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대해 아무거나 생각해 보자. 누군가는 우주에 먼지처럼 박혀 있는 지구에 무좀처럼 돋아나 있는 인간의 7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얼굴 모양에 대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혹은 먼지처럼 박혀 있는 지구에 무좀처럼 돋아나 있는 인간의 취향과 미각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심지어 사람따위는 관심 밖. 그대신 이 우주 어딘가에 살고 있을, 갈기 대신 도넛을 달고 다니며 꼬리에선 고압축 플라즈마를 발사, 입에선 냉면 육수를 뿜어내는 목도리 도마뱀 한 마리를 상상할지도 모른다.

말해 두지만 정해진건 없다. 생각 하나하나에 우열을 매겨 점수를 줄 생각도 없다. 그저 살랑살랑 봄바람이 얼굴을 간지르는 이 밤, 입을 헤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어떤 말을 하더라도 아무에게도 타박받지 않을 그런 시간을 가져보자는 거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낼 수도 있다.

잘생긴 개미핥기와 못생긴 사람 중에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니?

못생긴 사람.

그리고는 '못생긴 사람은 성형 수술로 바뀔 수 있으니까'라고 덧붙인다. 합리적 사고에 미국식 개척정신까지 단단히 갖춘, 그래서 때때로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친구가 한 말이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재미없는 대답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공할 요건을 두루두루 갖췄다. 친구여, 신의 축복이 영원하기를.

트위터의 글자 수 제한이 140자라는걸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럴수가!

예전엔 나도 몰랐다! 세상 사람 모두가 한 때는 뭘 모르던 멍청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뭔가 자기보다 모른다고 생각하는 인간을 만나면 가차없이 잔인해 진다.

화려한 삶과 평온한 죽음 중에 무엇이 더 나을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소문을 도대체 누가 퍼뜨리고 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만나게 되면 죽어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하고 다닌거라면, 진짜 용서하지 않겠어.

자살은 인간의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아니다. 인간의 실존을 증명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무런 설명 없이, 아무런 반론 없이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건 오로지 돈 뿐이다.

침묵은 긍정인가?

누군가는 대답할 가치가 없거나 아무리 말해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할 때 침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긍정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마음대로 생각해 놓고는 자기 혼자 들떠 신나게 떠든다. 누군가는 끝까지 침묵으로 응대해 보지만 천박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그것은 조롱을 위한 명분 밖에 되지 않는다.

물냉면은 냉면의 왕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시간의 끝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나요?

고민하지 말자. 안달복달 해봐야 인간은 결국 똥으로 변신한다.
언젠가 내 소설에 쓰일 대사다.

이 글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다. 일관된 논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촌철의 맛도 없다. 이런 글을 쓰느니 그냥 이불 속으로 들어가 일찍 잠 드는게 어떨까? 지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쳇, 그러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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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어렵다 보니 자주 이사를 하게 된다. 바로 직전에 살던 집은 일년 반을 채우지 못했고 그 전에 살던 집도 채 2년이 되지 않아 나가야했다. 물론 그 전, 그러니까 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그 집 바로 전에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꽤 오래 지냈긴 했다. 17평, 작지만 큰 저층 주공아파트. 하지만 그 주공아파트도 네 번의 이사 끝에 겨우 정착한 집이었으니, 1989년 2월 서울로 전입 신고를 한 이래 우리 가족은 무려 일곱 번이나 이사를 하며 이 동네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일곱 개의 집 중 어느 하나도 우리집은 없었다.  

 

 

새로 이사온 집은 빌라인지 주택인지, 어쨌든 2층 짜리 집이긴 한데 우리는 2층에 있는 세 개의 방 중 두 개를 차지했다. 방 하나는 집 주인의 것으로, 실제 집은 홍천에 있어 가끔 올라와 그 방을 쓴다고 한다. 그런 줄 알았다면 세들지 않았을텐데, 그래도 월세가 너무 싸고 우리에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지라, 밤사이 고마운 마음을 되새기며 잠에 들었다.

