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사람들이 북적이는 경주 보문호수이다.

올해는 경주에 대해 좀 더 깊이있는 공부를 해볼 참이다.

 

겨울 저녁 인적이 드문 보문호숫가를 친구와 산책을 했다. 

몇년 전, 유방암을 앓았고 수술을 햇다.

오 년이 지났으니 한고비는 넘김 셈이다.

자그마한 체구인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다이나믹하다.

그것 때문에 병을 이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학선생님이어서 생각도 합리적이다.

병을 알고 그 병을 다스려 나가는 과정이 담담하지만 단호했다.

병을 이기기 위해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번호를 매기듯히 그 하나하나를 실천해 나갔다.

그런 투병 과정에는 남편의 도움은 전혀받지 못했다.

남편의 위로나 배려, 보살핌 같은 것도 안되는 것 중의 하나였다.

보통의 사람들이면 본질은 물건너 가고 그것 때문에 싸우고 마음 아파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 친구는 그런 문제들을 밀쳐놓고 자신의 몸에만 집중했다.

드디어 병을 이겨냈다.

 

그리고 이년여 동안 날마다 출근하는 남편에게 '아빠 힘내세요'하는 율동을 하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이마며 볼에 뽀뽀를 했다는 것이다.

나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울다 웃다 했다.

이 친구는 두해 전쯤 퇴직을 했다.

요즘은 그랬던 남편에게서 하루에 한 번 정도 '점심은 드셨는지요?' 하는 문자가 온다고 했다.

 

나는 내 친구에게 말했다.

'그대를 의지의 한국인으로 명하노라'

 

이 이야기를 나보다 한 십 년쯤 젊은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다 이구동성으로 의지의 한국인은 내 친구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이라는 거였다.

 

오늘 아침, 예수쟁이라 교회에 가면서 나보다 좀 먼저 가야 하는 남편을 현관에서 불러세웠다.

그리고 안아주며 말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사실 지난 연말 언성을 높이며 싸웠드랬다. 그래서 냉전 중이었다.

정말 하기 힘든일이었지만 내가 누군가.

의지의 한국인의 친구가 아닌가.

저녁에는 소파에 나란히 누워 '나는 가수다'를 보았다.

 

삼 일마다 새로이 작심을 하면 좀 더 나은 '내'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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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1-02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지의 한국인, 내가 즐겨쓰던 말이었는데...^^
저도 2012년엔 의지의 한국인으로 건강관리를 잘 하겠습니다!!

먼저 안아주며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오늘 출근하는 남편에게 냉전중은 아니지만 나도 해봐야겠어요~
반응은 나중에 알려드릴게요.ㅋㅋ

gimssim 2012-01-05 07:18   좋아요 0 | URL
네. 건강관리 잘하시고 늘 왕성한 활동 기대합니다.
어금니를 깨물고서라도 안하는 것 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대를 축복합니다.'
나중에 페이퍼로 결과 읽게 되길 ...ㅎㅎ

하양물감 2012-01-02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없는 싸움...아시죠? 우리집은 그런 상태..무관심...
이 페이퍼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의 무관심이 현재의 상태를 만들었구나..
그렇다고 내가 모든걸 내탓이요, 하는 성격은 아닌지라... 100% 공감은...ㅋㅋㅋ

늦었습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gimssim 2012-01-02 16:17   좋아요 0 | URL
때로 나의 문제를 좀 더 객관화시켜 볼 수 있다면 방법은 보일 것 같습니다.
우리 내외는 '아는 것이 많아서 몸이 고생'하는 스타일이지요.
더 지치기 전에 줄을 놓으면 될 것 같습니다만...그게 잘 안됩니다.ㅎㅎ

그러나 사는 것 또한 그런 것이 아니겠는지요.

하양물감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마녀고양이 2012-01-02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전언니, 연말에 옆지기님과 싸우셨어요? ^^

사진 너무 고즈넉하네요, 늘 그러시듯이.
작년에 주위 사람들의 암에 걸린 소식을 꽤 많이 들어서, 이젠 가슴이 덜컹덜컹하네요.
친구분께서 그렇게 이겨내셔서, 참 기쁩니다.

새해 건강하시고, 즐거운 일 가득하셔요.

gimssim 2012-01-02 21:36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제가 서재에 좀 뜸했었어요. 잘 지내시죠?
새해에는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책도 많이 읽고, 글도쓰고, 사진도 찍고...

