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의미에서 엠마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시기인 수도원 시절의 분위기와 당시 엠마의 심리와 행동을 묘사하는 소설의 제1부 제6장은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엠마 특유의 ‘보바리즘‘
이 그 진정한 모습을 갖추어 가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세계관에 토대를 이루는 ‘보바리즘‘이야말로 ‘마담 보바리』를 숙명의 소설, 실패와 환멸의 소설로 만들어 놓는 요인인 것이다. 현실과 자아의 모습을 실제와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환상의 작용, 이것에 쥘고티에는 ‘보바리즘‘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에 따르면 보바리즘이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능력"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인물은 이상의 안경을 쓰고 현실을 바라봄으로써 현실의 모습을 변형시켜 버린다. 그는 일종의 상상력 비대증 환자다. 그병은 현실을 이상의 모습으로 왜곡함으로써 현실의 참모습을 볼 수없게 만든다. 상상에 의해 왜곡된 시선은 타자를 변형시키고, 결국은자기 자신까지도 변형된 모습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 병적인 ‘능력‘은 눈앞의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불만을 유발한다. 엠마에게 있어 불만의 대상이 되는 현실은 눈앞의 남편이며, 권태로운 시골이고, 그런 어리석음과 권태의 환경 속에 매몰된 자기 자신이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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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계기로서의 목로주점

목로주점은 <루공마카르 총서>의 일곱 번째 소설로 ‘나나』, 『제르미날」, 「인간 야수와 더불어 총서 중에서도 가장 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4대 역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의 성공을 통해 졸라는문단과 일반 대중으로부터 폭넓은 명성을 확보했고, ‘자연주의 유파를 대표하는 작가인 동시에 이론가로서의 지위를 굳힌다. 1877년4월 레스토랑 ‘트립‘에서 졸라가 당대의 젊은 작가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일과, 1880년 이 모임의 결과로 발표된 사화집 『메당의 저녁은 파리 문단에서 차지하는 그의 확고한 위치를 여실히 말해 준다.
발표하자마자 3만 5000부가 판매된 소설 목로주점의 성공은 장차 그의 모든 발표작과 관련된 출판사와의 계약에 유리한 입지를 확보해 주는 동시에 작가에게 상당한 수입을 안겨 주어, 1878년에는 드디어 파리 근교 ‘메당‘에 별장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 - P182

어느 비평가는 망원경과 현미경이 동시에 작동하는 듯한 이 소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시대의 역사인 동시에 한 의식의 역사다. 이와 같은 이중성과 그 양면의 결합이 바로 이 작품의 깊고도 경탄할만한 독창성을 이루고 있다.


한 시대와 그 시대의 인간들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프루스트는 다른 작가들과 공통된 면을 보이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작가의 눈은표면에만 머물지 않고 마치 ‘X레이 광선‘처럼 또는 내시경처럼 내면으로 깊숙이 침투해 미시적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이다.
프루스트는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인물과 모든 사태를 묘사하는 동시에 치밀하게 분석했다. 극도로 예민하고 지적인 의식이 한 시대를 바라보며 묘사하고 비평하고 분석하는 이 소설은, 그래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을 초월해 만인에게 공감을 자아내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 P248

많은 독자들은 자신만의 카뮈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카뮈는 『결혼』의 첫 페이지 첫 문단에서 다음과 같은 빛나는문장으로 매혹했던 위대한 산문가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 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카뮈는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시대의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부조리의 감정‘
을 간파해 내고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인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라는 비수 같은 - P317

