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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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샤바알샤바 1968년에는요


그러니까 샤바샤바알샤바 1968년에 올챙이에서 갓 사람으로 변태한 박민규는 36년 간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다가 갑자기 노트북 한대를 들고 삼천포로 간다. 그야말로 인생의 삼천포. 


삼천포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가 손에 쥔 건 역시 소설이었다. 그 소설이 비실비실 기 빠진 모기처럼 한 두번 앵앵대다 싸아~ 창틈을 뚫는 겨울 바람에 뎅강 날개가 끊어져 버렸냐고?


천만에!


이야기는 삼천포에 빠지면 그대로 끝인거다. 줄기를 놓쳤다는거야.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거지. 박민규도 8년 동안 그럭저럭 회사 생활을 해왔어.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가장이 되는 자격을 갖출 수도 있었다는 거지. 그런데 스스로 삼천포로 걸어 들어간다. 자기 인생을 갓길로 내몬 뒤 오히려 내면의 핵심을 건설해 돌아오다니, 보통 아이러니가 아냐. 이런 게 적장의 목을 베러 가는 각오라는 건가? 심각해지지 말자. 그저 될 놈은 된다는 거지.



싫다 싫어 천재의 탄생이라니

 

이외수 아저씨는 박민규의 출현이 '대한민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말했어. 소설가 김영하는 '박민규에게 뭔가를 빼앗아올 수 있다면 지금껏 우리 문학계에 존재한 적 없었던 그 놀랍도록 새로운 문장을 가져져오고 싶다'고 말했어. 나는 박민규가 거짓나부랭이, 쓰레기 같은 잡문들을 한껏 배설한 뒤 모여드는 똥파리들에 의해 숭배되는 사악한 소설가라고, 말하지 않아. 그는 천재야 천재. 정말, 당해낼 수가 없다니까. 

 

고작 삼천포에 갔다온 것만으로 어떻게 이런 글을 써냈냐고 묻지마라. 나와 당신의 무력이 초라하게 드러날 뿐이니까. 

 

농담. 사실 그는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나왔어. 

 

그러면 자, 신에게, 똑같이 문예창작과를 나오고 삼천포에 갔다온 당신이 왜 그와 버금가는 소설을 써낼 수 없는지 따지지마라. 신께서 가라사대,

 

그는 애초에 그렇게 되도록 태어났느니라.

 

이렇다니까.

 

 

내 길을 가로 막은 거대한 산

 

쑥쓰럽지만 고백할게. 나는 말이야, 소설가가 되려고 했어. 현실의 고단한 삶을 판타지 형식으로 날카롭게 풍자, 이 한국 문단에 끈적끈적 지워지지않는 흔적을 남기려 했거든. 그런덴 웬걸 박민규가 있네. 그가 1968년생이 아니라 1986년생이었다면 난 깔끔히 자살을 감행했을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청춘이 내 앞길에 고산처럼 버티고 있는 인생을, 도무지 헤쳐갈 용기가 없으니까.

 

박민규의 소설은 후기자본주의니 신자유주의니 미국의 패권주의, 취업지옥, 아니 때려치고 이 거지같은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가득해. 그런데 같은 비판을 해도 장하준, 케인즈, 마이클 샌델, 김규항 이런 사람들 책은 잘 안 보잖아. 어려우니까. 박민규는 안그래. 뻥안치고, 졸라 재밌어. 그런데 보는 사람들이은 신나겠지만 쓰는 사람은 숨이 턱턱 막혀. 어떻게 이런 걸 쓰지? 박민규 책을 몇 권 더 읽고 싶은데 엄두가 안나는 것도 당연. 그러고나면 앞길에 산이 아니라 산맥이 펼쳐질테니까. 아... 그래도 한번,

 

해보자.

 

가만히 있는다고 산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뉴턴은 자신의 업적에 대해, 그저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세상을 봤을 뿐이라고 했으니, 그럼 어디 한번 나도 올라가 볼까. 

