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참조하여 인간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첫번째 인간이 바로 아담이다.

나는 이 세상의 많은 여자들이 왜 이 수상한 대목을 한치의 의심없이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교리를 맹렬히 옹호하기까지 하는지 의아하다. 이 대목은 아무리 봐도 기독교가 남성에 남성을 위한 남성의 종교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악한 구절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라 태초의 인간 아담은 남자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형상을 빌려준 신도 남자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의심하는 건 이런거다. 신이 남자고, 그의 형상을 본따 만든 그 잘나빠진 첫 번째 인간까지 남자인데 오늘날 모든 생명은 왜,

여자의 뱃속에서 탄생하는가?

내 보기에 신은 여자였다. 열달 동안 뱃속에서 전전긍긍 생명을 빚어내 세상에 내놨는데, 젠장! 그게 아들이었다.

빨래도 청소도 요리도 못할 뿐만 아니라 주말엔 TV 앞에 앉아 축구를 볼 생각만 하고 인터넷과 컴퓨터를 발명해 방구석에 처박혀 게임만 일삼는 아들을 보자 신은 아들이 곧 이 세상을 파괴할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은 다시 한번 전전긍긍하여 또 하나의 인간을 낳았다. 이번엔 여자였다. 진정 자신을 닮은,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여자 말이다. 신은 이 여자를 남자에게 붙여줘 이 세상의 고요와 평화를 지키려 했다.

꿈도 참 야무지지. 


 
 

 

여자가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건 전부 헛소리다. 여자는 남자에게 진절머리가 났던 거다.

냄새나고 무식하고 게으른 남자에게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진지한 것인지 가르쳐 주기 위해 여자는 스스로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리하여 남자는 광야로 쫓겨나 평생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이후의 역사는 힘만 믿고 까부는 남자들에게 완전히 장악당한다. 그들은 태초의 책을 꺼내 창세기에 등장하는 신을 남자로 바꿨고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를 취해 만들었다고 뻥을 쳤다. 그렇게, 성스런 여성은 태초의 한 페이지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슬프지만, 이게 바로 창세기의 숨겨진 진실이자 우리 역사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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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포머 얘기를 안할 수가 없다. 이 시리즈가 처음 나왔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는가? 난 울었다.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다니! 그것도 쿵짝쿵짝 정교한 시계가 돌아가듯 한치의 오차 없이 변형되는 빈틈없는 동작이라니! 이건 마치 CG가 아니라 실제 모형처럼 보였다. 비로소 전능하신 오토봇들이 하늘에서 내려오사 저리로서 쌈마이 메카닉과 후루꾸 CG를 심판하러 오셨구나하고 나는 생각했다.
 

 

 

아 물론 스토리 텔링 얘기는 하지 말자. 마이클 베이는 이야기의 개연성을 죄악으로 생각하고 스펙타클의 절제를 수치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는 헐리웃에 배금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강림한 사탄이 분명하다. 베이의 악명 높은 스토리텔링은 잽없는 복서, 찐빵없는 앙꼬, 수 천만의 관객을 추락 직전의 저가 항공기에 태워 이제 막 폭발하기 시작한 화산 위로 몰고 나가는, 참으로 환장하겠는 비행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이클 베이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가진 장점이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베이는 전 세계 관객들과 영화 관계자 그리고 비평가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난 잘하는 건 잘하고 못하는 건 못해. 그런데 내가 못하는 일에 대해 전전긍긍하며 내 영화를 찍어야 할 이유가 뭐지?'

이 천박할 정도로 솔직한 고백은 여지껏 몇 편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나를 실망시켜 본 적이 없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 몇 편의 영화에 트랜스포머3가 포함된다고 말 하더라도 당신이 기어이 이 영화를 볼거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베이에 대한 단상>

1995년 마이클 베이가 '나쁜 녀석들(Bad Boys, 1995)'을 세상에 내놨을 때 1986년 탑 건(Top Gun)을 제작한 이후 줄곧 침체기에 있던 제리 브룩하이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이 영화는 누구도 성공을 예상치
못한 저예산 영화였으나 결과적으로 제리에겐 상층권을 돌파하는 로켓이 되어 버렸다. 나쁜 녀석들의 총 제작비는 약 천만달러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 중 베이에게 지급된 연출료는 고작 십만 달러였다.

