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8월 9일 처음 방문한 곳은 톱카프 궁전이다. 우리는 5일짜리 박물관 패스를 미리 끊었기 때문에 매표소에서 줄을 서지 않고 입장했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술탄 메흐메트는 당연히 비잔틴의 황궁을 궁전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도와 무슬림은 생활방식 자체가 달라서 사용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당연히 새 술은 새 부대에 아닌가, 집을 새로 장만해서 이사를 하는데 누가 헌가구를 쓰겠는가. 어쨌든 정복자는 처음에는 지금의 그랜드 바자르 옆 이스탄불 대학이 있는 자리에 궁전을 지었다가 얼마 후에 지금의 톱카프 궁전 자리에 새로운 궁전을 지었다. 당시에는 궁전입구 출입문 양 옆으로 대포를 배치해 놓아서  ‘톱카프’ 궁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톱은 대포라는 말이고 카프는 문이란 뜻이다.

 

 

1475년~1478년에 지어진 궁전은 19세기 중엽까지 근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인 술탄들이 거처한 정궁이다. 동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를 잇는 거대한 제국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상의 중요한 사안들이 이 곳에서 입안되고 결정되었다. 원래 궁전의 영역은 지금의 귈하네 공원을 모두 포함하여 이스탄불 곶 상단부 대부분을 차지하는 엄청나게 넓은 지역이다. 궁전은 골든혼과 보스포루스해협, 마르마라해 세 바다의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400년동안 몇 차례의 증축과 개축, 도시개발을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아마도 이런 절묘하고 멋들어진 곳에 지어진 궁전은 지구상에서 이 곳밖에 없을 것이다. 

 

 

궁전은 3개의 문과 4개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소생이 톱카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두 군데다. 하렘은 아니다. 하렘이라고 하면 뭐 벌거벗거나 아니면 먼지떨이 같은 짧은 깃털 치마를 입은 매혹적인 아랍 여인네가 엉덩이를 찰랑찰랑 흔들며 현란한 배꼽춤을 추는 무슨 유흥과 쾌락의 주지육림을 상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무지가 낳은 오해다. '하렘'이란 이슬람 사회에서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방을 뜻한다. 이 곳은 가족이외의 어떤 남성의 출입도 금지된다. 일반 가정에서의 하렘이 확대된 형태가 왕실의 하렘일 것이다. 술탄의 어머니와 술탄의 여인들, 술탄의 어린 자식들이 거처하는 곳일 뿐이다. 금남의 구역이라고 하니 이교도들인 서유럽인들은 야릇하고 해괴한 상상을 했을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고 관능과 애욕이 불타는 지상낙원이 아니다. 뭐든지 금지된 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금지가 강할수록 욕망은 커지고 욕망의 실현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는 상상이란 형태로 구현되는 법이다.

 

 

하렘에 대한 오해와 다소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 바로 ‘터키탕’이 아닌가 생각한다. 터키의 목욕탕은 ‘하맘’이라고 하여 일종의 증기탕이고 탕 안에서도 올누드는 거의 없다. 은밀한 부분은 수건으로 가리는 것이 예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터키탕’ 이라는 것이 유행하면서 터키의 목욕탕을 모두 한국 터키탕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뭐 아시다시피 과거 우리나라의 ‘터키탕’은 오늘날의 ‘안마방’의 전신이고, 바로 매춘업소다. 1990년대 말에 터키대사관에서 강력하게 항의를 해서 터키탕이라는 용어는 점차 사라져서 지금은 없어졌다. 소생도 소싯적에 동대구역 근처에서 ‘터키탕’이라는 간판을 많이 봤다. 어린 나이에도 저 곳은 어떤 곳일까? 아!!!! 나는 언제쯤 저런 곳에 들어가 볼 수 있을까??? 몹시 애를 태우며 꿈을 키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그 소년은 과연 커서 꿈을 이루었을까요? 그건,,,,, 음.......입니다. 그건 그런데, 얼마전에 텔레비전을 보니 이 한국식 터키탕의 원조는 바로 일본이라고 한다. 2차대전 후 일본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성행한 매춘업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오스만의 궁전에서 소생의 인상에 가장 남았던 두 곳은 이슬람 보물을 보관한 보물보관소와 이슬람교의 성스러운 물건들을 보관한 성유물실이다. 40~50분 줄서서 성유물실에 입장했다. 소생은 성유물실을 둘러보고 놀라서 뒤로 자빠질뻔 했다. 뭐 자빠질려고 해도 사람이 너무 많아 뒷 사람에게 밀려서 자빠질 수도 없었겠지만... 성유물실에서 가장 중요한 성물은 역시 예언자 무함마드와 관련된 것들이다. 예언자의 망토, 예언자 턱수염의 털, 625년 Uhud 전투에서 부러진 예언자의 이, 예언자의 검, 예언자의 활, 예언자의 발자국, 예언자의 편지 등이다. 안타깝게도 두 곳 다 사진 촬영은 금지다.

