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집을 짓지만 그건 대개 사회적 행위로 그곳에서 영역과 사회에 관련된 놀이를 한다. 나의 경우에는 혼자 있는 게 중요했다. 고독은 잎과 빛, 새소리, 꽃, 흐르는 물의 세계에 솔직하고 기쁘게 감응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을 기회로, 그리고 물질로 이야기한다. 아이들에게 이 물질들은 아직 신성하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정원을 재창조한다. 그러다 자라면서 분리가 시작된다. 산과 숲은 숭고하지만 계곡의 흙이 곡식을 더 잘 키워낸다.
완벽한 선물은 이제 하나의 집이 아니라 분리된 집(혹은 정신)이다. 어른이 되면 자신이 두 개의 반쪽으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다. 여가와 일. 그리고 이 둘을 고려하여 세상을 본다. 여가를 즐길 때는 찬란한 빛을 기억하고, 일할 때는 결실을 추구한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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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긴한 여행정보 Travel Tips

고분 트레킹 고령 여행의 첫번째 하이라이트는 고분 트레킹이다. "고분의 풍경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인가요?" 현지인에게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매일 풍경이 다르고, 시간대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날씨에 따라 색이 변하고, 사계절 모두 아름다워서 특정 시간과한 계절만 꼽기 너무 어렵다고.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계절마다 한 번씩 오란 이야기인가? 성질 급한 여행자들에게 이런 류의 애매한 답은 도리어 궁금증만 증폭시킨다. 고령에 다섯 번 방문했던 에디터의 경험을 풀자면 현지인들의 말이 결국은 맞다. 조용한 시간대의 호젓한 트레킹은 꽃놀이, 휴가철, 공휴일과 주말, 축제 기간,
장날을 피한 오전 시간이 좋다. 동틀때, 해질 녘, 하루에몇 번씩 거닐어도 매번 느낌이 다르다. 걷는 행위 자체보다는 일행들과 함께 고분 사이를 누비며 대가야의 문화와 역사에 집중하고 싶다면 매년 가을 열리는 ‘대가야 왕릉길 걷기대회‘나 4월에 열리는 ‘대가야체험축제 기간에 방문하면 된다. 20명 이상의 단체는 문화관광해설사의무료 해설도 신청할 수 있다. 4월에 열리는 ‘대가야체험축제‘는 명실상부 고령의 대표 축제로, 한 해 중 고령이 가장 붐비는 때다. 이 기간엔 야간 고분 트레킹을 실시하기도 한다. 월요일은 대부분의 박물관이 쉬는 날이고 장날은 4, 9일이 들어가는 날이다.

#유네스코세계유산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읍 지산동 일대에 분포해 있는 가야시대 최대의 고분군이다. 왕과 귀족 등 통치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군 트레킹은 고령 여행의 백미로 꼽힌다. 고령의 진산인 주산(主山) 남쪽 능선을 따라 704기의 크고 작은 봉분들이 포도송이처럼 모여 있는데, 이는 모두 대가야가 성장하기 시작한 서기 400년경부터 멸망한 562년 사이에 조성된 것이다. 신라와 달리 대가야의 고분들은 산 위에 있어 읍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반대로 읍내에서 보면 고분들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산의 구릉 전체를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이승과 저승이 하나로 연결된다고 믿은 대가야인의 내세사상을 가늠케 하는 부분이다. 현재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을 포함한 7개 가야고분군은유네스코세계유산 우선 등재 목록에 선정, 2022년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가야에는 두 가지 건국신화가 전해온다.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다들 조금쯤 기억하고 있을 이야기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로 시작하는 구지가를 부르며 왕의 강림을 기원하는 수로왕 건국설화 말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 개의 황금알에서 여섯 동자가 태어났는데, 맨 먼저 알을 깨고 나온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다섯 동자가 각각 다섯가야의 임금이 되었다는 이야기.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기록된 이 난생설화는 그러나 어디까지나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일 뿐, 대가야의 건국신화와는 배경도 인물도 다르다. 대가야만의 독자적인 건국신화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리책 ‘신증동국여지승람‘이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정전‘을 인용해 전하는 일명
‘정견모주설‘이 그것이다. 대략의 내용은 이렇다.