마이클 베이는 헐리웃 기준으로는
껌 값도 되지 않을 이 돈을 받고 그해 제리에게 1억 4천만 달러를 벌어다 줬다. 이 후 더 락(The Rock, 1996), 아마게돈(Armageddon, 1998)의 연속 히트는 마이클 베이의 전성기와 함께 제리 브룩하이머 사단이 탄생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둘 사이의 화근은 '진주만(Pearl Habor, 2001)'이었다. 항간의 소문으로 무려 3만 킬로미터의 필름을 썼다는 이 영화는 3시간이 넘는 런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막장 영화라는 오명을 벗지 못했다. 아슬아슬하던 관계는 찌릿했던 예전의 추억을 더듬듯 나쁜 녀석들2(Bad Boys 2, 2003)를 낳았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두 사람은 이 영화를 계기로 그나마 남아 있던 정까지 털어내고 결국 각자의 길을 향해 간다.

이후 제리는 고어 버번스키를 영입해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대히트, 영화 한편 당 8억 달러를 버는 무적의 제작자가 되고, 마이클 베이는 아일랜드(The Island, 2005)를 만들어 '베이, 제리에게나 돌아가'라는 말을 듣는 수모를 당한다. 그래도 아일랜드를 제작한 드림웍스(Dreamworks)는 베이를 그냥 내치지 않았다.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는 베이의 차기작을 제작하며 베이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을 트랜스포머(Transformer, 2007)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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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는 감독 롭 마샬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영화였다. 개성 이만점의 캐릭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유머, 비관습적인 액션 등 전작들이 쌓아온 DNA를 송두리째 날려 버린 이 영화의 유일한 칭찬 거리는, 캡틴 잭 스패로우를 조니 뎁이 연기했다는 것 정도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업적을 이토록 손쉽게 무너 뜨릴 수 있을까? 제리 브룩 하이머는 전시관의 유리를 깨고 더러운 쇠사슬을 걸어 명예의 전당에 잠들어 있는 전설의 블랙펄을 쓰레기 투성이의 바다위로 끌어내고야 말았다. 
아무리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냈더라도 그 본성은 역시 장사꾼에 지나지 않음을 천명한 사건이라고나 할까?

영화가 재미없는 이유에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감독이 바꼈다. 잭 스패로우의 캐릭터를 성공적으로 구축하고 이를 통해 독특한 코미디를 영화에 이식한 고어 버번스키가 다른 영화의 연출을 핑계로 떠나 버렸다. 물론 바톤을 이어 받은 롭 마샬도 그렇게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이 남자의 데뷔작 '시카고'를 보라! 그러나 다음 작품 게이샤의 추억(2005), 최근작 나인(2009)에 이르기까지 롭 마샬은 완연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남자에게 
시리즈의 새 기점이 될 중요한 작품을 맡기는게 옳은 결정이었을까? 롭 마샬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시대극과 모험영화'라고 했지만 개봉한 영화를 보면, 때로는 그냥 좋아하는 걸로 끝낼 일도 있다는 교훈을 배우게 된다.  


 



                         





둘째는 키이라 나이틀리와 올랜드 블룸의 부재다. 심각했다. 지금까지 캐리비안의 해적은 윌 터너(올랜드 블룸),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 잭 스패로우(조니 뎁), 이 세 사람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간 이야기를 때로는 
미스테리로 또 때로는 액션 활극으로 풀어나가며 타이트한 긴장감과 볼거리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이 익숙한 삼각 관계가 해체되고 나자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는 말 그대로 '낯선 이야기'가 되어 망망한 바다 위를 표류했다. 

나는 잭 스패로우와 새로운 적 
검은 수염, 그리고 소문난 인어가 쏟아내는 모험과 코미디를 기대하며 집중을 거듭했지만,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건 나를 아득한 꿈 속으로 빠뜨리는 강력한 수면제였다.