 

소생의 입이 똭!! 벌어진 이유는 예언자의 털이나 이 그런 것 때문은 아니고 구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관련된 물건들 때문이다. 유리 전시함 안에 있는 것이 “아브라함이 사용하던 접시”,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요셉의 가운” 이라는 것이다. 뭐라 할 말이 없다. 작은 표지판에 ‘staff of Moses’ 혹은 ‘sword of David’ 등으로 표시되어 있다. 아하!!! 모세의 지팡이라니!!!! 내... 참.... 길이는 1미터 조금 넘는 듯하고 중간중간에 대나무같은 마디가 있는 일자 모양의 지팡이다. 노인들이 흔히 집고 다니는 지팡이랑 비슷하다. 저 지팡이가 바로 홍해 바다를 둘로 똭!!! 갈라버린 기적의 그 지팡이???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가 야훼를 면담할 때 짚었을지도 모르는 그 지팡이??? 광야에서 40년 풍찬노숙의 삶을 버틸 때 모세의 노쇠한 몸을 지탱해준 그 지팡이란 말인가??? 모세가 기원전 14세기 사람이라고 한다면, 저 지팡이가 3000년도 훨 넘었다는 이야기인데.....아앙아아아!!!!...이건.... 정말 희대의 사기극이다. 

 

 

 

 

 

 

 

 

 

 

 

톱카피 궁전을 나올 때 기념품 가게에서 영문판 가이드 북을 한 권 샀는데 나중에 집에 와서 사전 찾아가며 근근히 읽어보니 모세의 지팡이나 다윗의 칼 등 구약의 인사들과 관련된 물건들은 그게 그러니까 그런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추정이라도 누가 무엇을 근거로 어떻게 추정하였단 말인가? 이건 역시 사기야....하는 생각이 드는데,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종교란 결국 믿음의 문제인 것이다. 진위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게 진짜든 가짜든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동안 그것이 진짜라고 믿고 또 믿어 그 믿음이 쌓여 단단하게 굳어지면 그것은 어느듯 진짜로 성물(聖物)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보물보관소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편에....

 

궁전의 두 번째 문인 인사의 문이다.

 

하렘의 입구

 

하렘의 내부 중 일부분인데 술탄의 방인지 뭔지 기억이 안난다.

 

 

 

 

 

 궁전은 바다를 접하고 있다.

 

 다윗의 칼. 모세의 지팡이는 책에 사진이 안나온다.

 

 예언자의 신성한 망토가 보관된 금궤

 

예언자의 이 보관함

 

예언자의 성스러운 털이다. 어째 말투가 불손한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스탄불 여행 중 8.8일 날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곳이 터키 이스람 예술 박물관이라고 앞서 이야기했다. 이 박물관은 1524년에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오스만 제국의 최고 전성기인 슐레이만 대제 시절의 재상인 이브라힘 파샤의 궁전이다.(왜 저택이라하지 않고 궁전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금일은 술레이만 대제와 이브라함 재상, 술레이만의 아내였던 록셀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술레이만은 '솔로몬'의 터키식 발음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슬람은 그리스도교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지혜로운 유대의 왕 솔로몬은 무슬림들에게도 역시 본받아야 할 왕인 것이다. 술레이만은 1520년 즉위해서 장장 46년간 제위에 있었다. 평생 13차례의 대정벌을 감행했고 결국 전장에서 죽었다. 1521년 10만 대군을 동원해 베오그라드를 함락시키고 1522년에는 로도스섬을 점령한다. 로도스는 제주도의 3/4정도 크기로 아나톨리아반도 바로 턱 밑에 위치하고 있는 섬인데 당시에는 베네치아령으로 성요한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어 오스만제국으로서는 손톱 밑에 박힌 가시같은 존재였다. 대제는 6개월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난공불락의 섬을 점령하지만 불굴의 항전에 탄복하여 항복한 기사들이 무사히 섬을 빠져나갈 수 있게 온정을 베풀었다. 기사들은 그 후에 몰타 섬에 정착하고, 몇 십년 후에 다시 몰타섬 공방전이 벌어졌다. 이 공방전에서는 술탄의 군대가 패한다.

 

1529년과 1532년 두 차례에 걸쳐 빈을 포위 공격하여 신성로마제국을 압박하고 술탄의 위엄을 만방에 떨쳤지만 길어진 보급선과 악천후 등으로 끝내 빈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 포위전 때 커피가 유럽으로 처음 전해졌다고 한다. 1538년 해적출신인 오스만의 제독 바르바로사는 교황,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의 유럽 연합함대를 그리스 북서부 프레베자에서 맞아 대승을 거둔다. 프레베자 해전이다. 이 해전으로 오스만제국은 1571년 레판토 에서 유럽 연합함대에 완패할 때까지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게 된다.  술탄의 군대는 동쪽으로도 진군했다. 1534년, 1548년 1554년 세 차례의 원정을 통해 대제는 아덴, 예맨, 바그다드와 이라크의 대부분, 아르메니아 서부, 소아시아 동부 등을 점령했지만 결정적으로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를 패망시키지는 못했다.