 

 

빨간 꼬치는 500원 파란 꼬치는 300원이요

 

카스테라는 박민규의 단편집이다. 총 10편의 소설이 들어있다. 그 소설은 너구리봉봉과 카스테라와 신자유주의와 미국과 마이클 잭슨과 링고 스타, 교황 바오로 2세와 개복치, 우주여행, 세계오리배시민연합, 야쿠르트 아줌마, 외계인, UFO, 대왕오징어, 헐크 호건, 기린, 고시원, 인간, 지구, 별, 하늘, 푸시맨, 고뇌, 웃음, 개탄, 환희, 냉소, 변비를 분쇄기에 넣고 한꺼번에 갈아 정확히 10등분, 뚝뚝 잘라내 반죽한 어육 같아. 박민규는 이걸 꼬챙이에 꽂아 기발한 형식 실험, 아랫배를 쌔하게 찔러오는 설사 신호 같은 날카로운 묘사, 기가막힌 문장으로 우려낸 육수에 담그지. 바야흐로, 빨간 꼬치는 500원 파란 꼬치는 300원입니다.

 

잠깐 500원짜리 얘길 해볼까?

 

카스테라라는 소설은 말이야, 전생에 훌리건이었던 소음 심한 냉장고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 대학생 얘기야. 사람들은 20세기가 치열한 이념 대립의 전장이었다고 생각하지. 아니야. 20세기는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부패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시대'(p. 21)지. 냉장고가 발명됐으니까. 주인공은 자기가 환상적인 냉장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깨달아. 그리고 세상이란 각자가 '냉장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일(p.22) 뿐이라는 것도.

 

솔깃하지? 끝이 아니야.

 

그래서 주인공은 냉장고에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넣기 시작해. 이를테면 '걸리버 여행기'같은 명작 소설 말이야. 곧이어 그는 이 세상에 해악이 될만한 것들도 냉장고 안에 보관하기로 결심하지. 이를테면 '아버지'라든가 '미국' 같은 것. 거리에선 맥도날드가 사라지고(당연하지, 냉장고 속에 미국이 들어갔으니), 아버지는 자기가 위치한 칸의 온도를 육류에 합당한 영하로 맞춰줄 것을 요구하는데 갑자기, 

 

아니야 관두자 관둬.

 

아마 이렇게 끝내면 더 궁금해 미치겠지.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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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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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다시 읽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책을 만난다는 건 정말 행운이다. 벼르고 벼르다 십년만에, '칼의 노래'를 다시 집어 들었다. 





베어지지 않는 적들


임진년, 왜란을 맞은 후에도 조선의 당쟁은 멈추지 않았다. 육군은 파죽지세로 깨져나갔고 경상도의 수군은 유명무실했다. 임금은 서울을 버리고 평양을 버리고 의주로 향했다. 조선의 모든 땅이 으깨지고 백성이 부서질 때 단 한차례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으며 나라를 홀로 지킨 장수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었다. 왜군은 감히 이순신의 앞바다를 경유해 서해로 나아가지 못했고 나아가지 못한 적은 고립되어 썩어갔다. 조선이 패망하지 않은 이유는 이순신이었다. 왜란 6년째인 정유년 2월, 조정은 그런 이순신을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해 서울로 압송한다. 죄목은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기동출격을 거부했다는 것. 왕좌에만 연연했던 무능력한 임금과 무능력한 임금을 좌우로 흔들던 당쟁의 합작품이었다.


이순신이 나간 자리를 원균이 대신했다. 그해 7월, 아둔한 도원수 권율은 원균의 함대를 앞세워 가토의 머리를 자르러 갔다. 이순신이 없는 바다에서 원균은 참패했다. 삼도수군은 궤멸했다. 백의종군하여 남해를 정찰중이던 8월,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삼도의 수군을 통제해야할 이순신에게 더 이상 수군은 없었다. 남아있는 병사를 수습하여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라는 조정의 명령에 이순신은 이러한 장계를 올린다. 


