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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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은 어렴풋한 염증을 시원하게 갈기는 것도 모자라,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지적인 '융단폭격'을 가한다.


 먼저 책 속에서 저자는 인터넷에 의해 집중력을 잃은 자신에 대해 세 번 고백하는데, 처음에는 사이다 같이 통쾌하다가 두 번째에는 씁쓸해지고 마지막에는 독자를 감동에 휩싸이게 만든다. 

 그 다음에 저자는 역사와 언어학, 과학, 경영학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주장에 힘을 싣는다. 그는 먼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지성사를 훑으며 책과 인터넷이 지성을 다루는 인간의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추적한다. 그러면서 책이 등장하면서 인간에게 선물한 '깊은 사고'를 인터넷이 해체시키며, 이것이 글쓰기와 같은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띄어쓰기 같은 사소한 언어학적 현상도 놓치지 않으며 그 영향을 분석한다.

 그런 뒤 저자는 다양한 독서가들의 일화를 소개하며 책의 위대함을 고급진 수사로 찬양하는데, '책을 읽을 때 독자는 책 그 자체가 된다'라는 문장은 독서의 상태를 거의 정확하게 포착한 말 같았다.

 

그리고 저자는 뇌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깊게 소개하며 또 한 번 독자를 황홀한 지적 만찬으로 초대한다. 그는 먼저 '신경가소성'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소개하며 뇌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 논한 뒤, 인간의 기억이라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이에 대해 인터넷이 어떻게 왜곡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책에 따르면 인터넷은 두 가지 이유로 인간의 기억을 방해한다. 첫 번째는 인터넷이 다차원적인 미디어를 통해 인간이 가지는 작업 기억의 한계치(4개~7개) 이상의 정보를 계속해서 제공하며 뇌에 과부하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인터넷이 그 자체로 기억의 역할을 대신해 버림으로써 인간에게 반복 학습을 빼앗아 작업 기억이 장기 기억으로 전환될 여지를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장기 기억은 무의식적인 개념의 정리와 이해가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맥락에 대한 깊은 사고는 제거될 수 밖에 없다.

 또한 저자는 이러한 연구에만 머물지 않고 구글과 같은 테일러리즘 형태의 기업들이 가진 음모와 위험성에 대해 고발하며 신랄하게 까내리는데, 그 비난이 너무나 통쾌하고 재미있다.

 

이와 같이 저자는 인터넷이 지배적인 관습이 된 현대 사회에 대해 융단 폭격에 가까운 지적 비판을 가하는데,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이 지적인 이야기에 거대한 황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걸작 논픽션'의 반열에 든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는 전혀 아깝지 않다. 이 책은 확실히 걸작이 아니다. 왜냐하면 걸작이 갖추어야할 치밀한 논리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지의 논리성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책의 구조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은 책의 구성이 산만한 느낌 또한 다소 주며(위의 요약은 내가 재구성한 것이다.), 논리가 아주 치밀하진 않다.

 

 그러나 앞에 말했듯 이 책은 어마어마한 지적 황홀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인터넷에 사람들이 잠식당하고 있는 이 시대에, 정말 매우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며, 모든 사람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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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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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한계를 버텨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벗 뿐인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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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사냥꾼 - 이적의 몽상적 이야기
이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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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되지 못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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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줄의 가사 - 한국 대중음악사의 빛나는 문장들
이주엽 지음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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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자체보다도, 이 책에 실린 음악들에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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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티유 뷔르니아의 만화 <양자 세계의 신비>를 읽었다. 처음 이 책을 집어들었던 동기는 기묘한 양자 세계를 어떻게 그려낼까에 대한 궁금증에서였다. 양자역학에 관한 만화는 사실 상당수 나와있지만(<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 <닐스 보어>, <퀀텀>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대부분 그것이 탄생된 과학사적 맥락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이 만화는 표지와 제목에서 풍기는 인상이 마치 양자 세계를 직접 그려내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뇌 속의 신경계를 재치 있게 그려낸 만화 <뉴로코믹>처럼 말이다.



 그러나 만화를 읽으면서 그 기대는 깨졌다. 이 만화 또한 양자역학의 역사를 다루는 것에 가까웠던 것이다. 심지어 설명을 그렇게 잘 한 것 같지도 않았다. 양자역학 만화책 중 가장 읽기 힘들고 어려웠다. 감수를 맡은 김상욱 교수는 이 책을 '만화라면 양자역학의 어려움을 덜어줄 수 있을까에 대한 흥미로운 대답'이라고 했지만 차라리 그의 책이 훨씬 더 양자역학에 접근하기에 좋다(특히 '김상욱의 양자공부'는 한국 최고의 과학교양서로 뽑을만큼 잘 쓰여졌다).



