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약을 뿌리고 비누를 가져다주었지. 하지만 당신 생각에 그들이 우리를 아껴서 그랬을 것 같소? 그럴 가능성은 없소. 우리가 병들어 죽으면 너무 끔찍할 테니 우리가 살아 있는 쪽을 선호한 것뿐이오. 만약 우리가 점점 말라가다가 종잇장처럼 변해 재가 되어 떠내려간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을 거요. 그들은 그저 자기들 마음이 불편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뿐이오. 그래야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으니까."
"난 모르겠어요."K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서 그렇소." 로버트가 말했다. "그들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시오. 그러면 알게 될 거요."
K는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갓난애요." 로버트가 말했다. "평생 잠을 자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지 이제 깨어날 때가 되었소. 왜 그들이 당신이나 아이들에게 자선을 베푼다고 생각하시오? 당신이 그들에게 위협적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주위에 있는 진실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이틀 후, 그날 밤 밤새도록 울었던 아이가 죽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수용소 안이나 가까운 곳에 무덤을 팔 수 없다는 상부의 철통같은 지시가 있었기에, 아이는 시립 공동묘지 뒤편에 묻혔다. 열여덟 살먹은 아이 엄마는 아이를 묻고 와서 식음을 전폐했다. 그녀는 울지 않고 자기 천막 옆에 앉아 프린스 앨버트 쪽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몸에 손을 대면 밀쳐냈다. 마이클 K는 그녀가 자신을 볼 수 없는 울타리 부근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몇 시간을 보냈다.  - P123

나는 지금 교육을 받는 걸까? 그는 궁금했다. 드디어 수용소 안의 삶에 대해 배우는 걸까? 삶의 장면 장면이 그의 앞에 펼쳐졌고, 모든 장면이 서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일지 아직 알 수는 없었지만, 모든 게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거나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하룻밤과 하루해를 천막 옆에 앉아 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여전히 울지도 않고 먹을 것도 입에 대려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K가 아침마다 가장 먼저 하는 생각은 ‘오늘은 그녀를 볼 수있을까?"였다. 그녀는 키가 작고 뚱뚱했다. 아무도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산에 있다는 소문만 들렸다. K는 자신이 마침내 사랑에 빠진 건 아닌지 궁금했다. 사흘이 지나자 여자는 다시 밖으로 나와 자기 삶으로 되돌아갔다. K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그녀가 그들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결코 말을걸지 않았다.
12월 어느 날 밤, 수용소 사람들은 함성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프린스 앨버트 방향 지평선 위에서 컴컴한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하고 아름다운 오렌지색 불꽃이 타오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놀라움에 숨이 멎고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경찰서가 틀림없어!" 누군가 외쳤다. 그들은 불길이 분수처럼 너울거리며 타는 모습을 한 시간가량 지켜보았다. 몇 킬로미터에 걸친 텅 빈 펠트를 가로질러 사람들이 고함치고, 비명을 지르고, 요란하게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러다 차츰차츰 불빛이 더 붉어지고 무뎌지면서 강렬함을 잃더니 연기에 섞인 불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몇몇 아이들은 부모 품에서 잠이 들거나 눈을 비볐다. 이제 침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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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남은 오후 동안, 덩굴식물과 풀을 베어 치우는 일을 했다. 그는 이따금 먼 곳을 쳐다보며, 내가 위층에서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체했다. 나는 다섯시에 그에게 돈을 줬다. "당신이 정원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요." 나는 말했다. "나도 당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시키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계속 자선에 의존해 살아갈수는 없잖아요."
그는 지폐를 받아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고, 나를 쳐다보지 않아도 되도록 눈길을 한쪽으로 돌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왜 그렇죠?"
"당신은 그런 걸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으며 말했다. "자격이라 ・・・・・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군데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나는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그에게지갑을 쑥 내밀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믿는 건 뭔데요? 가져가는 것인가요? 원하는 만큼 가져가고 싶어요? 자, 그럼, 가져가요!"
그는 침착하게 지갑을 받아, 거기에 든 30 랜드와 동전 몇 개를 꺼내고, 내게 지갑을 돌려줬다. 그리고 가버렸다. 개가 촐랑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삼십 분 후에 돌아왔다. 술병이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에서 그는 매트리스를 구해왔다. 사람들이 해변에 갈 때 가져가는 접이식 매트리스였다. - P31

그들은 처음에 시작할 때는 자기들 목숨을 하찮게 여기겠지만, 결국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목숨마저 하찮게 여기게 될 거야. 자네가 그들에게서 감탄스러워하는 점이 꼭 최선은 아니라고.
자네가 지난번에 더이상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고 했던 말에대해 계속 생각해보고 있어. 진심으로 한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어. 아이들은 어머니나 아버지 없이 클 수 없어. 지금 우리 귀에 들리는 방화와 살인, 충격적인 비정함, 심지어 퍼케일 씨에 대한 폭행, 이러한 일들은 결국 누구의 잘못이지? 가서,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너는 이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 나는 너에 대한 권위를 포기하겠다. 이렇게 말하는 부모에게 분명히 책임이 있는 거야. 어떤 아이가 진심으로 그런 애기를 듣고 싶어하겠어? 그런 말을 들으면 아이는 혼란에 빠져 돌아서서 이렇게 생각할 거야. ‘이제 나에게는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그러니 죽음을 어머니로 삼자. 죽음을 아버지로 삼자.‘ 자네가 그 아이들에게서 손을 씻으면 그애들은 죽음의 자식들이 될 거야."
플로렌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플로렌스, 자네가 나한테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들이 플래츠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작년에 얘기했던 걸 기억하지? ‘불에 타 죽는 여자를 본 적이 있어요. 그 여자가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자, 아이들이 웃으며 여자의 몸에 기름을 더 부었어요. 살아생전 그런 일을 보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이렇게 얘기했었어."
"맞아요, 그렇게 말했었지요. 그리고 그건 사실이고요. 하지만 그 아이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만든 게 누구죠? - P64