'...신에겐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임금은 이순신의 벨 수 없는 적이었다. 또한 12척의 배로는 바다를 빼곡히 뒤덮은 왜군을 벨 수 없었다. 이순신은 벨 수 없는 적들을 망토처럼 두른채 12척의 배를 끌고 나가 330척의 적선을 마주한다. 역사는 이 전투를 명량 해전이라 기록했다.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해도 죽을 것이다


1596년, 선조는 의병장 김덕령을 잡아 죽였다. 그는 오천의 병사를 일으켜 영남의 여러 고을을 온전히 지켜낸 영웅이었다. 그 때 홍의장군 곽재우도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이후 곽재우는 군사를 해산하고 산으로 들어갔다. 선조는 사직을 잃을까 두려워했고 사직을 지켜준 신하 또한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의 사직이 적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 사직이 영웅된 신하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또한 두려워했다. 그는 두려움이 일때마다 닥치는대로 죽였다. 


임금은 차가운 북쪽의 땅으로 피난을 간 뒤에 자주 하얀 소복을 입고 대청에 주저 앉아 능욕당한 사직을 향해 울었다. 울음은 곧 장려한 문장의 교지가 되어 이순신의 앞에 내려졌다. 이순신은 교지의 울음 속에 자신의 죽음이 잉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살기위해 이겨야했는데 승리로 얻은 삶은 곧 그의 목에 내려지는 칼이었다. 그는 패해도 죽었고 이겨도 죽었다. 그는 죽어도 죽었고 살아도 죽었다. 이순신은 이 모든 싸움이 끝나는 날 자신이 죽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그에게 합당한, 온전한 사지를 찾아 바다를 헤맸다. 



인간 이순신


우리는 영웅의 후광에 취해 인간의 그림자를 놓칠 때가 많다. 거듭되는 말 속에서 인간은 사라지고 신화만이 남는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유난히 몸이 허약한 장수였다. 그는 설사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며 구토하는 남자였다.


4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나는 적들의 적의를 뚜렷히 느낄 수 있다. 자신의 친구를, 형제를, 부하를, 상사를 잃은 적의 적의를 말이다. 왜군에게 이순신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또한 적개심의 대상이었다. 왜군은 결코 이순신을 그냥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살의가 해일처럼 몰려드는 바다에서 고작 12척의 배를 끌고 330척의 적을 맞아야 하는 이순신은 어땠을까? 그 적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유유히 노를 저어 나갈 수 있었을까? 모든 걸 훤히 꿰뚫 수 있는 사람일수록 마음은 더욱 무참한 법이다. 김훈은 무참함을, 자기편의 적의와 적의 적의 사이에서 충만해가는 그 무참함을, 그 역시 무참한 마음으로 눌러담아 사라져버린 인간의 그림자를 쌓아올렸다. 그리스의 대가 니코스카잔차키스가 '최후의 유혹'에서 신이 아닌 인간 예수를 그렸듯, 김훈은 인간 이순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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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3-10-14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리뷰가 김훈의 문장으로 울립니다. 공감 버튼을 한번만 누를 수 있어서 아쉽네요.
한참 소설책은 중고로 내다 팔던 시절이 있었는데 도저히 이 책은 팔 수가 없었어요. 몇 해 더 지나 또 보고, 또 보고 또 볼, 그럴 좋은 책이라는 걸 아니까요. 오늘 다시, 그때 안 팔기를 잘했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한깨짱 2013-10-15 11:50   좋아요 0 | URL
김훈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면 여지없이 김훈 선생님의 문장으로 글을 쓰게 됩니다. 아류죠. 그 분 문장이 가진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 과찬을 해주셔서 창피하네요. 칼의 노래가 문학 동네에서 새로 출판되어 한 권 구입했습니다. 이 책은 절대 팔지 않을거에요. ^^
 
