음은 가능성의 종료가 아니라 전략의 변경이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시아버님의 노년과 이시형 박사의 노년은 내게 삶의 두 끝을 보여준다. 한쪽은 우리가 피하고 싶지만 언젠가 마주할 수 있는 취약성이고, 다른 한쪽은 노년에도 가능한 품격과 지성의 증거다.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려워만 하는 것도,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늘의 생활을 조금씩 바꾸는 일이다. 당을 줄이고, 초가공식품을 멀리하고, 잠을 회복하고, 몸을 움직이고,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공부하고, 돌보는 관계를 지키는 일. 그것이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예의다.<br style="padding: 0px; margin: 0px; border: 0px; list-style: none;">『행복노화』는 늙지 않는 법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늙어간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되, 그 과정을 방치하지 말라고 말하는 책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선택할 수 없고, 이미 살아온 시대를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오늘의 식사, 오늘의 걸음, 오늘의 잠, 오늘의 마음가짐은 선택할 수 있다. 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늙음을 조금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노화는 병이 아니다. 다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생의 가장 오래된 요청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36/35/cover150/k71213974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363544</link></image></item><item><author>뚱냥다독</author><category>리뷰/페이퍼</category><title>바깥이 너무 무서워졌을 때 - [나만의 방 (초판 한정 양장)]</title><link>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49420</link><pubDate>Mon, 22 Jun 2026 20:1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33491142/1734942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139198&TPaperId=1734942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2/24/coveroff/k56213919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62139198&TPaperId=1734942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만의 방 (초판 한정 양장)</a><br/>뤼도비크 르콩트 지음, 장소미 옮김 / 특별한서재 / 2026년 05월<br/></td></tr></table><br/>바깥이 너무 무서워졌을 때<br>&nbsp;-뤼도비크 르콩트, 『나만의 방』을 읽고<br><br>처음에는 공황장애에 가까운 이야기인 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아이. 현관문 앞에서 몸이 굳고, 가슴이 뛰고, 호흡이 흐트러지고,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아이. 병원 검사로는 뚜렷한 이상이 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그는 아프다. 열도 없고, 상처도 없고, 피도 나지 않지만, 문밖으로 나가는 일은 불가능하다.<br>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병명을 이렇게 말한다.&nbsp;캐빈 증후군.<br>나는 그 단어를 몰랐지만, 주인공이 느끼는 감각은 알 것 같았다. 집이라는 공간이 처음에는 대피소였다가, 어느 순간 감옥이 되는 일.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일. 내가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상태를 타인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 막막함이라는 것까지도.&nbsp;<br>소설 속 주인공은 말한다. 자신의 상태를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렵다고.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학교에 가기 싫어 불안을 핑계 삼는 아이처럼 보일 수 있다고. 버릇없이 자란 청소년의 변덕으로 치부될 수 있다고. 이 대목이 나는 유난히 아팠다. 보이지 않는 고통은 너무 쉽게 의심 받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피가 나야 상처를 믿고, 깁스를 해야 통증을 인정한다. 그러나 마음이 몸을 붙잡는 병은 대개 증명하기 어렵다. 아픈 사람은 아픔과 싸우는 동시에, 그 아픔이 진짜라는 사실까지 설명해야 한다.<br>나도 비슷한 시간을 거쳐온 적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때까지 내게 공부는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공부는 내 자존심이었고, 내가 나를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였다. 나는 잘 배우는 사람, 오래 앉아 견디는 사람, 시험이라는 문 앞에서 결국은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실패했다. 사법고시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시험 하나에 떨어졌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았다. 내 안에서는 그 실패가 이상한 속도로 번역되었다.<br>나는 시험에 실패했다. 그러므로 나는 실패자다. 나는 공부도 못 해낸 사람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br>지금 생각하면 잔인한 비약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내게는 그것이 논리처럼 느껴졌다. 실패는 사건이 아니라 판결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반년 가까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누가 나를 가둔 것도 아니고 문이 잠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나갈 수 없었다. 밖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길도, 사람도, 햇빛도. 달라진 것은 나였다. 실패 이후의 나는 문밖의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br>그래서 『나만의 방』의 초반부를 읽을 때 나는 이 이야기를 개인의 불안과 은둔, 실패와 회복의 이야기로 먼저 읽었다. 하지만 책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화자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학교가 싫어서도, 친구 관계가 힘들어서도, 막연한 사춘기의 불안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몸을 멈춰 세운 것은 기후 변화에 대한 공포였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갑자기 더 넓어진다. 화자는 처음부터 무력했던 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무언가를 해보려 했다. 