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분석의 힘 - 그 많은 숫자들은 어떻게 전략이 되는가
이토 고이치로 지음, 전선영 옮김, 이학배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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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논쟁을 싫어한다. 생각과는 다르게 논쟁은 한쪽이 엉터리 논리를 펼쳐서가 아니라 양쪽이 다 맞는 말을 할 때 성립한다. 연애 상담이라면 그래, 둘 다 옳지 옳아, 하며 하나씩 양보해 타협하라는 중재안을 내놓을 수 있지만 회사 일에서는 이런 식으로 넘길 수 없는 순간이 많다. 중재안으로 팀은 평화를 찾을 수 있겠지만 고객은 그렇지 않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반푼이 서비스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뭔가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좋게 좋게 가자. 이건 좋은 게 아니라 이기적이고, 무능한 거다. 비용과 수고가 드는 일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라야 한다. 꼭 성공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실패를 하더라도 얻는 게 있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판단이 틀렸구나, 다음번에는 절대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이라도 얻어야 한다. 그러려면 격돌하는 논쟁의 양 끝을 부드럽게 깎아 접붙이는 식으로 결정을 내려선 안 된다. 논리적으로는 둘 다 맞을 수 있지만, 이 세상에 통하는 진짜는 하나뿐이다. 논리와 진짜를 구분하는 도구, 나는 이게 데이터라고 생각한다.


데이터를 분석하는 이유는 그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B라는 사건을 일으킨 원인이 어디 A 하나뿐이겠는가. 수많은 A의 변형과 심지어 C와 D까지 B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이 변수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거나 그 영향력을 낮추는 법을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의 주임무다. 크게는 무작위비교시험(RCT), 회귀불연속설계법(RD디자인), 집군분석, 패널 데이터 분석을 설명한다. 이름은 숨 막힐 정도로 무섭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분량도 적다. 데이터 데이터 하도 떠드니 나도 한번? 의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냥 훌훌 읽을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도무지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모르는 사람은 어느 정도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 분석의 힘>은 진짜 진짜 쉬운 입문서다. 현업에서 데이터 분석을 어느 정도 해온 사람이라면 건너뛰어도 무방하다. 케이스 스터디도 평범하다. 본격적인 무호흡 다이브, 그전에 유의사항을 알려주는 팸플릿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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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의 세이렌
커트 보니것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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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의 세이렌>은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가 아직 밥을 벌기 위해 쩔쩔매던 시절에 출간한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불의의 사고로 숨진 누나의 자식들까지 입양하여 대가족을 이룬 그에게 이름 없는 작가의 삶이란 결코 녹록지 않은 적수였을 것이다. 어디서 글을 쓸 용기가 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건 이 위대한 용기가 출발한 지 거의 20여 년이 지나서야 그가 성공다운 성공을 맛봤다는 것이다.


짹짹?


이 책에는 이후 커트 보네거트가 끈질기게 추구해 온 테마의 씨앗이 골고루 심겨 있다. 트랄파마도어 행성, 미래를 안다는 것의 의미, 자유의지 같은 것들.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킬고어 트라우트는 아직이다.


주니어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제5 도살장>과 <타임퀘이크>의 믹스라는 말에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제5 도살장>에는 전 세계가 똥통에 빠진 경험을 했던 2차 세계대전이 주요한 소재인 것에 비해 <타이탄의 세이렌>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확실히 문학계는 자유의지 같은 추상적 논쟁보다는 고통과 절망, 인간의 잔혹성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시도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 같다. 내 보기에 주니어가 작가로서 이름을 얻기 위해 <제5 도살장>까지 기다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커트 보네거트에게 이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면 아마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그렇게 가는 거지.


들어보라! 미국 로드 아일랜드 주 뉴포트에 사는 윈스턴 나일스 럼포드는 그의 개 카작과 함께 화성을 탐험하던 중 크로노 신클래스틱 인펀디뷸럼을 통과하는 바람에 파동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후 그와 그의 개는 주기적으로 우주 곳곳에서 물질화하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이 비극은 지구에서 15만 광년 떨어진 트랄파마도어 행성에서 온 살로를 만나며 완전히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낸다. 살로는 우주선의 부품 고장으로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에 불시착했고 윈스턴은 그곳의 유일한 인간이었다. 살로는 윈스턴을 좋아했다. 그를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시간의 비밀과 자신이 가진 기술을 아낌없이 공유한다.


