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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줄의 가사 - 한국 대중음악사의 빛나는 문장들
이주엽 지음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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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자체보다도, 이 책에 실린 음악들에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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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 서사시 범우고전선 10
N.K. 샌다스 지음, 이현주 옮김 / 범우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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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시 서사시는 흔히 알려져 있듯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이야기은 옛날 것 같지 않은 남다른 세련됨을 과시한다. 이 것은 일종의 신화이지만,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 로마 신화로 따진다면 신들의 탄생 설화보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보는 듯 하다.

 이 이야기는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야생에서 자라난 엔키두와 제국의 왕인 길가메시의 대립을 자연 대 문명의 대립으로 보는 해석도 있지만(편자인 N.K 샌다즈는 이러한 해석을 해설에서 언급했다), 내가 보기에 이 대립은 인간과 짐승의 대립, 인간의 존재론에 관한 것 같다. 여기서 엔키두는 창녀와의 성관계를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로 변화하는데, 성관계가 새로운 생명(삶)을 탄생하게 하는 창구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장면의 의중이 드러난다. 즉 이 작품은 인간의 경계를 '살고 죽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후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완전한 짐승인 훔바바와 대립한다. 그러나 훔바바가 있는 땅은 샤마시의 땅이며, 생명의 기운이 가득 찬 땅이다. 훔바바는 길가메시와 엔키두에 의해 죽임을 당할 뿐, 자연적으로 죽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길가메시와 엔키두, 즉 인간은 짐승(훔바바)과 신(샤마시) 사이에 있는 존재일 텐데, 양 끝의 두 존재들은 영원한 삶을 살지만 그 사이에 있는 인간은 죽는 존재인 것이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죽음은 인간만의 특성이며,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숙명이 되는 것이다.

 또한 죽음은 급작스럽게 고개를 내밀며, 인간은 그것을 예측하지 못한다. 이 작품에서는 오직 인간들만이 꿈을 꾼다. 인간들은 그것을 해몽함으로써 미래를 예측할 수 있지만, 이것은 다르게 말해서 인간은 미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오직 꿈의 해몽을 통해서만 (부분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엔키두는 갑작스레 여신의 저주와 신들의 심판을 받아 죽게 된다. 여기서 엔키두는 자신을 인간으로 만든 창녀를 저주한다. 그러나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창녀를 축복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엔키두는 인간으로써의 숙명에 괴로워하지만, 죽음의 직전 그 숙명을 기뻐하며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죽음에 가서야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길가메시는 친구의 죽음을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그는 자신만이라도 죽음을 피하고자 한다. 그는 인간의 숙명을 뛰어넘으려고 한다. 영원한 삶을 향한 그의 여정은 후반부에 매우 장엄하게 그려진다.

 그는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인간을 찾는다. 그는 성경의 '노아'에 해당하는 인물로, 인류를 멸망시킨 거대한 대홍수를 방주를 만들어 피한 인물이다. 그는 신들의 축복을 받아 영생을 얻는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곳이 일반적인 지상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죽음의 강' 너머에 살고 있다. 그는 태양신이 움직이는 곳에 살고 있다. 그렇다. 그는 일종의 신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되지 않는 한, 영생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길가메시는 이것을 깨닫지만, 신이 되기 위해 잠을 버텨보려 한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여기서 잠은 잠시 동안의 죽음이다. 잠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인 것이다.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처참히 실패한 그는 완전히 비참한 마음이 되어 고향에 돌아가 죽음을 맞는다. 젊음의 약초를 얻어 그것으로 젊을을 되찾으려고도 하였지만, 그것 또한 미래를 내다 볼 수 없는 인간의 특성으로 인해 뱀에게 도둑맞는다.

 이 작품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를 죽음과 시간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골똘히 들여다 본다. 그 성찰의 논리는 깊지 않지만, 이 장엄한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이 질문에 마음을 담글 수 밖에 없다. 이 전승을 전하며 수메르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 작품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이야기로만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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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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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무너져내리는 시간에 대한 보고서다. 주인공 김병수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후 기억들이 점점 왜곡되고 모순되는 것을 발견한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킬러가 기억의 미로 속에 빠졌다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김병수의 시간은 원래부터 무너져내렸는데, 김병수는 그것을 '살인'이라는 행위로 메꾸었던 것은 아닐까. 살인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살인 이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 누군가를 죽였을 떄, 우리는 살아있다는 것을 생생한 감각으로 느낀다. 요컨대 살인은 삶(시간)의 고무줄을 더욱 팽팽하게 만든다. 김병수는 그렇게 끝없는 살인을 통해서 균열이 가득한 본인의 삶에 접착제를 바 것이 아닐까.

