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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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연


많은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지금까지 읽어온 모든 책들이 한낱 장난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그 책은 이미 수년전부터 존재해왔으나 나는 그것을 까맣게 모르고 살아오다, 책이 이 땅의 빛을 본지 딱 10년이 되가던 2013년 어느 겨울밤, 비로소 지금까지 읽어온 모든 책들이 한낱 장난처럼 느껴진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방법으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쓰려한다. 


*이 리뷰는 리뷰의 대상으로 삼은 해당 작품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뒤 그저 한 두개의 단어를 바꾸는 방식으로 씌여졌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이야기의 마왕


훗날, 문학동네소설상에 의해 그 존재가 만천하에 알려져 세상에 흔히 '이야기의 마왕'으로 소개된 그 남자 소설가의 이름은 명관이다. 월드컵의 열기를 한참 우려먹고도 그 찌꺼기를 말려 만찬을 해먹던 2003년, 그는 문학동네신인작가상에 의해 단편 소설 하나를 낳는다. 그 소설은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심사위원들을 들뜨게 할 정도로 밀도 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수상을 한지 100일 채 지나기 전에 '새로 쓴 소설은 없느냐'고 묻는 출판 관계자들이 수 백명을 넘어섰다. 제도권 교육을 통해 글쓰기를 배우지 못했던 그는 자신만의 세계 안에 독특한 작법을 만들어갔으며 한국과 미국의 소설, 만화와 아서 코난 도일, 수호지와 삼국지 같은 영웅담으로부터 소설을 쓰는 모든 방법을 배웠다. 열망은 있으나 재능은 없는 수 천, 수 만의 소설가 지망생을 낙방의 우울과 자기멸시의 지옥으로 빠뜨린 문학동네소설상이 발표 되자, 때마침 장편 '고래'를 써낸 그는 수상자로 선정되어 학계와 세간의 관심에 수감되었다. 영어(囹圄)의 시간은 화려했으며 그는 신문에 게재된 수상자 발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야기의 마왕'으로 우뚝섰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였다.



고래


명관은 원래 영화판에서 굴러먹던 한량이었다. 되지도 않는 영화 시나리오에 매달리느니 소설이나 써보는 게 어떻냐는 동생의 권유로 '그럴까?'하며 돌아선 것이 시작이었다. 본디 희대의 이야기꾼이자 명성 높은 구라꾼에 그 바닥에서 상대가 없는 달필가인 동시에 호가 난 이야기광이며 모든 기담괴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대중소설가인 그는,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난관을 이미 정복하고 있었다. 그는 온갖 술수에 능했으며 복잡한 이야기들을 한 번은 날실, 한 번은 씨실로 꾀어 어느덧 아름답고 정교한 문양의 수제 카페트로 지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가 글을 쓰는 방편은 대부분 일반적 소설의 작법, 그 테두리 바깥에서 행해지는 일이었으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예술이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린지 지나치게 오래되면, 아뿔싸 이제는 그 자리에 예술이 있었는지도 모를만큼 범상한 것이 되고 말아, 세상은 반드시 이러한 새로운 작품을 필요로 하게 마련이었다. 


그가 지은 장편 '고래'는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딱 맞춘 듯한 소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과소평가된 바가 없지 않은 바, 말하자면 이 작품은 기존의 줄기에 뿌리를 내린채 독특하게 가지를 뻗은 작품이라기 보다는 글쎄, 아예 다른 종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되며, 어리석은 머리를 굴리고 굴려 보다 적합한 표현을 찾는다면, 바로 그 제목 '고래'와도 같이 어느날 문득 바다 한가운데에 불쑥 떠올라 신비하고 낯선 생명력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강력하게 뿜어대는, 진정 괴물과도 같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게 옳지 아닐까?