주택 입구에는 가슴팍에도 미치지 않는 쪽문이 달려 있다. 2층으로 올라 오려면 Z자로 꺽인 계단을 두 번이나 돌아야한다. 계단 끝에는 윗 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철제문이 달려 있다. 튼튼한 자물쇠가 달려있긴 하지만 유리를 깨고 문을 열면 속수무책이다. 훔쳐갈 거라곤 책밖에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현관문을 닫고 왼쪽으로 돌아서면 또 다시 철제문이 보인다. 집으로 들어가는 최후의 관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집주인의 방이 있고 왼쪽에는 장판을 깔거나 도배를 하지 않아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창고가 있다. 이 두 방 사이로 길다란 복도가 이어진다. 그 복도 끝에 마치 두 개의 삶을 구분하려는 듯, 낡은 나무 문이 버티고 서 있다. 문을 열면 나타나는 두 개의 작은 방이, 바로 나의 집이다.  

 

 

이사에 대해선 그닥 거부감이 없다. 어릴 때 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다. 더 어릴적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억이 닿는 한에서만 헤아려 봐도 전북 이리 - 지금의 익산 -, 경기도 수원, 인천시 주안동, 송월동, 십정동... 그 중에는 우리 네 가족이 누우면 딱 하나 책상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남았던 단칸방도 있었고 13층 삼익 아파트의 꼭대기층도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막내 고모와 함께 살던 집은 금강빌라 302호였다. 베란다에 서면 파란 천막으로 둘러싼 김치 공장이 보였던 게 생각난다. 지금은 이 곳에 주안역이 들어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원래 망해서 간 집에는 정 붙이기가 힘들다던데, 이번 이사는 바로 전 집으로 갈 때에 비하면 웬지모를 친숙함마저 느껴진다. 한 번 겪어본 일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살았던 옛 동네로 돌아온다는 설레임 때문일 수도 있다. 뭐, 앞으로 이보다 못하지는 않을 거라는 체념섞인 희망 탓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변기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 다는 점과 화장실 환기가 어렵다는 점만 빼면 이 집은 대체로 합격이다. 책장이 복도에 있어 내 오래된 미래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여유를 누릴 수는 없게 됐지만, 그래도 책을 버리지 않고 가져온 것만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사할 때 마다 우리가 버리고 온 책을 모으면 아마 지금의 집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을 것이다.  

  

  <출처: Flickr, m4calliope>

 

이러나 저러나 25년여, 나와 함께 살아온 동네로, 나는 돌아왔다. 앞으로의 내 인생이 어디로 향할지, 이보다 좋아질지 아니면 더 나빠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 시작이 이토록 미약하다는 사실에 나는 감사한다.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끝은 창대하리라. 역경을 견디고 고난을 참는건 내 특기다.  

이 뒤의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들려주고 싶어 이 글을 쓴다. 글을 읽은 모든 사람은 내 삶의 목격자가 된 셈이다. 아무쪼록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도록 노력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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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교대역 플랫폼에 한 가득 쏟아져 있던 인분을 보고 놀라 이러는게 아니다. 냄새가 고약했기 때문도 아니다. 구역질이 났기 때문도 아니다. 어딘가에서 그 똥의 주인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겁이 났기 때문도 아니다.

물론 처음엔 이런것들 때문에 짜증이 나긴 했다. 하지만 짜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각은 적응했고 시선은 손에 들고 있던 책 쪽으로 곧장 옮겨갔다. 그런데 아무리 집중하려 해도 도통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시퍼렇게 멍들어 스치기만 해도 격통이 몰려오는 상처를, 웬지 모르게 계속 찌르며 아픔을 느끼고싶은 마조히즘적 본성이, 귓가에 인분을 쳐다보라고 속삭였다.

나는 끝내 그 똥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책도 읽을 수 없었다.
 

 

 

내가 삼호선에서 칠호선으로 향하는 고속터미널역 통로에 한 가득 쏟아져 있던 인분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고 하는건 거짓말이다. 깜짝 놀랐다.

불과 수 센티미터 앞에 똥이 놓여 있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걸었다. 참사를 막은 건 후각이었다. 코를 찌르는 인분의 냄새는 고장으로 멈춰버린 대관람차처럼 내 발을 허공에 정지시켰다. 나는 멀찍이 돌아나와 인분을 바라보았다. 바닥위에 점점이 찍혀 있는 흔적을 봤을 때 누군가 똥을 밟고 지나간 것이 확실했다.

아침부터 어지간히 운이 없는 사람이다.

똥은 매우 굵었다. 하마터면 몸짓이 거대한 짐승의 짓이라고 생각할 뻔 했다. 그러나 지하철 내를 돌아다닐 수 있는 동물 중 크기로 따지면 인간이 으뜸 아닌가. 코끼리나 코뿔소 따위가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확실했다.

