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 나오는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말. 이교도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 두려워서 했다는 말. “누구 내 목을 쳐 줄 그리스도교인 없소이까?”는 이교도 병사의 칼에 맞아서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기 보다는 아마도 생포되어 수모와 치욕을 당할 것을 염려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병사들이 전투 중에 죽는다면 적군의 손에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저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은 자살을 할 수 없고 적군이 황제인 자신을 알아본다면 당연히 생포하려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죽여달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기번도 쇠망사의 주석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기번의 주석에는 저 대사의 출처는 나와있지 않다.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황제의 최후는 워낙 쇼킹한 사건이어서 역사적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고 더하여 구전된 구구한 이야기들은 수를 셀 수도 없을 것이다. 당대의 주요 인물들이 남긴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기번이나 런치만, 노리치, 나나미 등은 모두 이 원 사료들을 참고했을 것이다. 이런 원사료들도 좀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transient-guest 님 덕분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우쭈쭈하고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호호호)

 

1. 프란체스

황제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조언자였으며 1453528일 저녁까지 황제의 서기로 그의 곁을 지켰던 프란체스는 도시가 함락된 후에는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그는 노예 생활 18개월 만에 빌린 돈으로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의 아들과 딸은 살아남지 못했다. 그는 베네치아령 코르푸 섬으로 망명했다가 나중에는 케르키라 섬에 있는 수도원에서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프란체스는 그곳에서 자신이 겪었던 놀라운 사건들에 대한 고통스러운 연대기를 썼다. 훌륭한 그리스어로 쓰인 이 기록은 그리스 역사가 중에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쓴 유일한 사료이다. 연대가 정확하지 않고 다소 편견도 있으나 내용은 대체로 진솔하고 생생하며 설득력이 있다는 평이다. 그는 1474년에 사망했다.

 

2. 크리토볼로스

동시대 그리스인 역사가 크리토불로스는 공방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에 크레도스 섬 북방 30킬로미터 지점, 겔리볼루 반도 왼쪽에 있는 큰 섬 임브로스 섬에서 관직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의 역사서는 1451년부터 1467년까지 기간을 다루고 있다. 공방전에 대한 그의 기록은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투르크인들로부터도 정보를 얻은 것이어서 귀중한 사료로 여겨지고 있다.

 

3. 니콜로 바르바로

공방전에 대한 서방측 자료로서 가장 유용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베네치아 상선의 선의(船醫)였던 니콜로 바르바로가 남긴 공방전 일지. 그는 베네치아 명문가 출신으로 공방전이 있기 직전에 콘스탄티노플에 와 있던 사람으로 도시가 함락되던 날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골든혼에 정박해있던 베네치아 함선을 타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베네치아인다운 냉정한 시각으로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했다. 오늘날 우리가 공방전의 상황을 날짜별로 알게 된 것도 다 그의 덕분이다. 한 사람의 충실한 베네치아인답게 그는 제노바인을 몹시 싫어했지만 그리스인에 대한 적대감은 다른 서방인들보다 덜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니콜로의 일지는 아쉽게도 뒤늦게 학계에 알려졌다. 그 이유는 그의 일지가 중요 사료로 베네치아의 마르치아나 도서관에 들어갈 때까지 바르바로 가문의 먼지 쌓인 자료실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1783년에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도 니콜로의 일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말이 많은 기번이 이 유용한 일지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어쩌면 훨씬 더 수다스러워졌을 것이다.

 

4. 이시도로스

교회 통합을 추진하기 위해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궁수 200명을 거느리고 콘스탄티노플에 와 있던 이시도로스 추기경도 살아남았다. 화려한 추기경의 옷을 걸인의 옷과 바꾸어 입은 덕분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포로로 붙잡혀 갈라타의 제노바 거류지로 팔려간 추기경은 곧 자유의 몸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제노바 식민지인 포체아로 갔다가 다시 키오스 섬으로, 키오스에서 다시 크레타로 갔다. 추기경은 크레타에 머무는 동안 교황 앞으로 두 통, 베네치아 총독 앞으로 한 통 등 총 다섯 통의 서한을 작성했다. 추기경의 서한에는 비록 내용이 간략하지만 콘스탄티노플 함락 당시의 중요한 상황들이 적혀있었다. 추기경은 로마로 돌아가서 대 오스만 십자군 결성에 동분서주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63년에 눈을 감았다.

 

5. 레오나르드

레스보스의 대주교였던 제노바 사람 키오스의 레오나르드가 쓴 기록도 남아있다. 도시가 함락되고 약 6주 후에 키오스 섬에서 쓴 것이다. 그는 황제조차 너무 안이하게 대처했고 자신의 상관인 이시도로스 추기경도 나약했다는 암시를 풍기면서 동포인 제노바인들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6. 테탈디

공방전에 직접 참여했던 피렌체 상인 테탈디는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수영도 못하면서 바다로 뛰어들었다가 베네치아 함선에 구조되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가 운 좋게 탄 배는 베네치아의 해군기지가 있는 네그로폰테로 향하는 배였는데 여기서 그는 한 프랑스인에게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 프랑스인은 테탈디의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아비뇽의 대주교에게 보냈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순식간에 프랑스인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나중에 내용이 좀 더 다듬어진 테탈디의 이야기는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관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사료로 간주되었다.

