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가 집권하면 제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선정을 펼 것이니 걱정할 일이 없다. 정치철학은 현자가 아니라 사악하거나 무능한 자가 권력을 쥘 때를 대비해 적절한 조언을 주어야 한다. - P22

포퍼는 올바른 질문을 제출했고 적절한 답도 내놓았다.
‘권력의 제한과 분산‘이었다.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막는 법치주의. 선출 공직자의 임기 제한, 삼권분립과 사법부의 독립, 언론· 표현. 집회·시위 등 시민의 기본권 보장 같은 것이다. 이런 제도는 사악하고 무능한 자가 권력을 차지해도 악을 많이 저지르지 못하게 한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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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력으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한구석에 있었다. 배꼽이 언제나 달려 있고, 귓불이 언제나 두 쪽인 것처럼 그 마음도 늘 거기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서울로 내달렸던 석진의마음은 욕망이라기보단 낭만이었다. 여기 아니면 어디라도 좋다는 마음. 그게 로맨티시즘의 기본 강령 아니었던가. - P107

"너 입에서 시궁창 냄새 나.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냄새. 그거 못 고치면 회원 다 떨어져 나갈걸? 좋은 말로 할 때 내과나 가봐." - P130

"아침에는 카페인, 오후에는 니코틴, 저녁에는 알코올, 밤에는 마약, 새벽에는 SNS, 다시 아침이 되면 커피. 저번에 당신도 커피프린스 보고 한국 왔다면서요."
"그러네요" - P156

"욕조가 빨갰어요. 엄마 팔 한쪽이 욕조 밖으로 나와 있었어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칼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아, 남을 안 베려면 자기를 베면 되는구나 하고." - P169

내뱉는 동시에 석진은 그 말을 후회했다. 더럭 겁도 났다.
칼을 삼킬 정도로 무서울 게 없는 이 여자가 두려웠다. 수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가난한 사람들은 무서울게 없다고. 그래서 자기는 밑바닥 인생들이 제일 겁난다고 뜬금없이 조선족 여자를 데스크에 앉혀놓으면 환자들 반응이 어떨지 뻔했다. 무엇보다 그 데스크 대금을 치른 장모가 펄펄 뛸일이었다. - P169

묘한 몸이었다. 차고 뻣뻣한 몸피. 안쪽은 의외로 따뜻한물을 품은 여자였다. 하지만 석진의 몸은 이내 길을 잃고 허둥댔다. 에이스 이석진 원장이, 내시경 호스를 넣는 데 실패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뭔가가 팽팽하게 진입을 막고 있는 것만 같았다. 클라이밍 암장에 매달려 있을 때처럼 애를 쓰던 석진이결국 정상에 오르지 못한 채 떨어져 나갔다. 아랫도리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침묵하던 유화의 입에서 갈라지는 목소리가흘러나왔다. - P175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생리적 욕구는 희박해졌지만 타인의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싶은 욕구는 더 강렬해져만 갔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강박적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타인의 몸과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킨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섹스는 그 즐거움 때문에 치러야 하는 일종의 기회비용이었다. 주니와의 관계도 시작은 그랬다. 석진에게 죄책감도 없었다. 거짓이 없기 위해서는 거짓이 필요하니까.
- P190

"이 건물 말이에요. 꼭 노아의 방주처럼 생겼어요. 어릴 때오빠랑 교회를 다녔죠. 연변에도 정부에서 허락하는 교단이있어요. 모임을 할 때면 경찰이 들여다보곤 했지만 대놓고 막진 않았어요. 전도만 안 하면요. 그때 성경 공부 모임에서 목사님이 칠판에 노아의 방주를 그렸어요. 선택받은 자들만 탈 수있다고 했죠. 그날 밤 악몽을 꾸고 오줌을 쌌어요. 방주에 친구들이 다 올라탔는데 나만 계단에서 미끄러져 추락했거든요.
불어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데 다들 나를 보고 가만히 있었죠."
....."
"건물을 보고 그때 생각이 났어요. 이 방주에 저는 탈 수 없으니까."
"여기 이렇게 와 있잖아요?"
"임시 입장권이죠. 나 같은 사람은 돈이 아니라 몸으로만살 수 있는 입장권. 그것도 이렇게 피를 흘려야 받을 수 있는누가 만져주는 손길이라도 받으려면 아파지는 게 제일 빠르더군요. 한국엔 병원이 많으니까."
석진이 유화를 바라보았다. - P201

"엄청 추울 때도 내 피는 따뜻하데요. 그게 흘러나오는 걸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했어요. 죽어 있는 것 같은 순간에도내 심장이 열심히 뛰어서 온몸에 피를 보내고 있다는 게."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그런 행동을 한다는 건가요?"
"당신 헛기침 같은 거죠." - P202

"이 도시는 불길해요. 바다를 메꿔서 육지로 만들었다죠? 얼마나 많은것들이 죽었을까요?" - P204

먹고 싼다는 것, 그러니까 산다는 것의 맨얼굴을 수미는 견디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무대용 분장을 하고 살아서일까. - P216