나는 이 똥이 교대역의 그 똥이라고 확신했다. 똥의 색깔과 크기가 심각할 정도로 비슷했다. 게다가 교대와 고터는 삼호선으로 한 정거장 차이였다. 교대가 먼저고 고터가 나중인걸 볼 때 녀석은 삼호선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에 앞서 범인이 아무도 없는 플랫폼에 쭈그리고 앉아, 어딘가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관객들 때문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밤새 삭힌 응가를 시원하게 배설해낼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봤다.

이런 상상을 한다고 해서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건 없다. 도덕은 도덕이고 감정은 감정이다. 아침마다 변비로 고통받는 누군가라면 그것이 얼마나 시원하게 배설된 건지, 그리하여 자신은 언제 경험해 봤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 정화의 기쁨을 어떻게 이리도 간단하게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사실에, 일부는 부러움과 또 일부는 시기심이 충만한 시선으로 응가를 바라보지 않을 거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한편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플랫폼 위에 덩그러니 놓인 응가가 우주의 비밀을 노래하는 우울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안달복달 해봐야 인간은 결국 똥으로 변신할 뿐이다.

무한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100년 이라는 시간은, 저 응가가 콘크리트 위에 존재할 수 있는 수 십분의 시간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라고, 누군가는 울적한 마음에 빠져 그날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원초적 행위는 그것의 단순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심오한 상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만약에 그가 시원하게 갈긴 응가 옆에 장 활동을 돕는 기능성 음료를 놓아뒀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따위 글을 쓰기 위해 이토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녀석은 그렇게 노골적인 놈이 아니었다.

한때 자기 몸의 일부였던 말랑말랑한 덩어리를 단칼에 분리해낸 뒤 곧이어 도착하는 전철을 타고 유유히 사라진다. 고도로 압축되어 있는, 나무랄데 없는 퍼포먼스다.  

나는 언젠가 꼭 한번, 그 놈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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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베이의 데뷔작 '나쁜 녀석들'(Bad boys, 1995)이 한국 비디오 대여점의 선반 한구석을 차지했을 때, 사람들은 '대박인 비디오가 하나 나왔다'며 포스터를 지나칠 때마다 한 마디씩 하곤 했다. 참나, 그게 벌써 16년 전이다. 

 

 

 

내 기억에 '나쁜 녀석들'은 저예산 영화였다. 윌 스미스가 나오는 영화가 무슨 저예산이냐고 하겠지만 1995년 당시 윌 스미스는 저예산 영화에 어울리는 싸구려 배우였다. 사실 그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영화는 나쁜 녀석들 보다 일년 늦게 개봉한 '인디펜던스 데이'(1996)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영화 감독이 롤랜드 에머리히다.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보충 설명. 이 사람은 블록버스터만을 고집하면서도 주연 배우만큼은 절대 블록버스터하지 않은 배우를 쓰는걸로 유명하다. 소시적의 제이크 질렌할도(투머로우에 출연) 여기에 속한다.
어쨌든,

잘나가는 연예인들도 한때 어려운 시절이 있었듯 현존하는 최강의 블록버스터 감독 마이클 베이도 처음에는 저예산 영화로 시작했다. 하지만 스타일리쉬한 액션 연출과 유머에 대한 감각, 성공하는 대중 영화의 절대 방정식 두 개를 공학 계산기도 없이 암산으로 풀어 버리는 듯한 마이클 베이를 나쁜 녀석들의 프로듀서 제리 브룩하이머는 한 눈에 알아봤다. 

 

  

<CSI의 아버지 제리> 

 

이 둘이 의기투합한 결과가 1996년 더 락(The Rock)! 1997년 콘 에어(Con Air)! 1998년 아마겟돈(Amargedon)!이다. 오늘날 제리 브룩하이머가 CSI로 침좀 뱉고 캐리비안의 해적으로 어깨뽕을 넣어 입을 수 있는 이유는 사실상 이 3년동안 내리 쌓은 성공이 진토되고 넋이 되어 자금적, 기술적으로 튼튼한 토대가 됐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진주만(Pearl Harbor, 2001)이었다. 전작 3편의 과도한 흥행으로 한껏 고무된 마이클 베이는 장장 300km의 필름을 소모하며 어지간히 미친짓을 해댔다. 흥행 성적 자체는 그리 나쁜게 아니었으나, 마이클 베이는 그 해 최악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줄거리가 개판인 탓이었다.

그런데 그게 뭐?

