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댓 이즈
제임스 설터 지음, 김영준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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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댓 이즈>에는 인생을 하나의 쓸쓸한 농담으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주인공 보먼의 친구 에딘스는 사랑했던 아내를 기차 사고로 잃는다. 그는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진짜 남부 남자로 언제나 여자를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홀로 기차 여행에 보냈고 그녀를 죽게했다. 에딘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몇 년이 지나 에딘스는 아이린을 만난다. 결혼한다. 에딘스의 집 안엔 전처가 쓰던 물건이 가득 든 서랍이 있었다. 결국 에딘스는 아이린의 성화에 못 이겨 유품을 내다 버렸다. 그리고 둘이 함께 새 집으로 이사간다. 새 집은 아이린이 새로 들인 가구로 채워진다. 에딘스는 오래만에 집을 찾은 보먼과 함께 바에 들른다. 거기서 그는 이런 얘기를 한다.


"아내와 같이 바에 앉아 있는 상상을 했어. 이런 바 말고 좀 더 근사한 데. 여기서 동쪽으로 더 가면 있는 그런 바에서. 그냥 앉아서 이야기하는 거야. 특별한 거 말고 그냥 이 얘기 저 얘기. 방금 들어온 손님에 대해서, 아니면 나중에 우리가 어디로 갈지. 일상에서 스치는 일들 있잖아. 아내는 예쁜 드레스로 멋지게 차려입고. 아, 사람들 옷차림도 얘깃거리겠네. 난 옷을 좀 잘 입고 다니고 싶더라. 어쨌든 같이 얘기하면서 한 시간 정도 재밌게 보내는 거야. 그러다 아내가 화장실에 가면, 그사이 바텐더가 아내 잔이 빈 걸 보고 나한테 묻겠지. 아내분이 한 잔 더 하실 거냐고. 그럼 난 그렇다고 대답하고. 내 아내는 자리로 돌아와도 잔이 새로 채워진 걸 모를 거야. 그냥 들고 한 모금 마시겠지. 그동안 무슨 일 있었는지도 모르고."(p.330)


인간은 평생 온갖 속임수로 세월을 이기려하지만 언제나 세월이 인간을 이긴다. 인생의 정점에 섰을 때 그것은 가능해 보이지만 쌀쌀한 바람이 등을 스치는 계절이 오면 어렴풋이 불길함을 느끼게 된다. 좀 더 추워져 눈이 내리면 두 손을 들어 옷깃을 여미려 한다. 그러나 이미 두 손은 꽁꽁 얼어 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것은 흘러간다. 사라진다. 쓸쓸해진다.


이 책을 읽으면 딱 이런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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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언 형제 - 부조화와 난센스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조엘 코언·이선 코언 지음, 윌리엄 로드니 앨런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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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좀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난 코맥 매카시에 환장한 사람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미친놈이다. 코언 형제는 이 소설을 영화화한 감독이다.


원작보다 훌륭한 영화는 없다.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사실이 영화 역사상 딱 두 번 틀렸던 적이 있다. 한 번은 <빌리 엘리엇>의 스티븐 달드리가 마이클 커닝햄의 동명 소설 <The Hours>를 연출했을 때고 한 번은 저 코언 형제가 <No Country for Old Men>을 만들었을 때다. 적어도 내 경험상 지구상에서 이 형제보다 훌륭한 스릴러를 만드는 감독은 존재하지 않는다.


<블러드 심플>이라는 저예산 영화로(지인들을 통해 제작비를 확보했다) 커리어를 시작한 형제는 황금 종려상을 거머쥐고 박스 오피스 성적으로 전투력을 인정 받은 후에도 여전히 저예산 영화를 만든다. 저예산 이라면 지루한 에술 영화거나 이해할 수 없는 컬트 무비라는 편견을 갖는 사람이라면 오해마시라. 코언 형제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간섭하는 게 두려워 저예산을 택한다. 형제는 적은 돈으로 흥미진진한 영화를 만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재주꾼이다. 비록 모든 시도가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형제는 영화로 대단한 예술을 하려는 미학적 야심이 없다. 주어지는 상은 흥행에 좋은 영향을 끼치거나 다음 영화의 투자금을 끌어오는데 도움을 줄 때 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있다. 이들은 그저 이야기가 하고 싶을 뿐이고 영화가 눈에 들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형제의 영화에 끊임없이 예술이라는 딱지를 붙이려는 이유는 뭔가 할 얘기를 숨긴듯이 보이는 모호한 이미지들이 숏들을 채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이미지들이 숨긴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상징을 읽으려 한다. 그러나 형제의 말에 따르면 이미지 속엔 어떠한 의미도 숨겨져 있지 않다. 이미지는 그저 이미지일 뿐이다. 형제는 그 상황 그 순간에 그 이미지의 등장이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장면을 찍는다. 이미지는 순수하게 이야기의 일부라는 얘기다(<No Country for Old Men>은 예외다. 이 영화는 이미 문학적 상징이 풍부한 원작을 각색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영화화 했기 때문이다).