 

대제의 치세기간 동안에 제국은 문화적으로도 그야말로 백화만발한 황금기를 구가했다. 술래이만 자신이 무하비라는 필명으로 시를 쓰기도 했는데 록셀란에게 바친 연애시도 전해지고 있다. 슐레이만 대제 이전의 오스만 제국의 문화는 주로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대제 이후로는 오스만 제국 고유의 예술전통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건축분야에서는 오스만의 대 건축가이자 이슬람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리는 미마르 시난이 크게 활약했다. 시난은 대제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300여개 건축물을 지었다. 구시가지에 있는 술레이마니예 모스크는 시난의 걸작품 중 하나다. 대제는 또한 법률을 집대성하는 등 법체계 확립에 혁혁한 공적이 있어 ‘카누니’ 즉 입법자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대제의 사랑은 순애보에 가깝다 할 것이다. 우크라이나 사제의 딸로 전쟁 중 노예로 잡혀 술탄의 하렘으로 보내진 록셀란이란 여자에게 매혹당한 대제는 술탄은 전통적으로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관습을 깨고 록셀란과 정식으로 혼인을 하고 평생 일부일처를 고수했다. 물론 하렘의 다른 여자들을 전혀 만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어쨌든 대제는 두 번 결혼하지 않았으며 그것만으로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록셀란은 5남 1녀를 낳았다. 왕실의 다산은 축복이자 유혈의 씨앗이다. 보위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골육간의 상쟁은 왕실의 피를 타고 태어난 자들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대제가 하렘의 다른 여인에게서 얻은 첫째 아들 무스타파는 록셀란의 음모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된다. 1553년의 일이다. 무스타파가 죽자 이복 형을 몹시 따랐던 록셀란의 막내아들 지한기르는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렸다.(지한기르는 곱사등이였다고 하는데 자살했다고도 한다.) 셀림과 바예지드가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다가 바예지드는 패하여 처형되고 셀림은 황태자가 된다. 록셀란은 1558년에 눈을 감는다. 8년 후인 1566년 대제도 원정 중에 죽어서 록셀란과 함께 슐레이마니예 모스크에 묻혔다.

 

이브라힘 파샤는 그리스 출신으로 해적들에게 잡혀 노예로 팔렸다가 우연한 기회에 술레이만 대제가 아직 왕자였던 시절에 만나서 그의 시동이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심지어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잤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였다는 소문도 있다. 이브라힘은 술레이만이 술탄에 즉위한 지 삼년만인 1523년에 서른 살의 나이로 제국의 대재상이 된다. 이브라힘은 심지어‘다른 대신들의 눈도 있으니 제발 좀 천천히 승진시켜 달라’고 술탄에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 어지간 했던 모양이다. 나도 그런 부탁 한번 해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뭐 물론 그런 일이야 내가 죽었다가 깨어나도 없겠지만.....

 

어쨋든 대단한 이브라힘은 이듬해에는 술레이만의 여동생과 결혼한다. 하지만 어쩔것이냐 화무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권력은 아편과도 같아서 이브라힘도 처음의 겸손함과 현명함을 잃었고, 대 페르시아 전쟁에서 일부 실책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위에 올리려는 록셀란의 음모에 말려 결국 1536년 술탄의 묵인 하에 암살된다. 슐레이만은 이브라힘에게 자신이 보위에 있는 동안은 절대 그대를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맹세했다고 하지만 권력 앞에서 맹세나 약속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아아아!!! 새끼손가락 약속은 깨어지고.....하지만 카누니(입법자)의 호칭으로 불리는 술래이만이다. 대제는 맹세가 마음에 걸려 율법학자들과 상담도 했다고 한다. 상담의 결과는 맹세를 깨는 것에 대해 신에게 회개하는 의미로 모스크에 기부를 하라는 것.

 

 

록셀란도 이브라힘과 마찬가지로 노예출신이다. 흔히 우크라이나 정교회 신부의 딸이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전쟁 통에 포로로 잡혀 술탄의 하렘으로 보내진다. 기록에 의하면 록셀란은 “결코 아름답지는 않지만 우아했다.” 그녀는 쾌활한 성격 때문에 명랑한 여인 즉 후렘이란 별명을 얻었다. 물론 록셀란의 초상화도 몇 점 남아있다. 이스탄불 여행 중에 여러 박물관의 기념품 샵에서 록셀란의 초상화가 커다랗게 인쇄된, 지금은 망해버린 생각의 나무 출판사에서 나온 ‘세계문화유산’ 크기 만한 도서를 여러 권 본 적이 있다. 책 이야기를 하니 지금와서 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 거대하고 멋진 장정의 록셀란의 이야기 책이나 이슬람 보물에 관한 책이나 박물관에 관한 책을 한 권도 못 산 것이다. 물론 작은 크기의 책은 몇 권 사긴 샀지만.

 

 

록셀란이 술레이만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하렘에는 대제의 총애를 받아 무스타파라는 아들까지 낳은 마히데브란(혹은 귈바하르)이라는 여성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록셀란은 하렘 내의 암투에서 승리하여 대제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술레이만은 하렘의 여인들과 결혼하지 않는 오스만의 전통을 무시하고 록셀란과 정식으로 혼인을 한다. 명랑한 여인은 노예의 신분에서 황후가 된 것이다. 록셀란은 자신의 아들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궁중 암투에 뛰어들면서 정치에 개입하게 된다. 먼저 대제의 오랜 친구이자 동지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이브라힘 대재상을 암살하는데 개입한다. 물론 재상 본인의 잘못도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록셀란과 재상의 독주를 시기하는 세력들의 영향이 결국 제상을 파멸로 몰았다. 더구나 재상은 대제의 장자인 무스타파를 지지하고 있었다. 록셀란은 또한 인품과 능력이 뛰어났던 무스타파를 음모로 엮어 반역죄로 처형하는데도 깊이 관여한다.