러프 소장판 1~6 세트 (묶음)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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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 미츠루의 대표작이라 하면 '터치(1981)'나 'H2(1992)'를 말해야 옳을 것이다. 다양한 스포츠를 그리긴 했으나 그의 전성기는 역시 야구 만화를 그릴 때였다. 대중이 흥분하기 쉬운 환경에서는 영웅을 그리기도 쉬운 법 아닌가. 아다치 미츠루의 야구 만화들은 일본의 야구 붐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는 대표작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최고의 작품을 묻는다면 역시 '러프(1987)'다. 수영과 다이빙이라는 비인기 종목을 다뤘으며 아다치 미학이 완성되기 이전의 작품이라는 점, 게다가 소장판본으로 여섯 권에 지나지 않는 짧은 분량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점들이 그 제목과(Rough) 닮은 구석이 있고 또 그것과 공명을 이뤄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분출하는 것 같아, 나에겐 'H2'나 '터치' 보다도 더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작품을 몇일 전 마지막권의 주문을 통해 완전히 소장하게 됐다. 오랫동안 5권까지만 보유해 왔으나 문득 생각이 나 마지막 6권을 채워 넣은 것이다. 책장에 꽂기 전 간만에 만화를 펼쳐보니 그 깔끔하고 담백한 선이 눈에 가득했다. 흩으러졌던 마음까지 저절로 추스려지는 기분이었다.






주인공 니노미야 아미와 야마토 케이스케는 할아버지 대에 철천지 원수가 된 두 집안의 손녀 손자다. 원수가 된 사연은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어릴 때부터 줄곧 원수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아미는 야마토 케이스케를 '살인자'로 여기며 성장한다. 그 분노는 상당히 커 매년 설날 야마토 케이스케에게 '살인자'라고 쓴 연하장을 보낼 정도. 그런 두 사람이 우연찮게 한 고등학교에서 만난다. 그것도 다이빙부와 수영부. 모른척 하고 살래야 도무지 그럴 수 없는 지척의 관계로서 말이다.


원수를 가까이서 보는 게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야마토 케이스케와 니노미야 아미는 둘 다 잘 생기고 예쁜, 착하고 뛰어난 학생들이었으니까. 얽히고 설킨 학창 생활 속에서 야마토 케이스케를 덮고 있던 분노의 껍질이 하나씩 하나씩 깨져나간다. 그 속에서 멋쟁이 남자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당연한 말씀. 상황은 케이스케 쪽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를 살인자로 부르며 미운 짓만 골라하는 여자애지만 그 아름다움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굴복하는 건 남자의 특권이자 의무 아니던가?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엔 독특한 집안 사정 보다도 더 큰 장애물이 있었다. 바로 나카니시 히로키라는 남자의 존재.


나카니시 히로키는 일본 최고의 수영 선수이자 어릴 때 부터 아미의 결혼 상대로 지목되어온 남자다. 케이스케의 할아버지 때문에 니노미야 집안이 힘들었을 때 도움을 줬던 게 나카니시 집안이었고 그런 인연으로 두 집안 사이에는 자연스런 혼담이 오갔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아미는 나카니시 히로키라는 물결을 타고 주어진 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에겐 이제 야마토 케이스케라는 특별한 일이 생겼다.


나카니시 히로키는 소년이 남자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파도였다. 그 파도는 한 쪽 발로는 꿈을 다른 쪽 발로는 사랑을 밟고 서 있다. 나에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거대해 감히 쳐다볼 수 조차 없는 존재를 라이벌로 맞아야 하는 소년의 무참함 뿐이다. 그러나 소년은 꾸역꾸역 전진해 나간다. 히로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파도에 불과하지만, 소년의 파도는 기어이 대양을 흘러가 철썩 대지를 때리고 마는 묵직한 힘이 있다.