  그래서 실망감을 안은 채로 힘들게 이 책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마지막 휴 에버렛의 이야기를 지나 다중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는 장면에서, 이를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책을 단순히 양자역학 전달용 만화로 읽어선 안 된다는 것, 하나의 예술 작품이자 과학과 철학의 세계에 관한 선언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먼저 이 만화에서 그려내는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주인공이 어느 순간 '접속'해버린 이 세계는 과학자들이 있는 현실세계라고 하기도 힘들고 양자 세계라고 하기도 힘들다. 그것들이 한데 뒤엉켜 있는, 굉장히 특이한 세계다. 이 세계와 가장 비슷한 세계는 루이스 캐럴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세계다. 실제로 주인공 밥은 앨리스가 토끼굴 속으로 '떨어지듯이' 의자 속으로 '떨어지면서' 이 세계로 들어가고, 앨리스가 같은 장소에서 꿈에서 깨어나듯 똑같이 의자에서 꿈에서 깨어나며 세계에서 빠져나온다. 이 부분이 앨리스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밥이 접속한 세계에 대해서 조금 더 갈피를 잡을 수 있다. 그 세계는 밥의 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앞에 밥의 개 '릭'의 죽음이라는 사연과 후반부 다중 세계 해석을 이용해 그 세계에 대한 해석을 확장한다.

 이 작품에서 밥은 앨리스와 달리 어떤 계기로 인해 양자 세계에 접속하게 된다. 동료이자 친구였던 강아지 '릭'의 죽음, 그리고'릭'의 영혼으로부터 온 계시가 양자 세계 여행을 촉발했다. 어찌보면 그는 앨리스보다 길가메시와 더 닮아 있다. 친하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세계의 본질, 삶과 죽음의 문제를 탐구하려 나아간다는 점이 똑같다.

 하지만 이 작품은 플라톤이나 칸트 같은 철학자 대신 물리학자들을 그 질문의 원동자들로 삼는다. 그리고 그 탐구 끝에서.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을 던져버리고 다세계 해석을 주장한다. 물리학자 숀 캐럴이 <다세계>에서 다세계 해석이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의 저자도 그것을 최종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다세계 해석은 삶과 죽음에 관해서 매우 중대한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서로 인식하지 않으면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인류 전체가 찾아온 삶과 죽음의 문제에 양자역학이 새로운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것은 이 책을 읽은 뒤 떠오르게 되는 상념이 아니다. 이 책의 작가는 앞에 밥과 릭의 죽음을 길게 배치하고, 슈뢰딩거의 고양이 문제를 책 막판에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이론인 동시에 죽은 이들을 위한 레퀴엠이기도 하다. 그 장면에서 참을 수 없이 부풀어오르는 감동은 그 위로와 경이로움에서 오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철학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은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의 여정을 담은 책인 동시에, 철학에서 과학이 어떻게 활용되는 지를 여실히 보여준 책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책이 교양과학서적 중에서는 굉장히 많다. 스티븐 호킹과 카를로 로벨리를 비롯한 많은 물리학자들의 책이 이렇게 실재에 관한 부분을 다룬다. 브라이언 그린, 숀 캐럴, 짐 홀트 등은 직접적으로 본인들의 책에서 과학과 철학의 관계가 끈끈함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상욱 교수 같은 사람이 <김상욱의 과학공부> 같은 책에서 그런 부분을 지적했었다.



  그러나 만화책 중에 그런 책은 거의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책은 오직 하나,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의 <로지코믹스>였다.

 이 책은 수학의 기초를 세우려는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노력이 얼마나 처절하게 무너지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러셀은 힐베르트이 견해를 이어받아 수학을 완벽한 체계로 정의하려고 한다. 하지만 러셀 자신과 그의 제자 비트겐슈타인, 괴델에 의해서 수학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 만화의 비범함이 드러나는 부분은 그 것을 그려낸 것이 아니다. 그것을 러셀의 삶과 엮는 부분이 이 만화를 높은 예술성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러셀은 사실 어린 시절 마주한 광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 노력을 했던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히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기초인 수학부터 정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만화는 러셀의 실패를 통해 삶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을 안고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만화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교양 만화가 이토록 뛰어난 깊이를 가질 수 있다는 데에 놀랐었다. 그래픽노블과 만화 예술의 깊이에 대해서는 이제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교앙 만화는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양자 세계의 신비>까지 읽은 지금, 이제 그런 한계가 넘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양자 세계의 신비> 같은 경우, 그렇게까지 뛰어난 책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교양 만화로써 기본적인 지식 전달의 효과가 너무 떨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것은 아마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저자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로지코믹스> 같은 경우, 굉장히 뛰어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단점에도 불구하고 <양자 세계의 신비>와 <로지코믹스>는 과학과 철학의 융합을 매우 흥미롭게 그려내는 만화다.



 


 이 만화들은 이제 과학 교양만화 또한 깊이와 품격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하는 책들이다. 생각해보면 그냥 일반적인 책들의 경우, 논픽션이 픽션에 비해 위상이 딸리지 않지 않는가? 그래픽노블이 문학의 깊이를 따라잡았다면, 교양만화도 논픽션의 깊이를 따라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이제 교양만화도 진화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그 희망 또한 보인다. 이 만화들만큼은 아니더라도, 대다수의 교양만화들이 학습만화의 굴레를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다. 분명 교양만화들이 클래식 논픽션으로 자리잡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 책들은 그것의 주춧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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