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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84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난주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나쓰메 소세키. 그의 해학에 낄낄깔깔 웃다보면 어느 순간 스윽 잔인하게 베이고 만다. 그의 해학은 서슬퍼런 칼날 같다.
>> 고양이가 보는 인간들의 천태만상 꼬락서니
p. 73
요컨대 주인이나 메이테이 선생이나 간게쓰군이나 세상을 등진 백수건달, 그들은 바람 부는 대로 수세미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초연한 척하고 있지만 그 속내에는 세속적인 명예욕도 있고 욕심도 있다. 그들의 평소 대화에 남을 이기려는 마음과 경쟁심도 언뜻언뜻 엿보이는 터라, 여차하면 그들이 늘 욕을 해대는 속물과 한통속이 될 우려도 있으니 고양이인 내가 보기에도 안쓰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p. 159
주인은 자기 전에는 꼭 영문으로 된 책을 서재에서 가지고 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이부자리에 들어 그 책을 두 페이지 이상 넘긴 일이 없다. 들고 와 머리맡에 놓은 채 손도 대지 않은 적도 있다. 한 줄도 읽지 않을 거면 뭐하러 가져오나 싶은데 그 점이 바로 우리 주인다운 점이다. 마누라가 아무리 놀리고 이제 가져오지 말라고 해도 절대 말을 듣지 않는다. 매일 밤 읽지도 않을 책을 침실까지 고생스럽게 들고 온다. 한번은 욕심을 부려 서너 권을 껴안고 온 일도 있다. 얼마 전에는 매일 밤 <웹스터 대사전>까지 껴안고 왔을 정도다. 내 생각에 이는 주인의 병이다.
사치스러운 사람이 무쇠 솥에서 자글거리는 솔바람 소리를 듣지 않고서는 잠들지 못하는 것처럼 주인도 책을 머리맡에 두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책이란 읽는 것이 아니라 잠들기 위한 도구, 즉 활판 수면제인 셈이다.
p.236
눈에 뵐까 말까 한 하찮은 벌레 때문에 내게 치를 떠는 것이다. 손바닥을 위로 젖히면 비요, 아래로 젖히면 구름이라더니 인정이란 참으로 경박하고 쉬이 변하는 것이다. 고작 벼룩 1천, 2천 마리 정도에 그리 야박하게 굴 수 있으니 말이다.
p. 242-243 의복에 빗대어 인간의 역사-평등이라는 허울의 내면-를 비웃음
의복이란 이렇듯 인간에게도 중요한 것이다. 인간이 의복이냐, 의복이 인간이냐. 즉 인간이 먼저냐 의복이 먼저냐 할 만큼 중요한 조건이다. 인간의 역사는 살의 역사도 아니요 피의 역사도 아니며 뼈의 역사도 아니고 그저 의복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싶을 정도다. (…) 먼 옛날, 자연은 인간을 평등한 존재로 만들어 세상에 내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든 태어날 때 벌거숭이인 것이다. 만약 인간이 평등에 안주하는 본성을 지녔다면 기꺼이 벌거숭이인 채로 살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벌거숭이 가운데 하나가 이런 생각을 했다.
<모두가 이렇게 똑같으면 공부한 보람이 없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한 대가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나는 나라고, 누가 어떻게 보든 나라고 할 수 있는 점을 두드러지게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가 봐도 깜짝 놀랄 만한 것을 몸에 걸치는 게 좋겠다. 뭐 좋은 것이 없을까.>
이렇게 10년을 생각한 끝에 드디어 속바지라는 것을 발명했다. 그자는 곧바로 그것을 입고, <어때? 요건 몰랐지?> 하는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며 거리를 활보했다. 그 사람이 바로 오늘날 인력거꾼의 조상이다. 그 단순한 속바지를 발명하는데 무려 10년이란 긴 세월을 소비했다니 다소 뜻밖이기도 하나, 이것은 몸만 오늘날에서 무지몽매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내린 결론일 뿐, 당시에는 이만큼 대단한 발명이 없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세 살배기도 알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하는 데 10여년이 걸렸다고 하지 않는가. (…)
이렇듯 귀신들이 앞을 다투어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경쟁하듯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 나머지 결국은 제비 꼬리를 닮은 기형까지 출현했다. 잠시 뒤로 물러나 그 유래를 생각해 보면, 억지로, 마구잡이로, 어쩌다 우연히, 막연하게 생겨난 것이 절대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이기고 싶고 누르고 싶은 경쟁심에 매달린 나머지 다양한 새것이 등장한 것이요, 나는 너와 같지 않다고 공언하며 다니는 대신 옷을 뒤집어쓰고 다녔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심리를 통해 일대 발견이 가능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연은 진공을 꺼린다>는 말처럼 인간은 평등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p.313
주인은 무슨 일이든 자신이 모르는 것은 대단하다 여기는 버릇이 있다. 물론 이는 우리 주인에 한하는 버릇은 아닐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에는 허투루 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숨어 있다 여기고,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왠지 대단하다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 그러니 주인이 이 편지에 감탄한 것은 의미가 명료하기 때문이 아니라 취지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p. 347
감당하지 못할 바에야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정의(定義) 운운하자면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그저 공연한 일을 만들어서 스스로 괴로워하는 존재라고 하면 충분하다.