문장으로 시지프 신화』를 시작했고, 반항하는 인간에서 관용과 상대적 감각과 인간의 한계를 상기시키면서 밤과 낮이 서로 대립하는 "긴장의 절정에 이를 때 곧은 화살이 더없이 단단하고 자유롭게 퉁겨져 날아가는 정오의 사상을 역설했던 인물이었다. 냉전이한창이던 그 시기에 좌파 지식인 진영에 발 딛고 서서 이데올로기적절대주의 사상, 즉 전체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모든 형태의 종교·재판을 고발하며 좌파 쪽이든 우파 쪽이든, 동이든 서든, 모든 곳에서 벌어지는 야만성을 소리 높여 거부하자면 예외적인 통찰과 논리의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 불굴의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카뮈는 또한 시대를 증언하고자 하는 기자였다는 사실을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재능이 넘치면서도 통찰력을 갖춘 그 정의의 사람‘의 붓은 프랑스가 지배하던 알제리 원주민 지역 카빌리의
비참과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소름 끼치는 공포를 고발했고, 동시에사형 제도의 폐지를 호소했다. 카뮈는 맹목적으로 역사에 봉사하기를 거부했고, 맹목적인 역사의 힘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자신의 조국인 알제리가 야만적인 전쟁의 무대가 되자, 먼저 양 진영의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같은 나라 안에서 두 민족이 동등한 자격으로 공존할 수 있는 ‘시민 휴전‘을 호소했다. 그러나 양 진영에서는 다 같이 그에게 돌을 던지며 그를 회색분자로 매도했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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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의 구상과 소설의 배경

「제르미날』의 배경이 된 1866~1867년을 전후로 프랑스의 탄광들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과 파업이 잇따라 발생했다. 1862년과 1864년에는 카르뱅Carvin과 비쿠아뉴Vicoigne에서 임금과 작업 시간 단축 문제로 파업이 발생했다. 1867년에는 레 부슈뒤론es Bouches-du-Rhine지방의 퓌보 Fuveau 탄전에서 300여 명의 광부들이 국제노동자협회 지부를 결성했다. 1869년에는 오Aubin 의 광부들이 대표단의 이름으로임금과 퇴직연금, 의료 체계와 관련된 요구 사항을 적은 편지를 졸라가 기고가로 활동하던 <라 트리퀸>에 보냈다. 1870년에는 크리조Creuzot 탄전의 광부들이 파업에 실패한 후 졸라의 소설을 예고하는듯한 어조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중 몇몇 충돌 과정에서는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 P381

1867년 6월 16일,  리카마리 La Ricamarie의 생테티엔 Saint Etienne 단전에서는 군인들이 파업중인 광부들에게 발포해 두 명의 여성을 포함한 열세 명의 사망자와 아홉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1869년 10월 7일, 아베롱Aveyron 지방의 오빵 탄광에서는 "제르미날의 제6부 5장서 펼쳐지는 광부들과 군인들의 대치 장면을 예고하는 듯한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 그 결과로 모두 열네 명의 사망자와 스무 명의 부상자가 생겨났다.
그 무렵,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도래에서 비롯된 사회적인 혼란과 때를 같이하여 새로운 경제적, 정치적 이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864년 5월에는 노동자들에게 파업과 동맹의 권리가 처음으로 부여되고, 9월 28일에는 영국 런던에서 최초의 국제적인 노동운동 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가 결성되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결성 선언문과 규약을 작성하는 등 국제노동자협회의 결성을 적극적으로 지도했다. 1867년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제1권이 출간되었으며, 1875년부터 프랑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는 1883 년 출간된 라블레예Laveleye의 저서 『현대 사회주의Le Socialisme contemporain』에서 언급된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흐름으로 나타났다. 졸라는 제르미날의 등장인물들인 에티엔, 라스뇌르, 수바린이 정치적 논쟁을 벌이면서 제시한 논거를 위해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1850년경부터 프랑스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좌파의 다양한 경향은 대체로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받은 사회주의사상과 프루동의 이론에서 비롯된 무정부주의적 사상으로 대표되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적 흐흠으로 요약할 수 있다. - P382

