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이라든가 지방의 미신 연구, 뭐 그런 것들 말일세. 위치우드 언더 애쉬는 그런 방면에서 상당히 이름이 알려졌거든 악마의 연회가 열렸던 마지막장소 중 하나로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미신의 일종으로 마녀들이 화형을 당했다네 자네는 작가가 되는 거야 알겠나? "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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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역사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투쟁하며 가톨릭을 수호하는 신성한 왕정의 성립 과정으로정리할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역사의 실상은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이 단일한 전선에서 부딪치는 ‘문명의 충돌‘보다는양측 모두 다수의 정치 단위들이 이해관계를 좇아 복잡하게 얽혀서 경쟁하는 판에 가까웠다. - P93

민족주의 역사에서는 엘시드가 이슬람 세력들과 맹렬한전투를 벌이며 영웅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그려졌지만, 실상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카스티야의 귀족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iaz de Vivar지만, 아랍어 알사이드Al-Sayyid(영주)에서 유래한 엘시드로 더 잘 알려졌다. 그의 진면목은 이슬람 국가든 기독교 국가든 비용을 잘 지불하면 누구에게나 군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용병에 가까웠다.  - P94

혼란기에는 내부 결속을 다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영웅 만들기가 진행되곤 한다. - P96

이처럼 국운이 쇠락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명예를 되살려줄 영웅이 필요했던 것이다. 엘시드는 더 나아가서 20세기 전반의 에스파냐 내전 상황에서 프랑코 독재정권에 이용되었다. 1939년 내전에서 승리를 굳힌 프랑코 장군은 자신을 제2의 엘시드로 묘사했고, 1955년 그의 첫 번째 정치적 수도였던 부르고스에 거대한 엘시드 기마상을 건립했다. 영웅은 결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새롭게 주조되곤 한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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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에게서독일 민족의 우수성의 근원을 찾고자 했던 나치 이데올로그들은 북유럽이
‘초인 人, Ubermensch‘의 모태라는 과장된 이야기도 만들어냈다. 지금도 네오나치는 북유럽 신화, 바이킹 문화, 룬 문자 runic alphabet(고대 게르만족이 사용하던문자로 스칸디나비아 지방에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를 강조하곤 한다. - P33

역사의 거대한 전환은 약 500년 후 에스파냐,
포르투갈, 영국과 같은 강력한 근대 국가가 해상활동을 주도할 때가서야 일어났다. 그 이전 시기인 14세기에 기후가 계속 한랭해지자 여름에도 바다에 유빙이 생겨서 북대서양 항해가 힘들어졌고, 아메리카대륙은 점차 기억에서 멀어졌다. 오직 전설적인 옛이야기 사가에서만 한때 위풍당당했던 사나이들에 대해 노래할 따름이다. - P41

<그린란드와 문명의붕괴>
온 생활양식에 끈질기게 집착하여 농사와 목축에만 매달렸고, 심지어 바뀐기후에 안 어울리는 의복을 그대로 입은 채 추위에 떨며 살았다. 마지막까지생존했던 사람들은 결국 굶어 죽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의 마지막 기록은1408년에 끊어졌다.
환경 파괴와 그로 인한 자원 부족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의적응력 부족이나 개선 능력 결여가 사회의 몰락을 초래했다. 이 작은 섬의사례는 대륙 혹은 지구 전체의 미래에 대한 예시일 수 있다. - P43

았다. 윌리엄은 이렇게 축조한 성들에왕실 수비대를 주둔시킨 반면, 다른 영주들에게는 성의 소유를 금지했다.
새 왕조는 각종 봉건적인 세금을 부과하여 소득을 올렸다. 신하들이 소유지 변경과 상속 때납부하는 부과금,
영주가 딸의 결혼이나 아들의 십자군참가 시내야 하는 헌납금 같은 것이그 예다. 도시 자유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이나 벌금도 다양했다. 예컨대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일시에 결혼할 수있는 허가를 얻기 위해 15파운드", "아내가 국왕의 포로 상태인 남편과 동침하기 위해 200파운드"를 납부해야 하는 식이다. - P63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성장의 가도에 들어선 유럽은 그동안 준비한 힘으로 바깥으로 팽창을 시도했으니 그것이 십자군운동이다. 신앙의 적이며 정치·군사적 라이벌인 동방의 무슬림과 충돌한 이 장기적 사건 역시 유럽 중세 문명을 발전시키는 자극이 된 한편, 정신적·사회적 불안 요소가 누적되어 위기를 불러온 측면도 있다. 중세 유럽은 발전과 위기의 연속이었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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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은 크게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계로 나눌 수 있다.
이중 루스Ras" (어원은 ‘노 젓는 사람들) 혹은 바랑고이 Varangoi(어원은 ‘선서를한 동료)라고도 불린 스웨덴계 바이킹들은 발트해를 건너 동쪽과 남쪽으로 팽창해 나가면서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그 첫 번째중요한 현상이 러시아 국가의 형성이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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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비교적 평화로운 교류를 하던 시기가 끝나고 8세기 중엽부터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돌연 폭력적 성향을 띠고 해외로 나가는 바이킹의 시대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가까운 지역으로 배를 타고 가서 약탈하고 돌아오는 방식을 보이다가, 점차 현지에 정착하여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극히 먼 지역까지 찾아가서 교역을 하는식으로 발전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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