그는 역사적 시간 위에 허구의 공간을 걸어두는가 하면 도저히 현실감이 없는 설화적 인물들로 그곳을 가득채우기도 한다. 이를테면, 시간적 배경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느라 닥치는대로 사람을 잡아죽이는 와중에도 틈틈히 시간을 내 수 많은 여자를 따먹곤 하던, 검은 썬글라스가 잘 어울리던 우리 장군님의 통치 시절인데, 배경은 평대라는 듣도 보도 못한 미지의 공간이며, 그곳엔 사상 최악의 추녀 박색의 노파, 노파의 딸이었으나 그녀가 휘두른 부지깽이에 애꾸가 된 뒤 벌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소녀, 만나는 남자마다 불행에 빠뜨려 거지로까지 몰락해 여자로선 참으로 기구한 팔자였다고 할 수 있으나 훗날 돈벼락을 맞아 평대 최고의 사업가가되고 더 훗날 그 배짱과 오만으로 인해 남자로까지 변하게 되는 금복, 그리고 7세에 이미 100키로가 넘었던 그녀의 딸 벙어리 춘희, 이 밖에도 온갖 영화와 만화, 옛날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인물들이 양산박에 모인 108 도적들마냥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채 평대로 기어들어오는 것이었다.


고래는 일견 시정잡배들이나 입에 올릴법한 너절하고 더러운 이야기들의 쓰레기장처럼 보이면서도 그 안에 인간의 만사를 집약해 놓은 듯한, 마치 하나의 우주처럼 군림하는 독특한 권위를 내뿜어 책 깨나 읽는 사람들치고 고래의 마력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명망 높은 선생님들은 도무지 그 힘의 정체를 알 수 없어 한결같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누군가에게 그는 말하자면 솜씨 있고 믿을 만한 소설가였다. 



비밀


나는 고래의 재미, 그 근본을 밝혀야만 두려움이 멈추는 명망 높은 선생님이 아니며 그 비밀을 알아내 생활적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만 재미를 느끼는 감각만큼은 꽤나 타고난 면이 있을 뿐더러 불행히, 그 원인을 탐구하려는 기벽이 있어 정말로,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고래는 왜 그토록 재미있는 걸까?


누군가는 고래가 나의 고립된 생활 속에서 피어난 무료함을 달래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는 이야기에 반응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유희적 욕구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느라 닥치는대로 사람을 잡아죽이는 와중에도 틈틈히 시간을 내 수 많은 여자를 따먹곤 하던, 검은 썬글라스가 잘 어울리던 우리 장군님의 통치 방식을 풍자했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 어떤 해석도 충분한 설명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단지 무료함을 달래는 수단이라고 하기엔 내 주변에 너무나 많은 만화와 영화가 있었으며 단지 유희라고 하기엔 너무나 고된 일이었으며(무려 455페이지의 책), 또 단지 풍자 때문이라고 하기엔 그 강도가 지나치가 약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고래의 재미를 두고 우주의 비밀을 신화, 즉 이야기로 설명하고자 했던 초기 인간의 종교적 태도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누런 종이 위에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을 그저 정해진 규칙에 따라 늘어놓을 뿐인 글쓰기 안에 어떤 종교적 의미가 있는지도 설명할 길이 없다. 


그저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이 무수히 섞이며 전진하는 누런 종이에서 나는 왜 그토록 기괴한 재미를 느꼈던 걸까? 나는 이 종이를 수도 없이 반복해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걸까? 감동적이리만치 순정하고 치열했던 내 독서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고래dml 넓은 등짝 위에 섬뜩하고 폭력적인, 그 잔인한 작살을 꼽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뜨거운 바다를 가로지르는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독자 여러분, 안타깝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여기에 앉아 이야기가 계속 되는 걸 지켜보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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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
윤대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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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미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 미란. 갓 제대를 한 뒤 여행을 떠난 제주도에서 만난 여자였다. 미란은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두려웠던 어린 소녀였고 그녀는 우물쭈물 다가왔다 홀연히 떠났다. 짧았던 것 만큼 여운은 깊었다. 이후 남자는 사법고시에 합격해 번듯한 청년이 되지만 마음 한구석은 뻥 뚫린 채 껍데기만을 안고 살아야했다. 난파된 배의 잔해들처럼, 바다 위에서 부유하듯.


부유하던 잔해를 건져 올린 건 또 하나의 미란이었다. 땅 밑에 굳건히 뿌리를 내린 듯한 육지같은 여인. 이후 남자는 새로운 미란과 결혼을 한다. 하지만 신혼여행을 떠난 빈탄에서 태초의 미란과 재회한 후 남자의 삶은 다시 안개 속에 휩싸이게 된다. 