사실상 신이 되어버린 윈스턴은 인간의 역사를 송두리째 다시 쓰기 위해 화성에서 군대를 양성해 우주 전쟁을 벌인다. 그의 목표는 화성군이 철저히 패배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창조한 새로운 종교가 지구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의 계획에는 두 인간의 비극이 핵심이었다. 한 명은 성경을 이용한 투자로 세계를 지배할 정도의 부를 이룬 멜러카이 콘스탄트였고 또 하나는 그가 아직 물질로만 존재하던 시절에 결혼한 아내 비어트리스 럼포드였다. 두 사람은 윈스턴의 계획에 따라 완전히 몰락한 뒤 화성으로 납치된다. 지구인이었던 시절의 기억은 모두 삭제됐고 그 공백을 채운건 무선으로 사람을 조종하기 위해 만든 안테나였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고난에서조차 신의 의도를 찾으려 노력한다. 그들은 이 불행이 신이 준비한 해피엔딩의 과정일 뿐이라 믿음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한다. 우리 같은 하찮은 피조물의 입장에선 원하는 대로 믿고 위안을 찾으면 된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선 어떤 생각이 들까? 그러니까 지금까지 지구에서 일어나고 스러졌고 스러져 갈 모든 존재의 필요와 역할을 원자 단위까지 정해놓은 자신의 계획이, 사실은 더 큰 신이 짜 놓은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됐을 땐?


<타이탄의 세이렌>을 읽을 때 당신은 멜러카이 콘스탄트나 비어트리스 럼포드에 감정을 이입해선 안 된다. 당신은 이 이야기의 신이자 악당인 윈스턴 나일스 럼포드에 빙의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소설이 전하는 진정한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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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유유 2023-08-29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의 맥락을 짚어주는 좋은 리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한깨짱 2023-08-30 22:10   좋아요 1 | URL
긴 글 읽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전 코맥 매카시까지 가버리고 나니, 제 30대를 송두리째 차지했던 작가들이 이제는 아무도 지구에 남아있지 않네요.
 
특권 중산층 - 한국 중간계층의 분열과 불안
구해근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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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빈곤층부터 상위 중산층까지 모두 계층 하락의 불안에 시달리는 특이한 나라다. 언제부터 그랬냐 묻는다면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적어도 80년대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 1989년의 대한민국은 국민의 75%가 '나는 중산층이다'라고 대답하는 나라였다. 실제 이 중 일부는 소득을 기준으로 볼 때 중산층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이는 당시 한국인들의 계층 상승에 대한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불과 20년 만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2010년대에 이르러 이 수치는 20%대로 떨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소득상 중산층에 속해있었다는 점이다. 2010년대의 한국인은 80년대에 비해 확실히 기가 죽어 있었다.