 그애들을 그렇게 잔인하게 만든 건 백인이에요! 그래요!" 그녀는 깊고 격하게 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부엌에 있었다. 그녀는 다리미질을 하고 있었다. 다리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가볍게, 그녀의 손에내 손을 댔다. 그녀가 다리미를 들어올렸다. 시트에는 갈색으로 눌은 자국이 희미하게 나 있었다.
자비 없음, 나는 생각했다. 자비도 없고 한계도 없는 전쟁. 안 보는게 상책인 전쟁.
"그들이 언젠가 성인이 되면," 나는 부드럽게 말했다. "자네 생각엔 그들에게서 잔인함이 없어질 것 같아? 부모의 시대는 끝나버렸다고 배운 아이들은 나중에 어떤 부모가 될까? 부모라는 개념이 우리 안에서 파괴되고 나면, 부모라는 것을 되살릴 수 있을까? 그들은 술을 마신다는 이유로 사람을 발로 차고 때려 사람들의 몸에 불을 지르고 그들이타 죽어가는 동안 웃고, 그들이 부모가 되면 자식들을 어떻게 다루겠어? 그들이 어떤 사랑을 할 수 있겠어? 그들의 심장이 우리의 눈앞에서돌로 변해가고 있어. 그런데 자네는 뭐라고 말하지? ‘이건 내 자식이아니다. 백인의 자식이다. 이건 백인이 만든 괴물이다. 이렇게 말하지.
그게 자네가 말할 수 있는 전부야? 자네는 그들을 백인 탓으로만 돌리고 등을 돌릴 셈이야?"
"아니죠" 플로렌스가 말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저는 제 자식들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아요." 그녀는 시트의 모서리를 정확히 맞추며 가로세로 십자로 접고, 다시 가로세로 십자로 접었다. "이애들은 좋은애들이에요. 이애들은 철 같아요, 우리는 이애들이 자랑스러워요."  - P65

철로 된 아이들, 나는 생각했다. 플로렌스 자신도 철과 다르지 않다.
철의 시대. 그다음에 오는 청동의 시대. 그러한 순환주기에서, 점토의시대, 흙의 시대 같은 더 부드러운 시대가 돌아올 때까지 얼마나 오래,
얼마나 오래 걸릴까? 국가를 위해 싸울 아들들을 낳는, 심장이 철로 된 스파르타 부인 ‘우리는 애들이 자랑스러워요. 우리. 살아서 방패를들고 집에 와라, 아니면 죽어서 방패에 실려 집에 와라.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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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놀라지 않는다. 암시하거나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그리고 그런 식으로 질문을 함으로써 특정한 답변을 유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에 맞는 한 법을 이용할것이다. 그런 다음 다른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게 제3국이 운영되는 방식이다. 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법적 절차라는건 그저 많은 수단들 중 하나일 뿐이다.
- P139


내가 말한다. "당신이 오기 전에는 국경 문제 같은 건 전혀 없었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당신은 실상을 제대로 모르고 있을 뿐이오 당신은 과거 속에 살고 있소 당신은 우리가 몇 안 되는 평화로운 유목민 집단들을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조직이 잘돼 있는 적들을 상대하고 있는 거요. 만약 당신이 원정대와 함께 작전을 나갔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을 거요."
"당신이 데리고 온 한심한 저 포로들 말이로군. 그들이 내가 두려워해야 하는 적이란 말인가? 그게 당신이 하려는 말인가? 대령, 적은 바로 당신이야!" 나는 더이상 자신을 억제할 수 없다.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 친다. "당신이 적이란 말이야! 당신이 전쟁을 했고, 당신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순교자들을 만들어줬소. 그것도 지금 시작된 게 아니고 당신이 더럽고 야만스러운 짓을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던 일 년전부터 이미 시작된 거요! 역사가 내 말을 증명해줄 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역사는 없을 거요. 이건 너무 사소한 일이거든." - P188

 나는 지금도 수치심에 몸이 오그라들지만, 내가 머리를 그녀의 다리에 대고 부러진 발목에 입을 맞추고 애무할 때, 그녀에게 내 흔적을 깊숙이 새기지 못하는 것을 진짜 속마음으로는 아쉬워하지는 않았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부족 사람들이 그녀에게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해도, 그녀는 정상적인 방식으로 구애를 받지 못하고 결혼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방인의 소유물이었다는 낙인이 평생 찍힐 것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애처로운 감각적 동정심에서 그녀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녀는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나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녀가 그렇게도 자주 잠 속으로 빠져들었던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내 침대에서보다 채소의 껍질을 벗기면서 더 행복해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내가 막사 정문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을 조여오는 허위의 독기를 느낀 게 틀림없다. 욕망으로 가장한 질투심과 동정심과 잔인성의 허위 말이다. 충동이 아니라 충동을 애써 거부하는 성행위에서도 허위를 느꼈을 것이다! 그녀의 냉정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는 처음부터 내가 허위적인 유혹자라는 걸 알았다.  - P222