2,000여 년 전 가야산 깊은 골에 한 여신이 살았다.
아름다운 용모와 성스러운 기품을 지닌 산신(山神)정견모주(正見母主)였다. 가야 땅의 백성들이 우러러받드는 신이었던 정견모주는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밤낮없이 기도했다. 어느 봄날 그녀의 기도에 감복한 천신(天神) 이비가지(之)가 오색구름수레를 타고 가야산 중턱에 내려앉았다. 산신과 천신은 가야산에서 부부의 연을 맺고 옥동자 둘을낳았는데 첫째는 아버지 천신을 닮아 해와 같이 얼굴이 빛난다 하여 ‘뇌질주일(惱日)‘이라 하고, 둘째는 어머니 산신을 닮아 얼굴색이 하늘처럼 푸르다 하여
‘뇌질청예(靑)‘라 했다. 후에 형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이 되고, 아우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

그러니까 정견모주는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건국왕인 두아들의 어머니인 셈이다. 사자성어 같은 인명 탓에 귀에 착 감기지는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꽤 재미있는 이야기다. 인물의 우선순위가 금관가야의 임금 수로왕에서 대가야의 임금 뇌질주일로 바뀐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 또한 구지봉에서 가야산으로 옮겨갔다. 주몽이나 박혁거세처럼 알에서 태어난 신이 아닌 산신, 특히 여신이 설화의 중심에 선다는 점도 흥미롭다. ‘가야산신감생설(伽生)이라는 신화의 원래 제목이 말해주듯, 대가야의 건국신화에서 실제 이야기의 초점은 산신인 정견모주에게 맞춰져 있다. 하늘 신 이비가지는 정견모주가 감응하는 객체적 대상으로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가야산신 정견모주에 대한 고령 사람들의 숭배의식은 뿌리 깊다. 대가야의 국토를 지켜주는 신이자 국조를 낳은 신모이기 때문이다. 대가야의 무덤들이 모두 산 위에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본래 건국신화란 건국 초부터 형성되기보다는 소국(小國)으로 출발해 국가의 기틀을 닦는 단계에서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지배층은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신성함을 부각하고 정신적통합을 이룰 필요가 있다. 제각각 전기, 후기 가야연맹체의 맹주였던 금관가야와 대가야가 저마다의 고유한 건국신화를 정립한 이유다. 대가야의 정견모주설도 건국 초부터 완성된 것이라기보다는 5세기경 가야문화권의 맹주가 되는 과정에서 새롭게 전승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정견모주설을 통해 건국왕의 신성한 혈통을 부각하는 한편, 첫째 아들이 대가야를 건국했다고 선언함으로써 금관가야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맹주국이라는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장기리 암각화 | 이토록 확실한 시간여행