 

7. 이스칸데르

한편 러시아 정교도 네스토르 이스칸데르는 매우 흥미롭고 문제도 많은 연대기를 남겼다. 그는 처음에는 오스만 군대의 징집병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왔다가 포위전 초기에 도시로 탈출해서 도시 방위군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 위에서의 싸움 장면 등 설득력 있고 구체적인 세부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지만 날짜와 순서가 뒤죽박죽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6, 송은주 외 옮김, 민음사, 2011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3, 쇠퇴와 멸망, 남경태 옮김, 바다출판사, 2008

스티븐 런치만,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이순호 옮김, 갈라파고스, 2004

로저 크롤리,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이재황 옮김, 산처럼, 2015

시오노 나나미, 콘스탄티노플 함락, 최은석 옮김, 한길사, 2013

김형오,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21세기북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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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족 2019-09-25 1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좋군요^^
아무 생각없이 지금 삼체3권의 대목을 지나친 저로서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다 좋네요^^

붉은돼지 2019-09-25 14:23   좋아요 0 | URL
삼체에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야기가 나오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안 그래도 삼체를 언제 시작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이제 때가 온 것 같군요 ㅎㅎㅎ

꼬마요정 2019-09-25 15: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괜찮은가요? 저도 궁금한데 선뜻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이 때는 메흐메트 2세한테 좀 더 반해서 1100년이나 살아남은 그 제국의 마지막이 씁쓸하지만 그렇게 슬프지는 않더라구요. 어쩌면 이미 4차 십자군 전쟁 때 마음이 떴는지도요.. 근데 갑자기 다시 펼쳐보고 싶어집니다. 지금은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네요.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새로운 정보도 잔뜩 얻었구요 ㅎㅎㅎ 고맙습니다.^^

붉은돼지 2019-09-25 15:26   좋아요 1 | URL
김형오의 <술탄과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에 관심없는 분들에게는 별 재미가 없겠습니다만.....
1453년의 그 공성전에 흥미있는 분들에게는 일독을 권합니다. 아니 구매를 권합니다.

국내에 번역된 그 어떤 책들보다 1453년 공성전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여러가지 세세하고 흥미로운 자료들이 많습니다. 특히 삼중성벽에 대해 이만큼 세밀하게 기술한 책은 아마 국내에서는 유일하고 세계적으로 드물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잘 모르기는 하지만요.ㅎㅎㅎ 부록의 QR 코드에도 재미있는 자료들이 많습니다. 저는 초판본과 개정판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transient-guest 2019-09-26 0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위의 책들 중에서 ‘1453 -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는 없네요. ‘비잔티움 연대기‘와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예전에 읽었고 비교적 최근에 구한 ‘비잔티움제국 최후의 날‘과 기억이 좀 나지 않는 다른 책 한 권은 붉은돼지님의 서재에서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삼체 3부‘에서 비잔티움의 최후가 나오는 부분은 아주 잠깐이고 중요한 사건을 보여주는 장치로 생각됩니다만,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ㅎㅎ 동로마제국이라고 하면 그저 로마를 이주시킨 느낌이 강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지역의 그리스-아랍권의 문화가 로마와 융합되어 무척 독자적이고 특이한 문화를 보여주었다고 생각되어 ‘동로마‘보다는 비잔티움제국이란 말이 더 신비스럽게 느껴집니다. 저도 조만간 나머지 책들을 마저 읽어보고 싶네요. 내친김에
Philip Sherrard라는 사람이 쓴 Constantinople: iconography of a sacred city 를 아마존에서 찾으니 중고로 $10에 나와서 냉큼 주문했네요.ㅎ 역자께는 여전히 죄송한 마음이지만 이번 incident로 무척 즐거웠습니다.ㅎ

끝으로 궁금하실까봐 방금 주문한 책의 아마존링크를 남깁니다.
https://www.amazon.com/gp/product/B0000CMJP3/ref=ppx_yo_dt_b_asin_title_o00_s00?ie=UTF8&psc=1

붉은돼지 2019-09-26 09:01   좋아요 1 | URL
뜻밖에 삼체에서 비잔티움 이야기가 나와서 우쭈쭈 아는 체하며 수다를 떨 수 있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영어가 짧은 저로서는 얼마전에 읽은 <동방의 부름> 같은 비잔티움 관련 책들이 많이 번역되어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물론 이 책은 십자군에 관한 책입니다만 저는 비잔티움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계속 미루고 있었던 삼체를 오늘 주문할까 합니다. 일전에 <별의 계승자>는 앞 권의 내용을 잊어버리고 또 내용도 조금 어려운 것 같아서 3권까지인가 읽다가 그만 포기했는데 삼체는 워낙 평이 좋아서 재미있게 잘 읽을 것 같습니다. ~

transient-guest 2019-09-26 09:55   좋아요 1 | URL
3부는 번역수정 하신다고 했으니 조금 기다리셔도 될 듯

붉은돼지 2019-09-26 10:14   좋아요 1 | URL
안그래도 일단 1권만 주문했습니다. 님께 땡스투했어요. ㅎㅎㅎㅎ

transient-guest 2019-09-26 11:29   좋아요 0 | URL
즐독하셔요 ㅎ
 

 

 

 

 

 

 

 

 

 

 

 

 

오르한 파묵 <다른 색들> p472-486 '벨리니와 동양'에서 주로 인용.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2세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면서 유구한 역사의 비잔틴제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술탄은 정복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아드리아해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베네치아 공화국도 비잔틴제국이 무너진 그 자리에서 욱일승천의 기세로 준동하는 이 이슬람제국의 확장을 막아내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공화국은 바다와 육지 곳곳에서 오스만과 부딪혔고 오랜세월 동안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게 되는데, 1479년에 일시적으로 평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그해에 공화국과 제국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고, 위대한 군주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정복 전쟁이외에 문화와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베네치아에 훌륭한 화가를 요청하자, 평화에 목말라 있던 베네치아는 도제의 궁전을 장식하고 있던 공화국의 일급 화가인 젠틸레 벨리니를 일종의 문화 대사로 오스만제국에 파견한다. 곰브리치가 <예술과 학문>이라는 글에서 전통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벨리니와 조르조네가 없었더라면 티치아노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이 벨리니는 젠틸레 벨리니가 아니라 그의 동생인 조반니 벨리니다. 그렇다고 형이 동생보다 못하다는 그런 이야기는 물론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형제는 용감했다 쯤 되겠다. 어쨌든 

 