 

록셀란은 5남 1녀를 두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일찍 죽었다. 또 이복형인 무스타파를 몹시 따랐던 막내 지한기르는 무스타파가 죽자 상심하여 앓다가 죽었다. 또 다른 아들들인 셀림과 바예지드는 후계자 자리를 놓고 서로 각축하다 결국 바예지드는 처형되고 셀림이 다음 술탄으로 등극한다. 셀림은 술주정뱅이였다고 한다. 록셀란은 1558년에 죽어서 다행히도 아들 바예지드가 처형당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또 다른 아들 셀림이 술탄으로 즉위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록셀란 이후로 하렘의 여인들이 술탄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각축하는 궁중 암투가 본격화되어 결국은 제국이 쇠퇴하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록셀란은 오랫동안 제국을 망친 악녀 혹은 팜므파탈로 여겨졌지만 현대에 와서 재평가 되고 있다. 술탄의 노예로 머물러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여 성공을 이룬 진취적인 여성으로 말이다. 우크라이나에는 록셀란의 동상도 있다.

 

자료를 찾다보니 “무흐테솀 유즈이을”이라는 터키 TV드라마가 있다. 2011 ~ 2014년까지 터키 STAR TV 에서 방영했던 사극인데 무려 139부작이라고 한다. “무스테솀 유즈이을”은 터키어로 “위대한 세기”를 뜻한다. 술레이만 대제와 황후였던 록셀란의 이야기다. 미드처럼 시즌별로 나누어 방영했는데, 오스만 제국 시대의 궁정과 하렘을 화려하게 재현한 영상미와 하렘 여인들의 암투를 흥미진진하게 극화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아, 유럽과 중동, 중앙아시아 각국으로 수출되어 거의 한류 비슷한 터키 열풍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스와 거의 원수지간인 그리스에서도 드라마 방영후 터키어 학습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드라마의 포스터 중 하나다. 중앙은 슐레이만 대제, 왼쪽이 휴렘 술탄(록셀란)이고, 왼쪽 아래는 알바니아 귀족 출신의 마히데브란으로 슐레이만이 록셀란을 만나기 전에 총애했던 하렘의 여인이다. 슐레이만의 장자 무스타파를 낳았다. 대제의 오른쪽은 아마도 대제의 어머니인듯하다.(아닌것 같기도 하다.) 뒷줄 왼쪽은 대제의 여동생인 하티제 술탄으로 후에 이브라힘과 결혼한다. 하티제 술탄은 이브라힘이 처형되고 2년도 안되어 죽었는데, 남편의 죽음에 상심하여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으로 보아 정말로 그를 사랑했을 수도 있다.

 

하티제의 오른쪽은 이브라힘 파샤다. 노예 출신으로 대제의 시동이자 친구이자 동지로 초고속 승진을 하여 약관의 나이에 제국의 대재상이 되지만 결국 록셀란과 재상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획책으로 암살된다. 이브라힘의 옆은 아마도 마히데브란의 아들인 무스타파인 것 같다. 슐레이만의 장자다. 총명하고 인품도 뛰어나 유력한 후계자였으나 자신의 아들을 술탄으로 만들려는 록셀란의 음모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된다. 그 옆은 아마도 록셀란의 아들인 셀림 황자인 것 같다(짐작이다.) 나중에 대제의 뒤를 이어 술탄으로 즉위한다. 셀림2세다. 설명이 맞는지 모르겠다.

 

 

 

 

 

 

 

 

 

 

 

찾다보니 또 이와 관련된 만화도 나오고 있다. 시노하라 치에의 <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이라는 만화다. 여기서는 록셀란이 이브라힘을 연모하는 것으로 나오는 것 같다. 만화에서는 삼인의 관계가 어떤식으로 전개될지 궁금하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3권까지 일본에서는 6권까지 출간된 모양이다. 이 만화가 언제 처음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작가가 터키 드라마를 보고 작품을 구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9-02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은 붉은돼지님이 글 쓰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터키’ 마니아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붉은돼지 2015-09-03 10: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cyrus님 ㅎㅎㅎㅎ 마니아 분야에 터키나 이스탄불 같은 것은 없는 모양입니다..
마니아를 찾아보니 제가 이슬람/중동/이스라엘 분야에 2위로 되어있더군요..깜짝놀랐습니다. ^^

보슬비 2015-09-05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cyrus님 말씀에 100% 공감입니다.~~ ^^
그런데 이슬람/중동/이스라엘 1위가 아닌 2위라니요.. 곧 1위 등극하실겁니다. ㅎㅎ

붉은돼지 2015-09-06 13:4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상냥하신 보슬비님~
100%라니요 80%만 하셔도 감지덕지에요 ㅎㅎㅎㅎ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이라는 책이 나왔다. 저자인 로저 크롤리는 금시 초문의 인사다. 알라딘 소개는 이렇다. ‘영국의 작가 역사가. 케임브리지대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와 출판인으로 일했다. 어린 시절을 몰타에서 지내고 이스탄불에서 살기도 했으며 아나톨리아 횡단 여행을 하는 등 지중해 지역과 인연이 깊다.’ 전문적인 역사학자는 아닌듯하다. 어쨌든 반갑다.

