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은 날마다 수십 차례 비행기들이 이착륙하는 활주로 아래서 흔들리며, 다른 한 사람은 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실톱을 깔고 보낸육십 년에 대해서. - P213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 P220

나는 바닷고기를 안 먹어요. 그 시국 때는 흉년에다가 젖먹이까지 딸려 있으니까. 내가 안 먹어 젖이 안 나오면 새끼가 죽을 형편이니 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먹었지요. 하지만 살 만해진 다음부더는 이날까지 한 점도 안 먹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갯것들이 다뜯어먹었을 거 아닙니까? - P225

아버지를 위한 영화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영화도 아니고, 영상 시도 아니에요. 놀란 듯한 진행자가 웃으며 매끄럽게 물었다. 그럼 무엇에관한 영화인가요? 그 질문에 그녀가 어떻게 답했는지는 기억나지않는다. 다만 그녀가 영화를 그만둔 이유를 짐작하려 할 때마다그날이 떠올랐다. 당혹과 호기심과 냉담함이 섞인 진행자의 태도와 객석의 어리둥절한 침묵, 진실만 말해야 하는 저주를 받은 듯천천히 말을 이어가던 인선의 얼굴이. - P236

밤마다 악몽이 내 생명을 도굴해간 걸 말이야. 살아 있는 누구도 더이상 곁에 남지 않은 걸 말이야.
아닌데, 하고 인선이 내 말을 끊고 들어온다.
아무도 남지 않은 게 아니야, 너한테 지금.
그녀의 어조가 단호해서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는데, 물기 어린눈이 돌연히 번쩍이며 내 눈을 꿰뚫는다.
......내가 있잖아. - P238

어디로?
그건 뭐 그 사람 맘이지. 산을 넘어가서 새 삶을 살았거나, 거꾸로 물속으로 뛰어들었거나……그 순간 이후 우리는 다시 서로에게 경어를 쓰지 않았다.
물속으로?
응, 잠수하는 거지.
왜?
건지고 싶은 사람이 있었을 거 아니야. 그래서 돌아본 거 아니야? - P242

당숙네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홀러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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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이 깨지고 피가 흐를 때까지 계속한다. 허밍 소리가 별안간 그쳐 나는 고개를 든다. 건천에서 의식을 차렸을 때처럼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축축한 눈송이가떨어지고 있다. 이마에 인중에, 입술에이를 부딪히며 정신이 들어, 이곳이 건천도 마당도 아닌 인선의방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 톱이 필요하다고 꿈과 생시 사이에서생각한다. 이 모든 걸 물리치도록. 이 모든 게 나를 피해가도록.
잘 놀다 가세요.
인선의 어머니가 내 귀에 속삭인다. 내 두 손에 쥐여진 그의 손이 죽은 새처럼 작고 싸늘하다. - P171

부서질 듯 문과 창문들이 덜컹거린다. 바람이 아닌지 모른다.
정말 누가 온 건지도 모른다. 집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고 찌르고 불태우려고, 과녁 옷을 입혀 나무에 묶으려고, 톱날 같은 소매를 휘두르는 저 검은 나무에 - P172

죽으러 왔구나, 열에 들떠 나는 생각한다.
죽으려고 이곳에 왔어.
베어지고 구멍 뚫리려고, 목을 졸리고 불에 타려고 왔다.
불꽃을 뿜으며 무너져 앉을 이 집으로.
조각난 거인의 몸처럼 겹겹이 포개져 누운 나무들 곁으로 - P172

새가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감싸고 여민 손수건을 비집고, 친친 감아 매듭지은 실을 풀고, 귀를 맞춰 닫은 알루미늄 통을 열고, 수건으로 감싼 뒤 십자로 묶었던 실을 끊는 것은 얼어붙은 봉분과 그 위로 쌓인 눈을 뚫고 날아올라, 잠긴 문 안으로 들어와 철망 속이 횃대에 앉는 것은.
삐이이, 아마가 다시 울었다. 여전히 고개를 외튼 채 젖은 약콩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 P180