젠틸레는 이스탄불에서 16개월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그 유명한 술탄 메흐메트2세의 유화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의 소장품인 이 초상화는 2003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550주년을 맞아 런던에서 이스탄불로 건너와 베이올루에서 전시되었는데, 이 조그만 그림을 관람하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으니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비잔틴제국과 관련된 도서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자이크화가 빠지지 않듯이 오스만 제국과 관련한 거의 모든 도서에는 이 초상화가 등장한다. 오르한 파묵의 표현을 빌리자면 체게바라의 사진이 일반적인 혁명가의 아이콘이듯이 젠틸레의 이 초상화는 일반적인 오스만 술탄의 이미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 회화의 전통에서는 인물의 초상화는 거의 그리지 않는다. 일종의 금기다. 다만 예외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초상화를 남겼다. 토프카프 궁전에 가면 한 방 가득 오스만 술탄들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 술탄 제위 당시에 화원에서 그려진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일괄하여 그린 것인지는 소생이 알 수 없다. 우리 눈에 익은 사실주의적인 그림이 아니어서 다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젠틸레의 이 초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술탄의 가늘고 긴 메부리코다. 오스만의 위대한 술탄 술래이만대제도 메부리코다. (고골의 단편 중에 라는 것이 있죠 아마) 오스만 술탄 가계에 알려진 유일하게 공통된 얼굴 특징은 바로 코다. 메부리코. 가늘고 긴 메부리코를 가진 갸름한 얼굴의 사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 남자가 과연 정복자술탄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냥 보통의 터키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벨리니의 16개월 동방여행은 몇몇 유명한 그림들을 남겼고, 당대의 오스만 제국 화단에 적지않은 충격과 파장을 일으켰을 것이지만 그 영향이 지속되어 오스만의 전통적인 회화기법의 변화에 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세밀화가 시난 베이의 메흐메트2세가 장미 향기를 맡고 있다는 초상화는 아마도 벨리니의 영향을 받아 그려졌을 것이 분명하나 더 이상의 발전과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시도는 없었다

 

벨리니의 초상화

 

시난 베이의 '장미꽃 향기를 맡고 있는 메흐메트2세'

 

벨리니의 수채화 '예니체리'

 

 

 

 

 

 

 

 

 

 

 

술레이만 대제의 초상화 왼쪽은 서유럽 르네상스 화풍인듯 하고 오른쪽은 전통적인 이슬람 세밀화법 그림 같음.

술레이만은 메헤메트2세의 증손자인데 역시 메부리코로 오스만 술탄 가계의 유전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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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9-0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대 왕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잘 생겨 보여도 실제로는 외모에 약점 하나씩 가지고 있었어요. 스페인 왕가가 근친혼을 많이 해서 왕가 자손 대대로 주걱턱이었어요. 불행하게도 공주 역시 주걱턱이었고, 오래 못 살고 세상을 떠났어요. 정말 유전은 무섭습니다. 유전무죄도 무섭고요.

붉은돼지 2016-09-08 17:13   좋아요 0 | URL
맞아요...스페인 왕가 합스부르크가인가 뭔가 하여튼 주걱턱들 많지요....ㅎㅎㅎㅎㅎㅎ
예전에 주걱턱보고 생각했습니다...참 왕이라는 것들이 생긴거 하고는 끌끌끌....ㅋㅋㅋㅋㅋㅋ
유전 참 무섭죠..그래서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모양입니다...ㅎㅎ

AgalmA 2016-09-09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부리코와 장미꽃이 같이 있으니 기묘한 분위기가 ㅎ;; 저 앉은뱅이 자세의 저팔계스러움 때문이지도ㅎ;;;

붉은돼지 2016-09-09 10:07   좋아요 0 | URL
저는 벨리니의 작품도 멋지지만....메부리코에 장미꽃 작품도 나름 마음에 들어요 ^^
 

1950~70년대에 미국에서 활동한 캐나다 출신 남성 4인조 밴드인 The Four Lads의 노래 중에 “Istanbul(Not Constantinople)” 이라는 것이 있다. 이 노래는 1953년에 발표되었는데,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해가 1453년이니 말하자면 함락 500주년 기획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벼운 스윙 스타일의 노래로 경쾌하고 흥겹다. 듣고 있으면 궁뎅이가 들썩거린다. 가사도 유머러스하다. 약간 유치하기까지 하다. 이 유구하고 영광스러운 도시의 빛나는 문화와 역사 혹은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다만 도시의 명칭이 과거에는 콘스탄티노플이었지만 지금은 이스탄불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뿐이다. 얼쑤!얼쑤! 흥이 좀 날려면 약간은 유치해야 한다. 조금 망가져야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가사는 이렇다.

 

Istanbul was Constantinople
Now it's Istanbul not Constantinople
Been a long time gone
Old Constantinople's still has Turkish delight
On a moonlight night

 

Every gal in Constantinople
Is a Miss-stanbul, not Constantinople
So if you've date in Constantinople
She'll be waiting in Istanbul
Even old New York was once New Amsterdam
Why they changed it, I can't say
(People just liked it better that way)

Take me back to Constantinople
No, you can't go back to Constantinople
Now it's Istanbul, not Constantinople
Why did Constantinople get the works?
That's nobody's business but theTurks'
 
 Istanbul!!  Istanbul!!

Even old New York was o'nce New Amsterdam
Why they changed it, I can't say
(People just liked it better that way)

Take me back to Constantinople
No, you can't go back to Constantinople
Now it's Istanbul, not Constantinople
Why did Constantinople get the works?
That's nobody's business but the Turks’

Istanbul!

 

초반에 나오는 ‘Turkish delight’는 터키 젤리과자인 로쿰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여기서는 약간 중의적인 뜻으로도 쓰인 듯도 하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에 추억의 이스탄불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로 유명한 콜롬비아 레코드 전속가수 이해연이 불렀다. 노래 가사는 당연히 개사되었다. 도시의 이름이 바뀌었다고 자꾸만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아가씨를 조심하라는 것인지 아가씨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홀한 밤거리에서 방황하다가 까딱하면 큰일난다고 주의를 촉구하는 교훈적인(?) 내용으로 바뀌었다. 번안가요의 가사는 이렇다.