 이것은 그의 첫 번째 살인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는 아버지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으면 본인이 맞아 죽을 테니까. 시작부터 그의 살인은 살기 위한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은희라는 존재를 통해서 살인을 멈춘다. 시간을 지속시킬 하나의 이유를 찾은 것이다. 그렇게 그는 25년이란 시간을 살아간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끝에 반전이 하나 있었다. 은희라는 인물, 그러니까 의 입양한 딸의 존재 또한 불확실하다는 것! 그는 살인 없이도 삶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25년 전부터 그의 시간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너짐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으면서부터 급격하게 폭발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김병수의 마음과 책의 호흡도 질주한다. 이런 질주의 한가운데에는 공포라는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다. 상술했듯이 김병수는 삶을 위해 살인자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다. 죽음과 공허에 대한 두려움은 그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감정 중 하나일 것이다. 그 감정이 우리를 재빠른 속도로 소설의 끝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공허가 일으킨 공포는 공허에 다다랐을 때 허공에 흩어져 버린다. 단지 무(無)일 뿐이다. 이 무(無)는 누군가에게는 편안한 요람으로, 누군가에게는 감옥으로 느껴질 수 있다. 이 소설은 이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는다. 단지 묵묵히 그려낼 뿐이다.

 사실 이 소설은 모든 것에 대해 입장을 내놓지 않는다. 이 소설은 말 그대로, 보고서다.

 시간과 죽음, 그리고 두려움을 이 소설은 보고한다. 이 소설은 그에 대해 옹호도, 비방도 없지만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러나, 이 소설은 너무 빨리 읽히는 탓에, 그 생각의 통로를 막는다. 분석을 해 보면, 이 책이 질문을 던진 다는 것을 알겠지만, 그 소설을 읽고서는 전혀 사유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 점만 빼면 이 소설은 완벽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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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크리스토 백작 1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25
알렉상드르 뒤마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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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복수하는 자가 아니라 심판하는 자다. 그는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자들에게 치밀하게 접근하여, 그들의 죄를 파헤쳐 심판한다. 그 죄의 유형은 가지각색이며 심판 방법 또한 가지각색이다. 그런데 빌포르를 향한 심판의 칼끝은 빌포르를 넘어 그의 가족들에게까지 향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어째서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는 가족들의 죽음이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아닌 빌포르의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빌포르가 부인에게 내린 심판도 합리적이고 부인이 아들에게 내린 심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사실 이 작품의 모든 이는 심판을 내린다. 아니, 모든 인간은 심판을 내리는 존재다.

 작품 속 많은 종류의 죄와 심판, 그리고 그 합리성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탐구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침묵은 죄가 될 수 있는가(카드루스), 연좌제는 옳은가(빌포르 부인), 정치적 견해도 죄인가(모렐, 에드몽 당테스), 떠난 이를 버리거나 잊어도 되는가(메르세데스). 또 선량한 모렐 집안이 심판의 집안과 엮여 심판의 바퀴에 들어간다는 점과 등장인물의 심판이 변화한다는 점은 죄에 대한 탐구를 더욱 고차원적으로 증폭시킨다.

 죄라는 것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삶이라는 여행이다. 그는 14년의 삶을 죽은채로 있었기에 죄에 대해 얕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죄를 탐구하러 여행을 떠난다. 인간은 심판하는 존재이며 삶이라는 여행은 죄의 탐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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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
알퐁스 도데 지음, 정택영 그림, 이재형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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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에세트는 천당과 나락을 오간다. 순수함의 대명사 알퐁스 도데가 그려내는 나락의 모습은 적나라하다. 다니엘은 어째서 천당과 나락을 계속해서 오가는가? 천당과 나락의 차이는 없다. 인물의 배신, 혹은 사물의 배신이 천당을 나락으로 만든다. 그것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자크 에세트의 도움은 천당으로 끌어로려주는 구원의 손길이기도 하지만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추이기도 하다. 다니엘은 끊임없이 괴로워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체성을 되찾지 못한다. 자크 에세트의 마지막 구원 때, 다니엘의 상태는 여전히 불안하다. 언제 나락으로 바뀔지 모르니까.

 그런데 자크가 죽는다. 그렇다. 신은 죽었다. 자크의 죽음에 대한 슬픔, 그것은 주체성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도예, 시를 갈망한 다니엘에게 그것은 포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 다니엘에게 맞는 일은 그것이었다. 무엇보다 다니엘의 이름이 간판에 붙어 있다. 도예의 길, 그것은 안락한 삶을 바라는 나약함이 아니라 진정 자신에게로 향하는 소박한 강인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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