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의 쓸모 -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읽는 21세기 시스템의 언어 쓸모 시리즈 3
김응빈 지음 / 더퀘스트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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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내 선택 과목은 화학2였다. 수학 때문에 인생을 조진 사람이라 또 하나의 수학에 불과한 물리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지구과학은 과학 같지가 않았고 생물학은 적어도 당시에는 끔찍한 암기 과목에 불과했다. 애당초 왜 이과를 간 걸까? 그건 무려 나의 '친부'가 이공계에도 인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과 진학을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화학2는 좀 달랐다. 이 학문은 지극히 논리적인 데다,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를 쥐고 있었다. 고분자 화합물의 조립식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5만 조각짜리 직소 퍼즐의 마지막 한 자리를 찾아낸 것과 같은 희열이 느껴진다. 프라모델이나 레고를 좋아한다면 화학을 싫어할 수가 없다. 게다가 세상 만물의 근본이 궁금한 인팁(INTP)이라면? 이 과목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물학의 쓸모>라니! 화학의 쓸모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 감히 신성한 과학의 영역에 암기 과목에 불과한 생물학 따위가 발을 디딘단 말인가!라고 하기엔 유전공학을 필두로 우리 삶에 밀고 들어온 이 학문의 영향력이 너무나 크다. 화학은 우리 삶과 너무나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이를테면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바람에 눈에 띄지 않지만 생물학은 양손에 질병과 노화의 해방을 쥐고 있어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한때 생물 복제에 관한 한 세계의 중심에 서 있지 않았는가!(황우석 나빠요)


세상의 근원에 어떤 과학이 더 가까운가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과학에는 위계가 없다. 사실이 있을 뿐이다. 과학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각자가 배운 것을 나누며 궁극의 진리에 다가선다. 모든 과학은 결국 물리학의 아류일 뿐이라느니,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을 나누려는 시도 같은 건 대부분 과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야의 호가사들이 하는 말이다.


우리 사회의 최소 구성단위를 생물이라고 본다면 세계에 대한 이해가 결국 생물학에 대한 이해로 귀결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생물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가 원자이니 화학과 물리학이 앞선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건 마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픽셀을 살펴봐야 한다는 말만큼이나 공허하다. 적어도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에게는.


생물학은 그 간격을 좁혀주는 학문이다. 우리를 아주 먼 곳으로도, 그렇다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으로 데려간다. 그리고는 아주 큰 눈을 끼워줘 생물을 지배하는 유전자와 생물계를 지배하는 다양한 미생물들의 존재를 밝혀준다. 현미경을 처음 발명한 사람들이 자기 손에 득시글한 세균을 처음 발견했을 때 느꼈을 충격과 환희를 상상해 본다. 그 후로 수많은 시간이 흘러 우리는 우리를 살리고 죽이는 미생물들과 그 사이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관계를 발견하게 됐다.


<생물학의 쓸모>는 세포에서 시작해 호흡으로 넘어가 생명활동을 정의한 뒤 DNA로 근원을 밝히고 미생물과 생태계로 여로를 확장해 나간다. 너무 심오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적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수준 높은 패키지여행을 제공한다. 정말 쓸모 있는 생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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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에서 배워라 -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 여정
해나 개즈비 지음, 노지양 옮김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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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 개즈비는 오지가 많기로 유명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손꼽히는 깡촌인 태즈메이니아 출신의 여성 코미디언이다. 그녀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레즈비언인 데다 일반적인 한국 남성의 대여섯 배에 달하는 체격을 지니고 있다. 1994년도까지 동성애가 '법적으로' 금지였던 호주가 이 거대한 여성에게 이상적인 나라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이란보다는 나았겠지만.


해나 개즈비는 그 시절 호주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였으니 사회생활이 원만할 리 없었고, 학업 성적도 우수하지 못했다. 학창 시절에는 항상 외톨이였고 졸업 후에는 무능력한 식충이였다. 서구 문화권에선 다 큰 성인이 직업 없이 부모의 집에서 동거를 하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일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기로 결심한다. 2006년에 데뷔한 그녀는 <나네트>라는 문제적 쇼로 엄청난 인기를 끌며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낸다.


<차이에서 배워라>는 오늘날 출판업계가 지향하는 마케팅 전략에 맞게 그 내용과는 사실상 전혀 연관이 없는 제목이다. 그냥 해나 개즈비의 자서전이다. 문장에 유머가 넘치고 표현은 기발하다. 착즙기에 자기 인생을 넣어 있는 대로 불행을 짜내지도 않고 그 모든 역경을 극복했다는 영웅적 서사도 없다. 책으로 펴낸 누군가의 삶은 모든 이야기가 다 특별해 보이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인생일 뿐이다. 공감이란 결국 우리가 같은 처지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해나 개즈비의 코미디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이유가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네트>가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이유는 그녀의 코미디가 이 쇼를 기점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볼품없고 쓸모없는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로 결심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탠드업 코미디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그 위에서 뚱뚱한 레즈비언이 관객의 지지를 받으려면 자신을 깎아내리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나네트>를 시작했을 때 어떤 어려움을 겪었겠는가? 자기보다 밑에 있어야 하고, 그걸 소리 높여 인정해야만 자비를 베풀었던 백인 이성애자 남성들의 분노가 시작됐다. 그녀의 쇼에 야유를 하는 관객들이 나타났다. 어떤 남자는 공연 중간에 그녀와 대놓고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어떤 부부는 중간에 욕을 하며 나갔고 어떤 관객들은 환불을 요청하기도 했다. 아이러니는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성공을 도왔다는 것이다.