 

 

 

 

 

 

 

 

 

 

 

 

 

 

 

 비슷한 책으로는 역시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스티븐 런치만의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이 있다. 여기에 크롤리의 책이 보태어져 마치 3부작을 완성한 듯한 느낌이다. 아시다시피 나나미 할매의 책은 소설 형식이어서 쉽게 읽히고 나름 재미도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런치만경의 책은 이제까지 국내에 번역된 관련 책 중에서 가장 권위있는 책일 것이다. 재미도 있다. 재미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도 계시겠으나 어쨋거나 소생은 재미있게 읽었다. 크롤리의 책은 어떤지 궁금하다. 당연한 이야기로 비잔틴으로서는 최후의 날이겠지만 정복자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날일 것이다. 2012년도 터키영화 《정복자, 1453》도 dvd로 나와있다. 전에는 없었는데 이건 또 언제 나왔나 보니 7월달에 나왔다. 사야할 것들은 자꾸만 무슨 아메바가 세포분열하듯이 증식하는 것 같다. 무섭다. 돈 들어갈 구멍은 여기서 숭!! 저기서 쑹쑹!!! 자꾸 늘어나는데 돈 나올 구멍은 작은 구멍 한 구멍뿐이니....아....나도 이러다가 머지않아 무슨 골다공증 비스무리하게 온몸에 구멍이 숭숭숭!!! 뚫리는 병으로 최후의 날을 맞이할 것만 같다.....<20**년, 붉은 돼지 최후의 날>!!!! ....하기사 그날이 언제와도 오긴 올 것인데...  

 

알라딘에는 크롤리의 최후의 날외에도 부의 도시, 베네치아바다의 제국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도 삼부작인가? 당연히 나나미의 바다의 도시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나미의 저작에는 베네치아 공화국 1천년의 메시지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말하자면 공화국의 통사(通史). 반면에 크롤리의 부의 도시, 베네치아‘500년 무역대국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배경이 1000년부터 1500년까지이다. 전성기 시절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베네치아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크롤리의 또 다른 책바다의 제국들기독교와 이슬람의 지중해 쟁탈전, 1521~1580’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역시 나나미 할매의 전쟁3부작 중 로도스 섬 공방전레판토 해전과 내용이 겹친다. 크롤리의 책에는 나나미의 책에는 없는 로도스 섬 공방전의 연장전인 1565년의 몰타 섬 공방전’(오스만이 로도스에서 비록 신사적이었지만 결국 냉혹하게 깔끔하니 끝내지 못해서 연장전까지 가게 된 것이다. 전쟁에는 이기느냐 지느냐, 죽느냐 사느냐가 있을뿐이다. 씨를 말려야 하는 것인데 그게 또 뭐 말처럼 쉬운게 아니고....)과 일설에는 전쟁의 원인이 포도주 때문이라고도 하는 1569년의 키프로스 공방전이야기도 나온다. 역시 궁금한데 책은 절판이다. 하지만 중고는 있다. 지중해가 로마의 내해 혹은 앞 바다였던 시기 이후의, 그러니까 서로마제국 멸망 후의 지중해에 대한 전체적인 이야기는 역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 멸망 이후 지중해 세계를 참조하면 되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고기자리 2015-08-31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오노 나나미의 <바다의 도시 이야기>와 <전쟁 3부작>,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를 재밌게 읽어서 크롤리의 책들에도 관심이 가네요^^ 어느 곳을 중점적으로 묘사했느냐만 다를 뿐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었거든요. 저자가 몰타와 이스탄불에서 살았었다니 뭔가 더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같아요^^

붉은돼지 2015-08-31 23:25   좋아요 0 | URL
크롤리 삼부작에 1453 dvd를 한번에 구입하는 거는 조금 무리같아서 일단 최후의 날부터 사서 볼까 생각중입니다^^

마법의활 2015-10-05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는 최악의 졸저입니다. 로마인 이야기보다 해악이 아주 큰 악서라고 생각합니다.

붉은돼지 2015-10-06 13:37   좋아요 0 | URL
마법의 활님~ 어떤 면에서 그리 생각하시는 지 설명을 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히포드롬 광장 거의 끝 부분에 있는 이집트 오벨리스크 바라보고 서면 왼쪽은 블루 모스크이고 오른쪽은 터키 이슬람 예술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1524년에 지어진 건물로 오스만 제국의 최고 전성기인 슐레이만 대제 시절의 재상인 이브라힘 파샤의 저택이다. 군대 막사, 대사관, 감옥 등으로 사용되다가 1983년 박물관이 되었다. 아랍어 캘리그라피 작품, 카펫 컬렉션, 도자기와 금속공예품 등 다양한 전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소생 이스탄불 여행 88일 일정의 마지막 코스였는데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너무 지치고 힘이 빠져서 꼼꼼하게 둘러보지 못했다. 대충 설렁설렁 보고 사진만 몇 장 찍고 나왔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쉽다.