새해...건강하고 행복하세요^^

하늘바람 2012-01-05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참 잘 쓰셔서요
제가 많이 배우고 갑니다

gimssim 2012-01-06 07:13   좋아요 0 | URL
올해 저의 희망사항은 '폭풍 글쓰기'입니다.
질보다 양을 추구할 생각입니다.
녹슨 머리를 벼리기에는 아무래도 많이 써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새해인사

 

예수쟁이라 2011년 밤 11시에 예배당에 갔습니다.

12시, 가는 2011년을 보내고 2012년을 맞았습니다.

야누스는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세월이라는 것, 시간이라는 것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뒤는 그만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려가야겠지요.

 

개인적으로는 죽을만큼 힘들었던 2011년이어서 새해 2012년은 좀 품위있게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원하는 일도 해가면서...무엇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풍성히 받으면서...

그리고 또 하나 희망사항은 예수쟁이인것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책도 부지런히 읽고, 사진도 부지런히 찍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 돈도 부지런히 벌구요.

삼일마다 작심을 해가면서 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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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1 0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01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2-01-0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도 교회를 가서 피아노를 치고 왔더니 오늘 너무너무 피곤하더군요..
중전님! 2012년에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gimssim 2012-01-01 21:54   좋아요 0 | URL
네에~ 소이진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순오기 2012-01-01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교회를 방학(폐교)한지가 오래다 보니 송구영신 예배조차도 잊고 사네요.ㅜㅜ
다시 마음에 불이 당기는 날을 기다리지만...저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습니다.
2012년에도 건강하시고 좋은 사진 많이 찍으시고~~~~~~ 두루두루 복 받으셔요!^^

gimssim 2012-01-01 21:5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의 그 당당함에 박수를 보냅니다.
분명 마음에 불이 당기는 날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행복한 2012년 되세요^^
 

 

*** 한겨레 신문에 제 글이 실렸어요. 서재님들께 자랑질합니다. 그리고 글을 자주 올리진 못해도 나름 열심히 살고 있어요(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게으름을 변명해 봅니다). 

시베리아를 녹인 밥심

중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방학. 매일 학교 도서관에 가서 온종일 책을 읽었다. 꿈 많은 사춘기의 여학생은 이광수의 소설 『유정』을 읽고 며칠 동안 몸살을 앓았다. 최석과 남정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마지막 무대였던 바이칼 호수의 장면을 잊을 수 없었기에... 그곳으로 여행하고 싶었지만 동서냉전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당시 소련 땅에 가는 것이 그야말로 꿈같은 소리였다.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진다. 단발머리 중학생 때 꾸었던 꿈을 이루기 위해 무려 35년이 지나서 나는 바이칼 호수로 가는 대장정에 올랐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위해 세 시간 쯤 날아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갔다. 두꺼운 겨울옷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공항을 나섰지만 시베리아의 바람은 생각보다 힘이 세었다. 일행 모두가 입김이 얼어붙어 만들어진 산타클로스 눈썹을 달고 동태처럼 꽁꽁 얼어서 이북사람이 운영한다는 한식당에 갔다. 1960년대 우리 어머니들이 즐겨 입었을 것 같은 한복을 입은 여성 나와서 <반갑습니다>를 비롯한 여러 곡의 북한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마 남한 동포인 우리들을 위한 특별순서인 것 같았다.
미리 예약을 해두어서 자리에 앉자 음식이 나왔다. 낯선 음식이었다. 곰국도 아니고 그렇다고 맹물도 아닌, 멸치 다시국물 같은 국물에 단단하게 여며진 공기밥을 넣고 잘게 찢어서 양념한 닭고기와 잔치국수 고명을 얹은 것이었다. 닭고기는 잘 보이지도 않았고 맛도 밍밍해서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다 비우고 난 이후에나 내린 결론이었다. 입이 거의 얼어붙기 직전이었던 우리들은 세상에서 제일 맛난 음식인 양 맛있게 먹었다. 그 따스함 때문에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행복함이 몰려왔다.
영하 삼사 십 도의 추위에 맞서고자 겨울 여행을 택했지만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기도 전에 시베리아의 매서운 바람에 잔뜩 겁을 먹고 주눅이 든 우리들을 단숨에 녹여준 것은 바로 온반(溫飯)이었다. 이름 하여 ‘따뜻한 밥'이다. 온반으로 추위를 녹인 우리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대한민국 사람은 역시 밥심으로 산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그때의 향수 때문에 온반을 하는 곳을 알아보았더니 우리가 먹었던 그런 것은 아니고 이북만두와 당면, 팽이버섯, 양념한 닭고기 등을 푸짐하게 넣고 얼큰하게 끓인, 영양과 맛을 첨가한 온반들이어서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보름 동안의 겨울 시베리아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맛도 영양도 보잘 것 없었지만 한 그릇 온반의 힘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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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11-10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랑할만하네요^^ 멋집니다~ 역시 밥심!ㅋ