만약 내가 그녀를 이해했다면, 만약 내가 그녀를 믿었다면, 만약 내가그녀를 믿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면, 나는 혼란스럽고도 쓸데없는 속죄의 몸짓을 하면서 일 년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냉혹하고 엄격한 대령과 정반대인 관대하고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편안한 시절에 제국이 스스로에게 얘기하는 거짓말이고, 대령은 거친 바람이 불며 세상이 험악해질 때 제국이 얘기하는 진실이다. 제국의 통치술의 양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우물쭈물하면서 이름 없는 이 지역을 관망만 하고 있었다. 먼지 많은 여름,
짐마차에 실을 정도로 많은 살구, 긴 낮잠 시간, 게으르기 짝이 없는 수비대, 해마다 호수의 잔잔한 표면에 내려앉았다가 다시 날아가는 물새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참자 곧 저 사람은 떠날 것이다. 조만간 다시 조용해질 것이다. 낮잠 시간도 더 길어질 것이고, 우리의 칼날에도 녹이 더 슬것이다. 그리고 야간순찰자는 탑에서 살그머니 내려와 아내와 같이 밤을 보낼 것이고, 회반죽은 떨어져내리고 도마뱀은 벽돌 사이에 둥지를 틀게 될 것이며, 부엉이들은 종루에서 날아오를 것이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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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는 야만인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예전에는 겨울이 되면유목민들이 집단으로 찾아와 담벼락 바깥에 천막을 치고 양모, 동물 가죽, 펠트, 가죽제품 등을 면직물, 차, 설탕, 콩, 밀가루 등과 맞바꾸곤 했다. 우리는 그들의 가죽제품, 특히 그들이 만든 질긴 구두를 귀하게 여겼다. 나는 과거에는 그 거래를 장려했지만 돈으로 값을 치르는 일은 금지시켰다. 또한 그들이 술집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려 했다. 독한 술의 노예가 된 거지들과 부랑자들이 도시 주변에 기생충처럼 정착하는걸 나는 무엇보다도 원치 않는다. 예전에 이들이 상점 주인의 속임수에넘어가 자신들의 물건을 시시한 장신구와 교환하거나 술에 취해 도랑에 드러눕고, 결국 그들이 게으르고 부도덕하며 더럽고 어리석다는 주민들의 편견을 굳히는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다.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서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지금은 야만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하지만 올해에는 변경의 모든 지역에 장막이 쳐져 있다. 우리는 성벽에서 황무지를 노려본다. 우리보다 더 날카로운 눈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교역은 끝났다.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회생이 따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는 지침이 수도에서 내려온 이래로 우리는 기습과 경계의 시대로 되돌아가 있다. 칼날을 세우고 경계하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 P66

유감스럽게도 그의 말 때문에 나의 회상은 끊기고 만다. 나는 말다툼을 하며 이 자리를 끝내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응수한다. "그건 소문일 뿐이오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요.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유목민이 그들은 매년 저지대와 고지대를 오가며 살고, 그게 그들이 사는 방식이죠. 그들은 결코 산악지방에만 갇혀 있지는 않을거요.
그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오늘밤 처음으로 나는 장벽이 내려오는 걸 느낀다. 군인과 일반인 사이의 장벽. "솔직히 말씀드리면 바로그게 전쟁입니다. 우리가 강요하지 않으면 선택을 내리지 않을 사람들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거죠." 그는 사관학교를 나온 젊은이답게 오만하고 솔직한 눈초리로 나를 살핀다. 나는 그가 지금쯤 멀리 퍼졌을 나에 관한 소문을 들었으리라 확신한다. 내가 제3국 소속의 경찰에게 비협조적이었다는 얘기 말이다.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것 같다.
그는 나를 수년 동안 이렇게 침체된 곳에서 게으른 토착민들의 방식에맞춰 살다보니 구태의연한 생각에 젖어 있고, 제국의 안보를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평화와 맞바꾸려는 위태로운 생각에 빠진 하찮은 민간인관리쯤으로 여기는 것 같다.
- P85

그녀는 아무런 불평 없이 새로운 생활 방식에 적응한다. 나는 그녀가 야만인의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순종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야만인의 교육에 대해서 아는 게 뭐지? 내가 순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관심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거지에 아버지도 없는 그녀에게, 거처할 곳이 있고 배를 채울 음식만 있다면 내가 혼자 자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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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년에 칭기즈칸이 사망하고 2년 뒤, 몽골 쿠릴타이 족장 회의에서는 그의 아들인 오고타이를 후임으로 선출했다. 그렇지만 지성이 뛰어난 오고타이는 말 위에서의 거친 삶보다 안락한 궁실생활을 선호했다. 게다가 그는 자주 술에 빠져 있었다. 오고타이는 몽골 외교 정책에 대해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고문들 사이에서는 칸의 지지를 얻기 위한 다툼이 벌어졌다. 지금의 제국 규모로 만족하는 사람들과 수부타이를 주축으로 아직 이루어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편이 나뉘었다. - P100

 머지않아 금은 고기를 얻기 위해 죄수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끔찍한 전염병이 창궐했다. 속도와 기동성이 좋은 몽골군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편이어서 기동성이 떨어지는 군사들만큼 질병에 자주 걸리지는 않았다. 노병 수부타이는 도시 근처에 머무를 경우전염병으로 자신의 군대가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에 금과협상을 벌여 포위 해제를 제안했다. 수부타이는 자신의 제안이 속임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도시 밖으로 군대를 철수하는 대신몇 명의 대신은 남겨두고 가겠다고 했다. 금나라는 포위가 풀린다는생각에 제안을 수락했고 수부타이는 오염된 곳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전염병의 습격을 받은 금나라 수비대는 무력해졌지만 수부타이의군사들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던 중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송나라가 1개 사단을 보내 수부타이 군대에 합류했다. 한 달 안에 수부타이는 도시 공격 재개를 지시했다. 이번에는 성벽을 깨뜨리고 들어가 엄청난 학살을 시작했다. 도시가 무너지며 금의 힘을 상징하는 마지막 자취가 사라지자, 절망에 빠진 금나라 황제는 자살하고 말았다.
영원한 몽골의 노병 수부타이는 도시를 자신의 군사들에게 넘겨주어 약탈과 살육을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두려 했다. 그것이 몽골의 관습이었는데 도시의 저항이 수부타이를 몹시 화나게 했다. 게다가 금나라 도시들과 평원에 일궈놓은 밭에서는 도무지 쓸모를 찾을 수가 없었다. 수부타이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평원에서 건강한 말을 키우는 것이 낫다고 조언했다. 말을 타고 떠돌며 싸우는 몽골족의 삶에 농장과 도시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오고타이칸은 도시가 유지되고 기능공들이 일을 계속하며 농부들이 논밭을 계속 일군다면 세금이라는 형태로 약탈할 것이 더 많아진다고 지적한 중국인 조언자의 지혜를 신뢰했다. - P110

그리하여 오고타이칸은 금의 수도를 남겨두고 끔찍한 운명에 처한 금나라 사람들을 살려두는 것으로수부타이의 조언을 일축했다. 평화유지를 위해 몽골군 파견대를 남겨둔 채 수부타이는 오고타이칸이 2년 전부터 건설하기 시작한 새로운수도 카라코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품고 있던 러시아와 서구 정복이라는 꿈을 이룰 준비에 나섰다. - P111