마이클 베이의 영화치고 줄거리가 탄탄한 영화는 더 락 외에 전무하다. 브루스 윌리스 대신 살아 돌아온 벤 애플렉을 함박 웃음으로 맞이하는 리브 타일러의 모습에서 친구의 친구를 사랑한 케이트 베킨세일을 그리는건 어렵지 않은 일 아닌가? 만약 마이클 베이가 꽉 짜인 스토리 구성 능력까지 갖췄다면 그건 거의 스티븐 스필버그 급이다. 그런데 스티븐 스필버그가 베이만큼 액션을 잘 찍나?

마이클 베이가 스무쓰한 스토리 텔링에 젬병이라고 욕하지만, 그의 영화에선 액션, 근래에 들어서는 CG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스토리 텔링이다.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트랜스 포머(Transformer, 2007)'다. 

 

 

 

트랜스 포머의 줄거리는 단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I'm Optimus Prime!

그리고는 옵티 머스 프라임의 주먹이 날라간다. 대사도 필요없다. 액션의 도입부에서 묘사하는 상세한 변신 장면은 일종의 세레모니다. 전투전에 행해지는 마우리 족의 군무처럼 이것은 스펙타클을 기대하는 관객의 마음속을 한껏 고양시킨다. - 나는 변신 장면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여전히 줄거리가 개판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선 부단히 단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할 때 마다 창자가 비틀어지고 머리가 어질해진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선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진지하게 충고하지만,

다 개똥같은 얘기들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평생 장점만 갈고 닦아도 그것이 꽃필지 시들어 버릴지 알 수 없을 만큼 짧다. 그런데도 어떻게 단점 따위에 전전긍긍하며 마음을 졸일 시간이 있겠는가?

마이클 베이는 마이클 베이다. 못하는건 하지 않는다. 당신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되든 마이클 베이가 되든 그건 내가 알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베이의 길이 우습다고 깔봐선 안된다.

그건 사자의 목이 기린의 목보다 짧다며 비웃는 것과 같다.


<뒷 이야기>
마이클 베이는 2003년 '나쁜 녀석들 2(Bad Boys 2)'를 마지막으로 제리 브룩하이머와 결별했다. 제작비가 폭증한 것에 비해 벌이가 시원찮았던 탓이리라. 결별의 사유가 제리에게 있었는지 마이클에게 있었는지 알바 아니지만, 마이클이 제리를 떠나 만든 첫 영화가 아일랜드(2005)라는 사실을 볼 때, 마이클의 선택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Dream Works를 만났고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갑옷과(제작자) 샤이아 라보프라는 검까지(주연 배우) 얻게 됐다. 스티븐은 다행히 마이클의 장점과 가능성을 존중해주는 관대한 제작자인 것 같다.

믿음은 언제나 위대함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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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웃에는 데이빗 린치, 데이빗 크로넨버그, 데이빗 핀처, 아주 넓게 봐줘서 데이빗 보위까지 네 명의 데이빗이 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를 연출한 것은 데이빗 린치고 컬트 영화 크래쉬(1996)를 만든 것은 데이빗 크로넨버그이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데이빗 보위다. 그리고 데이빗 핀처는 소셜네트워크(2010)를 만들었다.

데이빗 핀처의 소셜네트워크가 공개 됐을 때 알만한 사람들은 기대와 흥분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1995년에 세븐, 1999년에 파이트 클럽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물론 에일리언 3(1992)를 연출한 것도 바로 이 사람이에요 라고 말해 찬물을 끼얹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데이빗 핀처는 세븐과 파이트 클럽을 만든 사람이고 최근에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까지 거꾸로 보내버린 감독이다. 기대를 안할 수가 없었다. 



 
 

 

소셜 네트워크는 하버드 컴공생 마크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을 만들고, 성공하고 돈 냄새를 맡은 인간들과 괴로운 소송을 벌이는 내용이다. 휘황찬란한 성공기가 아니다. 욕망과 성공에 눈이 먼 인간들을 관조하며 그 본성을 속살까지 드러내는 잔인한 영화다.

그래서 영화의 조명은 어둡다. 살인범의 이야기인 세븐과 정신분열자의 이야기인 파이트 클럽 그리고 소셜 네트워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이 무거운 조명이다. 카메라는 이 어둠 속에 들어 앉아 인간의 악한 본성을 포착한다.