gimssim 2011-11-10 22:18   좋아요 0 | URL
좀 주책이긴 하지만 그냥 넘어가주시니 저로서는 감사할 뿐이지요^^

이진 2011-11-10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한겨레에 글이 실리시다니 멋져요!! ㅠㅠ

온반이라.. 한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맛있어보이는걸요 ㅎㅎ

gimssim 2011-11-10 22:19   좋아요 0 | URL
아마 지금 먹으면 별 맛을 못느낄 것 같습니다.
우리 입맛에 맞게 좀 푸짐하고 얼큰하게 끓여서 파는 온반은 있나봐요.

진주 2011-11-11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부고속도로 타실 일 있으면, 상행선 '칠곡휴게소'에 들러 보세요.
거기 온반이 유명하답니다. 저도 먹어봤는데 그 맛이 닝닝구리한게..중전님이 원하던 맛과 가깝지 않을까 싶네요ㅎㅎ 제 입엔 맞지 않았지만 다들 줄 서서 사먹어요. 음..만약, 저도 추위 속 입이 꽁꽁 얼 지경에서 칠곡휴게소 온반을 먹었더라면 닝닝하네,기름지네 하면서 까탈부리지 않고 맛있게 먹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중전님, 처음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gimssim 2011-11-11 23:44   좋아요 0 | URL
진주님.반갑습니다. 저도 처음 뵙네요.
경부고속도로는 자주 다닙니다.
칠곡휴게소도 가끔 들르기는 하는데 온반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추억 속의 맛으로 간직해야할지, 그렇잖음 한 번 먹어볼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요즘 날씨가 궂은 날이 잦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가을 되세요^^

2011-11-11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1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2 2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1-11-12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런 건 당근 자랑질하셔야죠.^^
아~~~~ 나도 <유정>읽고 몸살을 앓았더랬는데~
지금도 이광수 작품 중에 최고는 <무정>이 아니라 <유정>이라고 추천합니다.^^

gimssim 2011-11-13 12:52   좋아요 0 | URL
아드님 수능은 잘 보았는지요?

가끔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하루종일 도서관에 있어도 세상이 잘 돌아가던 그런 시절요~~~

페크pek0501 2011-11-16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자랑질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전님, 늦게나마 축하드려요.

아, 유정, 저도 읽었어요. 소설 같지가 않고 무슨 연속극 보는 것 같았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재밌죠. 소설 하면 역쉬 이광수 작가지요.

제가 12번째 추천이 되겠습니다.


gimssim 2011-11-16 22:10   좋아요 0 | URL
어머, pek0501님. 잘 지내셨어요?
그 시절에 이광수의 소설이 고전이었지요.
참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내일부턴 추워진다네요.
불청객, 감기 조심하세요^^
 

*** 이제 연말이라 해야할 일도, 올해 안에 읽고자 한 책도 많이 있건만 몸은 자꾸만 밖으로 향합니다. 마음의 말을 거부할 수 없어서 몸을 움직였습니다. 이제 정말 책 읽고 일을 해야지, 다짐해 봅니다. 작심삼일이 될 지라도...으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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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11-0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로만 듣던 내장산 단풍이군요^^ 명성대로 화사하네요~

gimssim 2011-11-08 22:27   좋아요 0 | URL
올해는 전반적으로 단풍이 곱지 않다고 하네요.
이곳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옛추억을 떠올려보면 제 생각엔 설악산보다 내장산 단풍이 더 고운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1-11-08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장산에서 전남 장성 백양사로 내려와도 단풍이 멋집니다.유명한 등산로지요.

gimssim 2011-11-08 22:28   좋아요 0 | URL
단풍을 즐길려면 카메라를 버려야겠더라구요.
기회가 되면 그쪽으로도 한 번 가보고 싶군요.