 

이스탄불! 아가씨 조심해요, 이스탄불! 유혹이 많은 거리

멋있는 술집도 많은 거리, 아가씨는 춤을 잘 추네

이스탄불! 아가씨 조심해요, 이스탄불! 유혹이 많은 거리

밤이면 사고도 많아서 까딱하면 큰 일 납니데이~

 

황홀한 밤거리 너 혼자 거닐 때

아가씨들 윙크하는 여인의! 조심해요 조심해

이스탄불 아가씨 조심해요, 이스탄불 유혹이 많은 거리

밤이면 봄바람 바람 바람 정열에 불타는 거리 까닥하면 큰일 납니데이~

 

이스탄불! 이스탄불! 이스탄불! 이스탄불! 이스탄불! 이스탄불!

 

황홀한 밤거리 너 혼자 거닐 때

아가씨들 윙크하는 여인의 조심해요 조심해

이스탄불 아가씨 조심해요 이스탄불 유혹이 많은 거리

밤이면 봄바람 바람 바람 정열에 불타는 거리 까닥하면 큰일 납니데이~

이스탄불! 아가씨 조심해요 이스탄불! 유혹이 많은 거리

밤이면 사고도 많아서 까딱하면 큰 일 납니데이~

 

터키 노래하면 역시 위스크다르를 빼놓을 수 없다. 연세 지긋하신 분들은 한번 들어보시면 다 알 것이다. 1953년 미국의 여배우이자 가수인 어사 키트(Eartha Kitt)가 음반을 내면서 유명해진 우스크다라는 이후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알려졌지만 원래는 우리나라의 아리랑만큼이나 유명한 터키 민요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기 군인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 터키는 우리나라에 미국, 영국 다음으로 많은 15,000명의 군인을 파병했다. 그 군인들이 유혈의 전장에서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가 바로 우스크다라. 아라비아 지방의 독특한 선율로 실연당한 여인네의 목소리처럼 특이한 음률이 매력적이다.

      

어사 키트는 소생에게는 뭐 금시초문이지만 나름 유명한 배우이자 가수다. 어사와 관련하여 두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매우 훌륭하다는 의미의 프랑스어는 세시봉이다. 많이 들어보셨죠??? 아국에서는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등이 출연하기도 했던 최초의 음악감상실로 더 유명하다. ‘세시봉은 노래로도 유명한데, 1947년에 프랑스 작곡가 '앙리 베티(Henri Betty)'가 만든 이 곡은 한동안 가수를 찾지 못한 채 묻혀 있다가, 1950년에 '제리 시렌(Jerry Seelen)'이라는 미국 가수에 의해 'It's So Good'이라는 제목으로 불려지면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53년에는 미국의 한 흑인 여가수가 고혹적인 음성의 프랑스어로 노래해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8위 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 가수가 바로 어사 키트다.

 

또 하나. 1968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어사 키트는 배트맨 TV 시리즈에서 캣우먼 역을 맡아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한번은 백악관의 오찬 행사에 참석했는데, (당시 대통령은 존슨이었다) 영부인이 어사에게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당당히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이 나라의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 내보내서 총에 맞아 죽거나 병신이 되게 했어요. 아이들이 들고 일어나는게 당연하죠' 이 한 마디로 그녀는 그후 10여년 동안 미국의 어느 무대에서도 설 자리를 찾을 수가 없게 된다. 미국을 떠나 유럽을 전전하던 그녀는 1978년이 되어서 카터 대통령이 다시 백악관으로 초청하면서 복귀하게 된다.

 

우스크다라가사의 내용은 엄격한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던 오스만투르크 시대에도 여성이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은밀하게 사랑을 고백했다는 얘기를 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위스키 달라, 소주 달라, 막걸리도 좋다 어쩌고...’ 하며 우스개섞인 노래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 일명 웃기게 따라부르기로 이름난 노래로는 보니엠의 바빌론강가에서를 빼놓을 수 없다. 가사는 고대 유대왕국이 바빌로니아에게 절단나고 유대 백성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와 바빌론 강가에서 떠나온 조국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그런 내용이다. 디스코풍의 이 노래는 우리나라 코미디프로에서 다들 이불개고 밥 먹어, 왜에에에 너는 이불 안개고... 어쩌고....‘ 하는 가사로 바뀌어 불리기도 했는데, 한 민족의 가슴아픈 역사가 우스개가 되는 것은 유감이기는 하나 그런 것들을 일일이 다 생각하다보면 골머리가 터져서 살아도 오래 못살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는 소견이다. ’우스크다르의 번안가요 역시 추억의 이스탄불을 부른 이해연이 불렀다. 앨범은 1957년 첫 발매되었다. 당시는 말하자면 번안가요의 전성시대였다. 가사는 이렇다. 작사가는 무슨 생각과 의도로 이런 가사를 썻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UskDara 머나   찻아 와보니!
의심없이 듣던 대로 이상한 나라!
이것 저것보고 듣고정말 놀랬어!
이래서야 남자꼴이 말이 아니지!

 

'우스크 다라모든 여자 녹여 줄려고!
있는 멋을  내고서 으시대기에!
어찌되나뒤를 따라가 보았더니!
말도 마오녹은 것이글쎄남자야!

 

'Usk Dara'  아시오?!
거기선천한 나라인데요거기선!
남자들이 여자한테 맥을  춘다나봐요!

TURKEY, TURKS

 

'Usk Dara' 좋은 나라멋있는 나라!
여자라고 깔보다간   다치지!
무릎 꿇고  손으로 빌기 싫거든!
정신 바싹 차리고서어서 빌어요!