둥글고 각지고, 이런저런 형상의 그림이 바위 표면에 빼곡히 새겨져 있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어찌 보니 떡살 같고 또 어찌 보니 귀면와를 닮았다. 이 그림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빨려들 듯 궁금증이 솟구친다. 장기리 암각화를 한 것은 오래되었지만 눈으로 확인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무엇에 그리 쫓기며 살았는지 이제껏 놓치고 지내왔었다. 보물 605호로 지정된 이 귀중한 문화유산이 내 생활반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여간 뿌듯하지 않다.
고령에는 까마득한 옛적부터 사람이 살았던 모양이다. 암각화가 그런 추측을 가능하게 해주는 가장 뚜렷한 표식 아닌가. 이때부터 적게는 수십 호에서 많게는 수백호에 이르는 취락이 형성되어 삶을 영위했었던가 보다. 농사짓고 고기잡이하며 꾸려간 조상들의 생활의 자취를 이 장기리 바위그림에서 읽어낸다. 양전리(良田)라는 지명을 풀이해 보면 좋은 밭, 곧 ‘비옥한 땅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 이름만으로도 농경시대에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으레 그러하듯 강가의 논밭은 퇴적층의 사질양토여서 농사가 잘 되는 곳이다. 거기다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기에도 그만이었을 터이다. 암각화에 오래 눈길을 주고 있으려니 수천 년 전 이 땅에 머물다 떠난 우리 조상들의 일상이 선연히 그려진다. 그때도 사람살이의 근본 방식은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으리라. 농경사회였다면, 아침 일찍 일어나 밥 먹고 들어 나가 농사짓고 강에서 물고기를 잡다 저녁에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기본적인 의식주 생활이었을 게다. 문명이 발전되지 않았던 원시시대 사람들은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컸음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절대의 힘을 지닌 하늘과 땅에 의지하여 다산과 풍요를 빌고 싶었을 것이다. 그 소망을 담아 놓은 것이 바로 여기 바위그림 아닐까. 아득한 옛 시절의 우리 조상들과 지금 만나고 있다는 생각에 바위그림 앞에서 나는 잠시 숙연해진다.
이 귀중한 문화유산인 ‘양전리 암각화‘가 언제부터인가 ‘장기리 암각화‘로 이름이 달라졌다. 암각화가 자리해 있는 곳의 행정구역이 양전리에서 장기리(里)로 바뀌면서 자연히 명칭도 따라 바뀌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이름이 고쳐진 것에 대해 적이 못마땅한 마음이 든다. 이름이 가치를 만든다는 말이 있지않은가. ‘장기리 암각화로서는 원시시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는 그 자리적 의미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할 것 같다는 나대로의 판단에서이다. 하지만 돌려 생각도 해 본다. 이름이 뭐 그리 대수랴.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까마득한 옛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며 소통하는 장만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만 아닌가. 어찌 되었건 내 고장 고령 땅의 이 암각화가 수만년토록 고스란히 원형을 유지하면서 길이길이 보존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양전리 암각화, 아니 장기리 암각화를 마주하고 있는 동안, 타임머신을 타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오래 전 선사시대 땅을 밟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대가야왕릉전시관 | 종교의식으로서의 순장

주산의 남동쪽 끝자락에 고령의 자랑거리가 또 하나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순장 묘인 지산동 제44호분 내부를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놓은 대가야왕릉전시관이 그것이다. 궁륭 모양의 거대한 전시관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정교한 구도에 감탄사가 튀어나오면서 동시에 마음 한편이 숙연해진다. 무덤 속처럼 어두컴컴한 조명이 비치는 가운데 순장을 형상화한 인체 모형들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두 팔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잠자듯 반듯이 누워 있다. 가까이 다가가 흔들어 깨우기라도 하면 마치 산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것만 같다. 곁에는 이런저런 살림도구를 비롯한 다양한 껴묻거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한발 한발 조심스레 발을 떼며 찬찬히 둘러본다. 어디선가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오는 성싶다. 가만히 귀를 모은다. 무슨 내용인지 모를 음성이 간단없이 웅얼웅얼 거린다.
사람들은 늘 순장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겪었을 죽음의 공포를 이야기한다.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큼 클것인가? 서서히 숨이 끊어지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온몸으로 맞닥뜨렸을 그들의 최후에 전율이 인다. 하지만 거기에 종교라는 마법이 씌워지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종교만큼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드는 것이 있을까. 심지어 죽음 같은 극도의 두려움조차 종교적 신념 앞에서는 거칠 것이 없다. 혹독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위해 죽음의 길을 선택한 순교자처럼, 자기의지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찾아볼수 있으니 말이다. 왕릉에 순장된 사람들도 어쩌면 마찬가지였지 싶다. 지난날 임금은 종교의 교주처럼 맹목적으로 우러르는 대상이 아니었던가. 그런 절대적 존재를 향한 충성의 마음은 죽음에의 두려움을 뛰어 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들은 자신이 목숨처럼 받들어 모신 무덤 속 주인공에게 죽음으로써 마지막 존경의 염(念)을 다한다는 흔흔한 희열을 안고 조용히 사위어 갔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무덤 속 얼굴들을 찬찬히 살핀다. 그들의 표정에서 어떠한 고통도 두려움도 찾을 수가 없다. 그저 잠자듯 평온한 얼굴이다.
잔뜩 긴장되어 있던 내 마음도 스르르 풀어진다.