타자는 곧 자신이다


누군가를 잊는 게 괴로운 이유는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진정한 타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내가 인식한 타자'가 있을 뿐이다. 나와 관계를 맺는 타자는 곧 '나'라는 고치로 똘똘 쌓여 마음 속에 저장된다. 우리가 타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수 많은 사람들은 사실 내가 쌓아놓은 내 자신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뜯어 내는 게 내 살을 뜯는 것 처럼 아플 수 밖에.


남자 주인공 연우는 태초의 미란과 재회하자 자신의 마음 속에 여전히 뻥 뚫린 공동이 자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미란과 결혼하여 몇 년을 살았고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음에도 결국 연우는 이국땅의 미란을 찾아 한국을 떠난다. 그러나 연우는 그것을 알아야했다. 자신의 그런 행동이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남편으로 존재했던 미란의 타자를 박살낼 수 밖에 없음을. 자신의 공동을 메우기 위한 여행이 남겨진 사람의 마음 속에 또 하나의 공동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말이다. 



타자로 인한 슬픔은 오로지 나의 책임인가?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연우가 부인 미란의 고통에 그토록 담담할 수 있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진짜 타자'와 '나의 타자'의 괴리로 인한 슬픔은 결국 '나의 타자'를 만든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오히려 연우는 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로 작정했을 땐 그 모든 걸 담담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를 되묻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란은, 


'당신은 자신을 이해시키려고하지 않으니까요. 좀처럼 그런 기회를 주지도 않죠. 당신은 저에게 당신이 바라는 바를 구체적으로 얘기한 적이 없어요.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한 일이 단 한 번도 없단 말이죠. (중략) 당신은 또 저에게 요구하지 않는 대신 저에 대해서도 조금씩 이해하기를 포기하더군요.'(p. 314)


라고 항변한다. 


예전의 연우는, 그러니까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미란을 만난 그 때의 연우에게는, 어쩌면 타인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며 끝까지 이해해 보겠다는 각오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각오는 홀연히 사라진 미란으로 인해 산산히 박살나 버렸다. 그리고 그는 어른이 된다. 단단한 껍질을 둘러싸 마음의 공동은 가렸으나 덜어낸 무게까지는 채울 길이 없어 그저 부유하듯 살아갈 수 밖에 없는 남자. 연우는 두 명의 미란 그 누구와도 완전한 사랑을 이루지는 못한다. 태초의 미란은 끝내 연우의 공동이 되기를 바랐고 연우 자신은 또 다른 미란의 공동이 됐기 때문이다.



그후로 연우와 미란은


의외로 평범하게 잘 살았다. 삶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잔잔한 파도를 오르내리며 순항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변함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마음은 무뎌진 신경을 축복처럼 받아들인다. 타자니, 이해니, 사랑이니 하는 것은 이제 자그마한 흠집도 내지 못한다. 남자는 들키지 않게 바람을 피우고 적당히 흐물거리며 세상과 타협한다. 여자는 여자를 버리고 엄마와 주부가 된다. 도저히 유지될 수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의 관계를 단단히 묶어 주는 건 아이다. 아이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럭무럭 자란다.


인간은 모두 이렇게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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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3-12-03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회가 만들어 낸 압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게 결국은 자기 자신의 길을 홀로가는 존재일뿐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정당화하며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너무 깊게 들어갔나요?
저는 너무 심각한게 문제입니다.^^

한깨짱 2013-12-03 22:06   좋아요 0 | URL
요즘같이 경박한 시대에 심각한 건 오히려 축복일 겁니다. 저는 때때로 타인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질 때가 있는 데 그럴 때 마다 심각한 우울에 빠져요. 얼마전에는 사람을 만나기가 싫어 카카오톡도 지웠어요. 별일 없더라구요. ㅋㅋ
 
지구영웅전설 -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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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바나나맨!


누추한 나라엔 누추한 국민이 산다. 누추함은 숨길 수가 없어, 본인이 보기에도 한심하고 답답하니 그들은 으레 슈퍼한 것을 꿈꾸고 나아가 그 슈퍼한 것에 스스로 복종하려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이 소설은 누추한 국민 중에서도 가장 누추했던 한 소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소년은 어느날 자살을 결심한다. 자신의 누추한 실존을 비관해서가 아니다. 펜트하우스를 보다 담임에게 걸렸다. 