1227년에 칭기즈칸이 사망한 뒤, 그의 후계자 오고타이칸은 모든 군사작전 계획과 실행을 수부타이에게 일임한 듯하다. 이로써 수부타이는 칭기즈칸이살아 있을 때 이미 실질적인 몽골군의 참모총장이었다가 오고타이 대에 더욱 공식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따라서 카라키타이, 흐와리즘 샤와의 전쟁을 계획했던 사람은 바로 수부타이었다.
칭기즈칸은 몽골로 돌아가자마자 오랜 숙적인 나이만과 메르키트를 처단하기로 했다. 그들은 칭기즈칸과 10년 전에 충돌해 몽골 서쪽국경으로 밀려난 민족들이었다. 칭기즈칸은 1208년에 부족 간 전쟁에서 메르키트의 족장 톡토아베키를 죽였지만 그의 아들과 남아 있는 부족원들이 달아나서 발하슈 호카자흐스탄 동남부에 있는 호수 서북쪽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 개인적인 앙갚음이었다면 모를까 메르키트의 군사력이 몽골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칭기즈칸이 그들을 공격한 동기는 뚜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칭기즈칸이 메르키트를 무찌를 지휘관으로 수부타이를 임명한 것을 보면 동기야 어떻든 중요한의미를 지녔음에 틀림없다. 수부타이의 병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2만호(2만 명)로 추산된다.
몽골 국경을 지키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나이만과 변절한 족장 쿠츨루크서요의 왕(재위 1211~1218). 톈산 산맥 북방의 나이만 부족을 규합하고 흐와리즘의 무함마드와 동맹을 맺어 야율을 무찔러 사로잡으며 타림 분지의 서부를 정복했다와의 상황 때문이었다. 쿠츨루크는 부족 간 전쟁에서 패한 아버지가 칭기즈칸에 의해 사망한 뒤, 살아남은 부족원들과 함께 몽골에서 카라키타이로 도피했다. 카라키타이는 몽골 본토서남쪽에 위치했으며 오늘날 투르키스탄 동북쪽에 있는 중국령 투르키스탄------튀르크족의 땅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파미르고원을 경계로 서투르키스탄과 중국령의 동투르키스탄으로 갈라진다------일부 지역과 발하슈호 주변 지역을 포함했다. - P115

흐와리즘 왕국은 원래 고대 옥수스라 불리던 아무다리야 강과 약사르테스라 불리던 시르다리야강----중앙아시아의 톈산 산맥 서쪽에서 시작해 아람 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두 강은 약 1000킬로미터 떨어진 짜디짠 아랄 해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에 있는 대염호로 흘러들었다. 왕국의 북쪽 절반은 비옥한 유역의 토지로, 나머지 절반은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교역로가 교차하면서 몇몇 성곽도시와 요새를 연결하고 있었다. 왕국 최대의 도시이자 학자의 도시인 부하라와 수도 사마르칸트우즈베키스탄 동부, 아무다리야 강 유역에 있는 도시로 실크로드의 기지로 번영했으며 14~15세기에는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다는 이 무역로의 중앙에 위치한 전략 요충지였다. 무함마드 2세의 아버지인 알라웃딘은 셀주크 술탄에 의해 이 지역 성주로 임명되면서 봉토를 하사받았는데, 흐와리즘 샤가 된 아들 무함마드 2세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며 아버지의 소유지를 사방으로 확장했다. 그는 시르다리야 강 너머키르기스 초원에 이르는 곳까지 북쪽의 땅들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은사마르칸트 근처 트란스옥시아나를 정복했다.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해 원시 부족들을 정복했다. 무함마드 2세는 정복한 땅이 워낙 방대해 제2의 알렉산더 대왕 또는 지상에 나타난 알라의 그림자라 불리기도 했다. 샤의 군대는 아주 강력했으며 연대기 작가들은 군사수가 40만 명 정도였다고 주장한다. 왕국에는 인력이 풍부해 나라에 긴급 사태가 발생했을 때 수천 명의 군사를 마련할 수 있었다.
몽골이 흐와리즘을 공격하는 데는 샤의 군대 규모와 전투력 외에도 복잡한 요인들이 있었던 탓에 어려움이 따랐다. 일단 원정 거리가 어마어마했다. 칭기즈칸이 군대를 소집했던 이르티시 강-------카자흐스탄과 서시베리아를 북쪽으로 흐르다가 오비 강의 좌안에 유입하는 강---상류(위구르 영토)에서 시르다리야 강(호와리즘 북쪽 경계)까지의 거리는 거의 2000킬로미터에 달했다. - P121

그러나 대칸은 이런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았다. 1218년 여름, 그는 이르티시 강둑에 대군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몽골이 이슬람 국가와 벌인이 첫 번째 전쟁은 결국 말살전이 되어 샤 왕국 인구의 5분의 4가 죽거나 노예가 되었다. 어느 역사가는 "단 3년 동안의 충돌로 그렇게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경우는 아마 없을 것이다. (•••) 몽골에 의해 자행된 냉혹하고 계획적인 대량 학살은 (・・・) 고대 아시리아인과 현대 나치의 만행만큼이나 끔찍한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침략을 위해 모인 몽골군은 범민족적 협력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17세부터 60세 사이의 모든 몽골족에게 무기를 들게 했다. 몽골의 속국들도 분견대를 파견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서하를 제외한 모든 속국이 요구에 응했고 훗날 서하는 칭기즈칸으로부터 응징을 당한다. 이르티시 강에서 출발한 몽골군의 정확한 규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러시아인 동양학자 바르톨트1869~1930. 소련의 역사학자로 튀르크학 분야의 대학자인 바실리 라들로프의 뒤를 잇는 대학자가 어림잡아 계산한 20만 명 이상의 수치는 좀 많은 듯하다. 몽골군은 그때까지도 금나라에서 잃은 손실을 회복하던 중이었고 무칼리가 이끌고 간 상당수의 군사도 아직 금나라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전투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서하에 대해서는 몽골 안에 상당수의 서하 군사를 남겨두어 적대적 행위를 하지 못하게 했다. 참전한 몽골 군사가 단 15만 명뿐일 수도 있다는 프라브딘Michael Prawdin 1894~1923. 러시아계 독일 역사작가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듯하나 더하르토흐Leo De Hartog 네덜란드의 몽골 역사 전문가가 추산한 9만 명은 적어 보인다. 군사들 외에 말 40만 필 정도와 낙타 수천 마리, 소수백 마리, 전차 등도 평소보다 큰 화물차에 실려 험한 지형을 따라 거친 행군을 함께 했다.  - P123