도암서원 | 장군의 마지막 안식처

광주대구고속도로 고령 나들목을 빠져나와 고곡삼거리를 지나면, 몇 걸음 가지않아 왼쪽으로 꺾어드는 지점에 ‘칠등‘이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일곱 개의 등줄기가 굽이굽이 펼쳐져 있어서 칠등이라고 했는지, 아니면 다른 뜻을 품고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는 모르겠다. 이 마을을 거쳐 골짜기 끝자락에 다다르면 날아갈 듯한 기와집 몇 채가 당당하게 서 있다. 여기가 송암(松菴) 김면 장군을 배향하고 있는 도암서원이다. 우리는 임란의병사를 논할 때 늘4대 의병장을 떠올린다. 영남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 호남의 건재(김천일, 태헌(軒) 고경명, 호서의 중봉(조헌 선생이 곧 그들이다. 임란 때 이들 4대 의병장 못지않은 혁혁한 활약을 펼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김면장군이다. 이 사실을 최근 도암서원에 와서야 알았다. 고령에서 태어나고 잔뼈가 굵은 내가 이제껏 그 사실조차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니 적이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도암서원은 본래 1666년(현종 7년) 지역의 유림들에 의해 고령의 읍내에 세워졌었다. 그러던 것을, 1789년(정조 13년) 서원 주변에 시장이 자리하고 있어서 번잡하고 또한 주변 풍광에 어울리지도 않아 장군의 선산이 있는 칠등 아래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 따라 고령장 가는 길에 이따금 그 앞을 지나다니곤 했었다. 그땐 너무 어렸던 탓에 거기가 그런 역사적인 의미가 서려 있는 곳인 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고풍스러운 기와집 몇 채가 장중하게 여겨졌을 뿐이었다. 나이 들어 뒤미처 깨닫고 보니,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순절한 장군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구나 싶어 새삼 옷깃 여미어진다. 서원 뒤편의 서당 앞마당에 자라고 있는 아름드리 배롱나무가 지나간 세월을 말없이 증언해 준다. 그 당당한 풍채는 뵌 적 없는 장군의 모습을 상상 속에 그려보게 만든다.
장군은 장수이기에 앞서 퇴계와 남명 두 선현의 문하에서 배움을 닦은 유학자였다. 그런 선비가 임란이 발발하자 "나라가 위급한데 신하 사람으로서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야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고 할수 있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분연히 의병을 일으킨다. 적을 물리침에 있어 백성 속에서 백성의 지지를 받아 백성을 위해 싸우니 그 후원과 격려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기율이 엄정하니 위험이 있었고 백성의 우러름을 받은 장수였다. 그런가 하면 관군과 관군. 관군과 의군, 의군과 의군과의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여 통합을 이루어낸 덕장이기도했다. 장군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금산, 개령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 "오로지 나라 있는 줄만 알았고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只知有國不知有身)‘라는충언을 남기고 순절하였다고 전한다. 장군의 불타는 애국충정을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이다.
서원 서쪽 편으로 야트막한 산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 장군이 고이 잠들어 계신다. 묘소 앞에 서서 머리를 숙이고 마음속으로 명복을 빈다. 고개를 들어 다시 서원 쪽을 바라본다. 저녁 해를 받은 서원이 장군의 당당한 풍채인양 환하게 빛나고 있다.