물론 형제의 블랙 코미디를 종종 이해하지 못할 수는 있다. 사실 그들은 좀 꼬인 사람들이고 때문에 그들의 유머 또한 스트레이트하지 않다. 형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개그 콘서트>류의 유머를 구사하지 않는다. 이 말은 당신이 무표정으로 장면을 넘긴 순간 "아니 이게 안 웃겨?"하며 돌아보는 재수 없는 친구의 얼굴을 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모음집 특성상 동일 내용이 되풀이 되는 건 있지만 많지 않다. 형제는 헐리웃에서 인터뷰하기 어려운 감독으로 악명이 높고 자기 영화에 대해 얘기하는 걸 끔찍이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글을 읽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할 얘긴 다 해 준다. 알아야 할 건 충분히 담겨 있다. 아쉬운 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한 내용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유독 이 영화를 찍고 난 뒤엔 인터뷰 혐오증이 극심해져 인터뷰를 하지 않은 건지 단순히 편집자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다. 코언 식으로 하자면 아마도, "닥치고 영화나 보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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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시 - 인디영화의 대명사, 짐 자무시 인터뷰집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루드비그 헤르츠베리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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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야간 열차를 탄 나는 첫 차도 다니기 전인 이른 새벽 부산역에 도착했다. 차갑게 식은 우동 한 그릇을 먹으며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도시를 구경한다. 어둠 속에서 설렘과 기대가 부풀었다. 잠시 후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그 곳에서 부산 영화제 ID 카드를 받고 보고 싶던 영화를 잔뜩 예매했다. 남포동과 해운대를 오가는, 하루 4편의 영화를 보기 위한 미친 일정.


재미있을 것 같은 영화보다는 봐야만 할 것 같은 영화를 봤다. 그 때는 학생이었으니까. 웬지 예술 냄새가 나는 영화들만 골랐다. 그래서 졸았다. 시작한지 10분도 되지 않아. 그대로 영원히 잠들어 버릴 것 같은 순간 나를 깨운 건 스크린 가득 클로즈업 된 빌 머레이의 얼굴이었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Broken Flowers>, 짐 자무시와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이후 나는 <천국보다 낯선>을 봤고 <미스테리 트레인>을 봤고 <다운 바이 로>를 <데드맨>을 <고스트 독>을 그리고 <커피와 담배>를 봤다. 몇몇은 끔찍할 정도로 지루했고 몇몇은 기가막힐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나는 졸업을 했고 영화를 관뒀고 회사에 취직했다. 더 이상 짐 자무쉬를 찾지 않았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시간이라는, 이 부지런한 악마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옛 일을 떠올리게 된다. 구석에 쳐박혀 먼지 덮힌 기억을 자꾸만 꺼내본다. 그럴수록 기억은 더 생생해진다. 나는 어느 큰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고 거의 동시에 꺼내들었다. 이틀 뒤 내 책상 위에는 이 책이 배송되어 있었다.


<잠 자무시> 인터뷰집은 그의 대다수 영화와 마찬가지로 지루하다. 여러 인터뷰를 모아 놓은 것이기 때문에 같은 얘기를 되풀이 할 때가 많다. 확실히 그의 영광은 데뷔작인 <천국보다 낯선>에 몰려 있다. 사람들은 거의 신화가 된 이 작품에 대해서만 궁금해한다. 이 줄거리도, 유명한 배우도 없는 흑백 영화가 왜 자기를 그토록 매료시켰는지 놀라워 한다. 사람들은 그 이유를 짐 자무시의 입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대답은 신통치 않다. 대개의 위대한 예술은 창작자의 이해와 역량을 한참이나 초월하는 불가해한 존재기 때문이다.