젠장. 


더럽고 질퍽한 추문이 자신의 인생을 파멸시키기 전에 소년은 스스로 자기 삶을 파괴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냥 자살을 했다간 '글쎄 펜트하우스를 보다 걸려서...', '천박하고 더러운 꼬마 녀석. 죽어도 싸지' 같은 뒷말이 나올 우려가 있어, 그러니 완벽한 자살을 꾸며야지. 음욕은 충만했지만 결코 멍청하지 않았던 소년은 자신의 자살을 그 시절 종종 일어나곤 했던 해프닝으로 꾸미고자 빨간 망토를 두르고 가슴팍에 S를 새긴 뒤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바람이 분다. 

망토가 휘날린다. 

떨어진다. 


죽음이 얼굴을 강타하기 직전, 그러나 부우웅 몸이 떠오르는 게 느껴진다. 눈을 뜨니 나를 안고 있는 건 무려 슈퍼맨. 누추한 국민은 스스로 죽을 권리도 없단 말인가?


슈퍼맨의 슈퍼한 배려로 정의의 홀에 도착한 소년은 각종 훈련을 거친 뒤 '슈퍼 히어로'로 재탄생한다. 슈퍼맨, 슈퍼한건 백인만 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요? 


맞아. 


하지만 너는 더 이상 누추한 황인종이 아니야. 너의 영혼은 이미 새하얗게 탈색됐어. 중요한건 마음이잖아. 육체를 지배하는 건 정신이니까. 그러니까 너는 오늘부터 슈퍼 히어로, 


바나나맨 이야.



나는 지구의 왕이 될거야


미국은 뭘 먹은 걸까? 세계의 경찰, 군대, 은행, 기업을 넘어 지구의 왕이 되려하니 말이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박민규는 누추한 국가의 국민이지만 정신은 고고한 소설가다. 폭로를 꿈꿀 수 밖에. 소재는 뭐가 좋을까? 만화, 슈퍼 히어로! 그래 그런 만화는 접근이 좋고 파급력이 강해. 특히 이데올로기를 감추기에 적격이지. 애들이 보는 만화에 그런 게 있을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사실은 은밀하고 더 철저하게 파고드는 데도. 그러니 알려줘야겠다. 거기에 어떤 의도가 숨어 있는지를. 


'지구 영웅 전설'은 DC코믹스의(전통적으로 공화당(보수)을 지지한다) 슈퍼 히어로들이 사실은 지구를 포식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음을 유쾌하게 드러내는 소설이다. 이를테면, 슈퍼맨의 슈퍼함은 미국의 힘, 즉 U.S. Army를, 배트맨의 재력은 IMF, 바다의 왕자 아쿠아맨은 WTO, 그리고 원더우먼의 섹슈얼리티는 미국의 사악한 의도를 숨긴 각종 문화 산업을 뜻한다는 거지.


그럼 바나나맨은 뭐야?


바나나맨의 첫 임무는 원더우먼의 탐폰을 사오는 것이었다. 이름부터가 삼류야. 어딜 봐도 슈퍼 히어로는 아니지. 그럼 뭘까? 뭐긴, 


한국이지. 


겉은 노랗지만 속은 하얀 바나나는 복지에서 문화, 경제, 정치, 의료까지 미국을 모방하려 애쓰는 한국의 모습을 상징한다. 미국이라는 슈퍼 히어로 옆에서 어색하게 포즈를 따라하는 삼류 히어로. 삼류 히어로는 최선을 다해 시장을 개방하고, 불리한 협약에 사인하고, 군대를 파견해 슈퍼 히어로의 환심을 산다. 동아시아 최우방국이라는 지위를 놓고 일본과 피터지는 외교전을 벌이기까지 해. 결정적인 순간엔 결국 '까지 말고 꺼져 있어' 밖에 안되면서 말이다.



