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 에세이
양정무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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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미술관>은 나영석 PD의 예능에 출연했던 미술사학자 양정무 교수의 에세이다. 내용의 깊이가 남달라 이 책을 그냥 에세이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아마 유구한 예술의 역사를 4개의 스냅숏으로 짧게 풀어내 겸손한 표현을 붙인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다른 진지한 인문서보다도 훨씬 재미있고 참신했다.


1장에서 저자는 '벗은 몸'과 '고전'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미술이란 거칠게 말해 한낱 장식품, 즉 물건에 불과하고 예술가 또한 오늘날처럼 고고한 지위가 아니라 시장에서 자기가 만든 것을 파는 장인에 불과했다. 물론 장인의 정신과 기술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예술이 그 자체로 목적이었던 시절은 인류사를 통틀어 매우 짧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고 이전까지의 예술은 모두 무언가를 '위해' 창조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은 당시의 시대상, 윤리의식, 정치, 혹은 그 예술품을 주문한 사람의 의도와 기호가 반영되어 있다. 이 말이 무엇이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보편적 미의 기준이 사실은 그 시대의 특수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나긴 중세 암흑기 동안 미의 기준은 누가 신의 위대함을 가장 잘 표현했는가로 정해졌다. 원근을 살펴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건 어불성설. 신은 항상 정가운데에, 누구보다 크게 그려져야 했다. 15세기 피렌체인들은 이 기준을 과거로 돌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이다. 훗날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이 시대는 '고대의 부활', 쉽게 말해 복고의 시대였다. 이를 인류 미학의 절대 기준으로 확립하는데 일조한 사람이 독일의 고전주의자 빙켈만이다. 그러나 그가 찬양해 마지않던 대부분의 그리스 예술품들은 아주 놀랍게도, 로마 시대에 복제한 짝퉁으로 알려져 있다.


2장은 미술사에 드러난 '웃음'을 탐구하는 장이다. 미술과 웃음이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참신한 관점이 흥미롭다. 오늘날 단체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모두 김치와 치즈를 한다. 억지로라도 미소를 만들어내려는 건데, 왜 미술관에서 접하는 그 많은 초상화들에는 웃는 얼굴이 거의 없는 걸까? 오랜 시간 광대라는 직업이 차지해온 낮은 지위를 생각하면 웃음이 가진 의미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추리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이를 주제로 설전을 벌이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미술사가 다시 웃음을 되찾게 된 건 세상에 인본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3장은 박물관의 역사를 다룬다. 프랑스혁명으로 촉발된 공공 박물관의 탄생. 약탈품 창고 노릇을 하며 확장해가던 제국주의 시대의 박물관. 이 장에서 우리는 각 시대의 정치상을 반영하며 성장해가던 박물관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나폴레옹 집권 시기 그가 이탈리아에서 약탈해온 고전미술의 대표작들이 루브르에 진열되면서 박물관의 무게 중심이 진귀한 물건들에서 순수미술로 옮겨가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요즘에는 확실히 박물관보다는 미술관의 힘이 센 것 같다(리그 오브 레전드의 캐릭터 이즈리얼은 상대를 향해 "넌 박물관에나 어울리는 구닥다리야"라고 외친다!). 인스타그램에 미술관에 갔던 사진을 올리는 건 본 적이 있어도 박물관에 간 걸 본 적은 없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에는 873개의 박물관과 281개의 미술관이 있다고 한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모두 엄격한 자격을 갖춰야 그 이름을 달 수 있다고 하니 난립하는 허접한 시설들도 아니다. 역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4장은 팬데믹 시대의 미술을 이야기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팬데믹은 역시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일 것이다. 흑사병은 유럽의 사회 구조를 바꿀 만큼 엄청난 규모의 역병이었다. 이런 시대의 미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미술이라는 게 보편적, 절대적 형태를 지키며 인간에게 늘 같은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었다면 세상이 흑사병으로 망하든 말든 여전히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은 팬데믹으로 인해 존재 양식이 바뀔 정도로 큰 변화를 맞는다. 이런 걸 보면 예술이란 역시 인간과 외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욕망과 바람을 철저히 반영해 생존해가는 생활 밀착형 행동양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벌거벗은 미술관>은 저자의 참신한 관점과 안목이 돋보이는 책이다. 거기다 강연체로 굉장히 쉽게 쓰여 가독성이 높다는 장점까지 있다. 그림은 당연 풀컬러. 페이지 곳곳을 차지한 사진들 덕에 274 페이지라는 쪽수도 시원시원하게 넘어가니 올여름 휴가철에 들고 갈 책으로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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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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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최고의 소설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최고의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낙원 같은 소설이다.