 

여자를 녹여준다고 큰소리치다가 결국 녹은 것이 남자라. 지당하신 말씀이라는 생각이다. 큰소리 잘 치는 것도 그러하려니와 아무래도 녹기로 말하자면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더 잘 녹아나는 물건임에는 틀림는 것이다. 흐물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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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9-08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뎅이가 뮙니까? 엉덩이라고 하셔야죠.ㅋ 한국 가요사란 영화가 있군요. 어제 <해어화>란 영화를 봐서 그런가 왠지 땅기는군요!

붉은돼지 2016-09-08 15:00   좋아요 0 | URL
어머! 스텔라님...호호호.... 사전을 찾아보니 엉덩이의 아래 부분을 궁둥이라고 하고 궁뎅이는 궁둥이의 방언이라고 하네요....모르셨죠???? 저도 오늘 처음 알았어요....호호호호

제가 스텔라님의 노작 <네 멋대로 읽어라>는 벌써 9.1.날 주문했는데요, 외서와 함께 주문하는 바람에 9.26.은 되어야 배송된다고 하는군요...그래서 분리배송을 문의했더니만 , 분리배송하면 5만원 구입에 주는 2천 마일리지가 없어진다고 하는군요....그래서 그냥 눈알이 둘러빠지든지말든지 그냥 기다리기로 했어요...ㅜㅜ ....좀전에 보니 독서에세이 주간 13위에 올랐더군요...^^

붉은돼지 2016-09-08 16:09   좋아요 1 | URL
아....그리고 한국가요사는 영화가 아닙니다. 책입니다. 스텔라님 ^^

stella.K 2016-09-08 16:17   좋아요 1 | URL
아유, 언제고 읽어만 주시면 영광이죠. 무슨 때를 따집니까?ㅋㅋ

근데 누가 그러더라구요. 엉덩이로 하라고. 궁뎅이는 외설스러운 말이라나 뭐라나...ㅠ

아, 영화에 관한 책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근데 그 영화에 이난영과 우리나라에 사라진 창법 정가를 재현했더라구요.
중국의 경극에서의 창법과 비슷한 것 같은데
혹시 관련 자료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거 보니까 갑자기 우리나라 가요사가
궁금해지더라구요.^^
 

말하자면 박물관으로서의 ‘순수박물관’은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박물관>의 물질적 구현이요 실현이다. 파묵은 소설 집필을 시작하기도 전인 구상 단계에서 벌써 소설과 관련된 박물관을 건립을 계획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소설 <순수박물관>의 내용은 이렇다. 이스탄불 상류계층의 한 부유한 남성인 케말이, 부유하고 지적이고 아름다운 약혼녀도 있는 그 남성이, 가난하고 어리고 역시 아름다운 먼 친척 여자 퓌순을 집착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고 온갖 시련풍파가 지나간 뒤에 마침내 그 사랑이 이루어지려는 찰나에 여자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고만다.

 

케말은 퓌순이 살았을 당시 그녀의 집에서 훔쳐왔던 그녀의 물건들과 퓌순이 죽은 후 30여년동안 수집한 그녀와 관련된 모든 물건들 - 그녀가 피운 4,213개의 담배꽁초, 영화 포스터, 멜템 사이다병, 퓌순이 사용했던 빗, 머리핀, 칫솔, 립스틱, 퓌순의 집 텔레비전 위에 있던 자기로 된 개인형들, 화장수병들, 케말과 퓌순이 어린시절 탔던 세발자전거 등 - 을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장소인 멜하메트 아파트(멜하메트는 '연민'이란 뜻이다.)에 보관하고 나중에는 그 아파트를 박물관으로 개조할 계획을 세운다. 전세계 5,723개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세울 박물관에 대하여 고민하던 케말은 결국 2007년 62살의 나이로 그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박물관 다섯군데 중 하나라고 언급했던 밀라노에 있는 '바가티 발세치 박물관' 근처의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아마도 케말은 자신의 사랑과 관련된 수집품들을 통해 상실된 사랑으로 인한 슬픔과 아픔에 위로를 얻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박물관을 세움으로써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완성을 꿈꾸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케말은 박물관이 건립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죽기 전 케말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줄 것을 작가 ‘오르한 파묵’에게 부탁하면서 그 책의 마지막에 자신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꼭 잊지말고 기록해달라고 부탁한다. 바로 이 말이다. “모든 사람이 알아 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이 소설은 케말이라는 이스탄불 상류사회 한 남자의 사랑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스탄불의 작가 오르한 파묵의 한 도시에 대한 사랑이야기이기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에는 1970년대~1990년대 이스탄불의 문화가 촘촘하게 기록된다. 이스탄불 상류층의 문화, 연애 및 결혼 풍습, 영화계의 실태, 사업과 장사꾼들의 이야기, 보스포루스의 해안, 베이올루와 지한기르, 톱하네의 거리와 골목들, 클럽과 술집 등에 대한 애정어린 추억들로 가득하다. 한 도시에 대한 추억이라는 측면에서 <순수박물관>은 파묵의 자서전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의 확장판이다. 오르한 파묵은 1952년 이스탄불에서 태어났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 그의 나이 쉰이 되던 해인 2003년에 발표한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은 파묵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의 자신의 초상과 고향 이스탄불을 다르고 있는 회고록이다

 

“(순수박물관은) 사랑이 우리 마음에 어떻게 작용하고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 지를 고심햇던 책이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 한 여자에게 지독하게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에 비친 1970년대, 1980년대의 터키 이스탄불을 조망하고자 했습니다. (중략) 순수박물관은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사랑에 빠졋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한 여자의 물건들을 모으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 남자는 자신이 모은 물건들로 박물관을 세웁니다. (중략) 나는 이런한 것을 쓰면서 세상의 수많은 박물관을 돌아다녔습니다. 서양인들이 수집가라고 부른 것이 왜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이 수집가들의 영혼의 상태를 연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p177-178, 한국전쟁 60주년 다큐맨터리 인터뷰에서)

 