셋째는 페넬로페 크루즈의 존재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새로운 여주인공 안젤리카 역을 맡았으며 안젤리카는 설정상 잭 스패로우와 애증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애증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랑과 증오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과 증오의 사이다. 그래서 애증 관계를 연기하는 배우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무게추를 따라 아슬아슬한 밀고 당기기를 해야한다. 캐리비안의 해적: 망자의 함에서 잭 스패로우를 과감히 크라켄의 배때기로 밀어 넣은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을 보라. 그에게 수갑을 채우기 전에 보여준 엘리자베스 스완의 키스는 진심이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제는 죽어줘야겠어!' 안젤리카에겐 이런 느낌이 없다. 소리를 지르고 열심히 뛰어 다니지만 그녀는 그저 철없는 말괄량이를 연기할 뿐이었다. 잭 스패로우를 파멸시키기 위한 유혹, 그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애틋한 사랑, 안젤리카는 이 중 어느 것 하나 보여주지 못했다. 



                       





1984년 '나이트메어'로 데뷔한 이래 조니 뎁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결코 대중적인 배우는 아니었다. 이런 그를 일약 세계적 스타로 만든 것이 바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다. 조니 뎁은 주목받지 못하는 마이너리티였고 
실제 삶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바로 그 경험을 잭 스패로우의 고독한 눈빛으로 표현해냈고 그를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악당이자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망나니로 만들어 냈다. 이렇게 탄생한 잭 스패로우가 낯선 조류에 휩쓸려 허우적 대는걸 보니 시리즈의 팬으로서 그리고 조니 뎁의 팬으로서,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낯선 조류'를 얘기하면서 인어 얘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 실망할까봐 미리 말해주면 인어는 별로 볼거리가 되지 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볼게 인어밖에 없었다'라고 한다면 그건 이 영화가 최악이었다는 얘기를 1980년대식 농담으로 표현한 거니 다가오는 주말을 위해 깊이 새겨두기 바란다(다행히 당신의 Box Office엔 쿵푸팬더2와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라는 대안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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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겠지만 X-Men 퍼스트 클래스는 X-Men 시리즈의 프리퀄이다. 배경은 1960년대 미국. 대통령은 존 F.케네디. 굳이 그 시절의 대통령을 언급한 이유는 이 영화가 존 F.케네디 재임 시절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 때문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

때는 바야흐로 냉전시대. 소련과 미국이 군비 확장에 열을 올리고 전 세계가 핵 전쟁의 위협에 벌벌 떨던 시절 이 위협이 현실로 다가온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쿠바 미사일 사태다. 

이는 사실 미국이 초래한 사건으로 
미국이 터키와 중동에 ICBM(대륙간 탄도탄: 핵탄두를 실어 보낼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자 이에 대응하여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면서 발생했다. 소련의 미사일 기지 건설 과정이 미국의 첩보 기관에 의해 발각되자 존 F.케네디는 '즉각 건설을 중단하지 않으면 제 3차 세계대전도 불사하겠다'는 과격한 발언으로 온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다. 

물론 역사적 사실은 기가 꺽인 소련이 미사일 기지 건설을 중단하면서 
존 F. 케네디를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진정한 자유의 수호자로 만들어 주지만 영화는 이 위기가 사실은 X-Men들의 활약으로 해결됐음을 가정한다. 








X-Men 퍼스트 클래스가 전작과 다른 한 가지. 그건 바로 X-Men 1, 2편의 감독이자 불과 26살의 나이에 '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 1995)'를 연출한 천재 감독 브라이언 싱어가 제작과 각본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에릭(매그니토)의 과거가(유태인으로서 고통 받은) 
비중있게 그려지고 '뮤턴트'라는 것이 가진 상징적 의미가 심도있게 다뤄진다.