남은 5개월 동안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 책은 올해 최고의 소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7개월을 곰곰이 돌아보니, 최고의 소설이 아니라 최고의 책으로 꼽게 될 것 같다. 내용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이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와 수학자들이 바로 그 위대한 발견을 하는 순간을 소설로 옮긴 것이다. 지금부터 그 주인공을 호명하겠다.


1. 공기 중에서 질소를 추출하여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킨 프리츠 하버

식량의 산술급수적 증가가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따라잡지 못해 인류가 굶어 죽게 될 거라는 맬서스의 저주를 극복한 건 하버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소를 이용한 합성 비료는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인구의 폭발적 증가에 죄책감을 느꼈는지 애국자였던 하버는 독일을 위해 염소 가스를 활용한 생화학전을 창시하기도 했다. 염소 가스의 피해 규모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인 독일마저 생화학전의 금지를 결의하는 세계 조약을 체결할 만큼 크고 치명적이었다. 훗날 그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쓰인 염료 프러시안 블루를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시안화물을 이용하여 치클론 B를 개발하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기체로 선정됐다.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이었다.



2. 블랙홀의 어머니 슈바르츠 실트

프리츠 하버의 염소 가스가 전장을 휘덮는 동안 참호 구석에 박혀 아인슈타인이 고안한 일반상대성 이론의 방정식을 풀어낸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 책의 두 번째 주인공 슈바르츠 실트다. 방정식을 만들어낸 당사자조차 그 '해'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못 박은 일을, 편안한 별장도 아닌 전장에서, 전자계산기나 애플 실리콘이 탑재된 맥북 프로, 대량의 계산을 처리할 클라우드 서비스도 이용하지 않고 해냈으니 그 천재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조차 없다. 그는 자신이 찾아낸 해가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블랙홀의 존재를 예견하는데 놀라 이후에는 자신의 해가 잘못됐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슈바르츠 실트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지 얼마 안돼 전장에서 숨을 거둔다. 이 책은 사실을 토대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내가 만약 작가였다면 천재 화학자 하버가 살포한 염소 가스를 슈바르츠 실트 살해의 유력한 용의자로 암시하고 싶은 강력한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3. 진정한 천재 수학자 그로텐디크

필즈상 수상자 몇 명이 달라붙어도 해결할 수 없던 난제를 몇 주 만에 홀로 해결할 정도로 천재였던 그로텐디크는 그 압도적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수학자다. 심지어 어린 시절 유대인 수용소를 전전하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그가 이룩한 업적들에 놀랍다고 말하는 건 지극히 소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끔찍한 유년 시절 덕분에 그는 평화와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정치관을 갖게 됐는데 이 탓에 반전-반핵-환경 보호-생태계 보전을 핵심으로 하는 사상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수학과는 관계없는 수많은 기행을 벌이다 생활고로 80년대에 학계로 돌아왔지만 그가 제출한 연구 결과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로텐디크는 80년대 말에 완전히 수학계를 떠나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숨어 지냈다. 너무 똑똑해도 문제라는 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나 떠올릴만한 말이다. 그러나 그로텐디크를 보면 이 외에 어떤 말을 떠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4. a+b=c, 모치즈키 신이치

그로텐디크의 인생은 모치즈키 신이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모치즈키 신이치는 a+b=c라는, 일명 abc가설을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수학자이다. 그는 증명 과정에서 스킴과 에탈 코호몰로지 이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데 이것이 바로 그로텐디크가 창안한 이론이었다. 그가 abc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기술한 논문은 수백 페이지에 달해 아직까지도 검증이 끝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론에 담긴 심각한 오류를 지적하며 웬만한 수정으로는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반면 모치즈키 신이치의 교토 대학 동료들은 그의 증명이 완벽하게 끝났다고 주장한다.