부질없는 질문과 힘겨운 대답이 이어진다. 자기 영화를 팔아야 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면 짐 자무시는 결코 인터뷰 같은 걸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위한 유일한 위로는 어서 빨리 책장을 덮고 스크린 앞에 앉아 그저 영화를 보는 것이다. 때문에 의도치 않게 인터뷰집을 효과적으로 읽는 법을 배웠다. 절대적으로 질문에 집중하라는 것. 훌륭한 질문에 바보 같은 대답은 나올 수 있지만 바보 같은 질문에 훌륭한 대답은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질문을 읽은 뒤 그게 형편없거나 당신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면 그 답변 전체를 건너 뛰어도 무방하다.


유명한 예술가가 되면 모두 이런 곤혹을 치러야 한다. 수 없이 되풀이 되는 똑같은 질문들. 새 영화를 찍기에도 바빴을 이 사교성 없는 남자가 행한 그 끔찍한 앵무새 연기에, 슬픔과 연민을 담아, 진지한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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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오퍼스 7
수잔 손택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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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예술을 현실의 모방으로 정의한 이래 예술은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 의의를 증명해야만 하는 비참한 쳇바퀴를 굴려왔다. 스승의 말이라면 사사건건 토를 달았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사상 최초로 예술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아주 체계적인 글까지 남겼지만 사실 그건 플라톤에 대한 반박이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견해에 동의했다. 단지 그것이 유용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예술이 객관적 미의 구현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주관적 표현이라는 관점을 널리 받아들인 오늘날에도 그 정당성에 대한 물음은 끈질기게 살아 남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 것이냐?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오래된 편견 안에서 사람들은 예술이 다른 무언가를 가리킨다고 믿는다. 예술은 무언가의 상징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예술은 그저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와 본질은 예술 작품이 가리키는 어떤 곳 즉 예술 작품의 너머에 존재한다.


만약에 내가 망치를 가리키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망치라고 말할 것이다. 거기엔 일말의 주저도 의심도 없다. 그런데 내가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를 가리키면?


현대인들은 비평을 통해 예술을 받아들인다. 비평은 예술을 해석해 그것이 왜 예술인지를 밝혀낸다. 여기서 그들이 집중하는 건 내용이다. 그래서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독재자 프랑코와 나치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정치적 메시지가 된다. 하지만 이게 과연 유일한 길일까? 우리는 <게르니카>를 그저 고통, 비애, 슬픔, 좌절 같은 감정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걸까?


예술은 감각의 총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감각하지 않고 이해하려 드는가? 예술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엔 확실히 문제가 있다. 수잔 손탁이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주장하는 요지도 바로 이거다. 예술을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 받아들이라는 것.


지금 중요한 것은 감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내용을 쳐내서 조금이라도 실체를 보는 것이다. 오늘날, 예술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 한다면 우리는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훨씬 더 실감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p34~35)


현대 예술이 그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해석으로부터 탈주하고픈 욕망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의 해석은 거부한다. 그리하여 예술은 침묵을 하나의 주요한 양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맙소사, 현대 예술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해석을 쏟아내지 않는가! 뿐만아니라 현대 예술은 비평과 모종의 뒷거래를 벌이기도 한다. 까놓고 말해 캔버스 전체를 어지럽게 채운 페인트가 비평없이 예술이 될 수 있었겠는가?


우리의 문화는 무절제와 과잉 생산에 기초한 문화다. 그 결과, 우리는 감각적 경험의 예리함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p.34).


1933년애 태어난 손탁의 시대에도 이미 감수성의 종말이 문제시 되고 있었다. 이후로 우리가 그것을 회복할 시간을 가진 적 있을까? 우리는 21세기에 산다. 감성은 이미 멸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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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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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 페이지나 쓸 책이 아니다. 신의 부재를 과학적으로 논증하는 책으로 기대했는데 택도 없는 바람이었다. 대부분이 성경의 꼬투리를 잡는 무의미한 시비글이거나 종교인의 모순을 꼬집는 조롱이다. 리처드 도킨스 정도의 대 과학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날카로운 통찰력은 없다. 여름 성경 학교를 두 번만 갔다 와도 얘기할 수 있는 범부의 주장이었다. 어마어마한 두께를 자랑하고 있음에도 이 책에선 신기할 정도로 깊이가 보이지 않는다. 기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이 터무니없음으로 인해 하마터면 난 신의 존재를 믿을 뻔 했다.


신은 믿을 수 있어도 종교는 믿을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종교는 오랜 시간 인간이 가꿔온 문화의 일부다. 그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온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이 핍박을 받을 때 신은 거침없이 적을 찢는 죽음의 화신이 됐고 평화의 시기엔 자비로운 어머니가 됐던 것이다.