이 책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유심한 듯 무심한 듯 그녀의 삶에 울타리가 되어준 잔잔한 가족애가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삶을 특별한 시선으로 다시 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 겉으로 봤을 땐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수렁에 빠져 어두운 골방에 처박혀 있으면 어느 순간 말없이 옆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공간의 숨소리가 스스로 이야기를 해준다. 마치 나와 당신의 가족들처럼.


솔직히 넷플릭스 시리즈는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다. 나는 책을 읽기 전, 읽은 후 각각 한 번씩 도전을 했지만 모두 완주에 실패했다. 번역의 문제일 것이다. 혹시 나처럼 그 쇼에 큰 기대를 거는 사람이라면, 감안하고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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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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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김연수를 모른 척해왔다. 유명세에 비례해 손이 가지 않았고, 묘한 거부감이 있었다. 여성 작가의 글을 잘 읽지 못하는 편이다. 특히 풍부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할수록 따라가기가 어렵다. 읽어본 적 없으면서도 김연수에게는 비슷한 결이 느껴졌다. 하루키스러운 제목도 불호 리스트에 올리는 데 한몫 거들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니. 세계의 끝에는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는 와중에 몇 권의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장편 한 두 개, 단편 두어 개. 첫 장편을 읽었을 때, 확실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감성의 결은 비슷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흥미롭고 매듭이 잘 지어져 있었으며 특히 훅하고 다가와 심장을 찌르는 펀치라인이 절묘했다.


<오래된 미래>와 <너무나 많은 여름이>. 평생 김연수의 책을 이렇게 짧은 기간 안에 연달아 읽은 적이 없었다. 이 연속적이고 우연한 기회를 통해 나는 이 남자를 완전히 받아들이게 됐다. 그의 작품은 압도적이고, 나는 김연수를 좋아한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한국 단편 소설들이 갖는 가학적 글자수 제한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원하는 만큼 쓰고, 끝내야 할 때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이 쿨함에 얼마나 신났는지 모른다. 책장을 넘기는 손은 가벼웠고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에 등장할 이야기를 기다렸다.


이 소설들은 낭독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제주문화재단의 초청으로 가파도의 레지던스에 머물고 있었던 때라고 한다. 낭독회는 체류 작가들이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해가 저물면 가파도의 제주 시민들이 하나씩 서점을 찾아 들어온다. 중년 여성들이 많았다.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인문학서를 읽는 독서 모임의 회원들이라고 했다. 캄캄한 밤 위로 희미한 조명을 켠 뒤 평생 보고 살 일 없었던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게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듣는다. 한 사람은 소설을 읽고, 한 사람은 침묵으로 대답한다.


현실에는 낭만이 끼어들 데가 없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이 모습에 나는 자꾸만 몽글몽글한 색을 입히게 된다. <너무나 많은 여름이>는 그런 소설들이다. 책의 마지막에는 낭독회에서 같이 튼 음악 리스트도 있으니 찾아서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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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와 베타
로저 젤라즈니 지음, 조호근 옮김 / 데이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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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트와 베트>를 읽으며 크게 놀란 건 내가 이 책을 읽었었다는 사실을 역자 후기를 보고서야 깨달았다는 점이다. 나는 그 책의 이름과 표지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리송한 형이상학적 이미지, 제목은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출판사는 열린책들이다.


이 챗의 첫 단어에서부터 끝 문장까지 나는 단 한순간도 눈치채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완전한 망각이 책을 읽을 때마다 신선한 축복을 내려주니 마냥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엔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난다. 기억의 용량은 정해져 있고 새로운 것이 늘면 오래된 것을 내놔야 한다. First in, first out. 수십 년간 읽어온 그 아름다운 문장들이 영영 사라져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편으로 휑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무튼 이 망각 덕분에 <프로스트와 베타>를 재미있게 읽었다. 로저 젤라즈니의 작품들은 신화와 판타지 요소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SF다. 하드 SF 애호가들에게는 끔찍한 취향이겠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로저의 소설들은 쉽게 다가갈 수 있다. SF라는 단어를 아예 빼고 봐도 무방하다.