5. 서로를 혐오했던 라이벌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

양자역학을 창시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하이젠베르크는 그 업적과 비례할 정도로 복잡한 행렬 역학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행렬은 순수 수학에 속해 물리학자들에게는 대단히 생소했다고 한다. 논문 역시 엄청 난해해서 전자기력과 약한 핵력을 통합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스티븐 와인버그 조차 "마법 그 자체"라 언급했는 데, 나는 이 말이 '솔직히 이해는 못 하겠지만 뭔가 해낸 것 같으니 적당한 선에서 인정해 주자'는 의도로 말해진 대단히 지적이고 사회적인 표현이라 생각한다.


하버의 업적이 인류의 기아 해결과 대량 학살에 모두 기여하고, 아인슈타인의 발견이 에너지의 실체와 파괴를(E=MC스퀘어) 동시에 밝혀냈듯, 과학의 역사는 수많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나는 여기에 하이젠베르크의 끔찍한 이론이 만들어낸 최악의 라이벌 슈뢰딩거의 이야기를 추가하고자 한다.


슈뢰딩거는 다른 물리학자와 마찬가지로 본인만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 그걸 어려워하는 다른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저 오만하고 어린 독일 놈을 증오했다. 슈뢰딩거는 양자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보다 쉬운 방법을 찾는데 몰두해 그 유명한 '파동함수'를 만들어낸다. 파동함수는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에게 익숙한 미분방정식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에 학계의 환영을 받았다.


파동함수의 탄생 이후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을 거들떠보는 물리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훗날 양자역학의 창시자로 호명되는 천재 물리학자지만 당시에는 잊혀가는 명성을 두려워하는 어린 독일 놈에 불과했던 하이젠베르크. 그는 슈뢰딩거의 강연장에 허락도 없이 올라가 이 모든 것이 엉터리라며 칠판 가득 자신의 행렬을 써 내려가다 관중의 야유를 받고 경비원에게 끌려나가는 추태까지 보인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어떻게 해서든 혐오스러운 오스트리아 바람둥이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절치부심 연구에 몰두한다. 그러다 자신이 똥처럼 여기던 바로 그 파동함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에피파니를 경험한다. 모든 역사의 아이러니가 말해주듯, 그것이 바로 하이젠베르크가 펼친 대역전극의 서막이었다.


한편 슈뢰딩거가 파동함수를 고안해낸 곳은 크리스마스 휴가로 떠난 스위스 아로사로 알려져 있다. 동행한 여자는 부인이 아니었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역사적 사실 사이사이 비어있는 간극을 이야기로 채워 넣은 픽션이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서로 다르지만 연작 소설로 읽어도 될 만큼 교묘하게 엮여있다. 명심해야 할 건 이 소설이 사실을 바탕으로 썼다고 해도 결코 사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 벵하민 라바투트는 <프러시안 블루>에는 지어낸 문장이 단 하나밖에 없는 반면 다른 소설들은 좀 더 자유분방하게 썼다고 말한다. 자유분방을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두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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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패로
메리 도리아 러셀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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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외계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포착하여 우주로 모험을 떠나는 이 소설은 360페이지에 이를 때까지도 외계인이 등장하지 않는 인내심 강한 소설이다. 넷플릭스로 드라마화가 됐다면, 총 두 시즌으로 기획했다 치고 시즌1의 마지막 회, 엔딩에 가서야 슬쩍 외계인의 얼굴이 등장하는 셈이다. 나는 간질간질 떡밥만 흘리고 핵심 줄거리는 나무늘보처럼 전개하는 이야기들을 진심으로 혐오한다. 더블 제이의 <LOST>나 스페인판 <종이의 집> 같은 거 말이다.


그러나 이런 걸 소설로 읽고 있으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 위대한 작가들이 추구하는 건 외계인이 발견됐다는 가십이 아니라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는 지적 탐구이기 때문이다. 어슐러 K. 르귄의 작품들이 SF를 넘어 일종의 사회과학 소설로 읽히는 것처럼, 이 소설 <스패로>는 정확히 같은 길을 지향한다.


