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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라는 회사를 가지고 난리다. 그들이 좋은 디자인을 할 때는 눈을 내리 깔고 마이너 취급을 하더니 돈을 잘 번다니까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이제 애플은 시멘트 회사 사장에서부터 국가 정당의 우두머리까지 알게 됐는데 이로써 밑에 사람들은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애플을 알고 난 뒤의 우두머리들은 2가지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본인을 스티브 잡스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고집 부리기를 미덕으로 여기며 사무실에는 독불장군의 신상을 모셔놓고 매일 아침 기도를 올린다. 상품 품평회나 연설을 할 기회가 오면 집요하게 밑에 사람들을 비판하고 행여나 토를 달거나 반항하는 사람들이 보이면 겉으로는 듣는 척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공명첩을 꺼내 그 행동을 각인해 둔다.  

이제 조직에는 침묵이 강림해 무거운 엉덩이를 붙이고 자리를 잡는데 우두머리는 이 침묵을 본인의 말이 맞다는 증거로 착각하게된다. 하지만 가끔 그 침묵에 자기도 답답해 '도대체 생각이 있는거야 없는거야 왜 아무 말도 없나!'라며 역정을 내니 이로써 직원들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햄릿이 된다.

둘째는 애플을 철저히 부인하는 부류다. 

이 사람들은 교만 부리기를 미덕으로 여기며 사무실에는 바벨의 신상을 모셔놓고 매일 아침 기도를 올린다. 애플과 비교하는 언론을 접하게 되면 분노로 온 몸을 활활 불태우고 행여나 애플을 칭찬하거나 추켜세우는 사람들을 만나면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공명첩을 꺼내 그 행동을 각인해 둔다.  

이제 조직에는 강렬한 적의가 강림해 또아리를 틀고 가지를 뻗치는데 직원들의 세뇌가 씨앗이 되어 올바른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세뇌가 완료되고 시간이 흘러 분노가 뇌를 태워버리면 '과수원' 얘기만 듣고도 게거품을 물고 발광하니 이로써 직원들은 소돔과 고모라를 지키는 좀비가 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결국 죽어나는 건 밑에 사람들 뿐이다. 우두머리들은 눈가리개를 하고 귀를 틀어 막은 채 쇠채찍을 손에 들고 말 위에 올라타 허공에의 질주를 준비한다. 한바탕 질주를 끝내고 난 뒤
'아무래도 소용 없는 일을 한 것 같군'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밑에 사람들 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경마장은 영원히 존재하고 경주는 결코 끝나지 않을텐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묻지 맙시다. 이것은 애플을 본 한국 사회의 비극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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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TV에서 산에 사는 아이에 대해 본 적이 있다. 아이의 집은 시골 마을에서도 꽤 떨어진 산 기슭에 있었다. 아이는 고무신을 신었고 하얀 천에 직접 황토물을 들인 옷을 아래 위로 걸치고 다녔다. 주로 하는 일은 겨울산에 뿌리 내린 풀들을 맛보는 것이었고 나무 줄기를 따라 흐르는 수액의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아이는 학원을 다니지 않았는데 학업 성적이 우수했고 상장이 수십장이었다. 특히 표현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평소 즐겨 보지 않는 TV를 끝까지 본 데는 아이답지 않은 기행이 눈길을 끈 탓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 대목, '특히 표현력이 대단하다'라고 한데서 눈길이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아이의 표현력이 대단한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바로 자연이 뿜어내는 색, 향기, 맛, 소리들이 표현의 보고였다. 녹색을 12색 색연필 중에 하나로 알고 있는 나와 탱자 나뭇잎의 녹색, 겨우 살이의 녹색, 쑥풀의 녹색을 경험한 아이가 표현해내는 감수성은 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줄줄이 복사한듯 서 있는 가로수들도 곰곰히 살펴보면 저마다 개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써내려간 '가로수'라는 단어에는 그 속에 숨어 있는 생생한 실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나의 언어는 개념이라는 상자에 담긴 기성품일 뿐이었다. 개념의 역할은 차이를 죽이는 것이고 '차이'의 부재는 곧 표현의 부재였다.  

똑같아 보이는 사물 속에서 '다름'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플라타너스가 뿜어내는 향기, 바싹 마른 껍질의 감촉, 떨어진 잎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와 무성한 가지가 발하는 푸른 잎빛을 앞으로도 결코 전달 할 수 없을 것이다.

몇 자 되지 않는 글을 쓰는데 이리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 죽어 있는 단어에 오랜 시간 볼터치를 하고 아이라인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 있는 사람에게 아무리 화장을 한들 살아 있을 적의 생생함이 돌아오겠는가. 


가야할 길이, 더욱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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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답답하다. 마음이 확신으로 가득찼다가도 어느새 축축한 우울의 강바닥에 납작 엎드려버린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초조. *'삶은 브라이언 존스의 쳄발로 소리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야 하는건데 어느새 늑대에게 쫓기는 토끼가 되었다.