“(이스탄불-도시 그리고 추억) 그 책의 절반은 그 시점까지의 제 자서전이고, 절반은 이스탄불에 대한 거예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스탄불에 대한 어린아이의 시점이죠. 그 책은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와 풍경과 매력에 대한 생각과 그 도시에 대한 어린아이의 느낌, 그 아이의 자서전을 결합한 것입니다. 그 책은 '나는 화가가 되고 싶지 않아. 나는 작가가 되고 싶어‘라고 말했다.’ 라는 구절로 끝납니다.”(파리리뷰인터뷰 <작가란 무엇인가1> p76-77)

 

“저의 인물들이 느끼는 우울한 사랑의 슬픔은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의 풍경을 통해 재현됩니다. 이는 우연이 아니죠. 저 역시 이러한 우울한 감정을 갖고 있으니까요. 특히 이스탄불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는 동안에요. 해서 제가 자서전적인 책에서 이스탄불에 관해 썼던 것들을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어 <순수박물관>이라는 소설에서 보다 장대한 스케일로 정확하게 쓰려고 했습니다.“(<존 프리먼의 소설가를 읽는 방법> p487-488)

 

순수박물관이 소개되어 있지 않은 이스탄불 가이북도 꽤 있는 듯하다. 순수박물관은 금각만 건너편인 갈라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노면전차인 트램바이 T1을 타고 토프하네역에서 하차하여 갈라타사라이 역 혹은 이스틱클랄 거리 쪽을 향해 도보로 5분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적색의 아담한 목조 3층 건물이다. 크지 않은 건물이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순수박물관은 애초에는 소설 발간과 동시인 2008년 8월에 개관할 예정이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2012년 4월 27일 개관했다.

 

“나는 항상 이스탄불에 박물관을 세우고 싶다고 생각했답니다. 소설 집필을 하기 전인 1999년에 지금의 순수박물관 건물을 샀구요. 그리고 그 건물의 이웃들에게서, 벼룩시장 등에서 물건을 하나하나 사들이면서 동시에 소설을 써 나갔습니다. 나는 거대한 박물관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반영하는 하우스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소박한 박물관을 생각했습니다.“ (중략) “나는 이 소설에서 사랑과 박물관을 연관시키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어떤 것들을 간직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죠 물건들은 우리에게 왜 이렇게 소중할까요? 왜 그것을 간직해서 이후의 세대에 전해 주고 싶은 걸까요? 이것이 바로 사랑의 바로미터가 아닐까요”(<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p201-204, ‘2012.4월 순수박물관 개관 기념식 인터뷰’에서)

 

소설 <순수박물관>은 모두 83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박물관 <순수박물관>의 전시 상자도 83개이다. 각 상자마다 소설 각 장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소설을 읽고 방문하면 당연히 더 감회가 깊을 것이다. 민음사에서 나온 소설 <순수박물관> p386에는 박물관 무료 입장권이 인쇄되어있다. 소생은 뭐 책을 가지고 가지는 않았다. 잊어버렸는데 입장료는 1~2만원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박물관에는 관람객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나중에는 조금 늘어났지만 처음에는 중국어를 쓰는 젊은 아가씨 3명뿐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 끝 유리벽안에는 퓌순이 피운 담배의 꽁초 4,213개가 핀셋에 꽂혀 벽면 가득 날짜별 연도별로 전시되어 있다. 꽁초아래 적힌 메모는 파묵이 직접 쓴 것이다. 왼족 편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다. 퓌순의 귀걸이와 소설, 노트 등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2층과 3층에는 파묵이 이스탄불 각지에서 모은 관련 오브제들이 상자에 담겨 전시되어 있다. 4층으로 올라가면 왼쪽 벽면에는 세계 각국에서 번역된 순수박물관 책이 유리장식장 안에 전시되어있다. 40-50종은 되는 듯 하다. 중국어로는 ‘순진박물관(純眞博物館)’, 일본어로는 ‘무구박물관(無垢博物館)’으로 번역되는 듯하다. 그 옆 장식장 안에는 오르한 파묵의 친필 원고들이 전시되어 있다. 고등학교 때는 그림을 그렸고 대학에서는 건축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그림이 볼품있다.

 

4층은 다락방 형태로 꾸며져 있는 데 소설 속에서 케말이 2000-2007 살았던 방을 재현해 놓았다. 이 방에서 소설가 오르한 파묵은 케말의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었다. 방에는 케말 자신과 퓌순이 어린 시절 타고 놀았던 세발자전거가 있고. 케말이 세계방방곡곡의 박물관을 돌아다닐 때 들고 다녔던 가방이 놓여있다. 그리고 방 한쪽 벽면에는 소설 속의 그 유명한 구절이 터키어와 영어로 인쇄되어 있다. “Let everyone know, I lived a very happy life" 이 문구가 쓰여진 벽면에는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긴 평상 의자가 붙어있는데 그 의자에 앉아 여자 한명이 울고 있었다. 중국인 아가씨 3명 중 한명이었다. 그녀는 한 5분정도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감했을 것이고 그 옆에 앉아서 함께 울어주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데, 우리가 왜, 무엇 때문에 슬픈 것일까?

 

정말 ‘행복’이란 무엇인지?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봤지만 역시 답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오르한 파묵은 소설 <순수박물관> 출간 후 한 인터뷰에서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사랑은 교통사고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파묵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사랑은 심각한 질병이지요.” 퓌순이 교통사고로 죽은 것과 케말의 집착적 사랑을 염두에 둔 답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적절한 답변인 듯하다. 우문현답이다.

 

 

 

 

 

 

 

 

 

 

 

 

 

 

 

 

 

 

 

 

 

 

 

 

 

 

 

 

 

 

박물관의 외부 전경

 

1층 벽면의 담배꽁초

 

담배꽁초 (부분)

 

박물관 2층 전경

 

박물관 3층 전경

 

1장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퓌순의 귀걸이 (사진이 돌아갔어요..)