사회주의사상은 1881~1882년부터 두 개의 조직으로 뚜렷이 나뉘었다. 쥘 게드가 이끄는 ‘프랑스 노동당(PartiNouvrier français, 약칭 POF)‘은 집산주의를 내세워 강경하고 권위적인 태도(소설 속에서 에티엔에 의해 대변되는)를 취했으며, 브루스와 조프랭Joffrin이 이끄는 ‘프랑스사회주의노동자연맹(Fédération des travailleurs socialistes de France, FTSF)Brousse개혁은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진화론적 기능주의 정치 (라스뇌르의 주장의 근거가 되는 이론)를 구현하고자 했다.
한편 수바린에 의해 대변되는 무정부주의 운동은 19세기 말 수많은 테러를 야기했다. 1878년에는 이탈리아 왕, 1879년에는 스페인 왕에 대한 테러 시도가 있었고, 1881년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사망하기도 했다.
졸라는 특히 1871년에 발생한 피비린내 나는 파리코뮌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정치적‘인 색채를 띤 두번째 노동자(민중) 소설을 써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파리를 배경으로 구상되었던 두번째 민중 소설은 1880년경 탄전 지역에서 발생한 중대한 파업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다. 1878년 프랑스 북부 앙쟁Anzin에서 파업이 발생했고, 그에 관한 기사가 1878년 7월 23~28일자 <르볼테르>에 상세하게 실렸다. 1882년에는 몽소레민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감행했고, 의회에는 탄광법에 관한 법안들이 날로 쌓여갔다. 그리고 마침내 1883년, 프랑스 광부들의 청원서 Les Cahiers de doléancesdes mincurs français가 발표되었다.  - P383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며 졸라는 제2제정기(1852~1870)에 발생했던 피비린내 나는 파업들에 대한기억을 떠올리게 되었고, 1880년 모리스 탈메르Maurice Talmeyr의 『갱내 가스Le Grisou』를 비롯해 광부들의 세계에 관한 몇몇 소설의 출간에 주목하기도 했다.
졸라가 탄광에 관한 소설을 진지하게 구상한 것은 1883년 무렵부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졸라는 소설의 배경으로부르고뉴 지방에 있는 크뢰조 탄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다1883년 여름, 졸라는 휴가차 떠난 브르타뉴의 베노데Bénodet에서 우연히 발랑시엔의 사회주의자 하원의원 알프레드 지아르Alfred Giard를 만나게 된다. 그는 졸라에게 프랑스 북부 탄광에 관한 자료 수집차 자신의 집에 머물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후 1884년 2월앙쟁에서 또다시 파업이 발생했다. 1만 2천 명의 광부가 참여해 두 달씩이나 이어진 역사상 가장 길고 거대한 규모의 파업 중 하나였다.
알프레드 지아르는 졸라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그를 초대했고, 졸라는 며칠 후 발랑시엔을 방문했다. 졸라는 지아르의 집에 머물면서,
그의 비서로 자신을 소개해 탄광촌과 탄광회사 건물들과 갱들을 방문하고 조사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드냉 부근에 있는 르나르Renard 갱을 방문해, 극심한 폐소공포증에도 불구하고 675미터아래 땅속까지 내려가 갱도 내의 상황을 세밀하게 살펴보았고(졸라는이러한 체험을 "지옥으로의 하강"이라고 표현했다), 탄광촌을 방문해 그곳의 실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그 모든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나갔다. 이처럼 치밀한 현장 답사와 상세한 기록으로부터 제르미날』의 집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자 작가의 상상력의 원천이 된 <앙쟁에 관한 노트>가 탄생했던 것이다. - P384

‘제르미날‘은 말 그 자체로 역사적이고 혁명적인 울림을 담고 있다.
제르미날은 공화력의 일곱번째 달(3월 21(22) 일~4월 19(20) 일로서
‘싹트는germer 달‘을 의미하며, 굶주린 민중이 국민공회에 빵을 요구한 것도 혁명력 3년, 제르미날의 열두번째 날(1795년 4월 1일이었다. 배고픔과 반란을 상징하는 ‘제르미날‘은 소설 『제르미날』을 혁명의 위대한 신화가 되게 했다. 또한 ‘제르미날‘이라는 말은 그것이 포함한 암시적인 의미 외에도 단어 구성의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
‘Germinal‘이라는 단어에는 싹이 튼다는 의미의 ‘germer‘, 탄광을 뜻하는 ‘mine‘, 그리고 공화력을 의미하는 ‘al (almanach)‘이 포함되어있다.  -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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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마·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862~1944)추상화의 선구자였지만 오랫동안 오판되고 은폐됐던 여성 화가. 201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블록버스터 전시 <추상의 발명, 1910~1925>에도 아프 클린트는 포함되지 않았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돈 한푼 없이 오직 작품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독창적인 작품은 100년 만에 재평가되면서 미술계를 뒤흔들고 있다. 만약 루돌프 슈타이너가 아프 클린트 작품의 가치를 알아봤다면 어땠을까? 어쩌면 그녀는 ‘추상미술의어머니‘로 미술사에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 P17