사실 X-Men에서 뮤턴트들은 단순히 초능력을 가진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만화가 처음 등장했을때 부터 뮤턴트는 사회적 약자들을 상징했다. 1963년의 미국 사회에선 그 약자가 바로 극심한 인종 차별을 당하던 흑인들이었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일반인들의 멸시를 받는 뮤턴트들에서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공평한 기회를 박탈 당하고 무자비한 폭력에 짓밟혀야 했던 흑인들을 떠올리는 건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37년 뒤, 브라이언 싱어는 이 뮤턴트들을 스크린 위로 불러 모아 헐리웃 블록버스터를 만든다. 하지만 브라이언 싱어의 목표는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었다. 그는 원작이 가진 사회적 메시지를 그대로 계승하길 원했고 뮤턴트들이 가진 초능력이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상징으로 비춰지길 바랐다. 

이런 이유로 X-Men 1, 2편은 주인공들이 가진 초능력의 화려함 보단 오히려 그것을 갖게 됨으로써 겪어야했던 역설적 아픔들에 초점을 맞췄다. 결론적으로 21세기의 뮤턴트들은 1963년의 흑인을 넘어 다양한 유색 인종, 소수 문화, 동성애자 등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마이너리티들을 상징하게 됐다.

브라이언 싱어가 뮤턴트들을 다루는 방식은 확실히 기존의 블록버스터 감독들과는 달랐다. 그는 뮤턴트들을 유랑극단의 신기한 괴물들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내면의 깊숙한 상처를 들춰보는 사람처럼 그의 행동은 조심스럽고 진지했다. 나는 최근에 와서야 이런 태도의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브라이언 싱어 자신이 유태인이자 동성애자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X-Men 1, 2는 아주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촬영됐다고 한다. 연기자들은 빔을 쏘고 날아다니는 걸 즐기기 보단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인식에 집중했고 이는 원작 시리즈가 암시하는 뮤턴트들의 의미를 완벽히 반영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시리즈의 3편에(X-Men: 최후의 전쟁, 2006) 이르러 완전히 반전되어 X-Men은 그저그런 액션 영화가 되고 만다. 전작의 영광을 위해 3년 뒤 엑스맨 탄생: 울버린(2009)이 개봉되지만 이 영화는 망가진 3편과 비교해봐도 처참할 정도의 재앙이었다. 이는 모두 브라이언 싱어가 슈퍼맨 리턴즈(2006)의 촬영을 위해 X-Men을 떠났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하지만 구태의연하게 과거를 따져봐야 무슨 이득을 얻겠는가? 집나간 탕자는 돌아왔고 Box Office에선 부활한 X-Men이 기다리고 있는데!









X-Men 퍼스트 클래스에선 아쉽게도 전작의 오리지날 캐릭터들이 등장하진 않는다. 대신 파릇파릇 어린 뮤턴트들이 새로운 능력과 함께 등장한다. 그들은 에릭(매그니토)과 찰스(프로페서 사비에)의 도움으로 초능력을 발전시키고 X-Men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생애 처음으로 동질감이라는 것도 느껴본다. 하지만 평화는 길지 않았다. 그들은 곧 중요한 삶의 기로에 들어선다. 돌연변이로 당당하게 살 것인가? 평생 능력을 숨기며 정상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에릭은 평화를 주장하는 찰스와 전쟁을 선언하는 자기 사이에서 고민하는 뮤턴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No more hiding.

남보다 우월한 능력을 평생 죄처럼 안고 살아가는게 뮤턴트들의 운명이다. 에릭은 이 운명의 사슬을 끊고, 돌연변이야 말로 인류 진화의 시작임을 증거하려 한다. 에릭은 묻는다. 네안데르탈인은 왜 멸종했나? 더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바로 호모 사피엔스가 사라질 차례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영화는 뮤턴트들의 심리적 갈등과 그들에대한 정상인들의 공포를 드러내놓고 표현하면서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발한다. 나는 이 노골적인 표현이 어쩌면 현실 정치에서의 *진보와 **보수의 대결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에 더더욱 영화에 집중 할 수 있었다. 에릭이 혁명을 추구하는 급진 좌파라면, 찰스는 융화를 추구하는 중도 좌파랄까? 

혹시 전작을 보지 않아 망설이는 관객들이 있다면 그런 걱정일랑 하덜들 말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나오는 순간, 당신은 시리즈의 전 편을 찾아 보고 싶은 마음에 온 몸이 근질근질해 질 것이다.