80년대에는 중소기업을 다니든 대기업을 다니든 동네 슈퍼를 하든 다 고만고만하게 살았다. 원하면 누구나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고 성실히 저축하면 주공, 시영 같은 대단지 저층 아파트와 자가용을 소유하고 둘 정도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의 중산층은 비교적 동질적이고 상향이동의 꿈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분열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됐으나 결정적 계기는 누가 뭐래도 IMF일 것이다. 이 경제 재앙을 시작으로 부는 급격히 양극화했으며 비정규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소득에서도 큰 격차를 보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고연봉을 받는 대기업 직장인이라고 평화를 찾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2020년 연말정산 세액결정소득을 기준으로 상위 10%의 연봉은 6,590만 원이었다. 사람에 따라 이는 높게도 낮게도 보일 수 있지만 실제 저 연봉을 받는 사람에게 당신은 중산층이냐고 물어보면 대다수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주적은 높은 부동산 가격이다. 연봉 6,590만 원의 직장인 A가 중급지에 위치한 전용 59제곱미터의 7억 원짜리 아파트를 구매한다고 가정해 보자. 27살 때부터 저 연봉을 받았다고 가정하고(편의상 이후의 연봉 상승은 없다고 치자) 실수령액의 70%가량인  300만 원을 저축했다 치면(자린고비 뺨치는 구두쇠라고 하자) 33~4살 정도에 현금 2억 원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출은 5억 원에 5%. 이를 30년 간 원리금균등분할 상환할 경우 월 납입 원리금은 260만 원에 달한다. 고소득자 A는 넉넉한 중산층 가정을 꾸릴 수 있을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외식을 하고 일 년에 한두 번은 해외여행을 다니며 가끔은 문화생활도 하고 중형 세단을 끌며 아이를 둘 정도 낳아 기르는 게 중산층의 조건이라 한다면?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A에게 부모가 물려준 중급지의 7억짜리 아파트가 있다고 해보자.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두 번째 적은 망가진 공교육이다. 대한민국에서 고소득 전문직이 되기 위한 첫 관문은 명문대 입학이다. 명문대 입학생과 부모의 소득이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공교육의 붕괴와 반비례해 사교육비는 증가했다. 상류 중산층은 자신의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일반 중산층은 어떻게 해서든 그 위치를 따라잡기 위해 경쟁적으로 사교육비를 지출했고 모두가 가난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미디어의 발달은 중산층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사실 당신은 중산층입니까?라고 묻고 대답하는 건 '체감 중산층'을 조사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렇게 볼 때 80년대와 2010년대의 큰 차이는 이들의 준거집단이 달라졌음을 암시한다. 앞서 얘기했듯 80년대에는 사람들이 다 고만고만하게 살았고 이웃과의 실제 교류를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구석에 앉아서도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인스타그램의 친구들은 30만 원짜리 오마카세를 가고 신상 골프웨어를 입고 라운딩을 나가며 풀빌라를 빌려 새해를 맞이한다. 넘쳐나는 소비는 아주 특별한 일상 또는 동일한 정보의 재생산에 불과하지만 보는 이들에겐 이것이 아주 평범한 일이라는 착시를 일으킨다. 나는 꽤 괜찮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스마트폰만 켜면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슬픈 건 이런 삶에 '아니요'를 외치며 모범을 보일 집단이 없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과 분단이라는 재앙으로 스스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해 근대를 일궜다는 시민의식을 기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모범을 보일 상류층에는 반민족행위자 또는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요령껏 행동하여 계층 상승을 이룬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에겐 문화적 향취나 높은 도덕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중하층과 자신을 구분할 방법은 과시적 소비가 유일했다. 더 큰 집, 더 비싼 차, 명품 옷. 다른 선진국이 중산층을 정의하는 방식은 '자기만의 요리 레시피를 2개 이상 갖고 있는가'처럼 문화적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연봉이 얼마고 어느 정도의 자산을 갖추고 있느냐'와 같이 물질적인 기준만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사회는 좋든 싫든 각 계층의 사람들이 상위 계층의 소비와 행동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세속적 성공을 보장하는 필수 조건이 명문대 합격이고 성공을 인정받는 방식이 좋은 지역의 부동산과 비싼 자동차뿐이라면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것을 쟁취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인간 세상에선 어떤 일이 많이 발생하면 점점 당연한 일이 되고, 결국엔 옳은 일이 돼버린다.


성공의 조건이 매우 한정적인 데다, 계층상승의 기회가 희박하고, 그것이 세습되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경쟁은 모든 계층에서 치열할 수밖에 없다. 높은 놈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밑엣 놈은 올라가기 위해. 여기서 가장 절망적인 건, 이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족이기주의를 버리고 다른 계층보다 특권적 기회를 많이 향유한 상류층이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고, 나눔의 문화를 강조하며, 성공의 기준을 학벌과 소득의 서열이 아닌 다양한 가치관으로 대체하고, 노동의 진정한 가치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p.250)