 

금속 공예품들은 정교하고 아름답고 화려했다. 아마 코란으로 보이는 책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어떤 것들은 크기가 엄청나게 컸다. 길이가 거의 1미터쯤 되는 것들도 있다. 책이 아니라 무슨 거대한 화첩같은 느낌이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이 생각나서 이슬람 세밀화를 찾아봤지만 대부분은 캘리그라피이고 세밀화는 한 두점 정도만 본 듯하다. 이슬람에서는 예언자나 선지자 등의 인물을 회화나 조각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 모스크에 회화나 조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캘리그라피가 발달한 이유다. 세밀화는 궁정 생활이나 세속적인 부분에서만 일부 이용된 듯 하다. 처음 볼 때는 무슨 빨래줄에 널린 빨래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듯한 야릇한 아랍문자들도 자꾸 보고 또 가만히 보니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이슬람 캘리그라피의 아름다움에 눈이 떠지는 모양이다.

 

 

 

 

 

 

 

 

 

 

 

 

 

 

'이슬람 캘리그라피'는 이슬람 캘리그라피에 대한 단행본 도서로서는 아마도 국내에서 출판된 거의 유일한 책인 듯하다. 원서를 번역한 것이 아닌데도 저자가 외국생활을 많이해서 그런지 이상하게도 내용은 무슨 논문을 번역한 듯한 느낌이고, 말이 또 요상해서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많다. 개인적인 소견은 실망스럽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에 기초한 서양 문명의 지대하고 확고한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이슬람에 대하여는 참으로 무지하게 무식할 뿐만아니라 많은 부분 오해가 있기도 하다. 텔레반이나 알카에다, IS 같은 극단적인 사례만 자꾸 접하다보니 무슬림이라고 하면 검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집총한 테러분자를 생각하거나 아니면 머리에는 뿔이 솟았고 엉덩이엔 꼬리가 달린 악마의 현현을 상상하기 십상이다. 중세에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여 미켈란젤로도 모세의 머리에 두 개의 뿔을 달아 놓기도 했다.(히브리어 성경의 라틴어 번역과정에서의 오류라고 한다. 코란은 번역을 허용하지 않아서 코란의 번역본은 없다. 다만 해설서가 있을뿐이다.) 당연하게도 무지는 오해를 부르고 오해는 갈등을 일으킨다. 우리가 이슬람을 좀 알아야 하는 이유다.  

      

통상적으로 그리스도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를 세계 4대 종교라고 한다.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개인 수양적인 성격이 강하고 힌두교는 잡다한 다신교에 내용이 또 엄청 복잡해서 일단 논외로 하면 역시 문제는 자신외의 어떤 다른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유일신교다. 2010년 통계로 60억 인구 중에 기독교도는 19.9억명(33%), 이슬람교도는 10.7억명(18%) 정도라고 한다.(통계를 조사하는 기관과 그 조사 방법 등에 따라 숫치가 다 다르지만 대충 저 정도인 것 같다.) 기독교 인구 중에는 카톨릭이 10.5억명(18%), 개신교가 3.4억명(6%)이고, 이슬람의 경우는 수니파가 9억명(16%) 시아파는 1.5억명(3%) 정도다. 이슬람 수니파의 경우로 보면 전세계 개신교 인구의 3배 가까이나 된다.

 

한집 건너 커피집이요 두집 건너면 가요방과 술집, 세집 건너면 미장원과 교회다. 사랑과 용서, 봉사와 희생의 교회가 이리도 차고 넘치는 데 나라꼴은 좋게 말해도 한치의 양보도 없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양상이고 나쁘게 말하면 진흙 구덩이에서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개꼴로 실로 개판 오분전이니 안타깝다. 그 원인이 당연히 기독교인들에게 있지 않듯이 중동 문제의 근원도 종교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정수일 교수의 주장이다. 2차대전 후의 냉전 기류와 그에 호응하고 상응하는 식민주의와 민족주의의 대립, 석유자원의 국제화와 민족화의 갈등 등이 분쟁의 주범이라고 한다. 결론인즉슨 원인은 정치이지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리있는 이야기다. 터키는 이른바 세속주의를 지향하니 차치하더라도 이슬람을 이야기하면서 과연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어쨋든....

 

  

 

 

 

 

 

 

 

 

 

 

 

기독교가 사랑과 용서, 희생과 봉사를 강조하듯이 이슬람도 역시 순종과 평화, 관용과 자선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슬람을 가리켜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칼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교 역시 한 손에는 성경, 다른 손에는 총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없듯이 코란에도 그러한 기록은 없다. 성경과 코란은 서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코란에 등장하는 28명의 예언자중 21명은 성서에도 나온다. 코란에는 구약의 모세 5, 아담과 이브, 노아의 방주, 다윗과 솔로몬, 예수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그대로 나온다.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했던 천사 가브리엘은 바로 무함마드에게 코란을 낭송하라고 말했던 그 천사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 예수의 하느님, 무함마드의 하느님은 모두 같은 존재인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원래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출신이었는데 어느날 문득 하느님으로부터 고향과 동족을 버리고 미지의 땅으로 가서 새로운 민족을 세우라는 지령을 받는다. 아브라함이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70대 노인인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여종 하갈, 조카 롯 등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간다. 본처인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사라의 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아들을 얻는다. 이스마엘이다. 후에 본처에게서도 아들을 얻게되는데 이삭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장자요 이삭은 아브라함의 적자다.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이스라엘)은 다시 12 아들을 낳으니 곧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된다. 그 중 유다지파에서 후일 다윗과 솔로몬이 나오고 더 먼 훗날에 드디어 예수가 출현하게 된다.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이 바로 아랍민족의 조상이 된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종교적인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뿌리가 서로 다른 두 집안이 아니고 한 뿌리에서 갈라진 두 집안이다.