*진보: 뮤턴트와 그들을 지지하는 인간들.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집단.
**보수: 보통 인간들. 자신보다 우월한 능력을 가진 집단에게 기득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무지와 폭력으로 표출하는 집단. 쉽게 말해 한나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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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해는, 이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영화가 아니다. 나홍진 감독의 전작 추격자를 본 500만의 관객들이 무슨 기대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의 미학적 기술적 측면에선 황해가 추격자보다 훨씬 낫다. 물론 기술적 진보는 이 영화의 제작비가 100억이 넘었다는 점에서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폭발적으로 데뷔했던 많은 신인감독들이 뒤이어 맡은 대작 영화에서 거의 예외없이 비틀거렸다는 점을 감안할 때, 나홍진 감독의 연출력은 충분히 박수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연기

하정우와 김윤석의 연기는 최고였다. 하정우는 영화 초반 구남의 감정을 다소 산만하게 표현하는 면이 있었으나 차츰 안정되가더니 후반부에 이르러선 구남과 완전히 일체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구남이 복수에 눈을 떴을때, 그 절제된 감정에서 뿜어나오는 차가운 복수에 난 온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의 섬뜩함을 느꼈다. - 한국 영화에는 차가운 복수가 딱 두 번 있었는데, 첫째가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고 둘째가 바로 '황해'의 구남이다. '악마를 보았다'의 수현이(이병헌 분) 동일한 슬로건을 내걸고 질주했지만 이 둘에 비하면 명함도 내밀기 힘들다. 

김윤석의 경우 지금까지의 평가가 다소 과장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나는 황해의 면정학을 보면서 완전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무심한 표정에서 터져나오는 광기어린 폭력과 뻔뻔함의 표현은 면정학을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그로테스크한 악당으로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연기가 배우만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좋은 연기는 감독과 배우의 시너지에서 나온다. 비유하자면, 감독이 깔아 놓은 레일 위로 배우가 맹렬히 달려나가는 것이랄까? 영화에 따라 레일 위를 달리는 건 호화로운 여객차가 될 수도 있고 냄새나는 화차가 될 수도 있다.

영화 황해를 달리는 건 두 대의 폭주 기관차다. 서로 비껴 지나간듯 보이는 두 대의 기관차가 사실은 서로를 향해 달려오고 있음을 알아챌 때, 우리는 긴장감에 흠뻑 젖어 두 주먹을 꾹 쥐게 된다.   




연출


황해에서 가장 잘된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면정학의 무리가 한국의 아지트에서 내복만 입은채로 고기를 뜯는 장면이다. 어떤 사람은 이 고기가 사람 고기라고 하는데, 설정 상 개고기가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개고기는 연변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상처 회복에 탁월하기 때문에 이전 상황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하지만 생김새는 족발을 더 닮았다). 물론 중요한건 고기의 종류가 아니라 장면이 만들어 내는 탁월한 분위기와 효과다.

순서 상 이 장면은 구남과 면정학의 추격신 직후에 등장하는데, 기본적으로 앞 시퀀스에서 완전히 연소해버린 긴장의 잔해를 추스려 남은 이야기를 대비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래서 장면의 첫 샷은 풀샷이다. 추격씬이 빽빽한 클로즈업 위주의 편집이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풀샷은 시각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한편 영화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면정학의 아지트를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풀샷을 가득채운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후줄근한 내복 차림이다. 피가 배어나온 하얀 붕대를 여기저기 감은채로 열심히 고기를 먹는다. '맞고 들어왔으니까, 오늘 하루 수고했으니까 고기나 먹고 힘내보자'는
단순무식한 생각이 잔뜩 쫄아있던 관객들의 옆구리를 간지럽힌다. 웃음이 나올듯 말듯 미묘한 긴장이 유지되는 이유는 낡은 목조 건물이 뿜어내는 공포와 '뜯어 먹는다'는 행위의 폭력성 때문일 것이다.