마침내 두 남자는 마지막 경주를 위해 나란히 선다. 가슴을 울리는 출발 소리와 함께 오래된 워크맨에서 니노미야 아미의 고백이 흘러 나온다. 그 음성이 푸른 하늘에 사위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쯤 두 남자는 결승선에 다다랐을 테지만, 만화는 그 뒷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다치 미츠루는 과감한 침묵과 함축적 암시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침묵 속에서 말을 찾고 암시 속에서 의미를 밝혀야 하기에 그의 작품은 천천히 음미해야하며 서서히 스며들지만 그로써 자기도 모르는 새에 흠뻑 젖어 들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침묵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곰곰히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 알 것이다. 함축적 암시를 풀어본 사람이라면 그 암시가 얼마나 적합한 표현이었는지 깨달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때때로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이 그림으로 그려진 하이쿠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고작 17자에 불과한 한 줄의 시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걸어 오던가. 대사가 생략된 컷들엔 사실 대사보다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고 관련 없이 툭 던진 것 같은 말엔 수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말해지지 않은 것을 느끼는 것이 아다치 미츠루의 재미라면 느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다치 미츠루 미학의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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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각과의 만남 - 사유의 스승이 된 철학자들의 이야기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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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다루는 출판사치고 '철학 입문서'에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회사는 없을 것이다. 철학 입문은 그야말로 모든 인문 분야의 숙원이요 과제며, 정석이자 로망이다. 


이유가 뭘까? 


맛을 한 번 보고나면 결국 와구와구 게걸스럽게 탐하고 마는 철학 구매자들의 왕성한 소비욕은 비지니스맨이라면 도저히 놓칠 수 없는 기회일 것이다. 철학 입문서는쟁반 위에 잘라 놓은 시식 과일. 일단 한 번 맛만 보라니까. 그러고 나면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있을테니까!


한편 의무의 문제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아무리 발광해도 철학은 팔리지 않아. 니체는 신을 죽였고 대중은 철학을 죽였지. 의미심장한 얘기, 아무리 늘어놔봐도 따분한 말장난처럼 들릴 뿐이야. 그러니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얼음 위에서 속수무책인 북극곰이 되버린거다. 철학을 출판하는 사람들과 환경 보호 NGO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상실감을 공유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유야 뭐가 되면 어때. 비지니스 맨의 마음으로 책을 냈든, 아니면 철학에 대한 절절한 애정에서 출판을 했든, 어쨌든 이런 책들이 명맥을 유지한다는 건 철학을 사랑하는 흔치 않은 소시민으로선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다.







이 책은 '처음 시작하는 철학'의 속편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책을 본 적은 없으나 아마도 고전 철학들을 다뤘을 것으로 짐작한다. 왜냐하면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이 현대 철학자 스무 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영광스런 왕관을 받은 스무 명의 철학자들은 현대 철학사에 독보적 위상을 남긴 사람들과 여기에 더하여 작가의 선호도를 반영해 선정됐다. 면면을 보면 앙리 베르그송과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시작으로 후설, 마르틴 하이데거, 비트겐 슈타인을 거쳐 사르트르, 카뮈에 이르렀다 푸코, 들뢰즈, 데리다로 마무리 된다.