선생님들, 당황하지 마세요


'까지 말고 꺼져 있을 수 밖에 없는 나라'의 소설가 박민규는 이 소설로 제8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이라는 꽤 큰 상을 받는다. 그러나 상을 수여한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석연치 않다. 이 소설은 진지한 고민과 모색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이류 정치 평론가의 도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 참, 그런데 그렇게 많은 소설과 정치 평론이 동일한 도식을 답습하고 있는데도 이 세계는 왜 변하지 않을까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라구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어요. 아마 앞으로도 모를 겁니다. 그걸 아는 국민들이 뼛속까지 미국적인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뽑을리는 없으니까요. 모르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끊임 없이 답습해야죠. 그들이 알 때까지.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아선 곤란합니다. 대중이 알아야 되요.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정말 최고 아닌가요? 무엇보다 재미있으니까요. 재미있으니까 통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진지한 글들은 그 위에 계속 그렇게 계십시요. 사람들은 죽었다 깨놔도 한 방에 그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지구 영웅 전설' 같은 소설을 잡고 천천히 올라가야 해요. 그러니 선생님들, 탓하려면 재미없음을 탓하셔야 합니다. 다른 건 볼 필요도 없어요. 


오히려 저는 이 소설의 에피소드 늘어놓기 식 구성이 중반 이후 축 쳐진 뱃살처럼 긴장감을 잃어 지루했다는 지적을 하고 싶네요. 160쪽이 갓 넘는 소설이었기에 망정이지 300쪽이 넘었다면, 아~ 생각만해도 아찔합니다. 그러니 박민규 씨라고 불러야 할지 선생님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설가님, 재미있게 써주십시요. 도스토옙스키 운운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마세요. 누가 무슨 말을 한다해도 당신은 계속 이렇게 써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저는 끝까지 읽을 겁니다. 


글 쓰는 사람에게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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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3-11-25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우연이에요. 제가 오늘 몇 년 전 '꿈꾸는 다락방'을 들었거든요. 이동진 씨가 진행한 심야 라디오 프로였는데, 거기 '박민규' 편을 들으며 출근했어요. 아침 먹으며 지구영웅 전설에 대한 옛 기억을 더듬었는데 여기서 다시 마주치네요. 반가워요. 박민규 작가님 참 좋아하는데 신작 소식 없는지 궁금하네요.^^

한깨짱 2013-11-25 14:26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마노아님~ 저는 최근에 박민규 작가님 소설들에 빠져서 몰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안타깝게도 신간 소식은 못 들어봤네요. 이 분 소설을 읽고 있으면 웬지 모르게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얻곤 해(좋은 뜻으로)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금서의 역사 - 역사 속 억압된 책을 둘러싼 모든 이야기
베르너 풀트 지음, 송소민 옮김 / 시공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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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해요 당신들 마음


문명의 진보는 문자에서 나왔다. 사상이, 지식이 한 개인의 생리적 한계를 넘어 영원불멸의 책으로 태어났을 때 문명은 비로소 그 위대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세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성경은 로마를 무너뜨렸고 프랑스 인권선언문은 계급 사회를 끝장내 버렸다. 그 위험을 알았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기를 쓰고 책을 뺏으려 했다. 권력이 집중화 될 수록, 잃을 게 많을 수록 그들은 금지를 강화했다. 심지어 교회는 수 천년간 일반인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막았다. 그들이 성경으로 로마를 무너뜨린 것처럼 역시 성경으로 교회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옳았다. 1517년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그 뚱뚱한 목사가 처음으로 한 일은 독일어판 성경을 인쇄해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일이었다. 뿡야!



진지한 얼굴로 당연한 얘기하기


이 책은 요한 아담 베르크의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한다. 


책을 금지하는 일은 금지다. 그 일도 정당하다면 세상에 결실을 거둘 만한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요한 아담 베르크, <책 읽기의 기술>, 1799)


여기까지만 했다면, 대범하다, 훌륭해, 뭔가를 선언하려면 이정도 확신은 있어야지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뒷 얘기를 붙여버리는 바람에 하나마나한 말이 돼버렸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권리 중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전달하고 그에 대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발언권에 대한 침해는 그것이 무엇이든 금지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한 모든 분쟁은 그 표현이 상대방의 권리를 침해했는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얼버무릴 수 있을만큼 간단하지 않다. 그러니 입장을 확실히 하라고. 모든 걸 금지하자는 건지 아니면 모든 걸 허용하자는 건지.