가야문화 연구에 있어 토기는 일반적인 유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남아있는 문헌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야는 삼국과 수백 년 공존했음에도 ‘잊혀진 왕국‘으로 표현될 만큼 역사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일제강점기 때는 임나일본부설 구축을 위한 일제의 도굴로 숱한 유물이 유출되기도 했다. 그러니 가야의 토기는 삼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가야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단서중 하나인 것이다.
고령에서 만들어져 다른 지역으로 확산된 토기는 대가야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늠하는 지표다. 고령 양식 토기를 흔히 ‘대가야식 토기‘라 지칭하는 이유다. 대가야식 토기는 4세기 때 그 모양이 완성되면서 고령만의 지역색을 띄기 시작했고, 5세기 초 지산동 고분군 축조와 함께 양식적인 완성을 이뤘다. 이 무렵 대가야는 서쪽 내륙, 즉 거창과 함양, 남원까지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대가야식 토기를 전파했다. 6세기 들어 대가야식 토기는 경남진주를 거쳐 고성 지역까지 확산됐다. 대가야식 토기가가야 지역 전체에 걸쳐 발견됐다는 사실은 대가야의 국력이 그만큼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가야가 신라에 무너진 6세기 중반쯤부터는 같은 자리에서 신라 양식 토기들이 등장한다. 토기가 고대 정치체들의 흥망성쇠를 말없이 증언하는 셈이다.
가야 토기는 역사적 중요성을 떠나 그저 우아하기도 하다. 조형적으로 아름답고 만듦새도 뛰어나다. 오리, 집,
말 짚신, 뿔, 등잔 등 삼국과 달리 특이한 형태의 상형토기가 많다는 점도 보는 재미를 돋운다. 고령을 비롯해 대가야가 차지했던 영토에서 발굴된 토기들은 개성이 꽤분명한 편이다. 긴목항아리, 굽다리접시,그릇받침 등으로 대표되는 대가야식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균형 잡힌 안정감이 특징이다. 대가야박물관의 정동락 학예사는 이른바 ‘사국시대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토기를 가장 잘 만든 시기라고 말한다. "통일신라시대로 넘어가면서 토기들이 힘을 잃기 시작해요 무덤 속에 토기나 금관
"같은 껴묻거리를 풍부하게 넣는 것이 사국시대의 유행이었다면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처님의 형상을 잘 만드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방식이 바뀌면서 토기의 비중 또한 전보다 낮아지게 된 거죠."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방식이 바뀌면서 토기의 비중 또한 전보다 낮아지게 된 거죠."
토기는 신석기시대 이후 웬만한 유적에서 골고루 출토되는 흔한 유물이다. 그래서인지 주민들과 대화하다 보면 토기에 대한 괴담을 심심찮게 접하곤 한다. ‘고령 사람이라면 누구나 집에 온전한 토기를 한두 점씩 갖고 있다‘
는 소문도 그 중 하나다. 알아보니 영 허튼 소문은 아니다. 학예사의 말에 따르면 과거에는 정말로 동네 뒷산에서 온전한 토기를 쉽게 주물 수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이전만 해도 토기를 귀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아니었기때문이다. 다만 그 시기에는 ‘무덤가에서 주운 유물 귀신 붙은 물건‘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터라 토기를 제대로보관하는 사람 또한 드물었다. 그러다가 1980년 이후 토기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박물관에 기증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 학예사의 설명이다. 우리보다 먼저 골동품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던 일본인들이 무덤을 도굴해국보급의 귀한 토기들을 무더기로 가져갔던 것이다.
고령에서 가야금 못지않게 중시 여기는 것이 있다면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국보 제138호 가야금관이다. 고대의 관은 지배자의 상징이므로 역사학자들은 관을 통해 절대왕권의 형성 과정과 집권국가로의 이행 여부를 파악하기도 한다.
대가야는 가야 여러 나라 중 유일하게 금관과 금동관이 여러 개 출토된 곳이다. 앞서 말한 국보 제138호 금관과더불어 눈여겨봐야 할 것은 지산동 32호분에서 출토된금동관이다. 2019년 2월 보물로 지정된 이 금동관은 우리에게 익숙한 출자형(字形)의 신라관과 달리 꽃이나 풀을 묘사한 이른바 초화형(形)의 세움장식이 특징이다. 형태와 장식이 단순하고 우직해서 미니멀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요즘 미감에도 잘 맞는다. 현재까지 알려진대가야의 관은 지산동 30호분과 32호분 등에서 나온 금동관과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는 금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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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기에 그 당연함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굉장히 불편해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어떤 사람들은 불편하게 만드는 그 존재들을 아에 지워버린다. 가령 학교에서의 나와 같은 존재… 그리고어쩌면, 엄마와 아빠와 같은
"그때 그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어릴 적 외할머니가 재조 일본인이라 한국에서는 친일파라고, 또 일본인들에게는 현지처 자식이라고 더러운 피라고 욕을 먹었는데 이제는 광주 사람이라고 빨갱이라고 욕을 먹는다고요."
더러운 피・・・・・・ 이 말에 난 무언가 한 대 맞은 기분이 되어경아 씨를 조금은 빤히 바라보았다. 경아 씨가 한숨처럼 낮게 말을 이어갔다.
"사실 이렇게 결연하게 말했지만, 솔직히는 논문 쓰고 잊었어요. 그런데요, 하루는 여기 넘어와서 혐한 시위대를 마주친 거죠.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며 길 한쪽에 서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저를 똑바로 보고 말하더라고요. ‘한국인, 더러운 피.‘ 그때 생전 나를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나를 증오하고 혐오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 P95