 

터키 이슬람 예술 박물관의 원래 주인이었던 이브라힘 재상과 술레이만 대제 그리고 황후 록셀란 호상간의 사랑과 야망, 음모와 배신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무함마드의 발자국인데, 토프카프 궁전 성물실에 가면 예언자의 수염과 망토,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등이 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참십자가니, 예수의 수의니 하는 것들이 있고 불가에서도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등등이 있다. 이러한 종교상의 성스러운 물건들은 그 진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든 가까든지간에 이미 오랜시간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진짜라고 믿게되면

그 믿음들이 모이고 모여서 그것을 진짜 성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수백년 아니 수천년 동안 수억명 아니 수십억명을 속인 희대의 사기극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종교란 진실이나 사실보다는 결국 믿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블루모스크 인근의 시장을 둘러보다 발견한 램프. 당연하게도 알라딘이 생각나서 한 컷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8-28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 늙은 지니가 사는 요술램프 이야기가 생각나요. 지니가 너무 늙어버려서 소원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해요. 램프 안에 안 들어가고, 고길동 집에서 아예 눌러 붙어 살려고 하는 재미있는 캐릭터였어요. ^^


붉은돼지 2015-08-31 23:29   좋아요 0 | URL
둘리에 그런 에피소드도 있었군요
지금 생각하니 기념으로 램프 예쁜거 하나 사올껄 하는 아쉬움이 생기네요
이제와서 뭐 어쩔 수도 없지만 ^^;;;;

후애(厚愛) 2015-08-29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저도 여행가고 싶네요. ㅎㅎㅎ
편안한 주말 되세요.^^

붉은돼지 2015-08-31 23:31   좋아요 0 | URL
후애님 몸은 좀 어떠세요?
이제는 괜찮으신거죠?^^
 

히포드롬 경기장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경기장의 중앙분리대를 장식하고 있던 세 개의 기둥은 아직도 남아있다. 하나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이고, 둘은 콘스탄티누스 기둥이고, 셋은 그리스 델포이에서 가져온 청동 뱀 기둥이다.

  

이집트산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5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룩소르의 카르낙 신전에 있던 것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가져왔고 일정기간 방치되었다가 39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히포드롬 경기장 중앙분리대에 설치했다. 높이가 25.6미터라고 한다. 원래는 80미터가 넘는 놈인데 잘라서 윗부분만 가져왔다고 한다. 오벨리스크 각 면에는 고대 애급의 아름다운 상형문자가 무슨 부조 작품처럼 새겨져 있다. 거의 3500여년 전의 물건인데도 이렇게 깨끗하게 남아있다니 참 신기하다. 기단부의 대좌에는 사면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이 부조되어있는데 이게 또 미술사적으로 유명한 것이라고 한다. 오벨리스크는 이스탄불 외에도 프랑스 파리의 콩코드 광장, 로마의 바티칸 광장, 미국 워싱턴 국회의사당, 런던의 템즈 강변, 러시아 이르크추그 등에도 있다. 워싱턴의 오빌리스크는 169미터로 현존하는 오빌리스크 중에 가장 높은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즉슨 이집트 태생의 고대 유물은 아니고 이를 본떠 만든 현대의 건축물이다. 1885년에 초대 대통령 워싱턴을 기념해 세워졌다.

 

 

 

 

 

 

 

 

 

 

 

 

 

    

콘스탄티누스 기둥은 콘스탄티누스 7세가 할아버지 바실리우스 황제를 위하여 만든 것으로 높이가 32미터에 기둥 표면은 원래는 금박 입힌 청동으로 번쩍번쩍 반짝이 옷을 해입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옷이 벗겨져 그냥 벽돌기둥의 모습으로 조금 볼품없는 행색이다. 그 빛나던 금박 청동 옷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침략 때 약탈자들이 모두 홀랑 벗겨갔다. 아아아!!!! 입고 있는 옷까지 벗겨갔으니 약탈이 어느 정도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슨 특별 조치가 없으면 약탈이란 다 똑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1453년 오스만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정복자가 백마를 타고 당당히 입성할 때 술탄은 자신의 친위부대를 미리 보내어 병사들이 아야 소피아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3일간에 걸친 무차별적인 약탈은 술탄이 병사들에게 승인한 권리였지만 아야소피아는 술탄의 몫이엇던 것이다

  