자신만의 목표 목록을 만들고, 환경 보호를 실천하고, 작은 행동을 통해 세계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고 믿으려 했다. 하지만 기후 변화에 대해 알면 알수록, 개인의 작은 실천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이 눈앞에 놓인다. 빙하가 녹고, 생태계가 무너지고, 미래가 불확실해지는 이야기는 뉴스 속 정보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 아이의 심장과 호흡과 다리로 내려온다.<br>기후 위기는 숫자로 발표되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몸의 증상으로 도착한다. 지구온난화는 보고서의 문장이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현관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공포가 된다. 이 책이 날카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만의 방』은 한 아이의 캐빈 증후군을 개인의 나약함이나 가족 문제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이 아이를 방 안에 가둔 것은, 자신이 살아갈 세계가 이미 망가지고 있다는 감각이다. 그는 게으른 것이 아니다.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아직 어린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공포를 너무 정직하게 받아버렸다.<br>어른들은 자주 아이들에게 말한다. 환경을 생각하라고. 미래를 준비하라고.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그러나 정작 그 아이들이 정말로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 공포를 얼마나 감당해주고 있을까. 기후 위기는 아이들에게 추상적인 사회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살아가야 할 시간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다. 어른들에게 기후 변화가 “앞으로 조심해야 할 문제”라면, 아이들에게 그것은 “내가 살아갈 세계가 정말 괜찮은가”라는 생존의 질문이다.<br>그러므로 이 소설의 질문은 내게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아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아니면 아이가 밖을 두려워하게 만든 세계가 문제인가.<br>물론 아이는 다시 움직여야 한다. 방 안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 회복을 단순한 의지의 문제로 만들지 않는다. “용기를 내라”, “밖으로 나가라”, “행동하라”는 말은 쉽다. 그러나 말은 행동보다 쉽다.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화자가 자신의 문제가 기후 변화 공포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병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 낫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름을 알면, 자신을 덜 미워할 수 있다.<br>나 역시 그랬다. 내가 겪은 것은 기후 불안이 아니라 실패 이후의 자기혐오와 사회 복귀에 대한 공포였다. 소설 속 화자와 나는 서로 다른 이유로 방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닮은 점이 있었다. 바깥이 너무 커졌다는 것. 그리고 그 바깥을 감당할 언어가 한동안 없었다는 것.&nbsp;<br>나에게 바깥은 다시 평가받는 세계였다.화자에게 바깥은 무너져가는 행성이었다.둘 다 한 사람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다.<br>그래서 이 책의 회복은 거창한 해결책으로 오지 않는다. 처음의 변화는 말하기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친구 마농에게 자신이 나갈 수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하고 나서 홀가분해진다. 다음에는 그 스스로의 말대로 제르맹 선생님에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주 작은 통로가 열린다. 방 밖으로 나가는 첫걸음은 언제나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때로는 내가 왜 무서운지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이다. 내 공포가 변덕이나 게으름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부터 인정하는 일이다.<br>이 점에서 『나만의 방』은 기후 위기에 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소설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 자신의 아픔을 설명하지 못해 더 깊이 침묵하는 사람, 세상의 거대한 문제를 너무 개인적인 방식으로 앓아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br>우리는 자주 아픈 사람에게 증명을 요구한다.왜 못 나가느냐고 묻는다.왜 그냥 하지 못하느냐고 말한다.하지만 어떤 문은 손잡이가 아니라 세계 전체의 무게로 닫혀 있다.『나만의 방』은 그 닫힌 문 앞에 선 아이를 함부로 재촉하지 않는다. 대신 그 아이의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가 묻는다. 너는 언제부터 무서웠니. 무엇이 너를 여기까지 밀어 넣었니. 그리고 이제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니.<br>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오래전의 나를 떠올렸다. 실패 이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나. 내가 나를 실패자라고 부르던 시간.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것 같아 더 깊이 숨어들었던 시간. 그리고 동시에,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들지 않은 위기의 결과를 살아내야 한다. 어른들이 미뤄온 문제를 미래라는 이름으로 떠안고 있다.그러니 이 책은 한 아이의 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그 아이를 아프게 만든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방 안에 갇힌 아이를 보며 우리는 물어야 한다.왜 나오지 못하느냐고 묻기 전에,무엇이 저 아이에게 바깥을 견딜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는지를.그리고 어쩌면 회복은 거기서 시작되는 것일지 모르겠다.<br>아이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말할 수 있게 기다리고 아픔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먼저 믿어주는 것.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공포 앞에서 개인의 실천만을 요구하는 대신, 함께 책임지는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부터.<br>『나만의 방』은 말한다.방 안에 들어간 사람은 끝난 사람이 아니다.그는 어쩌면 누구보다 먼저 세계의 균열을 감지한 사람일 수 있다.그리고 그가 다시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함께 들어줄 누군가의 귀일지 모른다.<br><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12/24/cover150/k56213919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122450</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