1221년 봄, 몽골군은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아프가니스탄과 호라산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몽골군 종대가 발흐를 급습했다. 발흐는 전에 이미 수부타이에게 항복했었지만 이번에는 파멸을 피할 수 없었다.
주민들은 모두 학살되었고 도시는 불태워져버렸다. 그런 다음 칭기즈칸은 툴루이를 메르브로 보내 도시를 굴복시켰다. 이번에도 모든 주민이 도륙을 당했다. 툴루이는 메르브 평원에서 황금의자에 앉아 대량 학살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남자, 여자 아이들을 각각 ‘무리지어 여러 부대로 보낸 뒤 모두 참수시켰다. 그런 다음 툴루이는 니샤푸르를 공격했다. 칸의 사위인 토쿠차르가 지위를 박탈당한 뒤 일반 사병으로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 바로 니샤푸르 외곽이었다. 툴루이는 니샤푸르를 급습해 초토화시키는 것으로 보복했다. 토쿠차르의 미망인은 주민 학살을 주도했다. 확인사살을 위해 시신들의 목을 자르고, 남자, 여자, 아이들의 머리를 따로따로 쌓아두었다. 심지어 개와 고양이까지 죽였다. 다음으로 몽골군은 헤라트를 공격했는데, 이곳의 수비군은 저항을 했지만 시민들은 자비를 구하며 문을 개방했다. 그러자 툴루이는 시민들은 살려주고 흐와리즘 수비군만 모조리 살해했다.  - P141

수부타이는 이들 전투에서 활약하지 않고 카스피 해에 있는 야영지로 돌아갔다. 칸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카스피 해 너머에 ‘얼굴은 갸름하고 밝은 색 머리에 눈이 파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킵차크라는 땅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과 제베 그리고 2만의 군사가 카스피해로 원정하여 그 주위를 정찰한 다음, 몽골로 돌아올 때는 킵차크로 오게 할 것을 대칸에게 제안했다. 괜챦은 의견이라고 생각한 칭키즈칸은 출정을 허가하면서 수부타이에게 3년 안에 몽골로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1220년 늦가을, 수부타이와 몽골 기병대는 군사 역사강 가장 놀라운 기마 공격을 시작하게 된다. - P143

1220년 늦은 여름, 카스피 해안 평지에 막사를 친 수부타이는 서방에 대한 몽골의 첫 군사작전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수부타이의 군대는 2만5000명에서 3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위풍당당한 제베가 그중1만호를 지휘하기는 했지만 총지휘권은 수부타이에게 있었다. 그가 내놓은 아이디어로 카스피 해 인근에 배치된 대규모 기병대의 임무는 새로 정복한 흐와리즘의 서쪽 지역을 가능한 한 구석구석 꼼꼼하게 정찰하는 일이었다. 이 작전의 목적은 몽골군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낮선 군대의 군사적 역량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훗날 문헌에서도 드러나듯이 수부타이는 이미 몽골의 유럽 정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겨울에 적합한 야영지를 찾던 수부타이는 카스피 해안을 따라 북쪽을 답사했다. 그는 페르시아 서북쪽 고원을 넘고 아제르바이잔으로 진입해 튀르크인 총독이 통치하는 아제르바이잔의 수도이자 그 일대에서 가장 풍요로운 타브리즈---이란 서북부에 있는 도시-----로 곧장 향했다. - P146

수부타이는 군대를 다시 남쪽의 페르시아와 아제르바이잔으로 철수시켰다. 전투 승리로 끝났지만 전투를 벌인 것 자체는 완전한 실수있다. 몽골군의 목표는 캅카스 산맥을 넘어 러시아 초원에 도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조지아 전지역에 걸쳐 대격전을 벌여야 했다면 병사들은 유럽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산줄기인 캅카스를 넘어갈 형편이 못 되었을 것이다. 수부타이의 계획은 원래 진군 중에 쉬운 목표만 공격해서 말과 전리품을 비축한 뒤, 일단 러시아 초원에 다다르면 그 비축물로 동맹을 만들어 안전하게 다니는 것이었다. 몽골군은 티플리스처럼 요새화된 도시를 공격할 시간도, 인력도 없었다. 그래서 수부타이는 조지아 수도를 공격하지 않고 남쪽으로 후퇴한 뒤, 페르시아 마을들을 습격해 보급 물자와 말을 보충하고 그것으로 쿠라 평원 전투를 치렀다. 5다음으로 몽골군은 무슬림 포로들을 공격 대형 전방에 세우는 익숙한 전술을 활용해 마라케이란 서북부, 동아제르바이잔 주에 있는 도시를공격했다. 1221년 3월 30일 도시를 장악한 그들은 주민들을 학살하고 전리품을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그로부터 한 해 전에 수부타이는 하마단을 공격하지 않는 대가로 보상을 받아냈었다. 그런데 이번에 마을 유지들이 2차 상납을 거부하자 몽골군은 그에 대한 응징으로 하마단을 공격했다. 하지만 주민들이 전처럼 쉽게 물러서지 않고 직접 몸을 던져 몽골군에 저항함에 따라 끔찍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에 몽골군은 곧 저항을 제압한 뒤 주민 학살로 대응했다. 수부타이의 군대가 북쪽으로 다시 돌아갈 때쯤 아름다웠던 그 페르시아의 도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 P151