마리드니즈 빌레르(Marie-Denise Villers, 1774~1821)
뛰어났으나 쉽게 잊혔던 위대한 여성 화가의 전형이 그림에 대해서는 "지금껏 여성이 그린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이 또한 여성 화가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담은 평가일 것이다. 빌레르는 1799년부터 1802년까지 파리 살롱전에 지속적으로 출품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그림은 1814년에 완성한 것이고, 1821년 47세로 사망할 때까지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생애 마지막 7년 동안 빌레르는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설령 그렸다 해도 쉽게 손실되었거나 다른 남성 화가의작품으로 오인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그림도 작가의 이름이 알려지기까지 194년이나 걸렸으니 말이다. - P25

카를 슈피츠베크(Carl Spitzweg, 1808~85)
위트 있는 풍자로 독재자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화가 슈피츠베크의 그림은 너무 인기가 많아 갖고 싶어하는 수집가들이 많았다. 공급은 한정되어 있는데 수요가 많다보니 위작이 많이 제작되었다. 1930년대 후반에만 54점의 그림이 독일에서 위조되었다. 토니라는 이름을 가진 복제화가가 그린 것으로 그는 ‘슈피츠베크 이후‘라고 서명했지만, 나중에 사기범들이 서명을 삭제한 뒤 인위적으로 그림을 숙성시켜 진본으로 판매했다. 이후 체포된 사기범일당들은 법원에서 사기죄로 최대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 P41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 1471~1528)이름 앞에 ‘최초‘라는 수식어가 가장 많이 붙는 화가 뒤러는 독일에서 발달한 인쇄술을 순수미술에 도입해 복제예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화가다. 이뿐만 아니라 최초의 자화상과 최초의 누드 자화상을 그린 화가였고, 장인이기보다는 지식인이길 원했던 최초의미술가이자, 미술에 이론적 접근을 시도한 최초의 화가였다. 이렇게 그는 미술사에 최초로이룬 것이 가장 많은 시대를 앞선 예술가이다. - P45

음악이 소리의 시인 것처럼, 그림도 시각의 시이다.
주제는 소리나 색의 조화와 아무 관련이 없다.


_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 P47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19세기 말 유럽에서 가장 유명세를 탄 미국인 화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던 그는 주제보다 선과 구도, 색채의 배열을 중요시했다. 작품 제목에도 ‘조화‘ ‘배열‘ ‘교향곡 ‘야상곡‘ ‘변주곡‘ 등 미술과 무관하며 오히려 음악과 관련된 이름을 붙였다.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삶을 누린 휘슬러는 생전에 작품을 많이 팔진 못했지만, 평생 아들을 물심양면으로 보살펴준 어머니 덕에 화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 휘슬러는 화가와 평론가 사이에 벌어진 가장 유명한 재판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877년 전시에 출품한 자신의 그림에 존 러스킨이 악평을 쏟아내자 그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오랜 논쟁 끝에 휘슬러가 승소했지만 그가 받은 손해배상액은 단돈 1파딩이었고, 막대한 변호사 비용으로 인해 파산했다. 화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전 재산을 걸었던 것이다. - P49

미카엘리나 바우티르(Michaelina Wautier, 1617~89)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했던 화가, 평생 30점 정도의 그림을 남겼고, 그중 넉 점은 판매까지 성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바우티르는 신화나 역사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능력, 화가로서의 자의식, 해부학적 지식, 뛰어난 표현력, 자신감과 용기를 가졌던 위대한 화가였고 더 일찍 재조명되었어야 했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전시와 연구를 통한 바우티르작품에 대한 재발견과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는 벨기에 여성 미술사학자 카틀레이너 데스티헬렌의 공이 크다. 오랫동안 반다이크의 그림으로 알려졌던 바쿠스의 승리를 1993년 바우티르의 그림으로 밝혀낸 이도 스티헬렌이었다. 스티헬렌은 2018년에 남동생 샤를 바우티르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그가 원하는 모든 이 Every-one His Fancy (c. 1655)도 미카엘리나 바우티르의 작품임을 밝혀냈다. - P53