<프로스트와 베타>의 모티브는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천사와 악마의 대립이다. 지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핵전쟁으로 완전히 망가졌다. 아마도 이런 일을 대비해 인간들은 AI를 만들어둔 것 같다. 인류가 사라진 뒤에도 남아 고향별을 스스로 복구할 정도로 고도의 문명을 창조했으나 핵전쟁을 막을 정도로 온순하지는 않았던 인간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AI 시스템에 플랜 B까지 심어 두었다. 이야기는 이 계획이 얄궂게 틀어지면서 생기는 긴장을 다룬다.


들어보라, 태초에 솔컴이 있었다. 솔컴은 모든 AI를 관장하는 야훼와 같은 존재인데 무소 불위 하며, 전지전능한 신과는 달리 2차 창작물(신이 만든 인간이 만든 신)에 불과했기에 인간은 솔컴에 심대한 결함이 생겼을 때 그를 대신할 디브컴을 만들어두었다.


인류가 멸망한 뒤 솔컴이 깨어나 지구를 관제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핵 미사일 하나가 우연히 솔컴의 일부를 파괴한 게 문제였다. 이 파괴에서 깨어난 디브컴이 프로토콜에 따라 지구의 통제권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신의 훼손을 중대한 장애로 여기지 않았던 솔컴은 그 요청을 거부하고 프로스트와 베타를 만들어 각각 북반구와 남반구를 관장케 한다.


당연히 디브컴은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프로세스를 종료하고 휴면에 들어가는 대신 그는 자신만의 기계 군단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의 군단은 솔컴이 재건한 곳들을 족족 파괴한다. 이 창조와 파괴의 무한한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던 디브컴은 상황을 반전시킬 절묘한 전략을 떠올린다. 디브컴은 프로스트에게 기계 한 대를 보낸다. 이 사악한 기계는 위대한 프로스트를 인간의 지식으로 '유혹'한다.


직유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가벼운 상징이 아쉬운 사람도 있겠지만, 재밌지 않은가? 우리가 좋아하는 명작들도 사실은 위대한 서사의 2차 창작물인 경우가 많다. 물론 <프로스트와 베타>는 단순히 구조를 넘은 유사성이 있다. 그렇다고 읽는 즐거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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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의 데드히트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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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의 데드히트>는 대학시절 읽었던 책인데, 끔찍하게 지루했던 걸로 기억한다. 도통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즐비했고, 하루키 특유의 쿨함과 자의식 과잉이 합쳐져 자아내는 허세적 분위기가 가득했다. 예컨대 친구의 애인이나 부인과 섹스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화자의 태도나,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엄청난 미녀가 유독 하루키를 형상화한 캐릭터와 섬싱을 만들어내거나, 불현듯 경험한 에피파니에 의해 내 영혼을 구성하던 뭔가가 영원히 떨어져 나가고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는 없게 됐다는 식의 어쩌고 저쩌고 같은 얘기 말이다. 아무튼 이런 얘기를 반복해서 듣고 있으면 생굴에 날계란을 풀어 먹는 것처럼 느끼하다.


그런데 근 30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웬걸,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아니 뭐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꽤 재밌었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는 그냥 전형적인 하루키 소설이었다. 느끼한 걸 아무리 먹어도 버틸 만큼 위벽이 탄탄해진 건지, 번역된 책을 거의 다 읽으면서 하루키를 인정하고 또 존경하게 된 탓인지 모르겠지만, 한여름에 에어컨을 틀고 소파에 누워 후루룩 말아먹기에 좋은 책이다. 옆에 싱하 탄산수와 헤네시를 섞은, 이가 시릴 정도로 상큼한 하이볼을 더한다면 완벽한 주말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 지금 좀 하루키스러웠나?


소설은 하루키가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루키는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은 극히 일부분만 수정했을 뿐 소설이 어떠한 각색이나 과장이 없는, 근본적으로 사실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그대로 믿고 책을 펼치면 친구의 애인이나 부인과 섹스를 즐긴다는 그들의 고백에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한다. 이름 정도는 바꿨다 해도 하루키의 주변 사람들은 그게 누군지 다 알 텐데,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건가? 하루키가 몸담은 초 유명인들의 사교계에서 이 정도는 애교인가 보구나, 하는 왜곡된 세계관을 갖게 된다.


마지막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나면 이게 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하루키는 이 단편집을 통해 본인이 장편을 쓸 수 있을지 시험해 봤다고 하는데, 그러려면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대로 옮기는 형식이 아니고선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소설 앞과 뒤의 얘기가 달라 무엇을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사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에 등장하는 하루키가 현실 세계의 하루키와 같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게 촌스러운 발상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건 소설이고 그는 소설가 아닌가. 소설가란 시작부터 끝까지 다 거짓을 말해도 무관한 직업이다.


출간하여 독자 앞에 내놓는 작품이 뭔가의 연습이라는 게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하루키의 일부 에세이와 소설들은, 내용상으로 비슷한 탓도 있겠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1948년생의 작가가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결국 하루키의 작품들은 궁극의 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참 멋있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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