자꾸 옆, 뒤, 앞, 위 사방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럴수록 간격은 더 벌어지는것만 같다. '얼마나 빨리 도착하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얼마나 밝게 활활 타오를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라고 다짐한 일도 헛일이다.

나는 아무래도 즐기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지만 과연 무엇을 위한 일인가? 내 삶이 즐겁지 않다면 이 모든게 왜 필요한 걸까. 수고 롭고 짐진 자들이 찾는 곳이 수고로운 짐이 된 것 처럼 나를 위해 한다는 노력들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나는 다 타버리기 위해 불 붙는 양초고 죽기위해 걷는 Mr. 좀머다.

노자는 '배움을 단절하면 근심이 사라진다'고 했다.
스쳐 지나간 이 말이 가슴의 싸한 울림이 된다. 분명 배움을 포기하라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겠지만, 오늘만큼은 의심없이 따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진다. 

*굵은 글씨 출처: Sixty Nine (무라카미 류,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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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는 하북의 영웅으로 군마가 강성했으며 물자가 풍족했다. 집안으로 말할 것 같으면 4대째 정승을 배출한 가문으로 명망이 자자했고 백성들의 신임을 두루 얻고 있었다.

반면 조조의 군세는 원소에 비할바 아니요 핏줄 또한 환관의 양자였으며 젊은 시절 이름을 날린 일은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해 머리를 싸쥐고 도망간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역사의 주인공이 된 것은 조조, 반면 원소는 많은 것을 가지고도 뜻을 이루지 못한 어리석은 군주의 대명사가 되었다.

두 사람의 승패를 가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천하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고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선 먼저 전투에서 이겨야 한다. 그렇다면 전투의 승패를 가리는 요소는 또 무엇일까?

대부분의 전투를 돌이켜 봤을 때 전세를 가름짓는 승부처에는 언제나 중요한 의사 결정 대목이 등장했다. 군주가 의사 결정을 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첫째가 모사들의 훌륭한 계책이고 둘째가 계책을 듣는 군주의 태도다.

첫째 것만 두고 본다면 두 사람은 결코 상하를 가릴 수 없었다. 그러나 둘째 대목에 이르면 원소는 참패의 비평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듣는 태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런 사람이 신하로 있을 때 크게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작게는 본인의 인생을 망치게 된다. 그러나 군주가 그렇다면 그 폐해가 막심하니 나라는 반드시 패망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시름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군주 주변에 언제나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군주가 잘 듣지 못하니 의견을 부딪혀 대항했다간 참수를 면하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듣기에 좋은 말만 하게 되고 이런 자가 높은 곳에 이르게 되니 서로가 앞다투어 아첨만 일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어느덧 미덕이 된 듯하다. 불도저처럼 밀어 붙여 성공을 거뒀다는 얘기가 신화가 되고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세태는 바로 원소에 대한 데자뷰다.

신하의 뜻은 쉽게 잊혀지지만 왕국의 성벽을 허무는데는 수십년이 걸리기에,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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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글을 못썼다.  지난 몇 주 동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최후의 유혹' 리뷰를 작성해 왔고 드디어 오늘 리뷰를 등록할 수 있었지만 몇 번을 읽어 보아도 역시, 창피한 글이다. 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참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먼 훗날 이 글을 다시 꺼내 보며 이럴 때가 있었지 하며 얼굴을 붉힐 수 있는 날을 꿈꾸며 과감히 버튼을 눌렀다.   
    

  내가 리뷰를 쉽게 쓰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남과 똑같은 리뷰를 쓰고 싶지는 않다는 강박관념 때문일 것이다. 책에 대한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하고 상투적이지만 자못 진지해 쉽게 업수이 여길 수 없는 주제들을 현실의 문제와 버무려 내놓는 인스턴트 리뷰. 나는 이런 것들을 거부 하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리뷰를 쓰는 내내 나만의 '스타일'을 정립 해야만 했다. 

  나는 독서를 머리 속에 씨앗을 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씨앗은 부모의 나무로부터 온 것이지만 결코 부모와 같지는 않다. 리뷰 또한 내가 읽은 책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단순히 그 책을 참조하는 하위의 개념으로 쓰여져서는 안된다. 내 글은 원본과 대등한 위치 서 있어야 하며 상호 참조할 수 있되 그를 통해 언제나 새로운 의미가 창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씨앗에 움을 틔우고 나무로 길러내는 작업과 같다. 그리고 정성껏 길러낸 나무들이 넓고 푸른 '사상의 숲'을 이룬다면 이로써 내 글은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앞서 말한 '인스턴트 리뷰'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 못한 것 같다. 그것들은 책을 소개함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이니까. 내가 쓰는 리뷰라는 것은 그저 내 생각을 정리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오히려 리뷰라는 단어를 오해한 것은 나의 오만과 비뚤어진 심성이 아닐까? 

  어찌됐든 저찌됐든 다음 리뷰는 김규항의 '예수전'에 대한 글이 될 것 같다. 이 글이 또 얼마나 오래 쓰여질지 알 수 없다. 쓰기가 읽기만큼 쉬웠다면 참 좋았을텐데, 역시 보는 것과 참여하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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