분위기가 점차 이완의 국면으로 접어 들때 쯤
김태원의 부하들이 아지트를 습격한다. 또다시 분출하는 핏빛 아드레날린. 면정학이 먹다 남은 뼈다귀를 휘둘러 적들의 두개골을 깨는 순간, 장면은 터져나온 핏줄기로 그로테스크의 낙인을 찍고 폭력 미학의 정점에 올라선다.


얼핏 싱겁게만 보이는 이 장면은 사실 복잡한 계산이 들어 있는 고난도 씬이다. 만일 나홍진이 이 장면을 구남의 살해 시뮬레이션으로만 채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서스펜스는 잔잔한 물결만을 일으킬 뿐, 해일이 되어 덮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홍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시뮬레이션 중간에 갑작기 김승현을 끼워 넣는다. 예기치 못한 만남. 틀어지는 계획. 지금까지 잔잔하게 꿈틀대던 장면속의 공기가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진다. 우리는 구남이 무엇을 위해 여기 있는지 너무나 잘 안다. 우리는 구남과 함께 이 상황을 모면할 완벽한 변명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쭈뼛쭈뼛대며 어쩔줄 모르는 구남의 모습은 보는 사람을 더더욱 미심쩍게 만든다. 그런데 이 불쌍한 살인자를 구원해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피해자 김승현이다. 

'연변 사람이야?'

살았다. 그래 구남은 연변사람이다. 이제부터는 거짓말할 필요가 없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면 된다. 구남의 공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떨림도 멈춘다. 뒤이어 김승현은,

'춥다고 이런데 들어와 있지마'

라고 말한다.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 구남과 우리의 계획은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 거
기다가 김승현은 떠나가는 구남을 불러 지갑에서 이 만원을 꺼내 주기까지한다. 돈 앞에서 머뭇거리는 구남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받어'라고 반말을 한다. 이 남자, 정말로 대범하다.




우리가 김승현에 대해 알게 되는 건 살인 사건 후 보도되는 뉴스를 통해서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왜 그렇게 대범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자기를 죽이러 온 두 명의 킬러를 맨 손으로 제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바로 여기서 해소 된다. 물론 왜 김승현을 죽여야만 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 있다.

이 장면은 좋은 시나리오라는 빵 위에 탄탄한 연출력이라는 패티를 얹은 최고급 수제 햄버거다. 시나리오는 불필요한 정보를 늘어 놓아 이야기의 발목을 잡지 않는다. 정보는 자신을 감춰야 할 곳에선 숨죽여 기다리다 때가 왔을 때 정확히, 필요한 만큼만 드러낸다. 연출은 서스펜스와 미스테리의 블록을 두 손에 움켜 쥐고 이야기를 교묘하게 조립해 나간다. 이 완벽한 미로 속에서 관객은 길을 잃은 방랑자가 된다.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나아갈 길을 찾다 보면 어느덧 뒷목까지 다가온 반전의 칼날이 단칼에 머리를 베어 버린다.







'면정학 아지트 습격 시퀀스'가 미장센, 연출, 조명 등 객관적인 측면에서 가장 훌륭한 장면인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역시 김승현 교수와 구남이 처음으로 만나는 '논현동 빌딩 씬'이다.  









갑작스런 김승현의 등장은 관객에게 강렬한 첫인상과 함께 여러 의문을 남긴다. 김승현의 정체는 뭘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죽여야 하는 걸까? 아니 딱 봐도 만만치않을 이 사람을 내가 과연 죽일 수나 있을까?

김승현이 구남을 구원하는 순간 팽팽했던 긴장감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관객이 여전히 자리를 붙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뒤이어 쏟아져 나오는 의문들이 서스펜스의 빈자리를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나홍진이 추격자로 500만 관객을 찍었을 때, 나는 한국 영화계에 또 하나의 뽀록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가 논현동 빌딩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각을 고쳐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될성 부른 나무를 떡잎 부터 알아보는 거라면 명감독의 자질은 한 컷만 봐도 알 수 있다. 황해의 떡잎은 논현동 빌딩이다. 그러니까 김승현의 한 마디가, 나홍진의 미래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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