 

2장 '샹젤리제 부티크' 제니콜롱 가방

 

8장 '최초의 터키산 과일 사이다'  멜템 사이다

 

21장 '아버지의 이야기 : 진주귀걸이'

 

31장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거리들'

 

 65장 '개'

 

 67장 '화장수'

 

72장 '삶도 사랑처럼' 

 

 퓌순이 입던 옷

 

 다락방 전경

 

 순수박물관 소설들

 

 파묵의 친필 원고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문구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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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12-27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붉은 돼지님ㅜㅜ 정말 궁금한 풍경 중 하나였는데!
알라딘은 붉은 돼지님 배신을 용서하고도 남을 글ㅎ!

붉은돼지 2015-12-27 21:22   좋아요 0 | URL
어머 아갈마님~ 소생의 신원을 위해 이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ㅋㅋ
앞으로도 알라딘 중앙에 말씀 좀 잘 드려주세요..붉은돼지가 깊이 반성하고 있다고.ㅎㅎ

초딩 2015-12-27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앗 파묵이네요! 전 내이름은 빨강 부터 내년에 시작하려구요. :-)

붉은돼지 2015-12-27 21:22   좋아요 0 | URL
저도 <내 이름은 빨강>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물고기자리 2015-12-27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묵의 이런 긍정적인 집요함이 저는 참 좋아요. 물건을 먼저 수집하고, 그것들을 소설에 자연스럽게 배치해 나갈 때 화가로서의 면모와 소설가로서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았나 싶어요. 소설 속에서 그 작업이 얼마나 충실했는지, 물건들 하나하나에 마치 제 추억도 같이 깃든 것 같습니다^^ 퓌순이 담배를 끄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의 감정을 추측해보던 케말이 생각나요. 최소한 4213 번을 지켜본 셈이겠지요ㅎ 극적인 순간의 모든 전조를 담고 있던, 퓌순이 운전연습을 할 때 입었던 원피스와 너무나 궁금했던 멜템 사이다 병도 보이네요. 건물도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책을 읽으며, 케말이 물건들을 수집해 나갈 때마다 저도 그것들을 따라 적으며 수집하는 기분을 대신 느껴봤었어요^^ 터키의 물건들을 이미지로 떠올릴 수 없어 막연히 상상해보면서 말이죠. 제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사진들을 올려주셔서 감사해요ㅎ 쓸쓸한 케말의 방을 보며 눈물이 핑 돌기도 하지만 저는 붉은돼지 님의 `지적인 수집`에도 감동을 느낍니다^^

붉은돼지 2015-12-27 21:26   좋아요 0 | URL
소설을 쓰면서 한편으론 그 소설에 등장하는 물건들로 박물관을 세우는 것은 아마 전무후무한 일인 것 같습니다. 파묵이 소설가로 성공했지만 한때 꿈이었던 미술가나 건축가로서의 꿈도 잊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방문해본 순수박물관은 아직 건립된 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런지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무슨 박물관 상도 받았더군요...이 박물관이 10년 20년 30년 후에도 잘 운영될 지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살리미 2015-12-27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너무 멋지네요.
물건을 수집하고 그 것들을 소설에 배치하고 박물관을 만든거라고요????? 너무 너무 너무 인상적이네요.
물고기자리님 리뷰 보면서 순수박물관 읽어봐야겠다 생각했는데... 박물관 사진을 보니 읽고나면 터키에 너무 가고 싶을 것 같아요 ㅠㅠ
오르한 파묵.... 내년엔 아마 그를 푸욱~~~ 사랑하게 될 것 같네요.

붉은돼지 2015-12-27 21:34   좋아요 0 | URL
소설과 현실이 막 헷갈리기도 합니다. 소설 속 소품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소설 속에 오르한 파묵이 몇 번 등장하구요..끝에 가서는 소설 속 주인공이 작가인 오르한 파묵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달라고 부탁하고...그래서 이 소설이 쓰여진 것이고... 상상이 현실로 존재하는 그런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물고기자리 2015-12-27 21:50   좋아요 1 | URL
제가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를 읽고 있는데 <순수 박물관>을 쓸 당시 물건들을 모으고 물건에 적합한 상황, 순간, 장면들을 상상했다고 하더라고요.

˝예를 들면, 내 소설의 여주인공 퓌순에게 어울릴 오렌지색 장미꽃과 초록색 잎사귀 무늬의 원피스를 먼저 고물상에서 샀고, 나중에 이 허구의 인물이 이 옷을 입은 장면(운전 연습 장면!)을 쓸 때 그 옷을 앞에 놓고 세부적인 것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또 다른 예로, 소설엔 `모과 강판`이 등장하는데 파묵이 충동적으로 산 물건임에도 소설에는 한 역할을 하거든요^^ 이렇게 세밀한 작업을 통해 소설을 현실로 구현한 거죠ㅎ

붉은돼지 2015-12-27 22:02   좋아요 2 | URL
2012년 번역자 이난아와의 인터뷰(`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이난아 : 전시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 있다면요
파묵 : 가장 중요한 물건들 중 하나는 예를 들면 모과강판입니다. 이 모과강판을 어떤 가게 진열장에서 보았을 때, 그 장을 어떻게 구성해야할 지 알게 되었지요

살리미 2015-12-27 23: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게 소설을 쓴다는 자체가 너무 놀랍고 매료되요. 소설을 현실로 구현함으로써 독자는 진짜 소설 속에 빠져들어버리겠죠. 놀랍네요. 이 작가!!

붉은돼지 2015-12-28 13:09   좋아요 1 | URL
아마 이러한 시도는 오르한 파묵이 최초인 듯 합니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과는 또 다른 뭐랄까 보다 촘촘하고 훨씬 더 소설이 피부에 바로 와 닿는 그런 느낌입니다. ^^

서니데이 2015-12-28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속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이렇게 실물로 구현해 놓으면 진짜 그 사람과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아요, 붉은돼지님의 사진이 설명을 더하여 좋은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붉은돼지님, 오늘도 편안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1452년, 그러니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기 1년 전이다. 정복자 술탄 메흐메트 2세는 흑해 방면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내려오는 길목인 보스포러스 해협의 가장 폭이 좁은 곳의 유럽 쪽 땅에 ‘루멜리 히사르’를 축조했다. 터키어로 ‘룸’은 ‘로마’, ‘비잔틴’을 뜻한다. 여기에 접미사가 붙으면‘ 루멜리’가 된다. ‘루멜리’란 결국 로마인의 땅,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는 땅이란 뜻이다. 히사르는 ‘요새’를 뜻한다.