수부타이는 군사들을 쉬게 하고 보급 물자를 보충했다. 그의 병력은 이제 2만 명이 조금 못 되었지만 몽골군은 마침내 도시와 산을 벗어나 고향과도 같은 탁 트인 초원으로 왔다. 수부타이는 주요 임무인정찰을 계속하기로 하고 군대를 분할했다. 그는 아조프 해안을 답사하고, 쿠만이 몽골을 다시 공격하고자 그 지역에서 동맹을 결성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남쪽으로 이동했다. 제베는 나머지 군사들을 데리고 돈 강동부 유럽의 러시아를 흐르는 강을찾아 서쪽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수부타이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번 아조프 해 정찰에서 수부타이는 처음으로 서유럽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베네치아에서 온 상인들로 아조프 해안에 작은 교역소를 지어두고 있었다. 수부타이는 이 상인들이 서방의 정보를 전해줄 귀중한 원천임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막사로 초대해 후하게 대접했다.
몽골족의 군사 장비나 질 좋은 중국 비단속옷을 보고 그들을 야만족이 아니라고 판단한 베네치아인들은 몽골인들과 교류할 생각에 수부타이와 정보 무관들의 질문에 잘 대답해주었다. 수부타이의 군대는정보 수집 체계가 잘 갖춰진 편이었다.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막료 가운데는 이미 거쳐온 지역들의 지도를 세밀하게 그려낸 금나라 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포로나 정찰대를 통해 입수한 정보를 토대로 앞에놓인 땅의 지도를 그렸다. 심지어 베네치아인들이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헝가리와 폴란드, 실레지아---‐-----슐레지엔, 중부 유럽의 역사적인 지역,-------보헤미아의 지도를 그려내기도 했다.  - P158

이 무관들은 지역의 인구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거나 농작물의 종류와 산출량 등을 조사하고 심지어 기후에 관한 기록을 모아두기도 했다. 수부타이의 군대는 의사와 외교관을 비롯해 아르메니아인 주교를 포함한 통역단과 함께 답사를 다녔다. 실제로 몽골군 화물차를 탄 무슬림 상인들은 수완이 좋아 현지러시아인들에게 이미 성경책 사본을 싼값에 팔고 있었고 이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뇌리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어느덧 떠날 때가 된 베네치아인들은 몽골인들과 비밀 조약을 맺어 자신들이 방문하는 나라들의 경제력과 군사 동향 등을 자세하게 기록해 몽골군에 보내기로 했다.
그 보답으로 몽골군은 수부타이의 군사들이 가는 곳마다 다른 교역소가 있으면 모조리 파괴해 베네치아 상인들이 독점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1222년 가을과 겨울에 몽골 정찰대는 돈 강과드네프르강-----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흐르는 강------을 건너 크림 반도를 급습하고 드네스트르 강----우크라이나 남부를 흐르는 강------을 따라 정보를 수집하며 군사의 움직임을 보고했다.
자신의 형과 그의 아들이 몽골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쿠텐은 나머지 쿠만 병사들과 북쪽으로 이동해 러시아 공국인 키예프와 체르니고프에서 도피처를 찾아다녔다. 쿠텐은 힘을 합쳐 몽골군을 물리쳐야 한다며 러시아 대공 유럽에서 소국의 군주를 이르는 말들을 설득할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향한 그의호소는 거의 1년 동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러시아로서는 그들 자신이 수십 년간 쿠만족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국인 데다 이 도적들이 몽골인들에게서 뇌물을 받은 것도 불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골군이 드네스트르 강 기슭을 따라 행군하고 있으며 그곳의 농장과민가를 초토화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키예프에 전해지자, 몇몇 러시아 대공은 쿠만족의 호소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 P159

수부타이와 제베는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제배는 열병에 걸려 몽골의 수도로 돌아오지 못한 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부타이는 러시아와 유럽의 모든 형세를 꾸준히 파악하고자 첩자들과 비밀 전령사들을 다수 남겨두었다. 이들을 통해 얻는 정보는 몽골 정보부에 전달되었고 정보부는 유럽 여러 나라의 정치적, 종교적 대립관계 등을 문서로 기록해두기 시작했다. 수부타이의 러시아정찰은 3년여 동안 거의 1만 킬로미터를 이동한 역사상 가장 긴 기병원정이 되었다. 이 원정에서 수부타이와 제베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만나 전투를 벌이고 10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중요한 것은 정찰에서 얻은 정보를 통해 초원으로 이뤄진 광대한 회랑지대가 몽골에서 헝가리까지 뻗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점과 그 회랑지대를 따라 몽골군이 세계 어느 군대보다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위대한 수부타이 기병대의 임무는 원래 정찰이었기에 정복을 시도하기에는 병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몽골군은다음 정복지를 서방으로 정하고 전 병력을 투입하기로 했다.
1227년, 칭기즈칸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1229년에 카라코룸에서 열린 쿠릴타이 회의에서 오고타이가 후계자로 최종 승인되었다.
1234년에는 페르시아에서 몽골의 지배력이 강화되었고 중국 북부에 위치한 금나라가 공식적으로 병합되었다. 같은 해에 열린 쿠릴타이 회의에서는 4개 군사작전을 동시에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몽골은 한창 중국 남부의 송나라를 정벌하는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전쟁으로 어림잡아 수천만 명의 중국인이 희생당하는 실로 끔찍한 결과가 발생했다.  - P167

몽골이 침략을 앞둔(1236) 러시아는 거대한 숲과 습지 그리고 평원으로 이루어진 나라로 동쪽 외곽에 쿠만, 불가르, 하자르 등 반야만이교도 부족들이 다수 살고 있었다. 러시아는 여러 개의 작고 약한 공국들로 나뉘어 있어 그 특성상 국가적인 위력이 없었다. 봉건주의가지배적이었던 까닭에 서양이라고는 하나 딱히 더 많이 계몽된 사회는 아니었다. 나라 안팎은 봉건 영주들 간의 전쟁과 외세의 침략으로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1054년에서 1224년까지 러시아는 공국 간의 내전을 83차례나 겪었고 동서양으로부터는 무려 46차례 넘게 침략을 받았다.
몽골의 러시아 정복 전략의 핵심은 각 공국을 빠르게 공격해 고립시킴으로써 군사작전을 저지할 만한 연합 군대를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 P170