이라는 무력하고 추상적인 말 뿐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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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종말은 없다 - 세계 부와 권력의 지형을 뒤바꾼 석유 160년 역사와 미래
로버트 맥널리 지음, 김나연 옮김 / 페이지2(page2)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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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점을 줘도 아까운 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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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의 종말은 없다 - 세계 부와 권력의 지형을 뒤바꾼 석유 160년 역사와 미래
로버트 맥널리 지음, 김나연 옮김 / 페이지2(page2)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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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짧은 서평들을 보다 보면 내가 그들과 같은 책을 읽은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석유의 종말은 없다>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지만, 이는 저자의 논지와 너무 거리가 멀다. 이 책은 최초의 석유 시추 시대부터 최근에 이르는 유가의 변동을 지루할 정도로 세세히 늘어놓는다. 어떤 의견을 뚜렷이 제시하기보다는 최대한 정확한 사실을 수집하여 박물관처럼 전시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 같다. 출판사도 초월 번역을 의식했는지 원제 <Crude Volatility>(유가 변동성)을 더 크게 써놨다.


석유도 시장의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한다. 그런데 석유에는 좀 특별한 점이 있다. 우선 수요의 측면에서 보면, 유가가 수요의 영향을 받는 건 맞지만, 수요가 반드시 유가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이유는 석유가 '필수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유가가 오른다고 갑자기 자동차를 안 탈 수 있나? 석유 부산물로 만들어내는 각종 생필품은? 유가가 소비 패턴을 완전히 바꿀 임계점에 도달한다 한들 석유 위에 띄운 이 사회를 순식간에 바꾸기는 어렵다. 가격이 하락할 때도 수요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름값이 떨어졌다고 갑자기 출퇴근 거리를 두 배로 늘리고 가스보일러를 석유로 대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수요는 오히려 소득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최근 수십 년간 석유 수요를 이끌어 온 건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였다. 반대로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연비가 좋은 차가 인기를 얻는 시기는 경기가 침체되어 소득이 줄어들 때였다. 2008년으로 돌아가보자. 그 해 1월 유가는 배럴 당 100달러를 넘어섰고 7월이 되자 150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뒤 가격은 60달러로 폭락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세계 경제를 묘지에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공급면에서도 석유는 특별하다. 그게 어디에 얼마나 묻혀있는지 아무도 모를뿐더러 시추 설비를 만들어 진짜 퍼올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기존 유정의 최대 산유량을 넘어 수요가 폭증한들 어디선가 새유정이 곧장 나타나 은혜의 비를 내려주는 게 아니란 말이다. 한편 한 번 구멍을 낸 유정은 병뚜껑을 닫듯 산유량을 0으로 만들 수 없다. 일단 뽑아놓고 나중에 파는데도 한계는 있다. 석유 보관 시설도 무한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가는 오를 때나 내릴 때나 브레이크가 없다.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으로 수요가 급증한들 기존 국가가 수요를 늦추지는 않으므로 가격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이제는 거의 한 덩이가 된 지구 경제가 동시에 침체를 겪을 땐 이미 파 놓은 유정을 닫을 방법이 없어 가격은 미친 듯이 떨어진다.


그래도 이런 가격을 어느 정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바로 '스윙 프로듀서'라 불리는 대장 산유국이다. 자신이 산유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국제 유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절대자! 저자는 그 유명한 록펠러가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해 미국 시장을 독점했을 때와 OPEC의 석유 공급 점유율이 최고였을 때 오히려 유가는 안정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독점은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라고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이 정반대의 대답을 하는 상황에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석유의 종말은 없다>는 내 독서 인생을 통틀어도 견줄 데가 없는 최악의 번역을 자랑한다. 사실 오타도 너무 많고, 문장이 뚝뚝 끊길 뿐만 아니라 의미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편집자가 존재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엉망이다. 출판 문외한이 원저를 읽고 감명받아 마음만 앞서 내놓은 책 같다. 나는 평소 알라딘의 추천 도서 목록에 깊은 신뢰를 가져왔고 이번에도 그 추천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책으로 인해 그 믿음은 완전히 박살 났다.


빵점을 줘도 아까운 번역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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