물론 나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다. 심정적으로야 모든 억압은 악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지만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에 일관된 입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자유는 정말 절대적인가?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들, 진보적인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 상식적인 사람들의 대다수는 어떠한 경우라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장하준 교수의 '착한 사마리아인'을 금지한 국방부를 무식한 머저리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아마 말씀으로 꾀어 여신도를 성추행한 정명석 교주의 책을 금지하는 데는 찬성할 것이다. 장하준 교수의 자유가 권리로 인정되는 데 반해 왜 정명석 교주의 자유는 그렇지 않을까? 


자유라는 면제부를 얻기 위해선 최소한의 '질'이 뒷받침되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좋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검열 기관을 둬 수준에 미달하는 책과 언론, 잡지를 금지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 되야한다.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종교적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신도의 자유를 침해했다면 금지되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기독교 자체를 금지하지 않는 것일까? 기독교적 믿음이란 자유를 권리로 가진 사람들이 그 자유를 신께 반납해 오직 신의 말씀대로만 살겠다는 다짐 아니던가? 자유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경우를 인정한다면 우리에겐 정명석 교주의 합의된 강간(?)을 비난할 근거가 없다.


절대적인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적용되기 십상인 자유는, 어쩌면 지나친 대접을 받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근대 사회의 근본 가치라는 믿음하에 맹목적으로 추구되어온 신성불가침의 영역. 자유를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사상이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건드릴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가치를 근간으로 하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자유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중세로 날아가 사람들에게 자유를 원하냐고 물어보자.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자유가 뭔지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배불리 먹고 따뜻히 자는 것 뿐입니다. 자유가 그것을 보장한다면 우리는 자유를 원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자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30년째 '잘살아 보자'는 '독재자'의 망령에 홀려있는 한국인처럼 말이다.



베르너 풀트의 금서의 역사


는 '책을 금지하는 것은 금지다'라는 요한 아담 베르크의 한 문장만을 가슴에 안고 우직하게 달리는 책이다. 그의 조소 속에서, 또 비아냥 속에서 우리는 금서에 목숨을 거는 무지한 권력의 코미디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뒷문장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뤘다면,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권리를 해치는 자유는 무엇이고 해치지 않는 자유는 무엇인지 얘기해줬다라면, 좀 더 괜찮은 책이 되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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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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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외딴방'은 신경숙의 자전소설이다. 17세의 소녀로 1979년을 살아야 했던 여공의 이야기. 박정희라는 호환마마가 죽자마자 전두환이라는 악귀가 나타나 무고한 시민들을 아무 이유없이 찢어 죽였던,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 그 시절 불의에 침묵하며 호위호식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격동의 세월이라고 얼버무리며 과거의 헤프닝 쯤으로 붙들어두고자 하는 시간을, 신경숙은 '외딴방'이라는 소설로 써냈다. 


그러나 외딴방은 흔한 노동소설이나 민중문학은 아니다. 신경숙은 그것만이 세상을 구할 유일한 길이라는 듯 모든 걸 내팽개치고 불길 속에 뛰어드는 남자와는 달리, 파괴된 잿더미에서 살아남은 세계를 찾아 가슴에 품는, 그런 모성의 눈으로 그 시절을 훑어본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갖는 힘


작가 자신이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라고 했듯이 외딴방은 보통의 소설같지 않다. 그 시절 신경숙의 일상을 따라 천천히 흐를 뿐 '기'가 '승'을 만나 '전'하다 마침내 '결'해지는 사건의 전개가 없다. 