"사람은 잊고자 하는 일에 보복을 당하기 마련이다. 제가 공부를 시작할 때 영향을 많이 받은 오키나와 연구자가 한말이에요. 전쟁의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일본 제국을 향해 한말이었죠. 음...... 영소 씨, 어떤 사람들은요. 죽어도 꼭, 살아 있는 것 같잖아요? 또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았어도 늘 과거에 사는 거 같기도 하고 말예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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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이렇게 홀로 남겨지자 공허의 비애가 다시 그녀를 엄습해 왔다. 이건 분명 적막이 아니라 공허의 비애였다. 마치 어린아이가 원하던 물건을 얻고 난 뒤에 "아, 겨우 이런 거였나" 하는 걸 깨달으며 다시 곧 무료함을 느끼는 것과 같았다. 인간이란 이렇게 이상한 동물이다. ‘희망‘은 시시각각 인간을 자극해서 앞으로 나아가도록 부추기지만 그 ‘희망‘이 ‘현실‘로 바뀌고 현실이 다시 과거가 되면 그것 역시 너무나 평범하고 진부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특히 행복한 기대는 끝까지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결국은 고작 예상했던 대로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P65

더욱 유감스러운 건, 이건 징이 각별히 유감으로 생각하는 점이었는데, 여기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자신들이 혁명적인 행위나 혁명적인 인생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것을 보급하려고 하고, 그 때문에 징도 그 파장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징이 일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한 남자 동료가 징에게 우산을 빌렸는데, 다음 날 그는 돌려줄 생각은커녕 도리어다시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었다고 해서 결국 징은 우산을 다시 하나 살 수 밖에 없었다. - P96