"회당 8만 원짜리 레슨받고 2만 원짜리 샐러드에 요거트배달받고, 스크린 골프 깔짝대다 테니스가 유행하니 옷만 샀다 관두고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오나 몰라. 안목도 없으면서인증샷 찍으러 공연장 몰려드는 것도 웃겨, 발레의 발 자도 모르면서 발레코어룩이나 입고 다니지. 올림머리 하고 타이츠신으면 다 발레리나인 줄 아나 봐." - P220

만일을 위해 제 이름으로 처방받은 약이 비타민 약통 안에 있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량의 두 배를 삼키고 사각거리는 침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해야 할 일을 무사히 해냈다.
다음 날 아침 1층의 헬스장에서 공복 유산소를 마치고 온 수미와 한 번 더 몸을 섞었다.  - P225

"시골 쥐들은 말이야, 항상 뭘 그렇게까지 하냐 싶을 만큼해야 해. 노력도, 연기도, 서울말도, 도시 쥐 비슷하게 보이려면." - P251

불을 품은 눈에 마스카라를 바르는 여자, 바다 건너 땅에서 홀로 얼어가는 여자, 연인의 칼을 먹고 제 속을 베는 여자, 유리 방주를 향해 헤엄쳐 가는 여자. 그녀가 곧 자신의 남은 수염을 밀어주러 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때 석진은 그녀의칼날에 제 턱을 맡길 것이다. 여전히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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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급이라는 건 말이야. 신상 람보르기니처럼 돈을 낸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냐" - P85

"지금도 충분히 말랐지만 전공 특성 때문이라면 차라리 유산소를 늘려요"
"운동이라면 하루에 열 시간도 더 해요. 죽을 만큼 뛰고지 않을 만큼만 먹는다고요. 목이 타서 죽을 것 같아도 물론모금도 안 마셔요. 저 저주받은 체질이거든요."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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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몸과 대비되는 풍만한 발등 선은 발레의 세계에서나 아름다운 것이지 일반인에겐 기형적으로 보일 터였다. 높이가 7센티가 넘는다는, 그래서 마지막 동작까지 드라마틱한곡선으로 완성한다는 무용수의 발등 사진을 보며 어린 수미는 제 발등에 눈물 젖은 스펀지를 테이핑하곤 했다. 그러고 보면인간이 평등하다는 건 아름다운 미신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점 외에는 평등하지 않다. 예체능을 3일만 해보면 알 수 있다.
수미는 제 아이들에게는 몸으로 평가받는 일을 시키지 않겠다고 이를 갈았다. - P37

 일부 헬스 트레이너들이 마사지에 인생 상담까지 해주며 유사 연애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러울 정도였다. 필라테스는 강사도 고객도 대부분 여성이라 그런 묘한 설렘이나 긴장감으로 영업하긴 어려웠다. 그러니 여성 회원들이 동경할 만한, 마르고 탄탄한 강사의 몸 자체가 사업 전략이자 센터 인테리어 그 자체였다 - P40

도리스 레싱의 소설 속 수전에게처럼 자신에게도 19호실이 필요했다. 요가나 필라테스 같은 정적인 운동은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스피커가 터질 듯한 음악을 들으며 정신없이 세트를반복하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이 헬스장이 수미의 19호실이되었다. - P40

 주니와의 만남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못된 사람은 참아도 지루한 사람은 못 참으니까. 남편은표정도, 취미도 좋고 싫음도 없는 남자였다. 미식과 쇼핑에 관심이 없었고 잠자리는 수미가 눈치를 줄 때만, 그것도 정상위로.
- P41

아니, 이익을 주지. 사소한 부도덕은 상냥한 부인이 되게해주니까. 그렇지 않은가. 모두에겐 풀 곳이 필요하다. 풀고 와서 우아하게 처신할 곳도 필요하다. 필연적으로 두 개의 장소와 두 개의 자아가 필요하다. 수미는 손쉽게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 P42

전문가는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몸은 트레이너에게, 살림은 도우미에게, 교육은 학원강사에게. - P45

석진은 이럴 때의 수미를 좋아했다. 아니, 이런 여자를 차지한 자신을 좋아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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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정부가 세워지며 좌익으로 분류돼 교육 대상이 된 사람들이 가입된 그 조직에 대해 나는 알고 있었다. 가족 중 한 사람이정치적인 강연에 청중으로 참석한 것도 가입 사유가 되었다. 정부에서 내려온 할당 인원을 채우느라 이장과 통장이 임의로 적어 올린 사람들, 쌀과 비료를 준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도 다수였다. 가족 단위로도 가입되어 여자들과 아이들과 노인들이 포함되었고, 1950년 여름 전쟁이 터지자 명단대로 예비검속되어 총살됐다. 전국에 암매장된 숫자를 이십만에서 삼십만 명까지 추정한다고 했다. - P273

그후로는 엄마가 모은 자료가 없어, 삼십사 년 동안.
인선의 말을 나는 입속으로 되풀이한다. 삼십사 년.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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