페크pek0501 2011-11-16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런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지내셨다면 당분간 책을 읽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책보다는 삶이 우선하죠. <종이책 읽기를 권함>이란 책에 이런 글귀가 있어요.
"“강아지와 산보하는 일, 가족과 바닷가에 가서 연을 날리는 일, 이런 일이 있으면 책 읽기를 그만두고 그 일을 하자. 우리는 책 읽기 위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인생을 살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이다.”(36쪽)


gimssim 2011-11-16 22:12   좋아요 0 | URL
많은 위로가 됩니다.ㅎㅎ
사실 올 가을엔 비 오는 날씨가 많아서 이날 이 사진들 건진것도 행운이죠.

으흠...
그래도 종이책을 읽을 겁니다.
우선 써야할 리포트 좀 들여다 보구요.
 


직소퍼즐


직소퍼즐을 샀다. 1000조각짜리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를 샀다. 퍼즐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양으로 불규칙하게 잘라져 있는 조각들을 제자리에 끼워 맞춰서 하나의 전체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도구이다. 


결혼을 하여 남편의 직장을 따라 이곳으로 온 지가 이십 오 년이 다 되었으니 이제 여기가 고향처럼 느껴진다. 아는 분의 소개로 지금은 재개발이 된 임대아파트를 얻어 새 생활을 시작했다. 열 평의 작은 공간에서 남매를 낳아 길렀다. 잠시만 살다가 고향인 대구로 다시 돌아갈 계획이어서 살림살이들도 다 풀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인생이 어디 사람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던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히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은 그때 얻은 것이다.
그 무렵, 건강이 좋지 못했던 남편은 고통으로 밤잠을 설치다가 아침이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출근을 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내 가슴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곤 했다. 새벽이면 아침밥을 준비하고 밤새 달인 한약을 먹이고, 점심 때 먹을 것은 보온병에 담고 도시락 싸서 출근을 시키곤 하였다. 그때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두 아이의 양육비, 남편 약값, 아파트 임대료, 각종 세금, 또 약간의 저축으로 사는 것이  힘에 겨웠다.   


고흐는 불꽃같은 삶을 살았고 보통의 사람들이 가늠할 수 없는 열정으로 그림을 그렸다. 한 조각의 마른 빵, 부족한 커피, 남루한 외투와 닳고 닳은 구두, 딱딱한 나무의자로 짐작할 수 있는 스산한 삶을 살았지만 화가가 된 이래 그 궁핍함 때문에 캔버스 밖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나는 그런 고흐를 좋아한다.
졸업과 동시에 다른 분야는 기웃거리지도 않고 교육계에 발을 들여놓은 남편은 자주 교육현장의 부조리와 병폐를 토로하곤 했었다. 바람직한 교육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주입식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좋은 책을 읽고, 참된 친구를 사귀고, 학급활동, 동아리 활동을 통한 취미생활과 특기 살리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전인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남편은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사의 일을 힘들어했다. 현실은, 소위 말하는 명문대학의 진학률로써 교사의 능력과, 학교의 평판이 판가름이 났다. 학생들의 인격함양과 정서순화에는 관심이 소홀했다. 결국 이상주의자라는 질시 속에 상처를 안고 교직을 떠나야했다. 


쓰지 않는 방을 깨끗이 치웠다. 손님이 올 때만 가끔 꺼내 쓰던 커다란 상을 펴고 그 위에 1000개의 퍼즐 조각을 올려놓았다. 퍼즐은 맞추는 사람을 배려해서 A, B, C, D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인생과 닮았다. 순서대로 맞추어간다면 내 인생은 지금 세 번째 부분의 퍼즐을 맞추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만한 세월 위에 나는 서 있다. 퍼즐 조각 뒷면이 각기 다른 네 가지의 색깔로 칠해져 있었다. 마치 사람이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의 삶을 다른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 가족은 마흔의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한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고 십여 년의 세월을 원주로, 대구로, 청도로 전전하다가 다시 이 도시로 돌아왔다. 남편은 뒤늦게 자신의 길을 찾았지만 세상에 뿌리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사회의 토양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견고하고 배타적이었다. 실력이나 열정, 성실성, 정직함은 제쳐두고 배경을 보자고 하고, 유력자를 내놓으라고 했다. 자신 외에 내세울만한 그럴듯한 그림이 없는 남편으로서는 한 뼘 뿌리내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흔들리지 않는 나무로 서려면 얼마나 더 외풍에 시달려야 할지는 모르겠다. 
 