 한번은 또 어떤 여자 동료가 정의 망토를너무 예쁜 망토네. 나한테 좀 잘 안 어울려서 그렇지만 하더니 결국은 그 망토를 몸에 걸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버리더니 그 후 사오 일이 지나서 징이 돌려받았을 때는 이미 어개선이 다 터져 있었다. 이들은 자기 물건도 종종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면 다시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져다 쓰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고상하고 세심한 장은 도무지 이런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연애 소동은 특히 그들이 공무 외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남자 동료와 여 직원이 서로 치근대거나 서로 희롱하며 입을 맞추려고 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종종 눈에 띄었다. 독신의 여자가 만약 누구와도 연애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거의 반혁명에 해당하거나 적어도 봉건잔당으로 매도되었다. 이들은 자오를 통해 징이 아직까지 애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징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고 그중 하나는 징에게 심하게 치근덕거리기도 했는데 이런 일은 징을너무나 불쾌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징은 지금 하는 일에 대해서도 차츰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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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죄는 마음가짐에서 시작된다고 인식했듯이 우리 프로파일러들은 폭력적인 성범죄가 환상(fantasy)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다음 문제는 환상이 용인되는 행동의 정상적인 경계 너머까지 자신을 이끌어가도록 놔두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범죄자들의 동기를 살펴보아야 했다.
많은 사람은 강간이 성적 동기로 인한 행동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강간범은 실제로 "성적으로 흥분"했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 따위의 이유도 거짓이다. 다만 그런 이유를 핑계 삼을 수는 있다. 강간범은 성행위를 공격 수단으로 사용한다. 성폭력은 힘을 과시하거나 분노를 표현하는 수단이며, 두 가지가 혼합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성폭력은 본래 성적 욕구가 아닌 다른 욕구를 충족시킨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학생들에게 내가 기억하는 가장 나이 많은 강간 피해자는 93세였으며 가장 어린 피해자는 2세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P33

그러고 나서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성적 욕구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면 단 한사람도 손을 들지 않는다.
두 피해자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 연약하고 무력하며 공격자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강간범은 성적 욕망 분출이 아니라 지배하고 제어하며 힘을 행사하는 짜릿함에서 만족을 얻는다.
환상은 원하는 사건의 정신적 예행연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신적 예행연습은 성범죄 실현에 중심 역할을 한다. 범죄자는 환상을 일종의 편집 도구로 이용해서 자신에게 성적 흥분을 가져다주는 특정한 부분에 범죄의 초점을 맞춘다. 자신의 욕구에 맞추어서 범죄 요소를 재구성하고 적절한 곳에 배치하는 것이다. 또한 환상은 예행연습의 무대 역할을 하여 범죄자가 직접적인 위험 없이 범죄를 연습할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환상은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를 때 따르는 기초, 혹은 지도역할을 한다.
의식적 범죄자의 환상이 전개되는 과정은 연극이나 영화 제작 과정과 비슷하다. 범죄자는 중심인물인 극작가이자 감독에 해당한다. 범죄자는 환상을 통해서 행동을 정하고 배경을 선택하며 소품을 고른다. 물론 범죄자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만(그 밖에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함께 출연할 주인공인 피해자도 필요하다. 이제 피해자의 기준을 정하고 나면 그 역할을 맡을 만한 사람을 찾기만 하면 된다. 연극이 시작될 준비가 다 되었다는 것은 범죄가 일어날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 P34

가학적 변태성욕자들은 거의 모두 사이코패스인데, 앤더슨의 정신이상 징후를 살펴보면 그가 나르시시스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르시시즘은 자기애성 인격 장애라고 하며, 자기중심성과 타인에 대한 공감 부족이 특징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웅대한 환상을 품는다. 나르시시스트가 제일 좋아하는 주제는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자신과 다른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싶어 자기 업적을 자주 과장한다. 이 설명들은 확실히 앤더슨에게 잘 들어맞았다. 이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우스다코타 범죄수사부 요원 프레드 드배니는 나중에 나에게 앤더슨이 유죄 확정 후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비교했다고 알려주었다.
앤더슨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으며, 이 사건에서 그의 유죄를 강하게 시사할 만큼 구체적이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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