배배꼬이고 끝 부분이 잘린 청동 기둥은 보기에는 볼품이 없다.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게 또 오래고 고귀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물건이다. 원래 높이는 8미터였으나 손상된 현재 높이는 5.5미터다. 이 뱀기둥은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전쟁의 승전기념물로 델피 아폴론 신전에 세웠던 것인데,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기면서 집들이 기념품으로 차출하게 된다. 청동뱀 아래 쪽에는 페르시아 전쟁 때 병력과 예산을 지원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이름이 아직도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둔한 소생은 몰라서 보지 못햇다. 원래의 모양은 세 마리 뱀이 서로 엉겨서 감겨 올라가는 모습으로, 이 뱀기둥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맨 꼭대기, 그러니까 세 개의 뱀대가리가 삼발이 형태를 이루는 곳에 거대한 황금 솥이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 황금 솥은 지금은 어데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솥을 받치던 세 개의 뱀대가리 중 한 대가리의 일부는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역시 아둔한 소생은 고고학 박물관을 방문은 했지만 너무 피곤한 관계로 세세하게 둘러보지 못해서 그 놈의 뱀대가리 구경을 못했다. 안타깝다. 다른 한 대가리는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나머지 한 대가리의 행방은 여직 묘연하다.

 

 

 

 

 

 

 

 

 

 

 

 

 

 

캠브리지에서 비잔틴 역사를 공부했다는 제임스 굿윈의 소설 중에 스네이크 스톤이라는 소설이 있다. 배경은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 술탄의 늙은(영감은 아니고) 환관인 야심이 탐정으로 등장하는 조금 특이한 소설이다. 굿윈이 전작인 <환관탐정 야심>으로 에드가상을 수상했다고 해서 기대에 부풀어 읽어봤는데 다 읽고 난 소감은, 그래서 뭐 어쨋다는 말인가?? 비밀리에 전해진 비잔틴의 보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소설 속에는 저 뱀 기둥의 사라진 뱀 대가리도 등장하고....제목도 스네이크 스톤인데...그 보물이 뱀 대가리라는 말인지...말대가리란 말인지....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물론 독해력 떨어지는 아둔한 소생의 탓이겠으나 소설은 진정으로 심심하게도 심심했다. 그래도 혹 궁금하신 분은 뭐 함 읽어봐도 무방하겠지만 역시 재미를 보장하지는 못하니 참고하시길.

 

 

  

 

 

 

 

 

 

 

 

 

 

 

황금 솥의 행방은 알 수없지만 히포드롬 경기장을 장식하고 있던 네 마리 청동 말의 행적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어 추적이 가능하다. 연이나 이 청동말의 탄생은 역시 오리무중이다. 아마도 기원전 그리스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납과 주석이 조금 섞여있고 거의 구리로 만들어졌으며 몸 전체를 금으로 도금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히포드롬 경기장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1204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침략시 베네치아 도제 단돌로가 이 네 마리 청동말을 다른 수많은 노획물과 함께 베네치아로 보냈다. 말들은 산마르코 성당 발코니에 세워졌다. 1797년 베니스가 나폴레옹에게 항복하자 나폴레옹은 말들을 파리로 가져가서 1807년 파리에 개선문을 세우고 그 꼭대기에 말들을 배치했다. 이 개선문은 루브르 앞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으로 지금도 개선문 위에는 복제품 말들이 서있다. 참고로 샹젤리제 거리 끝에 있는 개선문은 에투알 개선문이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8년 안전 문제 때문에 로마로 옮겨졌다가 1919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2년 산마르코 성당 바로 옆 두칼레궁(도제궁전) 지하로 옮겨졌다가 전쟁이 끝나자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다. 말들이 이미 많이 노쇠한데다 편하게 좀 쉬지도 못하고 이리저리로 끌려다니며 왔다리 갔다리 하다보니 너무 피폐해져 더 이상 오염된 공기를 견디지 못할 것 같다는 전문가의 진단을 받고 1977년 산마르코 성당 2층 성물실로 옮겨졌다. 성당의 발코니에는 복제품이 서있다 2006년도에 베니스에 갔을 때 아둔한 소생은 뭘 잘 몰라서 성당 발코니에 있는 말이 진품인 줄로만 알았다. 성당 안의 성물보관실은 별도 입장료가 있어서 돈 아까워서 안들어갔는데 그 곳에 말 진품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아 뭘 알아야 해먹지......끙...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8-25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저 뱀기둥을 본 것 같아요. 아마도 델포이 신전에서 살았다는 뱀 퓌톤을 형상화했을 겁니다.

붉은돼지 2015-08-26 09:57   좋아요 0 | URL
인터넷에 보니 퓌톤은 대지의 신 가이아의 자식으로 피토(델포이의 이전 이름)를 지배하던 큰 뱀이라고 하네요...나중에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에게 죽임을 당하고 피토는 델포이로 이름이 바뀌어 아폴론이 지배하고 신탁을 내렸다고 하네요....

원래 델포이에 있던 뱀기둥이니 아마도 퓌톤과 연관이 있는 듯 합니다.^^

호서기 2015-08-26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돼지님의 서재가 참 마음에 드네요. 앞으로 자주 찾아 뵙겠습니다.

붉은돼지 2015-08-31 23:3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호서기님~~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