알베르트 에델펠트(Albert Edelfelt, 1854~1905)
국제 미술계에 핀란드 화가의 존재감을 드러낸 첫 화가. 에델펠트는 아름다운 핀란드의 자연과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은 그림을 통해 핀란드 미술과 문화를 해외에 알리려고 평생 노력했다. 한여름 바닷가에서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핀란드인의 일상과 조국 독립의 소망까지 드러낸 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이 그려진 지 33년 후, 핀란드는 비로소 독립할 수 있었다. - P79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1887~1914)요절한 다작의 화가. 마케는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독일 표현주의의 기수로 인정받았다.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공부한 후 본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지금도 본에 가면 그가 살았던 집을 개조한 미술관인 ‘아우구스트 마케의 집August Macke Haus‘이 있다. 이곳에서 사는 3년 동안 마케는 무려 400점이 넘는 회화를 완성했다고 한다. 빈센트 반 고흐에 버금가는 다작이 아닐 수 없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그의 작품을 유럽 곳곳의 미술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14년은 벨 에포크의 마지막 해이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다. 마케는 이 그림--모자 가게 앞 양산 쓴 여인--을 끝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집 명령을 받고 입대했다가 한 달 만에 전선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겨우 27세였다. 전쟁은 전도유망한 젊은 화가의 생명을 잔인하게 앗아가버렸다. - P83

페리 커샷(Mary Cassatt, 1844~1926)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열린 총 여덟 번의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약 55명의 미술가가 참여했는데, 그중 여성 화가는 단 세 명이었다. 유일한 미국 여성이었던 커샛은 4회 전시부터 참여했다. 20대에 살롱전에 입상한 실력파였지만 멘토이자 동료 화가였던 드가의 초대로 인상주의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다른 여성 화가들처럼 모성애나 여성들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그림을 주로 그렸지만 50세에는 시카고의 여성빌딩 내에 가로 18미터가 넘는 대형 벽화를 의뢰받아 제작했다. 스스로 수확한 지식과 과학의 열매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여성들을 주제로 그린 거대한 벽화가 그녀의 페미니즘적 시각을 잘 대변한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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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이슬람 민족인 로힝야는 오래전부터 라카인주에 정착해 불교 중심의 미얀마 문명과 공존해왔다. 일부 로힝야 난민과 관련된 기사에 달리는 다음과 같은 댓글은 사실이 아니다. "로힝야족은 미얀마 사람이 아닌 방글라데시 출신의 무슬림 불법체류자다." 이는 미얀마 정부가 줄곧 주장하고 있는 내용일 뿐이다.
1885년부터 미얀마를 식민 지배했던 영국이 수탈한 비옥한 아라칸(현재의 라카인)의 농토를 경작할 목적으로 방글라데시 동부(치타공) 지역 주민의 이주를 장려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방글라데시와 미얀마 사이의 국경이 확정되기 이전으로 두 지역을 오가는 데 법적 제재가 없었다. 로힝야 사람들의 일부 조상이 방글라데시 이주민일 수는 있어도, ‘불법‘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또 영국 식민 지배 당시에는 이처럼 국외에서 미얀마 전역으로 이주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로힝야 사람들은 자신들만 문제 삼는 것을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 사람들을 ‘벵골인‘이라고 부른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미얀마 내 소수민족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로힝야는 1948년 미얀마 독립후 다른 민족과 평등한 권리를 인정받았던 과거도 있었다.
하지만 1962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네윈이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부정하면서 삶의 뿌리가 흔들렸다. - P75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쓴 1899년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 지배를 받는 식민지로 전락한 수단은, 1956년 독립했지만 북쪽 아랍계 무슬림과 남쪽 아프리카계 흑인 사이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독립 후 수단의 불안 요소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수단북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집트의 끊임없는 개입이다. 이 때문에 수단은 독립 후에도 이집트와 충돌하는 일이 많았다. - P93