p.373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눈살을 찌푸리고 눈물 콧물을 흘리고 탄식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정이 많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동물이라니, 수긍하기 어렵다.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치르는 세금이라 치고, 교제를 위해 때로 눈물을 흘리고 딱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뿐이다. 말하자면 교제용 표정인데, 이것이 또 몹시 복잡하고 힘든 에술이다. 세상은 이 교제용 표정을 잘 짓는 사람을 예술적이고 양심이 있다 일컬으며 크게 대우한다. 그러니 남들에게 대우받는 인간일수록 수상한 것이다. 시험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한 우리 주인은 서투른 부류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서투르니까 대우받지 못한다.
>> 고양이님의 통찰력은 이런 정도의 클라스
P. 115
고양이 발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어디를 어떻게 걸어도 불필요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늘을 밟는 것처럼, 구름 위를 가는 것처럼, 물속에서 석경을 울리는 것처럼, 동굴 속에서 슬을 켜는 것처럼,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불교의 가르침의 진수를 스스로 깨우치는 것처럼.
p. 129
하늘은 만물을 덮기 위해 있고 땅은 만물을 올려놓기 위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이 광활한 대지에 막대기를 세우고 울타리를 쳐 아무개의 소유지라고 구역을 정하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 새끼줄을 쳐서, 이 부분은 내 하늘 저 부분은 네 하늘이라고 구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땅을 잘라 한 평 정도의 소유권을 매매한다면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적당한 크기로 나누어 팔아도 된다는 이야기다. 공기를 팔 수 없고 하늘에 새끼줄을 치는 것이 부당한데 땅을 사유(私有)하는 것이 어찌 합리적일 수 있으랴.
p. 225 해수욕이 몸에 좋은 이유
모두 물속에서 건강하게 노닐고 있다. 병에 걸리면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다. 죽으면 반드시 뜬다. 그러니 물고기가 죽으면 <떠올랐다>고 하고 새가 죽으면 <떨어졌다>고 하는 것이요, 인간이 죽으면 <떴다>고 하는 것이다.
p. 233
지금 내가 소나무를 힘차게 뛰어 올라갔다고 치자. 나는 원래는 지상에 사는 자이니 자연의 섭리에 따라 소나무 꼭대기에 그리 오래 머무를 수 없다. 그냥 놔두면 반드시 떨어진다. 그렇다고 대책 없이 떨어지면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그러니 모종의 대책을 마련해서 자연의 섭리를 다소나마 늦춰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내려가는 것이다. 떨어지는 것과 내려가는 것에 무슨 큰 차이가 있는 듯한데, 실은 대단한 차이는 없다.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면 내려가는 것이요, 내려가는 속도를 빨리하면 떨어지는 것이다. 떨어지는 것과 내려가는 것은 속도의 차이일 뿐이다.
p. 306
거울은 자만의 제조기이며 동시에 소독기이다. 화려함을 좇는 허영심으로 대하면 거울만큼 어리석은 자를 선동하는 도구도 없다. (…) 하지만 자아가 위축되었을 때 거울을 보는 것만큼 약이 되는 일도 없다. 자신의 아름다움과 추함이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얼굴로 용케 오늘까지 사람입네 하고 거드름을 피우며 살아왔다고 깨닫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애 중에서 그렇게 깨달을 때가 가장 다행스러운 순간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것만큼 존귀한 일도 없다. (…) 우리 주인은 거울을 보고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만큼 현명한 사람이 아니어도 자신의 얼굴에 찍혀 있는 곰보 자국 정도는 두루 인정할 수 있는 남자이다.
p. 372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신을 아는 것은 생애의 큰 과업이다. 자신을 알고 있다면 인간도 인간으로서 고양이보다 더한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나도 인간이 인간 자신을 아는 날에는 이런 짓거리를 당장 그만둘 생각이다. 자신을 아는 인간을 두고 이런 장난 같은 글을 쓰는 것은 미안한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코 높이를 스스로 알 수 없듯이 인간이 자신을 깨닫는 일이란 좀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p. 443
늘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 보면 어디에선가 슬픈 소리가 난다.
(알라디너님들은 멋드러지게 필사를 하시더만. 내손은 똥손이므로. 난 필사대신 타사를. 타이핑으로 베껴 쓰기. 안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낫구만..)
p. 311 그대는 무엇에 의지하려 하는가. 천지간에 무엇에 몸을 기대려 하는가. 신인가? 신이란 인간이 고통 끝에 날조한 토우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서러움에 싸질러 댄 냄새 나는 똥에 지나지 않는다. 의지할 수 없는 것을 의지하며 평온하다 하려는가. ... 기름이 다하면 불길이 스스로 꺼지듯 노년에 이르면 번뇌도 없어질 일, 업이 다하면 무엇이 남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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