외딴방을 읽고 있으면 작은 배 한대가 바다에 떠 있는 풍경이 그려진다. 그렇다면 수평선 위를 새카맣게 물들이는 태풍을 바라보며 손을 꽉 쥐게 되거나 산더미 같은 파도를 눈 앞에 두고 마음을 졸이는 상황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데, 이 작은 배는 그저 하늘하늘 물결을 따라 천천히 흔들릴 뿐이다. 그러나 그 미동에 방심하여 넋을 놓다 보면 어느새 외로운 배 하나 어두운 바다 가운데 망망히 떠 있다. 너무 크거나 화려해서가 아니라 오직 홀로 대양을 지탱하기에 그 배는 눈에 새겨진다. 표류하는 듯 보였던 배는 이윽고 뱃머리를 고정시켜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방향을 정한 배가 천천히 노를 저어 가야할 뱃길을 더듬을 때 이 소설같지 않은 소설은 손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소설이 되고만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옛날 옛적 이발사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고 완전히 탈진,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았을 때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고 한다. 일생동안 필사의 힘으로 틀어막은 마음의 문을 열어 모든 걸 와르르 쏟아 냈으니, 그 순간 비로소 삶이 해소된 거겠지. 


신경숙이 유명한 소설가가 된 후에도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쓰지 않은 이유는 친구들이 다그치며 묻듯 '그 시간이 창피했기' 때문은 아니다. 작가에게 외딴방은 봉인된 기억이었다. 신경숙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을 뚝 떼어 상자에 담아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 놓는다. 그러나 기억은 생각처럼 깨끗하게 잘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떨어진 부스러기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다시금 살려낸다. 작가에게 그 부스러기는 가난했던 과거에 대한 수치도 아니고 산업체 특별한 야간 학교를 다녀야 했던 창피도 아니다. 그것은 희재 언니, 어둡고 좁은 방에 웅크리고 살면서도 소박한 꿈을 잃지 않았던, 그러나 사랑했던 사람들의 외면 속에서 그 모든 꿈을 잃고 사라져야 했던 가련한 영혼에 대한 기억이다. 


199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때의 이야기를 하리라 마음 먹은 이유는 그녀의 문학이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삶에 부딪혀 자꾸만 자꾸만 그 시절로 되돌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말마따나 '문학은 삶을 앞지르기는 커녕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조차 없다'. 희재 언니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혀 작가의 삶을 붙잡고 있다. 삶이 나아갈 수 없기에 그 족적을 따라야 하는 문학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쓰기다. 써야한다.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 쓰기는 이발사의 고백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봉인된 기억을 다시 내 삶에 끼워 넣는 일이며 잘려진 길을 메워 다시 삶을 나아가게 하기 위한 일이다. 오래만에 제자리를 찾은 기억은 삐걱대며 아픔을 줄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그녀를 죽이지 못한다. 이발사가 탈진해 죽었다면 신경숙은 오히려 힘을 얻는다. 고백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비로소 온전한 나를 회복한다.



2013년의 구로공단


신경숙 작가의 아픈 기억이 웅크리던 구로공단은 더 이상 예전의 그 공단이 아니다. 공단은 디지털단지로 바뀌고 가리봉은 가산으로 환골탈태했다. 여공이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생산 계장으로부터 강간을 당하는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다.


70, 80년대에 새카맣게 몰려가던 공원들의 물결은 2000년대에 이르러 IT기업에 다니는 사람들로 대체됐다. 나는 그 사람들 중 하나로 3년간 구로디지털단지로 출퇴근을 한 적이 있다. 지하철 2호선의 높다란 창을 통해 바라보면 신경숙 작가가 겪었던 일들이 정말로 헤프닝이 아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그곳은 너무나 많이 변했다. 외관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 그곳의 회사원들 중 시골에 있는 동생을 서울로 데리고 올라와 고등학교에 보내는 게 꿈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70, 80년대의 공원들에게 그것은 꿈이고 희망이었다. 그들은 2만원이 채 안되는 월급으로 방세를 내고 찬거리를 사고 고향집에 돈을 부쳤다. 대한민국은 그런 사람들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왔다.


한가지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곳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산업 역군'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70, 80년대의 주력 산업을 지탱했듯 우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주력 산업을 지탱한다. 어쩌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그 시절 외딴방에 모여 살았던 산업 역군들은 같은 건물에 살고 있음에도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구로디지털단지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이 오면 그들은 시커먼 잠바를 뒤집어 쓰고 입을 꾹 다문채 제 갈길만을 갔다.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않기에 그 시커먼 잠바 속에 어떤 고민이 있는지, 나는 결코 알지 못했다. 소설을 읽고 나니 그 무리 속에 모습만 조금 달리한 희재 언니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아니 어쩌면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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