둘째는 수단 내 이슬람 종파 간의 잦은 세력 다툼이다. 주로 수단 북부에 살고 있는 아랍계 무슬림 인구는 수단 인구의 75%를 차지했는데, 그들 사이에 싸움이 계속되었다. 셋째는 흑인계 주민들의 반정부 활동이다. 수단 남부 지역 3개 주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수단 인구의 25%를 차지하는데, 이들은 북수단의 아랍인들과 갈등을 겪었다.
보통 수단 내 갈등을 ‘북부 아랍계 무슬림‘과 ‘남부 아프리카흑인 기독교도‘의 구도로 단순화하여 설명하는데, 이는 사실과거리가 멀다. 더글러스 해밀턴 존슨 Douglas Hamilton Johnson은 《수단내전: 원인, 실상 그리고 평화 The root causes of sudan‘s civil war》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단 내전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복잡하다. 20년 넘게 내전이 지속되면서 남과 북 사이의 명확한 경계선은 사라졌고, 내전은 수단을 넘어 주변국으로까지 번진 지 오래다. 수단 내전은 무슬림이 무슬림을 상대로, 아프리카 사람이 아프리카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전쟁이다. 이렇게 수단 내전에는 여러 요인이 서로 맞물려 있다. 한때는 국제적인 원인과 동아리카의 정치 질서에서 내전의 원인을 찾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수단 내전이 더 오래 지속된다는 것은 내전의 근본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존슨은 남부 지역에 살았던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토속 신앙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북수단의 이슬람 개종 요구에 반발심을 가진 남수단 주민들 가운데 비교적 많은 수가 기독교로 넘어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남수단 아프리카계가 모두 기독교도인 것처럼 설명하면 안 된다. 오히려 종교를 내전에 이용한 측면을 봐야 한다. - P94


‘주니의 아버지 이름은 ‘로넬 나니 차크마‘다. 로넬의 고향은 김포에서 3700킬로미터 떨어진 방글라데시 치타공이다. 로넬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훨씬 이전부터 그들은 산악 지대인 치타공에 삶의 터전을 일궈왔다.
치타공에서 살아온 차크마, 마르마, 트리푸라, 텅창갸 등 11개소수 부족 75만 명을 통틀어서 ‘줌머‘라고 한다. 전체 인구가 1억6000만 명이 넘는 방글라데시에서는 소수에 불과하다. 줌머의 사전적 뜻은 ‘화전농을 하는 사람들이다. 치타공은 인도, 미얀마와 국경을 마주하는 방글라데시 남동쪽에 있다.
영국은 1947년까지 인도반도를 지배했지만 줌머가 사는 치타공까지는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의 주류인 벵골인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지만 줌머인은 대부분 불교를 믿으며 자신들의 전통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줌머인들의 치타공은 영국 식민 지배가 끝나고 파키스탄의 지배를 받으면서 조금씩 불안정해졌다.
파키스탄 정부는 1962년 치타공 중심에 있는 카르나풀리강에 캅타이댐을 지으면서 치타공의 가장 비옥한 경작지 40%를 수몰시켰다. - P132

이 과정에서 줌머인 10만 명이 고향에서 쫓겨나 강제 이주되었다. 줌머인은 강압 정책을 펼치는 파키스탄에 맞서 벵골인들과 함께 싸웠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의 결과로 1971년 12월16일, 방글라데시는 파키스탄을 영토에서 몰아내고 독립을 맞았다. 하지만 줌머와 함께 독립을 쟁취한 방글라데시는 줌머인들의 치타공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 P133