가로등도 이웃도 없는 집에서 말이야. 눈이 내리면 고립되고 전기와 물이 끊기는 집 말이야. 밤새 팔을 휘두르며 전진해오는 나무가 있는 곳, 내 하나만 건너면 몰살되고 불탄 마을이 있는 곳 말이야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앞서 내가 했던 말을 조용히반박하듯 인선이 말했다. - P195

그녀는 익숙한 동작으로 다시 목장갑을 끼고 난로의 달궈진 문을 열었다. 부지깽이로 나무토막들을 뒤집자 불티가 튀었다. 불꽃의 열기가 내 얼굴까지 끼쳐왔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인선의 목소리가 그 열기 사이로 번졌다.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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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깨에 앉은 아마의 흰 목덜미를 무심코 쓸어보았을 때, 새는 더 깊게 목을 수그리곤 기다리듯 가만히 있었다.
더 만져달라는 거야.
인선의 말대로 나는 그 따뜻한 목덜미를 다시 쓸어내렸다. 마치인사하듯 새가 더 깊이 목을 수그리자 인선은 웃었다.
더, 계속 쓰다듬어달라는 거야. - P141

먹을 칠하는 일은 깊은 잠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오히려 악몽을 견디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걸까? 칠하지 않은 생나무들은 표정도 진동도 없는 정적에 잠겨 있는데, 이 검은 나무들만이 전율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 - P145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양치잎 같은 그림자가 벽 위를 미끄러지며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내지 말라는 거예요.
손깍지 낀 그녀의 두 손이 풀렸다가 다시 단단히 매듭지어졌다. - P159

어둠이요.
어둠이 거의 기억의 전부예요.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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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이유는 새로운 경험보다는 반복되는 경험이 많아지기 때문이라는 이론이 있다. 꼬마 때는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친구랑 모래놀이를 해도 새록새록 새로운 경험이라 하루가 풍요롭지만, 어른은 대부분 반복되는 일상을 살기 때문에 뇌가 일일이 다기억하지 않으니 하루하루가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는것이다. 내 일상도 그렇게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있었다. 곧 마흔 살, 청춘과는 이미 멀어진 나이이고 어차피 죽으면 썩어서 사라질 몸인데 난 참 쓸데없이 주저하는 일이 많구나,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발레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나이 마흔을넘어서도 심리적 에너지 수준이 떨어지지 않으려면어린 시절 꼭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해보는 게 좋다는조언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내게는 그게 발레였다. - P11

‘에샤페 (échappé)‘ 동작을 하는데, 유독 안다리 살이 눈에 거슬렸다. 땅에 떨어질 때마다, 무겁게 흔들리는 주방용 짧은 커튼처럼 지방이 출렁거렸다. 진짜 안 되겠다 싶었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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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기에 이 섬의 바람은 마치 배음처럼 언제나 깔려 있는 무엇이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온화하게 나무를 쓸고 가든, 드물게 침묵할 때조차 그것의 존재가 느껴졌다.
- P129

새는 어떻게 됐을까.
오늘 안에 물을 줘야 살릴 수 있다고 인선은 말했다.
그런데 새들에게 오늘은 언제까진가. - P130

산 이유를 알고 싶다는 생각만 하면 불꽃 같은 게 활활 가슴에 일어서 얼어죽지 않은 것 같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그때젖은 신발이 끝까지 마르지 않아 발가락 네 개가 떨어져나갔는데,
나중에야 그걸 알았지만 아깝지도 슬프지도 않더래요. - P133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둘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다.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 P134

모른다. 새들이 어떻게 잠들고 죽는지.
남은 빛이 사라질 때 목숨도 함께 끊어지는지.
전류 같은 생명이 새벽까지 남아 흐르기도 하는지. - P135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법이 없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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