이 책이 좋은 점은 '위대한 생각'을 창조해낸 사람을 굳이 철학자로만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를 두 번째로 다룰 뿐만 아니라 인도의 정치인 마하트마 간디, 자신을 철학자로 부르길 거부했던 유대인 여성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 역시 철학자임을 거부한 알베르 카뮈, 인류문화학자 레비 스트로스를 이 위대한 명단에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여기에 윌러드 밴 오먼 콰인, 메를로퐁티, 알튀세르 같은, 실제로 위대하지만 대중에게는 그닥 위대하지는 않은 철학자들도 이름을 올린다. 위대한 생각엔 하이데거나 사르트르만 있는 게 아니라는 작가의 사자후라고나 할까. 위대한 생각이란 본디 편견과 차별의 바위를 깨부수며 거침없이 흐를 때 진정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법이다. 매번 그 나물에 그 밥인 현대 철학에 질린 사람이라면 이 반가운 면면에 새로운 흥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책 내용은 쉽고 가볍다. 한 명당 15페이지 내외를 할당해 내용이 지나치게 심화되는 것을 막고 한 명 한 명 빨리빨리 알아가는 재미를 선사한다. 물론 이 쉽고 빠름이 철학에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는 분명 일정량의 고통을 통해서만 흡수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아무리 세태가 변했고 그것을 원한다 할지라도 철학은 결코 한 입에 꿀떡 삼킬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한 권의 책으로도 말하기 부족한 내용을 15페이지로 줄여야 한다면 거기에는 분명 삭제될 수 없어 아우성치는 사상의 비명들이 존재할 것이다. 


더욱이 이런 책을 쓰다 보면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 어디서 어떻게 살았고 누구와 논쟁했고 누구와 사랑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들. 이렇게 5페이지를 빼고 나면 태산과도 같은 그들의 철학을 불과 10페이지에담아야 하는 불가능한 미션만이 남는다.


책 제목이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이듯이 오롯이 그 생각에만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순수한 사상의 덩어리만을 꾹꾹 눌러 담은 뒤 형틀을 돌려 생각의 정수, 그 마지막 한 방울을 짜내고 짜냈다면, 불가해 보이는 15페이지에도 충분히, 양질의 엣센스가 담기지 않았을까? 읽는 동안 나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해봤다.


이 책은 원래 '간략하게 보는 현대 철학사'라는 제목으로 출간될 수도 있었다고 한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 그 목적은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정확하면서도 접근 가능한 출발점을 제공해주는 지극히 단순한'(p. 7) 것이다. 이는 입문서가 내세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목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그 목표를 아주 충실히 달성하고 있기 까지 하다. 그야말로 '언'과 '행'이 일치하는 셈. 그러니 나의 불만은 본격적인 현대 철학은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가벼운 입문서에는 갈증을 느끼는, 참으로 어설픈 독자의 어정쩡한 불만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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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왼손 그리폰 북스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서정록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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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이 책을 손에 든 이유는, 역시 그 무시무시한 제목 때문이었다. 이런 제목을 보고나면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지. 사실 다자의 오사무도 우연히 들른 도서관에서 '인간 실격'이란 제목에 뜩, 걸려버려 지금까지 팬이 된 경우거든. '어둠의 왼손'을 봤을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던거야. 줄을 딱 땡기는 순간 어부의 뇌리에 꽂히는 월척의 느낌이랄까?


이 제목이 웬지 모르게 느낌 있는 이유는 제목을 듣는 순간 그 형상이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어둠과 왼손이라니, 평소엔 가깝게 지낼래야 도무지 그럴 수 없는 두 단어지, 게다가 어둠이란 걸 떠올리는 순간 머리 속은 그야말로 어둠으로 가득차게 되버려, 왼손은 이미 이 어둠 속에 사로잡혀 형체도 없어 사라지 버린다구. 하지만 형체를 떠올리지 못해도 다가오는 느낌이라는 건 있다. 발 뒤꿈치에 달라 붙은 그림자가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와 쿡! 등뒤를 찌를 것만 같은 공포, 스릴러, 서스펜스. 아마도 이 제목을 본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스릴러라고 생각할 거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둠의 왼손'은 SF다. 그것도 무섭지 않은 SF. 작자는 어슐러 르귄이라는, 'SF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1순위'라고 평가받는 대문호다. 직전에 읽은 책이 바로 같은 SF 장르인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마치 사막을 걷는 듯한 무미건조한 문장에 마음이 바짝 말라 있었던 터라 르귄의 문장이 더더욱 가슴 깊이 스며들었던 것이겠지만, 이 책 '어둠의 왼손'은 펑펑 눈이 내리는 겨울 행성 '게센'을 그리고 있음에도 문장 하나하나가 오히려 포근하고 보드라웠다. 아, 과연 대 문호라 불릴 만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적어도 한 페이지 건너 한 번씩은 가슴을 쑥 파고 들어왔다. 