방글라데시 정부는 무슬림 벵골인들에게 치타공으로 이주할 것을 장려했다. 1978~1984년 치타공으로 이주하면 1가구당 6000평의 농토를 주고, 식량도 무료로 주었다. 이 기간에 무슬림 벵골인 40만 명이 이주했다. 1979~1997년에 무슬림 벵골인 이주민과 방글라데시 군대는 15회 이상의 대량 학살로 인종 청소를 시도했다. 이 기간에 민간인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줌머인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전세계를 떠도는 줌머 난민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 인도에 20만 명, 미얀마에 2만 명이 살고 프랑스와 일본 등지에 넓게 퍼져 있다. 미얀마의 로힝야난민 수십만 명을 수용하는 방글라데시가 한편으로는 줌머인을박해하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치타공 지역에는 방글라데시 무장군인 3만~4만 명이 배치되어 군사적 긴장감이 높다. - P134

‘난민은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통해 ‘난민은 무조건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다‘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난민 역시 ‘보통의 사람‘임을 강조하고 싶다. 한국 사회에 체류 중인 난민의 수가 늘어나면서 앞으로 한국에서도 난민 범죄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런 일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난민에 의한 강력 범죄가 발생해 ‘난민 혐오‘의 목소리가 커질 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에도 하나의 사건으로 전체 난민에게 ‘잠재적 범죄자‘라는 혐오의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된다. - P180

불평등하고 불안한 우리는 혐오의 말에 잘 휘둘린다. 혐오의말은 계속해서 세상을 가른다. 우리와 그들, 정상과 비정상으로,
난민과 국민을 갈랐던 문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가르고, 다음에는 성소수자, 그다음에는 이주 노동자, 모든 외국인,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들, 장애인, 여성…………. 문장으로 세계를 나누는 사람들은 저쪽이 아닌 이쪽에 자신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고 계속해서 나누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좁게 만들 뿐이다.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없다. - P181

예멘은 석유와 천연가스 등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잦은 분쟁으로 치안이 불안했고, 좀처럼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과는 1985년 공식 수교를 맺었다. 한국은 1990년대부터 예멘으로부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추진했다. 예멘은 1839년 남예멘이 영국 식민지가 된 뒤 남북으로 나뉘어 분단을 경험했지만, 1990년 5월 통일을 맞이했다.
예멘은 통일된 뒤에도 경제적 번영은 이루지 못했는데, 이는 국제정치의 영향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1991년부터 이라크와 쿠웨이트에서 전개된 ‘걸프 전쟁‘에서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의연합 요청을 거부하고 이라크의 편에 섰다가 곧바로 유엔의 경제 제재 조치를 받았다. - P188

 사우디아라비아는 100만 명에 가까운 예멘인을 추방했다. 해외 노동자의 송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예멘의 취약한 경제구조는 이러한 압박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실업률이 높아지고 심각한 경제난에 직면했다. 한국은 1998년 IMF외환위기 이후 예멘의 한국 대사관을 철수했다. 2001년에는 주한 예멘 대사관도 폐쇄되었다. 국가 간의 공식 교류는 단절되었지만 민간 단위의 교류가 남아 있는 상황이다.
예멘은 통일 이후에도 안팎으로 치안이 불안했다. 북예멘과 남예멘은 권력 배분과 통치 방식을 놓고 갈등했다. 1994년 5월,
통일 후 4년 만에 남예멘이 분리·독립을 선언하자, 북예멘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무력으로 통일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남예멘의 분리 운동은 이어져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예멘 남부 주민들은 중앙정부로부터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멘 북부에서는 2004년부터 후티 반군과 정부군의 교전이 지속되었다.
2010년 12월,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발생한 민주화 혁명, 이른바 ‘재스민 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예멘은 거대한 혼돈의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갔다. 예멘 국민은 대규모 시위로 33년동안 장기 집권한 알리 압둘라 살레Ali Abdullah Saleh 대통령을 축출했다.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Abdrabuh Mansur Hadi 부통령이 과도정부의 수반 역할을 맡았다. - P189