키예프는 1240년 12월 6일 치열한 백병전끝에 함락되고 말았다. 도시는 불태워지고 많은 사람이 학살되었다.
파멸의 정도가 어찌나 심했던지 6년 뒤에 그 폐허를 지나던 어떤 여행객은 몇백 채 남지 않은 막사들이 아직도 셀 수 없이 많은 해골과 뼈들‘로 가득하다고 묘사했다. 
키예프를 함락시킨 뒤 몽골군은 이름 뿐인 적들을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 P176

헝가리와의 전쟁
이 시기에 서유럽은 몽골의 위협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정도였다.
러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족 중 수가 가장 많은 쿠만족은 몽골군의 진군에 앞서 헝가리로 달아났다. 그들은 헝가리 왕 벨라 4세에게 복종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대가로 몽골군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달라는 제안을 했다. 이교도 20만 명이 기독교로 개종하면 로마 가톨릭교에 득이 되고 쿠만 기병대 수천 명을 자신의 군대에 보태면 군사력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벨라 4세는 제안을 수락했다. 쿠만족이 몽골의 군사력과 대학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서유럽은 몽골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수부타이의 군대는 키예프에서 강을 건넌 뒤 쉬고 있었다. 본대에서는 3만 명을 파견해 정복한 지역을 관리하고 몽골군 연락망을 보호하게 했다. 1240년 12월 수부타이는 다음 단계의 유럽 작전을 개시했다.
서유럽은 쿠만족에게 그만큼 경고를 듣고도 몽골의 위협을 막아낼 합동 군사작전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 P177

주목표는 헝가리였다. 그러나 카르파티아 산맥을 지나 푸른 초원으로 이동하던 몽골군 대열은 폴란드 평원에 주둔 중이던 군대를 만나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다. 폴란드와 독일인으로 구성된 유럽 군대는온전한 상태였기에 몽골군 우측 측면에 큰 위협이 되었다. 수부타이는 북방 세력의 기습으로 헝가리 정벌 작전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오고타이칸의 손자인 카이두가 지휘하는 군대에 군사 3만 명을 파견했다.
이들의 임무는 헝가리 공격에 방해가 되는 폴란드와 보헤미아, 실레지아 지역의 유럽 군대를 물리치는 것이었다. 1241년 3월 카이두의 군대가 다른 대열들보다 조금 앞서서 폴란드 국경으로 진군했다.
카이두의 군대는 산도미에시----폴란드 타르노브제크 주 중부의 도시-----에 진지를 치고 있던 크라쿠프 공국의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5세(프스티들리비)의 군사들을 직접 타격했다. 볼레스와프 5세는 몽골군 대열이 접근하자 가족과 재산을 챙겨 모라비아로 물러났다. 군 지휘권은 크라쿠프의 팔라틴 백작-------독일이나 영국에서 자기 영토 내에서 왕권의 일부 행사가 허가된영주-------인 블라디미르에게 맡겼다. 한편 여러 가신과 대공이 각자의 분견대와 함께 달아나는 바람에 남아 있는 군사들도 차츰 사라져갔다. 경비대만 데리고 있던 블라디미르는 크라쿠프에서 약 50킬로미터 전방에 위치한 츠미엘니크에서 몽골군과 맞서다가 무너지고 말았다. 몽골군은 종려주일-------기독교에서 부활절 직전의 일요일-------인 3월 24일에 크라쿠프에입성했는데, 주민들이 이미 숲속으로 피신한 뒤라 도시는 텅 비어 있었다. 몽골군은 곧 도시에 불을 질렀다. - P180

몽골군은 라치부시 부근에서 오데르--‐--폴란드 남부, 실롱스키에 주 서남부에있는 공업도시----강을 건넜고 카이두는 군사들을 두 종대로 나누었다. 두만호가 브로츠와프를 향하는 동안 나머지 만호는 폴란드를 돌파한 뒤에 리투아니아, 동프로이센을 지나고 포메라니아의 발트 해안을 따라서쪽으로 원을 그리듯 이동했다. 이 몽골 별동대는 행군 중에 뭐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우며 약탈을 일삼았다. 서유럽으로 가던 피난민들은 몽골군 군사들이 20만 명이 넘는다는 등 무시무시한 이야기를퍼뜨렸다. 그 사이 브로츠와프에 도착한 카이두의 군대는 돌로 된 성벽을 뚫기가 어려워지자, 브로츠와프는 지나치고 실레지아를 덮쳤다.
한편 몽골군의 침략에 맞선 정찰부대가 처음으로 조직적인 저항의 신호를 포착하면서 카이두는 그 적군을 찾아 괴멸시킬 준비를 했다. - P181

그런데 유럽군에 대참사를 안겨준 레그니차 전투는이미 카르파티아 산맥을 지나 눈 속에서 하루에 65킬로미터를 이동하며 헝가리로 행군하는 몽골군 본대의 측면을 적이 선제공격하도록 교묘히 유도한 수부타이의 계획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임무를 완수한 카이두는 발트 해안으로 보냈던 종대를 소환해 남쪽의 수부타이군대와 합류한 뒤, 셔요 강변에 포진한 헝가리군을 격파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몽골군을 거의 1000년 만에 세계에 등장한 가장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전술을 펼친 군대로 꼽는다면 그들이 유럽에서 맞붙은 러시아, 폴란드, 독일, 헝가리 군대들은 사실상 ‘악마의 기수들‘의 적수가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몽골의 적인 서양은 모두 봉건사회였으며,
봉건 영주와 봉신들이 군주에게 군사를 제공하고 땅을 하사받는 봉건체제 안에서 군대는 전쟁이 집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또 오래 지속되지 않는 한 원활하게 운영되었다. - P186