 

 

요새는 정확하게 1452년 4월 15일 착공하여 그해 8월 31일 완공되었다. 술탄 메흐메트2세는 요새의 건설을 3명의 대신들에게 맡겼다. 북쪽 성탑은 사루자 퍄샤, 해안가 성탑은 할릴 파샤, 남쪽 성탑은 자가노스 파샤가 세웠다. 대신들 사이에 경쟁을 붙인 것이다. 말하자면 돈내기 공사였다. 3천명의 인원이 투입되어 공사는 4개월만에 완공되었다. 지금은 ‘루멜리 히사르’라 불리지만 당시에는 ‘목구멍의 칼날’을 뜻하는 ‘보그하즈 케센’으로 알려져 있었다.

 

 

루멜리 히사르는 보스포러스 해안의 조금 가파른 계곡을 따라 축조되었다. 언덕 양끝 위에 높은 성탑이 하나씩 있고 해변에 또 하나의 성탑이 있다. 세 개의 성탑은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삼각형의 모양이 나오도록 설계되었다. 세 탑을 꼭지점으로 하여 외벽에는 또 14개의 작은 탑이 설치되었다. 공중에서 조망하는 전체 모습은 메흐메트 2세의 아랍어 이름을 본뜬 것이라고 한다. 성벽 전체의 길이는 250미터. 폭은 가장 넓은 부분이 125미터이다. 총면적은 30㎢다.

 

 

루멜리 히사르의 반대편이 아시아쪽 해안에는 메흐메트의 증조부인 바예지드 1세가 1393년에 세운 아나돌루 히사르가 있다. 아나톨리아 즉 소아시아에 세워진 요새라는 뜻이다. 루멜리 히사르의 건설로 메흐메트는 명실상부하게 콘스탄티노플의 숨통을 움켜쥐게 된 반면 비잔틴으로서는 정말 목구멍에 칼날이 걸린 형국이 되었다. 성이 완성되자 술탄은 망루위에 대포를 설치하고 해협을 지나는 모든 선박들은 무조건 멈추어서 검문을 받도록 했다. 11월에 해협을 지나던 베네치아 선박은 지침을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포탄을 맞아 침몰했다. 30여명의 선원들은 헤엄쳐서 해안에 닿았으나 모두 붙잡혀 참수되었고 선장은 쇠꼬챙이에 꿰어져 성벽에 전시되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이후에 요새는 무기고 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이 점차 쇠퇴하자 두 요새는 모두 황폐화 되었다.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 19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 5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루멜리 히사르는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을 거쳐 야외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현재 요새의 중앙에는 그리식 원형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야외 콘서트가 열린다. 이슬람 요새에 그리스식 원형극장이 왠말인가 싶었다. 원래는 모스크가 있던 자리인데 박물관으로 개조되면서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해안 가까이에 있는 할릴퍄샤 성탑으로 가는 길에는 대포가 줄줄이 늘어서 전시되어 있다. 세 개의 성탑 중 가장 북쪽의 높은 곳에 있는 사루자 퍄샤 탑에서 바라보는 보스포러스 해협과 건너편 아시아 대륙의 전망은 일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탑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성벽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좁은 계단은 가파르고 난간이 없어 위험해 보인다. 경찰복을 입은 안전요원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사루자 파샤 탑 아래에 벤치가 여러개 있는 휴게공간이 있어 해협을 조망할 수 있다.

 

 

할릴퍄샤 성탑 뒤로 현수교가 보인다. 1988년에 완공된 이 다리는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그 폭이 가장 좁은 곳인 유럽 쪽 루멜리 히사르 인근에서 아시아 쪽 아나돌루 히사르 부근으로 길게 걸쳐져 있다. 다리에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교’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일명 ‘보스포러스 제2대교’로도 불린다. 성탑 위에는 붉은 바탕에 하얀 초생달과 별이 그려진 터키 국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저택들 뒤로 아나돌루 히사르의 성채가 보인다.

 

아나돌루 히사르의 모형

 

루멜리 히사르의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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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쥐의 독서일기 2015-11-27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구경 합니다. 뭔가 레고처럼 잘 지어진 느낌이네요. 그나저나 검문 안 받았다고 벌이 넘 잔인해요. 어찌 저런 데에만 창조력이 심하게 발달하는지!

붉은돼지 2015-11-27 18:03   좋아요 0 | URL
뽈쥐님 말씀 듣고 보니 정말 무슨 레고처럼 지어졌네요 ㅎㅎㅎ
사진을 되나마나 찍기는 많이 찍었는데 쓸만하게 별로 없어요 ㅜㅜ

지금이라고 뭐 나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책 읽으면 사지절단하고 눈알뽑고 말뚝박고....
으으으 너무 잔인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요 ㅜㅜ

챔피언 2015-11-29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그하즈 케센. `목구멍의 칼날이라니. 너무나 절묘한 표현입니다. 당시 비잔틴의 사람들은 얼마나 애가 탔을까요.

붉은돼지 2015-11-30 14:2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정말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
비잔틴 사람들이야 애가 타기도 했겠지만 당시 사정은 흔히 말하는 바로 `다 익은 사과` 였습지요..
제국의 사정은 누가 뭐라 안해도 곧 떨어질 감이었지만....어쨋든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분전은
2천년 제국의 최후로서 부끄러움이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
이문열 식으로 말하자면 .....아!! 장려했느니, 그 낙일이여!! 쯤은 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