축출된 살레 대통령은 후티 반군과 연합해 재기를 꾀했다.
2014년 9월, 시아파 국가인 이란의 지원을 받는 살레---- 후티 반군이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수도 사나 점령에 성공했다(살레전대통령은 2017년 12월 4일, 이해관계가 엇갈린후티 반군에 피살당했다). 이로써 본격적으로 내전이 시작되었고,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후티 반군은 이듬해 정부가 제안한 헌법초안을 거부하고, 하디 대통령을 항구도시 아덴으로 내몰았다.
2015년 3월에는 수니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정부연합군이 이란 세력의 확대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군사 개입을시작하면서 확전 양상을 보였다.
이렇게 본격화된 예멘 내전은 3년 넘게 지속되면서 1만 명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유엔은 840만 명이 예멘 내전과 기근으로아사 위기에 놓였다고 발표했으며, 예멘을 ‘세계 최대 인도주의위기 국가‘로 규정했다. 전쟁을 피해 예멘을 떠나 전 세계를 떠도는 피란민은 수백만 명에 이른다.
2017년 여름에는 설상가상으로 역사상 최악의 콜레라가 발병했다.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는 예멘에서 100만 명이상이 콜레라에 걸렸고, 2000명 넘게 콜레라로 숨졌다고 보고했다. 이브 지역에서는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는 디프테리아까지유행하면서 수십 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후티 반군의 지배를 받았던 이브 지역의 에브라힘 집 바로 옆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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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그 어떤 언론도 카슈미르 주민의 죽음을 주목하지 않았다. 카슈미르에는 언론사가 있지만 자율적으로 보도할 수 없다.
‘어떤 보도도 하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카슈미르 관점에서 파키스탄과 인도는 모두 ‘침략자‘다. 그들에게 카슈미르는 서로의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놀이터‘다. 하지만 이 싸움은 단순히 인도와 파키스탄의 알력 다툼이 아니다. 양쪽 카슈미르에 사는 2000만 동포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전쟁이다.
카슈미르는 유엔이 인정한 독립 국가이지만 카슈미르 사람들은 카슈미르 땅에서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폭력이 없는 평화적인 저항도 용인되지 않았다. 지난 2년 동안 1000명 넘는 사람이 인도군이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쏜 고무탄에 맞아 시력을 잃었다. 그리고 300명이 넘는 ‘순교자‘가 나왔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카슈미르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바쳤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 카슈미르의 목소리는 미약하다. 인도와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다. 그들의 이익을위해 이용하려고만 한다. 선거철이 다가오는 인도에서는 카슈미르 지역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빌미로 표몰이를 한다. - P50

노웨어 맨, 아미르의 고향 발루치스탄은 19세기 말부터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영국 지배하의 발루치스탄은 1935년과1945년 대규모 지진을 겪은 뒤 1947년 영국령 인도제국이 해체되면서 자치권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1948년 3월 파키스탄이 강제로 들어와 불법 점령했다고 발루치스탄 사람들은 주장한다. 발루치스탄인들의 삶의 터전은 세 조각으로 찢겨 주변의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편입되었다.
발루치스탄은 파키스탄 4개 주 가운데 석유와 천연가스, 각종광물과 해양자원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지만 주민들은 이 자원의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마실 물조차 부족한 사람이 즐비하다.  - P54

파키스탄 정부가 모든 자원을 통제하고, 이에 항의하는 발루치스탄사람들을 탄압하기 때문이다.
발루치스탄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은 1948년부터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해 현재까지 70년이 넘도록 싸우고 있다.
이러한 저항에 파키스탄 정부는 강력한 무력으로 맞서고 있다.
발루치스탄에서 2011년부터 2016년 말까지 사법 절차를 거치지않고 죽임을 당한 뒤 버려진 주검이 1000구가 넘는다. 발루치스탄의 인권 단체 ‘실종 발루치인의 목소리VBMP‘는 직접 조사한 죽음만 1200건에 이르고 파악하지 못한 죽음까지 포함하면 훨씬많을 것으로 본다.
파키스탄 정부의 70년이 넘는 무력 탄압에 주민들의 독립 의지도 꺾인 탓인지 2012년에 발루치에서 한 여론조사를 보면 주민의 다수는 분리·독립을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직37%만이 발루치의 독립을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민의 대다수인 67%는 독립까지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발루치스탄 영토에서 더 많은 자치권을 누리기를 바란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비옥한 영토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차별받고 있으며, 경제적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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