나는 늘 외계 생명체가 발견됐을 때 이 세계의 종교가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생각해왔다. 신은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했는데 외계인은 언제 만든 걸까? 설마 안식일에 특근을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 종교인들이 새로운 대륙과 인종을 마주할 때마다 써 내려간 잔인한 합리화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외계인이 우리만큼, 혹은 우리보다 우수한 문명을 보유하고 있을 땐 얘기가 좀 다를 것이다. 종교는 그 숭고한 의미와는 다르게 늘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봉사해왔는데, 저 먼 우주의 이웃이 우리보다 훨씬 강해 도저히 지배가 불가능해 보일 때는 어떤 교리를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다. 역사상 처음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득세할지, 아니면 그들을 사탄의 군대로 간주해 성전을 촉구할지. 뭐가됐든 우리 삶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하고 폭력을 조장해온 종교들은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높은 콧대가 폭삭 주저앉아 골머리를 썩을 걸 상상하면 마음이 날아갈 것처럼 즐겁다.


이 혐오와는 별개로 나는 종교의 탄생이 인간 역사의 필연이라고 믿는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공포가 설명 가능한 이야기로 대체됐을 때 인간이 느끼는 안도를 생각해보자. 이 믿음이 결국 인간을 하나로 결집시켰고, 도시가 만들어졌고, 집단생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과학 기술이 발달하게 됐다. 종교가 없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웠을까 생각하다가도 내가 누리는 문명의 이기들이 결국 그걸 계기로 발명됐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어 마음이 착잡하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신은 인간이 종교를 만들 수밖에 없도록 세상을 창조한 셈.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부처님 손바닥 위의 원숭이처럼. 나는 이것이 지구인으로서 갖는 내 인식의 한계임을 바란다.


<스패로>는 예수회 신부 에밀리오 산도즈가 외계 문명의 존재에 담긴 신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소설이다. 나는 간질간질 떡밥만 흘리고 핵심 줄거리는 나무늘보처럼 전개하는, 내가 혐오해 마지않는 이야기처럼 이 글을 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쪼록 내 의도가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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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
이종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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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의 취객이 빈 쇼핑백을 들고 버스에 탄다. 승객은 많지 않았지만 좌석은 이미 다 차 있었다. 남성은 악취와 술냄새를 풍기며 좌석들을 노려보다 건장한 30대 청년 앞에 선다. 그러더니 툭, 툭 들고 있던 쇼핑백으로 청년의 다리를 친다. 반응이 없자 남자는 고개를 바짝 들이대 다리가 아프니 자리를 비켜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남자에게서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몰려온다. 참다못한 청년이 똑같이 언성을 높이며 말한다. "왜 이러세요!" 그 순간 남자는 들고 있던 쇼핑백으로 청년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쳐 그를 살해한다.


소설의 첫대목을 읽은 뒤 나는 이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강렬하지만 그만큼 부담이 큰 첫 장면을 작가는 어떻게 풀어나갈까? 뒤에는 수백 페이지가 남아있었다.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으려면 상당한 짜임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김칫국은 내가 이 소설을 장편이라고 오해한 데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은 작가 이종산의 단편선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의 표제작이다.