신의 모습은 당대의 인간이 바라는 모습을 정확히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예수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이 믿는 바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것이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보고 번뇌한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끊임없이 신의 아들이 될 것을 강요했고 그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민족을 핍박하는 로마인들을 한 칼에 쓸어내기를 원했다. 예수가 위대한 건 자신이 신의 아들이 아님을 알면서도 기꺼이 십자가를 지러 나아갔다는 것이다. 예수는 골고다 언덕의 고통이 살갗을 파고드는 끔찍한 현실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운명의 날 새벽에 떨며 기도했고 잠이 든 태평한 제자들에게 화를 낸 것이다.


종교를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조롱과 비아냥 없이도 '만들어진 신'을 깊이 있게 증명할 수 있다. 나는 리처드 도킨스가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책을 썼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깊이 없는 내용과 신랄한 어조로는 어차피 이런 책 따위 쓰지 않아도 신이 없다는 걸 믿었을 사람들을 신나게 할 뿐 정말 변화가 필요한 골수 근본주의자들을 감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대 과학자가 난리를 치지 않아도 종교는 어차피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공격은 도리어 죽어가는 종교로 하여금 필사적 저항 태세를 갖추게 만든다. 적을 바닥까지 몰아세우는 게 항상 좋은 전략은 아니다. 구석에 몰린 쥐는 결국 고양이를 물고 도망친다. 투항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은 물가에 몰린 병사들의 마음을 흔들지만 모두 죽이겠다는 말은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게 만든다.


장단컨대 도킨스 같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종교는 더더욱 번성할 것이다. 최근들어 미국의 티파티나 이스라엘의 하레디, 이슬람의 IS 같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것은 그 잘나빠진 지식인들의 계몽 전략이 얼마나 형편 없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근본주의자들의 메세지는 간단하고 강력하다.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600쪽 짜리 책이 배워야 하는 점이다.


반대 증거가 있다면 언제든지 자기 주장을 바꿀 것이라는 점에서 본인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리처드 도킨스는 과연 반대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까? 인간은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의견에 선택적으로 노출하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지각한다. 증거가 바로 눈 앞에 떠다녀도 모르는 게 인간 정신의 기묘함이다.


반대 증거가 나오지 않은 현시점에서 볼 때 그는 확실히 다윈의 자연선택과 유전자의 합리적 행동을 광적으로 신봉하는 근본주의자가 맞다. 그는 인간이 그저 유전자의 총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합리적 부분이 구성한 전체는 틀림없이 합리적이어야 한다. 


종교는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이므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전부 비정상이고 정신에 결함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치료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은 설령 그 말이 맞다하더라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만큼 폭력적이다. 그의 혀는 비행기를 끌고 월드 트레이드 센터로 돌진하는 테러리스트와 꼭 같은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다. 이런 태도로는 그 어떤 종교인도 바꿀 수 없으며 심지어 같은 생각을 지닌 동료들조차 등을 돌릴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유전자의 집합체가 아니며 본질적으로 합리적인 존재라는 근거도 없다. 그것은 잘나빠진 똑똑이들의 바람일 뿐이다. 현실에선 착하고 합리적인 개인이 군중을 이뤘을 때 철저히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사례를, 그러니까 전체가 결코 부분의 합이 아니라는 사례를 얼마나 많이 발견할 수 있는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그의 이해는 6살에 옥스퍼드에 입학한 소년의 것과 자웅을 겨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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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5-09-2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하게 공갑합니다. 공갑 10000000개 날리고 싶네요.
읽으면서 도대체 뭔 얘기할려고 이런 600페이지나 작성했지 ?
그냥 이런 것은 에세이로 2,3장에 걸쳐서 말하면 깔끔한 내용인데 말입니다. 이상한 책입니다.

한깨짱 2015-09-22 18:28   좋아요 0 | URL
와~ 격한 공감 감사드려요. 읽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요. 재밌는 소설로 마음을 다스려야겠습니다.

ㅇㅇ 2016-01-03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흔해빠진 종교쟁이의 앙탈이네요. 잘봤습니다.

한깨짱 2016-01-04 13:07   좋아요 0 | URL
쪽수가 저렇게 많은데 별로 읽을 게 없는 책이에요.

즐건독서 2023-10-11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네. 지식의 폭이 리뷰 글 몇자만 봐도 도킨스와는 비교도 안되게 얕은 수준인데.

한깨짱 2023-10-14 11:21   좋아요 0 | URL
그럼요, 제가 도킨스만큼 지식이 많다면 즐건독서같은 사람의 댓글을 받을 기회도 없었겠죠. 저도 그게 참 한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