소셜 네트워크가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가 밋밋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는 성공과 실패와 그리고 분쟁을 극적으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산발적으로 이야기를 내뱉는다. 그래서 감정은 고조되지 않는다. 힘들게 올라간 롤러 코스터가 내리막길 직전에 멈춰 버린 느낌. 아니, 아예 오르막길까지 가는 평평한 레일 위를 달리다 만 것 같은 이 느낌은 그대로 관객의 마음 속에 남아 욕구 불만을 일으킨다. '이런걸 볼려고 8,000원이나 낸건 아니지' 하는 한탄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런식의 전개가 이뤄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실제 페이스북의 성공이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크 주커버그의 대사처럼 '아직 이게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페이스북은 세계 최고의 소셜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그들은 어디까지 클 줄 모르는 폭발적 성장기의 어린아이였으나 사람들은 자꾸만 잡아다 키를 재려 했다.

엔젤 투자자들이나 넵스터의 숀 파커는 칼을 든 도축업자였고 페이스북을 통제 가능한 울타리에 가둬 놓은채 이 돼지에 칼을 꽂아 한 몫 벌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내는 짧았고 결국 도살 명령은 내려졌다. 피냄새를 맡은 파리떼들이 초대받지 못한 파티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야기 중간중간 끼어드는 소송 장면들은 이런 상황을 은유하는 듯 하다. 그것은 도축업자의 칼날이 살갗을 찍는 것처럼 갑자기 나타나 여지없이 관객의 환상을 깨뜨린다. 데이빗 핀처는 그들의 성공이 아니라 사라져버린 꿈과 깨져버린 우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만하는 주커버그의 심리에 집중하라고 강요한다. 

 

 

 

그런데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의 순결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이스북의 원래 아이디어를 윙클보스 형제로부터 제공 받은 것이 명백함에도 그는 '소스 코드는 온전히 나의 것'이며 페이스북을 만드는 일은 '자신에게 소송을 건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지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을 요구한다'고 거드름을 핀다. 이런 태도는 소송 과정을 엉망으로 만들고 그것을 지루하게 연장시키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리는 원흉이 된다. 

그러나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떠벌이려는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심각한 컴플렉스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학창 시절 지지리도 공부를 못했던 친구가 오랜만에 동창회에 나와 땅 팔아 부자가 된 사연을 주구장창 늘어 놓는 것 처럼 말이다.

사실 마크 주커버그는 컴플렉스 덩어리다. 영화 초반 주커버그가 에리카에게 - 에리카 올브라이트, 여자친구 - 쉴새 없이 떠드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자기 지능을 과시하고 싶어하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피닉스 클럽'의 부름을 받지 못한 Geek일 뿐이다.

그가 절친 에두아르도를(피닉스 클럽) 버리고 숀 파커를 따르기 시작한 것도 컴플렉스 때문이다. 주커버그는 숀 파커가 냅스터를 만들었고, 그 사실이 자신을 무시하는 세상을 엿먹이는 열쇠라고 믿는다. 실제로 숀 파커는 주변 사람과 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사실은 페이스북을 만든 자신 또한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들었다.

이렇게 페이스북은 주커버그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사회적 보호망이 된다.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주커버그로 불리는 한 그는 더 이상 별볼일 없는 Geek으로 취급받지 않아도 된다. 뿐만아니라 Facebook의 명함 뒤어 숨어 이렇게 상스러운 말을 지껄여도 사람들은 그를 우러러 볼 뿐이다. I'm CEO, bitch!라고 말이다.

이 영화가 시종일관 침울하고 어두컴컴한 이유는 페이스북을 둘러싼 소송과 갈등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페이스북 자체가 인간의 어두운 마음에서 태어났다는 것 즉, 사랑받지 못한 자의 뒤틀린 욕망을 먹이로 자라났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의 성공같은,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보장된, 이토록 흥분되는 소재에 아무 거리낌 없이 찬물을 끼얹을 수 있는 건 데이빗 핀처 밖에 없다. 그가 헐리웃 자본으로 일하는 상업 영화 감독이라는 점은 이런 사실을 더더욱 놀랍게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이번에는 데이빗 핀처도 별거 없었어'하고 단정할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소셜 네트워크를 계기로 데이빗 핀처의 다음 영화를 선택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것이 데이빗 핀처를 작가로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는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확고한 스타일과 철학이 있는 남자라면 다음 영화 아니 다다음 영화 아니 다다다음 아니아니 영원히 그의 영화를 기대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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