퍼즐은 인생에 다름 아니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그까짓 것, 어려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막상 달려들어 보면 만만한 것이 아니다. 우선 완성된 그림이 머릿속에 들어있어야 하고 비슷한 색깔들을 눈여겨봐야 한다. 예닐곱 개의 조각을 연달아 맞출 때도 있지만 거의 한나절이 다 가도록 한조각도 맞추지 못할 때도 있다. 그 때는 깨끗이 항복을 하고 물러나야 한다. 몇 시간 동안 쉬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다가가면 아까는 보이지 않던 그림이 의외로 쉽게 눈에 띄기도 한다. 퍼즐은 한 번에 한 개씩만 맞춰 넣을 수 있다. 아무리 빨리 하고 싶어도 여러 개를 한 번에 맞출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맞추고 싶은 부분을 고집스레 붙들고 있어서도 안 된다. 여의치 않으면 포기하고 다른 부분을 들여다볼 줄 아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직선 코스로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기를 원한다. 우리 부부의 삶도 다를 바 없었다. 다시 시작하느라 십 년이나 늦게 출발한 것을 만회하려고 얼마나 애를 써왔던가. 조바심을 치며, 곁눈질 하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내가 퍼즐을 맞추고자 마음을 먹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속도의 노예가 되어 욕망의 그릇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젊은 날의 시행착오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나름의 결심 때문이다. 그러려면 후반전의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때로, 세상의 모든 일을 잊고 멈춰 서서 신이 주는 메시지를 듣고 싶은 까닭이다. 나는 퍼즐을 들여다보고 있는 순간에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일종의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다.  


퍼즐을 반 넘어 맞추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빈 공간은 넓다. 나는 인생의 반환점을 이미 돌았지만 아직도 살아볼 만하다. 신이 나에게 맡겨준 일도 해야 하고, 하고 싶은 일들도 있다.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에는 하늘과 구름과 별과 달과 나무와 교회와 마을이 있다.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화가는 빈한한 삶을 살았지만 그림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역동적이고 무한하다. 나는 그림을 보며 그런 에너지가 나에게도 전이됨을 느낀다.
퍼즐의 남은 빈 공간은 내게 주어진 시간의 끝자락의 삶이고 바로 내가 살아야 할 미래의 시간이다. 남편이 자신의 자리에서 할 일을 다 마치고, 내 몸을 통해 세상에 온 나의 두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뿌리를 내리고 바람을 견뎌나갈 수 있는 든든한 나무로 설 때 쯤, 인적 드문 곳에 우리 부부가 몸을 누일 수 있는 작은 오두막과 과수원을 장만할 생각이다. 그러면 오두막 옆에 등나무를 심고 하얀 벤치를 마련하리라. 이것은 결혼을 하면서 남편이 나에게 한 약속이다. 내가 오랜 세월동안 놓치지 않고 간직해 왔던 밑그림이다.
햇빛이 눈이 부시게 빛나고 향기로운 바람이 옷깃에 스치는 등꽃의 계절이 오면 연한 보랏빛 등꽃이 만개한 등나무 아래에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남편은 늘 꿈꾸어왔던 과실나무를 돌보고 있는 황혼의 모습을 상상해 보곤 한다.  


우리 부부가 함께 맞춰야 하는, 남아있는 퍼즐 조각이다. 겸허하게 살아가야할 인생이다.  

 

      

      

    

*** 오랫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가끔 들어와 보고는 제 게으름을 탓하지 않고 꾸준히 찾아주시는 분께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글 하나 올립니다.
저로서는 조금은 의미가 있는 글입니다.
 

일 년 전쯤, 알라딘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직소퍼즐을 샀습니다.
이 수필을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쉬엄쉬엄 하느라 한 달은 걸려 맞췄을 겁니다.
수필은 완성되어 얼마 전 모 문학사 공모전에서 수필부분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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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10-21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그려지는 글이네요~ 중전님의 삶을 스케치하는 느낌.
와아~~~~ 수필 부문 최우수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gimssim 2011-10-21 23: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가며 글을 썼지요.
글을 많이 쓰시는 분이시니 금방 눈치채시는군요.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11-11-16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축하드립니다. 경사가 겹쳤네요. 수필부분 최우수상이라...ㅋㅋ

gimssim 2011-11-16 22:13   좋아요 0 | URL
뭐든 일이 될 때 좀 집중해서 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요.
욕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