1240년에 몽골군을 만난 폴란드군은 거의 다 창기병으로 이루어진 군대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러시아에서는 자유의 수가 변함없이 매우 많았던 데 반해 폴란드에서는 자유농이 거의 농도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폴란드에서는 토지 소유권이 다소 세분화되어 있어서 토지귀족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그리고 토지를 약간만 소유해도 농민은 무기를 들 수 있었다. 폴란드인들은 이웃인 러시아인이나 마자르인-------몽골족에 속하는 헝가리의 기간 주민--------들과 달리 창을 다루는 민족이었다. 부유한 귀족들은 쇠사슬 갑옷을 모두 갖춰 입고 준마를 탄 반면, 가난한 지주들은 가죽 외투를 입고 좀더 작은 말을 타고 싸웠다. 궁기병과 보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뚜렷하게 구별이 되는 군사는 중기병과 경기병이 유일했다.
두 나라의 군사적 특징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러시아나 폴란드 모두 돌벽을 쌓아 요새도시를 건설하지 않았으며 서양 군대의 축성 기술이 두 나라에 뿌리를 두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고위 귀족들은 목책을 친 목조 저택에서 살았으며, 사장 중요한 도시인 키예프 등 예외적인 몇 곳을 빼면 두 나라 모두 나무로 지은 요새 말고는 든든한 요새를 둔 도시가 하나도 없었다. - P191

 가장 중요한 도시인 키예프 등 예외적인 몇 곳을 빼면 두 나라 모두 나무로 지은 요새 말고는 튼튼한요새를 둔 도시가 하나도 없었다. 몽골의 공성 전문가들과 포병들은이 종잇장 같은 방책을 금방 무너뜨렸다. 한편 폴란드와 러시아에서는도시를 방어하지 않는 관습이 있었다. 오히려 침략당한 사람들은 도시를 버리고 침략자들이 사라질 때까지 깊은 숲속에 숨는 것이 보통이었다.
독일군과 오데르 강체코와 폴란드에서는 오드라 강이라 하며 유럽 중부를 흐른다 너머에 있는 도시들의 군대는 몽골군에게 훨씬 더 어려운 상대였다. 아마 중세 유럽 어디에도 독일만큼 군사기술이 견고하고 노련하게발전한 나라는 없었을 것이다. 독일 기사들은 갑옷도 더 많이 착용했고 훨씬 더 큰 말을 탔으며 전투 훈련도 더 많이 받았다. 금욕하며 검으로 기독교의 확장에 헌신한 전사이자 수도사인 튜턴 기사단을 탄생시킨 나라도 결국 독일이었다. 이들은 강인하고 규율에 바르며 잘 훈련되고 동기가 뚜렷한 전문적인 전사들이었다. 군대도 훌륭했지만 독일 도시들 또한 평소에 돌벽이나 해자, 탑 등을 쌓아 도시를 요새화했다. 지역 경찰군은 우수한 편이었으며 시민들은 영주나 성직자와의 신뢰가 두터워 사기가 높고 전투력이 좋았다. 몽골군에게도 독일 땅에서독일 군대와 전쟁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중부 유럽에서 전쟁을 벌이던 몽골군은 그 지역에서 이인자라고도할 수 있는 헝가리군을 만나게 된다. 헝가리군은 호전적인 민족이었다. 그들은 약 200년 전 다뉴브(도나우) 강 유역에 정착하기 전까지 초원에 살던 기마궁수들이었다. 그들은 몽골군이 주로 펼치는 기동전의 전술을 잘 활용하고 그것에 익숙했다. 헝가리 귀족사회는 봉건사회 질서가 반영된 서유럽의 전쟁 방식과 병기를 받아들였다. - P192

헝가리군이 전멸하면서 몽골군은 드네프르강에서 오데르 강 그리고 발트해에서 다뉴브 강에 걸친 동유럽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들은 4개월 이내에 총합이 아군의 5배나 되는 기독교 군대들을 제압해냈다. 수부타이는 헝가리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고 수많은 마을을 파괴하며 나라 구석구석을 약탈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헝가리가전체 인구의 50퍼센트를 잃었다는 추산도 있다! 수부타이 대열은 다뉴브 강이 얼어붙자마자 강을 건너 서쪽으로 향했다. 선봉은 줄리언 알프스------슬로베니아 서북부와 이탈리아 동북부에 위치하는 알프스 동부의 산맥--------를넘어 이탈리아 북부로 진입하고 정찰부대는 다뉴브 강 유역을 지나 빈의 성벽으로 접근했다. 유럽 군주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저 무력하게 야만인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몽골군이 빈을 정찰하고 있을 때 카라코룸에서 화살전령이 와서 오고타이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몽골 법에 의하면 모든 왕실자손은 수도로 돌아와 차기 칸을 뽑는 선거를 치러야 했다. 수부타이는 정복전쟁에 나가 있던 세 명의 왕자에게 왕족의 의무를 지키게 했다. 몽골군 대열은 진군을 멈추고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카라코룸으로 다시 긴 행군을 시작했다. - P199

그들은 달마티아와 세르비아, 불가리아북부를 지나며 이동했다. 그들은 지나쳐가는 이 땅들을 모두 파괴하고 다뉴브 강 하류 너머로 사라진 뒤 다시는 유럽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몽골은 바투를 지도자로 하여 러시아 땅에 자신들의 국가인 킵차한국을 세우고 거의 3세기 동안 몽골의 굴레를 씌웠다. 절대 권력을전적으로 활용하는 차르의 정치적 지배 수단도 서양보다는 몽골의 방식에 훨씬 더 가까웠다. - P200

 다뉴브 강은 몽골 초원에서 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이라 수부타이가 그렇게 먼 곳에서 은퇴생활을 하기로 한 것이 이상해 보일 수도있다. 당시 바투의 지배 범위는 킵차크한국과 러시아, 다뉴브 강 유역등이었는데, 수부타이가 바투의 부하였던 자신의 아들 우랑카타이와 가까이 있기 위해 다뉴브 강 기슭으로 온 것일 수도 있다. 바실 리들하트 경은 이슬람 연대기 작가들의 글을 인용하여 수부타이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32개 민족을 정복했고 65차례의 대격전에서 승리했다"고 언급했다. 그야말로 선대의 위대한 장군들 중 어느 누구도 능가할 수 없었던 업적이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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