배경은 눈과 얼음의 행성 '게센', 이곳의 주민들은 한 몸에 남녀 양성을 모두 갖고 있다. 26일마다 돌아오는 '케머기'에 남자 혹은 여자의 성을 스스로 선택해 사랑을 나누고 자식을 갖는다. 주인공 겐리 아이는 일종의 우주 연합이라고 볼 수 있는 에큐멘의 대사로서(지구인) 게센과 교역 협정을 맺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온다. 


게센인들이 겐리 아이의 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과 그 비참한 최후를 눈에 새긴 듯이 기억하는 우리인지라 에큐멘을 대하는 게센인들의 신중함과 머뭇거림을 답답하게 여길수도 있겠으나, 어디 신문물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스르르 스며들 수 있는 것이겠는가? 모름지기 생명이란 본능적으로 새로운 것에 저항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저항은 점차 두 가지로 분화된다. 하나는 자극, 또 하나는 적대다. 자극을 택한 집단은 그것을 새로운 기회라고 생각하는 반면 적대를 택한 집단은 그것을 자기 생명의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어느 사회고 이 두가지 의견이 충돌하기 마련인데 후자로 중론이 모아진 사회치고 그 끝이 아름다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에큐멘은 제국주의 시대의 선진국처럼 무력으로 강화를 요구하는 집단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점잖음이 오히려 자신의 대사 겐리 아이를 위험에 빠뜨리고 만다. 겐리 아이는 다가온 새 시대가 자기 자리를 지켜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놓고 주판알을 튕기던 정치인들의 음모로 강제 노동 수요소로 보내진다.







행성 게센의 두 나라 '카르하이드'와 '오르고린'에 대한 묘사가 냉전 시대의 미국과 소련을 닮아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둘의 대립이 결국 겐리 아이라는 '제3의 길'에 의해 봉합된다는 점, 마지막으로 게센인들이 양성을 모두 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생명체라는 점에서 '어둠의 왼손'은 단순한 SF를 넘어 풍부한 의미와 해석을 지닌 소설로 나아간다. 그 의미는 부질없는 이념의 대립과 갈등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고 지독할만큼 고착되버린 남녀 성역할에 대한 재고의 촉구일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의미의 경중에 따라 소설의 위대함을 측정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읽는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자의 가슴에 또렷한 흔적을 남기는 소설이야말로 진정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함박눈이 내린 다음날 아침,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밭에 오롯이 새겨져 있는 순결한 발자국처럼 말이다. 


강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된 겐리 아이는 지구인에게는 너무나 혹독한 게센의 겨울에 생명을 바쳐 견디고 있었다. 죽음이 목전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카르하이드'의 옛 재상 에스트라벤에 의해 구출된다. 에스트라벤은 국가의 이익보다 평화를, 게센인보다 전 인류를 더 사랑했다는 이유로 카르하이드에서 추방된 정치인이었다. 겐리 아이는 처음에 에스트라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끝없이 펼쳐진 얼음길, 빙하 위로 우뚝 솟은 두 개의 화산, 휘몰아치는 눈보라, 그 위에 간신히 뿌리 내린 한 움큼의 텐트 안에서 두 외계인은 서로의 입장과, 생각과 그리고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자기 손바닥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에서 이제 그 둘은 서로에게 완전히 의지해 걸어나간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본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두 사람은 내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와 한 발짝 한 발짝 고귀한 발자국을 남기고, 나는 두 사람이 어깨에 맨 것이 사실은 침낭과 텐트와 식량이 든 가방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역사였음을 깨닫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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