부커상 최종 후보로 뽑혔으나 수상에는 실패한 <저주토끼>의 저자 정보라는 이 책에 실린 단편선을 일컬어 '여성주의 공포소설'이라 말했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부조리와 피로를 공포라는 장르로 빚어냈다. 어지간히도 무던한 이 사회에 큰 충격을 주려면 좀 센 맛도 필요할 것이다.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82년생 김지영>을 써내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저주토끼>나 <빈 쇼핑백에 들어 있는 것>을 쓰는 작가도 있다. 다양성은 어느 순간 무조건 지켜야 하는, 다소 정치적인 단어로 변질됐는데 사실은 굉장히 실용적인 이유로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다. 주제가 영원히 싱싱하게 남으려면 이야기는 다양성이라는 외피를 둘러 독자를 질리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접하는 이런 소설들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좋은 시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빈 쇼핑백에 들어있는 것>>에는 지루한 소설들이 꽤 많다. 결말은 뻔한데 전개가 질질 끌리니 이야기의 맛이 살지 않는 것이다. 이 문장을 쓰고 하루를 더 생각해보니, 어쩌면 내가 남자여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들었다. 경찰에 신변 보호까지 요청했으나 끝내 스토킹 범죄로 죽어나가는 여성의 공포를 나는 피부로 알지 못한다. 내가 이 범죄에 분노하는 이유는 그게 옳지 않기 때문이지, 무섭기 때문은 아니다. 이 공포를 일상에서 마주쳐야 하는 여성에게는 내가 지루하다고 여기는 그 전개들이 마디마디 공감할 수 있는 세심한 묘사로 느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무서운 일이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이야기인 세상. 나는 내가 꽤 알고, 공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끽해야 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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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 인간경영
도몬 후유지 지음, 이정환 옮김 / 경영정신(작가정신)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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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중세를 끝내고 근대를 연 세 명의 장군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이 세명은 당대에 협력하여 천하를 거머쥔 사람들 치고는 성향이 너무나 달랐는데, 그 차이를 두견새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유명하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울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세 사람은 이렇게 답한다.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으면, 울게 해 주겠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는 패왕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치의 달인이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심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천하를 지배한 순서도 납득이 되는데, 복잡 다단했던 전국시대를 통일한 건 힘의 노부나가, 비천한 신분이었음에도 그것을 탈취하여 두 번째 주인이 된 건 지의 히데요시, 자기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때가 왔을 때 분연히 일어나 일본 최후의 막부를 세운 건 인내의 이에야스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할 때 '주군이 내려준 간토(관동) 땅이 혼란하다'는 핑계로 단 한 명의 군사도 출병시키지 않았다. 히데요시 사망 이후에는 모든 다이묘들에게 즉각 회군할 것을 명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세력을 규합해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와 전면전을 벌인다. 세키가하라, 오사카 전투를 끝으로 히데요시 가문은 완전히 멸망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가 수립된다. 에도의 현재 이름은 도쿄다.


히데요시-이에야스 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중심은 오사카에서 도쿄로 이동한다. 서울-부산만큼이나 말이 다른 두 지역은 서로의 언어를 오사카 사투리, 도쿄 사투리라 부를 정도로 자기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먹는 것도 다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초밥은 원래 쥐어서 만든다는 의미의 니기리 스시로 불리는데 이게 바로 도쿄식이다. 반면 오사카는 나무  상자 안에 고기와 밥을 층층이 쌓고 눌러 만든 하코 스시를 먹는다. 사회생활에서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는지 오사카 출신으로 성공하려면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속설이 있기도 하다.


도쿄에 터를 잡은 뒤 이에야스는 아들에게 쇼군 자리를 물려주고 전면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이는 은퇴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여러 분야의 지식인과 외국인들을 모아 여론을 수집하고 나라를 운영할 정책을 만들었다. 이것을 실행하는 건 아들이었는데 정치와 행정을 분리하는 일종의 권력 분립 체제가 아니었다 싶다. 이 방법의 장점은 배후에서 모든 걸 움직이면서도 정책 실패에 따른 비난은 아들에게 지울 수 있다는 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하를 다루는 방식도 이처럼 교묘했는데 드러내 놓고 위협을 가했던 노부나가와 달리 서서히 말려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크게 소리 나지 않게, 죽는지도 모르고 스르륵.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통치 방법 중 가장 인상적인 건 '꽃과 열매를 함께 주지 않는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부와 권력의 분리였다. 일본은 칼을 쓰는 자가 붓을 드는 사람보다 지위가 높았던, 세계사를 통 털어도 이례적인 나라였는데 천하를 지배한 이후 이에야스는 무신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평화를 이룬 정부가 흔하게 취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그 불만과 갈등을 다스리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정책을 좌우하는 측근들에게는 권력을, 그렇지 못한 이들에겐 더 많은 돈을 주었던 것이다.


참을성의 화신이라면 뭔가 근엄하고 듬직한, 대쪽 같은 인물이 떠오르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행적을 보면 이 말이 일본 역사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3인의 이야기를 끼워 맞추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너구리 영감이란 별명을 괜히 얻은 게 아니다. 판국을 좌우하는 모습을 보면 히데요시만큼 정치적이었고 여러 방면에서 도저히 의중을 알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다. 맹목적인 충성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히려 공포의 오니(귀신)라 불린 노부나가와 일 하기가 쉬울 것이다. 눈치가 빠르거나 정치적 수 읽기에 능하다면 히데요시가 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속을 알 수 없는 상사만큼 일하기 어려운 사람이 또 있을까?


인내심이란 어쩌면 자기 속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행보를 오역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나는 원래 이 3인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본능적인 매력을 느꼈는데, 알아보니 나와는 참 안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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